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모를 대답일 수도 있겠지.

루시이브

언제나 by 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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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게 가까운 듯 멀어서

한 걸음 다가갈 때면

수많은 생각을 해

하지만 내게 사랑은

처음부터 너야

| 김조한, 처음부터 너야

이어지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기분 좋았다. 전해져오는 내용과는 별개로 말이다.

" 미워하기는 누굴 미워한다고 그러는 걸까. "

나지막이 말을 뱉었다. 자꾸 슬프게만 생각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표정에서, 움직이는 눈동자에서, 그에 담긴 눈빛에서 많은 것이 드러났다. 애써서 숨기려 들지도 않았고 필요 이상의 웃음도 보이지 않았다. 언어로 구현하지 않은 것들이 언어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쉬이 확언할 수는 없었다. 어찌 될지 모르는 일에 대한 확신을 함부로 네게 건네고 싶지 않았다. 그저 소망에 불과한 것이 확신이 되고 믿음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로 인한 상처는 누가 받지? 결국 끝에 가서 괴로워할 것은 불확실함을 믿은 쪽일 게 분명했다.

" 떠나기는 어딜 간다고 그래. 안 가. 갈 생각도 없고, 이제는 루시엘이 가라고 하더라도 과연 갈지 모르겠는걸. "

그럼에도 이것만은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었다. 이미 사람을 떠나보낸 아픔을 알지 않던가. 같은 아픔을 감히 네게 겪게 할 리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만한 사람도 못 되었으니 애초에 불가능한 가정이고 전제였다.

간질거렸다. 네가 해주는 모든 말이 마음에 들었다. 다른 이라면 웃으며 넘겼을 말들조차 네가 해주거든 몇 번이고 더 듣고 싶어졌다. 자신을 이리도 사랑스럽게 봐주는 네가 신기하면서도 그런 너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곱게 휘는 눈으로 시선을 맞추며 웃어 보이고는 하였다.

"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아. "

-내 기회는 후할뿐더러 무엇을 하든 마음에 들어 할 테니까.

조금은 장난스럽고 가볍게, 그치만 애정이 담긴 어조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말들이었으니 당연한 거였으려나. 좋은 말만 해주는 네게 모진 말이 나갈 터가 무엇이 있다고.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만 해줘도 모자랄 것 같은데.

" 그 정도는 무리 없이 받아줄 수 있거든. 그렇다고 다른 게 무리가 있다는 말은 아니야. 무엇이든 그럴 거라는 의미지. 질투가 조금 심하면 어때. 그만큼 아껴준다는 뜻으로 생각하려고 하는데. 관심이 없거든 질투조차 안 할 테니까. 계속 붙어있어 주면 나야 좋고 고맙고. 어디 가지 말고 있어. ...그래줬으면 좋겠어. 싫다는 말은 아마 할 일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계속 다가와 줬으면 하는 것도 있는지라. 시간은 얼마가 걸려도 되니까, 굳이 노력하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 "

비슷한 말을 조금 전에도 했던 것 같지마는. 어느샌가 입꼬리는 진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끝에 와줄 것을 안다면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보단 나은 일이니까. 더불어 너를 그 어디에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슬금 들었다. 과한 생각이겠지. 네 생각보다 더욱이 너를 붙잡고 있고 싶어 하는 나를, 너는 어떻게 생각하려나.

...아.

맥박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잠시간 말이 없더니 이내 싱긋, 웃음을 지었다.

" 평생이라는 말을 굉장히 길게 하네? "

겉보기에는 담백한, 반면에 속은 너무도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지껏 미래에 대한 생각은 해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과거만 보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혹은 현재를 살아가기에 급급했던 것일까. 앞으로 그려갈 미래에-... 그래. 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긴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 평생. '

단어가 무겁게 느껴졌다. 여지껏 살아온 시간보다 더욱 긴 시간을 의미할 터였다. 귓가에 들려오는 고동 소리가 전보다 크게 들리는 듯 싶었고, 속도마저 조금 빨라졌나 싶었다. 책에서만 보았던 구절이 떠올랐다. 심장 소리가 너무 커, 상대에게 들릴까 걱정한다던 그 내용이 생각났다. 전에는 과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 ...뭐라 답할지, 왠지 알 것 같아. "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에 다른 말부터 슬쩍, 꺼내놓았다. 이리저리 굴리고 있던 시선을 올려 힐끔, 널 한 번 바라보았다. ...어찌 저리도 예쁘게 웃는 건지.

" 응, 있어 줄게. 기다려주겠다고 말한 건 내 쪽이었잖아? "

-그러니... 이건 그럴 수밖에는 없는 일인 거야. 내가 어떻게 너를 두고 가겠어.

" 과분하기는. 이런 건 별거 아닌데 말이야. "

나긋하며 그와 동시에 온당한 투였다. 원한다면 이런 말은 어렵지 않게 해줄 수 있는데. 그 속에 진심을 섞는 일 또한 아주 쉬운 일이었다. 언젠가부터 담겨있던 진심이었으니, 그다지 다를 것도 없긴 하였다. 늘 가볍기만 했던 말에 이처럼 깊은 진심이 담길 줄 누가 알았겠나.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만났던 그 이후로 네게 거짓을 고한 적은 없었으며 마음에 없던 소리를 한 적 또한 없었다. 그건 너도 아는 걸 텐데.

" 난 사실만 말하는걸. 루시엘이 그만큼 예쁘니까, 그만큼 내가 좋아하니까 할 수 있는 말인 거지."

보고 자란 사람이 그런 탓에,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네. 마냥 좋아하기만 했던 성정도 아닌 데다가 후에 가서는 많이 흐려졌던 부분인데, 네가 좋아해 주니 기쁠 따름이었다. 너를 위해서라면, 네가 좋아해 준다면 잠시 묻어두었던 것을 꺼내어 선명하게 만들 수 있었다. 더욱 다정하게 굴어주는 것도 가능했다. 당연하게도 네게만. 다른 이에게까지 줄 몫이 어디 있을까. 오롯이 너만을 향하기도 바쁜 것을.

" 무엇 하러 그래. 후회할 일 자체가 없었으면 하는걸. "

-믿어줘. 말 지킬 자신은 있거든. 혼자 끌어안게 둘 리도 없잖아.

시선을 맞추었다. 눈매가 유순하게 곡선을 그려내었다. 자색을 띠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짐을 외로이 홀로 지게 하지 않을 텐데. 깊게도 자리 잡은 사람이 있었고, 같은 일이든 비슷한 일이든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다면 나눌 것이고 가능한 만큼 함께 있고 싶었다. 그것이 후회하지 않는 길이라고, 스스로 굳게 믿고 있었다.

" 낭비라고는 생각 안 하니까 걱정 말고. "

이 과정을 통해 네가 안심할 수 있다면, 보다 편해질 수 있다면 이것 또한 필요한 시간인 거니까.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너를 바라보며 어여쁘게도 웃었다.

" 나도 그래. 네가 해주는 말도, 너랑 보내는 시간도, 전부 좋아해. 너를 좋아해서, 너를 이루는 모든 것들을 좋아하는 거야. "

마주 닿은 입술에 베싯, 웃음을 흘렸다. 몇 번이고 전할 이 진심을 네가 받아주었으면, 좋아해 주었으면. 네 앞에서는 앞뒤를 잴 여유조차 금세 없어지고는 했으니까.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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