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파블로프 재단으로
Robert Miller
“…….”
한 사내가 덜컥 깨어났다. 그는 휘청거리는 눈을 다잡고, 식은땀으로 축축한 손에 얼굴을 묻었다. 로버트 밀러. 그는 꼬박 몇 해 째 악몽에 갉아먹히고 있었다. 그의 악몽은 언제나 끝이 같았다. 부모님의 죽음으로 시작하든, 스티븐과 마거릿의 죽음만을 보여주든, 모든 악몽은 그를 갉아먹고자 했다. 뇌 스스로 자신을 자근자근 짓밟고 나면 어김없이 꿈의 끝이 찾아왔다. 죽음. 로버트의 꿈은 언제나 그를 죽이고자 했다. 스미스, 헬렌, 마거릿, 스티븐. 그들은 해가 밝아올 즈음이면 로버트의 목을 졸랐다. 때로는 곧장 그의 심장에 총구를 겨누기도 했다. 그는 매일 밤 죽고 있었다.
범인을 찾아내어 피떡으로 만들었던 그날, 로버트는 베트남전 파병을 자원했다. 군은 곧장 그를 전장으로 보내주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까. 일가족을 한순간에 잃었다는 점은 비교적 위험요소로 보였으나, 술과 헤로인에 전 병사들이 태반이었으니 사실상 재고 따질 상황 또한 아니었다. 비명은 시시각각 로버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거대한 벌집 한가운데 박힌 것만 같았다. 아내와 아들의 비명 같은 것은 들었던 적이 없음에도 그들의 비명은 생생하기만 했다.
왜 하필 나는 손에 총을 들어서. 총과 칼, 포탄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에 왜 이리도 익숙하여서. 그는 빌어먹을 M16을 정비하며 그리 뇌까렸다. 그는 마거릿과 스티븐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외출 후 돌아온 그의 눈앞엔 이미 죽어버린 시체들만 놓여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수없이 많은 순간을 훈련하였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 또한 경험하였으며, 귀가 멀 듯한 소음 밑에서 제 손에 죽어간 사람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를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비논리의 산물인 꿈 속에서 그는 언제나 자신의 가족이 죽어가는 순간을 생생히 두 눈으로 보아야 했다. 뇌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조합한 탓이었다.
해서 그는 차라리 전쟁터에 자기 자신을 내던지고자 했다. 일종의 자살 시도였다. 동시에 격리 시도이기도 했다. 그는 이제 자신이 멀쩡한 사회에 남아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유는 많았으나, 개중 하나는 그 자신이 언제 누군가를 죽이려 들지 모르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는 범인의 얼굴을 피떡으로 뭉개던 그 날, 제 안에 죄책감은 단 한 줌도 없이 오직 살의만이 흘러 넘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지금 또한 생각은 같았다. 그는 종종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하기까지 하였으니까. 그것에게는 몇 백 년의 수감생활도 과분했다. 법이며 도덕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이미 상부의 명령을 통해 많은 것을 뭉개보았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그것이 제 눈에 비친다면 그는 자신이 그것의 가죽을 벗겨 토막낸다 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를 멈춰세우는 것은 그저 죽은 아내와 아들에게 살인자 남편, 아버지를 선물할 수 없다는 일념 하나뿐이었다.
꾸욱. 손바닥 안쪽으로 파고드는 손톱은 짧은 길이에도 불구하고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턱끝까지 차오르는 질식감은 폐를 토할 듯 기침해보아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 마치 늪에 빠지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그는 무겁게만 느껴지는 이불을 걷어내었다. 벽을 따라 주욱 박힌 손잡이를 잡고 몸을 일으켜, 익숙하게 목발을 짚었다. 그는 문득 헐렁한 오른쪽 바짓단을 내려다 보았다. 내 주제에 의족은 무슨. 그는 하나 남은 다리와 목발에 의지해 몸을 옮겼다. 이제는 눅눅한 악몽을 씻어내야만 했다.
쏟아지는 물줄기는 성치 않은 몸도 공평하게 적셨다. 그는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제 삶도 모조리 씻겨나가기를 바랐다. 고개를 들면 여전히 긴 줄을 가진 샤워기가 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파병을 지원하기 직전, 그는 이 곳에서 한 차례 목을 맸다. 벽면에는 그때의 발버둥으로 떨어져나간 샤워기의 고정대와 타일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타일이 벗겨진 벽은 거칠거칠했다. 흘러내리는 물에는 미미한 짠기가 섞여들었다. 그는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는 죽을 수 없었다. 목을 죄어드는 호스에도 드는 생각은, 살아야겠단 생각이 아닌 그들을 기억할 사람이 없단 사실이었다. 헬렌이 멱을 잡아 흔들던 기억이 생생했다. 나는 이제 내 딸이 없다 생각하고 살 테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생각해보라던 그 외침까지도 선명했다. 괴로움에 젖어 외면하던 것이 떠오른 순간 또한 목이 조여 숨이 막혀가던 그 순간이었다.
몸과 머리를 헹군 거품이 하수구를 타고 흘러들었다. 마거릿이 쓰던 제품에서는 당연하게도 마거릿의 향이 났다. 그러니 그는 그것에 감히 손을 댈 수 없었다. 멍청하게, 전쟁터도 아닌 본국에서, 이 집에서조차 지킬 이들을 지키지 못한 것이 그였으니 그에게는 향과 추억이 모두 형벌이었다. 하, 하하. 어느덧 집에서는 사람이 살지 않는 듯한, 빈 집의 냄새가 났다. 그 즈음부터 헬렌은 정말로 이 집을 찾지 않았다. 다시 만난 것이 언제였더라. 그는 젖은 얼굴로 멍하니 기억을 헤집어보았다. 기억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가지런히 놓인 제품 대신 싸구려 비누를 집어들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향이 비강을 파고들었다. 손바닥에 닿는 살갗은 거칠었지만 이제 그것을 신경쓰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애매하게 자란 수염이 아저씨 같다며 핀잔을 주는 목소리가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가 낯설어 쭈뼛거리면서도, 학교에서 아빠 얘길 했다며 배시시 웃던 그 목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움푹 패인 눈가를 꾹 눌렀다. 이제는 남은 것들을 털어낼 시간이었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순간이라도, 누군가 죽어가는 것이 이제는 큰 일로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머저리처럼 구는 것은 밤뿐이어야 했다.
낡은 철문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닫혔다. 문 밖은 어느덧 햇빛이 가득했다. 그를 도와주러 온, 오랜 친구 윌리엄은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그저 그의 속도에 맞추어 큰 캐리어를 옮겨줄 뿐이었다. 내리쬐는 햇빛이 두 사람의 걸음걸음을 따라붙었다. 그는 어쩐지 그 볕이 두 사람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하. 그는 짤막하게 웃었다. 윌리엄은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웃음은 맞지 않을 때에는 울음을 대신하기도 하는 법이었다. 하여 그는 로버트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안경으로도, 평소와 다르지 않은 그 표정으로도 숨길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로버트는 구태여 변명하지 않은 채, 천천히 남은 길을 걸어갈 뿐이었다.
“그럼 부탁할게. 메리에게도 안부 전해주고.”
“가능한 자주 와. 내 뒷집이 폐가가 되는 건 사양이니까.”
“하하. 까칠하기는.”
그는 길가의 벤치에 비틀비틀 앉아 윌리엄을 돌려보냈다. 위치는 편지로 말해두었으니, 나머지는 찾아오는 사람들의 몫이리라. 그는 구태여 제 친구가 짐을 싣는 것까지 돕지 않기를 바랐다. 청승은 혼자 떠는 것도 과했다. 윌리엄이 떠나고, 그는 걸어왔던 길 끝에 놓인 집을 바라보았다. 마룻바닥에 고였던 피. 거실을 수놓던 웃음과 마당의 그네를 달던 날. 총성. 그리고 또 총성. 그는 마른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나마 멀끔하게 손질했던 낯짝이 뭉그러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그래도, 그럼에도 그는 나아가야 했다. 스스로 죽을 수조차 없다면 남은 것은 사는 것뿐이므로. 어차피 그에게 삶은 이제 대단하지 않았으니,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머릿속의 것을 내어주는 것도 쉬웠다.
로버트 밀러 씨, 맞으실까요? 그는 고저없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희게 가린 상대는 인간보다는 차라리 꿈 속에서 보던 것들과 닮아있었다. 해서 그는 크게 낯설어하지 않으며, 그저 짧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곧 성 파블로프 재단 조사원 블랭크 버스입니다. 예. 만나서 반갑습니다. 따위의 간단한 대화가 오갔다. 그는 다시 비틀비틀 일어나 목발을 짚고, 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를 걸어 흰 차에 몸을 실었다. 텅. 묵직한 캐리어가 트렁크에 실린 듯했다. 그는 창을 내리지 않고 그저 눈을 돌려 멀어진 집을 눈에 담았다.
……다녀올게, 내 사랑.
그는 곧 쉽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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