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너의 메리 해피 크리스마스

언젠가의 유키 생일 이야기. 유키모모 전제이지만 모모 분량적음.

나나계 by 휘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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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이브가 찾아왔다. 스케줄은 올해 역시 빠듯했지만, 연말이 되자 모모와 함께 지내는 오프가 모자라 점점 기운을 잃어가는 유키를 보고 오카링과 모모, 두 사람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유키의 생일인 12월 24일, 이브 날에는 가급적 스케줄을 빼고 생일을 즐길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그래도 중요한 녹화가 있었기에 완전히 오프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아침에 있는 스케줄을 어떻게든 처리하고 나면 하루 종일 비어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었다. 지금 막 끝나는 촬영 정리가 얼추 끝나면 이제 두 사람만의 시간만이 남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침 일찍의 일정이었으니 유키가 낮잠에 들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유키 씨, 오늘 생일이시죠? 축하드려요. 아까 이 뒤에 스케줄 없다고 하셨으니 푹 쉬세요.”

“고마워. 모모랑 같이 놀기로 했어.”

스텝들에게 인사를 하고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앞서 미리 나와 있었던 매니저, 오카링이 차를 대기시켜두고 있었다. 보통 아이돌이 움직이는 데에 매니저가 따라붙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날까지 운전 심부름을 시키다니 조금 미안한 감도 있고. 일이 연인이라고 하면서 Re:vale의 선전이 자신의 최고 주요 업무라고 이야기하는 귀여운 동안의 매니저에게는 두 사람 모두 약해서, 일이 한가해지면 몰래 서프라이즈 이벤트라도 해주자고 쑥덕거리기도 했다.

“텐 군한테 축하 래빗챗 와 있어. 귀엽네.”

“은근히 진지하게 축하해준단 말이지, 텐은?”

“아, 다른 애들한테도 있다.”

“역시 좋은 후배들이네! 나 때도 다들 개인으로도 축하 메시지 줬고 말야.”

“새삼스럽지만 다시 한 번 축하드려요. 오늘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음… 유키네 집에서 간단한 축하 파티? 유키 생일이니까, 유키가 원하는 방향으로 하기로 했어!”

“그렇네. 그래도 바빠서 냉장고 채워 넣을 시간 없었으니까 장도 봐야 하지만.”

그럼 마트 근처에 세워 드릴게요, 피곤하지도 않은지 운전석에 앉은 매니저는 경쾌한 소리를 냈다. 아이돌이 쉰다고 해도 사무소의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건 아니라 투정을 부릴 법도 하지만 혹독한 스케줄 뒤에는 휴식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유능한 매니저는 두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기념일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한시름 놓았다. 무엇보다도 연말에는 시간이 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탓인지, 12월 초부터 물 먹은 솜처럼 축축 쳐져 있던 유키가 소식을 듣고서는 그 날엔 뭘 할까, 하고 방방 뛰며 기뻐했으니 두말할 것 없었다. 방방 뛰었다는 건 당연히 과장이기는 하지만, 유키를 잘 아는 사람들의 눈에는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하고 한 번쯤 묻고 넘어갈 만큼 눈에 띄기는 했으니 그렇게 큰 차이는 없지 않을까.

무엇을 기대했던 간에 결국 체력적으로도, 유키 본인의 의지적으로도 걸리는 부분이 많아 평범한 축하 파티를 보내기로 했지만.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우니 오늘 저녁 모모의 식탁에는 유키 셰프의 특제 와규 스테이크가 올라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심심한 귀갓길을 메우기 위해 틀어두었던 라디오에서는 두 사람의 캐럴이 흘러나오고, 거리에서는 반짝거리는 조명이 내일의 크리스마스를 밝히고 있었다. 유키는 태어난 날까지 어쩜 이렇게 로맨틱….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는 모모는 12월 내내 했던 생각에 한 줄을 더 긋고 있었다.

“도착했어요. 이쯤이면 되나요?”

“…아, 응! 고마워 오카링, 메리 크리스마스 이브!”

“유키 군도, 모모 군도 메리 크리스마스 이브예요.”

“고마워. 조심해서 들어가.”

매니저의 도착 알림에 후배들에게 열심히 꾹꾹 답장을 하고 있었던 유키도, 거리의 모습과 차창에 비친 유키의 얼굴에 넋을 놓고 있었던 모모도 정신을 차리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차의 문이 열리자 모모의 콧잔등에 차가운 눈송이 하나가 내려앉았다. 깜빡깜빡. 차 문을 닫은 후에 위를 올려다보고 나서야 그게 눈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하늘에 손을 뻗는 모습이 유키의 눈에는 그저 예쁘게만 보였다. 두꺼운 옷에 털모자에 중무장을 하고 있는데도, 혹은 그래서인지 더더욱 내리는 눈과 잘 어울렸다.

“눈이다~….”

“기뻐 보이네.”

“예쁘잖아. 유키랑도 잘 어울리고.”

모모한테도 잘 어울리는데. 부끄러운 소리를 하기에는 눈 내리는 날씨는 너무 추워서 “그래?” 하고 짧게 대답했다. 매년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바라는 모모의 소원대로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도쿄에도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일 모양이었다. 외투 주머니 안에 손을 집어넣은 유키에게 꼭 붙어서는 손이 시리다면서 같이 손을 집어넣은 모모의 손은 유키의 손보다 훨씬 따뜻했다. 에헤헤, 하고 웃는 모습이 퍽 사랑스러워 이제는 좀 괜찮으냐고, 능청스럽게 물었다.

동네 마트에는 그럭저럭 사람이 많았다. 아무래도 성탄절에는 모쪼록 챙길 수 있을 만큼은 챙기는 분위기다보니 다들 장식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평소에는 그렇게 사람이 많지 않은 고급 식재 쪽에도 꽤 인파가 보였다. 마트 안에서 성인 남성 두 명이 손을 잡고 있으면 구경거리가 될 법 하니 어느 정도의 거리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카트를 밀고 입으로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모모는 정말 스물다섯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어 이쪽이 보호자가 된 것 같다고 유키는 생각했다. 평소에는 다 먹지도 못하면서 과하게 이것저것 담으니까 정말로 보호자 노릇을 하게 되지만, 오늘 담은 것들은 최대한 오늘 다 요리하고 싶으니까. 크리스마스 파티도, 생일 파티 역시 원래 평소보다 조금 더 욕심을 부리는 날이기도 하고.

“앗, 모모링 크리스마스 에디션!”

“새로운 맛이야?”

“아니, 포장만 바뀐 거. 기념으로 유리병에 담긴 건데, 일단 시험 삼아 다섯 개쯤 사 볼까~.”

“분리수거가 힘들겠네.”

“이런 특전은 보관하는 맛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다섯 개는 좀 힘들겠지만.”

그런가? 그럼 세 개만 사고 다른 건 페트병으로 사야지. 아무튼 세 개는 보관하겠다는 말에 모모네 집의 잡동사니가 올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얼마나 늘어날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몇 개쯤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모모가 음료수를 고르는 와중에 그런 생각을 하며 유키는 캔 옥수수를 두 개 카트에 집어넣었다. 이런 날에는 역시 술이지. 식사용의 재료 외에도 안주를 만들 것들을 몇 개 담고 나서야 나름대로 뿌듯하게 계산대에 설 수 있었다.

조금 돌아가야 하기는 하지만 유키네 집과 가까운 곳이었고, 손에 들린 짐이 무겁기는 해도 들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두 사람 모두 한 손에 하나씩 장을 본 것을 들었다. 눈이 내릴 만큼 날이 추우니 차가 있었다면 유키에게는 더 좋았겠지만, 오카링이 태워다 준 차를 타고 왔으니 비어 있는 탈것이 준비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추워…. 소리를 애써 억눌러도 3분에 한 번씩은 입 안에서 새어나왔다. “조금만 참아, 유키! 거의 다 왔으니까!” 열심히 외치던 모모가 집 앞의 놀이터를 지나가는 와중에 멈춰 섰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나쳤다가 신경이 쓰인다며 다시 돌아온 거였지만, 어느 쪽이든 추운 와중에 밖에 오래 있고 싶지 않은 오늘의 주역은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왜? …뭐 있어?”

“아니… 뭔가 사람이. 저기, 미끄럼틀 안에 안 보여?”

“이런 날에? 얼어 죽고 싶지 않으면 집에 들어가서 산타나 기다려야 하는 날인데.”

라고는 말하지만, 원통형 미끄럼틀 안에 누워 있는지 엎드려 있는지 모를 작은 발 두 개가 유키의 눈에도 보였다. 확실히 유키의 말마따나 날이 추워 놀이터 근방에는 어린이는커녕 대기하는 산타 할아버지나 루돌프 한 마리 보이지 않아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하기에는 적막했다. 눈이 꽤 쌓이면 껴입고 나올 법도 하지만 지금은 막 내리기 시작한 참이고, 게다가 오전이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미끄럼틀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무언가라니, 충분히 “시체인가…?” 같은 소리가 나오기에 충분했다.

“너무 흉흉한 소리 하지 말고… 좋은 날이잖아?”

“농담이야. 그래도 계속 놔두면 정말로 기정사실이 되어버릴지도. 저기 신발만 있는 거라면 모를까.”

“…그건 안 돼! 일단 보고 올게. 혹시 모르니까 유키는 여기 가만히 있어!”

혹시 모를 건 또 뭐야, 하고 중얼대면서도 유키는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실제로 죽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움직여서 놀이터 안의 무언가를 확인하기에는 너무 추웠기도 했다. 한 손에는 무거운 짐을 들고 있었다는 변명은 모모 역시 똑같아서 통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모모는 정이 많으니까. 어린 아이로 보이는데 적당히 깨워서 집에 보내는 편이 낫겠지.

모모는 한 손에 고기와 유리병 모모링이 잔뜩 든 봉투를 들고서도 무거운 기색 하나 없이 놀이터 안쪽으로 향했다. 평소에는 들어올 일이 별로 없기도 했지만 바스락거리는 모래장의 소리는 평소와 달리 조금 색다른 기분이 들게 했다. 어릴 적에는 자주 놀았는데 말이야. 성탄절 이브 날이기 때문인 건지 누워 있는 아이에 대한 걱정과 딴생각이 함께 들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가느다란 다리와 작은 신발이 더 도드라지게 보여 걱정의 크기가 늘어갔지만, 그래도 이쪽 역시 심각한 문제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순순하게 말을 걸었다.

“저기, 얘. 춥지 않아?”

모래가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서 땅 위에 봉투를 올려놓고서는 가까이 다가갔다. 어린애다…. 갈 곳 없는 아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옷차림이 꽤나 단정했다. 그래도 작은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모습에 괜찮은 건가, 하고 한시름 놓기는 했지만 친근한 모모의 물음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건드려 봐도 되나? 미끄럼틀 밖에서는 표정이 보이지 않아 잠들어 있는지, 아니면 그냥 대답을 하지 않는 건지 알기 어려웠다. 그래도 이런 날씨에 밖에서 노숙하면 어린애가 아니라 성인이어도 위험하니까. 쪼그려 앉아서 “이런 곳에서 자면 감기 걸려?” 툭툭 건드리니 안쪽에서 으응…. 잠에서 깨어나기 싫어하는 어린아이의 소리가 들렸다. 아침마다 유키한테서 비슷한 소리를 듣고 있으니 바로 알 수 있었다. 곤란하네. 추워 보이기도 하고, 잠을 깨울 목적으로 양 손으로 드러나 있는 발목을 감쌌다. 힉, 하는 소리가 들리며 미끄럼틀 안쪽에서 머리를 쿵,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살아 있어?”

“당연하지! 으아… 아프겠다. 괜찮아?”

가만히 기다리기에도 좀이 쑤셨는지 낑낑 봉투를 들고 유키가 놀이터 안쪽으로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발목을 잡았던 모모 역시 손을 떼기는 했지만 닿았던 차가운 피부의 감촉이 영 지워지지를 않아 역시 깨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얌전히 아이가 나올 수 있도록 입구 옆으로 자리를 비켜주고서는 안에서 아이가 나오기를 기다렸지만 부딪힌 이마가 아픈지 낑낑대는 소리와 함께 몸을 쪼그렸다. 설마 다친 건 아니겠지, 걱정이 되면서도 아이의 다리를 잡아당겨 밖으로 빼내기에는 이 상황에서 모르는 어른의 접촉은 너무 수상했으니 섣불리 만질 수는 없었다.

“집에 안 들어가? 부모님이 걱정하실 텐데.”

“…그런 거 안 해.”

미끄럼틀 안에서 쪼그리고 있던 소년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입김을 내뱉으며 유키가 던진 한 마디에 의해서였다. 옆에서 조잘조잘 떠들고 있어도 수상한 사람을 경계했던 것인지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던 아이는 그제야 의문의 침략자들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미끄럼틀 밖으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왔다. “분명히 걱정하실 텐데….” 하고 중얼거리려던 모모의 말문이 막힌 것은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 아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이었다. 에, 뭐야. 미소년…. …에?

“유키…….”

“왜?”

“아니, 이 애… 유키…?”

“그럴 리가 없잖아.”

“그야 그렇겠지~ 그래도 닮았네. 조금 의심을….”

“…이상한 생각 하지 말아줄래? 생각보다 정순하거든.”

그런 말을 하니까 더더욱 의심이 가는 거 아니야? 의문 섞인 눈초리가 유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몸은 몰라도 마음은 정순한데? 대꾸하려다가 어린애 앞이라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지만 유키 자신이 보기에도 꽤 닮기는 했다. 아니, 오히려 기억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양친의 금슬에 대해 다시 한 번 의심해 보게 되는 시간을 가졌다. 그야 귀찮아지는 건 싫으니까 피임은 확실하게 했고. 이 정도 크기의 애가 있다면 진즉 알았을 걸. 이제 와서 키워주세요 하는 건 좀 곤란하긴 하겠지만, 어쨌든 짚이는 건 없었다. 그리고 언뜻 초등학생처럼 보이는데 아무리 그래도 10년 전에는….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아이는 아까보다 경계심을 더 키운 것처럼 보였다. 으응, 모르는 어른들이 앞에서 쫑알대고 있으면 그야 겁먹으려나. 그래도 TV나 광고에 자주 나오는데. 이렇게까지 눈에 띄게 꺼리는 아이도 오랜만이라 조금 머쓱하기도 했다.

“…너, 집에 안 가? 이런 곳에서 어린애가 자고 있으면 보통은 걱정하니까.”

“…여기 어디인지 모르겠는데.”

“미아인가. 경찰서 데려다 줘?”

걱정한다는 보통의 사람들에도, 길을 잃은 아이를 경찰에게 데려다주는 친절한 사람에도 속하지 않는 유키였지만 옆에 있는 모모는 달랐다. 모모라면 분명히 지나치는 순간부터 걱정하기 시작해서 저녁쯤에는 “그 애, 무사히 집에 들어갔으려나?” 하고 얘기할 것 같았으니까.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고, 유키 자신의 생일인데다 기껏 오랜만에 독점하게 된 모모의 시간을 허투루 쓰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만큼이나 모모의 마음도 중요했다.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는데 충분히 정순하다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예전이라면 잘못 본 거겠지, 하고 그냥 지나가게 만들었을 텐데.

어쨌든 아이는 미비한 불안감을 표정에 띄우고서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기껏 두꺼운 코트를 입고서는 발목이 드러나는 바지를 입고 있는 게 언밸런스했다. 이 애도 추위 많이 탈 것 같은데. 이상하리만치 느껴지는 기시감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렇다고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과 닮기까지 했으니 모모는 더더욱 지나치기 힘들겠지. 얼른 경찰한테 데려다 주고 집에 들어가고 싶은데 애가 싫어하니. 어린애 주제에 벌써부터 경찰을 멀리하니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아, 하고 입김을 내뱉었다.

“부모님 전화번호는?”

“몰라. 상관없잖아?”

“까칠하네…. 싸우고 나왔나?”

“그래도 이런 날에 길까지 잃었으면 큰일이니까… 알려줄래? 무사히 집에 데려다 줄 테니까. 약속이야.”

“…유괴범?”

상식적인 범위에서 묻는 유키와 상냥한 모모의 회유책 역시 하나도 통하질 않았다. 급기야는 유괴범이냐는 말까지 들어 울며 겨자 먹기로 유명한 아이돌이라고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여준 모모였지만 “Re:vale? 모르는데. 그것보다 그거 뭐야? 이상해.” 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스마트폰도 모르고 TV도 안 보는 어린애라니 상당히 문명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면 유키 역시 어릴 적에는 TV보다는 레코드 판 속에서 살았던 인종이라 그럭저럭 이해는 갔다. 그래도 이 애에 대한 감상은 ‘기껏 집 찾아주려고 하는데 유괴범이라니 너무하지 않아? 그냥 방치해 두는 게 나을지도.’ 정도로 끝나버렸지만 말이다. 모모는 이런 사랑스런 아이를 잃어버리고 걱정하지 않는 부모라니 있을까보냐! 라는 태도여도 세상에는 그런 부모도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러게, 하고 가볍게 넘겼다. 자화자찬 같은 기분이 들어 크게 동의는 안 됐지만.

“그냥 두고 가는 게 낫지 않아? 비협조적인데.”

“걱정 되잖아… 그리고 유키랑 닮았는걸. 이 분위기라던가~…!”

그렇겠지.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아이의 입에서 유키. 곱씹듯 짧게 읊조리는 소리가 났다. 눈이 마주치자 급하게 고개를 돌려버렸지만 확실히 들었는데. …역시 부모님의 숨겨진 아들인가? 호적에 등재되어 있다고 들은 적은 없는 것 같아 의문이 들었다. 눈 아래에 점이 있는 것까지 똑같아서 신경 쓰인다고 해야 하나. 이 성격도 거의 유전이라고 생각하고. 물론 오리카사 본가는 여기에 없으니까 이 근방에서 발견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모모 쪽이 더 연락을 자주 하고 사는 부모님에게 전화를 해 봐야 하나 생각하며 유키는 주머니 속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너무 그러지 말고~. 여기 춥지 않아? 얼른 돌아가야지. 이름은? 나는 모모라고 하는데.”

“모르는 사람한테 함부로 이름 알려주면 안 돼, 모모.”

무슨 소리 하는 거람. 모모는 못 들은 척 무시하며 아이에게 열심히 치대기 시작했다. 앨범에서 보았던 유키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어 신경이 쓰이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고, 정말로 어릴 때의 모습이 이랬을까 싶을 정도로 똑같으니까. 추위를 많이 타서 당장이라도 실내에 들어가고 싶은데 괜히 오기를 부리는 모습도 그렇고. 코트 안으로 머리가 파고드는 모습을 보면 금방이라도 추위에 꺾일 것 같아 코코아 한 잔이라도 손에 들려 집에 보내고 싶기도 했다. 이 정도로, 게다가 눈물 점의 위치까지 유키와 똑 닮았으니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지만 오히려 이만큼 닮았으면 아들이라기보다는 본인 아냐? 하고 웃어넘기게 되는 마음도 있었다.

“이 주변에 카페 있으니까 뭐 마실 거라도… 음… 그래도 같이 들어가면 괜한 의심 사려나.”

“오카링한테 혼날지도. 오프 만들어 줬더니 사고 쳤다고 말야.”

“그래도 여기 두고 갈 순 없잖아. 미아인걸? 아, 그래서 이름은?”

아이의 얼굴에서는 처음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고 말했을 때의 불안했던 기색이 옅어져 있었다. 눈앞의 시끄러운 어른 둘이 사람 경계를 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만담 콤비였던 것도 그렇지만, 언뜻 보기에도 자신과 닮아 보이는 기분 나쁜 장발의 남자와 머리를 물들이고선 피어스까지 착용한 시끄러운 남자가 그렇게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사유로 모르는 어른에 대한 경계를 느슨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상관없을지도. 재차 재촉하는 말에 작은 소년은 부러 ‘귀찮은데 시끄럽게 구니까 어쩔 수 없이 말해주는’ 티를 내며 제 이름을 대답했다.

“…오리카사 유키토.”

자신을 오리카사 유키토라고 자칭하는 소년은, 그 말에 “헤?” 라던가, “에….” 같은 반응이 나오자 “…뭐야, 불만 있어?” 하고 몸을 웅크려 제 발목을 감쌌다. 손끝도 차갑게 얼어 있어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몸을 구부리니 추위를 막는 것에는 그나마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역시 안에 들여보내고 싶은데. 그 몸짓을 알아챈 모모는 한 발짝 움직여 바람이 불어오는 자리에 섰다. 비록 소년 유키토는 쓸데없는 참견이라는 듯 별 대꾸 없이 제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나 아들 없는 거 맞는데.”

“내 아빠도 이렇게 안 생겼는데.”

“당연히 그렇겠지.”

오해라고 다시금 지적하듯 모모에게 거봐, 하고 두꺼운 옷 안에 팔짱을 꼈다. 정작 모모는 으음…? 하고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결심한 듯 제 겉옷의 지퍼를 주우욱 내렸다. 이렇게 추운데 제정신인가? 하는 기색이 명백한 눈으로 바라보는 두 은발 남자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고서도 아랑곳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물론 안에도 두꺼운 옷을 입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 한 장으로 버틸 날씨는 아닌데. 뭐 하는 거야? 묻는 유키의 말에 추워 보이잖아. 짧게 대답한 후 제 옷을 유키토의 어깨 위에 걸쳐 주었다. 아이는 코트 위로 갑자기 닿아오는 따뜻한 체온에 잠깐 놀란 것처럼 모모를 올려다보았다.

“자자, 감기 걸리니까 일단 들어가자! 따뜻한 코코아라도 한 잔 타 줄 테니까. 집 바로 이 근방이거든. 저기, 저─기. 들어가서 몸 녹이고 있으면 집 찾아가는 거 도와줄게.”

저─기라고 하지만 모모가 가리킨 곳은 아파트 단지 안의 가까운 집이었다. 안에 기모가 붙은 후드를 입고 있긴 했어도 넉넉한 옷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이 매서워 자연스럽게 몸을 살짝 움츠렸다. 멍하니 앉아 있던 아이와 “저기 내 집이지만 말이지.” 하고 덧붙이는 유키를 뒤로하고 내려두었던 봉투를 들어 먼저 한 발을 내딛었다. 먼저 가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걸. 일단 얇아진 옷차림의 모모가 걱정이 되는 건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았느냐고 투덜대는 유키 역시 모모의 뒤를 따라 발을 움직였다. 따뜻한 외투까지 받아버린 아이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코코아 안 좋아한다고 중얼대면서 뒤늦게 따라간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엘리베이터 안까지 들어가는 길에 유키토는 주변을 꽤 두리번거렸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신기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터치 패드를 눌러야 들어갈 수 있는 아파트라던가, 한 눈에 봐도 세련되어 보이는 주변 구조. 부자인 것 같아 보이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이런 최신식 보안 장치가 설치되어 있는 주거 시설이라니 아이에게는 별세계처럼 느껴졌다. 여기는 정말로 집과는 멀리 떨어져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잠깐 주눅이 들었지만, 어차피 오늘은 집에 돌아가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으니까. 해코지를 당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하루 정도는 체류하고 있어도 되는 거다. 이어졌던 매서운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외투의 따뜻함에 마음을 놓다 못해 유키네 아파트 현관에 두고 온 것 같았다. 조용한 소리를 내며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도 따듯한 바람이 나왔다. 마음이 풀어지다 못해 살살 녹아내렸다.

“그 이름, 본명이야?”

“여기 일본이잖아?”

“그렇지….”

현관문을 열기 직전에 옆을 슬쩍 돌아본 유키가 내뱉은 질문에 유키토는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거냐고 반문했다. 당연히 내 이름인데? 같은 태도에 어쩐지 찝찝한 기분으로 도어락의 문손잡이를 돌렸다. 미묘한 표정인 것은 옆에서 이 얘기를 듣고 있었던 모모 역시 마찬가지였어서, 조금 서늘하지만 복도보다는 따뜻한 축에 속하는 집 안으로 세 사람은 함께 발을 옮겼다.

…이 아저씨들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지. 유키토는 현관을 지나면서 새삼스럽게 두 사람이 들으면 어처구니가 없을 생각을 했다.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어린 유키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다지 아무 일도 없었지만. 모모는 제집마냥 벽에 붙어있는 난방 기구를 틀어두었다. 아무래도 겉옷을 벗고 있으니 추웠던 모양인지 그제야 양 팔을 감싸고 얕게 바르르 떨었다. 그렇게 추우면 굳이 안 벗어줘도 되는데. 아직 몸이 데워지지 않아 모모가 준 외투를 부여잡고 있는 손은 머리의 말을 듣지 않았지만. 현관 가까이에서 쭈뼛거리고 있다가 거기 앉아 있어. 하고 소파를 가리키는 소리에 터벅터벅 거실까지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추워…. 모모는 코코아?”

“금방 따뜻해질 테니까~. 난 유키가 주는 거면 뭐든 좋아! 음… 달고 따뜻하게?”

자신이 주는 거라면 뭐든 좋다고 얘기하면서 코코아 농도를 리퀘스트 하고 있는 모모를 보고 유키는 픽 웃었다. 저 애 코코아 별로라고 했던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날이 날이기 때문인지 ‘설마….’ 하는 생각도 ‘설마…?’ 하고 바뀌었다. 왜 하필이면 오늘인 건지. 간만에 모모를 잔뜩 보충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랑 똑 닮은 애가 튀어나와서는. 게다가 이름까지 똑같고. 뭐 그렇겠지.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그런 판타지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는 거지. 내 생일이지만.

“손 차갑네! 따뜻한 물에 씻고 오자. 코코아 마실 거잖아?”

“안 마신대도….”

모모가 유키토의 손을 살짝 쥐면서 말했다. 갑자기 손잡지 말라는 듯 표정을 찌푸리면서도 따뜻한 체온이 그리 싫지만은 않은지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러고서는 대강 욕실이 있는 곳을 분간하고서는 쫑쫑 걸어가는 것이 일단 따뜻한 것이면 뭐든 손에 쥐여 주기만 하면 꼭 쥐고 있을 것 같았다. 흐뭇하게 웃으면서 유키토의 등에 손을 붕붕 흔들던 모모가 욕실의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주방으로 잽싸게 들어왔다.

“…유키, 정말 저 애 몰라?”

“이번에는 또 무슨 의심이야? …음, …몰라.”

모모가 오히려 더 수상해 보이는 몸짓으로 다가와서는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한참 따뜻한 물에 손을 녹였다 나올 것 같은데 괜히 조심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쿵짝이 잘 맞는 사이인 만큼 귀를 기울여 듣고서는 대답했다. 유키의 수상쩍은 대답에도 별로 추궁할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다가 “그치마안….” 하고 소리를 내서, 대충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법 했지만 이쪽도 명쾌한 답을 내려줄 수 있는 상태는 아니어서 그냥 후후, 하고 웃었다.

“어렸을 때 자신이 어땠는지 보통은 기억 못하잖아.”

“역시 닮았다고 생각하지? 앨범에서 본 거랑 똑같은데… 벗겨서 확인해 볼 수도 없잖아.”

벗겨서, 라니. 순간 뾰로통한 표정이 스쳐지나갈 뻔 했지만 유키의 머릿속에서 요저번에 모모가 얼굴을 붉히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엉덩이 쪽을 뚫어져라 보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파드득 놀라면서 대답했던 얘기. 있잖아, 사실은 말야. 유키는 꼬리뼈 위쪽에 점이 있는데, 그게 또 엄청 섹시해서…. 하우우, 소리를 내며 양 뺨을 감싸 쥐었다. 어린애를 벗겨서 뭐하려고, 같은 생각이 쓸데없이 들었지만 휘휘 치워버리고서는 대충 대답했다.

“…뭐, 확인한다고 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것도 그렇지만! 일단 집에 데려다줘야 하는 거 아냐?”

“그 생각대로라면 집에는 아무도 없겠지만.”

“역시 키우는 편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 같은 표정이지만 아무래도 농담이겠지. 너무 닮았다고 해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것도 충분히 망상벽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성격까지 본인 판박이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유키는 말없이 데운 우유에 코코아 가루를 타기 시작했다. 욕실 안에서는 세면대에 물을 받아두고 찰박거리기라도 하는 모양인지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오기까지는 조금 걸릴 것 같았다. 처음에는 물속에 들어가기 싫다고 버티고 있다가 한번 노곤해지면 나오기 싫어지는 게 인간의 심리라고 해야 하나…. 휘휘 스푼을 저으니 단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코코아는 즐겨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연하게 타 마시면 먹을 만하고, 모모랑 같은 거 마시는 기분이 들어서 좋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쪽 이름은 말 안하는 게 좋을지도. 저쪽도 별로 안 궁금해 할 것 같고.”

그 왜, 도플갱어를 만나면 죽는다고들 하잖아. 유키가 농담으로 던진 소리에 모모가 아직 닫혀 있는 욕실 문과 유키를 번갈아서 쳐다보았다. 농담으로 한 얘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너무한데. 정말 너무한 소리를 한 게 누구인지, 괘씸하게도 그런 생각을 하며 나머지 머그컵에도 코코아 가루를 넣었다.

“말로만 들어도 무서우니까 그런 얘기 하지 마! …앗, 나온다. 유키 쉿!”

“…….”

생일인데 내 취급 조잡해. 투정조차 입막음 당했다.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안에서 뽀송뽀송하게 손을 닦고 나온 유키토가 나왔다. 부엌 쪽의 두 사람에게서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어 뭐야, 하고 올려다보는 시선을 보냈다. 자신의 두 배 정도는 되어 보이는 어른 둘이서 쳐다보고 있으니 신경 쓰이지 않는 편이 더 이상하지만.

“자~ 여기 코코아! 유키토 군의 컵은 이쪽입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모모가 글자가 새겨진 하얀 머그컵을 들었다. 주방 테이블 위에 남겨진 두 개의 컵은 당연스럽게도 유키와 모모의 커플 잔이라 남겨진 사람과 코코아는 조금 뿌듯한 기색을 띄었다. 유키토의 손에 따끈하게 데워진 잔을 들려주자 “코코아….” 하는 볼멘소리가 들렸지만 유키의 입에 맞는다면 아이의 입에도 어느 정도 맞으리라. 그래도 따뜻하게 데워진 우유라는 점에서 크게 불만은 없는지 양 손으로 머그컵을 쥐고서는 소파 위에 앉았다. 모모도 본인 몫의 컵을 들고서는 옆에 앉았다. 내 생일은? 지켜보고 있던 유키의 심기가 나빠지고 있기는 했지만, 모모로서는 연인의 어린 시절 판박이인데다 이름까지 같은 소년이라니 친근하게 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초롱초롱한 눈의 모모와는 별개로 자연스럽게 남는 자리에 앉게 된 어른은 어째 오늘 하루 일정이 꼬여가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는 모양인지 점점 자세가 삐딱해졌다.

“코코아 다 마시면 돌려보낼 거야?”

유치하게 애 앞에서 이런 소릴 하기까지. 막 유키가 타준 코코아를 입에 대고서는 맛있다~ 하고 감탄사를 내뱉으려던 참이었던 모모가 옆으로 획 돌아 유키 쪽을 쳐다봤다. 유키토 쪽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저 장발은 내가 마음에 안 드나봐. 이쪽 짧은 머리는 왜 이렇게 친근하게 굴지? 역시 수상한 사람인가? 정도의 사고를 따뜻한 코코아와 함께 녹여내고 있었다. 어쨌든 따뜻하니까 됐어.

“이런 추운 날에 내쫓을 순 없잖아? 집도 모른다고 했고.”

“미아 돌보기가 아이돌의 소관은 아니잖아? 경찰에 맡겨.”

아까는 아이의 의사를 존중해주려고 했던 유키였지만, 아이가 자신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고 난 참이기 때문인지 영 툭툭 던지는 소리밖에 나가지 않았다. 아이의 외형 때문에 순식간에 정을 주고 있었던 모모는 어쩜 그런 냉혈한 같은 소릴! 같은 표정으로 잠깐 유키를 쳐다봤다가 유키가 자신을 신경 써 주지 않아 삐친 것을 눈치 챘는지 비위를 맞추려고 표정을 풀고서는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방금 막 들어왔으니까 조금만 더 있게 해주면 안 될까? 들어왔다 나갔다 하면 감기 걸릴 테고. …나는 유키토 군이 감기 걸리는 건 싫은데.”

의식하지 않아도 ‘유키토 군’에 강세가 들어가 있다는 것은 유키 역시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그 부분에서 잠깐 간질거림을 느꼈다가 “나보다 나랑 닮은 꼬맹이가 감기 안 걸리는 게 중요해?” 심사 꼬인 뾰로통한 소리가 나갈 뻔 했다. 오리카사 유키토가 얼어 죽으면 이쪽도 곤란하다는 걸 깨닫고 코코아를 마셨지만. …모모랑 하루 종일 같이 있는 날을 이렇게 망치는 거 싫은데. 잠정적으로 어린 시절의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귀찮게만 느껴졌다. 아니, 오히려 자기 자신이면 스스로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방해꾼이잖아, 이거. 코코아도 영 텁텁하게만 느껴졌다. 이 짧은 머리가 자신이 내쫓기지 않게 도와줄 거라는 걸 어떻게든 눈치 채고서 느긋하게 코코아를 홀짝이고 있는 유키토와는 정 반대였다. 이 정도면 마셔줄 만하네….

유키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모모는 “고마워, 유키.” 하고 헤헤 웃었다. 딱히 허락한 건 아니지만 모모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내쫓을 수도 없고. 옆을 봤다가 타이밍 나쁘게도 자신을 쳐다보던 꼬마 유키토랑 눈이 마주쳤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시선이 살짝 가증스러웠다. 어린애 상대로 열 내는 쫌생이가 되고 싶지는 않지만 ‘오리카사 유키토’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했다. 모모도 그래서 더 마음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어느 정도 참작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머릿속으로 지금 생각하는 거 다 읊을 수 있을 것 같은 표정이고. 코코아 맛있다. 라고 쓰여 있잖아. 아무리 봐도 심기 불편해 보이는 유키의 귓가에 옆에는 들리지 않도록 모모가 속삭였다. 밤에는 제대로 축하해 줄 테니까! …응?

어느 쪽 밤 말하는 거지? 어느 쪽이 되었든 아쉽지만 납득 가능한 말이었으므로 유키는 미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마스도 어쨌든 스케줄이 빡빡한 건 오후부터고. 그리고 보통 이런 사고는 하루 안에 끝나는 게 보편적인 흐름이었으니 그런 드라마적 허용을 기대하면서 애보기를 하는 수밖에. …그것보다 본인이라면 그냥 노래나 틀어주고 놀게 하면 되는거 아닌가? 글러먹은 유키의 머릿속과는 달리 모모는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저기, 유키토 군은 크리스마스에 뭐 해? 집에 안 들어가면 부모님이 걱정하시지 않을까?”

“우리 집은 그런 거 안 챙겨.”

“그렇…구나! 부모님 집에 잘 안 계셔? 나라면 걱정돼서 품에 끼고 살 텐데.”

모모는 농담인 것처럼 가볍게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얘기를 꺼냈다. 물론 유키의 양친 두 사람이 마냥 무뚝뚝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모모지만, 그래도 이렇게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어떻게 방치하다시피 놔둘 수 있는 건지. 아이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유키와 사귀고 있고, 아마도 인생에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예쁜 아이를 데리고 산다면 언제나 조마조마하지 않을까? 다 큰 예쁜 성인 남자랑 같이 있는 것도 언제나 조마조마한데. 사람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해도 좀처럼 납득이 가지는 않았다. 유키…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이 아이의 부모님도 방치형인 거겠지.

그런 모모와는 달리 얘기를 듣고 있던 유키는 시종일관 그렇겠지, 하는 표정이었다. 부모님을 제치고서도 일단 본인부터가 원래는 그런 데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인간관계라는 것이 생기고 나서야 기념일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지만 이전까지는 그럴 기미조차 없었다. 생일은 잊지 않기는 했지만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에게서 성대하게 축하를 받는다느니 하는 일도 없었으니까.

“바빠. …그리고 별로 상관없어.”

유키토는 퉁명스럽게 아무래도 좋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랬던가. 어린아이 치고는 나이에 맞지 않는 대답이라고 생각하지만 확실히 어느 순간부터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어느 정도 곤란한 기색을 띈 모모가 아이를 어르는 듯이 말했다.

“그래도, 집에 혼자 있으면 외롭잖아.”

확실히. 평소라면 그렇게 입 밖으로 꺼낼 뻔 했지만 유키의 눈앞에 있는 것이 자신과 닮은 어린 아이라는 사실에 더 말수가 적어졌다. 정작 그때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주제에 그런 말을 하면 어린 시절의 자신의 감정을 대변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는 거 외로워. 혼자 있는 게 편하다고 허세를 부리던 시절의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옆에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 있을 때의 안정감과 따뜻함 같은 것이 지금은 훨씬 더 소중했다. 대략 미성년에 생각했던 것 보다 유키 자신은 외로움을 많이 탔고, 꽤나 어리광쟁이였으며 모모를 많이 좋아했다. 유키토는 대답을 바라지 않는 듯 한 모모의 말에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또 굳이 “그렇지 않아.” 라고 이야기하기에도 뭐해 “별로….” 하고 말끝을 흐렸다.

“늦어지기 전에는 돌아가는 게 좋으니까, 말하고 싶어지면 얘기해 줘. 이래봬도 면허 있으니까, 집까지 데려다 줄 수 있어.”

모모의 말은 아이가 직접 말하기 전까지는 여기에 있어도 된다는 얘기와도 비슷했다. 아이의 언동에서 어떻게든 지금은 별로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하는 기색이 잔뜩 느껴졌기 때문이다. 유키가 마뜩찮아 하는 것을 눈치 채고 있기는 하지만 내버려 둘 수 없는 것은 여전했다. 유키도 자신의 생일에 “제 이름은 스노하라 모모세예요.” 하는 검은 머리의 아이를 만나면 쉽사리 내버려 둘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걸로는 이해해주기 힘드려나? 아직 점심도 한참 남은 오전이었고, 아이의 일을 어떻게든 해결하면 유키의 생일도 무사히 보낼 수 있겠지. 물론 오늘을 기다렸던 건 유키만이 아니었으니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아이가 있다고 해서 유키의 생일을 축하해 줄 수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오후에 여는 주변 케이크 가게에서 생일 파티용 케이크를 골라오기 전에 유키랑 같이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그것도 아이의 등장으로 어느 정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시작하는 게 좋으려나? 그것보다 이 애 정말 유키면 어떡하지?

“저기, 유키토 군. 지금 몇 살이야?”

“…엑.”

갑작스런 유키의 물음에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던 모모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무슨 문제 있느냐고 물어보는 듯 한 유키의 시선에 가볍게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지만 아무래도 유키의 입에서 나오는 ‘유키토 군’ 언급은 기분이 이상했다. 의식하지 않아서 그냥 별 생각 없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유키의 앞에서 유키의 이름을 부른 거구나…. 하고 괜한 곳에 신경이 팔려 낯부끄러워졌다. 그, 그러고 보니 유키토 군이 감기 걸리는 거 싫다느니 뭐니 유키한테 떠들어댔지…. 갑작스레 혼자서의 세계에 들어가 부끄러움을 타고 있는 모모를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본 유키토는 지금 이 아저씨가 대체 나이 같은 건 왜 궁금해 하나 불쾌했으나 따뜻한 음료까지 얻어마셨으니 신상정보 정도는 내줘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짧게 대답했다. 문제는 그런 태도가 유키에게는 뻔히 보인다는 점이었지만.

“여덟 살.”

뭐야, 어리잖아. 워낙 발육이 빠른 계열에 속했으니 알아보기 힘든 건 맞지만 명백히 자신의 어린 시절과 똑같이 생겼는데도 구분하지 못했다는 게 신기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쯤 뭐 하고 있었더라? 학교는 다녔겠지만. 가방 안 메고 있었던 걸 보면 무단결석인건가. 이 녀석 어린데 글렀네. 하고 과거의 자신에 대한 가차 없는 평가를 내렸다. 양 손으로 머그컵을 쥐고 있는 유키토 역시 유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사람들은 왜 나이 같은 걸 궁금해 하는 걸까? 정말 이상해.

“학교는 안 가? 아직 오전인데.”

“수업 재미없어.”

모모의 자연스런 물음에 딱 잘라 대답이 돌아오자 아하하, 소리를 내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듯 한 모모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유키 쪽을 바라보는 게 완전히 ‘유키 이래도 괜찮아!?’ 같은 느낌이었다. 어찌되었든 잘 자라서 이렇게 모모랑 같이 톱 아이돌도 되었는데 크게 문제될 건 없잖아? 그래도 어렸을 적에 그렇게 마음대로 학교를 빠졌던 것 같지는 않은데… 적어도 중학생 때부터…. 같은 생각도 들었다.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지만 별 일 없으면 출석은 했던 기억이 나는데.

“…뭐, 내일부터 잘 가면 되지!”

유키를 앞에 두고 어린 유키토에게 무어라 말하기도, 그렇다고 유키에게 이 애 어떻게 좀 해보라는 말도 할 수 없었던 모모는 고등학교까지는 무사히 졸업한 것으로 알고 있으니 초등학교에서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겠지 싶은 마음으로 냐하하, 웃었다. 그 이후로 제일 좋아하는 수업 뭐야? 음악 시간 재미없어? 같은 질문이 이어졌으나 체육이 제일 재미없고 음악 시간도 다 아는 것들이라 재미없다는 예상 범주 내의 대답들만 돌아왔다. 맹랑한 꼬맹이. 어린 오리카사 유키토 주제에 모모의 말에 퉁명스런 대답만 하는 게 맘에 들지 않았으나 모모의 앞에서 딱밤을 날릴 수도 없었다.

“그나저나 유키토 군도 오늘 생일이거나 그래?”

갑작스런 적막 속에서 꿀꺽, 코코아를 마시는 소리가 나더니 쿨럭쿨럭 기침 소리가 들렸다. 마시는 와중에 모모의 말에 놀라 사레가 든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흘리지는 않았지만 도통 멈추질 않아 모모가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었다. 지켜보던 쪽은 역시…?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영 반대쪽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손도 대지 못하고 몸만 앞으로 쭉 내밀어서 유키토를 보고 있었다. 곧이어 짧은 대답이 들렸다. 어, 콜록. …떻게… 콜록. 어떻게 알았느냐는 대답에 모모는 설마 맞아서 놀란 건 줄은 몰랐다는 듯 당황해서 손사래를 쳤다.

“여기 있는 유키도 오늘 생일이거든, 그래서 혹시나 해서! 두 사람 닮았으니까….”

저… 정말…? 진짜야? 아이를 다루는 게 능숙한 모모답지 않게 자꾸 헛소리가 나왔다. 그치만 앞에 있는 거 아마도 어린 유키고, 유키가 먼저 얘기하지 않으니까 이쪽에서 얘기해도 될지 모르겠고! 생일이면 같이 챙겨주고 싶은데… 생각해보니까 가출했다가 길 잃어버린 모습이었잖아! 일단 진정하라는 듯 등을 쓸어주고는 있었는데 유키토의 경계는 오히려 유키 쪽을 향하는 모양이었다. 이름도 비슷한데다 생일까지 같다고? 정작 말을 꺼낸 사람에게는 눈초리 주지 않은 채로 수상한 어른을 쳐다봤다. 쟤는 왜 나한테만 그래? 역시 본능적 무언가가 있는 건가? 어른스럽게 굴지 않았던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으면서 유키토의 반응에 삐뚜름한 표정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정말 우연이거든.”

유키는 우연이라고는 이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주제에 두 손을 들어 항복하는 표시를 했다. 어린애랑 기싸움 하고 있는 거 맥 빠지고…보다는, 이 라인업이라면 모모가 저쪽 편을 들 것이 명백했기 때문에 나름 얌전하게 있으려는 참이었다. 나보다 저 꼬맹이가 중요해!? 하고 토라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어진 스케줄 때문에 기력도 떨어지고 풀도 죽은 상태였다. 이제 대충 모모랑 같이 있는 프라이베이트적인 시간이면 아무래도 괜찮아….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최근 그런 상태였던 유키를 몰랐던 것은 아닌지라 미안한 마음이 배가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얌전하게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 버린 자신에게 모모는 소소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유키에게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려는 듯 반대편 손으로 팔을 내리고 다시 소파에 힘없이 기댄 유키의 손을 꼭 잡았더니 어리광 부리려는 듯 깍지를 껴왔다. 배시시 웃는 두 사람에 유키토는 무언가 기분 나쁜 기색을 느꼈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유키, 같이 생일 파티 해도 돼?”

“괜찮아. 저 애한테 선물도 줘도 돼.”

“미남인데다 다정하기까지…. …아, 물론 유키 거 준비해 뒀으니까! 이따가 기대해!”

“후후, 물론이지.”

그 기색이 빗나가질 않았는지 이 만담을 듣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 더 구겨지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 중에 부모님이라고 해도 이렇게 닭살 돋는 얘기를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다 큰 성인 남자 둘이서 대체 뭐 하는 건지. 게다가 대체 제 생일 파티를 왜 저 아저씨? 한테 허락을 받는 건지? 누구 맘대로 제 생일을 챙겨주겠다는 건지? 하나도 이해되지가 않았다. 이 이상 달콤한 코코아를 마셨다가는 웩, 하고 뱉어버릴 것 같아서 테이블 위에 머그컵을 올려두었다. 모모가 유키의 손을 꼬옥 잡은 채로 쾌활한 얼굴을 하고 유키토 쪽을 돌아보았다.

“그럼 모처럼이고, 같이 촛불 불자! 이따가 케익 사러 가기로 했거든. …지금 집에 돌아갈 거 아니지? 같이 재밌게 보내자! 모모 쨩, 이래봬도 세레브니까 갖고 싶은 거 있으면 사줄 수 있어!”

“뭐든지?”

“음… 가능한 선에서는 뭐든지? 깜짝 선물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러지는 못하니까, 최대한 유키토 군이 좋아하는 걸로.”

왜 그렇게까지 해주는데? 유키토의 얼굴에 알쏭달쏭한 표정이 떠올랐다. 보통 사람들은 처음 보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서 생일이라고 뭐든 사주겠다고 하지는 않으니까. 자신을 데려와서 뭔갈 하려고 하는 기색도 없고… 애초에 납치한다고 해도 부모님이 크게 걱정을 할까? 정도의 감상밖에 들지 않았다. 유키의 표정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을 보내왔던 모모는 유키토의 표정도 대충 읽을 수 있었다. 뭐, 유키토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고 해도 이 상황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겠지. 그러니까 그건 그냥…. 모모가 유키의 눈치를 보더니 유키토에 귀에 대고 비밀을 이야기하듯 작게 속삭였다.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같이 축하해 주고 싶은 거야.’ 알쏭달쏭한 대답에 유키토가 갸우뚱거리며 모모를 바라보았다. 옆에서 보고 있던 유키는 대체 모모가 무슨 말을 했던 건지 들을 수가 없었으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라고 했는데? 비밀이야! 알려줘. 유키토 군한테 물어봐.

이어지는 문답에 유키와 유키토의 눈이 마주쳤다. 유키는 도리도리, 의아한 채로 고개를 젓는 유키토를 보고선 “내가 코코아도 타줬는데?” 하며 볼멘소리를 냈다.


“너 아무것도 안 먹었지.”

“나 오늘 아침 일찍 나왔어.”

“우와, 유키토 군은 아침 일찍 일어날 줄도 알아?”

평생 말 한 마디 안 하고 지낼 것 같았던 유키와 유키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렇게 안부까지 묻는 사이가 됐다. 그냥 슬슬 점심시간이니 그런 얘기를 한 것뿐이지만 모모의 눈에는 마냥 흐뭇하게만 보였다. 유키토의 입에서 아침 일찍, 이라는 얘기가 나오자 눈이 휘둥그레 뜨여 반사적으로 물었던 모모였으나 당연하게도 유키가 “그거 무슨 의미야?” 하고 되물었다. 설마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하하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유키네 집에 며칠 전에 준비해 두었던 쇼핑백을 가져왔다.

“있지, 유키는 요리도 엄청 잘 하거든. 유키토 군도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만들어 달라고 하자!”

식재는 넉넉하게 사왔으니 아이 한명의 입이 더 더해진다고 모자랄 일은 없었다. 내일은 스케줄이 있지만 유키의 생일에 이어 크리스마스까지 충분히 성대하게 보내고도 남을 양의 고기와 야채가 유키의 손에 냉장고 속으로 들어갔다. 리퀘스트를 종용하는 모모를 보며 주는 대로 먹게 하면 됐지, 하는 생각을 하던 유키가 그 얼굴에 자랑하는 기색이 잔뜩 담겨 있는 걸 눈치 채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하는 거 좋아하니까. 생일이라고는 해도 어차피 자신이 만들 생각이었고.

“…아보카도 덮밥.”

순순히 따라 나오는 대답이 이 애 역시 유키다 싶었다. 모모는 들고 온 쇼핑백을 열어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을 바닥에 하나하나 늘어놓았다. 풍선, 벽에 매달 생일 축하 플랜카드, 케이크 촛불을 불 때 유키가 쓸 고깔모자. 한명이 더 늘었으니 케이크를 사러 갈 때 하나 더 사오는 게 좋겠다. 이미 쇼핑백 안의 내용물을 알고 있었던 유키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점심 식사 준비를 하러 주방으로 향했다. 모모도 다 꾸민 집에 유키를 데려오고 싶었지만 스케줄이 바빴던 건 서로 마찬가지라 어쩔 수 없이 당일에 준비를 하기로 했다. 파티의 꽃인 선물은 유키네 아파트 아래 보관함에 몰래 넣어두었고,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간단하고 제 입맛에 딱인 식사를 요청했던 유키토는 모모가 꺼내는 물건들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꿈지럭 소파 위에서 내려왔다.

“풍선 같이 불어줄래? 너무 많아서 혼자서 불기 힘들 것 같은데.”

“펌프 없어?”

“이, 있어….”

은근슬쩍 같이 파티 준비를 하게 만들려던 생각이었지만 다 들통 난 모양이었다. 쇼핑백 안에서 초록색 손 펌프가 튀어나왔다.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내며 풍선을 꺼낸 모모가 시범을 보이듯 펌프를 움직여 풍선을 부풀렸다. 몇 번이나 움직였다고 벌써 빵빵해져 있는 풍선을 보고 유키토가 옆에서 터질 것 같다면서 구시렁댔다. 그 말에 장난을 치려는 듯 손을 움직이는 모모를 보며 양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찌푸렸다.

“농담이야, 농담. 장난 안칠게. 같이 할래?”

무엇보다 갑자기 풍선 같은 거 터트리면 주방 안의 유키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화들짝 놀랄 테니까. 모모는 그제서야 귀에서 손을 떼어내고 풍선 하나를 집어 드는 유키토에게 푸스스 웃으며 펌프를 건넸다. 풍선 묶는 거 생각보다 어렵단 말이지…. 손재주가 좋은 유키에게 맡기면 순식간이겠지만 이미 요리 중이고. 몇 번이고 헛손질을 하면서 낑낑대는 모모와 달리 유키토는 옆에서 가소롭다는 듯 풍선에 바람을 넣어 슥슥 묶었다. 어렸을 때부터 뭐든 잘했구나 싶어서 흐뭇하기도 해서, 일부러 소리를 높여 아이를 칭찬했다.

“유키토 군 없었으면 오래 걸렸겠다─. 덕분에 살았네!”

“별로 어렵지도 않은걸.”

“잘못하다가는 바람 다 빠져버리니까…. …앗! 아….”

두 번째로 불고 있던 풍선이 모모의 손에서 빠져나가 푸르르르 소리를 내며 거실을 한 바퀴 돌았다. 빵빵하게 채웠더니 저만큼이나 날아가네! 거실에서 들린 괴상한 소리에 슬쩍 밖을 내다보았던 유키와 눈이 마주쳐 멋쩍게 풍선을 집은 모모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모모, 서툴러.”

“펌프로 바람 불어넣는 것처럼 자동으로 풍선 묶어주는 기계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유키토가 이름을 불러준 게 기뻐서 괜히 웃으면서 농담을 했다. 그래도 그 다음부터는 실패하지 않아서 금방 여러 색색의 풍선들이 바닥에 쌓여갔다. 대충 끝내고 나서야 통통 풍선을 가지고 놀고 있으니 주방 안쪽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코코아기는 했지만 우유도 마셨으니 별로 배고프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스케줄이 바쁘기는 했으니까. 잠시 후 어딘가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 자신의 배에서 난 건지 좀 민망한 표정을 지었으나, 옆에서 유키토가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 모모가 아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무슨 재미있는 일 있어? 나만 빼고.”

“아니, 얼른 유키가 만들어 준 밥 먹고 싶다─.”

앞치마 차림의 유키가 웃지 말라면서 얼굴이 빨개져 모모에게 달라붙어 있는 유키토를 보고 대충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다시 불 앞으로 돌아갔다. 순간 어쩐지 이 상황의 세 사람이 가족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모모는 배시시 웃으며 유키토를 달랬다.

풍선 붙이는 건 키가 작은 초등학생은 도울 수 없었으니 테이프 공정을 돕기로 했다. 귀찮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평소에 파티 준비 같은 것은 해본 적도 없는 유키토였으니 나름 재미는 있는 건지 불평불만 없이 척척 붙였다. 준비가 다 끝나면 자기랑 비슷하게 생긴 장발이 밥을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벽에 온갖 색의 풍선들과 HAPPY BIRTHDAY, 그리고 조그맣게 Marry Christmas! 라고 적혀 있는 카드까지 붙이고 나니 얼추 무슨 파티처럼 보이기는 했다. 유키는 와아─ 하고 하이파이브를 하자며 손을 내미는 모모에게 슬쩍 손바닥을 맞붙이는 어린 자신을 보며 어쩐지 좀 기분 나쁨을 느끼며 식사 준비를 했다.

“밥 다 됐어, 와서 먹어.”

“이쪽도 다 끝났어! 딱 맞아서 다행이다. 유키토 군도 가자~.”

식탁은 꽤 넓었지만 의자는 두 개 뿐이라 모모가 다른 방에서 의자 하나를 잽싸게 꺼내왔다. 유키토가 앉기 편하게 의자를 뒤로 빼 주고 자리에 앉았는데, 자신이 앉는 쪽을 제외하면 거의 풀밭인 광경이 익숙했지만 괜히 웃음이 나왔다. 잘 먹겠습니다. 세 개의 목소리가 울리고서 식사가 시작됐다. 이렇게 나란히 놓고 보니까 더 닮았다. 식사 도중에 멍하니 정신을 놓고 한 미남과 한 미소년을 쳐다보고 있는 모모를 보며 유키가 모모, 하고 몇 번 주의를 줬다. 밥 위에 올라가 있는 아보카도를 짓이기면서 유키토가 딴 생각을 했다. 모모는 이상한 사람.

식사가 끝난 뒤에는 셋이서 함께 욕실에 들어가 양치질을 했다. 컵에 아무리 봐도 세트인 칫솔에 꽂혀져 있었지만, 유키토는 선반에 들어있던 일회용 칫솔을 썼다. 유키의 집이라고 들었는데, 두 사람은 같이 살고 있는 건가? “둘이 같이 살아?” 하는 아이의 순수한 질문에 “모모네 집은 따로 있어.”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체 무슨 사이인 거지? 쓸데없는 고민을 하며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칫솔을 물고 있으니 “결혼 했는데 별거 중.” 이라는 유키의 답변이 돌아왔다. …남자끼리잖아. 별거라기에는 사이가 너무 좋아 보이는데? 한층 더 복잡해지는 표정에 모모가 오해라고 해명했지만 결혼했다는 부분이 오해인 건지, 별거 중이라는 부분이 오해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유키도 정말, 어린애 앞에서 그런 얘기 할 필요 없잖아?”

“쟤도 슬슬 세상에 대해서 알 나이야.”

“그런 얘기가 아니라… 그런 스포일러 해도 되는 거야? 모르는 것 같긴 하지만.”

먼저 양칫물을 뱉고 밖으로 나간 유키토를 뒤따라 나가며 모모가 구시렁댔다. 그런 일이 현실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만화를 너무 많이 본 것의 반증이 아닌가 싶긴 했지만, 아까 파티 준비를 하면서 올해를 레이와의 크리스마스라고 지칭했다가 “레이와?” 하는 반응이 돌아와 도저히 몇 년도를 사는 사람이냐고 물어볼 수가 없어 대충 헤이세이라고 말하는 걸 실수했다고 얼버무렸다. 당연히 크게 의심받지는 않았지만 밖에 나가도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어린 유키가 미래의 연인이 이런 남자라는 걸 알게 돼서 기분 나빠하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에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정작 장본인인 유키는 별로 걱정되지도 않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거실로 나가니 유키토는 TV 옆에 붙어 있는 앰프에 찰싹 붙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음향장치에 관심이 있었다니 여러 의미로 크게 될 아이인걸, 싶다가도 그 아이가 커서 된 게 모모 자신의 바로 옆에 있는 톱아이돌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납득이 갔다. 그 옆에 있는 앨범들도 만지작거리는 걸 봐서는 아마 Re:vale의 것도 보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정말 괜찮은 건가?

“아무거나 만지지 마. 소중한 거니까.”

“아이돌이라고 했잖아. 노래 들려줘.”

“안 돼.”

…이 꼬맹이 말 안 듣네. 툴툴거리는 소리에 모모가 작게 웃었다. 변변찮아서? 하고 악의 없는 투로 묻는 말투에 기분이 팍 상한 유키가 이내 딱밤을 날리려고 했으나, 그것보다 모모가 더 빨랐다.

“아니아니아니, 유키의 노래는 최고거든!? 물론 나도 들려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유키가 안 된다고 했으니까….”

정말 대단한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음을 호들갑을 떨면서 온몸으로 표현하는 모모에게 유키토가 뭐야 그게, 하면서 툴툴거렸다. 유키토 안의 자신의 이미지에 지극히도 제 물건을 아끼는 깐깐한 장발이라는 인식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네 알겠습니다, 하면서 들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억 못 한다고 해도 무의식중에 영향 받는 거 싫고. 지금의 자신이 미래의 자신에게 영향을 받아서 작곡했다고 생각하면 싫으니까 그런 전례는 만들어 두고 싶지 않았다. 그것보다 이 꼬맹이 오늘 안에 돌아가는 거 맞겠지. 짚이는 게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기억이 나는 건 아니라서 확신할 수도 없었다. 얼른 어떻게든 해치우고 모모랑 같이 꽁냥거리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다른 건 들려줄 수 있어. 네가 좋아할 만한 거. 그러니까 거기에는 손대지 마.”

“동요 같은 건 됐어.”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하지 말고. 그리고 동요도 훌륭한 노래잖아?”

“…알지만.”

동요를 무시하는 건 아니었지만 어린애 취급 한답시고 경단 3형제 같은 노래를 크리스마스 이브에 듣고 싶지는 않았다. 아침 댓바람부터 집에서 도망치듯 뛰쳐나온 이유도 노래 때문이었는데 모르는 사람 집에 와서도 노래 못 듣는다고 성내는 것도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궁금한걸. …두 사람이서 부르는 것 같았는데 유키의 노래라고 했으니까, 장발이 작곡이라도 하는 건가? …스스로의 노래를 만드는 사람. 아이의 눈에 아주 조금, 부러움의 빛이 묻어났다.

어쨌든 두 사람 다 고집이 세다는 건 알겠다. 어린애와도 타협이 없는 유키의 모습을 보며 그건 좀 어떠려나 싶었지만 노래는 유키가 제일 고집을 부리는 부분이니까. 그리고 유키가 정했다면, 최대한 유키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고집스런 유키 역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유키니까. 그리고 유키가 만드는, 어린 유키토가 만들어갈 노래는 자신에게 있어서 언제나 최고의 노래니까. 그래도 일단 이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두 사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갈 필요가 있었다. 두 사람은 워낙 말수가 적어서 둘만 있으면 싸울 것 같았으니. 어린애 상대로 진심으로 화낼 것 같은 유키가 불안불안하기는 했지만…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거라고 합리화를…. …음.

“노래 듣는 건 케이크 고르고 나서! 천천히 가고 싶기는 하지만 크리스마스 이브니까 더 늦어지면 사람 몰릴 것 같단 말이지~. 맛있는 것도 먹었고, 몸도 따뜻해졌으니까 슬슬 나가자. 케이크는 두 사람이 골라야 하잖아?”

“벌써? 아직 추운데….”

“어디보자. 아, 손 나만큼 따뜻해졌잖아?”

“기분의 문제인데.”

유키토 군도… 응, 이정도면 괜찮네. 그래도 목도리나 담요 같은 거 챙겨 가는 게 좋으려나? 손을 꼭 잡힌 유키토가 밖에 나가기 싫다는 표정으로 모모를 올려다보았다. 이 나이 때부터 얼굴을 쓰는 법을 아는 건지 울망울망하는 눈에 죄책감이 들었으나, 이게 엄살이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그걸 간신히 뿌리치고 목도리 가져 올게, 하고 대답한 후 모모가 방에 들어가서 옷장을 뒤졌다. 유키토의 얼굴이 빠르게 식었다. 사실 더 두꺼운 옷을 입혀주면 좋겠지만 사이즈 맞는 외투가 있을 리가 없고. 유키가 아까 두르고 있었던 목도리와 색이 비슷한 걸 가져왔다. 벗어두었던 외투들을 두 사람에게 입히고 목도리까지 둘러주었다. 몸이 두 개 있었으면 유키도 축하해 주고 작은 유키도 축하해 주고 할 수 있으니 편할 텐데. 유키네 부모님은 유키토 군의 올해에도 바쁘신 모양이니 즐거운 생일을 보내게 해 주고 싶었다.

“어디 가? 멀어? 많이 걸어야 해?”

“케이크 가게. 이 근방이라 별로 안 멀긴 한데, 추우니까 차타고 가자. 유키는 오늘 생일이니까 대신 모모 쨩이 운전하겠습니다!”

움직이기 싫은 유키토의 질문 공세에 하나씩 대답해주며 한 손에 한 사람씩, 양손에 꽃을 쥐고 현관을 나섰다. 유키의 손을 잡기 전에 주머니에 손을 꼬옥 집어넣어 차 키를 슬쩍 빼낸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다. 유키 선물은 들어올 때 챙겨야지. 주차장에 있는 차까지 와서 뒷좌석에 유키토를, 조수석에 유키를 앉히고는 안전벨트까지 꼭꼭 매주었다. 가족이라고 느꼈는데 부모님과 아들이 아니라 부모와 아들 둘이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차안은 금방 후끈하게 데워졌다. 춥다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던 두 사람도 이내 살만 해졌다는 듯 굽어졌던 몸을 쭉 폈다.

“오늘 평소보다 좀 긴장한 것 같은데. 정말 근방이니까 편하게 하지?”

“아, 아니야. 나 괜찮아!”

혼자 있을 때는 꽤 막 운전하는 편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타고 있으면 안전운전에 주의를 기울이게 됐다. 괜찮지 않은 사람의 대표 같은 발언을 하고서는 괜찮게 운전을 했다. 백미러로 뒷좌석의 어린 유키가 바깥을 보고 놀라는 게 보였다. 아무리 아파트 단지라고는 해도, 약 20년이면 꽤 바뀌었으려나? 세레브 동네의 특이점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을 텐데.

“유키토 군, 오늘은 왜 아침 일찍 일어났어? 학교도 안 갔잖아.”

모모가 나름대로 유키토의 정신을 분산시키기 위해 궁금했던 얘기를 꺼냈다. 유키도 쉬는 날에는 이 시간까지 자고 있는데 어린 유키라고 어련할까? 무슨 이유로 아침부터 일어나서 미아가 돼서 여기까지 왔는지. 부모님이 깨워주셔서 학교 가라고 했더니 땡땡이 치고 놀고 있었던 걸까?

“…부모님 깨기 전에 나왔어.”

부지런하네, 유키토 군. 그렇게 일찍 일어난 일이 있기는 했지. 일어났다기 보다는 거의 잠을 안 잔 수준 아니었던가? 그런 것 치고는 쌩쌩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역시 어릴 때가 좋다 싶기도 하고. 유키는 젊음이란 좋은 거네, 같은 생각을 하며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히터 앞에 손을 대고 있었다.

“졸리지 않아? 유키는 아침 일찍 일어나면 맨날 졸리다고 5분에 한 번씩 얘기하는데. …아, 그럼 엄청 일찍 나왔겠네. 무슨 일 있었어?”

“아무리 그래도 그건 과장 아냐?”

“그럼 3분에 한 번씩!”

모모가 키득키득 웃으면서 대답했다. 잠 많이 자는 건 예나 지금이나 딱히 달라진 게 없어서 크게 차이는 없겠지만.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잠만보의 숙명을 타고난 사람은 어쩔 수 없지 않나? 좀처럼 묻는 얘기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서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된다고 하려고 했는데, 말하고 싶었던 건지 아닌 건지 머뭇거리는 기색에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유키는 뭔가 알고 있으려나? 옆을 슥 보자 유키가 알듯 말 듯한 웃음을 짓고서 뒤에 말을 걸었다.

“혼날 일 있었던 거겠지.”

확실히 그러면 집에 들어가기 싫을지도. 역시 짚이는 게 있는 거 아닐까 싶었다. 하긴 유키 같은 사람이 부지런하게 일어나서 부모님이 깨어나시기도 전에 가출을 했다가 미아가 됐다는 일은 여간 엄청난 일이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역시 두 분 걱정하실 것 같은데…. …그렇다고 지금 당장 돌려보낼 수 있는 법을 아는 것도 아니지만. 유키토는 무언가 깊게 생각하는 듯싶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장발은 아까의 앨범 같은 거, 망가트리면 화 많이 내?”

“자, 장발.”

“…새로 살 수 있는 거라면 괜찮겠지만, 구하기 어려운 거라면 화날지도.”

“호적 파여?”

“…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는 네 아빠는 아니지만 아마 그 정도까지는 화 안 날 거라고 생각하는데.”

모모가 핸들을 부드럽게 돌리며 충격적인 호칭을 다시 읊었고, 유키가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분명히 그 때 심란했던 것의 절반쯤은 이런 이유기는 했지만. 절반은 지금의 자신이 들어도 어이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게 분명했다. 자신의 일이니까 알 수 있었다. 호적이 파이는 걸 무서워했다기 보다는, 아끼던 것을 망가트렸을 때 화내는 어른이 무서운 거였고. 부모님에게 큰 애착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족은 가족이었으니까. 그래도 직접 들으니까 바보 같은 생각 하고 있었구나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나저나 장발은 뭐야? 모모는 모모라고 불렀으면서. 역시 계속 꼬맹이라고 불러야지. 유키토는 그 이상으로 무언가 말하지는 않았다. …머릿속에 하나밖에 안 든 꼬맹이.

“부모님도, 아무리 소중한 게 있어도 유키토 군을 더 아끼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일단 도착했어! 저기 보이는 가게. 와, 벌써부터 사람 있네… 일찍 오길 잘했다.”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걱정하는 거지만, 그것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도 이상하다는 생각에 유키토는 버튼을 눌러 안전벨트를 풀었다. 먼저 내린 모모가 으아─! 하고 기지개를 쭉 폈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쭉 눈이 내리고 있었다. 유키의 생일날에 눈이 내리다니 엄청 로맨틱해. 발을 움직이자 쌓인 눈에서 뽀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외투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쫑쫑 뒤를 따르는 두 사람을 보고 웃으며 줄지어 케이크 가게 안으로 향했다.

이 근방에서 나름 유명한 편인 케이크 가게는 오후에 정해진 시간부터만 열고, 게다가 하루에 파는 양이 적어 늦게 오면 허탕을 치기 일쑤였다. 대신에 맛은 있으니까 케이크 명인의 가게라고 해야 하나? 사실 미츠키네 집에 맡기고 싶었지만 꽤 거리가 있어 짧은 오프에 가지러 가는 것도 일일 것 같아서 그냥 가까운 쪽으로 가기로 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달콤한 냄새와 함께 따뜻하게 데워진 공기가 흘러나왔다. 가게 곳곳에 꾸며진 작은 트리들과 캐럴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냈다. 케이크를 사면 결국 모모가 다 먹는 편이긴 했지만 생일에는 빠질 수 없는 아이템이니까. 딸기부터 초콜릿, 말차나 모둠 과일이 잔뜩 올라간 것까지. 모모가 케이크가 늘어선 진열장을 보고 있다가 빙글 돌았다.

“자, 유키 군들. 무슨 케이크가 좋으신가요? 내가 먹어본 것들은 다 많이 달콤한 거라서 두 사람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모모가 좋아하는 걸로 골라도 돼.”

“유키 생일이잖아!? 내가 좋아하는 건 지난달에 먹었으니까. 음, 말차라던가 고구마라던가 당근…?”

“당근이 좋아.”

어차피 한 조각 빼고 다 모모가 먹게 될 텐데 모모가 좋아하는 걸로 고르면 된다는 유키와, 까치발을 쭉 들어 진열장 위쪽까지 올려다보며 당근 케이크를 강하게 어필하는 유키토의 말이 상반되게 들렸다. 아니, 당근 케이크도 맛있으니까 상관없지만. 당근 케이크라는 게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아버린 유키토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맛일까? 흙당근 맛이 나는 거 아닐까? 오독오독 씹힐까?

“그럼 당근으로 할까?”

“응.”

“그래.”

이곳의 당근 케이크는 유키의 입에도 잘 맞는 편이었으니 케이크 고르기는 어렵지 않게 끝났다. 다음은 촛불이랑 고깔모자인가? 고급스런 전문점이라 고깔모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촛불은 동봉해 주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두 명 분의 생일을 축하해야 하는데, 두 개 살걸 그랬나? 나이 맞추기가 곤란해졌다. 어쩔 수 없이 유키의 나이대로 하나, 유키토의 나이대로 하나를 따로 묶어달라고 했다. 여덟 살… 아니, 아홉 살이에요. 점원의 물음에 답하는 모모의 얘기를 듣고 유키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이 생일이니까 한 살 더해서. 맞지?”

“…응.”

유키토가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서 있던 유키는 새삼 나이가 한 살 더 많아진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모모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내가 나이 먹는 건 상관없는데 모모는 정말 변하질 않는단 말이지. 저 얼굴로 벌써…. 같은 생각이 읽히는 건 아닌 모양인지 모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산도 마치고, 포장도 금방 끝나 케이크 상자를 받아왔다. 모모가 유키에게 슬쩍 다가와 귀엣말했다.

“나 리틀 유키 선물 사러 가고 싶은데 먼저 가 있을래? 아니면 차 안에 있어도 되고.”

유키의 주머니 속으로 차 열쇠가 슥 들어왔다. 원래 내 건데 돌려받는 게 왜 이렇게 부담스럽지?

“나 쟤랑 둘이서 있기 싫어.”

“유키는 유키잖아? 그럼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차에서 기다리자.”

유키는 유키니까 괜찮지 않냐니, 당연히 쟤가 나라서 거북한 건데. 그나마 시끄럽게 굴고 난동을 피우지 않는다는 부분에서는 합격점을 줄 만 하지만, 모모의 관심도 받아가고 맹랑하기까지 해서 맘에 드는 구석도 별로 없었다. 게다가 장발이라고 부르잖아. 어차피 둘만 놔둬도 아무 말도 안 할 걸?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 같았지만 모모가 어린 자신의 손을 잡고 이미 가게 밖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에 한숨을 푹푹 쉬며 따라 나섰다. 차 키가 이쪽 주머니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주차장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지만.

모모가 케이크를 뒷좌석 한편에 놔두고 돌아섰다. 펑펑 내리는 눈에 날이 더 추워진다는 신호인데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 모모가 환하게 웃었다.

“트렁크에서 우산 꺼내 줄까?”

“괜찮아, 비 오는 것도 아니고. 유키토 군은 눈 좋아해?”

“추우니까 싫어. …눈사람은 안 싫어해.”

“이따 같이 눈사람 만들자. 빨리 다녀올 테니까, 히터 틀고 기다려!”

눈사람은 허접하게 생겨서 재미있으니까 나름 좋아했다. 유키와 유키토를 집어넣고 모모가 재빨리 주변의 골목으로 사라졌다. 바로 준비하는 거니까 그렇게 특별한 선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싶었다. 문이 닫힌 차 안에 적막만 흘렀다. 당근 케이크의 맛이 궁금한지 케이크 상자 안을 들여다보는 유키토의 모습이 백미러 너머로 보였다. 잊어버린 자신의 심연을 마주하는 듯한 상황에 기분이 이상했지만, 그래도 어린애는 어린애니까. 그나저나 어릴 적에 저렇게 하고 다녔던 건가 싶은데 생각해 보면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케이크, 꽤 맛있어.”

“…그래? 당근 맛 나?”

“당근 맛은 별로 안 나지만. 그렇게 안 달아서 먹을 만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건지 유키 스스로도 잘 이해가 안 됐지만 대화 주제가 없는 것 치고는 꽤 좋은 선택이었다며 혼자 뿌듯해했다. 장발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유키토는 알쏭달쏭했지만 당근 케이크에서 당근 맛이 안 난다니, 흥미가 떨어져서 창밖만 보고 있었다.

“언제 돌아갈 거야?”

“그렇게 보내고 싶어?”

“걱정할지도 모르잖아, 부모님.”

“안 할걸… 레코드판은 걱정하겠지.”

“부쉈어?”

“…실수로.”

유키는 어릴 적에 실수로 반 토막을 냈던 부친의 LP판을 떠올렸다.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것이라고 드물게 자랑스럽게 얘기했던 것도 이제는 흐릿했다. 자신도 좋아했다. 취향이 맞아서 생각해서 뻔질나게 아버지의 컬렉션 룸에 들어가서 돌려 들었다. 처음으로 만져본 레코드판이었고, 그 노래는 지금도 좋아한다. 한밤중에 정리해 두려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져 그걸 반 토막 냈을 때에는 순간적으로 눈앞이 깜깜했다고 생각한다. 혼나는 것도 혼나는 거고, 그 방 출입을 금지 당하는 것이 제일 무서웠다. 평소에 그렇게 친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부친은 아끼던 물건이 망가져 분명히 엄청나게 화를 낼 것 같았고, 다시는 그 판으로 노래를 들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서러웠다. 다음 날은 자신의 생일이었다. 생일이고 뭐고 별로 중요하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새고 밖으로 나왔다. 부서진 판은 버리기 싫어서 들키지 않도록 학교 가방 안에 숨겨두었다. 그 상태로 학교를 갈 수도 없으니 당연히 사람 없는 동네 놀이터나 대충 돌아다니다가….

“노래 좋아해?”

“좋아해. …음악 시간은 재미없지만.”

아까 모모의 질문에 똑같은 대답에 유키는 웃었다. 이렇게 보니까 귀엽게 느껴지기는 하는데, 어린아이 보정을 받아서 그런 거겠지. 귀염성 없는 성격이라는 얘기는 어렸을 적부터 많이 들었으니까. 지금은 모모가 ‘유키 잘생겼어. 완전 귀여워, 최고로 멋있어!’ 같은 발언을 번갈아가면서 해주니까 그냥 그렇구나 생각하지만.

“내가 만든 노래, 지금 듣지 않아도 나중에는 들을 수 있게 될 거야.”

“…집에 가서 찾아보란 얘기?”

“그럴지도. 잘 생각해서 종이에 적어봐.”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직 어려서 그래.”

“…애 취급.”

“애잖아.”

금방 클 거야.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자신의 성장 과정을 떠올렸다. 확실히 금방 크기는 했지. 중학생 정도만 되어도 성인으로 오해받았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제 나이를 찾았다고 생각하지만, 얼굴 자체는 어릴 때와 그렇게 변하지 않았으니까. 적어도 자신이 어렸을 적의 사진이 담긴 앨범을 끼고 산 것이 아닌 모모가 단번에 알아볼 정도라면 꼭 닮은 거겠지. 옆을 보니 차창에 눈이 조금 쌓여 있었다. 어린애처럼 입김을 호오 불어 모모를 그리고 있었는데 유키의 앞에 거뭇한 인영이 불쑥 나타났다. 깜짝 놀라서 뒤로 조금 물러났더니 삐쭉한 모모 그림 옆에 모모가 헤실 웃으면서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러더니 반대편으로 돌아 운전석의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휴─ 춥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이따가 줄 테니까 기대해! …아, 너무 기대하진 말고…? 그나저나 유키, 뭐 그리고 있었어?”

“모모.”

“응? 아. …아, …완전 귀여워…. 유키 완전 훈남….”

유키가 너무 귀여워…. 하나도 안 닮았지만 엄청 귀여워…. 모모가 안전벨트를 맬 생각도 안하고 양 손으로 얼굴을 짚고 바들바들 떨었다. 유키는 웃으면서 한 손으로는 무자비하게 창문에 그려뒀던 모모를 슥슥 지워버리고서는 모모의 안전벨트를 채워주었다. 뒤에서는 여전히 우연히 고기라도 씹은 표정의 유키토가 있었다.


모모가 아파트 보관함에서 커다란 선물을 꺼내 오는 바람에 케이크는 유키토가 들게 되었다. 뒷좌석에 놓여 있었으니 유키토가 드는 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모모 옆에 찰싹 붙어서 “그거 내가 대신 들어줄까?” 같은 소리밖에 하지 않는 유키 쪽이 문제였다. 나중에 줄 테니까 유키토가 들고 있는 케이크나 들어주라는 모모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저만치 걸어가 현관문을 열었다.

파티 준비도 얼추 되어 있고, 모모의 손에 들려 있는 어디를 다녀왔는지 대충 고급스러워 보이는 쇼핑백 안에는 파티용 고깔모자도 하나 들어있었다. 바로 파티를 하자는 모모의 말에 유키토 역시 당근 맛 안 나는 당근 케이크에 새삼 흥미라도 생겼는지 케이크를 꺼내 테이블 위에 세팅했다. 아이보다 일 안 하는 유키가 히터 앞에 쪼그려 앉고 있다가 케이크를 담을 접시와 포크를 가져왔다. 크림으로 만들어진 당근이 잔뜩 올라가 있는 밭 모양의 케이크 위에 갈퀴도 아닌 초가 십수 개 꽂혔다. 절반으로 보이지 않는 경계가 나뉘어져서 한쪽은 유키의 나이대로, 다른 한쪽은 유키토의 나이대로 꽂힌 초를 보고 유키는 모모의 센스는 정말 독특하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모모가 너무 세게 그어서 성냥을 부러트린 전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에 성냥으로 불을 붙이는 건 유키의 몫이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유키들의─ 생일 축하 합니다─.” 잘 챙겨주는 건지 성의가 없는 건지 모를 가사에 웃으면서 두 사람은 푸우, 하고 촛불을 불었다. 모모 한 사람의 박수 세례가 이어졌다.

“그럼 이제 선물 수여식이 있겠습니다!”

“이거 벗어도 돼?”

“안 돼. 아직 파티 안 끝났는걸. 많이 불편해?”

유키토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옆을 보니 저랑 비슷하게 생긴 장발 아저씨도 화려한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저씨는 나이 먹고 뭐 하는 거지. 시선에 그런 기색이 보여서 딱밤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열 대만 때리고 싶어졌다. 모모가 자리에서 일어나 포장되어 있는 작은 상자 하나와 커다란 선물 주머니를 가져왔다.

“유키 씨.”

“네.”

엄숙한 부름과 함께 부드러운 천 주머니가 유키의 품에 안겨졌다. 산타의 선물 주머니처럼 붉은 색의 벨벳 천에 녹색의 끈으로 묶여 있었다. 안에 뭐 들어 있는 거지? 만지작거렸지만 여러 개가 들어 있는 모양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유키토 군.”

“응.”

작달막하긴 하지만 무게가 있는 상자가 유키토의 두 손에 얹어졌다. 영어로 브랜드 명 같은 것이 적혀져 있기는 한데 동네 가게이기 때문인지 들어본 적은 없었다. 안에 뭐 들어 있는 거지? 흔들어 보았지만 제대로 고정되어 있는 모양인지 달칵거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생일 축하해, 유키! 유키토 군도!”

“고마워. 이거 지금 열어봐도 돼?”

“받은 선물은 집에 가서 열어보는 게 매너잖아?”

“여기 우리 집이지만.”

“아하하. 그랬었지─.”

옆에서 들려오는 만담을 무시하며 유키토는 상자를 열었다. 아, 그거 지금 열어버리는 거야? 하고 조금 수줍은 듯 한 모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얀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은 심플한 디자인의 작은 손목시계였다. 액세서리인가 생각은 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종류의 선물이었던 모양인지 유키토는 상자 안에서 시계를 꺼내서 유리를 만지작거렸다.

“오늘처럼 이상한 시간에 돌아다니다 길 일어버리지 말라고 주는 선물! 오늘은 위험한 사람 만난 거 아니었지만, 앞으로는 모르는 어른은 조심해야 해? 제대로 해 지기 전에 집에 들어가고…. …내가 채워줘도 될까?”

부모님 같은 잔소리와 걱정이 섞인 선물에 유키토는 두 사람을 훑어봤다. 위험한 사람, 모르는 어른…. 위험하지는 않아도 지금도 충분히 수상하기는 했다. 신원이 수상하다기 보다는 언동이랑 생긴 게 수상했지만. 그래도 선물을 받았으니 모모에게 허락하듯 왼팔을 내밀었다. 웃음 속에 선물 수여식이 진행되었고, 유키는 얇은 손목에 채워지는 연푸른색의 시계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유키는? 안 열어봐?”

“둘만 있을 때 열어볼래. 이상한 거 들어있을지도 모르잖아.”

“…달링, 대체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멀쩡한 선물이거든!”

어찌됐든 이것도 지금 보여주면 미래의 자신의 생일 선물 스포일러 아닌가? 정작 본인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어느 정도의 그런 마음과, 모모 외의 다른 사람과 그 기분을 나누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있기는 했다. 자기 자신이기는 했지만 뭐 어때.

“그럼 케이크 먹고 파티 끝낼까?”

“모자 얼른 벗고 싶어.”

“케이크 누가 잘라? 두 명인데.”

유키의 물음에 모모가 잠깐 고민했다. 둘이 같이 잡고 자르는 건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니까 안 된다. 그렇다고 생일도 아닌 자신이 먼저 잘라줄 수도 없고. 이어 유키토가 선심 쓰듯 말했다.

“당근 많은 곳 주면 양보해도 괜찮아.”

“착하네. 그럼 내가 잘라야지.”

유키가 케이크 칼을 쥐고 꾹 눌러 한 조각을 잘랐다. 대망의 케이크 커팅을 양보해 준 유키토의 접시에 크림으로 만들어진 당근이 제일 많이 심어져 있는 부분을 옮겨주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무난한 쪽으로. 유키토는 크림 당근이 마음에 들었는지 포크로 하나씩 뽑아 입에 넣었다. 조금 달달하지만 과하지 않은 담백함이 마음에 들었다. 맛있다고는 했는데 꽤 입에 맞았다.

고깔모자를 쓴 두 남자가 옹기종기 앉아서 사이좋게 케이크를 냠냠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며 모모가 하아, 하고 숨을 내쉬며 제 양 뺨을 쥐었다. 어쩜 이렇게 귀엽고 예쁠 수가 있을까. 모자 사오길 잘했다. 그런 시선에 익숙한 유키가 “모모도 먹어.” 하고 깨워준 후에야 케이크에 입을 댔다. 역시 여기 케이크는 맛있다니까. 한 조각을 먹고 있으니 유키토의 입가에 크림이 묻어있는 것이 보였다. 오물오물 당근 밭을 해치워가는 모습에 테이블 위의 티슈를 뽑아 입가를 닦아주었다. 닦는 와중에도 저항하지 않고 계속 케이크를 씹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키가 모모가 정신이 팔린 사이에 제 입가에 하얀 크림을 슬쩍 묻혔다. 유키도 참, 크림 묻었어!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움직이고 있으니 질린다는 표정의 유키토와 눈이 마주쳤다. 너도 크면 이렇게 돼.

작은 생일파티가 끝나고 세 사람은 다시 소파 위에 앉았다. 아까와 달라진 점은 유키토의 자리가 모모의 옆이 아니라 무릎 위가 되었다는 부분이었다. 품에 안겨서 알게 모르게 고롱거리며 애교를 부리고 있는 모습에 유키 역시 아까의 유키토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유키, 노래 들려줘. …내가 좋아할 만한 거.”

“호칭이 바뀌었네.”

“싫어?”

“아니.”

모모의 무릎 위에 자리를 잡은 유키토가 문득 말을 꺼냈다. 선물을 사러 다녀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아까보다 사이가 좋아진 것 같았다. 케이크를 사러 나가기 전에 두 사람이 얘기하고 있었던 주제로 다시 돌아왔지만 아까처럼 찬바람이 쌩쌩 날리지는 않았다. 유키가 좀 더 부드러워…졌나? 자리에서 일어나 스튜디오로 향하는 유키의 뒷모습에 모모가 유키토를 안아 바닥에 내려주었다. 가보라며 등을 툭툭 두드려져 모모를 올려다보고서는 유키토가 뒤를 따랐다. 둘만 있기 싫다고 했으면서 잘 맞는 것 같았다.

유키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선 유키토에게 그 안은 별천지였다. 처음 보는 기계들, 그리고 여기저기 꽂혀 있는 레코드판과 CD들. 스튜디오이자 컬렉션 룸이기도 한 그 방을 보물 창고라도 되는 것처럼 빙글빙글 돌며 훑어보았다. 숨기려는 기색조차 없이 뺨을 발그레 물들이고서 눈을 빛내는 모습이 퍽 어린아이다웠다. 자신이 이렇게 노골적인 사람이었던가? 뒤따라 들어오는 모모와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운 듯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작업 하는 거야? 보여줘.”

“사람 있을 때는 안 해. 모모도 일 할 때는 잘 안 들어오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음악인의 고집을 유키토는 이해했다. 이런 것들을 보여줬으니까 당연히 순순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야 정말로,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들이 가득한걸.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올려져 있는 컬렉션에 까치발을 들어 앨범을 구경했다.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취향은 좋은 사람이었다.

작업실 환경이나 늘어선 보물들에 정신이 팔린 유키토를 두고 유키는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모모가 슬쩍 다가와 옆에 섰지만 돕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금방 레코드 판 하나를 꺼냈다. 무슨 노래지. 기웃거렸지만 유키가 쉿, 하고 웃으며 검지를 입 가까이에 댔다. …잘 생겼어. 영문도 모른 채로 고개를 끄덕이며 한구석에 놓인 의자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며칠 바빠서 방치해 두었다고 그새 옅게 먼지가 쌓인 턴테이블 위를 청소하듯 매만지다가 가지고 있던 판을 끼워넣었다. 유키토는 그제야 뒤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천천히 돌아보았다.

“나 이거.”

“일단 이거부터. 듣고 싶어 했잖아?”

말이 끝나자마자 유키가 재생 버튼을 눌렀다. 위쪽에 꽂혀 있는 CD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걸 듣고 싶다고 어필하던 유키토가 흘러나오는 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작은 발걸음으로 턴테이블 앞으로 다가간 유키토가 멍하니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나도 비슷한 일 있었어.”

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모모가 귀를 쫑긋 세우며 유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 없는 사이에 무슨 비밀 얘기가 오갔던 거지!? 아까는 나 없으면 싸울 것 같더니. 복잡 미묘한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유키가 유키토에게 마음을 써주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 채 가만히 노래를 들었다. …아, 이거 유키가 좋아하는 거다.

“아버지가 아끼던 레코드판을 박살내고 아침 일찍 도망쳐서 놀이터에서 잠들었는데도 신기하게 감기 하나 안 걸렸어. 한밤중이 된 데다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말야. 일어나 보니까 시간은 밤이지, 집에 돌아갔더니 부모님은 대체 어딜 갔다 온 거냐고 답지 않게 걱정하면서 화내지. 갑자기 자백하고 싶어져서 가방에 들어있던 것을 가져와서 사과했는데 별로 혼나지 않았어.”

아마도 아침 일찍부터 사라져 있었던 게 문제였던 거라고 생각한다. 평소라면 학교 끝나고 늦게 들어와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부모님이었지만 언제나 정오까지 도통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던 아들이 새벽녘부터 행방을 감추고 학교도 빠졌으니 그야 아무리 방치형 부모라도 무슨 일이 있었냐고 놀랄 만도 했다. 일찍 일어나서 외출했다는 부분에서 이상을 느꼈다는 점이 자존심 상하기는 하지만? 결국 자정이 지난 뒤에 돌아가게 되어 생일이고 뭐고 챙길 일은 없었지만, 십몇 년이 지난 후에야 그날 아버지가 생일 선물로 그 레코드판을 주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많이 좋아하는 것 같기에 선물로 주려고 했다니. 세레브가 돼서 똑같은 판을 구하고 난 후에야 들은 진실 치고는 맥 빠지는 결말이었다. 아버지야 뭐, 이후에 적당히 하나 더 사셨고. 물론 그 방에 출입금지를 당하는 일도 없었다.

모모 역시 대충 상황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키네 부모님, 애한테 많이 관심이 없기는 하지만 유키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닌걸. 유키가 오프날에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온다면 그것도 충분히 놀랄 일인데, 새벽같이 사라져서 종적을 감췄다니 경악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한밤중에 귀가했다니…. 역시 시계 사준 거 잘한 거 같아. 모모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별로 걱정 안 해도 돼. 노래도 이렇게 다시 들을 수 있으니까.”

“…알았어.”

어렴풋이 무언가를 눈치 챈 것 같기는 했지만 두 사람 모두 그 얘기를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아이는 다시 그 판으로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 기뻤는지 조금 안도한 것 같았다. 어린아이였으니 명백한 자신의 잘못으로 어른이 화를 내는 것도 무서웠겠지. 유키토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을 감고 잠시 동안 노래를 듣고 있었다. 한 곡이 다 끝나자 다른 음반을 들고 쪼르르 걸어왔다. 유키는 큰 불평 없이 듣고 싶다고 하는 대로 노래를 들려주었고, 모모는 그 모습을 애틋하게 지켜보았다. 아마도 이게, 유키가 어렸던 자신에게 주는 생일 선물인 거겠지.

“…그래서 대체 언제 갈 거야?”

“한밤중까지는 있어도 된다고 했잖아.”

“그런 얘기 안 했거든.”

슬슬 진이 빠지기 시작하는지 유키가 항복 선언을 했다. 귀찮은 건 둘째 치고 모모와 함께 있을 시간도 꾸역꾸역 줄어가고 있었다. 혼자 놀게 하면 예전처럼 레코드판을 반 토막 낼지도 모르고. 한밤중에 돌아갔다는 얘기를 어떻게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어이가 없었다. 뻔뻔함이 하늘을 찌르네. 노래를 듣고 있었던 모모 역시 중간부터는 좀이 쑤셨는지 휴대폰 카메라로 두 사람의 투샷을 찍기 시작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볼 수 있겠어. 앨범에서밖에 볼 수 없는 유키토 군의 얼굴을 데이터로 남겨둬야 했다. 프레임 단위로 찍어서 움직이는 영상이라도 만들 생각인지 열심히 셔터 소리를 끄고 그 모습을 담아내는 모모를 보면서 아무래도 돌려보낼 마음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유키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한참을 더 방에서 버티고 있던 유키토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갈 생각인가? 하는 맘에 유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으나 잠시 후에 유키토의 입에서 나온 “눈사람 만들래.” 소리에 다시 구겨졌다. 잠도 제대로 안자고 추운 것도 싫어하면서 무슨 눈 놀이야? 멍멍이같이 눈이 오면 방방 뛰어다니는 모모 탓에 아예 밖에 안 나가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지지는 않고 구석에서 달달 떠는 포지션이었으니 당연스레 불평불만이 튀어나왔다. 가능하면 안 나가고 싶었지만 눈을 좋아하는 모모가 유키토의 말 한마디에 벌써 저만치 나가 두 사람의 옷과 장갑을 챙기는 중이었다. 내 생일인데 왜 나가서 눈사람이나 만들고 있어야 해? 막상 만들면 재밌다고 열심히 공들이는 사람의 발언이었다.

밖으로 나가자 아까보다 더 눈이 쌓여 있었다. 옷을 꼭꼭 챙겨 입고 유키토가 잠들어 있었던 놀이터로 향했다. 어린이용 장갑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헐렁한 가죽 장갑을 끼게 된 유키토가 귀엽다며 모모가 또 사진을 찍어댔다. 이제 이상한 사람 취급 받는 건 걱정 안 하는 모양이었다. 유키토도 금방 그런 모모에게 익숙해졌는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른들은 커다란 눈사람 하나씩, 어린이는 작은 눈사람 두 개. 네 마리의 눈사람 몸통이 줄지어 생겼다.

“눈사람 머리 삐쭉삐쭉해─.”

“모모야.”

“아이 참…. 나도 유키로 만들래. 최고로 잘생긴 눈사람으로 할 거야!”

나도 크면 저렇게 되는 건가… 열심히 옆에 있는 커플을 무시하며 자신 몫의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동글동글하게 눈을 뭉치느라 손이 시려워졌지만 그래도 맨손보다는 나았다.

“유키토 군은 뭐 만들어?”

“눈사람.”

그거야 그렇겠지만. 두 마리나 되니까 혹시 세트인가? 싶어서 물어봤는데 별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조그맣다보니 세심하게 만들기 힘들어 삐뚤빼뚤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만들고 있는 것 같은데….

“모자 비뚤어졌다, 잠깐만. …됐다, 예뻐.”

마찬가지로 헐렁거리는 털모자를 꾹 조여매고서는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품에 쏙 안길만 한 크기의 눈사람을 만든 유키는 얼른 들어가고 싶은지 눈사람에 기댄 채로 모모의 이름을 불렀다.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TV에 나오는 멋있는 아이돌이 이러고 있는 걸 보였으면 큰일 날 뻔 했다. 유키토의 옆에서 눈을 모아 꾹꾹 누르던 모모가 눈 토끼 한 마리를 들고서는 유키의 옆으로 다가왔다.

“거의 다 만들었으니까 사진 찍고 들어가자!”

“나 추워, 모모….”

“유키토 군도 잘 참고 있는데….”

“난 별로 나오고 싶지 않았거든.”

여러 번 나올 필요 없이 케이크 사러 왔을 때 만들고 들어갔으면 될 걸. 유키의 불평을 못 들은 척 넘기며 눈 토끼를 유키의 손에 올려준 모모가 또 다시 사진을 찰칵찰칵 찍기 시작했다. 두 손을 모아서 눈 토끼를 들고 있는 유키, 완전 큐트…. 유키가 만들어 준 눈사람도 찍어서 후배들한테 자랑해야지. 유키토 군은… 아마 보여주기 힘들 것 같으니 혼자 봐야겠지만. 나중에 유키네 부모님한테 슬쩍 보내볼까? 너무 오래 전 일이라 다 잊어버리셨을 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걱정하셨을 테니까. 믿어 주실지 모르겠네.

열심히 두 사람의 모습을 카메라 속에 담고 있던 모모의 다리를 무언가가 툭툭 건드렸다. 양 손에 눈사람을 든 유키토가 모모를 부르고서는 유키 쪽으로 뒤뚱뒤뚱 걸어갔다. 설마 얼굴에다가 던지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손에 흰 눈뭉치를 든 채로 정면으로 다가오는 어린 자신에 대한 불신이 스멀스멀 올라왔으나 당연하게도 유키토 역시 눈싸움 같은 소모적인 운동을 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유키의 손에는 아직 눈 토끼가 들려 있어서, 앉아 있는 자리의 옆에 살짝 놔두었다.

“…냉동실에 넣어둬.”

웅얼웅얼 그 한마디를 하고서는 쌩 돌아서서 뒤에 있는 모모에게도 들고 있는 눈사람 하나를 건넸다. 그 쪽은 똑똑히 들렸다. “모모, 선물.” 유키는 제 옆에 놓인 눈사람을 슬쩍 쳐다보았다. 나뭇가지로 긁어냈는지 움푹 팬 눈 밑에 작은 돌로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이걸 지금 선물이라고 준 거야?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서 눈 토끼를 내려놓은 채 손을 비볐다. 모모가 받은 눈사람은 아까 유키가 만든 것처럼 머리가 삐쭉삐쭉하고 귀 쪽에 짧은 막대가 몇 개 꽂혀 있었다. 피어싱 표현이 섬세하네. 이거 유키랑 나야? 모모가 기뻐서 방방 뛰었다. 기념으로 눈사람들 다 모아놓고 셋이서 같이 사진 찍자는 모모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도 별로 없었다. 하나, 둘, 셋! 치─즈! 상투적인 멘트에 자연스런 웃음이 나왔다. 모모가 배경화면 설정을 재빨리 바꾸는 것을 보고서 유키토는 새삼스럽게 스마트폰이 신기하다는 듯 기웃거렸다.

몇 차례 사진을 더 찍은 후 코를 훌쩍이기 일보직전인 유키의 상태를 보니 정말로 금방 들어가야 할 것 같기는 했다. 꽁꽁 싸매고 왔는데도 이렇게 추워하면 어떡하지. 걱정스럽게 보던 모모가 유키토가 만들어 준 눈사람을 다듬었다. 유키와 모모의 손에 들린 작은 눈사람에 알게 모르게 뿌듯한 표정을 하던 유키토가 문득 얘기했다.

“나 이제 갈래.”

“아…… 벌써? …가 아니라, 응. 벌써 노을 지기 시작하네.”

겨울이라 그런지 시간이 늦지도 않았는데 하늘만 보면 벌써 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뭐 알고 있나? 유키토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모모에게 다가왔다.

“…다음에는 더 좋은 걸로 줄게.”

“충분히 기쁜걸! 이거 소중하게 간직할게. 냉동실 정리하고 안에 넣어둘 테니까. 내년 겨울까지 갖고 있을게!”

유키토의 말에 모모가 환하게 웃었다. 우우, 귀여워. 어릴 적부터 완전 훈남이잖아. 그런 모모와는 달리 유키는 영 불편한 기색이었다. 어린놈이 벌써부터 수작질 하는 것만 배워가지고는. 흥, 유키가 콧방귀를 꼈다. 내가 더 좋은 거 줄 거야.

“갈 거면 얼른 가.”

“갈 거야.”

불퉁한 말에 불퉁한 대답이 돌아왔다. 바로 돌아가려는 모양인지 한 발짝 뒤로 물러나더니 놀이터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설마 미끄럼틀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건가? 그거면 되는 거야? 혼란스러움이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가득했지만 유키토는 별로 망설이지 않는 것 같았다. 안을 들여다보면 안 되는 거겠지…? 모모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제자리에 서있었다. 미끄럼틀에 걸터앉아서 빼꼼 고개를 내민 유키토가 모모에게 “안녕.” 하고 인사했다. “잘 가, 유키토 군. 생일 축하해.” 헤실 웃는 모모의 인사에 이어 유키와도 눈이 마주쳤다. 뭐야, 얼른 가. 눈빛으로 그렇게 말하자 유키토의 입술이 삐쭉 튀어나왔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에 유키가 말문을 잃었다.

“…생일 축하해.”

아이는 미끄럼틀 안으로 쏙 사라졌다. 하?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유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끄럼틀 안을 확인했으나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 안에는 사람은커녕 불어오는 눈도 쌓여 있지 않았다. 모자 위에 쌓인 눈을 탁탁 털면서 돌아오는 유키를 보며 모모가 말했다.

“…유키, 역시 어렸을 때가 더 솔직한 거 아냐?”

그건 아니라고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할 말이 없었다. 자신에게 한 방 맞아서 부끄러워진 기색이 역력한 유키가 눈사람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워. 들어갈래.”

“그러게, 더 오래 있으면 감기 걸리겠다. 얼른 들어가자!”

앞서는 유키를 모모가 금방 따라잡아 옆에 나란히 섰다. 들고 있는 눈사람도 나란히 서 있어서 퍽 재미있는 풍경이었다. 아마 쿨쿨 잠들었다가 사이즈도 안 맞는 이상한 모자와 장갑, 처음 보는 시계에 둘러싸인 채로 잠에서 깨어나겠지. 기억도 안 나는 수상한 물건들을 쓰레기통에 넣을까 말까 고민할거고, 시계는 손목에 꼭 맞아 필요할 때 차고 다닐지도. 본가에 있었던 것 같아. 집에 들어가서 걱정 섞인 잔소리를 듣고, 따뜻한 방 안에서 뒹굴다가 다시 그 방으로 들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듣겠지. 냉동실에 이거 넣을 자리가 있던가, 이상한 고민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내년 생일 선물, 기대해도 좋아.”

그 말에 응? 하고 반문했던 모모가 이어 아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쪽은 진심이거든. 머릿속으로 어떤 걸 줘야 더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 크리스마스 이브의 마지막 외출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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