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밤

虎丹

바르르 떨리는 손이 흐릿한 시야 너머의 뺨을 쓰다듬었다. 눈을 깜빡여봐도 줄줄 흐르는 것이 눈물인지 퍼런 점액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 눈일까? 혹은 오라비의 눈일까? 푸르게 얼룩진 낯이 배시시 웃음을 머금었다. 덜걱거리는 꼴은 사람 아닌 죽은 것에 가까웠지만, 아직 머리가 울려대고 있으니 나는 아직 살아있을 것이다. 그럼. 내 서방 홀아비 만들 수는 없지. 호단은 팔을 벌렸다. 오라비. 서방. 나 한 번만 안아주라. 짤막한 부탁이 떨어지기 무섭게 넓지 않은 품에 온기인지 냉기인지 모를 것이 한아름 안겼다. 호단은 그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대었다. 이상하지. 내 서방 안았는데, 왜 자꾸 울고만 싶을까. 허나 짊어질 것 많은 어깨에 자신까지 올라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호단은 축 늘어진 팔을 들어 너른 등을 마주 안았다.

“오라비. 자꾸 말라가는 것 같어. 입이 깔깔해두 잘 먹어야 무어든 하지. 응?”

너른 등 토닥이는 손은 말단이 저렸다. 이리 온 뒤로는 세상이 술이라도 마신 것마냥 울렁거렸다. 때로는 빙빙 돌기도 했다. 그 시린 눈 마주한 죄인지, 혹은 그 손에 온 얼굴 범벅된 탓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후로 푸른 것 없는 이들은 사람이 아닌 말하는 소와 돼지로 보였다. 이따금 그들이 질러대는 비명마저도 짐승의 것으로 바뀌어 들리고는 했다. 하나 마누라는 언제나 서방 따르는 법이었다. 그러니 호단은 머릿속에 갱갱 울려대는 꽹과리를 반으로 쪼개두었다. 조각조각 갈라진 편이 이따금 더 시끄럽게 굴고는 하였지만, 호단은 그럴 적마다 편을 더욱 잘게 쪼갰다. 경종이 다 무슨 소용일까. 마누라 되었으니 서방 가는 길 그저 따르면 그만이지. 이따금 눈을 감아도 퍼런 것들이 보였지만, 그럴 때에도 호단은 그저 히죽 웃어넘겼다. 청운 외에는 더 중요한 것이 없어진 탓이었다.

아주 가끔, 말하는 짐승들을 썰어대다 보면 머릿속이 웅웅 울리고는 했다. 그리고 그네들 위로는 종종 사람의 얼굴이 덧씌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럴 때면 어디선가 뭉글뭉글 푸른 점액질이 솟아나 두 눈을 더 굳건히 가리고는 했다. 그것이 몇 차례 반복되니 이제는 푸른 것 칠한 이들도 왕왕 짐승처럼 뵈었다. 흐, 큰일났다. 호단은 그럴 때마다 가만히 몸을 웅크려 무르팍에 고개를 묻고는 했다. 눈은 버렸어도 아직 귀는 말짱하였으니까. 아직 살갗에 닿는 감각도, 귀에 파고드는 소리도 본래와 같았으니까.

호단은 가만히 웅크려 청운을 기다렸다. 청운은 이리 온 뒤로도 여전히 바쁜 것처럼 보였다. 무언가 복잡한 것들을 늘어놓기도 했고, 누군가와 알아듣지 못할 말을 나누는 일도 있었다. 호단 또한 짐승 모가지 썰어대기에 바빴으니, 자연히 얼굴 마주하는 날은 멀어졌다. 오라비,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거야? 라고 물을 적엔 미안함 가득한 웃음이 돌아오기도 했으나, 호단은 그리 개의치 않았다. 머리통 안의 무언가가 망가졌는지, 백정 놈들 망나니도 하는데, 짐승 껍데기 덧씌워주는 것이 고마운 일 아니냔 생각도 들었다. 다만 그 태연한 태도가 이상할 것은 알았기에 호단은 배시시 웃기나 할 뿐이었다.

청운은 어떤 때에는 아주 걸레짝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였다. 호단은 그 너덜너덜한 행색에 입술을 사리물면서도 이리 고요하게 얼굴 마주하는 것이 얼마만인지 헤아리고는 했다. 그의 목과 손에 감긴 점액은 어떤 것으로도 지워지지 않아서, 호단은 차게 적신 물수건으로 그의 살갗을 닦아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남의 것 뺏어 내 것 채울 줄만 아는데. 오라비 것 채워줄 수도 있음 좋았을 걸. 그리 하고 있자니 가리워진 눈이 간질거렸다. 호단은 처음에는 손등으로 그 눈까풀을 부벼대다가 어느 즈음에는 손톱으로 눈가를 갉작였다. 청운이 바르작거리는 소리에 손은 멈추었지만, 그 뒤로 종종 눈이 간지러울 때가 있었다. 아마 그 즈음부터 밤에도 눈이 번쩍이지 않았던 것 같았다.

푸른 것 찍어바른 짐승들 사이에서도 청운은 이상하게 선명하였다. 호단은 고것이 부부의 연이라며 이따금 홀로 키득거렸다. 상념은 언제나 혼자 있는 밤에나 떠올랐으니 이상하게 볼 이들도 없었다. 그러나 눈이 간질간질할 고 무렵, 호단은 오랜만에 마주한 청운이 이상하게 흐린 것을 알아차렸다. 오라비. 나 어떡하지? 무의식중에 불쑥 튀어나온 속마음이 청운에 앞에 던져졌다. 일 쳤구나. 호단은 짤막한 틈새도 없이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보니 내 서방이 새삼 잘생겼어. 놀랐던 청운의 눈이 그제사 이전처럼 되었다. 뭐야, 싱겁게. 아마 이런 말이 돌아왔던 것 같기도 했다. 휴우. 호단은 남몰래 참았던 숨을 뱉었다. 나, 이제 오라비가 잘 보이질 않어. 호단은 목구멍 너머로 울렁이는 소리를 꾸욱 삼켰다. 짊어질 것 많은 어깨에 자신까지 올라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호단은 많은 것들을 꾸욱 꾹 눌러 삼켰다. 어차피 제 앞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 몸이 놀면 잡생각이 느는 법이었다.

호단은 청운의 등 한번 도닥여주고 다시 몸을 움직였다. 하라는 것을 고대로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 많은 것 배우지 못한 호단의 머리로도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어느 즈음부터 청운은 짤막한 포옹을 안겨주는 일이 잦았다. 갑자기 무어 이러나 싶어 호단은 눈을 둥그렇게 뜨다가도 이내 그르릉거리며 그 품을 마주 안았다. 좋다, 내 서방. 무슨 일이 있느냐고는 더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그의 앞에는 일이 나래비를 서 있는 것이 일상이었다. 흐릿해지는 시야는 불안했지만 그에 앞서 청운과 마주하고 있는 일이 좋았다. 이따금 이러다 내 서방 두고 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리 된다면 시동생들 목에 걸린 목줄 풀어내고 훌훌 떠나버리자 하는 가벼운 마음에 도로 웃을 수 있었다. 아마 쪼개진 꽹과리가 이제 더는 소리를 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큰일났네. 우리 서방, 혼자 처량맞게 우는 것 아닌가 놀려도 주어야 하는데.”

그러다 아주 가끔, 조각난 편들이 제멋대로 소리를 내는 날에는 드물게 제 옆에서 잠든 청운의 가슴팍이 숨에 따라 오르내리는 것을 보며 그리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어쩌면 소리가 울려야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것인가 싶었지만 이제는 그 생각마저 길게 가지 않았다. 제정신이 무어 필요할까. 풋사랑부터 이리 푹 젖은 사랑까지 자라났으니 이제는 그다지 이것저것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청운이 짊어진 것 조금이나마 함께 들고 갈 수 있음 족했다. 호단은 설핏 웃었다. 김현네 부인이 어찌 하룻밤 정에 목숨까지 내어주었나 하였더니, 그 범도 이 마음이었음 제법 이해할 만했다.

호단은 제 웃음에 설핏 깬 청운을 끌어안았다. 으응, 날이 추워서. 별다른 물음은 없었음에도 호단은 괜한 답을 늘어놓았다. 그르릉. 범 특유의 목 울리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기대면, 아직 멀어지지 않은 향이 그대로 코끝에 맴돌았다. 귀와 코 중에 어떤 것이 더 빨리 멀까. 호단은 차라리 코가 먼저 멀었으면 좋겠다 여겼다. 귀만 남아있다면 제 몸을 움직이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테니까. 몸을 움직일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것도 많았다. 우리 서방, 언제쯤 어깨가 가벼워지려나. 호단은 배시시 웃으며 눈을 감았다. 그릉거리는 소리는 조금씩 엷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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