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쿠카나 글

[아쿠카나] World end:SCENAIRO

태어나 이름뿐인 배역을 받은 존재에게

🤍 by 🤍
5
0
0

최악의 시나리오

툭, 툭. 투둑.

“……비 많이 오네…….”

“무슨 생각 해?”

“……그냥. 멍때리는데.”

아무래도 오늘 뭘 하긴 힘들 것 같다.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며 카나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아쿠아는 말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저 성격은 변하질 않네, 하는 상당히 모난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쿠아는 나오던 발걸음을 돌렸다. 원래도 그리 많지 않던 말수가 부쩍 적어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굳이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 꺼내지 않게 된 건 카나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몇 년간 두 사람을 둘러싸고 급변한 세계가 모든 걸 바꿔놓았기에.

아직도 그날의 일이 선명하게 머릿속에 새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곳곳에서 귀청을 찢는 사이렌 소리와 군중의 혼란을 막기 위해 어떻게든 진정시키려는 안내 방송 소리, 비명 섞인 울음소리에 초여름의 밤이었음에도 멎지 않던 떨림까지. 그런 것들이 신호탄이 되어 세계는 급속도로 멸망했다. 남김없이 부서지고, 쓸려나가고, 좀먹혔다. 지금껏 인류가 이룩한 기술로는 자연에 완벽히 대항하기에 역부족이었을까. 작은 틈에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문명은 그간 안일하게 여겼던 것들로부터 연쇄적으로 터지는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었다.

몇 번은 죽을 고비를 넘겼을 것이다. 이름조차 모르는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어떤 이유에서건 쓰러져 가는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안 할 수 없었다. 약도 없는 전염병, 추위, 더위,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싸움, 우연한 사고와 자살. 운이 좋게도 살아남았다. 운이 좋은 것인지 지금껏 살아있는 것을 저주로 생각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살아남은 건 운이 좋은 일이었다. 네가 곁에 살아있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아쿠아가 없었으면 제아무리 버틴다 한들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단지 그가 가진 생존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마도 아쿠아가 없이 ‘혼자’ 살아남았다면 그건 저주였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너와 나를 제외한 모두가 흔적도 없이 말소됐다는 건 저주에 가깝다.

언젠가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을 극한의 상태로 몰아넣고는 드러난 모습을 인간성의 ‘본질’로 정의하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날 때부터 더럽고 추악하고 아무튼 끔찍한 존재이며—딱히 이 얘기를 전면으로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어느 정도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후 싸운 적은 없지만 아마 두 사람 다 제정신으로 살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몇 번이고 죽음을 떠올렸을 거라고 확신한다. 동시에 이기적이게도 살아갈 생각을, 모든 것이 지겹다는 배가 불러도 한참 부른 한탄을, 그럼에도 매일 아침 눈을 뜨며 느껴지는 심장이 뛰는 감각에 비굴할 만큼 안도했을 거라고.

“할 게 없는 날이라니. 기분이 이상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하염없이 추적대며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다 돌아온 카나가 시멘트칠이 다 드러난 벽에 기대앉았다.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이 누워 있던 아쿠아가 대꾸한다.

“그럼 나가서 비라도 맞을까.”

“감기 걸릴 일 있어?”

그런 뜻 아닌 거 알면서. 작은 투덜거림 뒤로는 다시 빗소리로 범벅된 정적이 찾아왔다. 얼마 가지 않아 아쿠아가 말을 꺼냈다. 내일은 뭐 할까.

“몰라. 하늘 봐선 하루 만에 그칠 비는 아닌 것 같은데.”

“장마 기간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날씨고 계절이고 멀쩡한 게 없으니까.”

“비 그치면?”

“음……생각을 해 보자.”

이 모든 일이 있고 한동안 우리에게 옛날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있는 건 무너진 잔해의 현재와 어떻게든 생존해야만 하는 기약조차 없는 미래 뿐이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전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강박적으로 앞만을 바라보며 집착했다. 해야 할 일을,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야만 했다.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과거를 말로 꺼냈다가는 정말로 걷잡을 수 없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였는지도 모른다.

일종의 현실도피였다. 존재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예전에 있었던 일, 가졌던 그 무엇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자신을 이 망가진 세계로부터 보호하기라도 할 수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을 함구했다. 엄마가 있을 시골에는 찾아가지 않았다. 전화도 편지도, 연락할 방법 또한 이제는 없다. 초반에는 무너져버린 사회와 국가의 체계를 재구축하려는 움직임도 분명히 있었다. 소식을 알려면 알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그로부터도 몇 년이 흐르고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조차도 거의 보이지 않게 되어버린 지금, 모든 체계는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나도 참 좋은 자식이 되기는 글렀지, 틈만 나면 그런 생각을 했다. 평생 엄마의 말을 잘 듣는 딸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엄마, 아마 어딘가에서 멀쩡히 살아서, 이런 큰일이 났는데 낳아준 제 어미 걱정도 안 하고 찾아와 볼 생각도 않는다고, 자식 키워놓은 거 다 부질없다고, 언제나처럼 실망스러운 심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을 거야. 평소 같았다면 마음 한구석에 수도 없이 생채기가 날 상상이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이쪽이 조금 안심이 됐다. 죽어서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받는 것보다 낫다. 더는 정말로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기를 내심 바라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진실을 찾지 않는 것에 그런 핑계라도 붙여서 어쩔 수 없는 척, 정당한 척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가 그날 이후 이치고 프로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은 것도 이것과 비슷한 맥락일 터였다. 어딘가에서 다들 기적처럼 생존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싶으니까.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없었던 일로 할 수 있어. 전부. 그야말로 편의주의적인 현실도피.

그러니까, 알고 있다. 결국 우리는 어디로도 돌아가지 못한 것이다. 그리운 과거의 흔적과 절망 뿐인 현실의 증명을 마주하고 받아들이기 두려워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문자 그대로,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어쩌다 한 번씩 예전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된 건 영영 적응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폐허에서의 생활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나서였다. 스치는 농담처럼. 그것도 자주는 아니었지만.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아직 현실감이 떨어질 때가 많았다. 어느 날 깨어나면 회색빛 콘크리트 대신 늘 보던 방의 천장이, 먼지투성이의 딱딱한 바닥 대신 내 침대가 보이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일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는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책이라도 몇 권 찾으러 갈까.”

한참 만에 카나가 내놓은 제안. 아쿠아는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반쯤 잠긴 목소리로 답한다.

“뜬금없네.”

“뭐, 그렇지? 그래도 말이야, 우리 원래 대본 읽는 게 일이었잖아?”

역시 그게 없으면 허전하지.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하는 그가 되레 상심해 보이는 듯했다. 세계가 멸망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들은 배우라는 직업을 수행하던 채였다. 비록 그 커리어는 영원히 그날, 그 시간, 그 공간에 멈춰버렸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제 전부 부질없는 것이었으니. 아쿠아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카나는 조바심이 난 것처럼 혼잣말을 늘어놓는다. 그러니까, 최후의 문명인으로서 남은 의무 같은 걸 지키는 차원에서.

“지금은 식량도 좀 있어서 당장은 찾을 필요 없고, 어쨌든 여유는 있기도 하고…….”

“되게 찔려하네. 별 말 안 했는데.”

“……너, 진짜 짜증 나.”

잔뜩 약이 오른 표정으로 쏘아대는 따가운 눈길에도 아쿠아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곧 의기소침해진 카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먼 곳에서 흘러들어오는 빗소리에 어우러졌다. 그러나 한참 만에 돌아온 아쿠아의 대답은 카나가 모처럼 꺼낸 의견보다 더 예상 밖인 것이었다.

“……할래?”

“뭐?”

“마지막까지 못 했던 거, 하지 않겠냐고.”

여전히 누운 채 등을 돌린 아쿠아를 응시하던 카나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아쿠아가 건넨 말의 의미를 잠깐 생각하던 그가 되물었다.

“……진심이야?”

“…….”

“이런 상태로? 이런 상황에서?”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있지만 카나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는 것쯤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어떻게 생각해도 끔찍한 제안일 것이다. 굳이, 그때를 다시 떠올리는 짓을……. 몇 번을 멀쩡한 옷을 찾아 갈아입고 빨았다 해도 입고 있는 옷은 해졌고 꼴도 말이 아니겠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재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었잖아.”

“…….”

“계속, 하고 싶어 했던 거 아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외의 다른 거창한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말문이 막히기라도 한 듯 꽤 긴 시간 동안 카나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얼마간 침묵 후에야 겨우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건 좀 힘들지 않을까.

“몇 년이 지났는데. 이제 대사도 가물가물한걸, 그동안 다시 기억할 일도 없어서.”

“뭐 어때. 생각나는 대로 하면 되지 않아? 애드리브 잘 하잖아.”

“본인 일 아니라고 참 편하게 말하네. 그것도 그런 데다가 상대역도 없고…….”

“……있어.”

또, 그 말을 이해하기까지 찰나의 시간이 필요했다. 상황을 파악해 나갈 때마다 점차 현실감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너, 기억해?

“그런 거야? 기억하고 있어?”

“…….”

기억하고 있다. 한 글자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전부, 내 것이 아님에도.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다고, 당장이라도 연기할 수 있을 정도로, 지문 하나하나까지 외우고 있다고 말할 용기는 없었지만.

“……원래 네 역도 아니었잖아.”

“…….”

“그걸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고?”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재차 반문하는 그를 두고도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변명하지 못한 쪽이 좀 더 진실에 가까울지도.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물소리만이 차곡차곡 쌓였다. 빗방울이 만들어내는 단조로운 소음이 약간은 지겨워질 때 즈음에 카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란 듯 부산스레 기지개를 켜는 소리에 그제야 돌아보면 팔을 쭉 뻗고 있는 카나와 눈이 마주쳤다.

“뭐 하려고?”

“나가서 비나 맞을까 싶어서.”

“갑자기 그게 무슨…….”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아쿠아를 향해 카나가 살짝, 장난기를 머금은 미소를 입가에 띄워보였다.

“결혼식을 이런 꼬락서니로 할 수는 없지.”

***

오랜만에 함께 출연한 드라마였다. 쟁쟁한 경쟁자들 사이에서 카나는 어렵사리 주역을 따냈다. 아쿠아는 주역이 아니었지만. 스케줄 상 주역을 할 만큼의 시간을 낼 수 없었던 거겠지. 아니면 그저 상대역에 관심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드라마는 평범한 연인의 사랑 이야기였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지만 마지막 회차 즈음에는 주인공 두 사람이 맺어져 행복하게 결혼하는 결말로 마무리되는. 이 일만 잘 풀린다면 성공한 배우라는 타이틀은 쉽게 얻었을 것이다. 한창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배우로서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아주 허무할 정도로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졌다. 마지막 촬영일이었다.

보기 흉하게 찢어진 웨딩드레스를 아무리 세게 쥐고 있는 힘껏 비틀어도 조금도 진정되지 않았다. 장갑 한 쪽은 대피하는 도중 어디에 떨어뜨렸는지도 기억나지 않고, 남은 한 쪽마저도 그을리고 먼지투성이라 성하지 않았다. 면사포는 누더기가 됐다. 갈아입을 옷을 찾을 경황 같은 건 없었다.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카나를 보던 아쿠아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멀겋게 드러난 어깨 위로 조심스럽게 덮었다. 그를 제외한 촬영장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처음 며칠은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푹신하고 깨끗한 이불이 아닌 차가운 바닥에 등을 기대어 맡기면서도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아서였다. 시간이 흐르고 점점 말도 안 되는 현실이 피부로 와닿다 못해 살갗을 뚫어버릴 수준으로 뼈저리게 느껴질 때가 되어서야 몇 밤 정도, 입을 틀어막고 숨 쉬는 법도 잊은 채 정말 원 없이 울었던 것 같다. 그러고도 아침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먹을 것을, 입을 것을 닥치는 대로 찾으러 나섰다. 살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얼마 후에는 날짜를 세는 것도 그만두었다. 이제껏 당연하다는 듯 해오던 일 중 얼마나 많은 것들이 살아가기에 무의미한 행위였던지.

이런 생각을 꺼낼 수 있게 된 건 어찌 됐든 너도, 나도 약간 살만해졌다는 거겠지. 지내다 보니 무뎌진 걸까. 쏟아지는 물방울을 맞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황급히 뒤따라온 아쿠아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요란스러운 빗소리에 묻혀 띄엄띄엄 끊어졌다. 아리마, 그렇다고 진짜로…….

“너도 올래?”

아랑곳하지 않고 건넨 권유도 아마 비가 단단히 친 장막 때문에 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쿠아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내리치는 장대비 아래로 들어선다. 우산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았다. 비를 피할 생각이 없는지 서두르지도 않고 다가온 아쿠아가 카나를 내려다본다. 살짝 염려스러움을 담은 눈길로.

“이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게…….”

“괜찮을 거야. 좀 춥다 싶으면 들어가면 되지.”

근데 너, 지금 모습이 말이 아니다. 재미있다는 듯 작게 웃는 카나에게 아쿠아가 예의 무심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며 받아쳤다.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완전 물에 빠진 생쥐 된 주제에.”

“그러게~. 이런 꼴로는 역시 결혼식도 무리겠지.”

잠깐 떨어졌던 시선이 이끌리듯 다시 그에게로 향했다. 이제야 네가 한 돌발적인 행동의 의미를 눈치챘다. 거짓말처럼 긴장의 끊이 탁, 놓였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본심을 숨기는 데에는 여전히 서툴다는 것이 새삼스레 와닿는 탓에 살짝 안심해버리는 것이다.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변함없이 내가 알던 아리마 카나는 아리마 카나, 라는 평범하고도 당연한 사실에. 어느 틈엔가 하늘만 망연히 바라고 있는 붉은빛 동공 위로 커다란 손바닥이 드리웠다. 얼굴을 향해 빗발치던 굵은 물방울들도 금세 멎었다. 이미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으로 범벅이 된 채 엉망이었지만.

“뭐, 뭐야.”

놀란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열심히 굴러다녔다. 비를 가린 손 너머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부터 그런 게 중요했다고.

“바보.”

“…….”

“하고 싶으면 하면 되는 걸.”

숨을 한 차례 들이켰다. 입을 앙다무는 모습만이 가려진 손 아래로 보이는 전부였다. 목이 메어서 마른침을 끊임없이 삼켰다. 그의 말대로였다. 하고 싶었다. 정말로, 어렵게 손에 넣은 소중한 기회였다. 인생에 다시는 몇 없을 브라운관의 주역이 될 기회였다고. 어쩌면 스타덤에 오를, 가장 가까웠었던 이의 인정을 다시 받을 수도 있었을. 약한 현기증이 일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만에 떨리는 목소리가 꼭 닫혔던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왔다. 나, 하고 싶었어.

“진짜, 진짜 하고 싶었어. 하고 싶어.”

“……알아.”

“근데 이제, 뭘 위해서 해야 해?”

아무것도 없어. 격해진 감정을 눌러 담아 뱉은 그 말이 목 부근을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그렇다. 이게 우리에게 남은 현실이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완벽한 연기를 한들 봐줄 이도, 미워할 이도, 엄마도, 컷 사인도, 컷 사인으로 연기를 끝내 줄 감독조차도. 더는 뭘 위해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게 되어버렸어. 아무것도 안 보여, 네 얼굴이 보이지 않아,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내 잿빛 하늘을 가린 두 손바닥 아래로 네가 바라보고 있던 건 무엇이었을까. 연장자라고는 도저히 보기 어려운, 앳된 아이의 칭얼거림에 지나지 않았을까.

“……널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라면. 차마 꺼내지 못한 두 번째 이유가 혀 끝에 미련처럼 남아 맴돈다. 허울 좋은 핑계였다. 이제 그 어떤 것도 너에게 다시 연기할 강렬한 동기가 될 수는 없을 텐데. 다리에 힘이 풀리기라도 한 모양인지 카나는 말없이 주저앉았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쪼그리고 앉은 그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것이다. 뭔가를 결심한 듯 뺨을 한껏 적신 물기를 양손으로 닦아내는 카나의 모습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와중에도 쏟아지는 빗줄기에 금방 젖어버리니 달라지는 것은 없었지만. 요란한 빗발 소리를 뚫고 카나의 목소리가, 네 의지가 언제나보다 명료하게 전해져왔다. 아아, 진짜 완전, 최악.

“그래, 해 주겠어.”

카나는 무너졌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다.

“하면 되는 거야. 못할 것도 없으니까.”

일어설 수 있다. 그랬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비는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이미 그쳐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보다 결혼식이라니. 기세 좋게 하겠다고 외치기는 했지만 아무리 연기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막연할 수 없다. 그때는 모든 게 준비되어 있었다. 장소, 의상, 소품, 대본. 현장에서 조율되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기본적인 틀조차 잡히지 않은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해내야 했다. 어떻게든 해내고 싶었다. 그때부터 우리의 여행은—언제나 한 곳에서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고 목적지도 없는, 그야말로 유랑이었다—생존이 목적이 아닌 마지막 연기를 완성하기 위한 여행이 되어 있었다. 더 아름답고 완벽하게, 못다 한 연기에 작품으로서의 마침표를 찍기 위한. 여기, 어떻게 할까? 좀 더 간결하게……. 마음대로. 아, 뭐 어때. 어차피 우리끼린걸. 부케 같은 건 어쩌지.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꼴이 정말 우스운 것 같아, 옷 좀 새로 구해야겠어.

어쩌면 살짝은 들떠있는지도 몰랐다. 앞으로 해야 할 연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한참 대화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말이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하나둘씩 상대역이 되어 줄 유일한 배우와 맞추며 채워나갈 때마다, 다시는 느낄 일이 없을 거라 단념했던 설렘이 배가 되어가는 기분에 낯을 가렸다. 그에 비례해 커지는 출처 모를 불안감까지도. 연기는 여전히 심장을 술렁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사랑해 마지않았던, 않는 것이었다. 부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

소파 위에 누워 왼손을 무너진 천장 사이로 새어드는 노을빛에 비춰본다. 싸구려 가죽이 찢어져 반쯤 속이 드러나보이는 소파에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등을 맡긴 카나가 움직일 때마다 항의하듯 기분 나쁜 쇳소리가 났다. 허공을 가볍게 감싸 쥔 손가락 사이로 품은 황혼이 어느 때보다 붉었다. 비가 갠 뒤의 하늘은 더 청명해지는 법이다. 맑고 서늘한 대기에 짧은 한숨이 딱 한 줌 만큼만, 섞였다.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대사와 행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어딘가를 향해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 무엇도 끼워지지 않은 손가락을 바라보며 감격해야 하는. 남은 건 그것뿐이라. 그렇게 엉망이래도 ‘결혼식 장면’을 ‘연기하는 것’으로 쳐 줄 수 있다면 말이다. 확신이 서지 않는다. 아직도 네가 원하는 게 어떤 건지 잘 알 수 없어서. 늦오후의 나른한 목소리가 아쿠아를 불렀다. 있잖아.

“넌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우리가 앞으로 할 연기 말이야.”

멀지 않은 곳에 앉은 그가 무심하게 대꾸한다. 아무렇지 않을 이유라도 있어?

“그냥 연기일 뿐인데.”

“그걸 누가 모르냐고…….”

괜한 질문을 했다는 뉘앙스가 역력히 드러난다. 여전히 소파에 기댄 채 툴툴거리는 카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쿠아가 물었다.

“왜 그렇게 걱정해? 잘 하면서.”

“그러니까, 실력 문제가 아니야.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이래선, 이건…….”

마치, 진짜 같잖아. 마지막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뱉고 나니 그제야 얼굴이 화끈거렸다. 노을이 비추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바보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잠깐 스칠 만큼. 그러나 찰나의 정적 뒤에 기다렸다는 듯 돌아오는 아쿠아의 한숨 같은 음성이 그것마저 멈춰버린다.

“진짜면 안 돼?”

“…….”

진짜면 안 되냐고. 진짜일 수도 있나. 아니,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할 말을 잃고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은 카나를 향하던 시선이 먼지투성이 바닥으로 옮겨졌다. 여기저기 이가 나간 타일이 깔려 엉망인. 한참의 침묵을 뒤따른 목소리는 카나 것이었다.

“……그건 아닌데…….”

“……그럼 뭐가 문젠데.”

그러게. 뭐가 문제일까. 막힌 말문이 좀처럼 트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끄집어낸 답마저 초라하기 그지없다. 보통은 이렇지 않잖아.

“진짜 결혼이라고 하면, 좀 더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이랑…….”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연기일 뿐이라는 거야.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라는 듯, 그의 말을 그대로 잘라버리는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건조함 뿐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 말 한마디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되어버린다. 왜?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거야? 이런 상황에서, 정말로 사랑하니까 우리는 진짜 결혼하는 거라는, 그런 머릿속이 꽃밭으로 가득 찬 답을 원한 건가? 아니면 지금처럼 확실히 선을 그어주길 바랐어? 어느 쪽이든 끔찍했다. 너도, 나도.

“……아, 그래.”

짧은 대꾸와 함께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며 카나가 옷을 가볍게 털어냈다. 네 말이 맞지.

“고마워. 덕분에 마음 정리가 좀 됐네. 제대로 할 수 있겠어.”

“…….”

“잘 쉬고.”

내일 봐, 라고 흘리듯 중얼거린 인사말이 묵직한 철제 문 너머로 흐릿해졌다. 이제 핏빛이 된 노을 속에서 혼자 남은 이의 그림자만이 그가 남기고 떠난 발자취를 느릿느릿, 기어서 따랐다.

Scene

S#xx 결혼식장, 낮

××, 긴장된 표정으로 결혼식이 시작된 식장 문 앞에 서서 한숨을 내쉰다. 곧이어 들려오는 주례자의 입장 신호와 함께 단상 앞으로 걸어간다.

이런 지문이었겠지. 잔뜩 녹이 슬어 페인트가 벗겨진 문을 열며 생각한다. 오랜 시간 시스템이 제대로 운용됐을 리 없는 작은 온실은 깨진 창 덕분인지 그럭저럭 괜찮은 공기를 품었다. 외벽은 관리가 되지 않아 뿌옇게 흐려진 채 유리 벽을 타고 자란 등나무의 형체만 겨우 보이는 게 다. 문을 열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들이닥친 재앙에 미처 버티지 못하고 죽어 나간 식물 더미와 그 자리를 빼앗아 차지한 잡초, 와중에도 강한 생명력으로 금이 간 콘크리트를 비집고 뿌리내린 이름 모를 덩굴 같은 것들이었다. 잔해를 밟으며 천천히 온실에 입장하던 아쿠아가 정장과는 거리가 먼 자신의 차림새를 떠올렸다. 별수 없다. 가지고 있는 옷 중 그나마 제일 깔끔한 걸 고른다고 고른 건데. 발걸음이 단상 대신 온실 끝에 설치된 작은 분수 앞에서 멎었다.

이제 신부가 입장할 차례였다.


○○,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상기된 얼굴로 단상을 향해 걸어온다.


정제된 발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주의를 돌리자 살짝 빛이 바랜 흰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카나는 부케 대신 어딘가에서 꺾어 모은 꽃을 한아름 양손에 든 채였다. 꽃을 뿌려 줄 화동도, 손을 잡아 줄 부모도 없이 혼자. 어딘가 살짝 긴장한 것만 같은 그의 걸음걸이가, 발그레한 뺨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시선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임에도.

조심스러운 걸음걸이가 곁에 와 멈췄다. 다가온 그와 얼굴을 마주하는 장면. 내내 발치를 응시하던 푸른 눈동자가 처음으로 카나의 붉은빛 눈에 가 닿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떠올렸다. 얼마 전에 나눴던 대화를. 맞아, 그리고 이 장면 말이야.

“원래라면 카메라에 비쳐야 할 텐데.”

“그렇지. 지금은 없으니까…….”

그냥 서로 카메라라고 생각하고 보는 수밖에. 아쿠아가 넌지시 넘긴 대답에 카나가 갑작스레 재미있다는 듯 작게 웃기 시작했다. 영문을 몰라 곁눈질만 하는 아쿠아에게 그는 애써 잠시 숨을 고르고서 입을 열었다.

“미안, 예전 일 생각나서.”

“무슨 일?”

“아, 그때 아 군은 못 봤나? 하긴.”

“뭐야.”

살짝 부아가 치민 것만 같은 대꾸를 듣고도 입가에서 여전히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한동안 부를 이유도 없었던 아 군이라는 호칭까지 꺼냈단 건 그런 의미였다. 즐기고 있구나.

“예전에 비슷한 요청을 들은 적이 있거든. ‘카메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돌아볼래?’ 하는.”

“…….”

“그때랑 비슷한데 전혀 다른 게 재밌어~. 사람을 카메라라고 생각하고 돌아본다니.”

묵묵히 듣고만 있던 아쿠아가 불쑥 던진다. 그래서?

“응?”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어떻게 했냐니, 그야…….”

의아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중얼거리던 카나가 금세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씩, 웃었다. 그건 나중에 확인해보면 되겠네.

—아. 그거, 이런 의미였구나.

눈이 마주친 두 사람, 입가에 미소가 조금씩 번진다.

말갛게 빛나는 미소가 입꼬리를 타고 미끄러지다 천천히 흩어졌다. 수줍게 눈앞의 신랑을 향한 붉은 눈동자 속, 차오른 다정함이, 행복이, 진심으로 잘 어울린다.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신부 같다. 행복해 보였다. 전부 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건만.

그때도 저런 미소를 보여줬던 걸까. 네가 하려던 말이 그거였을까.

잔인했다. 끝내 손에서 놓으려고 했었던 것이 눈앞에서 일순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거리에, 가장 거짓된 형태로. 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얼굴을……보여줬던가. 보여줬다. 본 적 있다. 그랬었다.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네가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던 날들이.

그러나 그런 미소를 바랄 자격 따위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비극이었을지도 모른다.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어떤 것도 전할 수 없었던 나에게는 끝까지 외면하는 방법 뿐이었다고. 손에 피를 묻힐 생각으로 시작한 복수에 대한 대가이자 벌이었다. 무엇 하나 줄 수 없으면서 바란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이기적인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것조차 제대로 해내질 못해 지금껏 질질 끌고 온 미련이 나를 여기까지 몰아세워서, 그래서……. 숨통을 무겁게 죄는 적막 틈새로 카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흔들린다. 간신히 다잡은 의지가 무너질 것만 같이 위태로울 때마다 상처받은 얼굴들을 기억했다. 목적을 빙자한 맹목 아래 내가 짓밟은 모든 애정을, 수많은 시간에서 나로 인해 슬퍼하던 너를.

연기는 거짓말이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게 빛나는, 가장 진실에 가까운, 그럴듯하게 꾸며 낸 거짓말. 진심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 거짓이라도 다시 한번 바라기를 꾀했다. 네 곁에 선 이가 내가 될 수 없다면 설령 거짓일지라도 재현해 보이겠다는 그런 욕심.

그의 말대로였다.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다. 좀 더 좋은 사람이, 네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설 자리였다. 네 웃음에 보답할 수 있을 만큼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 있어야만 했다. 그런 생각과는 달리 뜻하지 않은 재해의 연속으로 모든 것을 잃은 그의 옆에 살아남은 건 아주 우연히도 나였기 때문에, 그저 그런 사실만이 우리 사이에 남아서 불변의 연결고리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여기 있어. 비겁하기 짝이 없다. 잔혹하다.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서로에게 전부가 되고, 단 하나의 선택지를 강요하는 현실은.

그랬기에 진짜일 수 없었다. 이 결혼식은 진짜여서는 안 됐다. 그것만이 이제 와 카나를 위해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존중이자 마지막 예의라고 믿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연기에 그쳤어야 했던 것. 사심으로 더럽혀진 욕망을 채우고 나면 다시는 꺼내 볼 일 없는 수단으로서. 그러니까, 그래야만 했는데.

“아쿠아……? 왜 그래?”

그런 결심은 몇 번이고 본 적 있는 그의 행복 앞에서 너무나도 쉽사리 무너져버린다. 재앙이었다. 적잖이 당황한 카나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가를 울렸다. 밀려오는 두통에 사고가 흐트러진다. 나는, 너는 어째서 여기에 있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하면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마주 웃어야 한다. 이건 네가 시작한, 그런 거짓말이잖아.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 멸망한 세계와 같은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어느 것 하나 남김없이 부서진 채였음을. 머릿속을 관통한 이명 사이로 몇 번이고 이름을 부르는 음성이 겹쳤다. 아쿠아. 아쿠아.

“괜찮아? 아쿠아.”

“…….”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세게 주먹을 쥔 채였다. 말없이 번지는 미소 대신 잔뜩 어그러진 표정을 한 내가 네 눈 위로 비치는 것을 바라본다. 결국, 이러려고 나는…….

“……역시 아리마는 대단하네.”

“아쿠아? 무슨…….”

그제서야 눈을 맞춘 그가 처음으로, 웃었다. 바람이 스쳤다. 이명이 멈추지 않아.

“—.”

너를 여기까지 끌고 왔구나.

잦아들던 바람이 한층 더 거세진다. 깨진 창과 금 간 벽 틈으로 흐르는 공기가 나뭇잎을 시끄럽게 흔드는 소리를 만들어 사운드에 심한 노이즈가 섞인다. ×××, ○○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있다. ○○, 한참 멍하니 듣고 있다 화난 얼굴로 손에 든 꽃을 그에게 내던진다. 말소리가 들려오지만 온실 내부의 녹음 소리에 불명. ○○, ×××를 내버려 둔 채 뛰쳐나간다.

아, 이런 건 원래 없던 장면인데.

뭐……상관 없나. 방금 만들었다고 치자.

***

숨이 차서 욕지기가 올라올 때까지 내달렸다. 가쁜 호흡을 몰아쉴 때마다 흙먼지 섞인 텁텁한 공기가 허파를 가득 채워 휩쓸고 돌아나가기를 반복했다. 기분 나빠, 불쾌해, 짜증 나, 역겨워, 음침해, 싫어, 최악. 도대체 뭐야? 할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의 표현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차피 연기잖아. 그래, 연기. 어지럽다. 엉망이 된 심장 고동이 깊숙한 곳에서부터 강하게 울렸다. 아쿠아에게서 들은 마지막 말이 뇌리에 들러붙어 사라지지 않는다. 쭉, 기다렸잖아?

“그 자리로 돌아갈 날만.”

그가 손에 든 것은 반지였다. 어째서 지금 여기에 있는지 모를, 그때의 촬영 소품.

“이걸……네가 어떻게 가지고 있어?”

“…….”

“왜 이게 여태 네 손에 있는 거야?”

저기, 뭐라고 대답 좀 해. 말없이 반지를 끼워주려는 아쿠아의 손을 뿌리치며 카나가 다그쳤다. 내쳐진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보면 알잖아.

“굳이 물어서 대답을 듣고 싶은 거야? 갖고 있었어. 그동안 계속.”

“…….”

“너라면 이 자리로 돌아오지 않을까 해서.”

돌려줘야지. 이건 네 몫이니까. 여느 때와 같은 담담한 목소리였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평범한 사실을 말하듯. 이상했다. 이상하다. 전부 다. 망가진 온실, 갈라진 틈을 뒤덮은 녹음, 그리고 그 앞에서 미소 어린 얼굴을 한 네 모습까지, 한 가지도 빠짐없이. 심장이 미친 것마냥 뛰었다. 마치 그날처럼.

“내가 묻고 있는 게 그런 게 아니란 건 알잖아…….”

“알아.”

“그럼, 이건…….”

시선이 크게 흔들렸다. 아쿠아가 웃었다. 비웃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가 나뭇잎이 요란스럽게 부딪히는 소리 위로 포개진다. 결혼, 축하해.

“갑자기 그게 뭔…….”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하는 기분은 어때?”

꽃을 한아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속이 울렁거렸다. 어지러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혹스러움이 묻어나는 말이 생각을 거칠 새도 없이 튀어나온다.

“누, 누가 언제 너 같은 걸 좋아한다고……!”

“남의 자리를.”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을 파고들어 죄었다.

“빼앗으면서까지 여기에 선 사람과.”

그야말로 최악이다.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

밤이 되었다. 그저 그것만이 사실이었다. 시간 같은 건 알 수 없게 된 지 오래였고, 딱히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것을 세어 두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아, 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뛰쳐나간 카나가 돌아오지 않은 지 반나절은 지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것이 아쿠아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혼자가 된 사람만이 돌아왔다. 두 사람이 지난 며칠간 묵었던 폐건물로.

아무것도 없는 조용한 밤이었다. 물빛을 담은 눈동자가 줄곧 카나가 있을 유리창 너머를 비췄다. 쓰러지듯 기대어 앉은 곳의 건너편으로 별이 가득한 하늘이 보였다. 병원에서 올려다본 밤하늘이 꼭 이랬던가. 그마저도 희미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모든 것이 완전히 부식되어 사라졌다. 이걸로 됐다. 이걸로 편해질 수 있다. 이제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니까. 마지막까지 곁을 지켰던, 이름을 부르면 대답해오던 너도 없다. 그러니까 이대로면,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부 끝. 그런 생각을 하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스스로 끝낼 수 없다면 누군가가 나를 단죄하기를.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바싹 마른 입술 사이로 약한 숨결이 오갔다. 쉬고 싶다. 지쳤다고 생각할 틈도 없이 이미 만신창이였다. 그가 떠난 이후로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몇 번이고 그렸던 장면이었다. 지극히 당연한 반응에 불행한 너와 끔찍한 내가 서 있는.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어딘가 잘못된 인생이었다. 거짓말의 시작이었고 그랬기에 긍정 같은 건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인생을 몇 년 씩이나—세계가 무너지지 않았던 시기를 포함한다면 훨씬 오랜 시간을 카나는 곁에서 말없이 지켰다. 이유도 없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로. 그에게도 나름의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을 거라는 것쯤 생각하지 못한 게 아니다. 다만 그 수많은 이해관계 중 가장 비효율적이고 비이성적인 것 하나가 있었기 때문에. 너는 나를 사랑했다. 다른 모든 득실과 계산 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선 유일한 이유이자 의미였다. 사랑한다는 것, 결코 가볍지 않은 감정의 무게.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감당해야 할 애정의 무게를.

네 행복에는 내가 필요했다. 함께 있어야 했다. 가장 쉬우면서 어려운 일이다. 몇 번을 삼키며 살아왔는지 모를 구역질 나는 죄책감으로부터 눈을 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런 세계라면 더더욱. 나는 네가 진심을 다해 행복하고 자유롭길 바라고 있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사랑한 것이 전부 사라진 세계에서 행복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었는데. 아리마 카나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 또한 믿음이었다. 아리마 카나라면, 나를 잃은 세계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온 몸을 짓누른 피로로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웠지만 정신만은 또렷했다. 이따금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날카로웠다. 혼자 있기에는 지나치게 큰 실내를 미약한 자신의 숨소리만이 차분히 채워내는 밤이, 망막 깊숙한 곳을 파고들어 새겨지는 오롯한 어둠이 이상하리만치 낯설다. 잠이 오지 않는다. 잠들 수 없다.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는 건가. 변한 것은 네가 있던 자리밖에 없는데도. 언제나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는 한 끗 차이라 발치에 채일 만큼 가까웠다. 그러나 시간은 죽음 앞에서 끔찍할 정도로 늘어지며 흘러갔다. 역시 기다리는 시간은 길고 지루하니까, 그냥 이대로 끝내버리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

네가 돌아왔다.

***

열어젖힌 문 너머로 한층 차가운 공기가 스미는 것이 느껴졌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 부서진 전등 아래에 무력하게 기대어 앉은 실루엣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어제처럼, 잘 자라고 인사한 그 순간과 꼭 같은 모습으로. 곧 소리가 나는 쪽으로 이끌리듯 고개를 돌린 아쿠아의 눈에도 어둠 속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흰 원피스 자락이 스쳤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없어야 하는데. 헛것을 보는 게 아니라면 뇌리에 지겹도록 새겨진 분명한 카나의 실루엣이었다. 시선이 맞닿은 곳에 그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왜…….”

왜 돌아온 거야. 믿을 수 없다는 듯, 상처받은 얼굴을 감추려 손 아래로 파묻으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치기 어린 원망이 실렸다. 어떤 말을 내놓아야 네가 바란 정답이었을까. 아직도 그런 건 잘 모르겠다.

“마저 하려고.”

“…….”

“어울려 주겠다고. 네 그 말 같지도 않은 놀이에.”

아쿠아는 카나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런 건 이제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었는데도. 어차피 이대로 끝일 거라면 네가 돌아온 이유라던가, 마저 하는 연기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친 발걸음이 의욕을 대변하듯 비척거렸다. 다 무너져가는 층계참을 오르는 앞선 발걸음도 다를 바 없이 위태로웠다. 멀쩡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 어느 쪽도 제정신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껏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불안한 채 끊어질 듯 이어지던 걸음걸이는 옥상으로 이어진 묵직한 철제 문 앞에서야 겨우 멎었다.

옥상 문을 먼저 열고 나선 카나가 내달렸다. 겨우 허리 높이의 녹슬어 부스러져가는 철제 난간에 몸을 가누고서야 돌아섰다. 반사적으로 카나를 향해 뻗어지는 손을 애써 거둬야 했다. 뭘 하고 싶은 거냐, 나는. 붙잡지도, 말리지도, 그렇다고 다시 밀어내지도, 결국 아무것도 못 할 주제에. 그런 아쿠아를 바라보던 카나가 한참 만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그에게 한숨 섞인 목소리를 꺼냈다.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왜 돌아왔냐고 물었지.”

“…….”

“역시 난 널 안 좋아해. 그래서 돌아왔어.”

“그게 무슨…….”

“난 네가 죽을 만큼 미워서, 네가 원하는 대로는 절대, 아무것도 안 해주기로 결심했거든.”

아아. 다행이야. 늦지 않게 돌아와서. 몇 번을 다시 곱씹고 고민하고, 그 언동의 의미를 마침내 결론지었을 때 다른 무엇보다 크게 자리한 것은 두려움이었다. 네 머릿속을 가득 채운, 그다음의 장면에 대한. 생각하고 싶지 않다. 죽는다는 건. 그래서 안심해버렸다. 아직 네가 이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잊었어? 나 성격 무지 나쁜 거. 얌전히 따라줄 거라고 생각한 게 멍청한 거 아냐?”

“너 진짜…….”

“마음에 안 들어? 그렇게 나와야지.”

입꼬리가 올라갔다. 짓궂음을 살짝 머금은 미소와 달리 애처로움이 어린 눈동자가 줄곧 아쿠아를 향했다. 이렇게까지 마음이 놓이는 건 어째서일까. 다른 모든 걸 잊어버릴 정도로. 답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너도 마음대로 해.”

“…….”

“어차피 우리 뿐인데. 이제 아무래도 좋잖아?”

사랑하니까. 그게 네가 내게 가진 의미의 전부. 카나는 짐짓 과장된 톤으로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아아~ 이걸 어쩌나. 다시 돌아온 내가 미워서 못 견디시겠나 봐요~.”

“아니, 딱히 그렇게까지는…….”

“아니긴 뭐가 아냐. 아까 문 열자마자 아주 죽을상을 하는 걸 네가 봤어야 했는데.”

핀잔을 주며 난간에 기댔던 몸을 일으키는 카나.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쿠아가 피한 시선 끝으로 불쑥 찾아와 나타난 그가 또 한 번, 개구지게 웃었다. 도저히 즐거움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내가 아주 미워서 죽겠지? 꼴도 보기 싫지?”

“…….”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 반대라고, 즐겁게 웃고 있는 너를 보면 비참해질 만큼이나 좋아한다고. 그래도 너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웃어 보여.

“마음껏 미워해. 뭐 저런 애가 다 있냐고, 도움도 안 되는 여자라고 원망해.”

“……무슨 말을 그렇게…….”

“지키고 싶은 건 지켜. 손에 넣고 싶은 게 있다면 가져.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

“그러니까, 살아. 그렇게 괴로워하고 원망하면서라도.”

나도 멋대로 네 옆에 있을 테니까. 마지막 말에 아쿠아가 맥 빠진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포개어졌다.

“뭐야.”

“아니……그냥. 정말 여전하네, 그런 점이.”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는 말에 카나가 미간을 좁혔다. 그런 그를 오랫동안 바라보던 아쿠아가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정말 할 거야?

“당연하지. 그러려고 돌아왔으니까.”

카나의 대답은 확고했다.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시선이 아쿠아에게로 마주 다가와 부딪힌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행복한 신부’.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바라고 있었다. 내 곁에서 행복하게 웃었던 너와, 그 미소의 이유가 나이기를.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 엉망진창 뒤죽박죽으로, 감당 못할 만큼 전부 제멋대로여도 좋다면.

Ancore:마지막 시나리오

시야에 담는 곳마다 희미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여명이 찾아오고 있었다. 공기의 흐름은 새벽답게 아직 차가웠다. 마주 보고 선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어느 누구도 먼저 말을 건네거나 행동하지 않았다. 어떤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좋을까. 어디서부터 다시, 맞춰가야 하는 걸까. 아마 분명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참을 말이 없던 네가 내리 깐 시선을 발끝에 고정한 채 툭 던진 말 한마디가 그랬다. 어떡할까.

“……역시 처음부터 다시…….”

“……‘신랑은’.”

아쿠아. 왠지 널 보고 있으면, 바보 같아, 라는 생각이 들어버려서 말이야.

“‘언제나 신부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변치 않고 일생을 함께하기로 맹세합니까?’”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게.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시작된 혼인 서약의 장면에 아쿠아가 질책하는 듯한 당황한 시선을 보냈으나 카나는 그만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웃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후련하게.

…주례 소리가 들려오고, 식순이 지나면서 혼인 서약이 시작되면 장내의 소란스러움도 한층 더 잦아든다.

그건 네 눈에 비친 나도 마찬가지겠지. 나도 너랑 크게 다를 것 없는 겁쟁이에 나약한 인간일 뿐이니까.

“……‘맹세합니다’.”

한참을 차지한 적막을 깨고 아쿠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맹세, 맹세라니. 사치스럽기 짝이 없는 단어다. 그런 거창한 언어를 붙일 만한 것이 못 될 거야, 내 애정이란 건. 그러니까 아마 나는 너를, 이런 방식으로밖에 사랑하지 못해.

…혼인 서약의 맹세에 답하는 ×××. 차례는 신부로 넘어가고, ○○역시 긴장한 얼굴로 혼인 서약에 임한다.

“‘신부는 신랑을’…….”

그래도 있잖아, 그런 거짓말이 고작 내 사랑 정도를 대가로 너를 구할 수 있다면.

우리, ‘배우’잖아?

이미 아무것도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멀리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되어 닿지 않고 소멸해간다. 나지막이 대사를 읊어나가는 네 모습이 검푸른 잿빛으로 덧씌워진 여명 아래서 아득했다. 제대로 사랑받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는, 그래서 이런 ‘놀이’나 하고 있는 우리들이 숨이 막힐 정도로 애달파서. 잠겨버린 목을 애써 쥐어짜낸 음성이 볼품없이 바람에 흩어진다. 아, 싫네.

“……‘네. 맹세합니다.’”

진짜가 될 수 없는 결혼식. 나는 네 말의 의미를 이제야 제대로 이해했는지도 모른다. 그건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것을. 단지 너를 사랑하고 있을 뿐이라고, 진심과 이타를 맞바꿀 만큼, 그뿐이라고.

×××와 ○○, 서로의 손을 잡고 잠시 눈빛을 교환한 후 퇴장하기 시작한다. 환호와 박수 소리가 함께 들려오고, 하객의 축복 속에 식장을 빠져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비추면서 OST 재생. 엔딩 크레딧.

fin.

시나리오는, 여기서 끝.

“아 군.”

……시나리오는, 여기서 끝?

“오늘은 뭘 할까.”

내일은, 1달, 1년 뒤에는 우리 뭘 하고 있을까. 흐르는 시간을 세어나가는 것조차 무의미해진 세계에서. 붉게 젖어가는 여명을 한참이고 고요히 바라보던 카나가 입을 열었다. 돌아보는 시선이 교차하면 네가 환하게 미소지었다. 푸른 잿빛 하늘 끝으로부터 퍼지는 햇살이 세계를 물들인다. 선명한 붉은색 머리칼 위로, 창백한 빛을 띤 백색의 옷자락 위로 오렌지의 태양 빛이 덧쓰인다. 가슴이 아린다. 모든 것이 자신의 색을 되찾아가는 광경이 심장에 얕은 생채기를 남겼다. 지금껏 살아오며 숱하게 봐 온,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을 그런 장면이 역설적이게도 눈부시고 잔인했다. 성한 곳 하나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했다. 상처가 아물고 나면 흉터가 남을 것이다. 선명하게, 되돌리지 못할 아픔의 흔적이 되어서. 새겨진 흉터는 언제고, 몇 번이고 다시 살아나 나를 괴롭힐 터였다. 죽음이 발치까지 손을 뻗은 어느 날에, 생존했다는 사실이 저주처럼 느껴지는 모든 나날에 곁에 있는 너를 원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째서 이런 현실을, 삶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냐고. 그럼에도 지울 수 없다면 끌어안은 채 부딪히고 괴로워하고 가여워하며 살아가. 우리들은 배우니까. 그게 네가 내게 맡긴 최후의 시나리오였다. 불확실한 미래에 가진 모든 것을 걸었다. 태어나 이름뿐인 배역을 받은 존재에게.

“……글쎄다.”

“싱거워.”

“신혼부부 연기나 할까.”

결혼식 했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당황한 채 타박을 주는 카나의 모습 뒤로 이른 햇살이 비쳤다. 사랑하는 이의 곁에 선 사람은 행복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변치 않고 그 모든 순간에 네가 함께일 이야기.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H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