흡툭죽 재록본 사 초 이야기

[ㅎㅌㅈ/드라로나] 믿음과 도약

초여름의 이야기

페트병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떨어진다. 기울여진 땅 위에서 로널드는 기를 쓰고 중심을 잡았다. 가방은 떨어지지 않도록 몸에 묶다시피 맸다. 거친 바람이 얼른 꺼지라고 압박했다. 여름밤치고 싸늘한 한기 또한 그의 망설임을 야유했다. 분명 가방 안의 녀석도 그렇게 다그치고 싶겠지. 손을 더듬거려 다시 한번 가방을 확인했다. 필요한 건 다 챙겼다. 이제 해야 할 건….

벌써부터 숨쉬기 힘들다. 목구멍에서 졸린 소리가 나온다. 로널드가 눈을 꽉 감았다. 계속 뜨고 있다간 눈이 바싹 마르거나 날아가거나 할 거 같다. 어차피 저 아래는 어둠만 가득하니 이 편이 낫다. 침몰하는 배는 탈출하면 바다라도 있지, 여긴 오 분 남짓의 허공만 있다. 물론 그 뒤에 바다를 조우할 수 있겠지만.

아, 이젠 다 모르겠다. 귓가의 바람 소리를 쫓아낼 만큼 내지르며, 로널드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렸다.

 

⁓⁓⁓

 

지난 이 주 내내 드라루크의 기분은 추락 그 자체였다. 아, 아니다. 내내는 아니었다. 분명 초반에는 평소처럼 통통 튀어 다니던 드라드라였다. 그러다가 쇠똥구리의 응가처럼 구리구리함이 커졌지. 이다지도 낙천적인 그를 망치는 건 대개 같이 사는 고릴라다. 아주 당연하게도, 이번에도 그의 잘못이다.

아직 그가 아기 천사처럼 활기찼던 월초의 날, 길드에 간 드라루크는 마스터의 중요 공지 하나를 들었다. 흡혈귀 대책과와 흡혈귀 사냥꾼의 협업. 이 주 뒤 일어날 흡혈귀 주도 밀거래를 급습한다는 내용이었다. 남은 기간 동안 단단히 준비해야 합니다. 마스터의 목소리에는 진중함이 깔려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냥꾼의 눈에도 그만큼의 결연함이 비쳤다. 무거운 공기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웠던 드라루크는 그저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이거 참, 첩보물 영화 같군. 키득거리며 우유를 홀짝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평소보다 더 재밌는 일이 일어나겠구나― 정도의 감상이었다.

하지만 그 재미난 일은 예상보다 지루했다.

공지가 내려진 다음날부터 로널드는 매일같이 회의에 참석했다. 대부분 대책과 본부에서 진행했으나 이후 사냥꾼끼리의 의논이 있으면 길드로 이동했다. 사무소의 의뢰도 대폭 줄였다.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도 상당히 늘었다. 회의 따위에는 관심 없는 드라루크였기에, 한동안은 집에 들어오는 로널드의 죽을상만 봐야 했다.

한 주가 지났을 무렵, 평소처럼 지친 로널드가 돌아오자마자 누군가 사무소의 문을 두드렸다. 샷이었다. 샷은 로널드에게 두고 간 물건을 건네주었다. 사과와 인사말이 짧게 오가고, 도로 들어온 로널드가 물건을 탁자에 툭 올렸다. 드라루크는 자연스레 그것에 시선을 돌렸다. 자신도 아는 물건이다.

“VRC제 위치추적기 아닌가?”

“맞아.”

드라루크의 말에 로널드가 흘끔 돌아봤다.

“밀거래 장소가 지형지물이 복잡한 곳이라 개개인의 시야로는 한계가 있을지 모른대. 시간대가 밤이기도 하고. 그래서 중앙에서 실시간으로 우리 위치를 파악해두고 필요할 때 지시를 내린다더라.”

“꼭 전쟁 게임 같군!”

드라루크가 위치추적기를 덥석 잡았다. 정해진 맵에 아군을 원격으로 배치하고 적을 공격한다. 전쟁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원래 현실을 본떠 게임을 만드는 거지만 아무튼 뭐 어떤가. 본인의 전문 분야가 등장했다는 생각에 드라루크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이봐, 애송이. 어떤가. 게임의 지배자 드라루크 님이 이 작전에 큰 도움이 될―”

“아니. 넌 오면 안 돼.”

여지껏 없던 빠른 속도로 드라루크의 말을 잘랐다. 로널드는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드라루크를 응시했다. 그날, 길드에서 보인 눈동자로 로널드가 확실히 말했다.

“이번에 너는 오면 안 돼. 이번 건 진짜 장난이 아냐.”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로널드가 화장실로 곧장 들어갔다. 남겨진 드라루크가 위치추적기를 내려놓았다. 쓸데없이 심각하기는. 드라루크가 쯧 혀를 찼다. 속이 이상하다. 로널드가 보낸 눈빛이 그대로 속에 들어와 얹힌 기분이다. 이 껄끄러움을 없애려 된장국에 셀러리를 듬뿍 얹었다.

찝찝함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지기만 했다. 로널드가 회의에 다녀오겠다며 밖으로 나갈 때, 히나이치와 나지막이 작전 이야기를 소곤거릴 때, 몸이 둔해지면 안 된다며 반찬을 줄여달라 청할 때, 쓰지도 않던 자동권총을 꺼내 손질할 때, 그럴 때마다 울렁거림은 파도쳤으며 단순한 불편함이었던 감각에는 점점 짜증이 섞였다.

그래, 드라루크는 자신을 대차게 무시한 그에게 단단히 화가 났다. 저 멍청한 인간에게 흡혈귀의 진노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미 셀러리로 해결 안 될 문제인 건 판명 났다. 예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을 때처럼 아무 의뢰나 받을까 싶었지만, 요 며칠 전화기는 아주 조용했다. 신요코하마에 드문 평화가 내려앉은 동안 드라루크는 온갖 잔인한 복수를 골몰해내려 애썼다. 아이큐 이 만의 그에게 찾아온 드문 시련이었다. 너무 머리를 썼던 걸까, 드라루크는 오늘이 급습의 날이라며 떠나는 로널드의 뒤를 충동적으로 밟았다.

밀거래의 무대는 신요코하마의 항구. 뻔하면서도 안성맞춤인 분위기. 그곳에서 드라루크는 은밀히 숨어 자신이 등장할 순간을 기다렸다. 저 가엾은 사냥꾼이 적의 공격에 휘청일 때, 대책과가 이렇다 할 계책을 강구하지 못할 때, 그 순간 진조, 무적의 흡혈귀인 드라루크가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면 그것만큼 짜릿한 장면은 없겠지.

허구한 날 세금 타령에 시달리는 공무원과 이 일로 먹고 사는 자영업자의 조합 앞에서 모래 아저씨가 바라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행복 회로로 무시했다.

예견된 대로 꿈은 몇 분 만에 박살 났다. 고성이 오가고 섬광이 번쩍이는 살벌한 현장은 지켜보는 것만으로 기가 빨렸다. 반쯤 넋을 놓은 드라루크가 그냥 들키기 전에 돌아갈까 가늠할 때, 다급한 외침 하나가 귀에 꽂혔다. 저기 잡아!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자 흡혈귀 한 명이 포박에서 벗어나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바로 드라루크를 향해서.

으아아악! 설마 완벽한 이 은둔술을 들켰나? 허둥대는 사이 흡혈귀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드라루크는 압박감에 죽어버렸고, 흡혈귀는 그대로 그를 지나쳐 모퉁이로 사라졌다. 이어 뭔가 천둥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경비행기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서서히 항구를 떠나려 했다.

빨간 덩어리가 드라루크의 시야를 스쳤다. 덩어리는 비행기를 향해 뛰어가고 있다. 여기서 아주 괴상한 일이 하나 발생했는데(드라루크는 영원히 그 기이한 현상을 설명하지 못했다), 드라루크의 눈이 빨간 색을 인지하자마자 그의 다리가 놀라운 속도로 그 뒤를 득달같이 좇은 것이다. 그것의 그림자라도 되고 싶은 것처럼.

황소처럼 앞뒤 안 재고 붉은 색에 돌진한 결과, 닫히기 직전의 경비행기 문에 빨려가듯 들어갈 수 있었다. 실내에 발을 딛자마자 조종석의 흡혈귀가 속도를 높여서 곧바로 벽에 처박힌 모래가 되긴 했지만. 먼저 온 손님인 로널드 또한 벽에 부딪히면서 소음을 만들었다. 이에 흡혈귀가 침입자를 눈치채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황한 흡혈귀가 비행기를 뱅글 돌렸다. 신들린 곡예비행에 인간과 흡혈귀는 잠시간 마라카스의 내용물처럼 되었다. 그러나 이 인간이 누구인가, 아낌없는 나무처럼 제 몸을 굴리는 로널드는 빈틈이 생기자 곧장 조종석으로 몸을 날렸다. 조종석의 흡혈귀가 바닥으로 튕겨 나갔고, 로널드는 얼른 총구를 겨눴다.

“이제 포기해.”

흡혈귀의 낯에 패배감이 스쳤다. 머뭇거리며 두 손을 허공으로 올리는 모습에 곧 사건이 마무리 되는가 싶었다. 그러나 조종사를 잃은 비행기가 다시 곡예비행의 조짐을 보였고, 발밑이 계속 불안하자 반쯤 죽어 나가던 드라루크가 재촉했다. 동포는 얼른 포기하고 고릴라는 얼른 저 자를 다시 앉히게! 넌 좀 조용히 해! 집중력 다 흩어지잖아! 로널드는 용케 자세를 유지하며 윽박질렀다.

그러나 방금의 대화에서 영감을 얻은 걸까. 흡혈귀는 중심을 못 잡는 척 몸을 기우뚱거리더니, 문이 바로 뒤에 있는 걸 확인하고는 염동력으로 순식간에 열었다. 급작스러운 바람에 로널드의 팔이 휘청였다. 그 정도 빈틈은 박쥐 떼가 유유자적이 날아가기에 충분했다. 날갯짓 한 번마다 비웃음이 들리는 듯 했다.

“―망할!”

분에 못 이겨 벽을 주먹으로 쳤다. 그러나 넉넉히 화를 낼 시간도 없다. 조종사가 사라진 비행기의 최후는 너무도 뻔하니. 아닌 게 아니라 비행기는 흡혈귀가 도망친 직후부터 요동치고 있었다. 아아아아― 일단 다시 문 닫고, 그리고, 어, 뭔가, 뭐라도 눌러봐야!

빈 좌석에 급히 앉아 아무거나 눌러봐도 소용없었다. 로널드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번득였는지 드라루크에게 종용했다.

“게임 잘 하잖아! 비행 게임이라고 생각해봐!”

결과는 조종간을 잡자마자 팔부터 모래가 되더니 죽음. 게임기보다 훨씬 무거운 조작감이 문제였다. 이 약골, 전쟁 게임 운운할 때부터 알아봤다! 이제 와서 그런 얘기는 왜 하는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싸울 여유는 남아있는 모양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꽥꽥거리다가 느닷없이 터진 펑 소리에 꽤에엑 비명을 질렀다.

“이번엔 또 뭐야?”

로널드가 급히 창문을 확인했다. 바깥을 본 드라루크가 탄식했다.

“맙소사, 아무래도 이 비행기는 조금 전 흡혈귀의 염동력으로 일부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나 보이. 저쪽 외피가 떨어져 나갔어.”

“가지가지다, 진짜…!”

날아다니는 시한폭탄. 육지는 안 보인 지 오래다. 당장 여길 나간들 죽는 방법이 달라질 뿐이다. 로널드는 실내를 둘러봤다. 온갖 쓰레기가 굴러다녔다. 그중에서 유일하게 쓸모 있어 보이는 가방 하나를 집어 내용물을 뒤졌다. 볼펜, 보온병, 보자기, 복어 모형 열쇠고리, 보드라운 재질의 수저 보관함. 부아가 치미는 조합이다. 낙하산은 전혀 없었다.

로널드가 조종석에 도로 앉았다. 조종간을 잡아 이리저리 미친 듯이 돌리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미친 듯이 돌아가는 비행기에 드라루크의 혼이 쏙 빠졌다.

“드디어 돌아버렸나, 정서불안 다섯 살! 당장 손 떼고 얌전히 굴어!”

“뭐라는 거야. 이제 별수 없으니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든 육지로 돌아가 봐야지!”

“지금 천장이 바닥이 됐는데 퍽이나 가겠다!”

“수장되기 싫으면 입 좀 다물어! 바다에 빠지면 너라도 못 살아난다고! 흡혈귀 죽는 법 다 까먹기라도 했냐!”

“뭐?”

모래 파도가 되어가던 드라루크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지, 흡혈귀! 아까 동포도 흡혈귀라서 여길 빠져나갈 수 있었지. 나는 못하지만, 다른 흡혈귀라면 가능하다! 드라루크는 이 난리 통에도 놓치지 않은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얼른 연락처를 찾아 눌렀다.

“우리 아들―”

“아버지전지금신요코하마해안상공에서로널드군과함께추락하고있습니다바다에처박히기까지십분이나남았을까싶네요저희좀구하러와주세요.”

됐다, 그가 해냈다! 바닥 상태만 좋았다면 기쁨의 스텝을 밟았을 거다. 드라루크가 호기롭게 로널드를 불렀다.

“어이, 고릴라! 얼른 뛰어내릴 준비 해!”

“뭐야?”

로널드가 돌아봤다. 드라루크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손에 쥔 휴대폰을 흔들었다.

“조금 있으면 우리 아버지가 음속보다도 빠르게 도착할 걸세. 비행기에 머무르는 건 오히려 방해될 거야. 자, 얼른 뛰어내리자고, 고릴몬스터!”

“너희 아버지가 온다고?”

“그래!”

“…허공에서 낚아챈단 말이지….”

구태여 말이 많았다. 로널드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일부러 그러는 걸까? 순간 드라루크는 로널드의 눈에서 망설임의 빛을 읽었다. 불안의 눈, 불신의 눈, 분명 드라루크의 말을 온전히 믿지 않는 눈. 네 계획이 최선일까?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이 귓가에 들렸다. 그리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드라루크가 로널드에게 다가갔다. 진동하는 바닥에서 완벽하게 균형을 유지했다. 지척까지 다가간 그는 느리게 팔을 들어,

폰으로 로널드의 머리통을 냅다 찍었다. 모서리로.

“어지간히 날 좀 믿어, 이 빡대가리 애송아!”

원기옥을 끌어올라 내지른 공격이었기에 제법 아프긴 할 거다. 로널드는 두개골을 부여잡았고, 진작에 죽어버린 드라루크는 모래 상태에서 계속 말을 이었다.

“왜 자꾸 날 안 믿는 거야. 난 오면 안 된다느니, 장난이 아니라느니. 나만 쏙 빼놓고 자기끼리 쑥덕거리고, 자연스럽게 날 제외하고. 나는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기만 하라는 건가? 변태의 시답잖은 장난에만 합류하라는 건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난 진조, 무적의 흡혈귀야. 고릴라 따위가 걱정하고 다닐 조무래기도 아니며, 로널드 전기의 일등 공신일세. 나와 합을 맞추는 이야기를 쓸 거면 실제로도 좀 그래봐! 믿고 따라와 주라고!”

날 의지해! 드라루크는 거기까지 말하고 머리가 터져 죽었다.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 모래 산이 푸슬푸슬 떨렸다. 로널드는 머리를 잡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 입을 벙긋거렸다. 드라루크의 낯선 모습에 적잖이 당황스러운 듯했다. 하긴 그가 이만큼 진지하게 화낸 적 있던가. 공기가 잠시 싸해졌다. 질러놓고 보니 어색해 죽을 거 같았다. 다행히도 멋쩍은 침묵을 근처의 기계 소리가 깨뜨려줬다.

띠리릭. 드라루크의 휴대폰이 밝게 빛났다. 화면은 이제 막 통화가 끝났음을 알려줬다.

…그러고 보니 전화 안 끊었구나….

다 듣고 있었겠네… 모조리….

드라루크가 다시금 죽었다. 오늘 일진이 너무 사납다. 모든 기력을 소진한 드라루크는 먼지만 풀풀 날리며 재생을 포기했다. 그러자 마침내 로널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문을 한 번 살핀 뒤 바닥의 잡동사니를 다시 뒤지고, 가방을 어깨에 맸다. 그리고는 드라루크에게 다가갔다.

“나 너 믿어.”

로널드가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믿으니까, 네 계획대로 가자.”

정말 기다리다 목 빠질 뻔한 소리였다. 금세 기운을 차린 드라루크가 얼굴을 재생했다. 좋아, 날 따르라고. 멋진 미소를 지어 보이자 로널드도 피식 웃었다. 로널드는 손을 뻗어 드라루크의―

“자, 그럼 얼른 낙하 준비를 해보실까!”

―얼굴을 냅다 쥐었다. 아주 거칠게.

자비없는 움직임으로 모래를 쥔 로널드는 남는 손으로 보온병의 뚜껑을 열었다. 모래가 잡히는 대로 전부 보온병에 쓸어 담았다. 당연히 드라루크가 질색팔색했다.

“그대, 이 짓은 또 뭔가!”

“그럼 네가 저 바깥에 그대로 뛰쳐나갈 셈이었냐? 부채질 바람에도 죽는 놈이.”

“아아아악 보온병에 된장국 담아 놓고 안 씻었어어어어.”

“안심해. 로널드 특급 배송이 나가신다.”

로널드는 보온병의 뚜껑을 단단히 돌려 잠갔다. 그대로 배낭에 집어 넣었는지 흔들림이 더 심해졌다. 배낭 안 잡동사니가 서로 부딪히면서 끔찍한 타악기 합주를 만들었다. 끈적한 된장국, 완전히 밀폐된 공간, 시끄럽게 울려대는 딱딱딱 소리. 거대한 혼돈 너머로 어렴풋이 문을 여는 기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중력이 사라졌다.

⁓⁓⁓

 

어둠만 가득한 세상, 어딘가에서 인영 하나가 나타나 일직선으로 낙하하고 있다. 어쩌면 이 심연에서 유일하게 반짝이는 수면에 현혹된 것일지도 모른다. 욕심 많은 그에게는 다행히도 물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순조롭게 목적지에 다다르고 있다. 기쁨에 찬 비명이 허공을 채우고도 남았다. 그러나 약간의 문제가 있다. 이 빛의 그물은 제자리에 있는 대신 이따금 몸을 흔들며 어둠을 보였다가 돌아오길 반복했다. 흐름을 잘 맞춰야 할 거다. 어쩌면 인영이 도착하는 순간에 때가 맞지 않으면 어둠이 그를 반길 것이다. 운명의 시간이 다가온다. 그가 수면에 닿았을 때 그를 맞이할 존재는―

선과 선의 만남. 수직에서 만난 인영은 곧바로 포물선을 그리며 위로 솟구쳤다. 포물선의 여파로 수면이 파여 물방울이 튀어 올랐다. 물방울은 하나같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

 

항구에 이르자 드라우스는 로널드를 약간 높은 곳에서 휙 던졌다.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로만. 드라우스는 무섭게 로널드를 노려보며 다그쳤다.

“빌어먹을 폴, 우리 아들은 무사하겠지!”

가방을 빼앗아 급히 내부를 확인했다. 비척비척 일어난 로널드가 보온병을 잡아 뚜껑을 돌렸다. 당장 모래 탄이 발사되어 바닥으로 쏟아졌다.

“우으으으, 망할 고릴라… 온몸에 된장 냄새가 베였잖는가! 우엑, 걸어 다니는 장아찌가 됐어어.”

“무사했으면 됐지.”

“드라루크으으으으!”

드라우스는 아들의 주위를 뱅뱅 돌며 혹시 모를 상처를 확인했다. 냄새나고 약간 촉촉해진 것 빼고는 말짱한 드라루크가 손을 내저어 보였다. 아, 감사합니다. 아버지. 덕분에 살았네요. 감동의 부자 상봉에 벅차오른 드라우스가 아들을 꼭 끌어안으려던 차, 항구 저편에서 누가 시끄럽게 외쳤다.

“로널드!”

“네 녀석, 무사한 거냐!”

“다들, 상황은 정리된 거야?”

단정한 제복과 요란한 코스튬을 입은 무리가 그들에게 달려왔다. 항구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어떤 이는 그들에게 작전이 무사히 성공했다고 알려줬고, 어떤 이는 무모한 로널드를 질책했으며, 누군가는 두 흡혈귀의 등장에 어리둥절해했다. 그러다가 이 무사 귀환의 전말을 알아차리고 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흰 머리의 대책과가 말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경외의 시선에 드라우스는 잠시 움찔했다가, 금세 우쭐해져 턱을 치켜들었다. 그건 아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네 덕에 살았다, 모래.”

“역시 바보 고릴라에게는 이 천재 드라드라 님이 필요한 법이지!”

고맙긴 한 모양인지 로널드는 별 말 없이 드라루크의 욕을 넘어갔다. 그러다 퍼뜩 뭔가를 생각해내고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추격하던 흡혈귀는 도주했―”

“헬로, 에브리원.”

항구 바닥에 큼지막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일제히 위를 올려다보자 거대한 날개의 흡혈귀가 하강하고 있었다. 흡혈귀는 또 다른 흡혈귀와 함께였다.

“드라우스가 급히 나가길래 따라가다가 마주쳤어. 혹시 친구인가?”

“할아버지. 이 자는….”

수많은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흡혈귀에게 고정됐다.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몰라도 몸을 사시나무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다. 로널드. 응? 저 흡혈귀지. 응. 저 흡혈귀네. 진조에게 붙들렸던 가련한 흡혈귀는 수갑을 쌍수 들고 환영했다. 온순한 양처럼 대책과의 안내에 따라 경찰차로 들어갔다.

이걸로 사건 완벽 해결이다. 드라루크는 멋들어지게 망토를 펄럭였다. 훌륭한 활약이었다. 애송이는 사고를 치고 드라루크는 그걸 끝내주게 수습했다. 기고만장해진 그가 로널드의 팔을 툭 치고 룰루랄라 걸어갔다. 뒤에서 드라우스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불렀다. 드라루크― 이렇게 봤으니 밥이라도 같이― 아, 죄송합니다. 아버지. 지금은 좀 쉬고 싶어서요! 우에에엥― 드라루크― 불꽃 효자 드라루크는 울음소리에 괘념치 않았다.

“오늘은 나까지 너덜너덜해졌군. 돌아가면 간단히 라면이나 끓여주겠네.”

“엥. 나 오므라이스 먹고 싶은데.”

“방금까지의 훈훈함을 좀 유지해주게.”

하여간 말이지. 드라루크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말싸움을 또 하기엔 정말로 진이 다 빠졌다. 약간의 승강이 끝에 두 사람은 라면에 건더기를 많이 넣는 것으로 타협했다. 지금쯤 존이 걱정하고 있을 게 뻔하므로, 둘은 서둘러 대책과의 차를 얻어타 항구를 벗어났다. 나머지는 대책과에서 마무리 지어줄 테다. 지금은 집에 돌아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좌석에 앉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하품을 했다.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곤히 꿈나라에 빠졌다.

 

⁓⁓⁓

 

아들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드라우스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 금이야 옥이야, 온실 속 화초보다도 곱게 키운 아들이 당장 물에 푼 빵처럼 된다는데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부탁을 듣자마자 드라우스는 창문을 깨부수고 바다로 날아갔다. 통화가 안 끊어졌길래 좀 더 자세한 상황을 들려주려나 싶었으나, 들리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사생활이었다. 엿들은 건 조금 미안했지만 아들의 심정은 백 번 이해를 하고도 남았다.

바보같은 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고귀한 아들이 혜안을 제시해줬으면 감사히 따라야 할 것을. 미련 넘치게 조종간을 잡는 꼴이라니. 그래도 막판에 정신을 차려 드라루크를 따른 건 다행이었다.

음, 사실 전혀 티는 안 냈지만… 드라우스도 날아가는 내내 제때 도착할까 확신이 없었다. 빠지기 직전에 도착한 걸 보면, 글쎄, 그들이 조금만 더 일찍 뛰어내렸다면 드라우스의 시간도 더 촉박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드라우스는 머리를 팍팍 흔들어 마음의 속삭임을 쫓아냈다. 그때를 생각하면 다리가 절로 후들거렸다. 뒤늦게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짚자, 지저분한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누구의 것이더라. 폴 녀석이었나. 드라우스는 가방을 주워 먼지를 툭툭 털었다. 이대로 들고 가서 깨끗이 빨아서 돌려주면 다들 그의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까? 드라우스는 벌써부터 아들의 찬사와 폴의 경외를 받는 장면을 상상했다. 가방에서는 잡스러운 물건 때문에 절그럭 소리가 들렸다.

“이건 뭐지?”

아까 드라루크가 담겨있던 보온병을 들었다. 윗부분만 봐서 몰랐는데 아래에 팔찌 같은 게 끼워져 있다. 진짜 팔찌는 아닌 것이, 자그만 기계가 가운데에 붙여져 있다. 그렇다고 시계는 또 아니었다. 아, 이런 장치는 드라우스에게 쥐약이었다. 무슨 용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그것을 내려보던 차, 낯선 인간이 그의 의문을 해결해주었다.

“실례합니다. 위치추적기를 수거해야 해서….”

대책과를 지원하러 온 경찰 중 하나 같았다. 인간은 손가락으로 정체불명이었던 팔찌를 가리켰다. 조금 당황한 드라우스가 말 없이 그것을 내밀었다. 경찰은 인사한 후 다시 수거를 하러 이동했다. 드라우스의 시선이 경찰을 따라갔다. 대책과건 사냥꾼이건 하나같이 그가 오자 발목에 손을 뻗어 똑같이 생긴 장치를 건넸다.

“…위치추적기라고?”

드라우스는 아들이 항구를 떠났을 당시를 생각해냈다. 아들 곁에 있던 폴은 추적기를 반납했던가? 그걸 착용하고 있었던가? 그게 아니라면 보온병에 있던 건 폴의 것이리라. 왜 그 난리 통에서 굳이 그런 짓을 한 걸까?

“폴 군, 많이 걱정했나 봐.”

“예?”

드라우스가 아버지를 올려다봤다. 그는 이미 모든 상황을 이해한 모양이다. 드라우스는 늦게나마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조금 전을 회상했다. 그러니까, 위치추적기는 비행기에서 푼 것이겠지. 그 시점에서 추적기는 쓸모가 없었다. 더군다나 어차피 둘이 같이 있었으니 추적기를 옮길 필요도 없다. 하지만 폴은 필요성을 느껴서 장치를 몸에서 떼어내, 보온병에다 끼웠다. 왜일까.

둘은 무사히 구조했다. 드라우스가 제때 도착해 폴을 잡았다. 조금 아슬아슬하긴 했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드라우스의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그가 잡아챘을 때 폴은 가방을 몸에 딱 붙인 채였다. 그러나 못 뺏을 정도는 아니었다. 드라우스가 아들은 괜찮냐고 소리 지르며 가방을 당겼을 때, 가방은 조금 힘주는 정도로 어찌저찌 폴에게서 떼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폴과 가방은 분리됐다.

드라우스는 다시금 바다를 떠올렸다. 코앞까지 다다른 수면, 끝없는 망망대해.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던 인간.

드라우스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위치추적기는 그 당시에는 전혀 필요 없었다. 그 상황에서는.

“…이 멍청한 폴 같으니라고!”

보온병이 우그러졌다. 드라우스는 보온병과 함께 가방을 패대기쳤다. 어이가 없어서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드라루크가 그렇게 열성적으로 지시 내렸으면 곧이곧대로 따랐어야지, 뒤에서 다른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니! 말도 안 되는 인간의 이면성에 드라우스가 치를 떨었다. 당장 폴에게 따지고 들고 싶었으나 당사자는 떠난 지 오래였다. 애꿎은 머리카락만 쥐어뜯고 있자, 지켜보던 흡혈귀가 나지막이 말했다. 드라우스―

“드라루크를 믿고 맡길 수 있겠지?”

―무슨 소립니까! 드라우스가 부러지지 않을까 싶을 속도로 목을 돌렸다. 믿고 맡기긴 뭘 맡겨요, 우리 드라루크가 저 인간을 보살피는 건데! 열심히 항변해본들 여기선 소리 지르는 그가 더 이상해 보일 뿐이었다. 드라우스는 답답해 미칠 거 같아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믿고 따라와 주라고! 아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아들의 진심을 그 인간은 기만했다. 너무도 하다. 당사자도 아닌 드라우스의 속에서 천불이 일 정도였다. 아이고, 우리 드라루크― 드라우스는 처량하게 아들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리고 드라우스는 드라루크의 보호자이기도 했다. 드라우스의 맘속 어딘가에서 속삭임이 들렸다. 속삭임이 어지간히도 거슬려서, 드라우스는 머리를 파바박 긁어 그것을 저 멀리 내쫓았다.

어깨가 축 내려앉았다. 드라우스는 부산스레 움직이고 있는 인간 무리를 지켜보다가, 눈이 따가운지 아무 것도 없는 바다로 시선을 옮겼다. 시커먼 물이 육지의 빛을 받아 간간이 반짝였다. 목을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저기 은은한 색의 달이 은근히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연한 빛으로 드라우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치 ‘헬로’처럼.

드라우스는 이젠 다 피곤하다는 듯 크게 한숨 쉬었다.

“하여간, 인간은 눈곱만큼도 믿을 수 없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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