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카나] 마법, 그 밤
네 인생을 살아.
※캐붕주의
(본편 59~63화를 먼저 보고 오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개인적인 해석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둠은 갓 태어나 기지개를 키는 한기를 잔뜩 품에 끌어안고서 조심스럽게 하늘에서 발걸음을 내디뎠다. 언제나처럼 일몰은 썩 반갑지도 그렇다고 피하고 싶은 만큼 싫은 존재도 아니었으나, 무심결에 든 생각은 어쩐지 반가운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12월의 밤이란 조금은 근사한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으니까. 색색의 화려한 불빛과 장식들이 거리를 수놓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살짝 들뜨게 된달까. 현란하게 물드는 거리를 향해 나서자 부쩍 서늘해진 공기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두툼히 챙겨입은 옷깃을 단단히 여며보아도 아주 작은 빈틈 사이로도 비집고 들어오는 찬바람까지 막을 재간은 없었다. 정말로, 겨울이네.
"하아—."
소녀는 지나가듯 내뱉은 한 움큼의 숨결이 잠시간 형태가 되어 사라져가는 것을, 그리고 그 사이로 찰나에도 분주히 맞물려 돌아가는 세계를 지켜본다. 다들 열심히 살아가는구나. 밤이 가까워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바쁘게 움직이는 거리와 대조되게도 그는 홀로 멈춰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물리적으로 소녀가 선 채 지나가는 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지나치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법한 명백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그는 아직도 버리지 못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미련을 덕지덕지 묻힌 채 제 발목을 잡는 것을. 분명 이제는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순전히 착각이었던 걸까.
짙어져가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정돈된 붉은 머리칼 위로 사뿐히 겨울이 주는 선물이 내려앉았다. 예상치 못한 작은 이벤트는 소녀를 사색에서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올해 들어 내리는 두 번째 눈. 많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흩날리는 눈발이 한 층 더 거리를 환하게 밝히는 듯했다.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첫 눈은 많이 왔었는데. 그리고 그 때는—.
……아쿠아, 너에게 마지막을 고했던 날이지.
그거 진짜로 마지막이었는데 말이야, 하면서도 그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스워 소녀는 탄식인지 모를 웃음을 가벼이 흘렸다. 아무리 떨쳐내려고 애써도 너는 작은 빈틈 하나 놓치지 않고 공기처럼 스며들어온다. 내게는 그걸 막을 힘이 없어. 역시 너는 언제나 나를 이상하게 만들어, 그렇지?
***
예상 밖이었다. 첫눈은 으레 언제나처럼 비도 눈도 아닌 것이 내릴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보기 좋게 비웃어주었다. 11월의 말미에서 아침 댓바람부터 포근하게 날아드는 눈송이들을 보며 다른 이들은 저마다 조금씩 붕 뜬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아쿠아만은 겨울을 열며 찾아온 작고도 여린 손님이 영 탐탁치 않은지 무표정한 얼굴을 한층 더 굳혔다. 그 때와 같다,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아이가 죽고, 세간에서는 그저 스토커에 시달린 한 아이돌의 안타까운 이야기 정도로 치부되며 조용히 묻혔던 날. 그 날도 지금처럼 눈이 내렸지.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지나가서는 안 되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아이를 떠올릴수록 조바심이 생기는 것은 그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잊으면 안 돼.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 네가 살아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설마 '너의 인생'을 즐기려고 살아있는 건 아니겠지?
물론 아니다. 아니어야 했다. 나는 아이를 위해서 살아가는 거야. 아이를 지키지 못한 내게는…….
'—너도 기뻤던 일 한 두 개 쯤은 있을 거 아냐.'
얼어붙는 듯한 사고에 잠깐 때 아닌 봄바람같은 따스함이 스쳐갔다. 그러나 이마저도, 아니 오히려 이것은 더욱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있어서는 안 될 감정이다. 행복이라던가, 기쁨이라던가, 그런 듣기에 좋은 감정따위 전부 타인의 것이어야만 했다. 지금의 내게 그럴 자격이 주어졌나. 이 생명의 무게를 가늠하며 저울질하는 머리로는 이미 너무나도 선명히 보이는 답이었다.
그러나 나는 알면서도 어째서 매번 눈 앞의 너를 이리도 떨쳐내지 못하는 것일까.
"아쿠아,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나 계속 생각했어, 네가 내게 무대를 맡긴 그 때 이후로.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와 표정, 평소에는 잘 볼 수 없는 그런 모습으로 카나는 아쿠아를 마주했다. 어떤 심경의 변화인지 아쿠아의 소리 없는 동요가 두 사람의 사이로, 물결처럼 파동을 그리며 천천히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애써 그것을 무시하려는 카나의 움직임도.
나도 아리마가 하고 싶은 연기를 보고 싶거든.
스포트라이트 뒤에 가려지는 건 네게 어울리지 않아. 아리마는 빛을 연기해야 마땅했다. 나와 같이 자처해서 혐오스럽고 분노에 찬 어둠을 연기하는 것이 아닌, 누구보다 빛나고 행복하기에 마땅한,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원하는 연기를 하는 아리마가 보고 싶었기에 무대를 장악하기보다 철저하게 가려지는 쪽을 선택한 그의 등을 쏟아지는 조명 아래로 떠민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다. 지금도 그게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단순한 나의 욕심, 아니면 나에게 전해진 너의 욕심, 그것도 아니라면 제3자의 욕심. 혹은 전부일지도 몰랐다. 이유야 어찌됐건 너를 부추긴 것은 나였고, 네가 즐거운 것을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어째서. 어째서 너는 여전히 그렇게나 쓸쓸한 얼굴을 비추는 것인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그러니까, 이래서는 안 돼. 알잖아?"
"……."
"나는……기대를 건 사람들을 저버릴 수 없어. 아쿠아라면 이해할 거라고 생각해."
물론 단박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써먹기 좋은 배우가 되기로 했던 그의 결심을 흔들지 말아달라는 뜻이리라. 나아가서는 아리마가 수준을 맞추는 연기를 하기 위해 그간 해온 피나는 노력들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말아줬으면 하는 부탁이겠지. 어쩌면 이건 기회라는 웃기지도 않은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쳤다. 어떻게 해도 내게서 지우지 못했던 너를 지울 수 있는 기회 말이다. 그래, 네가 곁에 없으면 나는 더 이상……. 그게 진정으로 너의 행복이라면, 나는 네 마음을 응원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너는 여전히 외롭고 아픈 미소로, 너와 같은 얼굴을 한 나를, 이 겨울을 맞이하고 있는데. 달리 무슨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그 날의 무대 위에서 빛나는, 즐거워보였던 아리마와는 너무나도 대조되게. 겨울을 닮아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내리는 눈 탓인지 여느 때와 다르게 흔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나를 봐" 하고 온몸으로 외치던 태양같은 아리마는 그저 한낮의 신기루에 불과했던 것일까. 정말로?
"나는 많은 이의 행복을 짊어지고 있으니까."
멋대로 행동했다간 또 망가뜨리고 말 거야. 내려오는 눈 사이로 어렴풋이 들리는 목소리의 미약한 떨림이 그의 심정을 짐작케 했다. 아아, 결국은 너도 같았던 것이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후로 멈춰버린 시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타인에게서 찾아 발버둥을 칠 뿐인 인생. 너는, 나는, 우리는 어째서 이런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구애받지 않고 살아간다는 선택지도 분명 있었을 터인데. '누군가의 사정'에 의한 부조리함은 두 사람의 세계를 처음부터 끝까지 뒤집어놓았다.
그렇게나 괴로운 얼굴을 한 것은 나로 충분한데. 평생을 붙들려 살아가야 할 죄악감의 대가로 소중한 사람의 행복을 바랐다. 다시는 아이처럼 불행을 겪지 않기를, 나는 죽을만큼 슬플지언정 그들만은 보란듯이 행복하기를. 그러나 끝내 나는 뒤돌아서는 너에게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가 내린 결정이라는 이름 하의 포기가 얼마나 힘겨운 것이었을지는 나로서는 감히 짐작할 수 없기에. 이대로라면 어느 쪽이든 아프기만 할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처음이다. 이것은, 아쿠아가 견뎌 온 어느때보다 지독히도 차갑고 무심히 상처입히는 첫 눈.
***
그건 백일몽이었다. 선 채로 꾼 꿈. 절대 누구도 가져갈 수 없는 아리마 카나만의 꿈. 즐거웠던 시절의 연기를 꺼내들고, 보란듯이 멋들어지게 휘두르는 카나는 그야말로 무적이었다. 타고난 무대와 청중을 단숨에 휘어잡는 힘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래, 정말 꿈만 같았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얼마만의 즐거운, 하고 싶었던 연기였는가. 잊을 수 없는 달콤한 기억을 몇 번이고 속으로 삼키는 그였다. 12시가 지나간다. 마법은 풀려서, 마침내 다시 돌아갈 시간이 찾아오는 때. 조명 뒤의 원래 있던 자리로.
뭘 새삼스럽게, 이건 내가 선택한 거잖아.
반박할 여지 없는 사실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선택한 길이니까. 나의 의사는 철저하게 지우고, 어디에나 쓰기 좋은 배우가 된다. 이제는 정말 완벽하게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오직 나의 착각이었을 뿐이었는지.
나도 아리마가 하고 싶은 연기를 보고 싶거든.
너의 그 말 한 마디가 내가 그렇게나 듣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역 배우 때의 어느 시점부터 주변의 요구와 내가 원하는 것의 괴리감은 꽤나 컸다고 생각한다.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한 건 그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였지만. 그러나 한결같이 아무도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너만큼은 달랐다. 나에게, 너는 여기에 있어도 좋다고 말해주고, 원하는 것을 물어줬어. 그렇게 알 수 없는 너는 언제나 나를 멋대로 뒤흔들었다. 완벽하게 숨겼다고 생각한 것마저 들추어내 당황하게 만드는.
"나는 계속 써먹기 좋은 배우로 남아야 해."
첫눈답지 않게 흩뿌려지는 굵은 눈송이들 사이로 얼핏 아쿠아의 흔들리는 표정이 눈에 들어온 듯 했으나, 굳이 자세히 살펴보는 것으로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 시선을 받아내는 부담을 떠나 이미 이 대화 하나만으로도 벅찰 정도로, 충분히 버거운 주제였다. 어쩌면 그저 내게 도움을 주고 싶었을 너를 탓하게 될지도 모르는 이야기. 언제나처럼 내 생각과 의도는 관계없이, 오로지 주변에 맞춘 것들로.
"……."
"뒤에서 비추는 역할로 충분하니까."
차라리 뭐라고 말이라도 해주길 바랐다. 늘 그렇게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 것처럼, 네 진심은 그게 아니지 않냐고,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라고. 그게 아니라면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를 묻거나, 하다못해 모든 걸 네 탓으로 돌리려는 나를 향한 책망이라도. 그런데 왜,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거야? 내가 한 말의 의미가 너에게는 도대체 어떤 것이었길래 그렇게 동요하는 것인지.
카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부유하는 단어들을 입 밖으로 내뱉을 말로 연결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그래, 그저 잠시 어떻게 되었던 것이다. 너는 나를 언제나 이상하게 만드니까. 곁에 아쿠아가 없으면, 그렇게 되면……나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어. 하지만 너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도, 즐거운 꿈을 꾼 것도 전부 나의 선택이었다. 사실은 알고 있다.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너도, 나도. 다만 나에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오롯이 나만이 가질 수 있는 행복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이제, 그만두자."
나는 나아가야만 해. 지나간 행복에 얽매인 채로 안주하고 있을 수 없어. 그게 다같이 행복해지는 길이다. 괜스레 밝게 이야기하는 내게 여전히 아쿠아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우스운 이야기지 않아? 나를 이해해 준 유일한 사람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쯤 되면 네가 듣고 있는지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못 된다. 해서, 이 정도는 연기가 아니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말이다. 예고 없이 불쑥 튀어나온 진심이 그에게 가서 닿는다.
"그래도 정말 즐거웠어."
"아리마……."
"그 순간만큼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확신할게."
하지만……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아쿠아는 그 날 내게 끝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돌아선 내가 나지막이 건넨 일방적인 작별 인사도, 아마 그에게까지 전해지지 못하고 쏟아지는 눈에 파묻혀 그대로 사라졌으리라 생각한다.
끝이었다. 이것은, 카나가 빛 바랜 환상에 이별을 고하는 마지막 눈.
***
끝으로 하기로 했더라도, 마음처럼 잘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카나가 생각하기로는 그랬다. 방금만 해도 자연스레 아쿠아를 떠올리고 있지 않았는가. 약속대로 더 이상은 그 무대를, 그를 떠올리지 않아야 했다. 평소의 나로 돌아가면 되는 거야. 살을 에는 추위에 발갛게 상기된 콧등 위로 사뿐, 눈송이가 내려앉고 이내 녹아내렸다. 생각해보면 그에게 있어 쉽게 잊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그리도 소중한 경험을 준 이를 어찌 쉽게 잊을 수 있을까. 그럴 정도로, 타인의 기대와 책임이라는 것은 십여 년간 알게 모르게 어린 카나에게 상당한 무언의 압박이 되었음이 분명했다. 내가 바란 건 그저 행복 뿐이었는데. 그는 잡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얼마 가지 않아 다짐은 가볍게 녹아 사라졌다. 그 애가, 아쿠아가 있다. 움직이는 인파 사이에, 몇 발자국이면 닿을 거리에.
이 시간까지 무얼 했는지는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감독네에 있다 돌아오는 길이겠지. 매일 이렇게 어두워지는 시간까지 있구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카나를 사로잡았다. 유일하게 지금의 내 편을 들어줬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그에게마저 미움받고 있겠거니,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마주할 용기조차 앗아가버린다. 무서워. 내가 네게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알고 싶지 않아. 진심을 확인하게 된다면 나는 정말로 무너져버릴지도 모른다. 아무도 밟지 않은 채 쌓인 깨끗한 눈으로 남겨두고 싶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다르게 그대로 멈춰서서는 움직일 수 없다. 무의식중에 너와 눈이 마주치면, 언제나처럼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서 밝게 인사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생각해버려서.
"……."
내내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걷던 아쿠아가 꼭 12월의, 맑은 겨울 하늘을 담은 눈을 들어 카나를 바라본다. 어쩌면 그의 시선을 느껴서일지도 모른다. 눈길이 닿자 아쿠아는 잠시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달싹였으나, 이내 마음을 접은 듯 눈에 띄는 선명한 푸른빛은 다시 카나가 아닌 바닥을 비추었다. 그의 말을 기억하는 것이리라.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리라. 아쿠아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 그대로 너는 나를 스쳐서 나아간다. 맞다, 우리는 이렇게 만났다가 어긋나서, 멀어지는 것만이 남은 관계. 진짜 끝이구나.
원하는 대로 된 것이다. 분명 그렇다. 그래야만 했다.
이건 네가 선택한 거잖아? 그치?
***
"촬영 시작합니다."
겨우 이 정도냐는 실망 섞인 눈초리.
자리가 조금이라도 찬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사복 스태프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연예인의 괴로움은
좀처럼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일평생 인기만을 누리고 살아왔던 스타라면 경험해 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감정이겠지. 카나는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너라면 이해할 거라고 그렇게 말했지만서도, 아쿠아, 너는 당연하다는 듯이 존재하던 것이 사라진 후의 공백이 얼마나 큰지 상상하기 힘들거야. 내가 많은 것을 포기하기로 결심하지 않았더라면 그 빈자리는 영영 다시 채워질 기회조차 잃고 말았을 테지. 그러니까, 내 결심을……각오를 흔들지 말아줘.
아쿠아는 카나에게 따지지 않았다. 물론 카나도 더 이상 어떤 부탁도, 내색도 하지 않았다. 이걸로 됐다. 그는 천천히 카메라가 비추는 현실로 걸어들어간다. 물러선 여기가 내 자리야. 수많은 사람들의 일을, 행복을 짊어진 채로 나아가자.
"—컷, 좋아요.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연예계는 꿈을 꿀 만큼 아름다운 곳이 아니야.
"수고했다, 아리마."
"감독님도 고생하셨습니다."
……하지만 역시, 나는 좀 더 꿈을 꾸고 싶었어.
안타깝게도 소녀는 너무나도 어린 시절부터 꿈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기회가 있다면. 마법사가 없는 이 곳에서 나는 바랄 수 없는 소원을 빈다. 그것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 하더라도.
***
오랜만에 찾은 장소는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짧은 겨울 해를 대신해 어스름한 달빛이 보여준 세트장 내부 또한 촬영 때와 바뀐 것이 없었다. 카나는 그 모습이 저와 닮았다는 생각에 조금 마음이 풀어졌다. 그가 촬영이 끝나고 홀린 듯이 도달한 곳은 오늘달콤의 마지막 화 촬영 세트장이었다. 아쿠아, 네가 날 보란듯이 흔든 게 여기가 처음이었지. 아니, 따지면 사실은 두 번째다. 서너 살 무렵의 아쿠아에 대한 기억은 그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미 너는 내 안에서 지울 수 없는 존재가 되어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는 아무렇게나 쌓인 목재를 등받이 삼아 기대 앉고서 주위를 둘러본다. 꽤나 긴 시간이라면 긴 시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온기라곤 흔적도 없이 시려웠다. 달빛은 역할을 다해 버림받은 이런 장소까지 비추며 어둠이 눈에 익도록 도왔다. 정말 상냥하게도. 그는 나오는 한숨을 주저하지 않고 크게 내뱉고서 중얼거린다.
"……여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인간이 아냐……. 너 같은 날라리하곤 안 어울린다고……."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어. 몇 번이고 다시 읽을 정도로 좋아하는 장면이니까. 몇 번이고 다시 꺼내 볼 정도로 소중한 선물이니까. 나를 위해 아쿠아가 선사한 무대.
"양지에 있으면 말라비틀어지지……어두운 곳이 어울려……."
대사를 한 줄 한 줄, 읊어내려가며 떠올린다. 네가 내게 온전히 모든 걸 맡겼던 순간을. 바로 이 장소에서 피어났던 수많은 감정들—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설렘, 두근거림, 울렁거림ー따위를.
근데 말이야, 지금의 너는 어떻지? 그런 사람마저 멋대로 밀어낸 너는.
답은 이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너 같은 건 아무도 원하지 않아. 분……."
"분수에 맞게 살라고. 쓸데없는 꿈 꾸지 말고."
익숙한 목소리가 혼잣말에 불과했던 것을 받아 대사로 바꾸어 이어나간다. 이 대사의 원래 주인이었을 터인 이가. 세트장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쿠아의 모습이 비쳤다. 놀란 눈길이 그에게로 향했다.
"아쿠아, 여길 어떻게……."
"앞으로도 좋은 일은 없을 테니까. 네 인생은 새까만 어둠이야."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대사를 잇는 중이었다는 사실마저 잊은 카나에게 아쿠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며 자신이 맡았던 대사들을 카나에게 하나씩 풀어놓았다. 한참 찾았어. 그 모습에 어쩐지 울컥, 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짜증난다. 싫다, 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가. 정말로 모든 치부를 들켜버린 것만 같은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 들어버린다고. 동시에 그의 말들은 칼날처럼 기억을, 심장을 찬찬히 그어 조각내버린다. 진정해, 저건 대사일 뿐이야, 하지만, 하지만, 그렇대도……어떻게든 너한테서 듣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어. 실로 오랜만에 카나는 어둠 속에서도 푸른 빛을 띄는 그 별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다.
"네가, 네가 뭘 알아! 나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
"……."
"아쿠아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혼란스러운지 알기나 해?"
그렇게 부탁했는데, 너는 왜……! 이내 그를 향했던 분노는 변덕을 부려 점차 본색을 드러내고서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나를 덮친다. 자기혐오, 후회, 체념 비슷한 그런 것들. 일단 되는대로 던지고 보는 성격이 또 한 몫을 하는구나. 싫어. 싫어.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너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쿠아, 이만큼이나 나는 바보같이 굴어. 최악이지, 안 그래? 그토록 바라던 것을 순간의 감정따위에 휘말려 제 손으로 던져버릴 만큼. 대사는 끝내 너의 진심이 될 터였다. 너도 내가 질려서 끔찍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거야. 내가 자처한 결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미세한 금에서 시작된 붕괴는 단 한 번의 흔들림에도 겉잡을 수 없이 가속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모든 걸 안다는 듯이 말하지 마! 완전 열 받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입은 언제나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아리마 말이 맞아."
"……."
극단적으로 폭주하던 사고가, 예리하게 날 선 언어들이 잠자코 듣고 있던 그가 던진 한마디에 단박에 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정지했다. 아쿠아는 여전히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전달한다. 주위에는 어떤 무대장치도, 연출을 위한 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쿠아의 몸짓과 말 하나하나가 연출가로서 그의 의도를 전부,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 아리마,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해.
"네가 살아온 인생부터 너의 모든 것을."
"……."
"그러니까 알려줘.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아리마 카나는 어떤 사람이지?
나는 배우다.
제멋대로에, 인정받고 싶고, 열정이 넘치고, 꿈을 꾸면서, 아이돌까지 겸하는 배우. 심사가 꼬인, 한물간, 써먹기 좋은, 이름있는, 실력파. 수많은 수식어가 한 단어와 만나고 헤어지며 아리마 카나라는 인간을 어설프게나마 빚어내기 시작한다. 아직이야. 이걸로는 부족하다. 더, 더……아리마 카나는 고작 몇 마디의 말로 정의하기에는 한없이 다양하고도 변화무쌍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제서야 떠나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을 하게 만든 것들이 조금씩 눈에 밟히기 시작한다. 방금 막 인화된 듯, 혹은 해묵은 먼지가 켜켜이 쌓인 듯 흐릿하던 감정과 기억들이 점점 선명해지는 순간.
그건, 나였어.
그저 자신일 뿐이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꿈을 잊지 못한 자신이면서 다같이 행복하기를 바란 자신이었고, 동시에 타인의 인정을 바란 자신이기도 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이 전부가 나야. 하나도 빠짐없이. 이 당연하고도 명쾌한 사실을 나는 자신을 이 지경까지 몰아세우고야 알아차린 것이다. 그런 너를 나는 과거에 묶인 미련이라고 여기면서 인정하지 않았던 거구나. 무엇을 위해? 슬픈 눈으로, 카나가 쓸쓸히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많이 힘들었겠다. 존재의의를 부정당하고 벼랑 끝에 내몰린 너는. 누구보다 잘 아는 감정일 텐데도 나는 어째서 지금까지 스스로를 가장 아픈 방식으로 상처입혀왔던 것인지. 어느 새 그런 나의 곁에, 아쿠아가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네가 서 있을 곳은 여기라도 괜찮으니까."
있어, 지금의 너를 원하는 사람이. 배우끼리는 말이 필요하지 않다고 했던가. B코마치의 데뷔 무대에서 아쿠아가 내게 환상처럼 '보여준'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호의를 무시하고 이렇게 고집스럽게 뿌리치려 애쓰는 나에게도 그는 마지막까지 손을 내밀었다. 어둠 속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던 나를 부드럽지만 강한 힘으로 눈부신 조명 아래까지 인도하는 아쿠아. 여느 때처럼 내가 중심이 되도록 모든 것을 조정하고 연출해내는 그의 의도가 여전히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어째서야? 이제는 정말로, 버림받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심하게 대했는데.
"너는 왜 이렇게까지 나란 사람한테……."
나를 이끄는 단호한 손짓으로부터, 하고 싶었잖아? 하는 아쿠아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려와서 다시금 호흡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네가 내놓은 답은 간단했다. 내가 원한 것이니까. 그 이유에는 어떤 의도도, 사정도 가치도 개입되지 않았다. 오로지 이유 자체만으로 존중받은 한 인간의 바람. 너는 그렇게, 한 번 더 나의 세계에 마법을 건다. 두근거리는 가슴은 금방이라도 부풀어 터질 모양새로 질주한다. 사실은 하고 싶었어.
아아. 그토록 보고 싶었던 꿈이다.
여기—인생—의 주역은 네게 맡겼다. 하고 싶은 연기를 해라, 아리마 카나.
나도 아리마가 하고 싶은 연기를 보고 싶거든.
있지, 나, 지금이라면 정말로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마침내 결심이 선 이 순간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홀로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돌아와야 했는지 모른다. 지금은 아쿠아가 곁에 있다. 아쿠아, 나는 너로부터 분에 넘치는 마음을 받았어. 그렇다면 이제는 내가 부정했던 너에게 손을 뻗어 다가갈 차례다. 주역인 자신도 포기하려고 발버둥 칠 때, 아쿠아만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온전히 바라봐 준 것처럼. 부디 너무 늦지만 않았기를.
끝내 나는 너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이걸로 괜찮다고 생각해. 알았다면 품고서 나아가면 되는 거잖아?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이유만으로도 어디로든 내몰리지 않을 가치가, 어디에나 당당히 설 권리가 있다.
그러니까 아쿠아, 들어줬으면 해. 이게 내가 찾은 '나'의 정의야.
"나는 아리마 카나."
요동치는 심장박동이, 별무리가 나를 감싸고 너울거린다. 그래,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내놓은 이 대답이 너에게 충분했을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정답에 가까운 답이라고 생각한다. 아리마 카나라는 다섯 음절에, 나라는 인간을 설명할 수 있는 모든 수식어를 빠짐없이 담아서 너에게 줄게. 카나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인지 아쿠아는 그를 향해 미소짓는다.
"네 인생을 살아."
아쿠아, 너는 언제나 나를 이상하게 만들어. 처음 만났던 날부터 그랬다. 너는 정말 나쁜 사람이다. 나를 멋대로 뒤흔들고, 절대 혼자 내버려두지 않는 그런 사람.
그래서일까. 그런 너도, 나도 싫지 않아.
***
사람은 간단하게 죽는다.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면 바로 움직여야 해. 아니면 늦어버린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위태로워 보이는 너에게서 차마 눈을 뗄 수 없었다. 의미부여 따윈 하지 않아. 촬영이 끝났을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그가 걱정되어 찾아나섰던 게 전부였다.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까 그거, 마무리 짓는 게 어때?"
아쿠아의 제안에 카나는 자신있다는 듯 웃어보인다. 잘 보라고. 이게 나야.
"그래도, 빛은 있으니까."
하지만 환희에 찬 눈물을 마주하고서야 깨닫는다. 더는 모르는 척 할 수 없는 것이다. 내세운 것들은 허울 좋은 자기합리화였을 뿐. 역시 나는 이런 네가 다시 보고 싶었다. 불멸의 빛을 가진 별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차디찬 달빛을 받아 빛나는 태양이 눈 앞에서 타오른다. 꿈이 아니야. 결국은 내가 닿지 못했던, 하잘것없는 인간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던 반짝임이 흩날려서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시게 너를 비춘다. 빛은 정말로 있다. 여기에 있다. 좋은 얼굴이 됐구나. 연출가는 미소지으며 속삭인다.
"이것 봐. 할 수 있잖아."
네 빛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얼어붙을 만큼, 이 겨울밤보다 더 시리고도 행복한 광경이다.
아리마,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선택이야. 어쩌면 나는 언제까지고 네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은 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눈 앞의 소녀는 언제나처럼 제멋대로에 다부진, 약하지만 강한 사람이다. 끝내는 포기하지 못한 사람, 내가 보고 싶었던 아리마 카나. 그걸로 됐다. 네가 원하고 내가 바란 너의 행복이라면. 앞으로는 더 빛나는 너의 인생이 될 테니까.
너는 내가 듣지 못했으리라 생각했겠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마지막이 될 뻔했던 네 인사를 들어버렸다. 고마워, 라니, 감사 인사를 해야 할 쪽은 분명 나인데. 나는 언제나 죄악감이 이를 드러내고 웃는 이 지옥같은 삶에서 너에게 가장 고통스럽게 구원받고 있으니까. 세상에 이렇게 최악인 동시에 최선인 인연이 있었던가. 슬프게도 말이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옅게 덧칠한 이 감정을, 악의 가득한 조소를 마주하고 드러내고 싶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다.
너와 함께인 이상 나는 마지막까지도 행복한 속죄 대신 괴로운 구원을 선택할 것이기에.
자정이 지나도 풀리지 않을 마법으로, 서로의 세계는 어둠을 지나 다가올 내일을 위해 태동하기 시작한다. 한 뼘 자라난 마음을 소중히 품고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정말 별 내용 없는 개인적인 여담 및 후기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