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가장 긴 날

누가 의도적으로 지은 것이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조합의 이름.

| 밤이 가장 긴 날

#WINTER SOLSTICE

명령에 따를 수 없다면, 오롯이 적합한 판단에서 기인한 결과만이 지침이 된다. 이는 윈터 솔스티스의 방침 밖의 이야기가 될 수 없는 문장이다. 드득, 끝 잡아당겨 벗겨지는 나무의 외피나 날카로운 면 닿아 샥- 소리 내며 찣기는 옷은 불쏘시개로 전락한다. 추운 건 싫다. 침 뱉자마자 얼고 물 묻은 입술 그대로 딱딱거리며 돌덩이로 바뀌는 것 보고 싶지 않다면 얼굴을 옷 밖으로 드러내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인 곳. 윈터는 베르티간이 좋았다. 사람이 죽어도 딱히 묘를 지어주거나 가져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추위 잘 견디게 만들어진 털 복슬한 늑대들이 마구 짭짭거리고 간 뒤엔 금품이 더 잘 보이니, 장성한 인간종 드러누워 있다 하더라도 다가가지 않고 고개 돌리는 것이 우선인 행성. 윈터는 소꿉친구 샤가힌이 눈밭에 파묻힌 날 실종신고를 처리하지 않았다. 샤르헨과 물을 나눠마시며 남게 될 금품의 가짓수를 헤아리다가 금방 곯아 떨어졌던가, 하여간 그랬다. 행성 겉면에서 쇠를 맨 손으로 잡으면 피부가 뜯어질 것 같이 아려오게 된단 점으로 인해, 그 누구도 갈취품을 유품이라 하지 않았다. 관습적으로 가져온 금속 물품들은 모조리 칫솔질과 락스에 의해 딱지 붙은 것 다 떼어진 후 죽은 이의 친족들에게로 전해졌음에도 말이다. 사실 유품이나 장례문화라 하는 것들은 여전히 윈터 솔스티스에게 어색했다. 그러니 사람의 죽음은 기원할 것이 되지 못했는데. 그래서 썸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윈터는 그리 생각했다. 한 번은 베르티간의 이야길 꺼내볼까도 생각했으나 섣부르다 싶었다. 자신이 정말로 베르티간을 알고 있었는 지는 둘째 치더라도, 행성의 표면에서 금속을 맨손으로 쥔 순간 손바닥에 달라붙던 그 냉기가, 목구멍도 침범할 것만 같았다.

윈터는 정말이지, 죽음이 무섭지 않았다. 비유라면 좋았을텐데, 그런 점이 아니라서 미안하다고 앞에 스스로가 진술을 시도할 정도로. 샤가힌이 자기 몸에서 가져갈 인식표가 없었으면 하여 뛰는 다리로 탑승하던 날에도. 물어뜯겼다고 생각한 얼얼한 다리가 더는 얼어서 조각나지 않았을 때에도. 그리고 그 숱하게 많은 나날들까지. 윈터는 그게 고통이라 생각치 않았다. 그러므로 따라올 죽음에 대한 공포감은 인생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베르티간에서는 문화나 풍습이라 할 것이 모조리 묵음과 침묵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떠들지 않으면 몸 안의 열이 나올 길이 없었기에. 베르티간에 있는 인간종들은 수다를 떠는 것에 능숙했다. 살아남았으니 자아에 뼈대는 있으나 모든 말이 핵심을 뿌리 삼진 않았다. 그렇다 하여 체면을 차린다는 건 아니었다. 모든 아이들이 공동육아를 통해 길러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산 자들은 모조리 적당히 빗겨나가는 솜덩어리처럼 지냈다. 아니, 엇갈려 가는 화살촉처럼. 적당한 비유는 모르겠다. 윈터의 팔자에 책을 많이 뒤적거리기가 있지도 않을 뿐더러, 그가 샤가힌의 팔뚝 옆에서 가져간 것이 불쏘시개가 아니라 코트에 잘 붙어있던 우주선 모양의 뱃지였단 점에서. 고작 그 뿐이었단 점에서 정은 망치와 함께 아우르는 도구에만 한정됐다. 그래. 그 뱃지도 어쩌다보니 버리게 됐다. 처음 구치소에 갇혀 신분 확인될 때. 꼬박 사흘만에 나왔지만 뱃지는 물건 보관 과정에서 유실됐노라고 하는 공직자에게 그렇냐고 답 하고 감시대 밖으로 나갔다. 베르티간이라는 행성을 아는 사람은 없었고 윈터는 홀로 유랑중이었기에 그의 감상을 물어볼 사람은 존채지 않았다.

베르티간의 전통 무늬는 -베르티간에도 나름대로의 형태는 있었다. 문화라고 부를 정도로 구체화된 것이 아닌, 조잡한 동작이 전부였다. 고, 윈터는 생각했다.- 대부분 직선이고 손가락 하나라도 구현하기 쉽도록 곡선의 형태가 고작 세 개 뿐인 무늬. 그렇지만 선은 계속해서 그어두다 보면 원인 된다는 걸 모두가 알았다. 노력을 들이면 직선은 곡선이 될 수 있다는 걸 모두가 깨닫고 있었다. 그 누구도 원을 만들고 있다 말했다거나 하는 카더라는 귀에 닿은 적 없었으나 모두가 알았다. 모두가 각자의 원을 덧대어내고 있으리라는 걸. 사람이 죽은 수 만큼. 영역을 넓히고 내전을 겪으며 미쳐버린 사람들의 두개골 만큼. 베르티간은 인간종을 밖처럼 구분하지 않았다. 모두가 베르티간의 사람이었다. 베르티간에서 죽어버릴 사람, 밖에서 죽을 사람. 이 두 가지로 모든 것이 나뉘어졌다. 죽지 않음은 없다. 피를 말려 죽인다는 표현은 행성 밖에서 처음 접해본 윈터는 그 통념을 굳건히 믿었다. 모두가 죽는다. 늑대에게 물려도. 맨 살로 밖을 접하여도. 삶은 죽음으로 향하는 일직선의 길이다. 그것은 생을 버릴 이유가 되지 않았으나 영원을 믿지 못하는 근거론 충분했다.

솔스티스-윈터는 주로 해가 뜨는 행성만 골라 진전했다. 집이라곤 규격화된 단칸방에 알맞게 충당되는 비축품이 전부였으나 호사는 누리지 않았다. 음식도 모조리 먹을 수 있으니 취향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다. 가끔 독한 술과 매캐한 담배, 가끔 돌려두곤 하던 약 정도는 끌렸으나 적극적으로 소모하진 않았다. 취미용품은 어떤 행성을 막론하더라도 비싼 법이니까. 바지 아래의 드러난 약점이 맨발로 보일 때엔 의수라고 답을 하고 넙대대한 형태로 보일 적인 신발이라 했다. 아킬레스건 부근을 끊어두어도 잘만 복구되는 것이 야속했겠고. 그런 식이었다. 여행지로 알려진 곳에서도 선물이나 기념품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떼어두면 선이고 합치면 곡선인 것들. 인간 손으로 쉬이 빚어낼 수 없다며 분명 공장에서 마구잡이로 찍어냈을 것들. 윈터는 도통 정감이 가질 않았다. 그렇다 해서 베르티간을 그리워하냐고 한다면…

변기를 잡고 위산을 모조리 끄집어낸다. 손등 위로 두드러진 핏줄에서 시선은 빗겨나간다. 고개를 위로 들어올리며 숨을 확보하고 몸에 악으로 들어간 힘을 풀어낸다. 화장실 안의 전기 포트를 닫아두진 않았으니 그럭저럭 이 숙박의 주인장에게 전력 공급은 좀 해줄 수 있지 않겠는가. 붕 뜬 머리카락과 미처 닫지 못한 서랍장 옆의 수건 한 장이 바싹 탄 걸 보고선, 물을 틀어 흔적을 지워냈다. 타일이 거뭇거뭇해진 건 방치했다. 어차피 사나흘 뒤까지 잡은 방이니, 요청하지 않는 한 이 걸작을 보러 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방음 잘 되는 곳으로 잡길 잘 했지. 문을 어거지로 열고 나선다. 그리고 썸머를 본다. 겁에 질린 인간. 윈터는 베르티간에서 절대로 마주할 수 없는 얼굴을 유심히 살핀다. 샤르헨조차 사람을 제대로 위로하는 법 몰랐으나, 윈터는 더더욱 최악인 인간이었으므로 그 모습을 흐리게 더듬었다. 나를 안아야지. 명령조에 가깝게 나온 말은 강제성이 동반되지 않기에, 대상은 그대로 자신을 지나쳐서 나간다. 버려졌군. 샤가힌의 남은 머리통, 입술에 박혀있던 자국은 늑대 발톱이 아니라는 걸 떠올린 윈터 솔스티스는 우울해졌다. 그것이 우울함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모든 크레딧을 털어 독주와 매캐한 연초 두 갑, 금방 구해낸 즉석-행복-약을 챙겨 방 안으로 돌아왔다.

양지는 사람을 흐물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죽음에서 멀어지니 단단하다 믿었던 곳 아래로 녹은 물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샤가힌의 우주선, 그깟 뱃지를 찾아오지 못한 것이 너무 짜증났다. 다리가 터지는 순간 제대로 도망치지 못했던 것도 화가 났다. 저 썸머라는 인간이 자길 버릴 궁리하고 있는데도 꼬박꼬박 옆에 달라붙는 제 태도도 가여웠다. 자신이 몇 번이나 썸머에게 사람을 그렇게 험하게 묶지 말라고 한 것이 연민이 아니라 동정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점도 숨 막힐 정도로 싫었다. 따지자면 슬펐다. 되찾지 못한 것과 얻지 못할 것들의 홍수에 가만 손 놓고 서있을 자신이 말이다. 그러니 버러져도 괜찮았다. 목에 멍이 든 것도 상관없었다. 죽지 않을 정도였고, 이 정도면 애교에 가깝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썸머는 돌아오지 않을테고 이곳은 베르티간이 아니니 주워올 금품은 없었다. 베르티간 안에서 죽거나 밖에서 죽거나. 그 누구도 베르티간으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어쩌면 밖에서 만족했을 지도 모른단 과거의 착각을 지웠다. 이곳에선 물건이 기계적으로 부청되는 단칸방이 개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잠자리가 똑같지 않았고 음식과 외피에 치장을 부리는 사람이 한가득이었다. 모두가 원을 지니고 있었으나, 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차지 않았다. 선으로 투박하게 그려진 것은 오롯이 자신만이 그려낼 수 있었다. 모두가 암묵적으로 그러하다고 여기던 사회는 존재치 않는다.

그러다 썸머가 들어왔다. 틈 없는 접촉- 그 내면의 폭력을 숨기지도 않고 드러낸 뒤에는 함께 잠에 들었다. 약을 복용하고 싶다는 투정을 통해 자신을 챙길 의사가 있음을 확인했다. 저열한 방식이었으나 유용한 접근법이라고 판단내렸다. 그리고 잠에 제대로 들지 못하는 시간 내내, 베르티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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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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