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송
유페디바, 1500일 기념
"안돼."
고다이버의 손에 들린 작고 부숭하고 꼬물거리는 털뭉치를 발견했을 때, 유페니아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가 살면서 아주 많은 '동생'들을 책임져온 탓이었다.
철 없는 어린 아이들이란! 밖에 내놓고 잠깐만 방심하면, 나무 위에서부터 어디 동굴에까지 기어들어가 별에 별 생물들을 찾아내 오곤 했다. 그리고 고 지저분한 털투성이들이 집(이 있다면) 문지방을 넘지 않도록 하는 것은 큰 누이로서의 중대한 의무 중 하나였다.
"하지만,"
당황해서 일단 뱉고 본 듯한 서두는 유페니아의 '스으읍' 하는 소리에 바로 막혀버렸다. 유페니아는 이런 일에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제대로 키울 수 있다며 꺼내는 옹색한 변명들에 대한 반박 백 가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회유와 설득, 압박과 폭력까지, 아이가 납치당한 야생동물을 얌전히 돌려두고 오게 만들 방법도 아주 많이 알고 있었다. 자기보다 한 뼘은 더 큰 주제에 잔뜩 위축되어 있는 디바를 바라보며, 유페니아는 짐짓 단호한 동작으로 팔짱을 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일곱 살도 아니고 동물을 막 주워오면 어떡해."
그러나 말을 하는 동시에 유페니아는 깨달았다. 일곱 살도 열일곱 살도 아니고, 이제 서른 일곱 살에 가까워지는 디바가 새끼 동물을 주워 왔다고? 예상 밖의 행동에 놀라워하는 게 먼저였을지도 모른다. 몸에 밴 습관 탓에 거두절미하고 혼부터 내기 시작했지만.
어쨌든 그들은 나라 안팎의 사정으로 각자 너무 바빴고, 침입자를 경계하기 위해 훈련 받은 사냥개를 들이는 게 아니고서야 동물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애초에 여유가 있다면 동물 이전에 집 잃은 아이들을 키울 위인들이었다. (재단 설립과 고액 기부와는 별도로.) 그리고 디바도 그런 저런 사실들을 모르지 않을 터였다.
"그게...“
디바의 품, 아니 손 안에서 까만 생물체가 또 한 번 꼬물거렸다. 몸의 대부분이 그의 손가락에 가려져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세상에, 이제 보니 사람 두 손 안에 쏙 들어갈 만큼 작은 크기였다. 측은지심이 있는 인간인 유페니아는 약간 걱정스러워졌다.
"새끼인가 봐? 처음부터 손을 대면 안됐어. 어미가 찾고 있으면 어떡하려고."
"...어미와 떨어진 것처럼 보여서. 그리고 비가 올 것 같아서…"
주눅 든 목소리로 대답하며 디바는 손을 펼쳤다. 창백한 손바닥 위에서 꼼지락대고 있는 것은, 채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아기 고양이었다. 유페니아는 몇 마디 더 잔소리를 하려다 멈췄다. 이건…
“……”
너무 작다. 정말 작고 연약해 보이는 생물이었다.
갓난 것은 우느라 시끄럽기 마련인데 그것은 좀체 소리를 내지 않았다. 솜털 난 코와 입을 조금씩 꼬물거리다 간신히 힘빠진 ‘미잉’ 소리를 낼 뿐이었다. 달달 떨며 휘적이는 털 달린 게, 고양이의 튀어나온 앞발임을 유페니아는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고양이라지만, 기실 고양이가 되지 못한 살덩이였다.
이런 걸 있던 자리에 돌려두면? 그럴싸한 상상을 해보기도 전에 밖에서 ‘우르릉 쾅’, 하는 천둥 소리가 났다. 너무 극적인 연출이라 신이, 물론 세상에 ‘리브’ 같은 신은 없지만, 아무튼 어느 전능한 존재가 머리 위에서 ‘내쫓을 거냐? 진짜로? 그렇게 여리디 여린 생물을?’ 하고 호통을 치는 것만 같았다.
“…그래. 알겠어. 확실히 이런 날씨에 밖에 두긴 좀 그랬겠네. 그럼…”
삽시간에 전투력이 급감한 유페니아의 두 눈을 디바가 빤히 들여다보았다. 직전까지 시선을 제대로 못 맞추는 것 같았는데? 일곱 살도 열일곱 살도 아닌 주제에, 종종 얄미운 아이 같은 계책을 사용하는 디바였다. 유년 시절에 부리지 못한 어리광을 연인에게 뒤늦게 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유페니아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가, 이미 암묵적으로 합의된 사안을 번복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시원시원한 인물이었다.
“비가 그칠 때까지만 맡아둘까?”
작은 축생이 집 밖에서 죽어가도록 좌시할 수는 없다… 는 대의를 안고 귀가하긴 했지만, 디바는 돌봄, 특히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짐승을 돌보는 법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따뜻함이 충분치 못한 물로 아기 고양이를 씻다가 유페니아한테 혼이 났고, 때마침 와 있던 저택 관리인(※주 1회 근무)이 지나가듯 ‘누런 코가 나오는 걸 보니 감염인 거 같은데…’ 중얼거린 말에 급히 항생제를 구해다 먹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게 벌써 사흘째였다.
“하루에 다섯 번은 먹는 것 같아…”
“사람 아기보다는 낫네.”
애인의 한심한 행태에 속이 터져, 아예 자기 옆에서 두고 보려고 서재 한 켠에 요와 방석을 가져다놓은 유페니아가 말했다.
“갓난 애는 하루에 일고여덟번은 먹여야 해. 엄청나지.”
유페니아에게는 동생이 넷 있었다. 무사히 살아남은 아이만 넷일 것이다. 그 밖에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의 손을 거쳐갔을지, 어쩌면 본인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디바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연인을 바라보았다.
“가혹한 일이었겠어.”
“…아니, 그런 말을 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지잖아.”
그대로 두면 정말로 이상해질 터였다. 어린 아이가 어린 아이를 돌보다니 가혹하고, 힘들었을 거고, 발라노어의 아이들을 그런 궁지로 내몬 제국과 귀족들이 어쩌고. 그래서 유페니아는 빠르게 잘라냈다. 혼자 땅을 파길 좋아하는 연인의 성정을 잘 알아서. 말이 막힌 디바의 시선이 두어번 깜빡였다.
“그럼… 대단한 일을 했다고 하자.”
“나는 물론 대단하지, 그럼.”
어깨를 으쓱이며 유페니아는 농담아닌 농담으로 대꾸했다. 발라노어가 침략으로 황폐해진 것은 역사적 진실이었고, 숱한 아이가 죽어가는 것을 모두가 보았다. 그가 거둔 ‘동생’들 중에서도 죽은 애들이 있었다. 많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세월에 깎여 둥글고 부드러워진 사람의 태도였다. 과거의 비극을 별 일 아닌 양 말하는. 디바는 그런 삶의 자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둘 사이에 묘한 침묵이 잠깐 지나가던 때, 요에 웅크리고 있던 되다 만 고양이가 ‘미역 미역’ 작은 소리를 냈다. 디바의 까만 머리와 유페니아의 파란 시선이 동시에 아래로 내려갔다. 분비물을 질질 흘리며 휘적대는 조그만 생명체가 어미를 - 혹은 자신을 돌봐주는 누구건 - 찾고 있었다. 짤막한 다리들은 가느다란데, 우유를 잔뜩 먹어 배만 빵빵했다.
“믿기 힘들군.”
“뭐가?”
“이게 몇 달 안에 고양이가 될 거라는 것이.”
“잘 키워서 튼튼해져야 그렇게 되겠지.”
디바가 집게 손가락을 길게 뻗자, 만들어지다 만 덩어리의 작은 발이 그것에 달라붙었다. 예상 외로 강하게 붙잡았는지 손을 들자 말랑한 몸이 허공까지 따라왔다. 살고자 하는 산 것의 의지였다. 제대로 보지도 걷지도 못하면서, 뻗은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도 거기에 힘껏 매달리는 의지. 디바는 약간의 경의를 느꼈다. 혹은 감동이라고 해도 좋았다.
“꼭 그렇게 될 거야.”
말하고서 디바는 조금 놀랐다. 자신치고는 과하게 확신이 담긴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힘이 세니까. 기운이 굉장해.”
“벌써 네 자식쯤으로 생각하게 됐어?”
그 말에 디바가 소스라치려다 간신히 참는 기색이 역력해서, 이번엔 유페니아가 놀랐다.
달턴이란 가문을 세상에서 물리적으로 지워버린지도 여러 해가 지났지만, 디바는 여전히 그런 것들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자신의 혈통. 자신의 가족. 자신의 후손. 자신이 가진 저주받은 피, 혹은 어떤 치명적인 인자가 다른 누군가에게 이어지는 일을 상기시키는 모든 단어들. 슬프게도 자신처럼 피학적인 죄책감에 절어 사는 인간은 뭔가를 돌봐선 안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냥 희망 사항이다. 그만큼 클 때까지 여기 둘 수도 없겠지. 사람 손을 타버렸으니, 적당한 곳에 보낼 거야. 집고양이로 살 수 있도록.”
연인이 디바의 얼굴을 쳐다봤지만 그는 눈길을 피했다. 그리고선 떼어낸 손가락 끝으로 괜히 아기 고양이의 까만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살살 만져준다는 게 그만 간지러웠는지, 고양이는 짤뚱한 주먹으로 자기 얼굴을 문지르며 ‘믹’ 소리를 냈다. 지켜보던 유페니아가 넌지시 말했다.
“이름 정도는 지어주지 그래.”
“이름…?”
“그래. 다른 집에 가면 다른 이름으로 불릴 지도 모르지만.”
디바는 눈을 굴렸다. 이 ‘임시 보호’ 조치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이 생물이 이 집에서 나름의 존중과 보호를 받는 존재로 생활한다면 그 정도 구색은 갖추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비록 디바 자신은 이름 없는 살인자로 살아가는 것을 자처했다 하더라도.
하지만 자신이 이름을 지어준 존재, 라는 것은 디바에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무심코 죽은 언니를, 갓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네 미들네임에서 따왔다며 미소 짓던 언니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 보는 웃음으로 반겨주던 언니. 내가 죽인 언니.
디바는 유페니아와 살며 한 가지만은 제대로 배웠다. ‘죽음과 가까워지는 순간에 생각을 잘라내기’. 싹둑.
“좋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작명을 맡기면 안 될까, 유페니아?”
잠시 말이 없던 애인이 태연하게 자신에게로 책임을 돌리자, 유페니아는 조금 황당한 얼굴을 했다.
“응? 내가?”
“그래. 나 같은 사람이 지어준 이름보다는 그 편이 훨씬… 재수가 좋을 것 같다.”
“무슨 이상한 미신이야.”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꾸했지만, 사람이 성실한 유페니아는 꿈틀대는 어린 짐승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온통 새까만 털로 뒤덮여 있어, 타르가 든 통이나 석탄 주머니에 한 번 담갔다 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거의 하루 종일 잠만 잤고, 간신히 눈을 뜬 때에도 아직 눈 색이 흐릿해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까맣고 까맸다. …그런 탓일까, 사실 유페니아가 그 고양이를 보고 연상한 것은 아주 특정한 인물이었지만…
유페니아는 바로 옆의 검은 머리 검은 눈을 가진 여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다 살짝 눈이 마주쳐 재빨리 시선을 감췄다. 아니, 아무래도 새끼 고양이한테 같이 사는 사람 이름을 붙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짓을 시도하면 또 상대의 미친 자해 충동 같은 게 자극 받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 유페니아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글쎄. 평범한 단어면 되지 않겠어? 쟨 까만 색이니까 초코...?
생각나는 대로 말했지만 꽤 귀여운 이름이란 생각에 자신감을 느끼는데, 뜻밖에 디바의 반응이 애매했다. 그게 유페니아의 신경을 소소하게 건드렸다.
"아... 초콜렛은 개나 고양이한테 독이 된다던데…"
"무슨 상관이야."
아무튼 초콜렛은 좋고, 달달하고, 비싸고…
"...사람의 이름을 청산가리로 짓는 느낌이지 않나?"
"뭐!"
유페니아가 기가 찬 듯 소리를 질렀다. 디바는 간만에 빙긋 웃었다. 고양이는 허공을 향해 바르작거렸다.
여자 부부는 고양이 키우는 게 국룰이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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