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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 오랜만이야.
음. 오랜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네. 모르겠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첫 인사말은 항상 고민이다. 미안. 또 썼다 지웠어. 결국 늘 하던 의례적이고 지루한 말 적을 거면 왜 매번 고민하는 걸까….
애초에 언제부터 너랑 나 사이에 인사말을 신경써야 되는 사이였다고 이런 걸 고민하고 앉았는지. 한심해.
여전하네. 너랑 관련된 거면 사람을 이상할 정도로 바보 같은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건.
뭐, 됐고. 무슨 얘기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 사실 별 일 있는 건 아니야.
그냥 최근에는 자리도 잡고, 한숨 돌리고 생각할 시간도 주어져서. 예전 일들 이것저것 되짚다 보니.
웃겨, 여유가 생기면 원래 온 목적대로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하기나 하지.
그래도 가끔 사색에 잠기는 것도 나쁘지 않더라. 그 끝의 많은 부분이 너라는 건 어쩐지 완~전 분하지만. 엄청나게 오래된 인연도 아닌데.
어릴 때부터 알았던 건 맞지만 실제로 같이 지낸 건 3년 남짓이고….
그런데도 지금처럼 언제든 갑작스레 떠올라서 싱숭생숭한 기분이 되어버리는 게 놀랍다, 정말.
새삼스럽지? 나도 내가 여기 앉아서까지 널 기억하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야.
12월인데도 그렇게 춥지 않아. 눈 대신 비가 내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온통 여기저기 얼룩진 잿빛이야.
이걸 쓰고 있는 지금 시간은 오후 6시 10분. 저녁 시간이네. 그다지 배는 고프지 않지만.
어떻게 지내? 지금 너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이렇게 문득 '우리'였던 시간이 떠오르기도 한다는 건 아직 어떤 형태로든 내가 미련을 가지고 있다는 거겠지?
그땐 좋았는데,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전부 흐릿해져서 개중에 그나마 선명한 것들만 각인처럼 남은 걸 테고.
사실은 힘들었던 일도 정말 많았는데 말이지, 그리고 그건 대부분 지금도 현재진행형이지만.
그 이상으로 다들 필사적으로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불평할 틈도 없었고.
힘들었던 건 전부 잊어버리고 없었던 일로…그런 거짓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별로 하고 싶진 않다. 무슨 변덕일까, 이건.
그럼에도 이러나저러나 기뻤던 때의 기억이 덜 빛바랜 건 어째서일지.
아마 고통스럽기만 했던 일보다 즐겁고 행복했던 일들이 특별해서 그런 거라 생각하고 있어. 내 마음대로.
이제껏 지나온 길에 힘든 일은 언제나 있었으니까, 그렇게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걸 거라고.
마치 나를 쫓는 그림자처럼 말이지.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어딜가나 들러붙는.
그러니까 난 즐거웠다고 생각해. 너랑 함께 보낸 시간. 미화시킬 생각은 없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특별하고 소중해서 아직까지도 가슴 한 켠을 시끄럽게 만드는 행복이 있어.
잠깐 창문 좀 닫고 와야겠다. 바람 소리가 심해.
다시 돌아가서 하던 얘기를 하자면.
음, 몇 번이고 혼자가 되기를 선택한 건 나지만 정말, 정말로 쉽지 않더라. 소중하다는 걸 깨달은 후에는 더더욱.
자아를 무시하는 건 언제나처럼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거야말로 늘 해온 거잖아.
나 그래도 연기는 자신 있거든.
그래도 아직 많이 부족한가 봐. 쉽지 않지, 얼마가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고.
어쩌면 익숙해지는 게 본능적으로 무서운 걸지도 모르겠어. 나를 이룬 것들, 나를 타인과 구분짓고 정의하는 모든 것들이 의미를 잃고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그런 막연한 두려움 말이야.
나라는 존재는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더는 알지 못하게 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그러니까 더 필사적으로 만들어내는 거겠지. 자신까지도 속일 완벽하고 흠집 없는 거짓을.
너도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기억 속 마지막 순간까지 혼자 남기를 고집한 너도, 괴로움도 슬픔도 삼키고 그렇게 지내왔을까.
거짓으로 스스로의 시야마저 가린 채로?
네 어머니, 아이도 이런 마음으로 그렇게 외롭게 빛나고 있었던 걸까?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해. 아직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하고 어렵기만 한 것 투성이야.
최선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정말 다른 방법은 없었나, 하는 고민을 하기도 하면서 말이지.
오늘처럼 문득 떠오를 때면 미련하게도 그런 생각이 나를 붙잡아. 역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외로워지는 건 싫잖아. 평생 누구와도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으면 외로움 같은 것도 몰랐을 텐데.
그래도 어쩌겠어. 그만큼 소중하니까 아픈 거겠지.
그치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말이야, 어느 쪽도 거짓이 아니고 진실이 아니야. 결국 끝에 남은 건 다들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거든.
꿈꾸던 걸 이루고, 원하던 걸 손에 넣어서 잘 살아가기를.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고 되물어도 할 말은 없네. 그냥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야.
너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어.
별로 상관 없지 않아? 어차피 아무도 모를 걸. 생각한 것만큼 세상은 나에게 관심이 없고 눈에 보이는 결과만을 평가하는 게 전부니까.
하지만 이렇게 굳이 보이지 않는 부분을 들추고 써내려가고 있는 걸 보면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좋겠다, 하고 내심 바라고 있긴 한가 봐.
적어도 나에게 그 무엇보다 소중했던 사람들에게만이라도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어서.
역시 무리야, 안 그래? 좋은 사람으로 남기엔 늦었다고 생각해. 이제 다 끝난 일이고.
그래도 그건 전부 내 선택이었어. 그러니까 감당해야 하는 거겠지.
살아오면서 내린 선택들로 인해 일말의 후회조차 없었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지만.
주위에 휘둘려서 한 선택이건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건 내가 내린 선택이니까.
아마 틀리지 않았을 거야.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이런 나를 비난하고 좋을 대로 떠들어도 어쩔 수 없지만.
세상이 내가 의도한 대로만 흘러간다면 참 편할 텐데. 그치?
노력한 만큼 보답받고, 성취할 수 있었으면. 내 선택의 의미 하나하나를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준다면.
이렇게 구차하게 꺼내보이지 않아도 진심을 느껴준다면.
이 세계의 누구에게도 현실은 그렇게까지 친절하고 아름답지 않은데.
그 이상에 가까이 다가가려 할수록 눈에 들어오는 건 음영에 가려진 비루한 현실 뿐이야.
아무도 제대로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강한 빛 아래에 감춘 그림자 말이야.
다들 실망하겠지. 그게 보통이니까.
그럼에도 아쿠아, 나는 단 한 순간도 그림자를 미워한 적이 없어.
언젠가 그 어둠에 먹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이 떨려올 때도, 너와 내가 밟고 선 자리가 어느 그림자의 일부분이라 할지라도.
그건 거기에 빛이 존재했다는 사실의 증명이고 내가, 네가 그 빛이 있는 곳에 발을 디디며 살아있었다는 흔적이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나는 네가 가진 그림자까지도 좋아했어.
내가 좋아한 건 다른 게 아닌 너였으니까. 이 음침한 나르시시스트야.
정말이지 바보 같아. 겁쟁이. 끝내 도망치기만 하고.
그래도 너를 탓하진 않을게. 그게 네가 잡은 미래인걸.
언제까지고 이런 감상에 젖어서 살고 있을 수만은 없을 거야. 지나간 일들은 뒤로 하고 앞을 봐야겠지.
난 여기서 하고 싶었던 연기 공부도 좀 더 폭넓게 하고, 여전히 신경질적이고 귀찮고 짜증나는 애로 살고 있어.
무엇 하나 호락호락하지 않고 언제나처럼 매번 어려움의 연속이지만 말이야.
내가 내린 결정이니까 어떻게든 감당해야지!
그러니까 너도 후회하지 말고 나아가.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지금 있는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 살아.
도망쳐도 좋아, 네가 선택한 그 결말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게 내가 너를 보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어딘가에서 보란듯이 잘 살기를
***
흘러가는 대로 써내린 문장들을 담담하게 읽었다. 닫힌 창을 가볍게 두드리는 불규칙한 빗방울 소리에 맞추어 순식간에 문자 위를 훑고 지나가던 눈동자가 모든 페이지를 통틀어 딱 한 번 쓰인 이름에서 멈췄다. 곧이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미처 맺지 못한 남은 마지막 문장에 다다라서야 멈춘 시선이 펜으로 세게 눌러 쓴 흔적 사이를 헤맸다. 힘주어 쓴 글씨들이 날카롭게 비웃고 있는 듯했다. 여전하구나. 거짓말을 하는 그 입은.
"……최악이네."
내뱉는 한숨소리가 발신인도, 수신인도 적히지 않은 미완성의 편지를 언제나처럼 마구잡이로 구겼다.
어떻게 되어도 좋을 이야기다.
아마 내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네가 이 세상에 있더라도 전하지 못할 시시하고 쓸데없는 말.
예라(@ __858_1)님과 연교한 글•그림입니다
허락 받고 업로드해요🩵🤍
다들 따뜻한 크리스마스 되시길🫶🎄
[아쿠카나] 포식자 - 1
그건 마치 선명히 물든 핏빛 같은,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분명한 포식자의 모습이었다.
[아쿠카나] Merry Happy Christmas
너는 항상 나를 이상하게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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