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일까?

虎丹

밤 부엉이가 조용히 우는 밤, 호단은 애꿎은 머리를 헤집으며 나무 위에 올라 앉았다. 얼마 뒤면 새벽이 찾아올 텐데도 잠은 오지 않았다. 이상해, 이상하다구. 간헐적으로 오르는 열기가 문제였던 걸까? 하지만 강물에 뛰어들었던 것이 몇 시간 전에, 차가운 물을 머리부터 맞은 것은 직전임에도 열은 잘 식지 않았다. 이제는 손끝까지 뜨거울 지경이었다. 호단은 제 뺨에 두 손을 얹어보았다. 으으! 짧은 소리와 함께 흘러내린 머리칼이 두 뺨을 가렸다. 감은 두 눈은 밝게 빛나면서도 사정없이 흔들리는 중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머릿속에는 온통 질문이 가득했다. 잠이 날아간 자리를 물음이 가득 채운 것만 같았다. 그나마도 새벽이 가까워오니 사람들이 없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놀림감이 되는 것이야 어차피 정해진 일이니 상관없다지만 지금은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혼자 발버둥칠 시간이 필요했다. 호단은 욱신거리는 엄지손가락을 가만 보았다. 울렁거리는 속에 바늘로 따 보았지만 동그랗게 맺힌 피는 예쁜 다홍색이었다. 혼자 찌른 탓일까? 혹은 손이 너무 뜨거워서? 물음이 늘어갈수록 호단의 머리칼은 점점 새집이 되어갔다. 그러나 그 꼴보다 더욱 엉망인 것은 왕창 섞여버린 마음이었다.

그 오라비는 말야, 얼굴 붉히기도 먼저였음서 무얼 또 금방 멀쩡해지는 거야. 호단은 헝클어진 머리칼과 두 손에 얼굴을 묻고는 중얼거렸다. 불만 섞인 목소리였으나 그 안에 짜증은 없었다. 그리 금방 멀쩡해지면은, 나만 혼자 이리 되잖아. 웅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다시금 뺨에 얼룩이 졌다. 이상하게 갑자기 시선이 얽힌다 싶었다. 고것도 뜬금없이, 고향 땅 옆집 아주머니 사랑 이야기를 읊다가. 하필 그런 이야기를 할 때에 눈이 마주칠 건 또 뭐람! 후드득 고개를 털어보아도 생각은 뿌리박힌 듯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 뜬금없이 이야기를 할 것이람 부끄러운 티라도 내질 말든가, 티를 낼 거라면 종일 얼굴을 붉히고나 있던가! 엉겁결에 들어 뒤늦게 붉힌 것은 제 뺨인데, 왜 먼저부터 새빨갛던 얼굴이 그리 쉽게 멀쩡해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탓도, 미움도 다 제가 아닌 상대를 향해버리는 것이다.

“제비같은 놈…….”

이럴 줄 알았음 암만 마음에 차지 않아도 사내애 하나 잡아 사랑놀음이라도 해 볼 것을 그랬다. 그랬음 혼자만 이리 방방 뛰며 헛갈리는 짓은 덜 했을 텐데. 호단은 때늦은 아쉬움에 조금 더 몸을 웅크렸다. 운우지정이야 첫만남에도 나눌 수 있다지만, 그건 어머니 같은 이야기 속 이들이나 할 수 있는 거였나보다. 꺼내겠다 마음먹지도 않은 귀가 머리 위에서 추욱 처졌다. 이제는 너무 무모했던 것은 아니냔 생각만이 머릿속을 뱅글뱅글 돌았다.

드물게 탐라에서 건너왔다던 한 노인의 이야기가 좋았다. 제 원하는 신랑감 찾아 산 넘고 물 건너, 서천꽃밭 꽃감관 사위 노릇도 하다 마침내 그 신랑감 꿰어차고 신이 되었다는 자청비. 어차피 이래도 백정, 저래도 백정일 것이람 사내라도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잡아 앉혀두고 싶었다. 범의 피가 반이나 섞였으니, 절반쯤 별난 짓을 해도 다들 그러려니 할 터였으니까. 사내와 여인의 연정은 단 한 줌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큰 절 하나 올리고 색목인 따라 걸어온 것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 훌쩍 떠나버린 제 어미처럼 저도 다 자랐으니 훌쩍 떠나도 괜찮을 것이라 여겼다. 딸자식 시집가면 남의 집 사람 된다며 온 동네 사람들이 이야기했으니, 기왕지사 그리 될 것 조금 일찍 떠나자. 그런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냥 히죽 웃기나 할 걸. 아님 능구렁이마냥 그래, 나 고운 건 이미 잘 안다며 되레 놀리기나 할 걸. 거기서 냅다 소리를 지를 건 또 뭐야. 푸욱 숙인 고개는 이제 두 손도 아닌 무릎에 묻었다. 암만 또래 사내애들에게 아니 들어본 말이라 해도 그리 티를 낼 것은 없었는데. 남 잘생겼다 하는 건 그리 쉽더니 내 듣는 것은 이리 어려워서야 앞으로도 휘청거릴 게 분명했다. 묻었던 고개를 잠시 들고,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대었다. 어머니는 어찌 아버지를 그리 휘어잡으셨지? 범 처녀가 언덕 집 사내 하나 휘어잡았다구 그리 소문이 자자했다던데, 나는 이리 표만 내서 어쩐담. 이래서는 정인이니 서방이니 하기 전에 놀림이나 아니 받음 다행이었다. 알기 쉬운 여인은 매력도 없댔는데. 한숨이 가지 아래로 조용히 흩어졌다.

내일 일은 또 어쩌지. 이대로 날밤을 새웠다가는 종일 졸음에 절어 살겠지. 졸린 눈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담 그저 이대로 밤을 새웠겠지만, 짐승 잡는 일은 멀쩡한 정신으로도 베이고 잘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호단은 가만 눈을 감아보았다. 눈을 감으니 밤새와 풀벌레 우는 소리가 선명해졌다. 멀리 떠나간 잠은 돌아올 기미도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잠은 수런한 머릿속에 찾아오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답 없는 고민만 늘어놓는다면 잠이 비집고 들어올 자리는 아마 영영 생겨나지 않을 거였다.

붕붕붕. 그러니 호단은 복잡한 머릿속을 탈탈 흔들었다. 어차피 이리 된 것, 마음은 몰라도 겉으로는 더 표를 내고 싶지 않았다. 범 자존심이 있지, 풋사랑 하는 애들처럼 구는 것은 싫었다. 그러니 따악 오늘까지만, 오늘 밤까지만 이리 복잡하게 굴 셈이었다. 어차피 복잡한 속은 제게 어울리지도 않았다. 호단은 머리를 다시 두툼한 나무 기둥에 기대어 두었다. 정 마음에 들면 놀릴 생각도 못 하게 물어다 어디 산에 숨겨놓지, 무얼. 그리 생각하니 머릿속이 조금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부엉이 울음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고, 어느샌가 시야가 조금 밝아졌으니 아주 조금만, 아주 조금만 눈을 감았다 일어나 일터로 향하면 될 것이다. 아저씨들이야 툴툴거리면서도 걱정을 늘어놓을 테니 다 괜찮겠지. 응. 다 괜찮을 거야.

어린 범은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늘어놓았다. 일을 세어두니 조금씩 잠이 오는 것 같기도 했다. 조금씩 숨소리는 고르게 가라앉았고, 새벽녘 햇빛은 어두운 구름이 가려주었다. 이따금 파닥이는 귀와 사그락대는 나뭇잎만이 고로롱거리는 소리를 감춰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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