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요리

박사팬텀

by 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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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은 조심스럽게 프라이팬을 흔들었다. 뜨겁게 달궈진 프라이팬 속 기름의 위에서 천천히 요동치던 달걀이 팬텀의 손끝을 따라서 흔들리다가 그대로 철벅! 바닥으로 쏟아진다. 팬텀은 석고상처럼 굳어 움직임을 멈췄고, 굼은 아아아!! 하고 소리쳤으며 떨어진 달걀은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을 매섭게 질주했다.

“스크램블에그가!!”

굼의 외침에 보답하듯 갑자기 미스 크리스틴이 쏘옥 튀어나온다. 그리고 날아오는 달걀을 앞 발로 톡톡 막더니 그대로 물고 암냠냠 씹어 삼켰다.

“일반 동물이 먹으면 안돼!!”

굼이 화들짝 놀라 미스 크리스틴을 바라보지만 뭉그러진 달걀 조각을 맛나게 먹은 미스크리스틴은 앞발을 핥고 본인의 얼굴을 문지르고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척 얼굴을 세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흩어진 달걀을 찾아서 작게 입맛을 다신다. 굼은 팬텀을 바라보다가 미스 크리스틴을 바라보기를 반복했으나, 팬텀은 여전히 굳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굼은 그대로 검은 고양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름 잽싸고 낼랜 손길이었지만 검은 고양이는 액체라도 되는 마냥 손길을 피해 쇽쇽 빠져나갔다. 바닥에 떨어진 달걀 조각은 이 난장판 속에서 이따금 다시 뭉개지고 휘날렸으며 끝내는 기름 자국과 함께 알 수 없는 형태의 흔적만을 가득히 남겨두었다.

“으아아아!!!! 크리스티이인~!!”

이리저리 프라이팬을 피해다니며 남은 달걀 조각을 암냠냠 먹던 크리스틴은 그대로 낼름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굼 또한 그대로 소리를 지르며 고양이를 쫓아 문 밖으로 나가버린다. 마침내 이 모든 소동의 근원인 팬텀은 부엌에 달궈진 냄비와 함께 혼자 남았다. 그리고 이윽고 탄내가 풍기기 시작한다. 한참을 굳어있던 팬텀은 삐걱삐걱 움직여 천천히 뚜껑을 열고 냄비의 속을 들여다봤다. 검게 말라붙은 자국이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듯 하다. 팬텀은 그대로 뚜껑을 덮었다. 그리고 개수대로 이동해 그 위로 물을 붓는다. 치이이익… 부엌은 수증기가 가득 차올랐다. 이제 뭘 해야하지? 이런 상황에서 팬텀은 드물게 자신이 버려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굼은 끝까지 미스 크리스틴을 쫓을거고 미스 크리스틴은 끝까지 잡히지 않을게 분명하다. 팬텀은 그대로 조금씩 주저앉았다. 차가운 타일의 촉감이 엉덩이를 찌르지만 일어나고픈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 무대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팬텀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얗고 반들반들 깨끗한 장소에 검고 멀대같이 크기만 한 사람이 자리 잡는다니. 미적으로도, 상황적으로도 전혀 맞지 않는 배치다. 하지만 팬텀은 감히 문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대로 부엌 바닥에 가만히 있었다.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지만 그 어디에서도 팬텀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리고 팬텀의 앞에 놓인 망해버린 음식들을 보고 솔직하게 욕하거나 혀를 차거나 하면서 굼이나 부엌의 담당자를 찾으러 다시 나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팬텀은 침체된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축 처진 귀가 바닥을 향한다.

“미스 크리스틴.”

그녀를 불러보지만. 대답이 없다. 팬텀은 더욱더 우울해진 기분을 끌어안고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박사. 박사가 보고 싶다. 하지만 방금 까지의 요리는 전부 박사를 위하던게 아니었던가. 그대로 팬텀의 기분은 다시 추락한다. 달걀말이 하나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국은 졸이다 못해 태운다. 간식을 만들고 싶어도 이런 기본적인 요리를 잘 못하는데 제과제빵을 잘 할리가 없다. 팬텀은 자신의 내면에 숨은 연기와 몰입을 써 요리 장인을 흉내내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금세 그 생각도 접고 다시 저 멀리 치워버렸다. 박사에게는 자신이, 타인과 연극의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자신이 만든 요리를 먹이고 싶었다.

크림슨 극단의 배우, 크림슨 극단의 다시 없을 샛별, 블러드 다이아몬드, 천재 배우.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달걀 하나도 제대로 부칠 줄 모르는데. 팬텀이 우울해 하며 바닥을 짚자 물컹하는 촉감이 든다. 아까 흩날렸던 달걀의 일부다. 팬텀은 그 달걀을 보다가 한 입 베어 물었다. 지나치게 기름지고 짜다. 이걸 먹은 미스 크리스틴이 걱정된다. 나머지 망가진 것들이 입에 넣으려는 찰나 갑자기 튀어나온 검은 고양이가 팬텀의 뭉그러진 달걀을 물고 다시 달려가기 시작한다.

“크리스티인-!!”

그리고 이어지는 굼의 호통. 팬텀은 자신이 혼나는 것 같이 놀라 화들짝 일어났다. 그제야 팬텀을 발견한 굼이 엄청나게 큰 비명을 지르더니.

“와아아아아악!!!! 와아아악!!!”

그대로 뒤로 넘어가 버렸다. 팬텀은 쓰러지는 굼을 잡고 눈만 깜박였다. 엉망진창이 된 부엌 사이에서 소란스럽게 문이 열린다. 마치 무대에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사고같다. 팬텀은 당장 도망쳐야한다고 직감했지만 굼을 잡은 상태에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문이 아주 천천히 열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 팬텀은 결국 지금 제일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을 마주하고 말았다.

“팬터엄?”

박사. 그가 코드네임을 부른다. 팬텀은 그대로 붙잡혔다.


“우리가 얼마만에 보는걸까아?”

박사가 입을 열면서 말꼬리를 길게 늘어트린다. 몹시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표현하는 버릇이라는 것을 팬텀은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팬텀은 묵묵하게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박사의 호출에 불응한 것이 5번, 비서직에서 무단이탈을 한 게 2번, 외근 임무를 거부한 것이 1번이다. 누가 보아도 박사를 피해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횟수다. 팬텀은 점점 어깨가 무거워지고 고개가 내려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상상하던 최악의 방식으로 박사를 마주하고 말았으니까.

“…박사. 굼, 그녀는 아무 잘못이 없다.”

“아니이- 지금 오랜만에 봐서 하는 말이 그거야?!”

박사가 울컥 화를 터트린다. 하지만 팬텀은 다시금 목소리를 닫고 침묵을 입에 물었다. 아무런 말도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다. 굼이 뭐라 해명도 하기전에 팬텀과 단 둘이 남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내보낸 건 박사였다. 그리고 박사는 부엌 사태에 대해서 별다른 감흥이 없는 듯 했다. 오로지 이 구실로 팬텀을 잡아 두려는게 분명하다.

“여기서 도망치면 가만안둬. 적어도 굼이 시말서 부터 모든 걸 다 해명해야 할 테니까.”

팬텀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사는 이마를 짚더니 팬텀을 위 아래로 훝어보았다. 약간의 탄내가 나는 것 빼고는 전혀 달라진게 없다.

“부엌에 왜 있었어?”

“요리를 하려고 했다.”

“무슨 요리”

“아직 깨어나지 못하여 생명의 가능성을 가진-”

“달걀 요리? 알았어.”

박사가 팬텀의 말을 단숨에 토막내어 손질한다. 팬텀은 혀를 살짝 깨물었다. 생각보다 박사가 훨씬 더 많이 화가 난 듯 싶다.

“누구 허가를 받고 부엌에 출입했지?”

“..ㄱ.. 내가 혼자 들어갔다.”

굼이라고 말할 뻔한 것을 넘기고 팬텀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박사가 굳이 믿지 못하겠다는 제스쳐를 취했지만 팬텀은 묵묵히 무단 침입을 했다고 말을 고쳤다.

“혼자 들어갔는데 굼이랑 있었다고?”

“혼자 들어가서 난동을 부리다가 굼이 나를 제지하러 온 것이다.”

팬텀은 능숙하게 거짓말을 지어냈지만 박사는 작게 코웃음을 짓는다.

“그래서? 부엌을 혼자 엉망으로 만들었다?”

“나는-…”

팬텀의 목소리가 끊긴다. 박사는 팬텀의 손아귀를 잡고 장갑을 억지로 벗겨내렸다. 손가락 끝에 붉게 물든 손에는 귀여운 곰 모양의 반창고가 붙어있다. 박사는 이걸 보란듯이 손을 흔들면서 팬텀을 다시 추궁한다.

“굼이 가진 반창고를 손가락에 붙여놓고 혼자 했다?”

“…내가 훔친거다.”

“그래? 부엌은 혼자 들어갔고? 반창고는 훔쳤고?”

팬텀은 차라리 침묵을 고수할까 다시금 생각했지만 박사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대로 손목을 타고 올라가 손등을 간지럽히고 깍지를 껴온다. 명백한 성적인 행동이다. 아무런 텐션도 없는 상황에서 다가오는 스킨십에 팬텀이 몸을 움찔거린다. 박사는 더 과감하게 몸을 붙인 다음에 팬텀을 확 끌어안았다.

“팬텀. 너 몸을 좀 수색해야겠다.”

한올한올 옷을 다 벗겨버리겠다는 선언이다. 팬텀은 박사가 자신에게 어떤 방식으로 벌을 줄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자신에게 따질지 그제야 눈치를 차렸다. 여기서는 그 누구도 팬텀을 도우러 올 수 없다. 박사가 허락하지 않은 한 팬텀은 여기에 잡혀 있어야만 한다. 팬텀이 살짝 목이 죄인 소리를 냈다.

“왜?”

그리고 박사의 반문에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지금 도마 위에 올라가 요리되는 재료는 달걀이 아니라 팬텀이다. 입맛을 다시는 박사의 앞에서 팬텀은 자신이 굼과 한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이런 방식의 추궁에 자신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가늠해 보았다. 모든 것을 토해내지만 않는다면 괜찮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팬텀은 눈을 감았다.

박사가 자신을 어떻게 요리할지 벌써부터 겁이 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박사를 위한 생일 잔치를 준비하고 싶었는데 모든 요리에 죄다 실패했다는 사실을 당사자인 박사에게 만큼은 절대 말할 수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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