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다. 때늦은 봄이었다.
虎丹 X 靑云
정말이지 이상한 날이다. 호단은 달력을 갉작이며 제 볼을 꾹, 꼬집어 늘려보았다. 아야야… 호단은 곧 발갛게 된 뺨을 부여잡고는 몸을 웅크렸다. ……생시였다. 이것 다, 꿈이 아닌 생시였던 것이다. 호단은 그제서야 얼굴이며 귀부터 목덜미까지 죄 붉게 붉히고는 요상한 소리를 내었다. 어딘가 붕 뜬 감각에 호단은 몸을 파르륵 떨었다. 어느샌가 튀어나온 귀가 자꾸만 파닥거렸다. 어디선가 자꾸 막 피어오른 봄 꽃 내음이 따라붙는 것만 같았다.
생각해보면 전조가 없는 일은 아니었다. 오늘은, 그러니까 어젯밤은 유독 꿈자리부터 발그레하였으니까. 무슨 꿈이었나 기억은 나지 않는데, 자고 일어나니 이상하게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꼭 고장이라도 난 것만 같았다. 이가 빠진 그릇처럼 암만 숨을 몰아쉬어도 덜그럭 덜그럭. 실은 며칠이 내리 그랬다. 해서 호단은 그저 산 넘고 물 건너 온갖 사람들 만나고 사내들 만나니 그런갑다 하며 별것 아닌 일로 넘겨두었다. 그날 아침도 그러했다. 호단은 잠이 죄 묻어나는 얼굴로 푸르르 고개를 털었다. 코 끝에 남는 복사꽃 내음에 뺨을 붉히다가도 쉬이 씻을 수 있게 되었음에 콧노래를 부르는 것이 근래의 일상이었다.
호단은 아직 새벽달이 떠 있을 즈음부터 벌떡 일어나 쿵쿵 뛰는 심장을 뒤로 하고 차가운 돌바닥에 발을 딛었다. 겨울엔 데운 돌이라도 넣어두어야지. 맨질한 돌바닥은 다 좋았지만, 맨 살갗에는 유독 차게만 느껴졌다. 호단은 흥얼거리며 물을 틀었다. 세상이 이리 넓은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너른 세상에 이토록 다양한 이들이 있는 것도 몰랐다. 소금이나 쌀겨 대신 비누란 것을 쓰는 것도 그랬다. 제가 알지 못하는 것은 한문 외에도 산과 들판의 잎사귀만큼 많았다.
호단은 괜시리 손에 더 거품을 내며 새로 익힌 얼굴들을 떠올렸다. 처음 얼굴 마주하고 이름 나누는 데에도 그리 친절한 이들이 많았다. 살갑고, 조금은 이상하고, 이상하게 섬찟하면서도 다정한 사람들. 호단은 배시시 웃으며 손에 묻은 비누거품을 얼굴에 문질렀다. 향긋한 것이 근래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였으므로. 다만 호단은 자신이 이것을 생각해야지, 하고 생각하는 류의 존재가 아님을 깨달아야만 했다. 좋은 것, 즐거움, 근래에 만난 사람들. 이런 것들이 겹치고 겹치면 자꾸만 한 얼굴이 떠올랐으니까. 호단은 화악 붉어지는 낯에 손을 더듬더듬 뻗어 머리 위로 냅다 찬물을 쏟아부었다.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럼에도 살갗을 지나는 순간 물은 순식간에 데워져서, 세면대를 타고 흐를 즈음에는 확실히 미적지근하다 할 수도 있었다. 호단은 머리칼에 거품을 내면서도 불쑥불쑥 떠오르는 낯에 머리를 죄 털어버리고만 싶었다. 그래. 확실히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다.
머리가 복잡할 적에는 몸을 쓰는 것이 좋다. 이는 어른들의 습관과도 같은 말이었다. 호단은 이전까지 고것이 무슨 말인가 잘 체감하지 못하였으나, 오늘만큼은 그것이 바른 말이라 여겼다. 호단은 종일 죽은 짐승과 피, 무쇠와 비린내를 마주 잡고 씨름하였다. 오늘따라 유독 모든 이들이 바쁜 덕에 복잡한 생각은 고개를 들 새도 없었다. 다행이다. 호단은 남몰래 숨을 푹 내쉬고는 피를 뺀 소 한 마리를 통으로 들어다 옮겼다. 잡생각이 나는 건 다 몸이 편해 그래. 호단은 이따금 저도 모르게 발긋해지는 뺨을 눈치도 채지 못한 채 그렇게 해가 뜬 시간 전체를 일로 보냈다. 어찌나 칼을 쥐어댔는지 드물게 손아귀가 저릿저릿할 지경이었다.
두 자루 칼로 뼈와 살 가르는 것이야 익숙하다 해도 종일 무언가를 들고, 나르고, 갈라대면 몸이 지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호단은 몸에 밴 죽은 짐승 특유의 비린내를 꼼꼼하게 씻어내고는 광장으로 향했다. 근래에는 그 광장 긴 의자에 벌렁 드러눕는 것이 취미라면 취미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걸음이기도 했다. 몰려오는 피곤에 차라리 방으로 들어갈 것을 그랬나, 싶다가도 호단은 종종 그 네모진 건물 안에서 답답증을 느꼈으므로, 긴 의자에 그저 몸을 기대어 앉을 뿐이었다.
“으으, 피곤해!”
호단은 후두둑, 고개를 털었다. 주변에 뉘가 있는 줄도 모르고 마른 손으로 눈을 꾹꾹 눌러대었다. 멍한 눈에 뉘가 하품하는 것 보고 그대로 졸음이 옮아버린 것도 같았다. 것이 아니라면, 어쩌면 생각을 접어두려 종일 몸을 움직였던 탓인지도 몰랐다. 그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나 바람결에 소금기 밴 내음이 실려오는 것 모른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청운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키득거리며 일이 많았냐 물었다. 호단은 벤치 등받이에 머리를 젖혀 기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것도 그렇구, 요즘 잠을 잘 못 잔다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에 청운은 특유의 말버릇과 함께 잠깐이라도 눈을 붙일만한 자리는 없나 두리번거렸다. 이전의 그 호들갑스런 상황은 어디갔는지, 웬일로 호단과 청운의 대화는 매끄럽게 흘러갔다.
대화의 흐름이 바뀐 것은 호단이 멍한 눈을 부비며 자그마한 하품과 함께, 방금 전 흐릿하게 뭉쳤던 인영의 입 안에서 무언가를 보았다 깨달은 순간부터였다. 파르륵 고개를 털며 졸음을 조금이나마 털어낸 호단은 첫째, 이야기를 나누던 이가 청운이라는 사실과 함께 둘째, 그의 입 안에서 본 것이 제법 반짝거렸단 사실을 동시에 깨달았다. 호단은 당연히 자신이 무언가 잘못 보았을 것이라 여겼다. 청운은 호단이 건넨 짧은 물음에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저 피어싱이었다. 흔하디 흔한, 제 귀에도 여럿 박힌 피어싱. 그것이 입안 조금 깊숙한 곳에, 혓바닥 한가운데에도 있을 뿐이었다. 되게 졸려 보이더니 그 사이에 그런 걸 봤네 싶어 약간은 웃음이 일기도 했다.
“아아, 이거? 그냥 피어싱. 귀걸이 같은 거야. 그걸 혀에다 한 거지.”
여하튼간에 청운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왜? 보고 싶어? 라는 물음도 별다른 뜻 없이 불쑥 튀어나왔다. 호단은 귀걸이를 입 안에 한다는 사실 하나에 놀라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청운은 입을 벌려 혀를 내었다. 부정확해진 발음으로 어헤? 하며 소감을 묻기까지 했다. 그러자 정작 궁금하냐 묻고 혀를 낸 청운은 말짱한데, 보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호단의 목소리만 휙 빗겨나가 삑사리가 났다. 입 안에 있으니 그리 보여주는 것이 당연했다. 그럼에도 호단은 무얼 상상했는지 파드득 고개를 털었다. 잠시 청운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는 것은 덤이었다. 청운은 그런 호단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 기울이면서도 곧 아프지 않으냔 물음에 여상히 답했다.
“음… 혀는 별로 안 아팠어. 여기, 이게 조금 아팠지.”
청운이 두드린 곳은 제법 짙은 눈썹께였다. 호단은 그제서야 이 오라비가 얼굴 여기저기 장식을 제법 많이 달아두었단 것을 깨달았다. 생각에 그것이 장식이란 인식이 없으면 눈은 자연스레 그 장식을 건너뛰고 사람을 인식하는 법이었다. 샛노란 눈이 신기한 듯 반짝임을 좇아 따라다녔다. 따뜻한 온도의 노란 눈은 웃음기를 담고 휘었다. 호단의 인식에 장식은 혀나 눈썹이 아닌 귓불에나 뚫어 하는 것이었고, 청운의 인식에는 오래 전 박아넣은 혀 안쪽의 것보다 최근에 한 것이 아직 따가운 것이었다. 상반된 인식이 호기심과 웃음을 담고 얽혔다. 청운은 호단이 연신 신기하단 말을 입에 달자 허리를 조금 숙였다. 그리도 신기한가 싶었다. 하여 호단의 눈높이에 제 낯을 가져다 준 것이다.
호단은 반짝거리면서도 살갗에 딱 붙어있는 모양이 청운과 퍽 잘 어울린다 여겼다. 배에는 큰 닻이 배를 떠내려가지 않게 한다던데, 저것도 그럼 오라비 닻인가. 그리 뇌까리기도 하였다. 밋밋하게 둥그런 쇠구슬 같은데, 그것이 꽤나 보기에 좋았다. 고향에선 이리 살갗에 쇠구슬 박겠다 하면 네가 소냐, 네가 말이냐 하며 난리였을 텐데. 호단은 청운을 통해 밟은 땅이 조선 것이 아님을 새로이 깨달았다. 청운은 그리 신기한가 싶어 눈을 꿈뻑이다가도 호단의 샛노란 눈이 꽤나 고양이를 닮았단 생각에 내심 웃었다. 호단의 눈은 청운에게 유달리 흰 노랑으로 보이고는 하였다. 해서 귓바퀴에 달아둔 것도 고개를 슬쩍 돌려 호단에게 보여주었다. 아파도 이런 반응이면 하는 보람이 있다 웃으면서.
“으응. 오라비랑 잘 어울린다! 오라비. 고거, 다 아물어서 안 아픔 잠깐 만져봐도 돼?”
“응? 으음… 조심히만 만지면.”
묻는 목소리는 그저 천진했다. 호단은 고질적으로 호기심이 강했다. 눈앞에 움직이는 것이 있다면 그 호기심은 쉬이 사냥에 대한 본능으로 일고는 했고, 것이 아니더라도 궁금한 것은 꼭 손으로 만져보고 생김을 알고 싶었다. 호단은 그것이 어쩌면 손 쓰는 이의 병이라 느끼기도 했다. 청운은 그에 고민했다. 그다지 거리낄 것도 아니었지만, 이따금 통증이 이는 것도 사실이었으므로. 다만 망설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흔쾌히 가만 눈을 감고 제 얼굴을 호단에게 내어준 것이다. 뭐 대단한 거라고. 그에 호단은 살금살금 청운의 머리칼을 걷고 손끝으로 눈썹께를 매만졌다. 오, 우와. 아래 짧은 막대가 있구나. 얼굴은 평평하다 생각을 했는데, 솟지도 않은 곳에 어찌 이리 뚫었담. 호단은 어느샌가 생각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고 위를 매만지다가 윽, 하는 소리에 화들짝 손을 떼었을 뿐이었다.
고백하자면, 청운은 그리 호들갑을 떨고픈 마음이 없었다. 그저 따끔하기에 별다른 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짧은 소리를 내었을 뿐. 청운은 허둥거리는 호단을 차분히 달랬다. 그저 살짝 따끔했을 뿐이라고. 당황한 듯 흔들리는 노란 눈동자에도 그저 동생 어르듯 달랠 뿐이었다. 외려 호단이 그리 허둥거리니 겸연쩍을 지경이기도 했다. 뚫어 놓기까지 했는데 고작 따끔한 것에 바닥을 뒹굴겠는가. 청운은 씩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대두. 피어싱한 곳을 밟힌 적도 있는데, 뭐. 거기 비하면 티끌만치도 안 아프지.”
호단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뚫어놓은 곳을 발로? 으. 생각만 해도 그리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엄청 아플 것 같은데! 하며 뇌까렸다. 차라리 베인 상처에 소금을 뿌리지. 오라비도 험하게 살었구나. 그녀의 눈에 청운은 퍽 말끔하게 보였기에, 호단은 청운의 삶을 쉬이 짐작하지 못하고는 했다. 청운은 나중에 되갚아주었으니 괜찮다 일렀고, 호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단은 흉 가득 진 손으로 뺨을 긁적였다. 오라비에 비하면 나는 제법 곱게 살았구나 싶은 생각이었으므로.
청운은 웃음을 터트렸다. 구룡성. 청운은 하루라도 빨리 모든 가족을 그 밖으로 빼내고 싶었다. 오래 전 번성하였던 그때로 되돌려야 한다는 마음도 있었다. 헌데 그에 앞서 구룡성을 벗어나는 것조차 어찌 이리 기약이 없는지. 웃음의 뒷맛이 썼다. 청운은 아무렇지 않은 척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힘들게 돈을 모으겠어.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으니 그렇지- 하며. 호단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구룡성이 무어인지 알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다만 저 사는 곳 떠나고 싶다 하는 사람의 마음은 알았기에, 그저 오라비 하는 것 보면 금방 떠날 것 같다며 청운의 옆구리를 장난스레 콕 찌를 뿐이었다. 청운은 그에 움찔거리며 멋쩍은 듯 웃었다.
“뭐, 내가 책임져야 할 게 내 몸 하나뿐이었음 진작 떠났겠지만… 가족들 전부를 먹여 살려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 뭐.”
“으응. 그것 다 생각해두. 세상 가장이 다 오라비 같음 좋겠네! 기특해, 기특해.”
음. 마을 문턱 바로 뒤에 사는 아재가 이 오라비만 같았음 부인이 도망도 안 갔을 텐데. 호단은 그리 생각하며 배시시 웃었다. 제 부인이며 자식들 챙기지 않고 사는 이들도 수두룩했다. 암만 손가락질 받는대도 어쩌겠는가. 당장 내 입에 들어갈 쌀 한 톨이 아쉬울 날이 있는데. 해서 호단은 그네들을 비난하지 않았지만, 청운이 그들과 비교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호단은, 청운과 조금 더 친해 그가 제 동네 사내애 같았다면 저 머리를 쓰담지 않었을까 하였다. 이따금 호단은 청운에게서 아등바등 버티고 있는 이를 발견하였으므로. 다만 청운도 나이 다 찬 사내였으므로 구태여 머리에 손을 올리지 않을 뿐이었다.
청운은 호단의 웃음을 따라 저도 웃으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저런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나? 청운에게는 그저 모든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부모도, 줄줄이 딸린 동생들도 전부 당연하게 제가 져야 할 무게라 생각하였다. 해서 집 밖을 나돌면 나돌았지, 표를 낸 일은 없었다. 해서 청운은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말 해 준 건 네가 처음이야. 고마워. 라는 말을 툭 건넸다. 노란 눈이 꿈뻑, 꿈뻑 하더니 곧 호단은 제 뺨을 긁적였다. 그저 말뿐이니 어떤 말을 못 할까. 이 대화도 어쩌다 제가 친 사고에 이어진 것이니, 호단은 마냥 겸연쩍었다. 해서 대화의 주제를 살짝 비틀었다. 좋은 가장이니, 부인 될 사람은 든든하겠다고.
없는 말은 아니었다. 호단은 몇 차례, 빌어먹을 서방 만나 신세 망친 여인들을 자주 보았다. 우리 백정이야 천하디 천한 족속이었으니 재고 따질 것도 많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사내가 제 구실 못할 때에 고생하는 것은 언제나 여인네들이었다. 그러니 곱게만 자란 고운 여인들은 어떻겠는가. 호단은 그리 중얼거리며 청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오라비는 튼실하니 소박맞을 일은 없겠다, 하며 농을 곁들이기도 했다. 물론, 이어지는 청운의 말에는 다시 눈을 휘둥그렇게 떠야 했지만.
“부인은 무슨, 연인조차 한 번도 못 만나봤는데. 언제쯤 혼인할 수 있으려나.”
“으잉. 단 한 번두? 오라비.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청운이 한숨을 작게 뱉었다. 호단은 그에 눈을 가늘게 떴다. 제비인 것이 분명하다며 씩씩거렸던 전적이 있던 탓이었다. 호단은 제 눈으로 본 바만 가지고는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머리색이야 이리 오니 온통 총천연색이었으니 문제 없었을 테고. 저 허우대에, 저 생김인데? 급기야 생각은 저 오라비가 절 놀린다, 까지 가 닿았다. 그 눈에 청운이 되레 얼굴을 붉혔다. 호단은 청운이 말을 더듬기까지 하며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 되묻고 나서야 가늘게 떴던 눈을 본래대로 돌렸다.
“보통 다… 그렇지 않나?”
“오라비는 잘생겼길래 여인 여럿 울렸을 줄 알었는데.”
죄 비루먹은 말처럼 비실비실한 고향 사내들과 이리 넘어와 다른 나라 이들을 보니 눈이 뜨이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은 호단은 그 가운데에서도 희멀건 이들을 제쳐두었다. 햇빛 한번 안 보고 산 것 같잖어. 가진 미감이 그러하니, 호단의 눈에 청운이 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넌 해 봤어? 청운은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호단은 청운이 제 얼굴을 흘끔거리자 눈을 꿈뻑였다. 이 오라비는 부러 묻는 건가? 호단은 잠시 고민하다가, 어차피 저도 그가 사는 곳을 모르기는 매한가지란 생각에 가만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제 고향 마을엔 머리 하나 껑충 큰 여인을 좋다 하는 사내가 없었다. 물론 호단 쪽에서도 사양하기는 마찬가지였으니, 사랑놀음이 따라붙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청운은 그에 긴 생각 없이 곧바로 말을 붙였다. 남자들 중에서도 키 큰 여자 좋아하는 사람은 많다고. 뒤에 붙은 말은 저 또한 그렇다는 말이었다. 호단은 그에 잠시 눈만 깜빡였다. 이 오라비가 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잠시간의 정적. 청운은 뒤늦게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라며 삐질, 땀을 흘렸다. ㅇ, 왜 그랬지? 방금 자신이 한 말임에도 청운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저 노란 눈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말실수인 양 진심을 흘리는 것 같았다. 호단은 청운의 반응에 부끄러움을 꾹 참고 놀리듯, 오라비가 키 큰 여인 좋다 하는 것은 또 몰랐다며 장난스레 웃었다. 청운은 다시 그에 쩔쩔매며 눈을 돌렸고, 그저 취향이라며 우물거렸다. 일련의 대화 사이에는 잦은 정적과 난감함, 그리고 봄 내음이 스며들어 있었다.
콕. 호단의 손가락이 다시 청운의 옆구리를 찔렀다. 저번엔 강한 사람이 좋다구 하더니, 하며 도로 대화를 끌어왔다. 어쩌다 이리 대화가 흘러왔는가는 몰라도, 호단은 애매한 것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호단은 부끄러움을 꾹 참고 쐐기를 박고자 물었다. 오라비, 또 없어? 좋아하는 사람 특징 말이야. 그리 묻자 청운은 흠칫, 놀라다가도 오래지 않아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웃는 게 귀여운 사람. 그리고 눈이 예쁜 사람. 뒤엣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지만, 호단은 그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해서 저도 모르게 귀 끝을 발갛게 물들여놓고는 입을 열었다. 청운은 호단을 가리키고, 호단은 청운을 가리켰다. 이 즈음이면 아무리 둔해빠진 이라도 알 수 있을 터였다.
이 오라비가 이리 표정이 다양하였나? 호단은 청운과 오간 짤막한 말들 사이에서 몇 번은 바뀐 청운의 표정을 재미나게 바라보았다. 응. 이 오라비면 괜찮을 것 같애. 호단은 구태여 발갛게 달아오르는 귀끝과 뺨을 가리지 않았다. 빼꼼, 눈만 튀어나와 진심이 아닌 적 없다 하였으니, 저 얼굴을 하고 속인 것이라면 기꺼이 받아줄 마음 또한 먹었다. 호단은 우물거리며 잠시 말을 골랐다. 앞에 튀어나온, 저 또한 진심 아닌 적 없다 하는 말은 그저 혼잣말이었지만, 뒤에 따라붙인 말은 소리가 컸다.
“허면 나, 오라비가 나 좋아한다구 알아도 돼?”
겨우 마주 닿은 시선이 발갛게 붉었다. 청운의 얼굴은 이제 숫제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콕 찌르면 정말 그대로 터져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청운은 뱃속이 울렁거리는 감각에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짝사랑 여럿 하였어도 이리 입 밖으로 꺼내놓는 것은 단언컨데 처음이었다.
“좋아해. 호단아.”
허나 처음이라 하여 언제까지 삼킬 수 있을까. 청운은 호단의 뒤를 이어 제 마음을 입 밖으로 뱉어놓았고, 호단은 그에 웃음을 터트렸다. 애살스럽게 뺨을 콕 찌르는 손은 거친 동시에 보드라웠다. 두 낯이 나란히 붉었다. 코끝에 닿는 바람은 꽃 피는 시절 다 지났음에도 달았다. 조금 서투르고 바보같다 해도 어쩌겠는가. 나도 그렇고, 이 이도 그렇고. 사랑 앞에 얼간이처럼 굴지 않을 수 있는 이들은 많지 않을 터였다. 호단은, 청운은 그렇게 서투른 발을 내딛기로 하였다. 앞으로 어찌 되는가는 차후 생각해도 늦지 않을 거라 믿으며. 역시 밤바람이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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