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gold

Save me

Marigold by 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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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루한 일상, 반복되는 하루, 아무도 없는 오늘. 승연은 생각했다. 세상에 영웅이 있다면, 부디 자신을 구하러 와주기를.

승연은 집 바깥에서 간간이 들려오던 소음을 회상한다. 꼭두새벽에는 그 나름의 업무에 매진하기 위해 나서는 이들의 발걸음 소리였고 해가 완전히 떠오를 적에는 학교에 늦으면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이던 아이들의 소리였으며 해가 중천에 걸릴 즈음에는 그럴싸한 식당을 찾던 이들의 소리였던 소음. 저녁 시간에는 저마다의 가정에서 울리던 기분 좋은 웃음소리였고, 그러므로 심야에야 자신의 목소리로 가득 채운 삶을 살 수 있었던 평범한 동네의 소음. 남들과 다른 생활 패턴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수 없는 소음이 오랜 잠을 방해한다는 의미였으며, 그럴 때면 이웃들의 집을 중심으로 오롯이 자신의 집만, 혹은 오롯이 자신만이 다른 시차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독립된 시간선에서 살아가거나 혹은 그 자신만이 시차 부적응에 시달린다는 것은 아주 긍정적인 일이 아니었으나 그들의 소음이 자신의 낮을 깨우듯 자신의 소음 또한 그들의 밤을 깨우며 살아가고 또 그 과정에서 대단한 마찰이 생기지는 않았으니 그것으로 상관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 태평하고도 철없는 생각을 하던 순간이 있었다. 그러니까, 한 달 전 즈음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시차 부적응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적응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가끔은 버거운 법이었고, 또 언젠가는 자신이 잠들 때면 어김없이 들려오던 소음이 거슬릴 때도 있었으므로 저 소리가 전부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반복되었던 날도 있었다. 여전히 그때의 생각을 잊지 못한다. 그때, 이 소리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면 지금은 예전처럼 소란스러웠을까. 언제나 들리던 생활 소음을 그리워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예상치도 못하게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승연은 구석에 놓인 통조림을 확인하던 시선을 옮겨 창 바깥에 시선을 두었다. 그래봐야 10층을 넘지 않았다만은 높은 층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삶은 특별할 것도 없었으며 엘리베이터가 고장 날 때는 후회까지 되곤 했었는데,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굳이 커튼을 치지 않고 살아가도 된다는 점은 썩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애써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으면 길가에 즐비한 시체나 혹은 인간을 닮은 것들을 마주칠 일도 없으며, 세상이 개판이 되든 말든 눈이 부신 햇살은 구름이나 빗줄기 따위가 가로막지 않는 이상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감은 눈꺼풀 위에 내려앉아 잠을 깨우곤 했으므로.

쟁여두었던 통조림은 손 가지 않는 것들만 남았다. 이런 상황에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영 입맛이 돌지 않는 음식만 먹다 보면 먹은 음식마저 제 몫을 못 하는 법이다. 거의 한 달 내내 통조림이나 즉석식품으로 연명하고 있던 입장에서는 여즉 버틴 것도 훌륭하다 싶긴 했다만 그렇다 해서 한 달 내내 아껴가며 먹은 통조림들이 죄다 돌아오는 것은 아니니까. 바깥에 나가면 음식을 구할 수 있을까. 하다못해 옆집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면 햄 통조림 같은 것이라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하면 몇 주를 더 버틸 수 있을까. 아니, 이렇게까지 버티며 살아가는 것에 의미가 있긴 하나……. 늘어지는 생각의 끝을 붙든 승연은 무릎 사이에 파묻으려던 고개를 들었다. 살아가는 것은 중요한 가치다. 어떤 방식으로든 이지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면 종래에는 잃은 모든 것을 만회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지금, 벌써 무너질 까닭은 어디에도 없다. 희망보다는 오기에 가까웠던 생각을 머릿속에 품은 채 승연은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는 매일같이 들락거렸고 사태가 일어난 이후에도 이틀에 한 번은 작은 희망을 품고 들어갔던 방송용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기가 들어오긴 하지만 항상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고, 인터넷은 끊긴 지 오래인 아파트. 가스도 간간이 들어오긴 하지만 켜지는 시간은 죄다 제각각인 것을 생각해보면 누군가 바깥에서 인위적으로 아파트에 공급되는 기본적인 물자들을 조절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직도 끊기지 않고 나오며 그리하여 언제 끊길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겨주는 물보다 인터넷이나 전기 같은 요소들이 승연에게 중요했던 사유는 승연이 아직 컴퓨터 너머로 마주하던 사람들에 대한 염려를 놓지 못한 까닭이었다. 마지막 방송을 그렇게 끝내서 다들 조금 서운해하지 않을까. 내 걱정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대부분은 다정한 사람들이었으니. 전기가 들어오는 순간이 간간이 있으므로 인터넷이 작동되는 순간도 가끔은 있지 않을까. 그러면 방송을 켜서 인사를 해야 하나, 인터넷에 남아 있을 뉴스를 훑어야 하나. 팔자 좋고 편안한 생각은 딱 거기까지만 하기로 한다. 오늘은 컴퓨터도 켜지지 않으니. 승연은 이 와중에도 먼지 하나 내려앉을 일 없이 관리하던 컴퓨터의 모니터 위를 가볍게 쓸다,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던 방송을 하던 날을 떠올렸다.

강승연. 23세, 프로게이머, 닉네임 케이. 외국에서 출범한 AOS 게임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유행할 시기에 혜성처럼 나타난 승연에게는 천재 게이머라는 수식이 붙었고, 그러한 수식은 한 달 전의 승연에게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뛰어난 게임 실력으로 다져진 단단한 팬층을 바탕으로 활동하던 승연은 프로게이머 계약 조건이었던 월별 방송 시간을 채우기 위해 시작한 스트리밍으로 유입된 팬층까지 합해져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프로게이머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방송을 챙겨볼 만큼 성실한 팬층뿐만 아니라 그 바깥으로 나가더라도 그의 이름을 듣지 못한 사람은 없는 수준이었고, 길을 걸어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을 심심찮게 않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승연은 어느 순간부터 그런 삶이 익숙해졌다. 그런 것들에 취했다는 의미는 아니었고, 다만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는 삶에, 언제나 마음 놓고 게임에 접속할 수 있었던 삶에, 의무이긴 했지만 어쨌든 팬을 만날 수 있는 장소를 하나 더 마련하여 자신의 마음이 동할 때 켤 수 있었던 방송을 켜는 삶에. 남들과는 조금 다른 시차를 가진 대가로 얻게 된 삶에 익숙해졌고 그런 것이 당연해졌다는 의미였다.

승연은 그날도 예고한 시간에 맞추어 방송을 켰다. 캠을 조절하고 화면을 공유한 채로 진행했던 게임은 평소보다 이상하리만치 잘 풀리는 구석이 있었는데, 프로게이머라는 것을 알아본 사람들이 게임의 채팅에서 유쾌한 말장난을 건네거나 팬이라는 인사를 건네기도 했고 팀원 운이 지나치리만큼 좋아 한 판도 적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시즌을 앞두고 컨디션과 컨트롤을 끌어 올리는 시점이었으니 팀원 운이 조금은 따르지 않아도 쉽게 판세를 뒤엎을 수 있었는데 일이 잘 풀리니 구태여 자신의 실력을 고스란히 보이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오늘 왜 이렇게 게임이 쉽지? 이상하네. 장난스럽게, 그러나 오히려 기쁘다는 듯이 내뱉은 목소리에 승연이 귀엽다며 온갖 후원이 쏟아진 것은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일이었지만 승연은 그러한 후원 또한 평소보다 많은 양이 쏟아졌음을 확인하고 평소보다 들뜬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건넸다. 한바탕 게임을 마치고 화면 공유를 종료한 승연이 턱을 괸 채 방송의 채팅창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승연이 주로 플레이하는 게임은 독자적인 세계관과 거기서부터 비롯된 캐릭터의 설정 또한 꽤 다채로운 편이었다. 시즌별로 스토리가 개편된다고도 하던데, 첫 번째 시즌의 스토리는 척박한 대지에 내려온……. 게임 밸런스에 영향을 끼치는 내용이 아니었으니 승연은 거기까지만 읽고 그 이상으로 읽지 않았지만, 최근 업데이트된 스토리는 전쟁에 참여한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각자 영웅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뒤에 펼쳐지는 이야기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매일 같이 쏟아지는 후원에 ‘케이가 하니까 그 캐릭터도 진짜 영웅 같다’와 비슷한 맥락의 글이 적혀 있었으니 모르려 해도 모를 수 없는 쪽에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승연은 오늘도 비슷한 내용이 적힌 후원 메시지를 바라보다 입꼬리를 조금 끌어 올렸다. 좋아하는 칭찬이었다, 손가락 조금 움직인 것으로도 영웅을 표방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 아닌가. 세상에 영웅 하나 정도 있으면 좋지, 정신도 도덕도 잃어가는 현대 사회에. 그런 생각도 잠깐이었다. 새로 도착한 후원 메시지를 읽은 승연이 허리를 곧게 펴고 고쳐 앉았다. 평소에도 자주 후원금을 보내는 열성팬으로부터 게임과는 전혀 관련 없는 내용의 후원 메시지가 도착한 탓이다.

케이, 이거 봤어? 조심해야 할 것 같아. 그러한 메시지와 함께 도착한 동영상으로 승연은 시선을 옮겼다. 채팅창 분위기부터 확인할까 싶어 채팅창을 확인해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무슨 어그로냐며 난리를 피우던 사람들이 후원자의 닉네임을 보고 곧 물음표가 가득한 채팅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따로 분위기 정리는 안 해도 될 것 같고, 동영상을 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동영상에 시선을 둔 승연은 흘러나오는 뉴스를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일주일 전 영국 런던에서 이상한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사지를 비틀거나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다가 타인에 대한 공격성을 보이는 존재가 관찰되었고 최근 국내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한 명 발견되었다는 뉴스였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모습이 미디어 속에서 보이는 좀비와 유사하며, 그로 인하여 해당 현상을 좀비 바이러스 현상이라 명명했다고…… 거기서 끝난 영상에 승연은 기울인 고개를 바로 두고 눈을 몇 번 끔뻑였다. 사실이라면 조심해야 할 일은 맞았지만 방송과 어울리는 동영상은 아니었으니 이쪽 방향으로 오래 시선을 두면 안 되겠다, 승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래도 좋은 현상은 아니지 않나, 스트리밍을 하는 사람은 자신인데 다른 방향에 관심이 온통 쏠리는 것은. 시청자들의 피로도를 고려하면 더더욱.

열성팬이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보낸 메시지는 나름의 파급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 팬도 알고 있었는지, 곧이어 같은 사람이 보낸 후원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혹시나 하고 가져왔다고, 밖에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조심하라고…… 방송을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승연은 이어진 메시지까지 보고서야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뭐라고 할 리가 없는걸, 어쨌든 나를 걱정해서 보내준 거잖아?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승연은 시청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평소에 잘 하지 않던 게임을 실행시켰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쨌든 유쾌하고 어쩌면 바보 같은 게임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심각한 게임을 실행시켰다간 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져 현실의 걱정에 잇닿을 것이고, 프로게이머 겸 스트리머 케이는 그들을 현실에서 한 발짝 물러난 가상의 공간에 가둘 책임이 있었고 스스로 자신의 세계에 들어온 이들에게 웃음이 피어나게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그런 승연의 판단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어떤 게임을 켜든 뛰어난 컨트롤을 보이는 승연이었지만 지금 막 실행한 게임은 이상하리만치 키보드 인식이 튀는 부분이 있었고, 승연은 정확히 그 부분을 싫어해 좀처럼 실행하지 않는 게임이었으나 ‘그 케이가 버벅거린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시청자가 많은 게임이기도 했다. 방금까지는 모든 판에서 훌륭한 플레이를 선보였으나 다른 게임을 켜자마자 이리저리 헤매기 시작한 승연의 모습을 보던 채팅창이 웃는 이모티콘과 초성으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뭐, 게임은 마음에 안 들지만 팬이 웃으면 그걸로 된 거지. 승연은 모처럼 한 건 했다는 생각을 하며 한 시간 정도 키보드를 두드리다 방송을 종료할 준비를 했다.

가지 말라는 채팅이 쉴 새 없이 올라왔고 승연 또한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방송을 끄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찌 되었건 시간이 늦었다. 지금 잠들지 않으면 자신도 피곤하겠지만 방송을 보겠다고 밤늦게까지 깨어있던 팬들도 다음날 컨디션 난조를 겪을 것이 분명했다. 채워야 하는 방송 시간도 거의 다 되었으니 딱 내일 방송을 켜면 괜찮으리라는 계산을 마치며 승연은 내일 다시 방송을 켤 테니 오늘은 자러 가라는 간단한 코멘트를 남겼다. 이제야 그를 보낼 준비가 된 듯 잘 가라는 말과 잘 자라는 말이 정신없이 섞여 올라가던 채팅창과 후원 메시지를 보던 승연이 문득 입을 달싹였다.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자, 별일 없을 거야. 왜 그런 말을 했는지도, 그런 말이 정말 해야 하는 말이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승연은 그저 그렇게 말했다. 아까 전 보았던 동영상이 계속 머릿속에 맴돈 탓이겠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닿기에는 조금 피곤한 날이다. 맞지도 않는 게임을 오래 하고 있으면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감각이니 승연은 이 또한 스스로 불러온 피로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캠에 손 인사를 건넸다. 방송 종료를 누르자마자 몰려오는 피로를 감당하지 못하고 바로 뒤에 놓인 침대에서 잠을 청했던, 그 날의 그 순간. 승연은 그 날을 떠올리다 말고 손을 뻗어 침대의 이불을 쓸었다.

그렇게 인사를 건넨 밤, 다음 날 자고 일어나자마자 인터넷을 확인하려던 순간을 승연은 떠올렸다. 인터넷 통신이 원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던 순간이었지. 당연히 게임도 제대로 실행할 수 없었고, 인터넷 사이트를 확인하는 것조차 어려워졌음을 깨닫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전날의 도네이션이었다. 좀비 바이러스 사태라고 했던가, 당장 인터넷이고 뭐고 전부 끊길 만한 계기는 그것뿐이지 않나. 몇 번이고 새로고침을 눌러 겨우 웹사이트에 접속하는 데에 성공한 승연은 포털 사이트에 떠오른 기사를 확인했다. 하나같이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는 웹사이트에 시선을 고정한다. 속보라는 말머리가 붙은 기사들은 죄다 좀비 바이러스 사태의 위험성을 알리고 있었고, 뉴스를 하나 클릭해 전날 동영상으로 보았던 내용을 재차 확인하자마자 그것이 마지막 자비였다는 듯이 인터넷도 완전히 끊겨버렸다. 그날 방송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지만, 당시에는 금방 끝날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승연은 뜻하지 않은 휴가를 누리기 위해 침대에 몸을 눕혔다. 뭐, 세상은 언제나 혼란스러웠고 과학자들은 언제나 답을 찾았으니까.

다만 이번만은 안일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길어봐야 일주일 정도 칩거하면 상황이 많이 나아져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까지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으니. 일주일째가 되는 날에는 세상이 정말 다 이 지경이 된 것이 맞나 싶어 처음으로 창문 바깥을 내려다보았고, 의식 없는 채로 걸어 다니는 사람 몇을 확인하고서는 급하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더 지나고서는 가스도 불안정해지기 시작해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 전기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냉장고에 있는 식품을 최대한 빠르게 처리했고, 다시 일주일이 지나고서는 그나마 냉장고에 있던 음식도 완전히 동이 나거나 못 먹을 정도로 썩어버렸고, 그리하여 식량이라도 구할까 싶어 오래도록 닫혀 있던 문을 연 순간 한때는 가끔 안부도 주고받고 매일 오전 여섯 시면 대문을 밀어 여는 소리를 내던 옆집 아주머니의 텅 빈 눈동자와 마주쳐 큰 몸싸움으로 번지기 전에 급하게 문을 닫았다. 한참 집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지만, 억지로 귀를 틀어막고 오지도 않는 잠을 몇 번이고 청하고 나니 울리던 소리도 사라졌다. 제풀에 지쳐 어디로 간 것이 아닐까, 승연은 이제야 불완전한 가정을 내려둘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되었건, 그렇게 승연의 삶은 완벽하게 고립되었다. 이제는 타인에게서 고립된 지 정확히 한 달이 된다. 한 달 전에, 여기서 자신을 반겨주던 사람들에게 인사라도 제대로 했으면 후회는 덜했을까. 여기서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는 희망찬 생각을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까. 아무래도 나아지지 않을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는 게 지금이 아닌, 적어도 2주일 전이었다면, 아니, 사건 당일이었다면 뚜렷한 해결책이 보였을까. 수없이 이어지는 의문은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하여 맺어지지도 못했다. 같은 팀의 동료들도, 가족들도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니, 살아남기는 했는지도 의문이다. 팬들이야 일방적으로 아는 사이나 다름없었으니 자신 정도는 금방 잊고 살아갈 텐데,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던 직장 동료들이나 평생토록 삶을 지지해준 가족은 그렇지만은 못할 것이 아닌가. 제가 그렇듯이. 승연은 익숙한 가족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다가, 생각의 끝이 자신의 형에게 가닿으면 빠르게 진정됐다. 그래, 게임을 할 때는 몰라도 다른 경우에서는 언제나 믿음직한 형이 있으니까. 형과 다른 가족들이 굳이 떨어져 있을 리도 없고, 같이 있다면 어떻게든 괜찮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고로 승연이 걱정해야 하는 것은 오롯이 본인뿐이었다. 식량은 전부 떨어지고, 집 앞을 점거했던 좀비는 그 자리에 남아 있는지 어디론가 떠났는지도 알 수 없으며, 지금 이 상태로 영영 살아가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자신. 본능이 말했다, 이 장소를 떠나야 한다고. 그리고 본심이 말했다. 전혀 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지금, 이 자리를 떠나 사지로 뛰어드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다만 확실한 것은 하나, 이렇게만 지낼 수는 없었다. 불호에 가까운 통조림을 다 까서 먹는대도 이틀 정도나 겨우 버틸 것이다. 그 이후에 여기서 굶어 죽으니 나가서 사흘 먼저 뜯겨 죽느니 죽는다는 결론만은 같을 것이 자명했다.

승연은 베란다의 문을 열고 창 바깥을 내려다보다, 주방에서 손에 집히는 컵 하나를 잡아 쥐고 창 바깥으로 힘껏 던졌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을뿐더러 지나가는 사람이 맞기라도 할까 걱정이라도 했을 행동이었지만, 당장 산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가지기에는 불필요한 도덕심이며 걱정이었다. 홀로 살아 있다는 데에 지쳐 타인을 고려할 수 있는 상태 자체가 아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챙그랑! 큰 소리와 함께 컵이 떨어지는 모양새를 끝까지 눈에 담는다. 소음이 들리자마자 좀비 무리가 컵이 떨어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지만, 컵이 떨어진 방향을 유추하여 올려다보거나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좀비들까지 몰려들지는 못했다. 소리를 인식하는 범주는 반경 10m 내외인가? 소리에 얼마나 민감할까. 일단 어디서 누가 무얼 던졌는지 파악할 지성은 갖추지 못한 것 같은데, 좀비면 다 그런가? 당장 파악할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다. 집에 라디오라도 들여둘 걸 그랬나. 인터넷이 문제인 거지, 전파는 통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다만 그것도 당장은 쓸모없는 희망임을 승연은 모르지 않았다. 그것마저도 구하려면 나가봐야 할 테니까. 그렇다면 일단 최소한의 안전이라도 확보할 수 있도록 무장을 할까. 딱히 나갈 일이 없으니 열어보지도 않았던 옷장을 오래간만에 연 승연이 가벼운 한숨을 내뱉었다. 살갗을 전부 덮는 옷이나 발을 편하게 하는 신발 정도는 찾아 신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기로 쓸 만한 것이 집구석 어디에도 없다. 여차하면 부엌에서 식칼이라도 들고 나가야 하나. 사람 하나 죽일 깜냥도 없는 데다 어쩌다 사람을 만났는데 실수로 죽이기라도 한다면 그게 더 큰 일이다. 아쉬울 것도 없지만 식칼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자면 정말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 자체가 없었다. 한참 시선을 옮기다 보면 시선 끝에 걸리는 것은 고작 기둥 부분이 나무로 되어 있는 빗자루 정도였는데, 저런 걸 가지고 가자니 신발장에 걸려 있는 구두 주걱 하나 들고 나가는 편이 낫겠다 싶다가도 내구도를 생각하면 그래도 구두 주걱보다는 빗자루가 나을까 싶어 한 손에 빗자루를 들고 휘둘렀다. 프로게이머에다 방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던 성향 탓에 당연히 운동 따위는 저 멀리 두었던 승연이었으나, 그런 승연에게도 빗자루 하나 휘두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긴 이게 어려우면 안 되지. 당연한 생각을 하며 승연은 손에 쥐었던 빗자루를 잠시 바닥에 둔다. 나갈 때 잊지 않고 챙겨가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살상력도 공격력도 낮을 테며 그렇기에 위태로운 상황에서 자신을 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조차 들지 않는 무기였으나, 그런 것도 무기긴 하다는 사유로 조금은 안도하게 되는 것이 조금 우스웠다. 허나 당장 살아남겠다 다짐하는 사람이 어떤 것이든 무기로 붙들고 싶어 할 만큼 절박하다는 게 정말로 우스운 일인가, 그럴 리가 없다. 그러고 보면 1층에 제설 용품이 있었던 것 같은데, 거기에 삽은 없으려나. 거기까지 생각하던 승연은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빗자루도 오래 흔들면 힘들 것 같은데, 삽까지 들고 가면 중간에 무기를 놓치고 좀비 밥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어쨌든 이 생각에만 매몰될 수는 없다. 당장 무기만큼 중요한 것은 새로운 물품을 가져올 가방이었다. 통조림이든 즉석식품이든,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확보할 수 있는 음식은 최대한으로 확보해야 할 것이며 확보한 물품을 손으로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일 테니 등에 메는 가방이 없으면 여러모로 곤란할 것을 알았다. 백팩 사 모으는 취미를 들일 걸 그랬나,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면 분명히 들였을 것이다. 아니, 일 년 정도는 나가지 않아도 될 만큼의 식료품과 자재를 준비하는 게 우선이었을까. 의미 없는 가정이다. 외국에서 처음 발발하여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도시까지 퍼지는 데 일주일도 걸리지 않은 마당에 미리 알았대도 대비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궁금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빨리 퍼질 수 있었을까. 공기 중으로도 감염될 수 있는 여지가 있나? 수도를 타고 감염된다거나. 그렇다기에는 한 달 내내 수도에서 나오는 물을 받아먹고도 멀쩡하게 살아 있었고, 몇 번 창문을 열어 공기를 죄다 바꾸기도 했지만 제 몸에서 이상한 현상이 발발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 어떻게? 꼬리를 물어봐야 명확한 답이 나올 수 없는 문제였으니 승연은 집 안을 둘러보며 마땅한 가방을 찾는 것으로 생각을 환기했다. 마침 학창시절에 들고 다니던 가방이 눈에 띄어 상태를 살폈다. 낡아 보이는 구석이 있긴 해도 많은 물자를 담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준비는 이제 충분하다.

확보해야 하는 것은 식량, 그리고 안전. 허튼짓으로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는 짓은 최대한 자제할 것. 주변에서는 얼굴을 아는 사람이 좀비가 된 모습도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이고, 혹여 그들이 이지를 가지고 멀쩡하게 살아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편이 되어 함께 이 고난을 헤쳐 나갈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아 있는 물자가 없냐며 칼이나 들이밀지 않으면 다행이지. 이런 상황에서. 이런 사태에서. 오래도록 외면했던 현실을 제 입으로 되뇌며 승연은 호흡을 가다듬는다. 바닥에 내려두었던 빗자루를 집어 든 승연이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지금까지 집 안은 그나마 안락한 공간이었으며 평안한 심정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나, 앞으로 자신이 발 뻗은 곳은 안온하고 안락한 장소와는 거리가 멀 것임을 안다.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을 몇 번이고 넘어 다시금 이 안온한 터전으로 발 들일 수 있기를. 그 과정에서, 자신을 방해하는 사람이나 존재가 없기를,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 지나치리만큼 허황되며 필요 이상으로 긍정적인 생각이라면 적기라도 하기를. 승연은 감았던 눈을 뜬다. 현실과 먼 공간에 적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을 생업으로 삼고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이러한 활동도 어쩌면, 그간 해온 일들과 그렇게까지 다른 일은 아닐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신발을 고쳐 신는다. 자리에서 일어나, 평생토록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문을 열어젖힌다.

문과 관련된 마지막 기억은 이 문을 두드리던 사람에 대한 기억. 아니, 그것을 여전히 사람이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승연은 한때는 이웃이었던 이가 자신의 집 문을 마구잡이로 두드리려 들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주변을 경계했다. 다행히 그 사람은 제풀에 지쳐 다른 곳으로 이동한 건지 아파트 복도에 그대로 남아 있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이 몰고 간 걸까? 혹은 아래에서 큰 소리가 나 그쪽으로 이동했던 것일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당장 없다는 게 중요하니까. 승연은 다시금 전방을 주시하며 빗자루를 손에 꽉 쥐었다. 괜찮다. 정말 괜찮아. 지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까. 사태가 이렇게 된 마당에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겠다는 생각은 사치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승연은 사태가 터지기 전에는 매일같이 오르던 엘리베이터를 외면하고 비상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1층까지 내려가는 것도 일이겠다. 내려가다 체력이 다 떨어지면 어떡하지, 아니, 올라가는 건 어떻게 하지. 거기까지 생각하면 물자를 조금 덜 챙겨와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그건 물자를 구하고 나서 생각할 일이다.

9층에서 8층, 8층에서 7층……. 발소리조차 죽인 채로 살금살금 내려가는 걸음이 5층에 다다랐다. 순간 5층 복도 쪽에서 들끓는 숨소리가 들려 승연은 4층으로 내려가던 걸음을 멈추고 소음이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닫힌 문 너머에서 여전히, 숨소리가 들끓고 있다. 저 정도 소리면 몇 명이지? 한 명인가? 저 문을 부수고 나올 수 있는 확률은? 여러 가지 가능성이 정신을 어지럽혔지만, 계산보다는 전진이 나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 승연은 아예 신발을 벗은 채 양말만 신은 발로 바닥을 딛는다. 틀린 판단은 아니었던 건지 들끓는 숨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에는 신발을 고를 때, 활동성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을 골라 신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집에 그런 신발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고, 이것도 오늘 살아 돌아오면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승연은 마른 침을 삼키며 4층으로, 3층으로, 2층으로. 그리고 기어코 1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새 아무것도 만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1층에 다다른 승연은 손에 들고 있던 신발을 다시 신고 바깥의 동태를 살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좀비는 없고, 집 근처의 구조가 갑자기 바뀌지 않은 이상 100m 안팎에는 편의점 하나가 있다. 그곳에 있는 물자가 전부 털렸다면 다음으로는 500m 근방에 있는 소형 마트에 들리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 같았고, 그다음으로는 2km 정도를 걸으면 나오는 대형 마트에 가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까지 걷고 싶은 마음도 없었을뿐더러, 규모에 비례하여 마트 안에 산재해 있을 좀비들을 마주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달가운 일이 되지 못하였으니 아무래도 편의점에 들르는 정도면 좋을 것이다. 세상만사 제 뜻대로 돌아가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고, 정말로 제 뜻대로 돌아가는 세계였다면 애당초 좀비 바이러스 같은 허황된, 이제는 실재하는 현실이 된 것들도 하루 만에 종식되었겠지만. 그즈음에서 승연은 이미 확신한 셈이다. 아마 편의점은 죄다 털렸을 것이라고. 그도 그럴 것이, 아파트 단지 아닌가. 살아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다면 바로 편의점부터 털어 물자를 확보했을 것이다. 그런 행동을 한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 있을지는 의문이었다만. 다시금 주변을 살핀 승연이 문을 열고 편의점이 있는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동시에 무언가에게 팔목이 붙들려 저도 모르게 빗자루를 휘둘러 상대의 어깨 부근을 가격한 승연이, 고의로 때린 것이 아님을 어필하기 위해 한 손을 어깨높이로 올리고 놀란 시선으로 팔을 붙든 이가 있는 방향을 바라본다. 그 자리에 있는 텅 빈 눈동자를 마주한다.

아까의 충격으로 좀비가 들고 다니던 가방이 바닥에 떨어진 건지, 바닥에 무언가가 둔탁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승연은 두 발 뒤로 물러났다. 당장 다른 좀비들이 몰려들지도 모르는 상황이고, 여기는 사방이 뚫려 있다. 도주로를 확보하기에는 좋을지 모르겠지만 사방에서 좀비가 몰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의미기도 했다. 그나저나 이 사람, 이상하리만치 낯이 익은 것 같은데. 승연은 시선을 들어 상대의 얼굴을 훑었다. 그 사람 아닌가, 마지막 팬미팅에 왔던 내 팬. 꽤나 오랜 팬이었던……. 그런 사람을 이렇게 마주하는 것이 그렇게 달갑지는 않았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기로 했지. 정신 차리자. 일단은 도망을 가야지. 승연은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훑는다. 무게가 제법 되는 것 같은데, 돌아오는 길에 저 가방도 주워 가자. 먹을 만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때 자신에게 열렬한 애정을 쏟아부었던 사람의 물건에까지 손을 대려니 양심이 찔리긴 했지만 당장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시대에 우선시 되는 가치는 생존이지 사사로운 양심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그렇게 생각만 하기로 한다. 마음이 생각을 따라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돌아오는 길에는 가방을 뒤질 일 또한 없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행히 가방을 내려두는 소리 정도에는 주변의 좀비들이 반응하지 않는 건지, 혹은 이 주변에 눈에 띌 만큼의 좀비 무리는 없는 건지 승연의 주변으로 다른 좀비들이 몰려드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당장 해야 할 일은 눈앞의 옛 인연을 뿌리치고 편의점까지 달아나는 것. 승연은 다시금 시선을 주변으로 돌려 도주로를 확보한다. 눈에 보이는 길이 뚜렷해지자마자 뜀박질을 시작했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예년보다 차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토록 살아남고 싶다는 의지 하나로, 혹은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바닥을 박차고 뛰어본 것이 얼마 만인지. 승연은 문득 프로게이머가 되기 전, 그도 아니라면 자신이 기억하지도 못하는 아주 오래전의 자신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낸다. 불안에 대한 방증이었다. 아무 고민 없이도 살아갈 수 있었던 어릴 적의 기억을 밟고 일어나 그때처럼 살아가고 싶다는,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철없이 살아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과거의 조각. 이제야 좀비 무리가 목숨을 위협하고 목전에서 자신의 삶을 와해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받아들였다는 이해의 증명.

그러나 도주에 집중한 승연이 발소리를 감춘 채 뛰는 법까지 계산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소란스러운 뜀박질에 좀비들의 시선이 몰림을 직감한 승연은 완전히 틀려먹은 판단을 했다는 사실 또한 직감했으나 이제 와 걸음을 멈추고 발소리를 죽이고 나아가는 것을 택하느니 이목을 끌더라도 편의점 안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 나으리라는 판단이 앞섰다. 그나마 백 미터 정도는 쉬지 않고 뛰어도 될 정도의 체력은 남아 있었는지, 승연은 바로 지척에 있는 편의점 안으로 뛰어 들어섰다. 텅 빈 매대를 마주하고는 헛웃음을 지었고, 한때 냉동식품을 보존하던 냉장고에서 풍겨오던 악취에는 코를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 편의점, 문이 두 개였지. 뒤쪽 문으로 나서면 당장 이목을 끈 좀비들을 따돌릴 수는 있을 것이다. 물건을 얻는 것은 무리였지만 다른 소득을 얻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고, 승연은 찰나의 순간 스스로를 위로하며 뒤쪽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닥을 짚는 자신의 것이 아닌 걸음과 가래 끓는 소리 섞인 호흡이 등 뒤에서 들리는 소음인지 문 너머에서 들리는 소음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었지만, 이제 와 돌아갈 수 있는 경로는 어디에도 없다. 나아가도 죽고 돌아서도 죽는다면 나아가는 편이 낫다. 그러한 각오로 여기에 다다른 게 아니었나.

묵직한 뒷문을 민다. 승연의 힘으로도 열기 조금 버거울 정도였는데, 아무리 철문이어도 그렇지, 사람이 열기 어려울 정도로 밀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발치에 놓인 시신이 시야에 들어와 눈을 질끈 감았다. 좀비인지 사람인지 알 수도 없는 것의 시체가 문을 막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눈으로 확인한 것이 두 구이니 아마 이 뒤에는 더 있겠지. 끔찍한 풍경을 눈앞에서 마주한 충격에 찌들어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이 그를 못내 서럽게 했다. 여기 진짜 산 사람은 없나. 아니, 이런 생각 할 새가 어딨어, 뒤에서 여전히 좀비가 쫓아오고 있는데. 그렇게 생각한 승연은 손잡이를 놓고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달렸다. 쾅, 큰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지만 돌아보지 않는다. 돌아볼 필요도 없었고, 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 저 주변으로 좀비가 모여들 것이 자명하니 돌아갈 때는 다른 길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다른 생각을 할 틈 따위도 없다. 명백한 생존본능이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끌린 시선이 뜀박질의 방향으로 이어질 것을 알고 있던 승연은 다리에 힘이 풀려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살아남고 싶어 뜀박질을 시작했으니 적어도 도착할 때까지는 멈춰설 수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반만, 지금까지 뛴 만큼만 더 가면 바로 마트가 하나 나오니까. 시선을 들어 마트가 있는 방향을 바라본 승연이 조금은 맥이 풀린 표정을 지었다. 근방의 소형 마트는 바리케이트로 무장된 채였다. 아니, 나쁘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 바리케이트를 칠 수 있을 정도의 지성을 가진 좀비는 지금으로는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안에 생존자가 있다는 뜻이 아닐까. 운이 좋으면 물자를 나눠 받을 수 있을 테고, 혹여 그러지는 못하더라도 무리에 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자신이 그만큼의 쓸모를 증명하긴 해야겠지만, 본래 승연이 발 딛고 선 곳은 매 순간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곳이었다. 남들이 발목을 붙든 손을 짓밟고 뿌리치며 그 자리에 꿋꿋이 버티고 있었던 시간이, 이번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쓸모를 요구하는 곳에서 증명하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승연은 그나마 문처럼 꾸며져 있는 입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망설일 틈도 없이 마트 안쪽으로 몸을 던진다.

정말로 여기에 사람이 있긴 했던 건지, 마트 입구에 있던 물자는 전부 사라졌고 규칙적으로 놓여 있던 매대는 다시금 한두 사람이 지나갈 틈만을 남긴 채 겹겹이 쌓여 내부의 바리케이트를 형성하고 있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이쯤 소란을 일으켰는데 안쪽에 사람이 있다면 분명히 나와 봤을 것이 분명한데도 아무도 나와보지 않는다는 것. 승연은 버릇처럼 퇴로를 확인했다. 들어온 문, 오른쪽 문, 왼쪽 문. 바리케이트의 열린 곳과 가까운 문은 왼쪽 문. 그렇다면, 만약의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선택은 정해진 셈이다. 승연은 뛰는 동안에도 놓지 못한 빗자루를 바로 든 채 바리케이트의 열린 부분으로 다가섰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무엇 하나라도 건질 수 있겠지. 그게 사람이든, 물자든, 뭐든 간에. 사람이 살아 있던 흔적이 있는 곳에서 아무 소득도 얻을 수 없을 리는 없으니까. 승연은 느리게 숨을 고르고 걸음을 안쪽으로 옮긴다. 그러는 동안에도 승연의 귓가에 들린 걸음 소리는 한 사람만의 것이었다.

안쪽으로 조금 더 걸음을 옮기니 다시 한 겹의 내부 바리케이트가 눈에 띄었다. 솔직히 이쯤이 되면 맥이 빠지는 기분이긴 했지만, 눈에 띈 것이 좀비 같은 것도 아니었으니 차라리 다행이다. 여기에도 별다른 물자는 없으니 안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 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문득 다리에 피로감이 느껴졌다. 하긴 평소에는 뛰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많이 뛰었고, 여기에서도 쉬지 못했으니 당연하지. 그렇다면 조금만 쉬고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승연은 자리에 앉아 가볍게 다리를 주물렀다. 오늘은 잠은 잘 자겠네, 쓸데없는 생각이 들자마자 아주 잠시 웃음을 터트리면서. 그러다 문득 승연은 코끝을 찌르는 이상한 냄새에 미간을 좁혔다. 그러니까, 이건……. 고기 썩은 내?

정확히 그런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솜털이 쭈뼛 서는 것만 같은 불쾌한 기분이 그러한 직감을 불러일으켰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느껴지기 시작한 냄새,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내부, 한참의 침묵을 지키니 귓가에 들어오기 시작한 가래 끓는 소리. 승연은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까치발을 들고 두 번째 바리케이트를 지났다. 길을 다시금 지나 첫 번째 바리케이트를 지나려 하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빗자루가 바리케이트를 건드린다. 철과 막대기가 만나 불쾌한 소음이 울리자마자 승연은 문득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예컨대, 바리케이트 너머에서 들려오던 들끓는 숨소리에 묘한 흥분이 담기기 시작했다는 것과, 그리하여 귓가에 질질 끌리는 듯한 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는 것과, 그 수가 지금까지 상대했고 보았던 좀비들의 수를 아득히 넘을 것 같다는 것까지. 승연은 까치발을 세우던 것도 그만두고 오른쪽 문을 향해 뛰었다. 소리는 나겠지만 이미 들킨 이상 어쩔 수 없다. 빠르게 나가는 것이 우선이다. 그들이 제 목덜미를 잡아채기 전에.

좀비가 한둘 갇혀있는 게 아니었다면 가능성은 두 개 정도다. 여기가 애당초 좀비를 가두기 위한 요새였거나, 혹은 여기에 스스로를 격리했던 모든 사람이 예상치 못한 감염에 휩쓸려 좀비가 되었거나. 어느 쪽이든 승연에게 달갑진 않다. 속에 갇힌 좀비가 몇이나 될지 모른다는 사실은 실재하는 불안이었다. 그나마 여즉 바리케이트가 무너지지 않은 것을 보면 그렇게 많은 수의 좀비가 산재해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그나마의 희망은 적당히 접어두기로 한다. 문득 뒤를 돌아본 탓이다. 시야에 든 좀비가 끔찍할 정도로 많다. 이런 상황에서 살아 돌아가는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희망일 정도로. 이제 승연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이 근방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마트로 향하는 것. 작은 마트도 요새화 되었던 마당에 큰 마트라고 멀쩡할까 싶긴 했지만, 그렇다고 가보지도 않고 집으로 복귀하면 굶어 죽는다는 선택지 말고 어떤 선택지가 주어지겠는가. 어쩌면 오기였다, 살아남고 싶다는 데에서 기인한 오기. 목까지 차오른 숨이 버겁고 뛰는 것조차 힘겨워 이제는 질질 끌리는 다리가 무거웠음에도 멈출 수 없었다.

지금껏 승연이 본 좀비는 소리에 어느 정도 예민한 만큼, 시각은 처참할 정도로 나쁜 축에 속했다. 그나마 날이 밝을 때는 사람의 인영이 다가오면 어두워지니 그것으로 구분을 하는 것 같긴 했지만, 종전의 마트는 제법 어두운 편이었으며 마트를 완전히 빠져나오기 전 첫 번째 바리케이트를 넘은 좀비는 자신이 소리에 공백을 낼 때마다 가야 할 방향을 잃고 휘청이기나 했으니 어두운 곳에서는 시력이 효용성을 잃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가능한 그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식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어두운 곳으로 다니되 큰 소리는 내지 않고, 젠장, 말이 쉽지. 마트로 향하는 길 중에 어두운 길이라고는 지하 주차장밖에 없었는데, 상식적으로 지하에 좀비가 한 마리도 없겠는가. 좀비 소굴이 아니면 다행이지. 아무리 이 사태를 등 뒤에 밀어놓고 외면하고 있었다 해도 승연은 그 정도 상식과 클리셰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조금 다른 방향에서, 관찰한 정보를 활용해야 한다.

급박한 마음에 뛰고 있긴 했지만 좀비들은 대체로 질질 끄는 발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요컨대, 운이 좋아 만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나 어쨌든 뜀박질을 하는 좀비는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급한 상황이 아닌 이상 조금 빠르게 걷는 것만으로도 좀비를 따돌리는 것은 이론상 가능할 것이다. 이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내내 뛰어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승연은 제 생각이 아주 틀려먹은 것이 아니기만을 바라며 뜀박질을 포기하는 대신 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 좀비는 아직 그의 목덜미를 잡아채지 못했고, 들끓는 숨소리는 점차 가까워지는 것 같기야 했으나 일정 범위 내에 들어오지 못했으니 승연은 이것만으로도 제법 괜찮은 전략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 더 걸음을 재촉한다.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 눈에 보이는 마트는 이러한 사태가 발발하기 전의 마트와 완전히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바리케이트도 없고, 입구에는 카트가 쌓여 있고, 계산대와 매대도 그대로 놓여 있는 모양새. 불이 들어오기만 했다면 잠시 과거의 향수에 젖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승연은 불 꺼진 마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됐다. 이 안에서라면 따라오더라도 따돌릴 수 있다.

등 뒤에서 느껴지던 들끓는 숨소리를 따돌리기 위해서는 이곳의 지리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했고, 다행히도 승연은 이곳에 와본 경험이 잦았다. 생필품을 살 때 자주 들르는 곳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손에 들린 물건을 아무렇게나 던지면 소리가 난 방향으로 좀비 무리가 몰릴 테니 막다른 길에 좀비를 몰아두고 식품이 있는 매대로 가면 그만이다. 승연은 매대에 있는 물건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집어 들어 막다른 길이 있는 방향으로 던지고 발소리를 죽인 채 식품의 매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집은 건 뭐였지. 승연은 그제야 뒤를 돌아본다. 그를 따라오던 열댓 마리의 좀비들이 막다른 길로 들어서는 모습 뒤로 잘 진열된 맥주가 정확히 하나 비어있는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아, 이럴 상황은 아닌데 괜히 맥주가 당겼다. 술이 약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술을 잘못 마시고 취했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할지도 모르니까. 철없는 생각은 그즈음에서 내려두기로 하며, 승연은 비로소 식품 매대로 시선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에 있던 물자들도 제법 많이 사라졌다. 처음 들린 편의점이나 직전에 들린 마트만큼 처참한 수준은 아니었으니 승연은 그나마 그런 것을 안도로 삼기로 하며 그제야 편하게 매대를 둘러보았다. 불에 가열하여 먹는 것을 보통 상식으로 두기에 당장 먹기 좋은 것은 아니지만, 부탄가스를 구입하거나 가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거나, 혹은 전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불에 가열하면 무리 없이 먹을 수 있을 통조림도 몇 개 있었고 즉석밥도 몇 개가 남아 있었다. 당장 이 자리에서 배를 채울 수 있을 법한 과자나 에너지바 따위도. 원래 이런 곳을 들르면 죄다 털어가는 것이 상식 아닌가? 왜 남겨뒀을까.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승연은 당장 먹을 수 있는 것들을 급하게 입에 밀어 넣었다. 이상하게도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통기한이 지났나? 그런 문제인가 싶어 비닐에 찍힌 유통기한을 확인했지만 앞으로 세 달은 남아 있었다. 너무 긴장해서 맛도 못 느끼나 보다. 에너지바를 우물거리던 승연이 등 뒤에 맨 가방을 바닥에 내려둔다. 지퍼를 열어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최대한 쓸어 담았다. 이 정도 음식이면 일주일 정도는 무리 없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물건을 채운 승연은 가방의 지퍼를 닫다, 문득 등 뒤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나, 비닐로 포장된 음식도 먹고, 가방 지퍼도 그냥 막 열고……. 막다른 길과 여기에 거리적 여유가 얼마나 있었지? 소리가 거기까지 들렸을까. 들렸, 겠지? 나, 빗자루를 어디에…….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무기의 행방을 찾으려 들 때, 들끓는 숨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승연이 몸을 돌려 소음의 행방을 눈으로 찾았다. 그러니까, 이제는 정말로, 바로 앞에.

아, 이건 죽었다. 물건 다 챙겼는데, 집에 돌아가기만 했는데, 여기서. 오래 뛰어서인지, 혹은 바로 앞에 있는 텅 빈 눈동자를 보고 기운이 빠져서인지. 승연은 더 저항할 틈도 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몸을 숙이는 좀비의 모습이 시야에 가득 찬다. 승연은 어느 순간부턴가 손에 쥐고 있었던 가방으로 억지로 제 앞을 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싫어, 죽고 싶지 않아.

그 순간, 묵직한 타격음이 귓가를 울렸다.

살점을 뜯기는 고통이 찾아들 줄 알았는데, 타격음 이후로는 들끓던 숨소리조차 귓가에 들리지 않아 승연은 세게 감았던 두 눈을 간신히 들어 올린다. 목전까지 다가왔던 좀비가 바로 옆에 쓰러져 있음을 깨닫고 헛숨을 들이켜기도 전 제가 낸 소음을 듣고 다가온 좀비 무리와 대치한 사람의 등이 보여 조용히 시선을 고정한다. 키는 자신보다 조금 크지 싶고, 어깨는 확실히 자신보다 넓고, 덩치도 그만큼 큰 사람. 대놓고 열댓 마리의 좀비가 몰려오는 것이 그리 무섭지도 않은 건지 두 손으로 쥔 창을 정확히 좀비의 복부에 꽂아 넣은 그는 뒤이어 등 뒤에 진 쇠지렛대를 들어 다가오는 좀비 무리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객관적으로 봐서 승산이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더니, 정말로 모여들었던 좀비들이 하나하나 쓰러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승연은 문득 몸을 떨었다. 기묘한 안정감 탓이다. 그가 자신을 구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남은 한 마리까지 전부 처리한 그는 바닥에 쇠지렛대를 내려놓고 좀비의 배에 꽂힌 창을 뽑아냈다. 가볍게 혀 차는 소리가 들린 것을 들으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기라도 한 모양이었는데, 무슨 심정이었는지는 모르니 사실 제가 말을 얹을 일은 아님을 아는 승연은 찰나였으나 침묵했다. 침묵이 발화보다 나은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 순간은 아마 지금이리라. 남자는 곧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려 승연을 바라보았다. 살아 있는 이들이 생기를 잃어가고 오늘 그러하였듯 내일도 살아갈 수 있는지를 확신할 수 없는 세계에서도 생기를 잃지 않은 금빛 눈동자, 좀비에게서 튄 피가 조금 번져 있는 뺨, 거기서부터 기인된 제 거부감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검은 소매로 그 자신의 뺨을 몇 번 문지르다 손을 떼는 행동, 조금 사나운가 싶었으나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은, 그러므로 그 자체로 온전한 표정을 보고 있자면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얼굴. 세상에 영웅 따위는 없다고 단언했던가. 저런 사람이 영웅이 아니면 대체 뭐라 말할 수 있겠나. 그가 승연에게 손을 뻗었다. 붙들고 일어나도 괜찮다는 신호였고, 어쩌면 허락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아, 네, 네! 덕분에요.”

뻗은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승연은 급하게 그의 손을 붙들며 몸을 일으켰다. 제대로 힘이 빠졌던 다리에 갑자기 힘을 싣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으므로, 손을 붙들고서도 크게 몸을 휘청였으나 상대는 그런 승연의 모습에 흔들리는 법도 없이 손에 붙들고 있던 무기를 내려두고 팔에 힘을 실어 승연을 자신의 방향으로 끌어당겼다. 여전히 다리에 힘이 실리지 않은 덕에 꼭 남자에게 안긴 모양새가 되었으나, 남자는 그런 것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지 승연의 몸을 몇 번 시선으로 훑는 것이 다였다. 그런 시선에는 불쾌감을 느낄 법도 한데, 시선에 대단한 사심이 묻어 있는 눈치는 아니었고 도리어 물린 곳이 있는지 한 차례 확인하는 과정에 불과한 것 같았으므로 승연은 별다른 말 없이 멀쩡한 옷 상태와 물린 자국 없는 피부를 남자에게 한 차례 확인시켜 주었다. 무엇보다 불쾌한 시선이었다면 승연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간 그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으니까. 대단한 자랑이 아니라, 공인도 일반인도 아닌 어느 애매한 선에 있는, 따지자면 공인에 가까운 이가 자연스럽게 감내해야 할 시선이 그런 시선이었으므로. 그러고 보면 아까 봤던 그 팬도 가끔은 그런 눈으로 나를 봤던 것 같은데. 승연은 또 다른 방향으로 샐 뻔한 생각을 붙들고 자신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앞에 사람 세워놓고, 그것도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세워놓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별말씀을. 이 주변에서 뵌 적 없는 분인데, 어느 부근에 있는 쉘터에서 오셨습니까? 저기 아래 있던 마트입니까?”

조금 날카로운 말투였으나 공격성은 느껴지지 않았다. 말투가 워낙 공격적인 사람이라 그런 거지, 정말로 궁금해서 건넨 질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들 정도로. 승연은 몇 번 눈을 끔뻑이다 직전에 들렀던 마트를 떠올렸다. 바리케이트로 가득했던 공간, 안쪽에 산재해 있던 좀비 무리. 그곳은 정말로 쉘터였던 것이다.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바리케이트를 세웠지만, 결국 그것들이 자신들을 가두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들의 흔적이 가래 끓는 소리로 증명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문득 욕지기가 치밀어 올라 승연은 급하게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헛구역질 한 번이라도 잘못 하는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증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만큼 가능한 그에게 온전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탓이다. 여기까지 와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사면, 저 사람의 창과 쇠지렛대가 겨누는 사람은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문득 치밀어 올랐으므로. 그렇게 생각하면 그 장소에서 들려왔던 가래 끓는 소리보다 눈앞의 사람이 조금 더 무서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게 느낄만한 공포심은 아니었고, 영웅이라 생각한 이를 상대로 들 법한 감정은 더더욱 아니었지만.

승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솔직히 눈에 전부 다 보일 지경이었으므로, 승연의 맞은편에 선 남자는 한참이나 승연을 바라보았으나 별다른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래저래 무서운 일이 많을 수도 있지.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앞에 세워놓고 저러는 것이 예의가 될 수는 없겠지만, 공포감이라는 것은 원래 사람에게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한다. 게다가 눈앞에서 좀비 열댓 마리 죽이는 걸 본 사람이니까. 그런 놈이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을 어려워하리라 판단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이 사람을 데려가지 못한다면 오늘의 탐색에서 사람을 발견했다는 말은 비밀에 부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남자는 찰나 생각한다. 이대로 돌아가 있는 대로 보고했다가, 내가 자기 죽일 줄 알고 무서워하던데. 같은 한 마디를 건네기라도 하면 거기 있는 놈 중 하나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릴 것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승연이 입을 틀어막든 말든 남자는 승연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침묵이 곧 안정일 수 있을 만큼 오래 만난 사이는 아니었지만, 구태여 딱딱한 말을 건네느니 침묵을 지키는 편이 나았다.

“쉘터……는 아니고요, 집에 있다 왔어요, 내내. 이런 사람들 생기고 나서 처음 나와요.”

“……한 달쯤 됐나? 그럴 수 있지. 아파트에 사십니까?”

“네, 네. 그리고 아래쪽 마트는, 혹시 먹을 게 있나 해서 다녀왔는데 좀비만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렇군……. 폐쇄적인 분들이셨으니 놀랍진 않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남자는 꽤 태연해 보였다. 자신과 관련 있는 사람들의 죽음이 아니어서인지, 말마따나 진작 예견한 비극이었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자의 태도를 봐서는 후자에 가까워 보이긴 했다. 상관없는 사람의 죽음이니 아무래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태도였으면 자신도 구하지 않았겠지. 그는 승연을 처음 구했을 때나, 지금이나. 그는 변함없이 불필요한 적의를 내비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었기에 승연은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적어도 그의 창이 자신의 배를 꿰뚫는 일은 없을 것 같았으므로. 한 달이나 집에 처박혀 있었다는데 별다른 의구심 없이 넘어가 주는 것만 봐도, 남자는 최대한 승연을 의심하지 않을 작정인 것처럼 보였다. 객관적으로는, 대단히 선한 사람이라서라는 사유보다는 구태여 타인을 신뢰하지 않음으로 적을 만들 의도가 없는 방향에 가까운 것 같긴 했다만 당장 그 덕에 목숨 부지할 수 있는 처지가 된 승연의 시선에서는 그렇게까지 객관적으로 보이지는 않았고, 다만 그가 아주 선하고 영웅다운 사람이라서 그런 것처럼 보였다. 남자가 들었다면 한바탕 웃을지도 몰랐을 일이다. 괜히 겁을 줬다는 미묘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겠지만, 승연이 입 바깥으로 내뱉을 리는 없는 말이었으니만큼 별 의미 없는 가정이기도 했다. 남자는 내내 붙들고 있던 손을 가볍게 놓으며 승연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넸다.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이하진입니다.”

“아! 강승연이에요, 하진 씨는……. 좀비 만나는 상황이 익숙하신가 봐요, 무기도 있으시고, 잡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으시고…….”

“아주 안 만나보지는 않았습니다. 뭐 사람 진압하는 건 이런 일 생기기 전에도 해봤으니까…….”

승연의 의도야 앞쪽에 있는 말에 치우쳐 있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하진의 답은 후자에 치우쳐 있었다. ……조폭인가? 영웅이 아니라 위험한 사람일지도. 그러고 보니 얼굴에 흉터도 있네, 저 정도의 흉터는 이번 사건으로 갑자기 생길 수 있는 게 아니긴 하지. 거기까지 생각한 승연은 반사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나려다 자신을 구해주던 등을 떠올리며 가까스로 정신을 붙들었다. 예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몰라도 일단 지금은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다. 이런 상황에서 좀비 열댓 마리를 혼자 상대하며 타인을 구해주는 사람이면 예전에는 나쁜 일을 했더라도 지금은 좋은 방향으로 풀려갈 수도 있는 거고. 오만 상상을 머릿속에 채우던 승연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잡념을 떨쳤다. 의아한 듯한 하진의 시선이 승연에게 가닿았으나, 하진은 구태여 승연의 이상한 행동을 지적하지도 행동의 사유를 묻지도 않았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아까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대신, 하진은 승연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엿보려 애썼다. 좀비와 싸우는 능력은 전혀 없어 보였지만 상황 돌아가는 그림은 금방 파악할 줄 아는 것 같던데, 이런 사람과 함께 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 생각에 빠져 있던 하진이 문득 입을 열었다.

“혼자 지내고 계십니까? 집에서요.”

“네? 아, 네……. 원래도 혼자 살았거든요, 가족들은 예전에도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고.”

“저도 쉘터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우리 공통점이 조금 있군요.”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하진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지만, 하진의 여상스러운 목소리를 알고 있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으므로 승연은 그의 목소리에서 차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구나, 하진 씨도 가족과 만나지 못한 지 꽤 되셨겠구나. 그렇다면 꽤 외로우실지도, 가족을 걱정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반장갑이 끼워진 하진의 손등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하진은 자신의 손에 닿아오는 손길을 조금은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다, 곧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고맙다는 듯 손끝을 잡아 오는 손길에 승연도 그제야 조금 미소지었다. 가벼운 손길이 온전히 위로로 다가갈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웃는 얼굴을 처음 본 것은 마음 놓이는 일이었다. 웃지 않으면 마냥 날카로운 얼굴인 것 같았는데, 미소짓는 얼굴이 의외로 다정하고 순한 것도 조금은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승연은 손을 꼼지락대다 하진의 손을 깍지껴 잡았다. 자신의 손도 제법 큰 편이었는데, 대강 가늠하더라도 하진의 손은 자신의 손보다 못해도 반 마디 정도는 큰 것 같았다. 굵은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던 승연이 가볍게 손을 놓는다. 그러는 동안에도 하진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다.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쪽일지도 모르지마는.

“혼자 지내는 게 힘드실지도 모르니 드리는 제안입니다만, 저희 쉘터로 오시는 건 어떠십니까?”

“……쉘터에요?”

“예. 보아하니 좀비와 관련된 정보도 많이 알고 계시진 않으신 것 같고, 내내 혼자 지냈다고 하신 것도 조금은 마음에 걸려서 말입니다. 쉘터에서 함께 지내면 혼자 계실 때보다는 나을 겁니다. 정보 면에서든, 외로움이 사라진다는 면에서든.”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하진은 그 자신이 말하는 쉘터에서 꽤 괜찮은 위치에 있는 모양이었다. 외부인을 대뜸 쉘터 안으로 들여도 된다고 하는 태도나, 관련된 정보를 많이 공유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어쩐지 아닐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쉘터의 책임자일까? 물론 그랬다면 굳이 여기까지 나올 까닭이 없을 것 같기야 했다. 그렇다면 바깥을 둘러보러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괜찮은 위치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손을 붙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진의 손을 붙들고 쉘터 안으로 발을 들인다면 솔직히 말해 시작이 좋을 것 같기는 했다. 권력에 편승한다는 것은 언제나 그렇지 않은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이가 응당 시작하기 좋은 위치였음을 모르지 않았으나 승연은 찰나 침묵했다. 곧 시선을 옮겨 하진의 등 뒤에 널린 좀비를 바라본다. 열댓 마리의 좀비가 안면의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뭉개져 쓰러져 있는, 자신을 구했으나 잔혹성을 부정할 수는 없을 그 풍경을.

하진은 승연이 직전에 들렀던 작은 마트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고 말했다. 그들만의 쉘터를 구축하고, 그들 나름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진의 말로는 폐쇄적인 집단이었다고 하였으며 그 단어를 내뱉는 순간의 표정이 아주 달갑게 보이지는 않았으므로 하진이 몸담은 쉘터는 마냥 그렇지만은 않은 곳이라는 사실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으나, 거기 있는 좀비들이 어쩌다 좀비가 되었을지를 예상하면 쉘터라는 단어에도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직전의 마트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이 쉘터라는 이름 아래에서 모여 살았다면, 어떤 쉘터로 가든 비슷한 꼴을 면치 못할지도 모른다. 외로움은 견뎌내기 힘든 감각이었으나 개죽음을 맞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살아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죽은 것도 산 것도 되지 못하고 감각과 이지를 잃는 것보다 끔찍할 리는 없지 않은가. 승연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당장은 무서웠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진은 그런 승연의 얼굴을 한참이나 고요히 바라보았다.

여태껏 하진이 만난 사람들은 쉘터에 올 것을 권하면 두 가지 중 하나의 반응을 보였다. 기쁜 마음으로 따라오거나, 아예 의심 섞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거나. 전자의 경우에는 그나마 나은 축이었으나 후자가 되면 골치 아픈 일이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탓에 여러모로 골머리를 앓곤 했는데, 승연이 전자로 나올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으나 침묵으로 일관할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 적은 없었기에 하진의 표정은 그제야 의아함을 띤다. 그러고 보면, 이 사람. 아까 마트에 다녀왔다고 했지. 내가 쉘터 얘기를 했고. 겁을 준 꼴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진은 그제야 그런 생각을 하며 승연을 바라본 채 조금 웃었다. 그냥 돌아간다는 선택지가 손에 쥐어져 있는 사람에게 쉘터에 올 것을 권유하는 것은 나쁜 선택지가 아니었지만, 무작정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는 일도 사실 시기상조다. 이런 세상에서 처음 본 사람을 무작정 따라가지는 않으니 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며 하진은 고개를 조금 기울인 채 승연에게 가볍게 덧붙였다.

“오기 싫은 눈치는 아닌데, 고민이 좀 되시나 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 싫지는 않은데 좀 무서워요.”

그렇지. 겁을 준게 맞군.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하진이 괜찮다는 듯 승연의 손을 잡고 가볍게 손등을 쓸었다. 종전의 위로와 똑같은 형태였으므로, 승연 역시 하진의 그러한 행동이 사심보다는 위로에 가깝다는 것을 금세 눈치채고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다정한 사람인 것 같았다. 이런 쪽으로는 보는 눈이 조금 있어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일단 돌아가고……. 인연이 있어서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는 좋다는 대답이든, 싫다는 대답이든. 뭐 하나 골라서 해주시겠습니까?”

“그래도 돼요……?”

“안 될 건 뭐야. 집 가실 거죠,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솔직히 얼떨떨했다. 좋은 제안을 제 발로 걷어찬 것이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을 텐데, 눈앞의 남자는 불쾌한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이유 없는 호의를 덧대어주기까지 했다. 내게 그렇게까지 해주는 이유가 있나? 의아하긴 했지만 당장 건넬 질문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승연은 내려놓았던 가방을 손에 들고 고개를 끄덕이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하진을 바라보곤 고개를 기울였다. 더 다가올 필요가 있나? 의아해할 즈음에는 손에 들린 가방을 하진이 뺏어 들어 눈을 몇 번 끔뻑이고 말았지만, 자연스럽게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멘 하진이 승연의 손을 잡아 이끄는 바람에 승연은 별말 없이 그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친절한 사람이다, 아까 조폭인지 아닌지 의심했던 것이 조금 미안할 정도로. ……아니겠지? 별 의미 없는 생각도 잠깐이다.

“그러고 보니, 바깥소식은 전혀 몰랐던 것 같은데. 집에 라디오 없습니까?”

“없, 없어요. 인터넷도 간당간당해서 소식 접할 길이…….”

“살아 있는 게 용하네…….”

웃음기 섞인 목소리는 조롱처럼 느껴져도 이상할 것 없는 내용이었지만, 듣는 내내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해져 승연은 괜히 눈만 몇 번을 끔뻑였다. 하진은 곧이어 재미없는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면서 좀비가 가진 특징 따위를 승연에게 하나둘 전해주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승연이 파악한 내용도, 파악하지 못한 내용도 있었다. 예컨대 아는 것에는 좀비는 소리에 예민하나 소리의 방향을 추적할 정도의 지능은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 있었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보다 더 많았다. 밤이 되면 시각적인 자극을 아예 구분하지 못하는 좀비의 특성 상 그들의 움직임이 급격히 느려지지만 소리에는 몇 배로 예민해지니 작은 기척도 숨겨야 한다는 사실이나, 소리가 난 곳에서 다시 소리가 들려오지 않으면 좀비는 추적을 포기하니 웬만하면 기척을 숨기고 세 시간 넘게 숨어 있으면 잘 넘어갈 수 있으리라는 사실 따위나. 바이러스의 감염 루트는 꽤 다양한 편이고 수도로 감염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공기 중에 있는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경우도 있지만 가장 확실한 감염법은 물리고 난 후 발현되는 경우라는 사실. 물리면 무조건 발현되며 물린 시점부터는 미열이 생기고, 사흘이 지나면 촉각과 관련된 감각이 대부분 상실되며, 일주일이 지나면 24시간 동안 고열에 시달리다 24시간 동안 멀쩡해지고, 그 이후 6시간 동안 가사 상태에 빠지고 다시 깨어났을 때 좀비가 된다거나……. 이어진 이야기들은 하진이 이 세계에 꽤나 적응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었다. 이 사람만 곁에 둬도 당장 벌어지는 상황은 타개할 수 있을 만큼.

“수도로 감염되거나 공기 중으로도 감염될 수 있으면, 어쩌면 저도 위험할 수 있겠네요……?”

“공기 중에 있는 바이러스로부터 감염되는 사람들은 좀비화 현상이 바로 일어나고, 수도로 감염되는 사람들은 하루 전후로 발현하곤 했습니다. 아파트에서 지내셨다고 하셨는데, 사태 이렇게 되고 수돗물 쓰신 적 있으십니까?”

쓴 적이 있던가? 잠시 생각하던 승연은 오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먹는 물은 그나마 생수로 충당할 수 있었다 쳐도 밥을 먹으면 계속 설거지를 하기도 했고, 내내 씻지도 않고 지냈던 건 아니니까. 전기나 가스도 간당간당한 마당에 물이 언제 끊길지 모르기에 물이 나올 때 최대한 씻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루에 한 번은 꼭 잊지 않고 씻곤 했다. 직관적으로는 매일 같이 양치도 하긴 했고. 그 과정에서 체내로 들어간 수원이 한 방울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안전한 건가? 공기나 물로 감염이 되지 않는 사람은 물려도 괜찮은 걸까? 승연은 조금 더 고민하려다, 자신의 짐에 무기 두 개까지 든 채 한 손으로는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하진이 자신의 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빨리 대답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나저나 저 사람, 안 무겁나.

“아, 네. 내내 수돗물로 씻고 했으니까…….”

“그럼 면역이실 겁니다, 이 근처 아파트에 감염자가 많았던 걸 생각하면 수도 쪽에도 뭔가 있었을 거라.”

“아…….”

“수도나 공기로 감염되지는 않는다 해도, 물리면 감염되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요. 이쪽으로는 면역이라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아직. 다 괜찮았다가 물리고 나서 일주일 후에 발병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봐서.”

그렇게 따지면 이상하리만치 바이러스의 확산이 빨랐던 이유도 조금은 이해가 됐다. 공기 중에 바이러스가 퍼졌을 테니, 면역이 아닌 사람들은 바로 감염되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물고 다녔다면 피해자의 수는 점점 늘었을 것이고. 처음부터 제가 오래 고민해봤자 답을 얻을 수 없는 문제였다. 애당초 자신이 의아해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은 하진이 전부 쥐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승연은 잠시 생각한다. 이 사람은 정말로, 이 사태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쉘터에 가든, 가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리든 이 사람과는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휴대폰도 전파도 멀쩡한 시대에 살았다면 번호라도 받을까 싶었을 텐데 아무래도 아쉬운 일이었다. 뭐, 하진이 번호를 주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뭐라 더 말을 할까 고민하던 승연은 이참에 궁금해진 것이나 마저 물어볼까 싶어 입을 열었다.

“쉘터에 있는 사람들도 다 그런가요?”

“저희 쉘터는 그렇습니다. 혹시 모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과정이라서 말입니다.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지는 담당자가 제가 아니라 다 알지는 못합니다만…….”

담당자라, 쉘터가 꽤나 체계를 갖춘 모양이었다. 주변에서 어떤 업무를 하는지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각각 담당하는 부서가 분명히 있고 상호 소통만 필요한 상황이라면 체계가 잘 잡힌 모양새를 기대하게 되지 않나. 그나저나 이 사람도 꽤 한 자리 차지하고 있을 것 같았는데, 일도 하려나. 승연은 차오르는 궁금증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하진 씨가 따로 담당하고 있는 것도 있어요?”

“그럼요. 굳이 따지자면 보급품 수급과 배분 같은 것을 제가 주로 하고 있고, 조사 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하는 것이나……. 갈등이 생겼을 때 중재하는 것 정도만 신경 쓰고 있습니다.”

다 한다는 거 아닌가? 다른 일이 뭐가 있는지는 몰라도 저게 제일 중요한 일들 아니야? 체계가 잘 잡혀있을 거란 생각은 취소. 회사 돌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일 잘하는 한 사람이 대부분의 일을 몰아 하는 모양이다. 그럼 이 사람이 대장인가?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았는데. 의아하다는 듯 하진을 바라보면 조금 멋쩍은 듯한 미소를 짓고 있어서, 아, 이 사람도 본인이 과로하고 있다는 인식 정도는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한 승연이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나저나 너무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데 좀비들의 이목은 안 끌리나. 주변으로 잠시 시선을 돌린 승연은 이상하리만치 보이지 않는 좀비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 많은 좀비가 그새 다 어디로 갔나 싶다. 물론 아까 왔던 길은 아니긴 한데, 아, 그래서 그런가. 그나저나 이 길로 가면 집이 좀 멀긴 하겠다. 승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하진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 이 길로 아파트 단지 가려면 좀 돌아가야 하지 않아요?”

“그렇긴 합니다. 그래도 이쪽 길에 있는 좀비는 제가 아까 들어오기 전에 전부 잡아서 말입니다. 그나마 안전한 길이라……, 생각해보니 아까도 많이 놀라신 것 같았고, 힘드실 텐데 괜히 이쪽으로 왔나 봅니다. 미안해요, 미리 설명이라도 하든지 가까운 길로 가든지 할 걸 그랬네.”

“아, 아니요! 그런 의미는 아니었구요. 안전한 길 알려주셨는데 저로는 감사드릴 일이죠.”

그런 의도였다면야. 뭐 대단히 이상한 이유로 데려온 건 아니리라 생각하긴 했는데, 유난히 좀비가 없는 거리를 선택한 것이라면 저로는 그저 감사할 일이었다. 이해해줘서 고맙다는 듯 작은 웃음소리를 터트린 하진이 승연에게 가볍게 말을 붙인다. 그러고 보니 어디 살아요? 이 주변 지리는 잘 모르긴 하는데. 아, 저 저기 편의점 앞에 있는 아파트 살아요. 거기 돈 잘 버는 사람들 살던 데 아닌가? 모른다면서요. 뭐, 거의 갈 일 없는 동네라 모를 줄 알았는데……. 그 말에 승연의 의심-저 사람 조폭 아닌가,-은 한층 더 커질 수밖에 없었지만, 아니라면 실례고 맞다면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될 테니 승연은 그저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진도 달리 답할 까닭이 없어서인지 그저 웃고 말았다.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았다면 기가 막히다는 듯 한참 승연을 바라만 보고 있었겠지만, 당장은 앞뒤 사정 모르고 있으니 실없이 짓는 웃음에 불과하다. 그런 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적어도 하진은. 공연히 가방을 붙들고 있던 손에 힘을 실은 것도 같은 까닭이다.

그 뒤로는 거의 승연이 대화를 주도했다. 하진은 사람들을 대하는 데에 능숙해 보였으나 반면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닌 눈치였는데, 그러니 사람 다루는 것에도 익숙하고 저 혼자 떠드는 데에도 익숙한 승연의 말수가 많아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고. 하진은 내내 주변을 주시하며 걸으면서도 승연의 말에 몇 번 고개를 끄덕이고 가벼운 추임새를 넣는 것으로 답했다. 그렇게, 길지 않은 거리를 걸으며 승연은 하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전반적으로 믿음직하고 다정한 사람. 자신의 안위는 그렇게까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지만,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사람에게는 신경을 제법 기울이는 사람. 그리고 그런 버릇은 어느 날 좀비 사태가 터져 갑자기 생겼다기보다는 오래전부터 쌓아온 버릇인 것 같았다. 그가 보이는 배려의 깊이는, 적어도 자신에게 닿는 것은 하루아침에 생겨났거나 혹은 타인을 표방하는 형태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으므로.

이 사태가 터지기 전에는 제법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평을 자주 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으나, 그런 생각도 실례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얼른 지워냈다. 그런 생각을 한 까닭도 남들이 들으면 웃을만한 이유긴 했으니까. 그러니까, 정확한 근거는 자신을 모른다는 데에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웬만한 남자들은 다 나 알던데. 승연은 괜히 제 목 뒤를 만지작거리며 하진을 바라보았다. 저런 눈빛이 모르는 연기를 하는 사람의 눈빛이라면 저 사람은 상황이 이렇게 되기 전에는 분명히 배우를 했을 것이다. 한 번도 본 적 없었으니 진짜 모르는 거겠지. 괜히 하진 씨는 게임 같은 건 좋아하지 않으시냐는 질문도 건네봤는데, 제게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는 듯 한참 눈을 끔뻑인 하진은 스물 넘어서는 거의 해본 적도 없다는 보는 그대로의 답을 건네 괜히 진을 빠트렸다. 저도 저 못 알아보는 사람 정말 오랜만에 보거든요. 편한 것 같기도 하고. 마음에도 없는, 혹은 어쩌면 진정으로 진심이었을지 모르는 이야기를 툭 내뱉으니 하진은 자리에 가만히 서서 승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어쩐지 익숙하지 않아, 승연은 한참 눈을 맞추다 말고 어렵게 시선을 뗐다. 너무 잘생겨서 부담스럽나? 그런 건가? 아니, 그냥 사람을 최근에 안 만나봐서 그런 건지도. 승연은 괜히 목 뒤를 긁적이다 다시 고개를 기울이는 하진을 흘끔 바라보았다. 날 아나?

“윤도영이 계속 얘기하던 게 당신인가 싶기도 하고…….”

“어, 주변 분이 저를 알고 계셨어요?”

“폐급 있습니다, 사무실에서도 인터넷 방송만 보던.”

잘려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그런데 요즘 조폭 참 신세대네. 그런 걸 보고도 가만히 있어 주고. 역시 조폭이 아닌 건가? 그러면 뭐지. 어쨌든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자신에 대한 설명을 오래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직감한 승연은 모처럼 방송을 켤 때마다 그러하였듯 자신감으로 가득 찬 미소를 지으며 하진을 바라보았다.

“프로게이머거든요. 스트리밍도 하고.”

“맞겠네, 당신 방송 봤나 보다. ……이렇게 뵈니 영광입니다. 게임 같은 걸 좀 해둘 걸 그랬나.”

남 이야기는 전해 들은 적 있으나 자신은 영 모르는 사람인 것이 미안하다는 듯 하진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윤도영 걔가 인터넷 폐인이라 인터넷에 쩔어 있는 애들이나 아는 사람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냥 유명한 사람인지를 모르겠네. 그나저나 저렇게 웃으니 인상이 조금 다르구나. 하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맞잡은 손을 조금 더 세게 움켜쥐었다. 아까보다도 더 옥죄어 오는 손에 승연은 일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 손길에서 악의나 사심 따위는 일절 느껴지지 않았고 그다지 폭력적이지도 않았기에 곧바로 표정을 풀고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아니에요, 알아보지 못하는 분도 오랜만에 뵈어서 편하다니까요.”

“그래도……. 아, 그것도 그렇네요. 이런 상황에 팬이었던 사람 만나면 더 불편하긴 할 것 같습니다. 좀비가 되어 있어도 문제고 아니어도 문제고.”

“…….”

그 말에 승연은 종전에 보았던 좀비 한 마리, 아니, 팬 한 명? 아직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방금 만났던 것을 떠올렸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도, 자신의 의지대로 힘이 들어가지도 않는 몸으로도 내내 붙들고 있던 가방에는 뭐가 들어가 있을지가 궁금하기도 하고. 함부로 열어보는 건 예의가 아니겠으나 정신이 멀쩡할 때는 자신을 사랑해 준 사람이다. 수습 정도는 도와드려도 괜찮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고 있으니 하진이 의아한 낯을 하다 이내 표정을 갈무리했다. 상처를 건드렸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탓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생각이었지만, 하진은 일단 승연이 답을 하기 전까지는 잠시 기다려 주기로 한다. 승연은 하진을 흘끔 바라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실은 여기 나오면서 팬이었던 분이…… 그렇게 된 걸 마주치긴 했는데요.”

“으응.”

“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트리셔서, 그 짐이라도 좀 수습을 해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거든요……. 저희 집 아래에서 떨어트리셨는데, 혹시 도와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 말을 들은 하진은 눈을 몇 번 끔뻑였다. 도와주는 거야 일도 아닌데, 왜 굳이 팬이라는 사람이 당신의 집 앞에서 발견된 거지? 이웃이었나? 그렇다기엔 그냥 팬이라고만 말했다. 몇 분 동안 본 승연은 정이 많은 동시에 의외로 구분이 명확한 사람이라, 이웃집에 사는 사람이었다면 근처 살던 팬분, 이라는 단서라도 달 것 같았는데. 뭐, 지금 상황에서 굳이 필요한 추리는 아니었음을 알았으니 하진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승연은 딱 보니 정에 약한 사람이었고, 가방에 쓸만한 물자가 있다면 수습한다는 핑계를 대고 쉘터에 가져가서 소비해도 그만이었으니까. 너무 기회주의적인 생각인가 싶었지만 당장 사람 여럿 먹여살리는 입장에서 도덕이니 뭐니 하는 것을 고려할 새는 없었다. 마트에서 발견한 음식을 죄다 승연에게 양도한 마당에-물론 승연과 헤어지면 다시 마트로 향해 남은 게 있는지 뒤져볼 생각이었지만- 그 정도 보상 챙기는 것은 그렇게까지 나쁜 일도 아니지 않겠는가. 물건 주인도 좀비가 됐다는 마당에. 뭐 어찌 되었든.

승연은 그런 하진의 속은 조금도 알지 못한다는 듯 밝게 미소지었다. 확실히, 약한 모습을 보이면 다정해지는 사람이다. 굳이 약한 모습을 내비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아니지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곧 아파트 단지로 들어선 승연은 아까 전까지만 해도 많았던 좀비들이 대부분 사라진 것을 눈치채고 고개를 기울이다, 편의점 앞에 몰려 있는 좀비 무리를 확인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아, 누가 죽인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저기로 몰고 간 거구나. 그제야 승연은 집 근처 바닥에 떨어진 둔탁한 가방을 주워들었다. 하얀색, 세상이 멀쩡할 적의 자신을 상징하던 키링이 달린 가방. 정말 좋아해 주신 분이셨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우울해지는 것도 같아서, 승연은 말없이 가방을 주워들었다. 곧 자신의 손을 막는 하진의 모습에 의아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지만.

“당장 안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들고 가는 건 좀 위험할 것 같고, 가져가실 거면 여기서 같이 열어보고 가져가시죠.”

“그, 그래도 제 팬분인데……. 가방 대놓고 막 열어보는 건 예의도 아닌 것 같아서…….”

“그냥 제가 탐사하다 주웠다 칩시다. 주십시오.”

그래도 되나? 사실상 돌아가신 분인데 그런 분한테 예의가 아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던 승연은 하진의 강경한 태도에 결국 포기하듯 손을 거뒀다. 맞는 말이긴 하다. 이 사람은 내게 쉘터에 올 것을 제안하기도 했고, 살아 있는 사람을 하나라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으니까. 그리고 자신 역시도 죽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위험요소가 있다면 최대한 제거하고 들이는 것이 맞았다. 승연의 순순한 포기에 하진은 이해해줘서 고맙다는 듯 잠시 고개를 까딱이다, 지퍼 소리가 거의 나지 않게 천천히 가방을 열었다. 봐도 되나, 보지 말까…….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린 승연이 괜히 전방을 주시할 즈음, 의아한 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연 씨는 보시면 안 될 것 같은데.”

“네? 왜요?”

“보자, 그냥 팬이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러면 이 사람이 그냥 팬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승연은 당연한 말이 아니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다가도, 하진이 곤란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지난번 팬미팅에서 짧게 대화를 나눈 기억이 있다. 여기 사는 것도 아니라고 했는데 굳이 여기까지 온 사람이면 자신의 팬이 아니고서야 뭐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던 승연은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듯 큰 눈을 여러 번 끔뻑였다. 그렇네, 멀리 사는 사람이 굳이 내 집 앞에서 좀비로 발견된 이유가 어딨지……? 선한 방향으로 해석하려 하면 이런 상황이 벌어진 이후 자신이 생각나서 무언가 도움이 될 법한 물자를 전달하기 위해서였을 텐데, 그게 아니라면. 승연은 몇 번 눈을 끔뻑이다 말고 하진의 낯을 바라보았다. 영 곤란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 사람과 관련이 있는 물건이 있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이 사람과 좀비가 된 사람은 아무 관계도 아닌 것 같았고, 되려 자신이 어떤 상처를 받지 않을까 염려하는 표정에 가까워 보였다. 그리하여, 승연은 조심히 고개를 들어 하진에게 간단한 질문을 던진다.

“제가 상처받을까 봐 그러시는 거예요?”

“예, 따지자면……. 그렇군요. 염려됩니다.”

“그런 거면 그냥 보여주세요, 저도 궁금해요.”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찬 하진이 가방에 든 물건들을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간식 몇 개, 가방 겉에 매달아 둔 키링이 어색하지 않도록 꽉꽉 들어찬 자신의 이름이나 캐릭터가 박힌 굿즈, 가방 안쪽 지퍼 안에서 튀어나오는 메모리카드 삽입이 가능한 초소형 설치 카메라와 메모리카드, 여분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메모리카드 두 개, 선물용으로 포장한 쿠키, 포장이 뜯어진 한 번도 본 적 없는 약……. 직감적으로 이 짐덩이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챈 승연은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니까 내가. 무어라 한 마디를 얹으려던 하진이 입을 다물고 승연의 눈치를 살피다 카메라와 메모리카드를 한 번씩 훑어보았다.

“메모리카드, 이 기종이랑 안 맞습니다. 여기 삽입하려면 더 작아야 해요.”

“그건…….”

“집이나 집 근처에 몇 개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미.”

그러니까, 카메라가. 굳이 덧붙이지는 않았다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이해하고 있던 승연이 인상을 구겼다. 사람의 순수한 호의와 선을 넘어선 욕심은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마냥 그렇지만은 않았나 보다. 정말 좋은 사람인 줄, 사람 사정 잘 이해해주고 배려해주는 팬인 줄 알았는데 발견된 꼴부터가 이렇지 않나. 승연은 입을 틀어막는다.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동시에, 새삼스럽지만 자신이 알고 있던 상냥하고 다정한 세계는 정말로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처에 남아 있던 까닭이 자신을 지켜주거나 혹은 도와주기 위해서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은 자신이 가장 혐오하던 모습으로 재회했고,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예전 같았으면 놀라운 일이었겠으나 지금에 와서는 차라리 안도 되었으며, 그런 사람이 이제 와 자신을 돕고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제가 알고 있었고 제가 몸담았던 세계에선 기대할 수도 없었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이다. 그런 것이 이제는 일상이며 실재가 된 것이다. 그중 어떤 사실에는 금방 적응할 수 있었으나 또 다른 사실에서 느껴지는 힘겨움은 도저히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지금 느끼는 불쾌감은 오래 가지고 갈 감정조차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연의 상태가 나빠졌다는 것을 한눈에 눈치챈 하진이 가방 안에 짐을 밀어 넣었다. 눈에 보이지만 않으면 그만인가 생각했으나 당장 눈에 거슬리던 것이 차단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안정감을 동반했다. 승연은 느리게 숨을 몰아쉬며 입을 막았던 손을 떼었다. 짐을 정리하던 하진이 승연은 이름도 알지 못하는 약물이 담긴 통을 가만히 바라보다, 쿠키와 약을 번갈아 보곤 자신의 옷 안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그건 왜 챙기지. 승연의 입장에서는 궁금할 일이었으나, 어쩌면 저것도 그 나름의 배려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떤 배려인지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안주머니에 쿠키를 밀어 넣은 하진이 인상을 가볍게 구겼다. 좀비 사건 터지기 전에 이 주변을 꽤 돌던 약물인 것 같은데, 돌아가서 자세히 살펴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럴 만한 시설이 주변에 있나. 없다면 보일 때까지 돌아다니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며 챙겨 들기야 했지만, 그런 생각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르자면 만약을 대비한 것이다. 승연은 오래도록 집에 있었고, 이 사태에 대한 현실감 또한 많이 사라진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단 음식이 당기거나 몸이 아프면 다른 선택지를 택하기보다는 아주 불쾌한 기억이긴 해도 이 쿠키와 약을 찾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세상에 있는 누가 그런 멍청한 선택을 하고 생각을 하겠냐마는 하진은 얼마 전 쉘터에서 출처를 알 수 없어 내다 버린 수제 과자를 먹으려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을 두 눈으로 본 적이 있어 조금 더 예민했다. 먹을 게 없으면 사람이 이성을 잃기도 하지, 아파도 마찬가지고……. 곧 하진은 한때 승연의 팬이었던 사람, 그리고 이제는 아마 승연의 스토커로 기억될 사람의 가방을 바닥에 내려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조금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승연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래도 메모리카드를 직접 수거해야 하는 형식이면 사태 이후로 승연 씨를 지켜보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이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집 몇 층이에요. 데려다드리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바로 직전, 제게 온갖 호의를 베풀던 사람이 스토커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승연으로는 아주 달가운 호의는 아니었으나 당장 도와준다는 것을 거절하는 것도 그림이 우습긴 했다. 올라가는 길에 좀비라도 만나면 큰일이기도 하고. 승연은 고개만 몇 번 끄덕이고, 아파트의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간헐적으로 들리던 좀비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잠깐이나마 하며, 승연은 하진과 함께 자신의 집이 있는 층까지 올랐다.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집 앞에 멈춰선 승연이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아, 그냥 바로 전 층에서 헤어졌어야 했는데. 집이 몇 층이고 심지어 몇 호인지까지 고스란히 노출했다.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은 승연이 눈을 세게 감았다 떴지만 하진은 그저 주변만을 경계하며 그의 뒤를 따랐을 뿐이었다.

“여, 여기예요. 이제 다 와서 안 도와주셔도 괜찮으실 것 같아요.”

“그래요, 고생했습니다. 아까 보니까 무슨 빗자루를 들고 다니던데, 웬만하면 이거 들고 다녀요.”

그렇게 말하며, 하진은 들고 있던 두 개의 무기 중 그가 손으로 깎아 만든 건지 혹은 어디서 잘 벼려진 나무토막을 주워온 건지 지금으로는 구분하기 어려운 창을 승연에게 건네주었다. 쇠지렛대가 아니라 내구도도 부실한 창을 건넨 건 하진의 개인적인 판단 탓이었는데, 승연은 무거운 가방 하나조차 오래 들고 있기 어려운 것처럼 보였고 체력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닌 것 같았다. 근력도 체력도 모자란 사람에게 쇠지렛대는 들고 있는 것조차 어려운 물건일 테고 좀비가 우글거리는 소굴에서 그것은 곧 죽음과 한 발 가까워짐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고를 수 있는 것은 비교적 무게가 가볍고, 꼭 살상용으로 사용하지 않아도 좀비를 제압할 수 있는 창 정도였다. 그나저나 이런 걸 왜 주고 앉아있지, 나 쓸 무기도 시원찮은데. 하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내내 메고 있던 승연의 가방을 벗어 승연의 손에 들려주었다. 역시나, 이 가방 하나 받는데도 손이 바닥에 닿을 기세로 내려갔다 올라왔다. 그렇게 무겁지도 않은데. 입모양으로만 중얼거린 말이 닿지 않아 다행이라고 잠시 생각하면서.

“연이 닿아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조만간 한 번 찾아와도 되겠습니까?”

“왜, 왜요?”

“저희 쪽에 남는 라디오가 하나 있습니다. 드릴까 싶어서요.”

왜 그렇게 잘해주시는데요? 승연은 물어보려던 질문을 애써 삼키며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그렇지만, 대뜸 다시 얼굴을 마주치면 쉘터에 오라고 할 것 같은데. 당장은 사람과 모여 지내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 자체를 조금은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승연은 망설이듯 눈동자를 굴렸다.

“주, 주시는 건 좋은데……. 당분간 조금 혼자 마음을 추스르고 싶어요, 하진 씨가 싫은 게 아니라요. 지금은 사람 만나기가 조금…….”

하진은 그런 승연의 얼굴을 잠시 내려다본다. 앞뒤 사정이 어쨌든 도와준다는 사람의 호의는 받고 싶지만 도와준다는 사람을 마주치기는 싫어하는 태도는 영 받아들이기 힘들 줄 알았는데, 그가 말하니 그렇게까지 나쁘게 들리지도 않았다. 왜일까. 동생이랑 나이가 비슷해 보여서? 아니면, 윤도영 그 자식, 폐급이긴 해도 저 사람 방송 보고 나면 그나마 정신 좀 차리고 일하는 걸 봐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마음의 빚을 좀 지고 있는 걸지도. 잠시 생각하던 하진은 아무래도 후자인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려둔다. 동생이고 뭐고 안 본 지 오래된 이상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소중하게 남는 존재들은 아닌데-직전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표정이 굳었던 것만 봐도, 그가 가족에게 친밀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자명했다-, 사태가 모두 뒤집히고 세상에 발 딛고 살아가는 것조차 힘겨운 지금도 자신에게 명예와 성취는 중요한 과업이었으므로. 그것을 해치지 않게 도와준 사람에게 마음의 짐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일이 설명하기에도 우스웠으니 승연에게 말하지는 않았고, 그렇기에 승연이 불온한 오해를 할 수도 있었겠으나 그것은 설명하지 않는 이상 자신이 감내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하진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해합니다, 일도 있으셨잖습니까. 음,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이틀 정도 지나고 이 자리에 라디오를 놓아두겠습니다. 낮 즈음에 놓아둘 테니, 밤이나 다음 날 아침 즈음에 확인하시면 서로 불편할 일 없을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정도면 좋아요…….”

그러니까 왜 그렇게까지 배려해주시고 이해해주시는 걸까요. 마침 거기서 마주쳤던 것도 실은 우연이 아닌 건가? 당신은 뭘 하는 사람이에요? 승연은 묻고 싶은 이야기를 삼키고 고갯짓으로 인사를 건네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마지막으로 가벼운 손인사를 건네는 하진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면서.

승연은 바로 문 앞을 떠나는 발걸음을 확인하고서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것이 사람이다 보니 혹시 몰라 문 뒤에서 잠시 머물렀건만 기우였던 모양이다. 챙긴 음식들은 풍족하게 먹으면 사흘, 아껴 먹으면 5일 내외로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더 챙길 걸 그랬나. 아쉬운 마음은 그뿐이다. 그 상황에서 이만큼 챙긴 것도 감지덕지다. 집 바깥으로 나가도 좀비를 덜 마주칠 수 있는 경로를 파악한 이상, 식량이 떨어지면 나가보면 그만이기도 하고. 또다시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없지야 않겠다만 승연은 하진이 좀비를 처리하는 모습을 지척에서 보았다. 그의 행동을 따라 하면 좀비 배를 간지럽히는 흉내라도 낼 수 있겠지, 짤막한 기대를 한다.

승연은 가진 통조림의 뚜껑을 열어 당장의 허기를 해결했다. 이상하리만치 배가 고팠다, 오랜만에 많이 움직여서 그런가. 물을 많이 마시니 어느 정도 배는 찼는데 공허하다는 느낌은 도저히 누를 수가 없었다. 통조림 아껴 식사로 때우는 신세가 오래 이어지니 그만큼 체력이 떨어졌음을 고려한다면 여러모로 끔찍한 일이다. 체력이 떨어졌으면 배라도 고프지 말지. 괜히 투덜대던 승연은 언제나 그랬듯 몸을 씻고 나와 침대에 누웠다. 휴대폰을 켜도 인터넷은 나오지 않으니 귀에 이어폰을 끼고 인터넷이 없어도 잘만 돌아가는 게임을 실행시켜 맥없이 화면을 두드린다. 이런 짓도 한 달째니 이 게임도 슬슬 질리기 시작했지만, 읽을 만한 책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을 때 죄다 읽은 지 오래였으니 이제 할 만한 일이라곤 게임밖에 남지 않았다. 그마저도 30분에 한 번씩 충전되는 게임 플레이 기회가 전부 끝나고 나면 승연은 그저 침대에 대 자로 뻗은 채 천장을 올려다보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평안한 날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분명히 그렇겠지만. 하루의 피로에 낮아진 체력이 더해진 탓인지, 승연은 저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이상하게도 하진이 나오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도 승연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 그 사람이 나오는 꿈을 꿀까, 싶었으나 한 달 만에 제대로 만난 사람이니 퍽 인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하곤 그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사실 저런 사람이라면 이런 난장판 속에서가 아니라 어디서 만났더라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긴 했다. 냉정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약한 사람에게 다정하게 구는 태도나, 객관적으로 위험한 상황인데도 다른 사람을 위해 뛰어들 수 있는 용기, 자신이 구한 사람에게 별다른 생색도 내지 않으면서 타인의 안녕을 살피는 다정함 따위……. 그리고 객관적으로 보든 주관적으로 보든 찾아봐도 찾기 힘들 정도로 괜찮은 얼굴이라든가. 등을 돌리고 있던 그 낯이 몸을 돌려 자신을 바라본다. 새까만 머리카락, 그 아래에서 금빛으로 물들어 파도치듯 미소짓는 눈동자. 승연은 꿈속에서나마 그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근거라곤 손톱만큼도 존재치 않는 확신이 든다. 언젠가, 또. 만나게 될 것이라고.

꿈속의 그가 입을 열려던 찰나 잠에서 깼다. 이상한 꿈이었다. 왜 이렇게 꿈 같지도 않고 생생한 건지. 느리게 눈을 비비던 승연은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창밖을 바라보다 다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베개에 고개를 묻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지. 어제 많이 일찍 자서 그런가. 자신을 달래가며 잠에 빠져들기 위해 노력해도 좀처럼 잠은 오지 않았고, 다만 하진의 얼굴이 머릿속에 맴돌아 승연은 눈을 세게 감았다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기 한 번 하고 청소하자. 그러다 보면 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오겠지. 비척비척 움직여 청소기를 끌어와 전원을 연결했지만, 청소기는 작동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전기가 끊긴 모양이다. 이러다 다시 돌아오겠지, 늘 그랬으니. 어쩔 수 없이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청소를 하는데 왜 먼지는 계속 쌓이고 머리카락은 계속 남아 있는지도 의문이다. 찌뿌둥한 몸을 달래며 상체를 일으키고 크게 기지개를 켜는데 마침 동이 트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에, 승연은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어둠뿐이었던 세상에 떠오른 금빛 태양이 세상을 빛으로 물들이는 과정을, 새벽 여섯 시 즈음이 되었으나 문밖에서는 들려올 기미도 없는 발소리를 기대하면서. 그리고, 다시금 생각한다. 세상에 없는 것은 영웅뿐만이 아니라 기적이나 희망 같은 단어 또한 마찬가지인 것 같다고.

그렇게 이틀이 더 지났다. 하진이 라디오를 가져다 두겠다고 예고한 지 딱 하루가 지난 날이다. 오가는 소리는 듣지 못했으니 자는 새 왔다 간 것 같았다. 물론 그 자리에 라디오가 있다면 말이지. 승연은 느리게 몸을 일으키고 문에 걸쇠를 건 채 문을 조금 밀어젖혔다. 약속한 자리에 고스란히 놓여 있는 종이봉투를 보고서야 작은 웃음을 터트린 승연은 괜히 문틈으로 보이는 주변을 눈으로 훑는다. 그 사람, 혹시 여기 계속 있는 거 아니겠지……. 괜한 걱정인지 주변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아, 승연은 곧 염려 없이 걸쇠를 풀고 종이 쇼핑백을 손에 쥔 채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나저나, 이거 꽤 묵직하다. 아무렴 라디오가 들었는데 마냥 가볍겠냐마는 그 정도 무게가 아닌 것 같아 승연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얼른 열어볼까? 거실에 쇼핑백을 내려둔 승연이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봉투 안을 열었다. 종이 봉투 안에 든 검은색 비닐봉지, 그리고 아래에 깔린 라디오를 본 시점에서는 조금 더 의아해지긴 했지만. 라디오만 준다고 하지 않았나? 이건 또 뭐람. 의아한 마음에 열어본 봉투 안에는 통조림이나 간단한 조리로 먹을 수 있는 레토르트 식품이 가득 들어있었다. 먹어요, 성의 없이 적힌 쪽지 하나와 함께.

이건 그냥 라디오 맞지? 아래에 놓여 있던 라디오를 집어 드니 거기서도 어김없이 쪽지가 붙어 나왔다. 접혀 있는 쪽지를 열자 간단한 내용이 눈에 띄었다.

28.6번 채널에서 좀비와 관련된 정보가 방송됨. 13시에 방송되고, 매일 방송되지는 않으니 참고 바람. 그 외 시간에는 재방송 또는 방송 중지됨.

승연은 어른스러운 글씨를 오래도록 내려보다가, 28.6번 채널에 주파수를 맞췄다. 과연 재방송이 나오고 있는 건지 좀비와 관련된 내용이 하나둘 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내용일까, 싶어 들어본 내용은 죄다 하진이 그날 들려준 내용이었지만. 여기서 들은 걸까? 아니면, 그 사람이 이쪽 채널에 제보를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날 많은 정보를 들은 것이 괜히 고마워서 승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인데 이것저것 알려주는 게 고맙기도 하고, 보기보다 순하고 순진한 사람인가 싶기도 하고……. 곧 승연은 라디오의 전원을 끄고 거실에 앉아 식량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많지는 않았지만, 이것으로 열흘 정도는 무리 없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그렇게, 승연은 정말로 열흘을 더 버텼다. 입안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다 거기서 거기였으니 열흘간 간단한 음식만 먹고 버티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고, 하루가 다르게 저물어가는 희망을 구태여 상기해가며 현재에 적응하려 드는 것도 꼭 어렵게 느껴지지만은 않았으며, 어느새 최고 단계에 다다라 더 플레이할 스테이지도 남지 않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그를 가장 힘겹게 하는 것은 외로움이었다. 아예 사람 만날 각오조차 하지 않고 버텨온 한 달, 그리고 예고치 못하게 사람을 만나게 된 지금. 정말 단 한 번 만난 사람이 그에게 특별하게 느껴질 까닭은 어디에도 없는데 승연은 내내 하진의 얼굴을 떠올리고, 가끔 자신의 손을 붙잡던 그의 손을 떠올렸으며, 쉘터로 자신을 이끌기 위해 노력하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홀로 살아가는 것은 버거운 일이다. 그 사람은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처럼 굴었고, 한 달을 무난히 버틴 승연은 그 말을 부정하고 싶었으나 사실 승연 또한 알았다. 사람은 사람 없이 살아갈 수 없고, 사람의 관심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이 익숙했던 시간을 지나와 지금에 다다른 승연은 오롯이 홀로 버텨내는 것을 버거워하는, 그런 시간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고 힘겨워했던 시간을 넘어선 계기도 결국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승연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슬슬 정말로 사람이 보고 싶었다. 이렇게 있다가 결국 굶어 죽든, 혹은 바깥ㅇ로 나가 좀비에 물려 죽든,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었다가 사람들에 의해 좀비에 물려 죽든 죽는 것은 똑같다면 쉘터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 그 무렵 승연의 머릿속에 하진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그리고, 반드시 하진이 있는 쉘터로 갈 필요는 없었다. 지금 바깥으로 나가 마주치는 사람이 하진이라면 충분히 고려할 만한 대상이었겠지만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먹을 것이나 라디오도 신세 졌는데 몸까지 신세 지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어디로 가든 몸 신세 지는 처지인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어쨌든 간에. 반드시 하나의 선택지만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승연은 가방을 메고 하진이 주었던 창을 들었다. 다시 그 마트로 가면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설령 만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음식 수급한 셈 치면 되니까. 그렇게, 승연은 다시 한번 자의로 문을 열어젖힌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이번에도 서늘했다. 한낮의 공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바람에 승연은 무심코 하늘을 바라본다. 비가 올 것 같았다. 이곳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정말로 먹구름이 드리워져 비가 쏟아지기 전에 승연은 하진이 안내해주었던 길을 따라 일전의 마트로 향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물자가 제법 많은 마트 안으로 걸음을 옮긴 승연은 이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면 여기, 좀비가 한 마리도 없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고 또 어쩌면 부정적인 징조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승연은 괜히 하진을 떠올렸다. 그 사람이 여기에 다시 와서 주변 정리를 하고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물자를 구하러 온 것 같았는데, 물자를 편하게 구하기 위해 그런 방법을 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찌 되었든 자신에게는 좋은 일이니 승연은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식품 코너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제법 여유롭게 남은 물자를 보니 조금 더 기분이 좋아져, 별 경계 없이 통조림과 레토르트 식품을 가방 안으로 밀어 넣던 승연은 문득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지금 등 뒤에 뭐가 있지 않나? 지금, 그러니까……. 이후의 행동은 반사적이었다. 승연은 가능한 거리를 두기 위해 앞으로 두어 걸음 전진하며 창을 쥐고, 몸을 돌리는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상대의 머리를 겨누었다. 눈부터 확인하자. 초점이 없으면 좀비니까 망설이지 말고 찔러야 한다.

“어어, 어?!”

“어? 어, 어어, 죄송해요! 좀비인 줄 알고……!”

“케이?! 어, 케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초점 잃은, 인간을 모방한 생명체는 없었고 대신 초록색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그 바로 뒤에 서 있던 흰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한숨을 내쉬며 승연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온다. 그는 하진이 승연에게 넘긴 창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남자의 앞을 막아서며 승연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해칠 의사는 없으니 무기 내려놓고 말씀하시죠.”

“아, 죄송합니다. 저도 해칠 마음은 없었어요.”

“이해합니다. 저희 때문에 많이 놀라셨죠,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어쩐지 하진을 조금 닮은 말투였다. 정확히 말하면 경찰이나 군인이 민간인에게 사용할 법한 말투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치고는 하진이 조폭이 아닐까 의심하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승연은 바로 무기를 바닥으로 내려놓으며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알리듯 가볍게 두 손을 들었다. 그 행동을 보고서야 여자 또한 자신이 든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은 채 두 손을 보여주었다. 마찬가지로 공격할 의사는 없던 모양이었다. 아니, 애초에 다가온 사람은 여자도 아니고 지금까지도 여자의 등 뒤에 숨어 눈을 빛내고 있는 남자였지만. 저 사람들은 원래 같이 다니던 사람들일까? 2인 1조로 움직이네. 아니면 가족이나 커플이려나, 아니, 가족은 아닌 것 같다. 닮진 않았어. 스스로 결론을 내린 승연은 곧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여자에게 한쪽 손을 내밀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목표는 충족했다. 지금 두 명만 같이 지내는 집에 살고 있다면 합류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겠지만 말이다. 그건 반쯤 포기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승연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할까요? 강승연이에요.”

“강유리입니다. 그나저나 저 머저리가 자꾸 케이, 케이 하던데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승연이 내민 손을 가볍게 잡고 흔든 유리는 곧 마주 잡은 손을 떼고 그 손으로 그대로 머리를 짚었다. 두통이 좀 있으신가, 아니, 앞에 있는 사람 때문에 피곤하신 것 같다……. 상태로 따지자면 철없고 상황 파악 좀 못 하는 신입 사원 데리고 일하는 사수 같은 느낌이라 해야 할까. 승연은 그들을 바라보다, 곧 부리나케 앞으로 튀어나와 자신에게 손을 뻗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 저도 인사! 저도! 케이 맞죠?!”

“아하하……. 알아봐 주시는 분이 계실 줄은 몰랐는걸요. 네, 케이예요. 그, 이게 제가 방송할 때 쓰던 닉네임이거든요.”

“아, 아……. 그 케이구나. 이제 좀 알겠네.”

“저는 윤도영이에요! 와, 진짜……. 저 나중에 사인 해주시면 안 돼요?”

도영? 어디서 들어본 것도 같은데. 뭐 아주 드물게 들을 수 있는 이름은 아니긴 하니까. 승연은 문득 떠오른 생각을 가볍게 넘기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사인이야 어렵지도 않은 일이니까. 이런 세상에서 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유리가 도영의 뒷덜미를 낚아채 그의 낯에 얼굴을 들이밀고 으르렁거렸다.

“골 울리니까 가만히 있자, 도영아……. 모르는 분한테 민폐 그만 끼쳐…….”

“……네…….”

“저, 저는 괜찮아요! 아, 그러니까, 두 분은 무슨 사이세요? 가족이신가 했는데 아니신 것 같기도 하고, 원래 아시던 사이셨던 건지 궁금해서…….”

어쩌면 유리는 자신이 아니라 도영이 거슬리다 생각했기 때문에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승연은 급하게 분위기를 바꾸려 입을 열었다. 마침 화제를 돌리기 좋은 주제여서였을까, 유리도 붙들고 있던 도영의 뒷덜미를 놓고 승연을 바라보았다. 별 걸 다 궁금해하네. 그런 얼굴이었지만, 이런 공간에 혼자 다니는 승연을 보며 무언가 깨달은 바가 있는지 유리는 지체하지 않고 가볍게 대답했다. 애당초 어렵게 고민하고 답할 문제가 아니기도 했다.

“직장 선후배예요. 퇴근하다 일이 터졌는데 마침 같이 퇴근하던 길이었거든요, 그 이후로 그냥 쭉 같이 다니고 있죠.”

직장 선후배라,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아는 사람과 함께 낙오될 수 있었다는 건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승연은 생각한다. 주변에 어떤 사람도 남겨지지 않은 풍경은 조금 버겁다. 지금의 환경이 승연에게는 조금 버거웠다는 의미였다. 괜히 손을 만지작거리던 승연은 문득 뿔뿔이 흩어져 있을 동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들 어떻게든 잘 지내고 있을 테고 잘 살아남았겠지만, 이런 사람들을 보니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고 보니 몇 명은 사옥에서 방송하고 수면실에서 잔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럼 멀쩡할지도 모르겠다, 그뿐만 아니라 같이 있을지도 모르지. 제 안위나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남 걱정을 이어가던 승연은 느리게 눈을 끔뻑이다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아, 그렇구나……. 유리 씨가 상사셨죠?”

“그럼요, 저런 놈 아래에서 일을 어떻게 해? 승연 씨는요, 방송하던 분이신 것 같은데……. 가족과 같이 지내고 계시나요?”

농담 어린 목소리였지만 그 말에 도영이 적잖이 상처를 받은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런 도영을 신경 쓰고 있긴 한 건지, 왜 그래, 농담이잖아. 웃어. 그렇게 중얼대듯 이야기하며 등을 두드리는 유리의 모습을 본 승연이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는 사람들이다, 같이 지내면 더 재밌을 것 같아. 물론 처음 봤던 그 사람처럼 든든하거나 대단한 사람 같지는 않지만, 또 받은 게 많은 입장에서 미안하긴 하지만 이 사람들과 함께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지도. 승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요, 혼자 지내고 있어요. 방송하면 아무래도 시끄러우니까 가족과 집을 따로 뒀거든요, 본가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요.”

“어, 그, 그럼 우리랑 같이 가요!”

아까 전까지만 해도 아주 풀이 죽어 있던 도영이, 승연이 혼자라는 말을 듣자마자 금방 기운을 차려서는 고개를 들었다. 오히려 자신이 기다리던 말이었기에 승연은 웃는 낯으로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도영의 표정에 웃음이 물들자마자, 유리가 팔을 뻗어 도영의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툭, 수준이 아니라 도영이 삽시간에 신음소리를 내며 자리에 주저앉은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야, 리더가 사람 늘리지 말랬잖아. 검증 안 된 사람이면 더더욱.”

“아니, 그래도요……. 나쁜 사람 아닌 건 제가 보증할 수 있어요! 그리고 어제 리더가 여자 데리고 온 거 보면 뭐라고 하진 못할 것 같은데…….”

“걔는 원래 그러잖아……. 승연 씨도 그래요. 우리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대뜸 쫓아온대요?”

“……그건 그런데…….”

덤앤더머네……. 패트와 매트? 중얼거리던 유리가 한숨을 내쉬다 말고 품속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좀비 사태가 터진 이후, 지갑은 신원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신원이라는 것도 명함 따위로 증명할 수 있는 신원보다는 주민등록증으로 증명할 수 있는 신원으로, 시체가 된 이후 품을 뒤졌을 때 이 사람이 생전 어디 살던 사람이었으며 이름은 무엇인지 정도를 알기 위해서만 사용된 물건이라는 의미였다. 아무리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승연이라도 사태 파악이 불가능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으며, 그렇기에 이 타이밍에 왜 유리가 어째서 자신의 품을 뒤지고 지갑을 꺼내 드는지 잠시 궁금해졌으나 승연은 이어지는 유리의 말을 듣고 판단하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를 검증하기엔 모자란 물건이라는 건 알아요. 그래도 우리가 태생적으로 나쁜 사람이거나, 그렇게 행동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데에는 이만한 게 없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유리는 지갑 속에서 명함을 꺼내 들어 승연에게 건넸다. 태림경찰서 강유리 경위. 적혀 있는 이름과 주소지, 그리고 연락처를 확인한 승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옥과 가까운 경찰서였다. 이 집과도 그렇게 거리가 멀지 않은 곳이고. 쓰여 있는 주소도, 사실 경찰서 주소를 일일이 외우고 있을 까닭은 어디에도 없으므로 진짜 주소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대략 이 위치 정도에 있는 경찰서가 태림경찰서인 건 맞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신원을 조작하겠다는 근거 하나만으로 명함을 뽑을 수 있을 리도 없고. 그렇다면 정말로 경찰인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승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잘 어울리는 직업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도영이가 당신을 데려가려고 하는 것도, 물론 저 자식 성격에 팬심이 하나도 없진 않겠지만. 곤란한 사람을 도와주려는 의도에서 그런 걸테니 너무 기분 나빠하진 않으셨으면 좋겠고요.”

“네, 네.”

“경찰서는 좀비 사태 직후 유치장에 갇혀있던 용의자와 일부 경찰들로 인해 쑥대밭이 됐어요. 그래서 우리는 경찰서와 가까운 대형 교회에 쉘터를 만들었고요.”

“쉘터 관리는 누가 하고 계세요? 그러니까, 리더요.”

거기까지 질문하자 유리는 다시 이마를 짚었다.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었다. 만성적 두통인가……. 나한테 약이 있던가? 골치 아픈 일이 생기긴 했던 모양인데. 승연이 더 궁금해하기도 전 유리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경찰서 총경……. 말이 어렵죠? 경찰서장님께서 그 자리의 리더를 맡고 계시다 보름 전 사고로 돌아가셔서 그분의 아들이 리더 자리를 이어받게 됐고, 그 사람은 새로운 사람을 데려오는 데에 굉장히 폐쇄적이라……. 우리가 데려가도 승연 씨랑 지낼 수 있을지는 몰라요. 그래도 저희를 따라와 주시겠어요?”

승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 이래저래 따질 시간은 없다. 쫓겨나면 또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고. 그렇게 생각할 즈음 도영이 자리에서 방방 뛰다가, 자리에 있던 웬만한 식량들을 한 번에 가방 안으로 쓸어 담고는 20kg는 족히 되어 보이는 가방을 등에 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그래 보이는데, 은근히 힘이 센 사람이다. 신기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승연이 도영을 바라보자 도영은 조금 뿌듯하다는 듯 코 밑을 문지르며 웃었다. 그러다 다시 유리에게 뒷통수를 한 대 맞긴 했지만.

“그럼 일단 가죠. 슬슬 정말 비가 올 것 같아서, 얼른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가능한 한 뛰어갑시다.”

“저 지금 20kg짜리 가방 메고 있는데요?”

“내가 무리하지 말라고 했지. 우리 중에 그 가방 메고 뛸 수 있는 사람 팀장님밖에 없으니까 작은 가방 메라고 했어, 안 했어.”

투닥대는 목소리를 들으며 승연은 가벼이 웃었다. 그나저나 나는 이 가방을 메고도 못 뛸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할 찰나 유리가 승연의 뒤로 다가오더니, 승연이 등에 멘 가방을 벗기고 자신의 등에 멨다. 승연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놀란 얼굴로 바라보기도 전, 운동화 끈을 고쳐 맨 유리가 내려두었던 무기를 승연의 손에 쥐여주고 자신의 무기도 손에 쥔 채 가볍게 웃었다.

“방송만 했다면서요? 딱 봐도 몸 쓰는 일은 제가 더 잘할 것 같은데 맡기시고, 잘 뛰기나 하세요.”

“우리 경위님 멋있죠…….”

“헛소리 그만하고. 가자.”

그 말과 함께 유리가 건물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그러고 보니 이 건물에서 교회까지 어느 정도 걸리더라?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였던 것 같은데, 내내 뛰어갈 수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안색이 새파래진 승연이었지만, 그렇다고 뛰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 승연은 다 죽어가는 낯으로 걸음을 뗐다. 그나마 함께 뛰는 도영과 유리가 굳이 승연을 무리하게 하고 싶은 건 아니었는지, 평소대로였다면 뛴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속도로 뛴 덕에 승연은 곧 죽을 것처럼 숨을 몰아쉬면서도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고 그렇게 일행은 8분이 지나서야 교회에 도착했다. 마침 비가 쏟아지기 시작해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리며 쉘터 앞에서 숨을 골랐다.

“그, 참. 혹시 제가 쉘터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이렇게 수색하는 것도 도와드려야 하는 거죠?”

“못 하겠으면 보급이나 정리하는 쪽으로 가도 되긴 해요, 그것도 일이 많아서.”

“하지 못하겠다, 그런 건 아닌데……. 혹시 수색 중에 사람 하나 찾을 수 있는지도 여쭤봐도 되나요? 찾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뭐……. 일단 리더 만나고 오면 얘기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람 찾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그럼, 갈까요?”

숨을 고르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도 오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새로 보고해야 할 일이 예상외로 많아진 덕이고, 그 중 가장 큰 일은 승연이 합류했다는 사실임을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기에 수다가 길어지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진 않았다. 뭐, 일이 잘 풀린다면 수다는 안에서도 떨 수 있는 것 아닌가. 유리는 승연에게 가방을 다시 돌려주고 쉘터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도영이 그 뒤를 자연스럽게 따랐고, 승연 역시 뒤를 따랐다.

유리는 짐을 정리하는 대신 리더의 방으로 먼저 향하는 것을 택했다. 물론 등에 진 짐이 아주 가볍지만은 않았고 도영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나, 승연이 이 장소에 더 익숙해지기 전에 머물러도 되는지 혹은 나가야 하는지를 결정짓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한 탓이다. 장소에 다 익숙해졌는데 이방인이라는 사유로 내쫓기면 승연에게도 속상한 일이고, 데려온 입장에서도 예의가 아니니까. 평소 같았으면 불만이란 불만은 다 쏟아내며 어깨가 아프다느니 등이 결린다느니 몸이 다 무거운데 짐이라도 내려놓으면 안 되냐느니 투정이란 투정은 다 끌어모아 입 밖으로 내뱉었을 도영도 이번만큼은 조용했다. 어쩌면 분위기 파악이 된 게 아니라 아까 한 헛소리들이 부끄러워 이제야 입을 다문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든 도영이 평소와 다르게 조용한 것은 좋은 일이었다. 새로 선임된 리더는 언제나 가벼운 태도를 유지하려는, 정확히 말하자면 분위기가 처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어떻게든 떠들어대는 도영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니까. 저 사람 하나만으로도 저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리더에게는 나름 좋은 요소일지도 모르겠다고. 유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리더의 사무실 문 앞에 섰다. 그나저나, 오는 길에 여러 번 주변을 둘러봤는데도 팀장님이 안 계시네. 상황 설명 좀 하면 설득하는 것도 도와주실 텐데. 아쉬운 마음도 잠깐 삼키며 문을 두어 번 두드린다.

“강유리, 윤도영입니다. 들어갑니다.”

별다른 긍정의 대답은 들어오지 않았으나 언제고 고운 대답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바로 문을 열어젖히는 게 낫다고 생각한 유리는 지체할 것 없이 문을 열었다. 의자에 삐딱하게 걸터앉아 책상 위에 발을 올린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거만한 모습을 바라보며 유리는 가벼운 한숨을 내뱉는다. 승연 씨에게 첫인상은 엉망이겠군. 아니나 다를까, 승연은 저게 뭐지, 라는 듯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리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지 말라는 듯 도영이 소매를 잡아끈 덕에 금방 표정을 갈무리하긴 했지만.

“외부 구조자입니다. 들여도 되겠습니까?”

“……오, 케이 아니야? 스트리머. 방송 가끔 봤어.”

“강승연씨구요……. 케이가 맞긴 한데 프로게이머라고 하는 걸 좋아하지 않을까요…….”

도영의 소심한 반항에 승연은 잠시 어떤 표정을 지을까 고민하다가, 그저 고개를 몇 번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도영의 말에 대답한 건지, 리더의 말에 대답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대답은 되었다는 판단이었는데, 그것이 아주 틀려먹은 판단은 아니었는지 리더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느 정도는 상대를 존중한 채로 대화를 이어나갈 의지가 있다는 건지, 혹은 리더의 권위를 보여주겠다는 방향인지 모르겠으나 전자였으면 좋겠다고 유리는 생각했다.

“내가 팬이긴 한데, 검증도 안 된 사람 막 데리고 오는 짓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내 말은 듣지도 않나 봐.”

“그간 했던 것처럼 하루 어디 두고 확인하면…….”

“아니지, 아니지. 상황이 바뀌었지. 얼마 전에 누구 하루 두고 봤다가 우리 다 큰일 날 뻔했던 거 기억 안 나? 지금은 아주 검증된 사람만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비꼬는 목소리에 유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다시 붙들었다. 내가 얘 때문에 늙는다, 늙어. 원수만도 못한 놈. 가볍게 호흡을 고른 유리가 승연의 얼굴을 흘끔 바라보았다. 거절당할 것을 염두에 두긴 했지만, 그렇다 해서 면전에서 전해지는 무례를 고스란히 받아 낼 의무가 그에게는 없었다. 여기에 있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으로 인해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원하지도 않았고 무례한 사람의 얼굴을 계속 맞대고 있는 것은 피곤한 일이었으니까. 어제 여자는 그냥 받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하니 속까지 안 좋아졌다. 저열한 사람이라는 의미밖에 더 되겠는가.

“……대체 언제 생긴 규칙이죠? 제대로 얘기한 적도 없으면서 사람 데려오니까 갑자기 검증 안 됐으면 내쫓아라? 왜, 어제 새로운 여자분 하나 들어올 때나 그렇게 말하지 그러셨습니까.”

“아, 여자 데려오면 말이 조금 다를…….”

쾅.

그 순간, 일순 크게 울린 소리에 사무실에 있는 모두가 몸을 떨었다. 벼락이 내려치는 소리인지 문이 열리는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었으나 곧이어 한숨을 내뱉으며 들어오는 덩치 큰 실루엣을 보면 문을 여는 소리였나보다 싶었다. 눈을 세게 감았다 뜬 탓에 스쳐 지나간 사람의 얼굴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승연이 겨우 눈을 뜨고 걸어 들어온 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판초 우의의 후드까지 뒤집어써 머리카락 하나조차 보이지 않았으나, 어쩐지 그 뒷모습이 익숙한 것도 같았다. 덩치도 그랬고. 어디서 봤더라, 아는 사람인가. 고개를 기울이기도 잠시 도영이 반갑다는 듯 한결 높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째 안 계시더라! 어디 계셨었어요?”

“비 처맞은 거 보면 몰라. 나갔다 왔다, 배달하러.”

도영의 목소리와는 정반대로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승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를 수 없는 목소리다. 그런 승연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도 못하고, 유리는 빈정대는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지만 그 속에 든 감정은 분명히 반가움이었다. 세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승연도 단박에 느낄 수 있을 만큼 선명했다.

“뭐야, 배달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던 사람이 갑자기 무슨?”

“정찰이라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긴 하고…….”

그렇게 말하던 남자가 이상할 정도로 소란스러웠던 안을 둘러보고 싶었던 건지, 후드를 벗으며 주변을 둘러보다 문득 승연과 시선을 마주쳤다. 하진 씨? 입만 뻐끔거리는 승연의 모습을 바라본 하진의 표정도 당황으로 물들었다가, 금방 눈을 돌려 사무실 안을 둘러보더니 급하게 상황 파악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윤도영이랑 강유리가 데려왔고. 리더는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상황인가? 강유리가 또 머리를 짚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그게 가장 유력했다. 하진은 이내 표정을 평소처럼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왜 손님 모셔놓고 세워두고 있어. 우리 쉘터 싸가지가 그것밖에 안 되나.”

“검증도 안 된 애 쉘터에 들여달라잖냐. 앉히는 것도 아까워.”

“그것만 문제인 건가? 검증 안 된 거.”

속이 빤히 보이는 문제였다. 승연은 어리고 잘생긴 사람이니 데려다 놨다간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갈까 봐 그게 아니꼬운 거지. 다만 자신도 자존심이 있으니 그렇게 대놓고 말하진 못하겠고,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밖으로 끌어내고 싶은데 마땅한 이유가 없으니 검증 핑계를 대는 것이다. 바보 같은 조건이다. 그렇게 말하면 이제 앞으로 누구도 여기에 편히 들이지 못할 텐데 굳이 사람 넷 있는 자리에서 검증 핑계를 대고 있고. 하진은 그것이 리더의 자승자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기에 다만 어깨를 으쓱이며 리더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얼굴 아는 사람이 들어온 셈이니 도와나 줄까. 하진의 시선을 받은 리더는 잠시 주춤하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렵 하진은 생각했다. 정말 약해 보이는 사람에게는 기세등등하면서 조금만 덩치 있는 사람이 노려보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놈에게 리더 자격을 주는 것도 조금 우스운 것 같다고. 나중에 고민할 일이다. 하진은 물기 묻은 제 머리카락을 가볍게 만지작거리다 무심히 입을 열었다.

“내가 지난번에 확인한 애야. 이제 문제없지?”

“뭐? 어, 언제 봤는데?”

“보름 좀 더 됐나. 그렇지 않습니까, 승연 씨?”

솔직히 말해 제 팀장이, 그러니까, 하진이 자신들을 돕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줄 알았던 도영은 침울한 표정을 감추려 고개를 떨구다 승연 씨, 라는 호명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경찰서 구석에서도 매번 케이를 울부짖었던 건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케이였지 강승연이라는 이름도 아니었고, 인터넷 매체와는 아주 거리가 먼 삶을 사는 데다가 후배직원이 좋아하는 스트리머에 관심을 가질 법한 사람도 아니었으므로 따로 그의 이름을 검색해 인상을 익히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사건이 터지기 전 하진의 성격으로는. 그렇다면 지금의 호명은, 정말로 그가 사건 이후 강승연을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있다는 증명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최근 조사 보고서에 혼자 다니는 사람을 봤다고 기록한 게 없으셨는데, 다 적는 게 아니셨나? 도영은 조금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눈을 굴렸다.

그건 유리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그가 오면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긴 했지만, 그가 실제로 승연을 만난 적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여기 들어오기 전에 들으신 게 있나? 그런 것치곤 쉘터 입구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은 비어있었는데. 모두가 혼란스러운 시선을 들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으나 승연만은 확신 어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 분명히 만났으니까. 그나저나 하진 씨가 불러주셨을 때는 안 온다고 했는데 대뜸 다른 사람 손에 붙들려 와버렸네, 나중에 여기 사람들 도움이라도 받아서 하진 씨가 어디 계실지 찾아보려고 했는데 바로 여기 계실 줄이야……. 어딘가 민망하고 또 한편으로는 불편하기도 해서-하진의 잘못이라기보단, 승연이 혼자 찔려 그런 것에 가까웠다- 승연은 곧 하진의 시선을 피하고 리더를 흘끔 바라보았다. 죄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하진은 그런 리더의 표정에도 굳이 자신의 표정을 일그러트리지 않았다.

“검증 제대로 한 거 맞아? 너희 친하니까 편들어주는 거 아니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믿으셔야지. 그런 거면 내가 저 사람 이름을 어떻게 알아.”

“프로게이머잖아! 쟤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세상에!”

“아니, 씨발……. 나더러 유행이라곤 하나도 모른다고 노인네라고 부르던 놈이 그렇게 말하는 게 더 우습지 않나…….”

내가 그렇게 유명한가? 그럴 타이밍은 아니지만 승연은 조금 어깨가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가도, 정작 눈앞에 있던 하진이 자신을 몰랐던 것을 떠올리며 겸손하게 어깨를 내렸다. 하진은 그런 승연을 흘끔 바라보다가도 곧 어렵지 않게 입을 열었다.

“저 애 들고 있는 무기가 내 창일 테니까, 진위 여부는 그걸로 확인해. 보고서 쓰러 간다.”

“아니, 어쩐지! 창 익숙했는데 팀장님이 깎으셨던 거 맞죠! 저게 왜 저 사람 손에 있나 했어, 나는!”

마침 쩌렁쩌렁 소리치는 유리를 보고 어깨를 으쓱인 하진이 손을 뻗어 승연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 사무실을 나섰다. 아니, 처음에 나 막 째려보셨던 게 사실 나를 본 게 아니라 창을 확인하셨던 거구나. 그나저나 나 이렇게까지 어린 애는 아닌데 막 머리도 쓰다듬으시고……. 그런데 팀장님? 여기서도 나눠진 팀 같은 게 있는 건가? 갑자기 밀려 들어온 정보가 너무 많아 승연이 도륵 눈을 굴릴 즈음, 리더의 입에서 결국 승연을 쉘터에 들여도 된다는 말이 나왔다. 빠져나갈 구멍을 하진이 죄다 막고 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도영과 유리는 여기에 더 있고 싶지 않다는 듯 승연을 이끌고 쉘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짐 정리부터 조금 하고 쉘터 내부 소개해줘도 될까요?”

“앗, 네. 짐 정리도 도울게요!”

유리는 모처럼 마음에 드는 신입이 들어왔다는 듯 승연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도영이나 리더의 말을 들으면 꽤 이름 있는 사람인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 이런 제안도 거절하지 않고 무엇보다 딱 봐도 어려 보이는데 분위기 파악까지 잘하는 모습이 꽤 마음에 들었다. 어렵거나 힘든 일이라고 무작정 빼지도 않는다는 부분까지도. 이거 잘만 하면 시끄러운 윤도영 대신 여기저기 끌고 다닐 수 있겠는데. 그런 사심 아닌 사심은 덤이다.

“좋아요, 같이 해요.”

“어으, 저 안이니까 말 안 했지 어깨 아파 죽겠어요 지금. 팀장님은 맨날 이거에 짐 꽉꽉 넣고 어떻게 다니신 거야?”

나오기가 무섭게 깐족거리는 도영을 흘끔 바라보던 유리는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분위기 풀어야 하는 상황도 아니고, 도영보다도 어려 보이는 사람이 아무 말 않고 잘 따라오고 있는데 저렇게 말하는 건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고나 할까. 그런 분위기에 승연은 조금 어리둥절하다는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도, 이내 이러나저러나 즐거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들을 따라 쉘터의 깊은 곳으로 본격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량이나 물품을 쌓아두는 창고는 아마 깊은 곳에 하나, 입구 근처에 하나가 있다는 설명을 도영이 재잘재잘 떠들었다. 깊은 곳에 두는 까닭은 쉘터의 물품을 도난당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입구 근처에 두는 이유는 혹시나 쉘터에 무슨 일이 생기면 물자를 쉽게 바깥으로 보내기 위해서라고. 따지자면 쓸모에 따라 장소를 구분하고 있는 셈이었다. 승연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창고 안쪽으로 들어서자 철제 선반이 빼곡하게 놓여 있는 풍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떤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몇 개가 있는지 빠르게 수량을 파악하기 위해 그리 놓아둔 모양이었다. 아이디어도 괜찮네. 승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중간 즈음에 있는 식품 보관 선반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따라가다가, 유리와 도영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짐을 꺼내는 동안 선반 위에 있는 물건들을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같은 통조림이어도 육류인지 아닌지, 조리해서 섭취하는 것을 권장하는 식품인지 아닌지에 따라 나누어 두는 모양이었다. 정리된 모양새를 빠르게 이해한 승연이 유리가 두 손에 식품을 가득 들고 일어서자마자 유리의 품에 있던 통조림을 빼앗아 그것들이 들어있어야 할 자리에 깔끔하게 놓으며 수량을 세기 시작했다. 발 빠른 승연의 모습에 유리가 작게 눈을 빛냈다. 써먹기 좋은 사람이네, 쓸모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특히 좀비 사태가 터진 지금 같은 상황, 한 자리에 오래 살아남아 버티기 위해 본인의 쓸모를 증명할 것을 종용받는 쉘터 같은 곳에서는.

그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도영과 유리가 물품을 꺼내면 승연이 발 빠르게 움직여 통조림이나 레토르트 식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물건을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물품을 전부 제 자리에 놓아두고 나서는, 그 앞에 놓여 있는 물품 수량 기록 일지에 어떤 물품이 얼마나 들어왔고 누가 언제 구해온 물건인지까지 깔끔하게 작성했다. 제 일에 집중하느라 승연을 유심히 보지 못했던 도영도 그즈음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게임을 할 때도 워낙에 지령을 잘 내리는 선수고, 상황 돌아가는 것도 가장 잘 파악하던 선수인지라 이런 곳에서도 잘할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으나 이것은 기대 이상이었다. 어디 다른 쉘터에 있다 온 것도 아니고 쉘터는 여기가 처음인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랬다.

“물건 어딨는지 파악 진짜 잘하네요. 여기 와본 적도 없을 텐데 대단해요.”

“오늘은 음식밖에 없었으니까 조금 찾기 쉬웠던 것 같아요, 온 김에 어디에 뭐가 있는지 파악하고 싶긴 한데……. 그럼 정리할 때 조금 더 편하긴 할 것 같아서요.”

“아, 그거 팀장님이 정리해 두셨을 거예요! 일단 승연 씨는 쉘터 안내부터 받으러 가요, 우리가 해드릴게요.”

승연은 아쉬운 눈길을 선반에서 떼지 못하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승연은 두 사람이 내내 부르던 호칭을 떠올리다 고개를 기울였다. 팀장님이라고 했지. 아까 안에서도 그랬고, 밖에서도 그렇게 부르고 계시고. 여기에도 그런 제도가 있는 게 맞는 건가? 팀장이라든가, 부팀장이라든가. 리더는 확실히 있었고. 오래 품고 있을 의문은 아니었다. 물어보면 그만이다. 승연은 도영과 유리를 바라보다 간단한 질문을 건넸다.

“그런데, 그. 하진 씨가 팀장님이신 거죠? 왜 팀장님이에요? 수색팀 팀장님이시라든가…….”

“그 전에. 두 사람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알려주면 알려줄게요.”

장난스러운 유리의 목소리에 도영이 한소리를 할 법도 한데, 도영 역시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승연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그게 내내 궁금했던 모양이다. 말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으니, 승연은 고민하지 않고 금방 말을 이었다. 실은 두 분을 만났던 그 마트에서 처음 만난 관계이며, 하진 씨가 위험한 상황에서 제 목숨을 구해주셨고, 집 근처까지 왔던 스토커도 확실히 처리해주셨고, 집까지 데려다주시기도 하셨고, 제가 무기가 없어서 창도 주셨고, 물건도 이것저것 보내주셨고……. 줄줄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던 두 사람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놀라울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승연을 바라보기도 하고, 물건을 보내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직후에는 두 사람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는 낯을 숨기지 못했다.

“아니, 그럼 수색 다녀와서 주운 물건을 그쪽에 준 건가? 어쩐지 보름 정도 전이랑 열흘 정도 전에 가져오신 물자가 평소보다 적었잖아, 난 그냥 그날따라 운이 좀 없으시구나 했지.”

“물건을 줬……. 라디오도 줬다고요? 진짜 살뜰히 챙겨줬다, 팀장님이……. 창도 본인이 사건 터지자마자 직접 깎으신 거거든요, 어디 가서 잃어버렸다더니 승연씨 준 게 진짜 충격이다.”

숙덕대던 유리와 도영은 이내 허리를 바로 세우고 승연의 낯을 바라보았다. 뭐가 그 사람을 움직이게 했을까. 이렇게 보면 그렇게 아끼시던-본인은 극구 아니라고 표현했으나 주변 사람들은 늘 그렇게 보았다- 동생들과 나이대가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눈을 여러 번 끔뻑이던 유리와 도영이 이내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렇게까지 다정한 사람은 아니에요, 라고 말해도 들을 분위기도 아니고, 승연은.

“아, 무슨 팀장님이냐고 물어봤죠? 좀비 사태 터지기 전에 같이 일했었어요. 저분이 제일 상사, 우리 둘은 부하직원. 저분이 제일 직급이 높으셔요.”

“겨, 경찰이셨구나…….”

잠깐이나마 조폭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스스로가 부끄러워 승연은 괜히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그간 여기서 지었던 표정들과는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승연을 바라보던 도영이 작게 웃었다.

“나랑 솔직히 얘기해봐요, 경찰일 인상은 아니죠! 조폭 같지 않아요? 얼굴에 흉터도…….”

“야, 마약사범 검거하다가 생긴 흉터로 놀리는 거 아니라고 내가 말했지.”

“저, 절대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이쪽은 절대로 있었던 것 같은데…….”

승연을 놀리듯 가벼운 어투로 말한 유리가 웃는 낯으로 창고 옆쪽에 있는 방을 가리켰다. 더 놀릴 생각은 없는 건지, 그 이후로 유리는 곳곳에 있는 방들은 각각 어떤 기능을 하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창고를 기준으로 바로 왼쪽에 있는 방은 무기를 모아두는 공간이며, 좀비가 소리에 민감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총 등의 무기는 최대한 사용하지 않고 있지만 예비용으로 몇 자루만 들여두었다는 것, 아무리 사태가 이렇게 됐다고 해도 좀비를 죽이는 데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기에 일단은 비살상용 무기도 구비하고 있으나 그만큼 내구도가 아주 낮고 도리어 좀비를 도발하는 꼴이 될 가능성이 크므로 사용을 권하지는 않는다는 점. 그런 것들을 세세히 설명하는 목소리를 듣던 승연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죽이는 것이 즐거운 사람이 있을 리는 없지만, 승연은 유독 더 그런 편이다. 비살상용 무기가 있다면 그것을 주로 활용하는 게 나으리라 생각했는데 세상일이 생각대로 이루어지긴 어려운 모양이었다.

바로 옆에는 숙소가 있었다. 숙소는 2인 1조로 사용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함께 사용하게 되어 있었으나 문제가 생긴 이후로 리더 보조 격으로 활동하고 있던 하진-이 즈음에서 승연은 하진이 이야기했던 그의 업무들을 떠올리며, 상당히 과로하시는 분인 데다 체계라곤 엉망이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이 임의로 배정한 방을 사용하고 있고 며칠 전 하진과 같은 방에 있던 사람이 감염으로 인하여 쉘터로 돌아오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아마 승연은 별도의 지시가 없는 한 하진과 같은 방을 쓰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이야기를 들은 승연이 느리게 눈을 굴렸다. 아마 나를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은데, 승연이 우물쭈물대며 입을 연다.

“아, 아마 다른 방을 쓰지 않을까 싶은데……. 제가 그분이 쉘터 오라고 말씀하시는 걸 거절했다가 여러분 덕분에 여기 오게 된 거거든요. 아마 저를 싫어하거나 불편해하진 않으……. 실까요?”

“그랬으면 사무실에서 승연 씨 안 도와줬을걸요……. 그분이 기본적으로는 심성이 착한 분이긴 한데 일 느는 건 힘들어하시는 분이시거든요. 사람 하나 새로 받는 게 관리하는 사람한테 얼마나 큰일인지를 걱정하시면 몰라, 싫어할 걸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러니 안심하라는 듯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유리의 모습에 승연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리더에게 하는 말투만 들어도 자신에게 말을 건네던 모습들처럼 아주 상냥하고 다정하기만 한 사람은 아닌 것 같기도 했는데. 물론 유리 또한 그가 심성이 착한 사람이라는 단서를 앞에 달긴 했으니 정말 자신에게 몇 없는 자비를 베푼 것일지도 모르긴 했다. 마음은 반만 내려놓고 있을까, 그럼……. 짧게 생각하던 승연은 곧 다시 이어지는 도영의 설명을 들었다. 쉘터의 중앙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여럿 놓여 있으며 대부분 저기서 대화를 나누거나 끼니를 때우는 등의 활동을 한다고 한다. 바로 오른쪽에는 큰 주방이 있는데, 바깥에 나가서 좀비를 처리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대부분 저기에서 통조림과 구해온 식재료들을 이용하여 먹기 좋은 음식들을 만들어 내며 하루 세 번 음식이 주어진다는 이야기까지 들은 승연이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통조림만으로 연명해야 하는 신세가 아니라면, 게다가 밥을 해주는 사람까지 따로 있다면 여기가 집보다는 훨씬 좋은 곳임이 자명했다. 오길 잘했다, 승연은 짧게 그런 생각을 했다.

도영의 설명은 쉘터 내 응급 병동, 통칭 의무실로 이어졌다. 쉘터에 입소할 때는 한 차례의 검증을 마친 후 입소하게 되며, 물린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는 대부분 자신의 의지로 쉘터를 떠나니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을 다룰 일은 거의 없지만 요즘 세상에 아프다 해서 그 이유가 전부 좀비 바이러스는 아니지 않겠는가. 도영도 정확히 그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쉘터에 구비된 의료기기의 특성상 정밀한 검진은 어려운 부분이 있어, 두통이나 감기 등 가벼운 증상을 위주로 진단하며 제약은 어려운 상황이니 상비약으로 처방을 해준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승연은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저 병동의 담당자는 어떤 사람이에요? 유리가 가볍게 대답했다. 이 일 터지기 전에는 의사였던 사람. 덕분에 살판나셨어, 본인들도 할 일이 있긴 있다고. 웃음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승연 역시 작게 웃었다. 그래도 개개인이 빛날 수 있는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하고는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든 덕이다.

당장 제약은 어려운 상황이지만, 최근 하진이 약국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외관이며 안쪽이 모두 멀쩡한 약국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승연은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발전기를 찾게 되면 그쪽에 먼저 전기를 안정적으로 보급해서 제대로 된 약을 만들자는 의견도 있고, 쉘터에 연결하여 쉘터 생활을 보다 원활하게 하자는 의견도 있는데 그 덕에 두 무리가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승연은 어깨를 으쓱인다. 뭐가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당장 약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닐 텐데 그게 무슨 소용이냐는 말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을 데려온다면 오히려 이쪽이 훨씬 효율적이지 않냐는 말도 다 그럴싸한 말이었다. 각자의 이해관계가 있기 마련이니까. 그런 싸움이 일어난 덕에, 하진이 자신의 손으로 약국을 부수고 올까 고민하는 것을 억지로 뜯어말렸다는 이야기를 웃으면서 하는 유리와 도영을 보면서는 마냥 좋은 표정을 지을 수 없었지만. 진짜일까? 하긴, 자기가 발견한 것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싸움이 나는 걸 원할 사람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잘못 짚은 것일 수도 있겠다만 일단은. 승연의 표정이 삽시간에 심각해지자, 승연의 눈치를 살피던 두 사람이 급하게 화제를 돌리려는 듯 샤워실과 화장실, 세탁실을 대강 설명해주곤 중앙의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자! 이쯤이면 안쪽은 대충 다 둘러봤네요. 더 자세한 건 직접 돌아다니면서 봐도 돼요. 아 참, 창고는 웬만해선 보지 말구요. 괜히 기웃거렸다가 물자 도둑 취급받으면 피곤해진다?”

“그래도 보고 싶어지면 어떡하죠?”

“음, 팀장님, 아니지. 이하진 씨에게 말해봐요, 그분이랑 같이 가면 의심 안 해.”

불편한데……. 좋은 사람인 것과는 별개로 역시 마음의 짐이 없을 수는 없다. 그냥 안 가야지, 그렇게 생각한 승연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인다. 이래저래 도움이 되고 싶어서 둘러보려고 했는데 가만히 있는 게 도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복귀하고 물건을 정리할 때 봐둬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하다가. 여러모로 정신없이 생각이 오갔다. 승연의 변화를 알아챌 리 없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곧 보급으로 넘어갔다. 보급은 하루에 한 번 이루어지고, 말이 보급이지 실은 그날그날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하거나 필요한 물건이 없는지, 다음 날 수색조에 참여할 수 있는지 등을 조사하기 위해 의례적으로 거치는 과정이라고 했다. 보급과 관련된 규칙이 있다면, 필요한 물품이 있다면 전날에 이유와 함께 물품을 이야기할 것. 또한, 요구하지 않은 보급품을 긴급하게 요구해야 할 상황이 있다면 그 또한 이유를 명확히 이야기할 것. 다른 사람들의 보급품을 뺏거나 훔치지 말 것, 보급 시간은 매일 21시를 기준으로 하며 그 시간 전에 쉘터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날 보급은 챙겨줄 수 없다는 것. 마지막으로, 보급이 끝나고 물품 정리를 마친 23시부터 다음 날 6시까지는 별도의 특이사항이 없는 한 쉘터의 문을 걸어 잠그고 개인 정비 시간을 가지므로 웬만하면 통행을 금할 것. 전부 상식선의 이야기였고, 특히 좀비 사태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였을 때 이상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규칙이었으므로 승연 또한 금방 수긍할 수 있었다.

마침 시간이 늦어졌다. 대치했던 시간이 길기도 했고, 쉘터의 규모가 제법 되다 보니 돌아다니며 설명만 해도 시간이 금방 지난 탓이다. 곧 보급이 시작된다는, 쉘터 인원의 안내를 들으며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지막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바로 보급 면담을 하자니 조금 피곤한데 쉬었다가 하면 안 되겠냐는 도영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반영해서였다. 어차피 보급도 하진이 담당할 텐데, 그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지만 아무튼 조금 불편하긴 한 하진을 바로 마주치기에는 부담스럽기도 했고.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승연의 부담감을 첫 보급 면담에서 나오는 긴장이라 오해한 유리와 도영이 소리가 빈 테이블에서 열심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사태 초반에 여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최근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소한 이야기지만 쉘터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이야기들이 한참 이어졌고, 승연은 그들의 말을 하나하나 경청했다. 잘 섞여들고 싶기야 했다, 어쨌든.

“그나저나 찾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제 식구인데, 특징 말해주면 찾아볼게요.”

“아니에요. 하진 씨를 찾아보고 싶었던 거라…….”

“아이, 뭐야. 가족이라도 찾는 줄 알았는데 그냥 은혜 갚는 강아지였구나.”

“강…… 네?”

대꾸도 않는 유리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도영을 바라보던 승연의 표정이 일순 어이가 없다는 듯 애매해졌지만, 승연은 금방 표정을 갈무리했다. 곧 자신의 차례가 오는 마당에 괜히 더 떠들고 있을 필요도 없고. 곧이어 하진이 승연의 앞에 섰다. 개인별로 정보를 정리한 파일이 따로 있는 모양이었는데, 하진은 파일철에 꽂혀 있는 서류들을 넘겨 빈 종이가 나오고 나서야 승연의 낯을 가볍게 훑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괜히 긴장됐다. 이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을 이렇게 본 걸까? 그러고 보니 경찰이라고 했는데, 이런 위압감으로 계속 쳐다보면 있는 죄는 다 털어놨을지도. 지금은 지은 잘못이 없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들자 하진의 표정이 보였다. 그러니까, 웃고 있네.

“좋습니다, 이제 봐 주시는군요.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 네.”

“아프거나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개인적으로 필요한 물건이 있다거나. 급하게 나오시면서 챙겨오지 못한 물건 등이 있으시다면, 그것도 말씀해주시면 내일 챙겨드리겠습니다.”

하진의 이야기에 승연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챙겨야 할 게 있으려나, 당장은 딱히 생각나는 게 없어 그저 고개를 저으니 하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승연에게 상비약 조금과 간단한 에너지 보충 식품을 건넨 채 창고로 걸음을 옮겼다. 아마 자신이 마지막 사람이었나보다. 별거 아니죠?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승연은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두 사람과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두 사람과 있을 때는 마음이 편안했다. 꼭 어디서 만나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기분 탓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편안하다면 그걸로 된 것이 아닐까. 승연은 생각한다.

보급을 마치면 개인 정비 시간을 가진다는 말대로, 바깥에 나갔다 왔던 사람들은 자신의 무기를 강화하거나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테이프를 칭칭 감는 등 전반적인 도구를 수리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는 사람들은 먼저 샤워실에 들어가 씻고 나와서는 남아 있는 물자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보급품을 확인하거나 다음 날 해야 하는 일을 정리했다. 아직은 낯선, 아마 다음 날부터는 자연스럽게 저들 중 하나로 섞여 들어갈 승연은 남들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다 잠시 시선을 돌렸다. 창고에 들어가 계속 머물러 있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리더의 개인 사무실 바로 옆 방에서 나오는 하진을 바라본 승연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저기서 나오지? 마침 오늘 나갔다 왔던 유리도 하진의 옆에서 삽 손잡이와 기둥 부분에 절연 테이프를 칭칭 감다가, 승연이 고개를 기울이자 그의 시선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유리와 도영, 그리고 승연이 있는 곳에 하진 역시 잠시 시선을 둔다. 도영이 밝은 웃음을 지으며 하진이 있는 방향으로 손을 흔들자 하진은 언제 봤냐는 듯 슥 시선을 돌렸다.

“팀장님은 늘 저기에서 보고서를 정리하시거든요. 다 정리하시고 나오셨나 봐요.”

“저긴 팀장님…… 그러니까, 하진 씨 개인 사무실이신 거예요?”

“준 적도 없는데 알아서 차지하던데 뭐. 회의실로도 쓰니까 봐주긴 하겠는데…….”

너무 기어올라. 뒷말을 덧붙이며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리던 리더가 자연스럽게 무리에 섞여 승연의 옆에 앉았다. 왜 여기 앉지? 나 별로 마음에 안 들어하는 거 아니었나?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옆 사람을 흘끔 바라보던 승연이 아무래도 괜찮다는 듯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뭐, 이러나 저러나 잘 쓰고 있다면 그만이지 않을까요……. 승연이 작게 중얼거릴 즈음, 시선을 돌렸던 하진이 당연하다는 듯 내려와 중앙 테이블석 구석 자리에 앉았다. 승연과 유리, 도영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그 탓에 유리가 괜히 리더가 있는 방향을 째려보았다. 아니, 저기 우리 팀장님 자린데 어디서 대가리만 큰 개새끼가 자리를 차지해가지고. 오늘도 보고 드릴 거 있는데. 입으로만 욕을 중얼대던 유리는 문득 시선을 돌려 도영을 바라보았다. 아예 리더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모습을 보며 빠르게 자신의 표정을 갈무리 한 유리가 도영의 안경을 벗긴다. 그 탓에 날카로운 시선도 일순 거둔 도영이 당황스럽다는 듯 유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잘들 노네, 중얼거리는 리더의 목소리에 승연도 결국 조금은 웃어버린다. 도와주려고 하셨구나, 도영 씨도 저런 표정을 다 지으시네.

만담에 잠시 정신이 흐려졌으나, 승연은 곧바로 다시 시선을 하진에게로 돌렸다. 보고서는 분명히 다 쓰고 내려왔다고 했는데 그는 자리에 앉아서는 검은 가죽으로 된 수첩을 펼쳐 다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보고서 외에 쓸 만한 내용이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하진의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것이 그의 버릇인 것 같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이었으면 유리와 도영이 제일 먼저 이야기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일종의 믿음 혹은 불신에서 비롯된 판단이었다. 유리는 몰라도 도영은 입이 제법 가벼운 것 같고, 유리는 사람을, 특히 자신이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판단하는 사람인 하진의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사람인 것 같았으니까. 말마따나 도영과 유리는 하진을 흘끔 바라보다가도 다시 저들끼리 정신없이 몸싸움을 빙자한 몸개그를 하고 있었다.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일이라는 증명이었다. 승연에게는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행동이긴 했다만은.

승연은 한참 멀리서 개인 수첩에 무언가를 빼곡하게 적는 하진을 오래 바라보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리더를 향해 가벼운 질문을 건넸다. 상대가 제대로 된 답을 줄 것이라 기대하거나 하진과 친하다면 친해 보이므로 제 궁금증을 해소해줄 것이라는 기대에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 다만 리더라면 적대시하는 것보다는 친하게 지내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을뿐더러, 자신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 같지는 않았으니까. 잘생긴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 같긴 했지만, 아니, 여자가 아니면 다 싫어하는 건가? 어쨌든 그 논리라면 하진을 자신보다는 다섯 배는 싫어할 테니 자신은 어영부영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판단이 있기야 했겠지만.

“뭘 저렇게 쓰시는 거예요?”

“낸들 아나. 지 공상이겠지.”

제대로 된 대답은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긴 했지만, 역시 재미없는 사람이다, 남 비방하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고. 어쨌건 가까이 둬봐야 이래저래 피곤할 일만 있는 사람일 것 같아 승연은 가볍게 내쉴 뻔한 한숨을 삼키고 고개를 돌렸다. 곧 이곳저곳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다가와, 승연은 그 일도 오래 마음에 담아두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보고 싶었다는 이야기나, 네 걱정을 가장 많이 했다는 이야기. 자신에게 으레 다가오던 다정을 이제는 어느 정도 경계할 수밖에 없게 된 자신의 처지를 다시금 되새긴 승연은 언제나 그랬듯 자신 넘치는, 그러므로 보는 이들을 안심시키던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다른 사람들을 곧잘 달래주었다. 그러다가도 배정받은 방 안으로 들어서면, 2층 침대의 아래에 놓인 침대에 들어가 정신없이 오가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몸을 옆으로 눕힌 채 눈을 꽉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걸음이 제 침대 앞에서 한참을 멎더니, 어설픈 손길이 제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는 것을 느끼며 승연은 몸을 돌렸다. 하진이 시야에 가득 찬다. 내가 싫거나 불편하지는 않을까. 염려 섞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승연의 손등을 토닥였다.

“미안, 깨웠어? 쉬어요.”

“아, 안 자고 있었어서 괜찮아요. 하진 씨도 얼른 쉬세요…….”

쉴게. 덧붙이는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갈 만큼 가벼워서, 승연은 무심코 하진이 제 손등을 두드리던 손을 꼭 붙들었다. 떠나지 않았으면 했다. 그가 아주 특별해서가 아니라, 바쁘게 일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이 자신에게 다정하게 행동해주는 것이 나쁘지 않아서.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건네주는 다정이 필요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하진의 버석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마음 어딘가가 간지러운 기분에 승연은 눈을 내리감았다. 옆에 있을게.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밤에 좋은 꿈을 꾼 것이.

불편하다면 불편한 상대와 매일 밤 같은 곳에서 잠들고, 깨어나며.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이곳의 생활은 그렇게까지 지루하거나 힘들지 않았고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가는 일상 속에서도 승연은 종종 하진의 모습을 관찰했다. 같은 방을 쓰고 있는 마당에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 시작한 관찰이었는데 날이 지날수록 관찰하는 것 자체가 버릇이 되었다. 승연이 보건대, 그 사람은 언제나 수첩과 펜을 들고 다녔다. 이런 세상에서 기록할 만한 것이 뭐가 그렇게 많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매일 저녁 한 사람 몫의 보급을 나누고 개인 정비 시간을 가질 때 하진은 매일같이 수첩을 펼치고 무언가를 빼곡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보고서에 적지 못할 개인적인 내용을 적는 건가 싶었고, 함께 순찰을 나갔을 때도 무언가를 기록하는 것을 보아하니 그런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리더는 꾸준히 그가 수첩에 적어 내려가는 내용이 철모르는 낭만의 한 조각이 아니겠냐며 그의 행동을 비웃곤 했고, 쉘터에 있는 대부분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모양이지만 승연은 어쩐지 그가 적어 내려가는 세계가 궁금했다. 그 속에 낭만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을 것이라는 무언의 확신이 들었다.

또 승연에게는 나름의 수확이 있었는데, 하진이 의외로 자신을 많이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과 도움을 요청하거나 부탁을 하면 잘 들어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예컨대 보고서 쓰는 일은 아무에게도 맡기지 않으려 하는 편이라-보급 후 개인 정비 시간에 작성하는 보고서이니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간 실례일 수 있고 그런 방향으로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다는 의도라고 승연에게 따로 설명해주기까지 했다- 승연에게도 맡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쉘터에 이제 막 들어왔고 리더도 자신을 탐탁지 않다고 생각하는 마당에 돕는 일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런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의도를 담아 설득하니 오래 고민하지도 않고 중재안을 손에 쥐여주었다. 여기서 쓰던 방식이 있는 데다 대부분 순찰을 나갔다 온 후 작성하는 방식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이 쓰는 것은 무리일 것 같고, 자신이 초안을 간단히 가져오면 살을 붙여주고 다듬는 것을 도와줄 수 있겠냐는 의견이었다. 듣고 보면, 자신의 체력을 손톱만큼도 믿을 수 없는 승연의 입장에서는 그러는 편이 오히려 더 나은 것 같아 승연은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서 작성을 함께 하겠다는 이야기도 반드시 리더에게 전하겠다고, 고맙다고. 그렇게 인사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승연은 어쩐지 마음 한쪽이 간지럽다는 생각을 했다. 하진은 승연에게 유독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삭막하기만 한 세상에서 그러한 다정은 제법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그렇게 말하며, 보고서를 쓰다 말고 지금껏 썼던 보고서를 보여주겠다며 서류 뭉치를 들고 올 때도 그랬다. 저 많은 걸 어느 세월에 다 보나, 보긴 보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하진은 최근 일주일의 보고 기록과 그간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따로 기록해 두었다는 보고 기록 요약본을 승연의 바로 앞에 두며 순찰, 혹은 탐색을 다녀온 후 반드시 적어야 할 내용과 반드시 적을 필요는 없지만 적으면 좋은 것들을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제가 일하는 시간이라 바쁠 텐데도 후임을 자처하는 사람에게 깔끔한 인수인계와 서류 정리 방법을 교육해 준 셈이었다. 쓰시는 동안 이거 읽고 있을게요, 그렇게 말하는 승연의 목소리가 든든하다고 생각한 건지 하진은 웃으며 승연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고 다시 보고서에 매진했었다. 그날의 보고서는 결국 하진이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쓰긴 했지만, 그날 이후로 하진과 승연은 매일같이 회의실로 사용되는 방에서 머리를 맞대고 보고서를 쓰곤 했다. 딱히 의외랄 것도 없지만 꼼꼼하게 적힌 초안과, 역시 전혀 의외가 아니었던, 살을 붙여 보강된 보고서의 내용을 보며 서로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일상의 한 조각으로 자리 잡았다.

이건 이만큼 가까워지기 전에 알게 된 사실인데, 여기서 다시 만난 날, 그가 말한 배달이라는 것도 실은 승연의 집에 다녀왔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라고 했다. 사실 하진은 승연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걸려 할까 봐 웬만하면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는데, 쉘터에 들어온 다음 날 하진의 순찰길을 승연이 따라가는 바람에 알게 되었다. 하진이 주었던 보호장비를 착용한 승연을 포함하여 네 사람이 함께 출발한 순찰길, 무난하게 물자를 구해오고 쉘터로 돌아가던 중 들를 데가 있어 혼자 따로 가겠다는 하진의 이야기에, 모든 사람이 위험한 데 잘 다녀오고 물건이나 많이 털어오라는 말로 그를 보내주었으나 승연만은 그러지 못한 것이다. 애당초 두 사람 이상이 함께 다니는 것이 원칙이니 절대 다른 사람과 떨어지지 말라고 했던 사람이 하진인데 그런 하진이 이탈하는 것이 다들 익숙했던 모양이었지만 승연은 이런 상황에서 혼자 다녀봐야 좋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당시 승연은 하진이 조금 어려웠으나 그럼에도 잃고 싶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서. 남은 두 사람이 그럼 따라가도 상관없을 테지만 승연이 무리하지 않게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하진에게 건넸다. 그 덕에 함께 가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어, 하진은 결국 이마를 짚고 한숨을 가볍게 내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즈음 승연은 ‘유리 씨의 이마 짚는 버릇도 실은 하진 씨를 닮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지만, 승연의 보폭에 맞춰 걸음을 걷기 시작한 하진의 걸음을 따라가는 것이 우선임을 알았으니 금방 그의 곁을 따르기 위해 열심히 발을 움직였으므로 생각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하진이 향하는 곳은 익숙한 길이었다. 처음 이 길을 함께 걸었을 때보다 하진은 조금 더 긴장한 낯이었는데, 그게 역시 자신을 조금 불편해해서인지, 혹은 그 사이 좀비가 늘었을 것을 대비하고 있어서인지 알기 어렵다고 승연은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다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익숙한 길로 가다 자신이 쉘터에 오기 전 머물렀던 자신의 집 앞에서 멈춘 승연이 주춤, 한 걸음을 뒤로 뗐다. 굳이 우리 집에는 왜 온 거지? 의아함과 경계가 섞인 승연의 시선에 하진은 마른 세수를 하다 입을 열었다.

“배달 얘기……. 당신 집에 물자 두고 왔단 소리였습니다.”

“네, 네? 왜요?”

“라디오 주려고 오가면서 보니 아파트 복도에 좀비도 좀 있더라고. 겸사겸사 그것도 죽이려고 했고, 식량 떨어질 때 됐겠지 싶어서……. 걱정돼서 그랬는데. 쉘터에 왔으니 회수해야지 싶어서 온 겁니다, 오늘은. 당신도 나오면서 짐 못 챙겨온 거 있으면 챙기면 되겠네요.”

이상한 거 아닙니다, 정말로……. 기운 없이 덧붙이는 목소리에 드문 진심이 섞여 들림을 눈치챈 승연은 곧 힘 빠진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내가 스토커 때문에 이만저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눈앞에서 본 사람이었으니 혹시 자신을 스토커로 오인할까 싶어 혼자 오려고 했던 것이고, 더 긴장한 것이다. 내가, 당신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나 봐.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많이 풀어져 승연은 하진의 손을 잡아 이끌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저 여기 다 올라갈 생각 하니까 벌써부터 다리 아파서 쓰러질 것 같아요. 우리 오늘 많이 걸었구……. 여기 계단도 너무 높구…….”

반쯤은 농담이라고 한 말인데, 하진은 그 말에 못 이기겠다는 듯 웃어 보이다 자리에 멈춰 섰다. 왜 멈추지? 쉬었다 가자고 하려나? 승연이 하진의 앞에 서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자 하진이 장난스러운 웃음소리를 흘리며 가볍게 물었다.

“안아서 들고 가드릴까요. 그러면 하나도 안 무거우실 텐데.”

“너무 좋죠~… ……하진 씨는 진짜로 하실 것 같긴 한데…….”

“진짜 하려고 물은 겁니다.”

그렇게 말한 하진이 아무렇지 않게 승연을 안아 들었다. 키가 180cm도 넘는 사람이 남의 품에 이렇게 안겨 있을 일이 몇 번이나 있었겠는가. 승연은 적잖이 당황한 표정으로 하진을 바라보며 큰 눈을 여러 번 끔뻑였지만, 바라던 일이 아니었냐는 듯 어깨를 으쓱인 하진이 아무렇지 않게 계단을 걸어 오르기 시작했다. 좀비라도 나타나면요? 지난번에 다 죽였다니까. 아니, 아니, 안 힘드세요? 운동하는 거지…….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싹싹 비는 승연과, 그런 승연의 말은 조금도 들을 의지가 없는 하진의 대화가 몇 번 오갔지만 결국 승연이 졌다. 어쩔 수 없지. 승연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하진의 목에 팔을 두르며 그의 품에 고개를 조금 기댔다. 염치없다는 거 모르지는 않는데, 나 정말 조금 힘들긴 하니까. 이렇게라도 조금만 쉬어야겠다.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면서. 하진의 낯에 작은 웃음이 번진 것도, 하진의 팔에 긴장감이 실린 것도 그즈음이었다.

곧이어 승연이 살던 집 앞에 도착한 하진이 승연이 도어락을 누를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 주었다. 한쪽 팔은 여전히 하진의 목에 두른 채 다른 팔을 뻗은 승연이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려다가, 문득 하진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인다. 그러니까…….

“그러고 보니 요새 전기가 왔다갔다 해서, 다음에는 아예 열쇠로 잠그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집 열쇠 어디 있는지 압니까? 도어락 쓰면 잘 잊어버리지 않나.”

“안에 있지 않을까요? ……찾는 거 도와주시면 안 돼요?”

제법 뻔뻔한 말이었지만 하진은 거절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아니, 이 사람은 거절을 할 줄 모르는 건가……. 사납게 생겨서는 영 맹탕인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승연은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처음으로 프로에 데뷔하고, 가장 큰 대회에서 처음으로 입상했던 날. 부정할 여지 없이, 제 삶에서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순간을 회고하는 승연의 표정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때로 돌아가기 영 요원해 보였으니까. 하진은 별말 없이 문을 열어 당기는 승연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쪽까지 들어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승연과 함께 지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이 자주 벌어진다는 생각을 하면서.

집 안에 들어선 승연은 먼저 일전에 하진이 챙겨준 라디오를 챙겨 들었다. 쉘터 내에도 라디오가 곳곳에 놓여 있는 것을 확인하긴 했지만, 지난 밤에 보니 방에 놓여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는 것이 가장 큰 까닭이었다. 잠을 많이 자는 편도 아니었고 라디오 치직대는 소리에 잠에서 깰 만큼 귀가 밝은 것도 아니었건만 어쩐지, 그냥. 가장 편한 공간에서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해서. 하진 역시 묵묵히 승연을 바라보다 별 말 없이 주방의 선반 위에 레토르트 식품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도리어 이것이야말로 승연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왜 여기에 굳이? 이제 나갈 건데. 의아하다는 듯 하진을 바라보자, 하진은 별 말 없이 가스 버너와 부탄가스까지 주방 아래 서랍장에 넣어 놓으며 승연을 흘끔 바라보았다.

“돌아오고 싶어질 수도 있어. 리더 꼴 봤죠.”

“……아,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아하하, 빈 말이라도 그럴 일 없을 거라고 해야 할 텐데…….”

말마따나 리더는 승연을 일견 거슬려 하는 면이 있었고 어쩌면 하진 역시 그런 대상이었다. 낙오자가 될 지도 모르는 사람들끼리의 배려임을 감안하고 바라보면 그의 행동은 어딘가 산뜻한 곳이 있어 승연은 결국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지. 자신은 분명히 돌아올 수 곳이 있는 사람인데. 하진 역시 그럴까. 하진이 살던 집은 어떤 곳이었을까. 승연은 문득 그런 것이 궁금해졌다. 리더와의 부딪힘이 잦고 대부분의 업무를 자신이 처리하는 하진에게도 쉬고 싶은 순간이나 스스로를 무리에서 낙오시키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당신에게도 쉴 만한 곳이 있을까. 고민하던 승연은 자주 보던 책 한 권과 좋아하는 옷가지들을 가방에 욱여넣으며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진 씨 집은 어디였어요? 남아 있나?”

“쉘터에서 여기 걸어온 거리에서 딱 세 배 만큼 더 걸어가면 있습니다. 사태 터지고 나서는 초반에 옷 챙길 때 말고는 가본 적이 없는데, 남아 있었으면 좋겠군요.”

남아 있을 겁니다. 어쩐지 확신 어린 목소리에 승연은 조금 신기하다는 듯 하진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언가에 확신을 갖는 일이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그 목소리에서는 어딘가 애착이 느껴졌다. 집을 좋아하시나? 그가 남과 어울리는 데에 능숙한 사람이어서일까, 딱히 집에 박혀 있을 만한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자가인가? 그럼 좀 좋아할 수도 있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승연이 마저 짐을 챙겼다. 꽉 찬 가방을 등에 매고 일어나니 무게가 영 버겁긴 했지만 그래도 들 만은 했다. 하진의 시선을 보아하니 중간에 하진에게 뺏길 것 같기야 했지만. 아니, 그런데. 열쇠 어디에 뒀지? 그제야 생각난 건지 집 서랍을 뒤지기 시작한 승연이 저를 따라 집안 구석을 살피던 하진을 흘끔 바라보며 말했다.

“나중에 여유 나면 하진 씨 집에도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네?”

“아니, 뭐어……. 물론 제가 들어와도 된다고 말씀 드린거긴 하지만, 저만 보고 하진 씨 집은 안 보여주는 건 조금 비겁한 것 같다고 할까……. 농담이에요.”

그의 표정에 실린 감정이 당최 무엇인지 읽어내기가 어려워 승연은 뒷말을 빠르게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대강 보면 아주 싫어하는 표정은 아닌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 아주 내켜하는 표정도 아닌 것 같고. 어쨌든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물어봤다면 이것보다도 더 나쁜 반응이 돌아왔을 것이라는 확신만은 얻을 수 있는 표정이었기 때문에 승연은 다시 서랍 구석에 머리를 박고 열심히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승연이 건넨 질문 뒤로 영 찾는 둥 마는 둥 느긋하게 손을 움직이던 하진이 문득 몸을 들어 승연의 머리맡에 섰다. 나 진짜 크게 실수했나. 그렇게까지 나쁜 말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할 즈음 하진이 승연의 높이만큼 몸을 숙이더니,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을 승연에게 내밀었다.

“맞나 보십시오. 열쇠.”

“어? 어! 이거 맞아요. 어떻게 찾으셨어요? 경찰이라 잘 찾으시나…….”

“마침 그 말 하려고 했는데. 경찰이라 보면 다 안다고.”

던진 농담을 그대로 농담으로 받아치며 웃는 하진의 모습을 바라보며, 승연은 역시 이 사람을 그렇게까지 무서워할 필요는 없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재미 없는 농담에도 쉽게 웃어주는 모습을 보며 승연은 조심히 몸을 일으킨다.

“아까 말했던 것 말입니다, 집 보고 싶다고 한 거. 승연 씨 체력에 걸어가기는 좀 머니까 다음에 차 타고 같이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어, 진짜 그래도 돼요?”

엔진 소리에 좀비의 시선이 끌릴 것을 감안하면 금방 가능케 될 일은 아닐 테다. 아마 이번 말로 인해 하진은 또 스스로 좀비가 가득한 소굴로 몸을 던질 지도 모르는 일이다. 고작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만, 승연은 이전보다 조금 더 호의적인 태도로 다가오는 하진의 말에 저도 모르게 들뜬 목소리를 내었다. 하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승연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는다. 부끄럽다는 듯 잠시 허공을 훑던 시선이 하진의 낯을 똑바로 바라보다 이내 웃는다. 하진 또한 그 시선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그럴 까닭은 어디에도 없다는 듯이. 그게 기분을 조금 더 이상하게 만들어, 승연은 슬쩍 시선을 내리깔다 헛기침을 하며 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 그럼 챙길 것도 다 챙겼으니 가요! 도어락도 못 쓰게 바꿔놨으니까 문으로 잠그고 나가면 될 것 같아요, 하진 씨도 나오세요.”

“그러지요.”

승연의 보채는 목소리에도 하진은 굳이 다시 한번 승연의 집 안을 훑고 나왔다. 승연이 내내 보고 있었으니 이상한 일을 할 틈은 없었을뿐더러 딱히 이상한 행동을 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상한 풍경이긴 해서, 승연이 염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안에 볼 거 있어요?”

“아뇨, 뭐……. 지난번에 그게 맘에 걸려서 조금 더 둘러보다 나왔습니다. 왜, 그 이상한 사람 짐에 메모리 카드가 있었잖습니까. 혹시 집 안에 설치된 게 있나 하고 봤는데 눈에 띄는 건 없었습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잊어가던 사건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자 승연은 삽시간에 기운 빠진 표정을 지었다. 내 집이라고 마냥 안전한 공간은 아니었지. 그렇게 중얼거린 승연이 바깥으로 나오는 하진을 바라보더니, 이내 내친김에 여기도 보자며 바깥을 둘러보기 시작하는 모습까지 지켜보고는 별 말 없이 문을 잠갔다. 곧이어 현관문 근처 화분에 묻혀 있던 소형 카메라 하나를 찾아내는 하진의 모습을 보면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경찰은 원래 그런 것도 잘 봐요?”

“대부분 여기 숨기니까……. 범죄자들 머릿속이 거기서 거기지.”

그런 대화를 나누고 굳이 하진이 보는 앞에서 화분 아래에 열쇠를 숨기곤 돌아갔던 날. 승연은 가끔 그날을 떠올린다. 쉘터에서 가장 경계했던 사람이, 정확히는 내심 불편해했던 사람이 하진이었는데 그가 그렇게까지 무섭고 무거운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은 쉘터에 대한 마음의 장벽을 낮췄다. 물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리더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은 다시 그만큼 벽이 쌓이긴 했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친구는 제법 생겨 그마저도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개중에서 가장 친해진 사람은 당연하게도 도영과 유리였다. 하진과도 자주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으나 잘 때를 제외하면 좀처럼 얼굴을 보이지 않았고, 대부분은 말이 좋아서 거의 부리더지 실은 쉘터의 모든 일을 총괄하고 있는 하진이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그게 더 문제라며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으며 그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실은 유리와 도영 정도밖에 없었으니 그 두 사람과만 가까워진 건 어쩌면 아주 당연한 일이다.

두 사람이 말하건대, 하진이 처음부터 그 많은 일을 도맡아 한 것은 아니지만 원래도 자주 무리하던 사람인지라 그 모든 일을 떠맡게 된 것이 아주 이상하지는 않다고 했다. 경찰일 때도 한 팀을 통솔하면서 특수한 사건이 터지면 팀원으로 튀어나가기 일쑤였는데, 처음 좀비 바이러스 사태가 한국에서 발발한 시점에도 특수사건처리팀 팀원으로 출동하는 바람에 퇴근 시간도 유리와 도영의 퇴근 시간과 달라져 사태 초반에는 이대로 다시는 못 보게 될 줄 알았다고 했다. 하진과 두 사람이 만난 건 두 사람이 경찰서로 돌아가 챙길 수 있는 무기와 짐을 죄다 챙겨 거점을 찾기 위해 사방팔방을 돌아다닌 지 사흘 만이었는데, 괜찮은 거점처럼 보이는 곳은 좀비가 산개해있어 거점으로 잡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며 그러다 정말 괜찮아 보이는 곳을 하나 찾았는데 이미 누군가가 거점으로 삼아 바리케이트를 세우고 외부인은 오지 말라며 깡통을 던지는 바람에-승연은 이쯤에서 아마 그 마트겠군, 생각했다- 들어가보지도 못해 지쳐 탈진할 즈음 어떤 미친 사람이 차 클락션을 있는 대로 울리며 좀비 무리를 이끄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두 사람의 주변으로 오던 좀비들도 그 소리에 이끌려 차에 우르르 붙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자 조수석의 창문을 내려 그쪽으로 좀비를 죄다 유인하고는 운전석의 문을 열고 좀비들을 따돌려 뛰기 시작했다고. 그게 하진이었단다.

이야기가 좀 새지 않았나? 일 많이 하던 사람이라는 얘길 하다가 웬 영웅담을. 승연은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꽤 재미있던 이야기였던지라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러던 하진이 유리와 도영을 발견하고, 지금의 쉘터로 자신들을 이끈 것이 이 쉘터에서 자리를 잡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아, 빌드업이었구나……. 중얼거리던 승연이 이어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특수사건처리팀도 몇몇 간부 외에는 죄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살아남은 간부들도 뿔뿔이 흩어졌다는 말과 함께, 부상을 입긴 했지만 그래도 목숨은 붙어 있었던 서장을 이끈 덕에 체계를 잡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서장의 아들을 구출해온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는 말에 승연 역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의 리더는 리더로는 부족한 사람이 맞긴 하니까. 어쨌든, 처음에는 경찰서에서 그렇게 하듯 부서를 나누어서 관리했고, 서장이 살아있을 때는 그 모든 일이 나름 체계적으로 돌아가는 편이었으나 서장이 죽고 난 이후 서장의 아들이 리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그나마 사회에서 간부 경험을 한 하진이 리더가 채 하지 못 하는 일을 돕다가 지금의 꼴이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가 끝날 즈음 승연은 막 들어온 하진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짬처리 당한 거네요…….”

“그런 셈이지……. 지금은 괜찮아 보이시는데 과로로 쓰러지실까 걱정이네, 저러다가.”

“내 얘기하냐.”

그게 다 들린 건지, 성큼성큼 다가오는 하진을 바라보던 승연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하진에게 고갯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있었네. 작게 중얼거린 하진이 승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 보고 오셨으면서.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그저 웃음으로 화답하는 모습에 승연도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웃어버린다.

“하진 씨 옛날얘기 듣고 있었어요. 사건 터진 직후 즈음 얘기요.”

“제일 슬픈 얘기 들으셨네.”

“슬픈……. 어디가 슬퍼요?”

“머저리 둘 구하느라 스포츠카 한 대 날린 거. 새 차였는데.”

스포츠카 특유의 소음은 좀비의 이목을 너무도 쉽게 끌었다. 차를 끌고 다니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우니 스포츠카는 그날 그 순간 그렇게 날려 먹지 않았어도 분명 탈 수 없었을 것이 자명한데도 하진은 그런 이야기를 하며 모처럼 미소 짓고 있었다. 웃으니 됐나.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입이 댓발 나온 도영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승연도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어렵겠다, 같은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전 몰라도 강 경위님이 머저리는 아니죠…….”

“아, 그 부분…….”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승연은 자신에게 몰리는 시선에 눈만 몇 번 끔뻑이다가, 곧 크게 터진 유리의 웃음소리와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돌리는 하진의 모습에 몇 배는 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왜 저렇게들 웃으실까요? 몰라, 나 뭐 잘못했나? 승연과 도영의 대화가 오가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웃음을 멎지 않았다. 사태가 이렇게 된 후로는 정말 모처럼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웃음소리가 멎을 즈음, 네 사람은 대화를 마무리하고는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유리는 또래 여자와 같은 방을 쓰고 도영은 열 살 정도 어린 사람과 같은 방을 쓴다고 했다. 유리는 나름 잘 맞는 것 같은데, 도영은 늘 자신의 방에 가는 것을 꺼리는 모습을 보였으나…… 실은 그 부분만은 승연도 하진도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두 사람은 그저 같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같이 방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늘 승연이 들어온 방에 늦게나마 하진이 들어오는 식이었는데. 의식하니 괜히 새로운 느낌이라, 승연은 흘끔 하진을 올려보았다. 왜 그러냐는 듯 승연을 바라보던 하진이 무언가 깨달은 듯 먼저 입을 연다.

“그러고 보니 같이 들어가는 건 처음이네요.”

“아, 그쵸! 저 그 생각 하고 있었거든요.”

“워낙 바빠서 정말 잘 때만 오니까. 제가 못 챙겨드렸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그건 아니었다. 하진이 바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쉘터에 없다고 봐도 무방할뿐더러, 하진은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늘 승연을 신경 써서 챙겨주었다. 그럼에도 사람 마음이 그런 말을 들으면 정말 그랬나 싶은 법인지라, 승연은 가만히 하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못 챙겨준 건 아닌데, 본인이 그런 부채감을 가지고 있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해야 하려나. 고민하던 승연은 손을 뻗어 하진의 손을 붙잡았다. 움찔, 하진의 손이 떨렸지만 그도 구태여 그 손을 놓지는 않았다.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같이 들어가는 날이 많이 생기면 좋겠어요.”

“……제가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그 말투는 정말 의외라는 듯한 감정이 그득 어려 있어서, 알게 모르게 불편해하고 있었던 것을 하진 역시 알고 있었구나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승연은 몇 번 고개를 젓고 하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왜 그렇게 생각했냐는 듯이 천진한 표정이라도 지었을 텐데, 이상하게 하진 앞에서는 딱히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숨기는 법을 모르는 것처럼 구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 또한 진솔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냥, 불편했던 건 아니고……. 같이 가자고 말씀하셨을 때 함께 오지 않았는데, 이후에 합류한 게 조금 눈치도 보이고 죄송해서요.”

승연의 솔직한 대답에 하진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굴리다가도, 어느 정도는 알겠다는 듯 뒤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이해했다는 것보다는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보겠다는 몸짓에 가까웠으나 승연은 그저 그가 자신의 감정이 어떤 맥락에서 시작된 감정인지 이해했다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그저 맑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마주잡은 손에 힘이 실린다. 하진은 그런 것으로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건넬 수 있을 정도로 상냥한 표현에 익숙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이 하진 나름의 위로이며 이해라는 사실을 승연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승연은 그저 웃어버린다.

“……그런 것으로는 불편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게, 음. 당장 만난 사람 따라오기도 어려운 일이고, 생각 정리하실 시간도 필요하셨을 테고…….”

주절주절 말을 이으려던 하진이 잠시 말을 않더니 승연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승연은 큰 눈을 두어 번 끔뻑이며 하진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하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저 그가 그렇게 말해줄 줄은 몰랐기 때문에……. 승연은 조용히 하진의 손을 붙든 손에 힘을 실었다. 마침 방에 다다라 문을 연 하진이 승연의 손을 깍지 껴 붙들었다 놓았다. 승연은 한참이나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그렇게 잠깐 숨을 고르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밤이 길 것만 같았다,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 이후로는 정말로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당장은 그렇게 느껴졌다. 보급이 끝나도 쉘터를 여기저기 둘러보던 하진은 이제 보급이 종료되기가 무섭게 승연의 곁으로 다가와 앉는 버릇을 들였고, 그러니 별다른 일이 없는 이상 하진과 승연은 늘 함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솔직히 말하건대 이런 연은 이어본 적이 거의 없었고 더군다나 좀비 사태가 터진 이후로는 원래 알던 사람 외에는 곁에 사람을 두지 않는 버릇을 들였으므로, 실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간 이후로는 먼저 말을 꺼내는 법도 없던 하진이 문득 이야기한 날 이후로는 눈을 감기 전 오늘 있었던 일을 상대에게 말해주자는 규칙 아닌 규칙까지 생겼으니 더더욱 그랬다. 승연이 보았던 것처럼 하진은 정말로 성실한 사람이어서, 승연이 그런 규칙을 제안하자마자 다음 날부터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으며 보급 중에는 어떤 특이사항이 있었는지 주절주절 이야기하곤 했다. 그런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동안 두 사람은 자주 시선을 마주쳤고, 또 버릇처럼 웃었다. 평화는 가장 불완전한 순간 가장 완벽한 형태로 나타난다던데, 승연은 문득 제가 바라던 형태가 하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인지를 모르지는 않았음에도 그랬다.

그렇게 흘러가는 하루하루의 평화가 꼭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던 어떤 날이다. 매번 수색팀에 참여하던 하진이 컨디션 난조를 이유로 수색팀에서 부득이하게 빠지게 되었다. 그도 사람이니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은 있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렇다 해도 언제고 바깥으로 나가던 이가 나가지 않는다고 하니 여러모로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리더의 말을 잠자코 듣던 하진은 안에서라도 할 일을 찾아 해보겠다는 이야기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자연스럽게 그날 수색조를 이끌기 위해 쉘터 바깥으로 나선 것은 리더였다. 그간 안에만 있었으니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쐬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을 위주로 꾸려진 수색조와, 그들을 데리고 쉘터를 잠시 떠나는 리더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승연이 고개를 돌려 걱정스럽다는 듯 하진의 얼굴을 바라본다. 저 사람들은 별일 없겠지, 아무리 그래도 리더가 따라가는데. 그런데 하진 씨는 많이 아프신가. 그렇게까지 컨디션이 나빠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는데, 꾀병이라기엔 정말로 기운이 없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승연이 하진의 낯을 뚫어지게 바라볼 즈음 유리가 다가와 하진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곧 유리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꾀병인 것 같은데…….”

“두통이 좀 심해. 약은 먹었는데, 나갔다가 실수하느니 남아있는 게 낫지 싶어서.”

“아, 그거면 뭐. 약 기운 영향 많이 받으시잖아요.”

머리 아프다는 이야기도 간만이시네, 중얼거리는 도영의 목소리에 승연이 고개를 돌려 도영과 유리를 바라본다. 그러고 보면 이 사람들은 하진 씨에 대해 잘 알고 있구나, 내가 아는 것은 그저 그가 쥐여준 몇 조각이 다인데도. 그를 알지 못하고 살아왔던 시간의 공백에 이 사람들은 틀림없이 존재했으니. 그게 조금은 부럽다고 생각하던 승연은 어깨를 으쓱이며 벽에 기대는 하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당장 움직이진 않을 것 같았으니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나눌 작정이었다.

“원래 머리 자주 아프세요?”

“일 할 때는 자주 아팠습니다. 그래서 커피도 달고 살았는데……. 여기 와서는 그나마 몸 움직이는 일이 잦았으니 덜했습니다만 오늘은 간만에 예전만큼 아프네요.”

“하진 씨 입에서 아프다는 말 나오는 게 되게 어색한 느낌이에요…….”

그 이야기에는 하진도, 도영도, 유리도 웃었다. 도영과 유리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밝게 웃었으나 하진은 입꼬리만 올리는 정도였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였겠다만, 승연은 이상하게도 그런 하진의 얼굴에서 좀처럼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더 밝고 소란스럽게 웃고 있는 사람은 근처에 있는데 왜 시선을 뗄 수 없는 것은 당신의 얼굴인지. 승연이 이리저리 눈을 굴릴 즈음 하진이 손을 뻗는다. 승연은 구태여 눈을 감거나 움츠리지 않았다. 이제 그 손이 자신을 향할 때는 결코 모질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상대로 하진은 그저 승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당신의 말이 맞다는 듯, 그러나 오늘만은 예외였다는 듯이.

“맞아, 팀장님 원래 아프단 소리 안 해.”

“솔직히 말해봐요, 오늘은 좀 쉬고 싶으셨던 거죠?”

잠시 눈을 굴리던 하진은 곧 고개를 기울였다. 정확히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듯이.

“그렇다기보단……. 창고 정리를 못 했는데 내가 안 하면 아무도 안 할 것 같아서. 안쪽 일을 좀 할까 싶어서 안 나간 것도 있고, 리더라는 놈도 제정신 못 차리고 있는 와중이니 사람들 데려가서 믿음이라도 좀 샀으면 했던 것도 있고.”

그런 거면 리더를 하진이 하면 되지 않나. 예전에 잠시 들었던 의문을 곱씹던 승연은, 팀장님은 정확히 리더가 되고 싶은 분은 아니시며 실세이길 원하시는 분이니 지금으로도 만족하실 것이라던 유리의 대답을 새삼스레 상기하며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제 말에 대한 수긍인 줄 알았는지 하진은 승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으로 다시금 그의 머리를 헤집었다. 도영과 유리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하진을 바라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어섰다. 한 박자 늦게 승연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너희는 쉬어라…….”

“아니에요, 이럴 때 같이 해야죠!”

승연의 경쾌한 목소리에 하진은 못 이긴다는 듯 웃으며 창고로 걸음을 옮겼다. 보급 물자 중에도 호불호가 갈리는 품목은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었으며, 그에 비해 창고의 공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니 일단 닥치는 대로 주워오고 창고에 욱여넣는 것을 버릇으로 두던 대원들이 쌓아둔 물건은 이제 포화상태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늘어났으므로 한 번 정도는 정리할 필요는 있었다. 사용도가 낮거나 불호도가 높은 품목을 위주로. 아무래도 그러한 활동의 적임자는 한 번에 많은 짐을 옮길 수도 있으며 보급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 때문에 대원들의 호불호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고, 재고 파악도 빠르게 할 수 있을 하진일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본래 자기 직전까지 이 일을 하다 들어오는 것이 하진의 일과였으나 승연이 방에 함께 들어가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건넨 이후로 정리하지 못한 것이었으니 실은 자업자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저를 따라오는 승연과 도영, 그리고 유리를 바라보던 하진은 저도 모르게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미룰 대로 미루다 믿음직한 사람들과 함께 일을 처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영과 유리가 자초지종을 전부 다 들었다면 그쪽이 알아서 하라고 성 아닌 성을 냈을지도 모르겠다만 어쨌든 그렇게 생각했다. 그나저나 창고가 엉망일 텐데, 막연하지만 기분 나쁜 예상은 틀리지도 않는다.

어젯밤 보급 이후로 창고는 난장판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보급품 배분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던 리더가 보급에 참여하겠다 나서며 창고가 개판이 되었던 것인데, 어젯밤의 하진은 깊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알아서 정리하고 자면 무슨 짓을 해도 별말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마는 뜻대로 되지는 않는 법이다. 정리라고는 하나도 되지 않은 꼴을 보면 아무래도 확실하지. 웬일로 창고 꼴이 이렇게나 엉망이냐고 물으려던 도영도 눈치껏 입을 닫았다. 하진이 이런 꼴을 가만히 놔두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면 리더나 다른 쉘터 사람이 난장을 쳐두고는 제대로 정리도 않고 도망친 것일 텐데 이럴 때 괜한 장난을 쳐봐야 좋은 그림은 나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뭐, 곁에 승연이 있으니 고함을 치거나 자신을 위협하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까지는 없는 법이다. 적잖이 짜증이 난 표정을 감추지도 않던 하진이 철제 수납장 맨 위에 있는 칸마다 대분류를 적은 종이를 붙였다. 그 아래 섹션마다 소분류를 적은 종이까지 붙이고 난 후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 대강 한 곳에 밀어 넣고 나서야 승연과 일행에게 도움을 청한 하진의 말을 세 사람이 거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애당초 도와주려 온 것이 아니었나.

세 사람에게 일을 맡기고 쓸데없는, 그러니 아마 버릴 물품을 모아 담기 위해 깨끗한 박스를 가져오던 하진, 떨어져 있던 물건 중 영 못 쓰게 된 물건을 우선 쓰레기통의 대용이 된 박스에 욱여넣는 도영, 가벼운 물건부터 수납장 상단에 정리하는 승연, 무거운 물건을 줄 맞춰 수납장 하단에 정리하는 유리. 별다른 말 없이도 체계적으로 진행되는 청소에, 꼭 완벽한 조원으로 이루어진 조별과제 같다는 생각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떠올렸다. 어쩌면 앞으로 정리는 이 넷이서 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잠깐, 하진이 짐을 옮기는 데 합류하면서 모두가 다시 짐 정리에 완전히 매진했다. 그렇게 두세 시간 정도 쉬지 않고 움직였을까, 승연의 표정에 슬슬 지친 기색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재미있긴 한데 여간 힘든 게 아니네, 그렇게 생각할 즈음 돌연 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쉬었다 할까.”

“오, 네. 좋죠! 뭐라도 좀 마셔요.”

냉큼 들려온 도영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승연은 벽에 등을 기대 앉았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하진이 컵과 멸균우유팩을 챙기다 티백 따위를 놓아둔 칸에서 기웃거렸다. 막 마셔도 되는 건가? 내가 관리자인데 숫자 하나 덜 적으면 그만이지 뭐. 오가는 농담에 승연은 실없이 웃었다. 딸기 우유 먹고 싶다, 여기 흰 우유밖에 없지만. 우유 자체가 사치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쓰레기를 모아둔 박스에 놓인 빈 딸기 우유 팩을 한참 바라보던 승연이, 문득 하진이 자신의 앞으로 내미는 우유컵을 바라보았다. 어라, 딸기 우유다.

“우와, 딸기 우유가 있었어요? 마시고 싶었는데!”

“딸기 우유 분말이 있더군요. 드십시오.”

“그래! 맛있는 건 애기 줘야죠, 전 커피~”

웃음소리 섞인 유리의 목소리를 들으며 승연은 조금 멋쩍은 듯 뺨을 긁적였다. 그렇게까지 애도 아닌데 정말로 여기서는 애 취급을 많이 받는다. 그게 싫냐고 묻는다면, 사실 조금 애 취급을 한다 해서 정말로 인간 대 인간으로 동등한 대우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귀여워하는 방식이 그런 것 같으니까, 마냥 싫고 그렇지는 않은데 여러모로 멋쩍은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승연은 딸기 우유를 가볍게 홀짝이며 커피 믹스에 우유를 부어 마시는 유리의 옆으로 다가갔다. 별 말 없이 자리를 내어준 유리가 승연이 제 옆자리에 앉자마자 승연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정말 남동생 대하듯이 대하시는구나, 문득 생각한다.

“요새 종종 생각하는데 승연이는 듣던 거에 비해 엄청 귀여운 것 같아.”

“어, 누가 얘기해줬……. 도영 씨가요?”

“응, 쟤 직장 다닐 때는 진짜 취미만 물어보면 승연 씨 얘기했어요. 게임 엄청 잘하는 애라고.”

제겐 숨을 쉬는 것만큼 익숙했던 일이 게임이었다. 키보드를 잡고 영웅이 있는 세계를 누비는 것은 제 장기였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먼 세상의 이야기가 된 것처럼 느끼게 된 건지. 마우스를 잡은 것도 아주 오래전의 일인 것 같아서, 승연은 여러 번 눈을 굴리다 우유컵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래도 옛날 얘기를 하니 조금 즐거운 것 같기도 하고. 그때처럼 찬란한 순간은 앞으로 쉽게 찾아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는 있었으니까. 그때의 나라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짧게 생각하던 승연은 곧 짓궂은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잘하는 애들 사이에서도 제일 잘했죠, 제가.”

“맞아, 막 이런 말만 한다고 하고. 엄청 단단하고 멋있는 사람이라는 얘기만 들었는데 여기서 같이 지내니까 막 귀여운 거 있죠?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누나동생 하자고 했을 텐데요.”

“엇, 지금은 못 해요? 전 지금도 누나동생 해도 좋은데~”

“그럴까요? 말만 좀 천천히 놓고?”

밝은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문득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진과 도영의 눈치를 살폈다. 경우가 다르다면, 승연은 너무 친해지면 도영 씨가 싫어할 것 같다는 생각 탓이었고 유리는 지나치게 친한 척을 하면 도영은 제 최애인지 뭔지……. 아무튼 그런 사람을 넘보지 말라고 고함을 지를 것도 같았고, 하진 또한 뭔 짓을 하냐는 듯이 바라볼 것 같다는 생각 탓이었는데 의외로 도영은 마음이 따뜻해진다는 듯 그렁그렁한 얼굴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물론 하진은 정말로 조금 아쉬운 낯이었지만. 유리는 문득 시선을 옮겨 승연의 얼굴을 바라본다. 선배님 안 보고 있네, 얘. 다행이라면 다행인데, 다행이 아닌가. 짧게 생각하던 유리는 가볍게 혀를 차곤 손을 올려 승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대놓고 예쁨을 받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아 승연은 조금 웃고 말았다.

승연이 이제야 마음 편하게 웃는 모습을 보아서인지, 그렁그렁한 얼굴로 승연과 유리를 바라보고 있던 도영이 두 사람에게로 다가가다 유리의 옆에 앉아 유리의 어깨에 기댔다. 뭐 하냐, 머리 무겁다, 치워. 냉정하게 흘리는 목소리가 자신을 대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어서 승연은 결국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두 분도 좀 잘 됐으면 좋겠다, 유리가 들으면 우리는 절대 그런 사이가 아니니 그런 오해는 하지 않아 주었으면 한다는 비명을 지를 법한 생각이지만은. 그나저나 이렇게 쉬니까 확실히 좋긴 하다, 하진 씨는……. 시선을 돌린 승연은 하진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한 것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어디 아프신가? 그런 생각도 잠시, 아까 전까지 두통을 호소했던 것을 떠올리며 승연은 조금 눈을 굴리고 만다. 누워서 쉬시라고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도 잠깐이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그냥 피곤하셨던 건가. 그렇게 넘겨버렸다. 더 할 수 있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평소의 하진과 유리, 그리고 도영이었다면 10분 내외로만 쉬고 바로 다시 창고 정리에 매진했을 텐데, 하진은 평소와 다르게 30분을 쉬고 나서야 마저 일을 처리하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니 이전보다 능률이 높아진 것은 좋은 일이지만 왜 굳이, 라는 생각을 숨기지 못하던 유리와 도영은 그렇게 쉬고서도 아직은 힘들다는 듯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승연을 보며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중에 체력 나쁜 애 있으니까 배려해주신 거구나.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은 조금 더 쉬고 싶다는 표정을 짓는 승연을 바라보며 세 사람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야 정말로 귀엽게 굴고 있지 않은가. 일반인 기준에서는 이 정도도 힘들구나.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고. 어찌 되었든 간에 그렇게 다시 일을 시작한 지 두 시간 즈음이 지났을까, 지지부진하게 이어진 창고 정리도 슬슬 끝이 보였다. 하진이 오늘의 보급품을 정리하는 것을 조금 도와줄 수 있냐고 물어 남은 세 사람이 함께 일에 매진하려던 찰나였다.

바깥이 이상할 정도로 소란스러웠다. 이 시간에 이렇게까지 시끄러운 일은 그렇게 잦지 않은데. 그렇게 생각한 하진이 시계를 바라보았다. 보급으로부터 몇 시간 정도의 여유가 남은, 통행금지 시간 언저리. 시끄러워질 시간은 저녁 배급 시간 정도일 테니 지금의 소란은 다소 어색한 곳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하진이 문 바깥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려 보급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것만 다 하고 나가봐야지, 진짜 심각한 일이면 나를 찾았을 테니까……. 그런 생각도 잠시, 남은 세 사람이 제법 심각한 얼굴로 문 바깥을 바라보는 것을 바라보던 하진이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무슨 일 터지면 부리나케 그를 찾아올 사람들이 다 여기 있는 게 문제였다.

“바깥이 이상하게 시끄럽지 않아요?”

“뭐 막으라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이야기를 들은 하진이 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몸도 안 좋다는 사람에게 부담감을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에 그나마 적합한 사람이 하진인 것도 맞았다. 남은 세 사람은 조금은 미안하다는 듯 하진을 바라보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숨을 쉬는 하진의 뒤를 따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하진이 가볍게 이마를 짚었다. 두통이 가라앉지 않은 탓이었을까.

“오늘은 진짜 나가서 일하기 싫다…….”

“에이, 그래도 뭐 별 일…….”

하진 씨, 하진 씨 불러와! 어디 가셨어! 도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하진은 깊은 숨을 내쉬고 한 구석에 정리해둔 무기를 챙긴 채 문 바깥으로 나섰다. 입을 괜히 놀렸다는 듯 제 입을 몇 번 친 도영이 바로 하진의 뒤를 따랐고, 내내 심각한 표정으로 문 근처를 바라보던 유리와 승연 역시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문 바깥으로 나섰다.

문 너머는 난장판이었다. 좀비 몇 무리 들어와 생긴 난리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무기를 고쳐쥐던 하진은 곧이어 리더가 문을 막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동시에 문 바깥에 리더가 이끌고 온 사람들이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제발 저 사람들부터 막으라며 고함을 지르는 리더, 우리 이야기를 좀 들어주면 안 되냐는 듯 고함을 지르는 사람들. 그 사이에 좀비는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안심한 하진은 무기를 손에 쥔 채로 문 근처로 다가섰다. 곧이어 유리는 문 바깥에 고립된 사람들의 얼굴을 훑는다. 하나같이 좀비로 인한 감염을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하던 사람들, 그래서 웬만해서는 쉘터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던 사람들. 쉘터의 식사를 담당하는 주요 보직에 있는 사람까지 섞여 있는 것을 바라보며 유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제야 승연의 시선이 문 바깥의 사람들에게로 향한다. 비명을 지를 뻔한 승연이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린 자국이 있었다. 한 명도 빠짐 없이, 전부.

그렇다면 안으로 들어온 리더는? 승연은 급하게 리더의 몸을 눈으로 훑었으나 리더만큼은 멀쩡해보였다.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다같이 나갔는데 리더 한 명만 멀쩡하다고? 그러나마나 리더는 쉘터에 남아 있는 모든 사람을 끌어 문을 막으려 애썼다. 적잖이 당황한 얼굴을 바라보던 승연의 시선이 가늘어진다. 뭔가, 저 사람. 찝찝한데. 곁에 있는 도영과 유리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팔짱을 낀 채 난리통을 바라보았다. 그 즈음 하진이 리더 앞을 가로막고 섰다. 문 바깥에 있던 이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문득 승연은 속이 울렁거림을 느꼈다. 그들이 하진을 바라보는 눈빛이 살려달라는 구조 요청과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 속에 든 절박함을 읽어낸 이상 하진의 다음 행동을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됐다.

“앞뒤 다 자르고 본다. 쉘터 사람이다. 들여보내.”

“미쳤어? 물린 자국 안 보여?”

“들어오라잖아, 왜 다시 막아!! 너 아니었으면 이 꼬라지 될 일도 없었다고!!!”

하진의 선언이나 다름 없는 목소리, 그 이후 다시 들린 찢어질 듯한 비명과 고함. 울음소리에 엮인 감정이 필요 이상으로 억울하고 처절해서, 뒤에 선 세 사람은 의아하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저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다는 건 또 무슨 뜻인가. 또 무슨 짓을 했나? 저 사람 하나만 멀쩡한 꼴인 것도 의심스럽긴 했는데, 정말로 무슨 짓을 저질렀단 소린가? 의아한 시선들이 몇 번을 오간다. 그 즈음 바깥에서 천둥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비는 오지 않지만 조만간 비든 무엇이든 뭐 하나는 분명히 쏟아질 것 같았다. 하진은 가볍게 한숨을 뱉다 다시 한 번 말했다.

“……들여보내.”

“이하진!!”

고함에도 하진은 변함없는 시선으로 쉘터 밖의 사람을, 그리고 리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운 얼굴이다만, 그런 그를 한참 지켜봤던 유리와 도영은 알았다. 지금 진짜 화 많이 나셨다, 건드리면 큰일나는 상태다……. 쉘터의 입구를 가로막던 사람들과 리더의 어깨를 붙들어 쉘터 안쪽으로 밀어낸 하진이 짜증 가득 어린 낯으로 리더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은데, 어떡하지.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도영과 유리와는 다르게 승연은 염려되지 않는다는 듯 고요히 하진을 바라보았다. 일을 굳이 키울 사람은 아니니까. 적어도 승연이 본 하진은 그랬다.

“특별한 신체 증상도 없고, 좀비화 이전에는 뭔 짓을 해도 다른 사람한테 못 옮기지 않나. 게다가 물리면 바로 나가겠다는 동의 하나 사전에 제대로 받지 않고 네가 직접, 데리고 나간 사람들인데,”

곧 하진이 몸을 숙여 리더와 눈을 맞췄다. 어느 순간에는 상냥한 행위라고 정의했을지도 모르는 행위였다만, 지금 하진의 의도는 위협에 가까워 보였다. 빛 한 줌 들지 않는 시선이 서늘하다. 승연은 문득, 사람들이 왜 그렇게까지 하진을 무서워하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다 해서 그 감정들에 속속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런 상황이 아니고서야 타인을 위협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승연은 믿고 있었다.

“네 관리 부실로 인한 문제를 들어보겠다는데, 문제 있나?”

“그래도 물린 사람을, ……상식적으로…….”

“한 달 반 전인가 물렸던 네 친구도 물린 거 알고서도 들여보냈지? 상식선에서는 문제 삼을 이유가 없겠군. 들어오시죠, 비 맞으면 안 되잖습니까.”

이후 들려온 하진의 목소리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을 만큼 다정하고 따뜻해서, 선두에 서서 고함을 지르던 사람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이고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울고 있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게 하진이 신경쓸 바는 아닌 것 같긴 했지만. 아직도 말 없이 리더를, 그리고 그제야 들어오기 시작하던 이들을 바라보던 하진이 잠깐만 기다려달라는 듯 들어오던 이들의 몸을 가볍게 수색했다. 모두 팔뚝에 물린 자국이 하나씩, 그 외에도 물린 자국이 하나 이상. 중앙에 서서 그나마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온 사람……. 유진 씨군, 그러실 것 같긴 했는데. 중얼거린 하진이 유진의 몸을 눈으로 훑었다. 유진이 가장 많은 상처를 입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곳만 해도 팔뚝, 손, 정강이……. 아팠겠네. 하진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들려온 울음소리가 커진 것이 기분 탓일는지. 머잖아 찾아올 비극을 직감한 이들의 상심한 표정을 바라보던 하진이 한 발 물러났다. 그런데, 당신은 왜 혼자 왔어. 그렇게 묻고 싶은 듯 리더를 바라보는 시선들, 원망 가득한 얼굴로 리더를 바라보고 있는 바깥에서 온 사람들. 그 모든 시선을 받아내던 리더가 고함친다.

“왜, 왜?! 뭐가 문제야, 물린 사람은 나가는 게 맞잖아!!”

“그 규칙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나가지 않겠다고 한 사람들이잖아요.”

“본인들이 바람이나 좀 쐬고 싶다고 나서긴 했지만…….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이끈 건 리더였고요.”

“아무 걱정 하지 말라던 새끼가 그런 짓을 해?!”

그런 짓이 뭔데. 어쨌든 하진은 판단을 하는 입장이었다. 이야기가 더 구체화되기를 기다리듯 지그시 막 들어온 무리를 바라보고 있는데, 곧이어 흉기를 손에 든 리더가 다시 고함쳤다.

“입 다물어, 거기서 더 얘기하면 다 죽는 거야!!”

“안 그래도 죽이려고 했잖아, 새삼스레 무서워할 줄 알아?!”

안 그래도 죽이려 했다? 유진의 고함에 승연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내가 헛소리를 할 것 같냐며 흉기를 휘두르기 시작하던 리더의 주변에서 모두가 멀어질 즈음, 하진이 깊은 숨을 내쉰다.

“……지금 두 쪽 다 너무 흥분했는데. 진정 좀 합시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고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하진이 그제야 입을 열고는, 곧바로 리더의 팔을 붙들어 흉기를 억지로 뺏어 들었다. 그러던 중 칼에 팔이 맞을 뻔했지만 그런 것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구는 모습에 승연이 세게 눈을 감았다 떴다. 안 다쳤구나, 그나마 다행이다. 그가 무기를 뺏음과 동시에 리더의 중재에도 제멋대로 떠들던 이들의 입이 전부 닫히고 모두의 시선이 하진에게 몰렸다. 하진은 별다른 말 없이 모든 사람을 한 번 둘러보다, 조금 전까지 절대 나갈 수 없다며 고함을 지르던 유진에게로 다가섰다. 가볍게 몸을 떠는 유진의 앞에 멈춰 선 하진이 손을 뻗어 유진의 이마를 짚었다. 정상 체온, 그러므로 하진에게는 조금 뜨거운 온도. 아직 열은 없네. 그렇게 중얼거린 하진이 몸을 숙여 유진과 시선을 맞춘다. 그 모습에 승연이 찰나 숨을 들이켰다. 머릿속이 소란스러웠는데, 그 이유를 스스로는 가늠할 수 없었다.

리더의 앞에서는 내내 고함을 치던 모습과 달리 유진은 조용했다. 그 모습에, 승연은 무심코 이곳의 사람들은 사실 현재의 리더라고 불리는 사람보다 하진을 더 따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진의 오랜 침묵은 일상적인 긴장감보다는 차라리 오랜 심판을 기다리는 이의 침묵처럼 보인 탓이다. 그렇다 해서 한바탕 소란스러워진 마음이 가라앉는 것은 아니었고, 소란의 사유 또한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감염자를 쉘터 안에 둘 수는 없다. 이건 지금까지 우리가 지켜온 규칙이고, 당신도 찬성한 규칙입니다. 맞습니까?”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하자는 게 아니에요, 그렇지만 저는 이 안에서 한 게 많잖아요. 저는, 그리고…….”

그렇게 말한 유진이 시선을 옮겨 리더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안은 감정이 대체 어떤 감정인지 승연은 알 수 없었으나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둘 사이에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급하게 쉘터의 문을 봉쇄할 것을 외치던 리더, 이상하리만치 그에게 적대심을 내보이고 있는 유진. 안 그래도 죽이려고 했다는 말까지. 유진이 입을 달싹이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하진을 위해서였다, 지금도 하진을 노려보고 서있는 리더의 시선을 유진이 읽지 못했을 리가 없다.

“……아니에요.”

“지난 번에 원정이 내보냈을 때 분위기 어땠어요, 당장 내쫓을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아요…….”

뒤이어 들려온, 승연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누군가의 목소리에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연만은 모르는 이야기지만 처음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전 리더의 손에 의해 누군가를 섣부르게 내보냈던 적이 있었고, 그로 인한 분위기 저하가 있었다는 것. 그 무렵에는 쉘터에 남아 있으려는 의지를 보이는 사람조차 적어져 보급품을 가져오는 것에도 차질이 있었으나 하진이 어찌저찌 분위기를 잘 무마해 지금 같은 아슬아슬한 평화는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와서 내보낸 사람에 대한 언급을 입 바깥으로 낸다는 것은 의도가 분명하다.

“무슨 뜻인지는 압니다. 쉘터에서 유진 씨가 보여준 성과를 무시하려는 의도 또한 아니고, 지금 해주신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말을 끝까지 잇지 않은 유진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려 애쓰던 하진은 그저 수긍하겠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말마따나, 승연이 눈여겨 본 사람은 하진과 유리, 기껏해야 도영 정도가 다였으나 그런 승연에게도 유진의 이름은 퍽 익숙했다. 의무적으로 나가는 탐색이나 보급품 확보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보급품을 확인하고 확보한 식량을 쉘터 사람들에게 보급하는 일에 대해서는 쉘터에 유진만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눈여겨보지 않았어도 오가며 그 정도의 정은 쌓을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는 의미인 셈인데, 그러니 그가 주장하는 쉘터 내에서의 성과 또한 아주 허황된 주장은 아닌 셈이며 그에게만은 일말의 배려가 닿길 원하는 쉘터 사람들의 시선 또한 아주 모순되지만은 못한 것이었던 셈이다. 승연은 하진에게 닿는 시선들을 살핀다. 기대, 찰나의 실망, 두려움, 믿음. 리더로 인정된 이에게 가닿는 시선들.

그러므로 승연은 유진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재의 리더가 얼마나 무정한, 또한 무능한 사람인지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토록 중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중요시하지 않겠다는 방향이라면 무정한 것일 테고, 그가 무슨 일을 해낸 사람이었기에 대부분이 그에게만은 예외가 닿기를 원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방향이라면 무능한 것일 테다. 아무래도 후자겠지, 다른 사람들이 저런 시선으로 하진을 바라보고 있는데. 승연은 그제야 시선을 옮겨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리더를 바라보았다. 머리가 나쁜가. 여기서 한 번의 아량을 보이면 이미지 전환은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일 텐데. 가볍게 혀를 찰 즈음, 리더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린 하진이 느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지혁아, 너는 어쨌든 이 사람을 당장 내쫓고 싶은 거지.”

“어?……뭐, 당장이 아니라도 그렇게 하긴 해야지.”

아까 전까지 고함을 지르던 사람은 어딜 간 건지, 하진의 목소리를 듣고 고분고분해진 리더를 바라보는 이들의 표정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으나 하진은 그런 리더의 모습도 어느 정도는 익숙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저 사람 이름이 지혁이구나. 여기에 한 달쯤 있었는데도 몰랐네. 승연의 상념도 아까보다는 상대적으로 태연해졌다. 그야, 하진이 저런 얼굴로 무언가를 고민할 때는 꼭 나쁘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으므로. 하진을 믿고 있기에 어쩌면 당연해진 흐름인 셈이다. 승연의 옆에서 곧 튀어 나갈 준비를 하던 도영과 유리의 표정도 어느새 한결 편안해졌다.

“네 말대로면 당장이 아니어도 괜찮겠군.”

“어? 아니, 그게.”

“말 바꾸려고? 이제 와서? 말 신중하게 해. 리더 노릇 제대로 계속 하고 싶으면.”

순식간에 가라앉은 하진의 목소리에 리더가 한 번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못 이긴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다, 하진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것이 없는 분위기이다. 여기서 대들었으면 한바탕 싸웠을 텐데. 이런 걸 보면 눈치는 살필 줄 아는 놈인가 싶기도 하고. 그제야 굳은 하진의 얼굴이 다시 풀렸다. 아무 말 없이 리더를 바라보던 하진이 시선을 돌린다. 쉘터 안을 둘러보려는 것인지, 주변을 느리게 훑던 시선이 곧 한 자리에 머무른다. 하진이, 그러므로 가끔은 승연이, 또 어느 날에는 리더와 다른 쉘터 인원들이 줄곧 시간을 보내던 회의실이었다. 안에서 밖이 들여다보이고 그 역 또한 성립하는, 튼튼한 유리문으로 막혀 있는 곳.

“회의실, 앞으로 격리실로 사용하지. 일단 증세가 발현하는지 거기서 두고 보고 증세가 발현하면 그때 추방 투표를 받고 내보내든 그 안을 폐쇄하든 하면 그만 아닌가.”

애매한 결정이다. 누구에게도 석연찮을 결론이라는 의미다. 바로 내보내고 싶은 입장에서도, 내보내고 싶지 않으나 언젠가는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에서도. 그럼에도 유진의 표정은 한결 후련해 보였다. 곧 유진이 밝은 표정으로 하진의 손을 잡아 몸을 이끈다. 별다른 방향도 없이 끌려간 하진이 유진의 눈높이에 맞게 몸을 숙이더니, 곧 귓가로 입을 붙여오며 무언가를 속삭이는 유진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인 채 몸을 바로 세웠다. ……지금 뭐지? 승연의 손에 공연히 힘이 실린다. 그 움직임을 본 건지, 손을 뻗은 유리가 승연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얹고 그대로 손을 꽉 쥐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조금 진정해. 그렇게 말하기라도 하듯.

“그래서, 반대하는 사람?”

타이밍 좋게 하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곧이어 리더가 하진을 한참 바라보더니 주먹을 움켜쥐었다. 당연히 뒤따른 불만 어린 시선을 읽어낸 하진이 리더에게 다가가 팔목을 붙들었다. 리더의 얼굴이 세게 구겨진다. 붙든 손아귀에 힘이 실린 탓이다. 핏줄 선 손을 바라보던 도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번에도 우리 팀장님 원하시는 판대로 흘러가겠구나.

“말 해. 뭔데.”

“그렇게 해봤자 희망고문일 뿐이야, 당장 내보내지 않는다는 건.”

그제야 주먹을 푼 리더가 건넨 말에,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는 듯 하진이 몇 번 고개를 끄덕이긴 했다. 동시에 유진과 일행의 낯이 창백해졌지만, 애당초 하진에게는 저러한 의견을, 특히 리더의 의견을 수렴할 의지는 전혀 없었다. 당장 내보내는 것이 올바른 선택지인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오래도록 했던 탓이다. 잠시 고민하던 하진이 입을 열었다.

“그럼 저분들이 하던 일 네가 다 바로 하는 걸로 해. 동의하면 바로 내보내지.”

“……뭘 했는데?”

뭘 했는데? 리더가 할 소리인가.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으나 하진은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리더와 조용히 눈을 맞추다 업무들을 하나하나 중얼거리듯 나열하기 시작했다. 쉘터 인원들을 위한 식사 시간에 맞춰 만들기, 설거지 같은 업무는 기본이고, 창고에 있는 음식 재고 확인 및 사용. 대량으로 챙겨야 하는 식사이니만큼 많은 사람들의 니즈를 다 맞춰야 할 것 같은데 유진 씨가 이걸 정리해뒀는지는 모르겠으니 안 하셨다면 네가 알아서 다시 조사하고, 아, 저 분은 쉘터에 사람이 들어올 때와 짧으면 한 달, 분기에 한 번씩 쉘터 사람들을 대상으로 바이러스 감염 테스트를……. 이어지기 시작한 말은 반절이 채 흐르지 못했는데, 그것마저도 견디지 못하고 리더가 손을 내저었다. 그냥 있으라고 해라. 덧붙이는 목소리에 하진은 그제야 헛웃음을 흘렸다. 리더에 대한 적대감이 그보다 더 분명할 수가 없었다.

“추가 반대 의견 있나? 이제 반대할 때는 대체 방안도 생각하고 말하도록. 가급적 ‘희망고문일 뿐이다’라는 말과는 먼 방향으로, 또한 지금 내가 제시한 것보다 나은 방안으로.”

이것보다 나은 방안이랄 것이 없지 않나. 내쫓지 말자고 하자니 다 죽으라는 말과 다를 것이 없으며, 당장 내쫓자고 하자니 그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 사실이었을뿐더러 남은 정이라는 것이 매정한 답변으로부터 몸을 한 걸음 뒤로 물러나게 했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침묵이 뒤따랐고, 하진은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주목을 끌기 위해 크게 한 번 손바닥을 맞댔다. 모두의 시선이 하진에게로 이끌린다.

“이렇게 결정합니다. 제가 곧 찾아뵐 테니, 유진 씨는 피해받은 일행들과 함께 회의실로 가시지요. 보급 때 뵙겠습니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불편한 분위기를 피하듯 대부분의 사람이 자리를 떴다. 말없이 회의실로 올라서는 유진과 일행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진이 고개를 돌린다. 어느덧 그의 주변에 남은 것은 도영과 유리, 승연뿐. 승연의 가라앉은 낯을 흘끔 바라본 유리가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까 유진이랑 무슨 얘기 했어요? 딱 붙어계시더만.”

“무서웠는데 마음 정리할 시간 줘서 고맙고, 인수인계는 나한테 하겠다네.”

당장 생명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인수인계 걱정이라니. 그것이 어쩐지 하진답고, 하진이 일을 가르친 사람답기야 하다는 생각에 일행 모두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와중에 그런 일까지 죄다 하진이 도맡게 되면 그는 도대체 언제쯤 휴식을 가질 수 있을지가 걱정되긴 하였다마는 하진이 필요 이상으로 무리를 하게 되면 그때는 일을 받아 가거나 재분배하면 그만이니까. 한숨 돌렸다는 듯 유리가 가벼운 숨을 내뱉던 찰나, 승연과 하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도영이 고개를 기울인다. 둘이 안에서 싸웠나? 아까 전부터 둘 다 표정이 영. 물론 도영이 바라보는 팀장, 그러니까 하진은 도통 좋은 표정을 짓는 법이 없는 사람이고 지금 같은 상황이 있었으니 더더욱 웃기 어려운 상황이기야 했다마는 승연의 표정까지 구겨진 것이 영 탐탁지 않았다. 농담이나 해서 분위기를 좀 풀어볼까, 딱 그게 필요한 상황인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던 도영이 짓궂게 입을 열었다.

“그런 것치곤 너무 딱 붙어계시던데요? 사심 있는…… 컥.”

말을 뱉자마자 유리가 팔꿈치로 도영을 세게 밀긴 했지만……. 코웃음을 친 하진이 어느 순간부터 손에 들고 있던 물품 차트를 넘기며 성의 없이 답했다.

“내 취향 아니다.”

“대답이 좀 바뀌셨는데? 연애할 마음 없다면서요, 취향이 아니시라, 으읍?!”

바로 반응하는 도영의 입을 기어코 틀어막은 유리가 도영의 몸을 질질 끌고 빈방으로 사라졌다. 졸지에 둘만 남은 하진과 승연이 멋쩍은 웃음만 흘리며 서로를 마주 보다가, 하진이 읽던 차트를 접고 다른 손으로 승연의 손을 붙잡자 승연도 별말 없이 손을 붙들었다.

“하진 씨는 어떤 사람이 취향이세요?”

“……나보다 작은 사람.”

무심코 건넨 질문과 대충 얼버무린 답. 그렇게 따지자면 유진 씨도 하진 씨보다는 작았는데요. 승연은 그리 말하려다 말고 하진의 손을 꼭 잡았다. 남들보다는 조금 찬 체온, 온기를 읽어내기 어려운 손. 그러나 그 순간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에 담긴 열기. 사람이, 처음 봤을 때는 아무래도 어렵고 무섭기만 한 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 그렇지만도 않다. 거짓말이나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 못하고, 상대 곤란할 만한 상황에서는 말을 줄이거나 대신 나설 줄도 알고. 승연은 그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린다. 왜 웃어요……. 작게 중얼대는 하진의 목소리에는 굳이 대꾸하지 않으며, 맞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싣고. 하진은 맞잡은 손으로 시선을 내리다 말고 기어코 손을 제 쪽으로 끌어와 승연의 몸을 기울였다. 뭐지. 엉겁결에 하진의 품에 안긴 승연이 의아한 낯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작게 속삭였다.

“오늘 많이 피곤했을 거 아는데, 당신 오기 전에는 이런 분위기가 일상이었습니다.”

“…….”

“그러니까 같이 다니는 애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승연 씨 오기 전에 있었던 일들도 들어둬요. 분위기가 이것보다 험해질 수도 있을 겁니다, 조만간. 그러면 당신이 놀랄 테니까…….”

미리 알려주고 싶어서. 많이 어수선해지면 놀랄 테니까. 그렇게 덧붙인 하진이 승연을 세게 끌어안는다. 그 온기가, 언젠가 아주 그리워했던 것을 닮은 것도 같아서…….

“그럼 이건 그냥, 미리 해주시는 위로예요?”

승연의 충동적인 질문에 하진은 대답 없이 웃었다. 맞나보네. 적당히 수긍한 승연이 하진의 품에 고개를 기댄다. 정신없이 날뛰던 삼정, 자신의 감정이 오롯이 자신의 것이라고 확신하기에는 어려웠던 시간. 호감이 있던 사람들끼리의 갈등, 그로부터 기인한 피로. 마침 위로받고 싶던 차였다. 그 모든 것에서부터. 그런 마음을 알아주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자신을 향한 호의였으나 그런 방향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건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고 따지자면 후자에 가깝기야 하였겠으나 승연은, 승연만은 그의 의도를 되는대로 착각하고 싶었다. 자신의 등을 토닥이는 손길을 받으며 승연은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이따 보급도 있고, 아직은 일과 중인데. 이렇게까지 피곤할 일인가. 아니면 이제야 긴장이 풀렸다고 말해야 하나. 애매한 기분에 눈을 끔뻑이면 그제야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와닿았다.

“들어가서 좀 쉽시다. 보급품은 당신 몫까지 챙겨서 나올게.”

“……부탁드려도 괜찮으실까요?”

“내가 해주고 싶어. 들어갑시다.”

그 목소리에 승연은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떨어지고 싶지도 않은데, 방으로 가려면 걷긴 해야 하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하진의 시선이 줄곧 자신을 향해 있었음을 새삼 깨달은 승연이 어리광이나 조금 부려볼까 싶어 하진을 향해 양손을 뻗었다. 그 행동에 자연스럽게 승연을 안아 든 하진이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실은 피곤하면 자신이 더 피곤하지 승연이 그렇게까지 힘들 까닭은 어디에도 없었을 테다. 싸움을 중재한 것도 자신, 내내 리더와 기 싸움을 하다 온 것도 자신. 어느 하나 승연에게 더한 피로가 가중될 요소가 없었음에도 하진은 구태여 승연을 챙겨주고 싶었다. 왜였을까. 아니, 정말 왜인지 모르나? 하진은 이제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제 품에 완전히 안겨 벌써부터 눈을 감고 있는 승연의 모습을 가만 바라보다가, 작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방문을 열었다. 내 쪽은 제대로 보지도 않네. 난 그게 섭섭한가……. 이제 와 고백하건대, 그런 것도 같다. 생각이 겹겹이 쌓여 하나의 덩어리가 될 때까지 자신의 감정을 곱씹던 하진은 시선을 내리깐다. 우스운 일이다.

정신적인 피로감이 컸던 건지, 승연은 하진이 침대에 내려놓기도 전부터 고른 숨을 내쉬었다. 하긴 창고 정리도 했고, 피곤할 만도 하지. 저 스스로 사유를 납득한 하진이 승연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주고 방 한편에 놓인 책상 의자에 앉았다. 쉬어도 되는 것은 승연의 입장일 때에나 적용되는 이야기이지, 하진은 언제나 자신만은 휴식과 여유로부터 예외였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수색 중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나갔던 전원에게 들어봐야 할 것이고, 그를 기반으로 보고서도 작성해야 할 것이다. 본래대로라면 나간 이들에게 맡기고 최종 검토만 하면 그만이었겠으나 오늘은 그럴 정신이 있는 사람도 없는 것 같으니까. 그래도, 그게 당장 이루어져야 할 일은 아니다. 물린 사람들도 감정을 정리해야 할 테고, 함께 나갔다 온 리더도 감정을 가라앉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진은 보고서 대신 내내 들고 다니던 다이어리를 펼쳤다. 누군가는 공상이 담겨있으리라 생각했고, 누군가는 이런 상황에서도 한 조각 낭만을 담아뒀을 것이라 생각했으며, 누군가는 그저 시간 낭비에 불과하리라 말했으나 실상 그 내용을 본 이는 어디에도 없는 하진만의 세계를.

무언가를 적는 데에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으므로, 하진은 오래지 않아 덮은 다이어리를 겉옷 안주머니에 넣었다. 쉘터 초기에는 책상 서랍에 욱여넣는 버릇을 들였었는데 지혁을 비롯한 쉘터 인원 몇몇이 제가 자리를 비우기만 하면 다이어리를 찾으러 방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그러지도 않고, 종이를 여럿 덧붙인 탓에 무게가 제법 되는데도 옷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게 됐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정말로 남이 보면 곤란한 내용만을 쓰게 될 테니까. 하진은 앉은 자리를 정리하고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향하려다, 악몽이라도 꾸는지 끙끙대기 시작한 승연의 호흡을 듣곤 걸음을 멈췄다. 승연의 머리맡에 앉은 하진이 그의 머리카락을 느리게 쓰다듬는다. 몸까지 죄다 긴장한 건지 꽉 쥔 손을 억지로 펴 깍지 껴 잡는다. 흠칫, 승연의 몸이 크게 떨린다. 곧 불안정한 시선이 하진을 향한다. 진한 분홍색의 눈동자를 마주하던 하진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괜찮아. 그냥 꿈이야. 더 자도 괜찮아. 속삭이는 목소리에 승연은 그제야 안심한 듯 속절없이 눈을 감는다. 하진은 그 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다가, 승연의 호흡이 더는 불안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할 즈음에야 손을 놓고 방 바깥으로 걸음을 떼었다.

승연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보급품 배분 시간은 한참 지난, 지나다 못해 다음 날 아침 식사가 배부될 즈음이었다. 간밤에 나쁜 꿈을 꿨던 것 같은데, 또 그래서 중간에 한 번쯤은 깼던 것도 같은데. 어떤 꿈이었고, 왜 깨어났더라. 제대로 기억나는 것은 없었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좋은 꿈을 꿨던 것 같다. 지나치게 달콤한 꿈이라 편안히 잤던 것 같기도 하고. 보급도 잊고 잤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기야 했다. 겨우 몸을 일으킨 승연이 기지개를 쭉 켜다 부스럭대는 인기척이 들려 고개를 들었다. 하진 씨, 아직 안 나가셨나? 평소 같았으면 나가시고도 남을 시간인데. 의아한 듯 바라본 곳에는 여즉 잠이 덜 깬 듯 피곤한 표정을 지은, 자기 전에는 붙이지 않았던 거즈를 뺨에 의료용 테이프로 대강 고정해 댄 하진이 보였다. 저건 뭐지. 승연은 고개를 기울인다.

“얼굴은……. 뭐예요, 하진 씨?”

“미친개에 긁혔어……. 좋은 아침입니다.”

미친개? 이 주변에 살아있는 동물이 있나? 승연은 의아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도 일단은 좋은 아침이라는 말에 화답하듯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이만하면 좋은 아침이긴 했다. 잘 자기도 했고.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곧 먼저 몸을 일으킨 하진이 옷을 갖춰 입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흐트러진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침부터 그의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으나, 의외인 모습을 보니 그건 또 그것대로 좋은 것 같아 승연은 실없이 웃으며 하진과 함께 준비를 마치고 방 밖으로 향했다. 나서자마자 두 사람을 마주친 도영과 유리의 표정이 눈에 들었다. 놀랐네, 많이. 승연은 무심코 생각한다.

“여, 좋은 아……. 얼굴 뭐예요?!”

“개한테 긁히셨다는데요…….”

“아, 그래? 광견병 예방주사는 맞으셨던가?”

아침부터 주고받기 시작한 농담이 승연의 귀에는 그리 재밌게 들리지 않아, 승연은 한숨을 내쉬며 거즈를 뺨에 댄 하진의 낯을 한참 바라보았다. 상처가 크게 나셨나. 어느 정도로 다쳤는지 알 수가 없으니 영 아쉬웠다. 보여달라고 하면 보여주시려나. 그조차 확신할 수 없지 않나 싶다. 제 부탁이면 뭐든 들어주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걱정 끼치는 것은 싫어하는 사람이니 더더욱. 괜한 생각들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밥만 먹고 조금 더 쉴까…… 그리 생각한 승연이 아침 배식을 받고 중앙 테이블에 앉았다. 늘 이 자리에서 아침을 나눠주던 게 유진이었는데, 어느덧 유진과 가장 친했던, 순찰조 내에서 제일 기여도가 낮은 무리에 속해 있었으나 애매하게 쉘터에 남아있긴 했던 이로 대체된 자리를 바라보며 승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자리에 앉은 세 사람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었다.

밥이 어디로 넘어가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승연은 묽은 수프를 목 너머로 넘긴다. 맛이 없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농도가 썩 옅기 때문인지 그렇게까지 인상적이지도 못했다. 급하게 인수인계를 받아서 그런 건가? 아니면 유진 씨 말고도 요리를 담당하던 사람 한둘이 함께 격리된 것 같았는데 그래서 그런 건지. 하진의 표정이 썩 좋지 않은 것으로 봐선 자신이 예민한 건 아닌 것 같다고, 승연은 무심코 생각한다. 어느 방향이든 간에 하진이 개선해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아서일까, 유리와 도영도 맛이 없다는 듯 몇 번 인상을 찌푸리다가도 곧 평상시와 다를 것 없는 표정으로 말없이 음식물을 넘겼다. 그나마 함께 나온 빵은 씹는 맛 정도는 나서 다행이었다. 다행인 게 맞나, 승연은 무심코 생각한다.

“어, 저기…….”

불편하다면 불편한 침묵을 깬 사람은 도영이었다. 도영의 목소리에 유리와 승연이 고개를 들어 도영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침 배식 시간에 맞춰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본래 한둘은 아니긴 하고, 리더 역시 그 중에선 예외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평소처럼 늦게 나오고 있었으며, 실은 거기까지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건만 도영이 구태여 시선을 불러 모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얼굴이 죄다 부어있는 데다 뺨에는 멍까지 들어있는 꼴이 빈말로라도 멀쩡하다고 얘기해줄 수는 없는 꼴이었던 탓이다. 세 사람의 시선이 짠 듯이 하진의 뺨으로, 눈으로, 낯으로 향했다. 그럼 그 미친개가? 와닿는 시선엔 하진이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맞아서 친 거다.”

“그렇다고 사람 얼굴을…….”

“아니, 여기 봐……. 진짜 나도 맞았다니까.”

승연의 질책에 정말 억울하다는 듯 입을 연 하진이 상의를 들어 배를 내보였다. 정말 비명이라도 지를 뻔했다만 다른 두 사람은 이런 게 익숙한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하진의 배를 바라보고 있기에 승연도 한숨을 삼키며 하진의 배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잘 잡힌 근육……. 이런 거 보지 말고. 제 뺨을 톡톡 두드린 승연이 다시 그의 배로 시선을 옮기다, 꽤 크게 남아있는 멍 자국 여럿을 시선에 담자마자 눈을 꾹 감았다. 하진의 옆에 앉은 유리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그의 멍 자국 위로 손을 뻗더니 지그시 내리눌렀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멍인 것은 확실한지 하진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도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발로 차였어요? 그, 이 정도면 주먹 가지고는 안 되지 않나 싶어서…….”

“어. ……물론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람 때린 게 잘한 짓은 아니지만, 걔는 정말 겁주지 않으면 더 난리 칠 것 같아서. 그래도 가급적 말로 풀겠습니다, 앞으로 싸울 일 생기면.”

덧붙인 말이 누구를 의식하고 건넨 말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승연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친 거 보니까 저 정도는 맞아도 되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렇다고 사람을 때리는 게 올바른 일은 아닌 것 같긴 한데. 승연이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찰나, 하진의 몸에서 손을 뗀 유리가 이번에는 하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얼굴은 얼마나 다치셨어요? 우리 팀장님 얼굴 빼면 뜯어먹을 거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뭘 보려고 해……. 안 다쳤어, 별로. ……그나저나 욕을 할 거면 욕을 하고 칭찬을 할 거면 칭찬만 해라.”

……이 기분은 또 뭐지? 거즈를 떼어야 하니 마니 윗옷을 죄다 벗겨놓고 확인해야 하니 뭐니 떠드는 도영과 유리, 그리고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며 곤란해하면서도 실없는 웃음을 짓는 하진을 보니 또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와 승연은 세 사람을 빤히 바라보다 충동적으로 말했다.

“보여줘요, 얼마나 다쳤는지.”

두 사람 말도 안 들은 사람이 내 말이라고 듣겠냐마는. 반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말한 건데도, 하진은 승연의 말에 조금 눈치를 살피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밴드가 붙은 방향으로 손을 올렸다. 진짜 보여준다고? 당황한 낯으로 승연과 하진을 번갈아 보던 유리와 도영도, 곧이어 드러난 하진의 낯 위로 생긴 상처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상처를 보려 애썼던 승연 또한 마찬가지다. 깊이는 아주 깊지 않았으므로 흉터가 남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턱 부근부터 광대뼈까지 남은 긁힌 자국은 도저히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본래도 흉터가 있다마는, 흉터가 있던 방향과는 반대인 것이 되려 눈에 띄는 꼴이다. 게다가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도 못한 건지 피는 여전히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고……. 하진의 뺨을 들여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유리가 튀어 나가려는 것을, 타이밍 좋게 일어난 도영이 간신히 끌어안아 말리고선 비명이라도 지르듯 소리쳤다.

“아니,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칼에 베이신 거잖아요!!”

“그걸 아는데 안 놔?!”

“못 놔요!! 저만한 놈한테도 칼 들고 설칠 놈인데 누나가 가면 더하지 덜 하겠냐고!!”

정말 선하게 해석하자면 뺨을 내리치다 반지에 긁힌 게 아닐까 추측했겠지만, 리더가 반지를 끼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여기 있는 모두가 다 알고 있다. 게다가 응급처치를 하고도 여즉 다 아물지 않은 상처. 저 정도라면 도저히 칼 외의 다른 흉기가 원인이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그건 지나치리만큼 낙관적이고 철없는 기대에 가까울 테다……. 제정신인가? 의례적으로 따라붙을 법한 비난도 그를 공격한 사람에게는 찬사로 들릴 것을 안다. 그럼에도 그 말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제정신인 누가 대체 이런 짓을 하겠는가. 승연은 여전히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하진의 상처 위를 쓸었다. 눈을 옮겨 손이 닿는 위치를 가늠한 하진이 괜찮다는 듯 작게 웃었다.

“잘 가리고 다니고 벌어지지 않게 조심하면 흉은 안 진대.”

“많이 아팠죠…….”

“별로. 하하, 자는 의료진 깨워서 바로 처치한 덕에 아프지도 않고 크게 덧날 일도 없을 것 같아. 걱정 안 해도 돼요. ……유리 너도 앉아, 저건 죽여도 내가 죽여.”

이 양반은 뭘 해도 아프다는 소리를 하는 법이 없다며 투덜댄 유리와 팀장님 말하는 것만 듣고 있으면 틀린 말도 아니라며 유리를 두둔하는 도영이 자리에 앉는 것을 보아도 승연은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 좀비에게 물려 좀비 바이러스가 발현되기 전, 보균자 상태로 돌아다니는 것도 여즉 익숙하지 않았고 좀비에게 물려 완벽하게 감염된 사람이 좀비의 모습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까지도 익숙하지 않았는데 좀비도 아니고 인간의 공격으로 다친 낯을 마주하는 것이 그에게 마냥 괜찮을 리는 당연히 없었다. 그런 승연의 마음을 안다는 듯, 그의 손을 가볍게 떼어내고 거즈로 상처를 덮은 하진이 승연의 뺨을 두어 번 두드리며 눈을 접어 웃었다. 괜찮다는 뜻인지, 별일 아니니 괜찮아해도 된다는 뜻인지. 어떤 의미인지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으나 눈앞의 하진이 그저 웃고 있었으므로 승연 또한 어정쩡하게 웃었다. 그러지 않으면 울기라도 할 것 같았다, 꼴사나운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 되었든 식사는 마저 하자, 또 할 거 해야지. 하진이 흘린 목소리에 세 사람은 억지로 몸을 돌려 입안에 보급된 음식을 밀어 넣었다. 그러기도 잠깐이다. 옆에 식판을 팽개치듯 내려두는 소리에 승연은 크게 움찔거렸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아니나 다를까 그놈의 리더가 서 있었다.

“사람 면상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밥이…….”

“거기서 더 말하면 어제 네가 휘두른 거 그대로 네 눈에 꽂을 거니까 생각 잘해라.”

“…….”

“애들 튀어 나가려는 거 막아줘, 상처 난 거 다 가리고 나와줘, 입도 닫아줘. 난 이만하면 너 충분히 배려해 줬다. 그럼 시비는 걸지 말아야지, 지혁아.”

보아하니, 겉보기에 크게 다친 사람은 하진이 아닌 자신이니 다른 사람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진에 대한 여론도 조작할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하진의 성격상 자신이 다친 곳을 쉽게 드러내지도 않을 것이고, 그 사유가 리더에 대한 배려면 더더욱 그럴 것이며, 여론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스스로를 이용할 사람은 정말로 아닌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진이 강경하게 자신의 도덕적 결백을 주장하는 유형의 사람은 확실히 아니었으니 평소 같았으면 먹혀들 수도 있었을 핑계일 텐데, 시선이 죄다 모여든 찰나 하진이 뺨에 댄 거즈를 다시 떼어내자 리더를 비롯한 이쪽을 바라보던 시선이 죄다 경악으로 물들었다. 의료용 가운을 입은 쉘터 사람 하나가 급하게 의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갈 즈음 하진이 묵묵히 닭가슴살을 포크로 집으며 입을 열었다.

“나 정말로 조용히 넘기고 싶다. 막을 수 있는 걸 처맞고 칼에 그인 것도 내 딴에는 쪽팔린 일이라…….”

“거즈 떼지 마시라고 했잖아요!!!!”

벼락같이 들려온 외침에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아까야 유리와 도영이 난리를 치는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시선이 그렇게까지 모이지도 않았고 승연이 몸으로 가려주기까지 했던 덕에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주변 다 트인 상황에서 하진이 보란 듯이 거즈를 뗀 상황이긴 했으니 이제야 의료진의 눈에 띈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까 전 의무실로 뛰어 들어갔던 이가 구급상자를 열고 하진의 상처 위로 약을 발랐다. 여전히 면봉에 옅게 피가 묻어나오는 것을 보자 모두의 시선이 리더의 낯에 꽂혔지만, 하진은 그런 것은 하등 상관없다는 것처럼 아픈 기색 하나 없이 마저 입을 열었다.

“……몇 대 패고 넘겨주려고 했는데 왜 긁어 부스럼이야.”

“거즈 떼지 말라니까 왜 뗐냐고요! 이거 처음 뗀 것도 아니죠! 밴드 접착력 봐!!”

“나 말 좀…….”

“하지 마세요! 그렇게 옅게 베인 거 아니라고요! 흉 안 지고 넘어가야 할 거 아니에요! 말 좀 들어요! 좀!!”

그 말엔 괜히 승연이 숙연해졌다. 그래서 안 떼려고 하셨던 거구나……. 그렇다고 말씀을 하시지. 타이르는 말과 혼을 내려 고함치는 소리가 정신없이 섞이니 아무리 봐도 식사를 할 판은 아니고, 도리어 구경거리 하나 제대로 눈에 담는 것이 즐거운 판이 되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유리가 급하게 시선을 여러 방향으로 돌리다 그대로 눈을 내리깔았다. 애당초 하진의 의도가 이것이었던 셈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을 어떻게든 끌고 가려는 리더의 의도를 부수고, 일부러 상처에 대해 아는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어 그보다는 자신이 더 심각한 환자임을 어필하고, 그 원인이 전부 리더에게 있다고 고발하기 위해서. 리더가 옆으로 다가오자마자 그 모든 계산을 끝내고 한 행동인 것이다. 시간을 내어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일은 여러모로 피곤한 일일 테고, 보급이 시작될 즈음에는 모두 지쳐 남들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으니 대부분의 쉘터 인원이 모이는 시간, 그리고 꼭 밥을 먹지 않더라도 다들 깨어 쉘터에서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하는 오전 시간을 이용한 것이겠지. 그 순간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니. 유리는 문득 내부 정치는 여러모로 피곤한 일이라 종종 되뇌던 하진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피로를 느낀다는 말은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어쩌면 그 일에서 더는 흥미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익숙하다는 의미…….

“거즈 또 뗐다가 걸리면 흉지지 말라고 바르는 약 안 드려요.”

“제가 애도 아니고 말입니다…….”

투덜대는 목소리, 그리고 그와 다르게 웃음 번진 얼굴. 한참 씩씩거리다 하진의 등을 가볍게 내리치고 구급상자를 정리하는 손끝을 바라보는 시선들. 그 모든 모습이 하진이 쉘터 생활에서 얼마나 존재감 있는 사람인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긴장감 넘치던 분위기는 어느새 간데없고 이제는 그저 가족이 가족을 걱정하는 것만 같은 분위기로 흘러갔으니, 그 평화를 깨부수려는 리더가 되려 이방인처럼 보일 정도였다. 새로 댄 거즈를 잠시 매만지던 하진은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 멈춘 리더를 바라보며 무성의하게 이야기했다.

“지혁아, 웃어줄 때 웃을 수 있는 일로 넘기자.”

넘겨줄 테니 저리 꺼져라. 그런 의미가 담긴 말치고는 제법 다정하게 들려온 목소리였으나 그렇다고 그 의미가 바뀔 리는 없는 법이다. 리더는 어느새 자신의 근처로 와닿는 시선들의 온도가 한참은 식었음을 느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당장은 고집을 부리며 누군가를 깎아내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으므로 물러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식은 시선으로 리더를 바라보던 하진이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곧바로 도망치듯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진이 남은 닭가슴살을 마저 입에 밀어 넣고 식판을 잡았다. 아예 일어나시려는 건가, 승연은 문득 생각했으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기서 가장 바쁜 사람은 하진이었으므로 그것이 이상한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조금 바빠서 오늘은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아,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렇게 하진이 먹은 자리를 정리하고 쉘터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니 어수선했던 분위기도 어느덧 가라앉아 평온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승연은 그제야 남은 밥을 묵묵히 넘기며 고민에 빠졌다. 오늘은 일단, 지난밤 하진이 말했던 것처럼 자신이 오기 전 쉘터의 분위기는 어땠을지 물어보고 다닐 심산이었다. 물어볼 만한 상대는 당연히……. 승연은 눈을 들어 여전히 앞에 앉은 도영과 유리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이 둘이 건네준 이야기 속에도 과거의 분위기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있긴 했다. 현재의 리더가 리더직에 선출되고 나서 급격하게 분위기가 나빠졌다고 했던가, 그 무렵의 일을 물어보면 적당한 단서가 되지 않을까. 승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 끝이 조금은 떨렸던 것 같다면 스스로의 착각일까.

“지혁……. 씨랬나요? 지금 리더요. 그 사람이 리더직으로 선출되고 나서 분위기가 나빠졌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 질문에 유리와 도영이 시선을 돌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바라본 승연은 심약한 사람이었던 데다가, 사람 간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질 낮은 권모술수가 익숙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기에 구태여 말을 해줘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한 탓이다. 게다가 도영이 보는 승연은 여전히 쉘터 내의 동료보다는 나쁜 주제는 그다지 들려주고 싶지 않은 동경의 대상에 가까웠고, 하진이 알게 모르게-자신이 이렇게 느낄 정도라면 쉘터의 다른 사람은 유리가 아니고서야 아예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고 도영은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편애하고 있는 승연이 이 쉘터에 정을 떼게 된다면 자신의 처지가 조금은 곤란해질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했기 때문에 더더욱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하진은 꽤 자비로운 동료였으나, 그와 동시에 치명적인 실수에는 냉정해지는 사람이었으니까. 도영이 한참 입만 뻐끔댈 즈음 유리가 한숨을 내뱉고 입을 열었다.

“그때는 쟤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많았으니 가능했던 일이긴 한데, 바이러스 보균자라고 판단되는 사람을……. 팀장님이랑 우리가 자리 비웠을 때 몰래 다 쫓아냈어. 실제로 물린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유리 씨!”

도영이 놀란 낯으로 유리의 말을 막으려 했으나, 한 번 트인 유리의 입이 쉽게 다물리지는 않았다. 하진이 승연을 편애한다는 것을 하진과 남매처럼 지내고 있던 유리가 모를 리는 없었다. 그런 승연이 싫은 것도 아니었고, 이 와중에도 눈에 어느 정도 보이는 애정을 퍼붓는…….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자신뿐일 테고, 몇 명 더 있다 해도 도영 정도가 전부일 것이라는 사실을 유리는 의심치 않았다. 하진이 속을 내보이는 사람이 아닌 것은 차치하고 그가 사람 대 사람으로 어떤 사람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이가 대부분일 쉘터에서 그의 애정을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일 테니까. 어쨌든, 그렇게 한 사람에게만 애정을 내비치는 하진이 특별히 아니꼬웠거나 그런 모습에 짜증이 났던 것도 아니다. 다만 승연은 이곳의 분위기가 원래 어땠고, 그에게 마냥 다정하게만 보였던 이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그에게 유난히 다정했던 사람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었는지 알 필요와 자격이, 그리고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본의 아니게 하진의 점수를 따주는 것 같기도 하고, 되려 깎아 먹는 것 같기도 하고. 허나 이것으로 깎이게 될 점수였다면 애진작 깎아놓는 편이 낫다. 하진이라는 사람의 본질을 말하는 과정이니 당연하다. 유리는 곧 놀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던 승연을, 그리고는 리더를 노려보기 시작하는 승연을 바라보아다. 저러는 거 보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도영이가 좋아하는 사람이지. 그럼 도리어 조금 불안하기도 하고……. 어찌 됐든 제가 관여할 바는 아니라 생각한 건지 유리는 어렵지 않게 말을 이었다.

“팀장님이 이상할 정도로 자리를 오래 비우기 시작한 것도, 2인 이상이 한 조가 되어서 움직이는 것이 기본이라는 규칙이 있는데도 팀장님은 혼자 돌아다니기 시작하신 것도 그때부터였어. 그때 내쫓긴 사람 중에 생존자가 있다면 찾아가서 사과해야 한다고. ……쓸데없는 짓이라고 내가 몇 번 말하긴 했는데 팀장님한테 닿지는 않은 모양이야.”

“그때 하진 씨는 왜 자리에 안 계셨어요? 애먼 사람 다 내쫓길 때…….”

탓하는 어투는 아니었고 그저 정말로 궁금하다는 어투였다. 그제야 유리를 바라보기 시작하는 승연의 눈빛을 바라보며 유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진이 그런 큰일이 터질 법한 상황에 공연히 자리를 비우지는 않을 사람이라는 믿음이 둘 사이에는 있는 모양이다. 그건 다행일까. 그렇게 생각한 유리가 한숨 가득 섞인 목소리로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래. 그게 정말로 중요한 일이다. 리더가 신임을 잃게 된 이유, 도리어 하진이 이 쉘터에서 더 믿음직한 사람으로 정의된 사유.

“……우리 사이에서 그분 장례는 치르고 묻어드리자고 했거든.”

“그건 당연히 해드려야죠…….”

“그래서 약식으로 장례 치르고, 팀장님이랑 우리가 시신 운반해서 근처에 묻어드리려고 나갔던 때였거든.”

하진이 그런 역할을 한 것 자체가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달가운 이야기는 아니다만 쉘터에서 타인의 죽음에 가장 익숙할 사람은 하진을 비롯한 경찰들이었을 것이고, 그들이 한때 경찰이었던 이의 마지막을 함께하는 것은 경찰의 마지막으로는 영예로운 일이 아니겠나. 하지만 이 경우라면 말이 조금 달랐다. 떠나간 경찰에 대한 예우를 지키려 자리를 비웠을 때, 떠난 경찰의 아들이라는 신분 하나로 새로운 리더 자리에 오른 그가 쉘터 운영에는 손 한번 댄 적이 없었으면서도 일방적으로 쉘터의 사람들을 내쫓은 일이 아닌가. 그것은 그저 추모를 위한 마음과 성의를 이용하기 위해 내세운 핑계였다. 유리의 이야기를 곱씹던 승연이 곧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전 리더분이 지금 리더 아버지 아니셨어요?”

분명히 그렇게 들었는데. 승연이 의아하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자, 내내 안절부절못하던 도영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래, 승연이 생각이 맞아…. 자기 아버지 시신은 남 손에 맡겨놓고 수작질을 한 거예요, 안에서.”

“아니, ……아니……. 이해가 안 돼요. 보통 따라가는 척이라도 하지 않아요?”

“그게 우리한테도 부채감인 게……. 아프다고 핑계 대고 드러누운 거, 팀장님이 그래도 네 아버지 마지막은 네가 지키라고 억지로 일으키는 걸 다들 말리길래 우리도 말렸거든요.”

이야기를 듣자 하니, 당시에는 리더를 불쌍하게 여기는 여론이 컸던 모양이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갑자기 부모를 잃고, 아버지가 이끌던 조직을 넘겨받아 책임감에 짓눌린 젊은 남자. 주변 사람들의 동정을 사기에는 지나치리만큼 좋은 조건의 집합이었던 환경에 놓였던 사람, 김지혁. 그가 그 틈새를 파고들어 쉘터를 제멋대로 휘두르기 위한 초석을 쌓던 중이었다는 사실을 오로지 하진만이 눈치챘으나, 그런 면이 도리어 하진에게는 악재가 되었던 셈이다. 아버지를 잃은 이에게 지나치게 냉정한 것이 아니냐는 핀잔, 이해가 아주 되지 않는 것은 아니며 까닭을 논하라면 평생 곁에서 머물던 사람이 떠난 자리를 지키지 못했음은 추후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될 수 있으므로, 그것마저도 하진 나름의 배려였을 것이라는 이해. 동행할 수 있으나 그때에만은 상반되는 의견을 첨예하게 나눌 즈음 한쪽의 의견이 힘을 얻기 시작했고, 기어코 죽은 경찰의 시신을 실은 차가 떠났다. 그러므로 직전까지 고통을 호소하며 드러누워 있던 사람이 일어나 누구도 허락하지 않은 무자비를 휘두를 때도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해로부터 비롯된 갈등, 그것이 아닐 수 없었던 순간을 떠올리는 유리와 도영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못했다.

세 사람이 죽은 경찰의 시신을 묻고 돌아온 순간 내쫓긴 이와 친밀했던 이들이 일제히 달려와 억울함을 호소했을 때, 멀끔한 낯으로 쉘터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했을 뿐임을 주장하는 리더에게 동조하는 이들은 실은 그리 많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승연은 숨을 내뱉었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해가 되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진을 처음 만났을 때 하진이 혼자였던 이유도, 자신의 집에 들르기 위해 무리에서 이탈하려던 하진을 다른 동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리고 직전, 먼저 식사를 마치고 홀로 쉘터 밖으로 나서는 하진을 아무도 말리지 않은 것도. 모두가 그의 생각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안고 있던, 그러나 애당초 안을 필요가 없던 죄책감을.

승연이 바라보는 하진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판단한 일이 있다면 조금 미련스러울 정도로 그 일에 매진하는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의미다. 홀로 쉘터 밖을 나서는 그가, 이상할 정도로 늦은 시간에야 방으로 들어오는 그가 지금껏 어떤 마음으로 쉘터 안팎을 오갔는지는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승연은 하진이 조금 안쓰러워졌다.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큰 사람을, 뭐든 혼자 힘으로 전부 해낼 수 있을 것처럼 구는 그 사람을 안타깝게 여길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승연은 빠르게 눈을 끔뻑였다. 그러지 않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상할 정도로 울고 싶은 기분이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여전히 리더인 거예요?”

“쉘터를 위해 필요한 결정이었다는 억지 주장에 동의한 사람이 많진 않았는데……. 그 사람들이 다 전 리더 측근이었어서 그냥 넘어갔어. 지금은 한 명도 여기 남아 있지 않지만.”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고? 그렇다면 왜?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기울인 승연은 곧 다 죽었는지 어쨌는지는 나도 모른다며 중얼댄 도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몇 번 끔뻑이다, 이제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듯 눈을 감았다 떴다. 아, 결국 그 사람은 자신을 위해 목소리를 낸 사람들까지도. 어쩌면 처음 내쫓긴 사람 중에도, 그가 몸이 아프다며 자리에 누웠을 때 편을 들어준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즈음 생각하면 리더가 정말로 역겹다고, 승연은 무심코 생각하고야 만다.

“그 이후로도 쭉 그랬어요? 아픈 사람 다 내쫓는 거요.”

“아니, 그때부턴 팀장님이 좀 손을 쓰셨어. 들어올 때 신체적인 증상이 있으면 격리했다가 일주일 후에 들여보내자고 하시기도 하셨고, ……물리면 제 발로 나가겠다고 한 사람들만 수색조에 넣었으니까. 오늘은 아니었지, 그게 문제가 된 거고.”

그 말에 승연은 가볍게 몸을 움찔였다. 자신도 탐사와 수색을 위해 하진을 따라 나간 적이 있었는데, 자신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으며 그런 말에 동의한 적 또한 없었던 탓이다. 물론 동의해야 나갈 수 있다고 한다면 동의하기야 했겠으나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으니. 역시 처음에는 거절했는데 유리 씨와 도영 씨의 제안으로 들어온 게 불만이셨던 걸까? 그게 눈엣가시여서 물리면 내쫓으려고 하셨다거나……. 그런 것치곤 되게 잘 대해주셨는데 그것도 가짜였나? 혼잡한 생각 탓에 삽시간에 굳은 승연의 표정을 바라보던 유리가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생각 하는지는 알겠다. 유리는 곧 어깨를 으쓱이다 입을 열었다.

“넌 안 물리게 하려고 애쓰시더라. 본인 장비도 다 너 입혀주고, 너 있으면 신경 쓰는 게 늘기도 하고. 그래서 우린 너 있으면 못 나갔어, 팀장님 엄청 예민해지셔가지고.”

그 말에야 승연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하긴, 다른 사람들에게는 씌워주지도 않던 보호 장비도 다 씌워주셨고. 무슨 위험할 것 같은 일 생기면 바로 달려와서 막아주시기도 했고……. 조금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하진은 제 뒷목을 매만졌다. 원래 예민해 보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랑 나갈 때 조금 더 신경을 써주신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머쓱했고 또 고마웠다. 승연은 괜히 시선을 돌려 하진이 나선 문을 바라보았다. 조금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제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돌아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주겠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해서 보고 싶다는 마음의 크기가 줄어들지는 않는 법이다.

이 정도면 유리와 도영에게 들을 수 있는 큼지막한 이야기는 다 들은 것 같았다. 승연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나 의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굳이 의무실로 걸음을 옮긴 까닭이라면, 그 사람이 쉘터가 처음 세워질 때부터 있었다고 들었던 것 같아서. 그렇다면 지금껏 있었던 일에 대해 조금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했던 탓이다. 아니, 이런 말을 기대라고 해도 되는 게 맞나. 어쨌든 문을 열어젖히자 보고서 종이에 무언가를 휘갈겨 쓰던 이가 고개를 돌려 승연을 바라보곤 곧 고개를 기울였다.

“다쳤어? 하진 씨가 별말 안 하던데.”

“아뇨, 그게 아니라…….”

어, 그런데 이 목소리 어디서 들었더라. 승연은 순간적인 잡념을 지우지 못하고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들었던 목소리였지. 아, 리더와 유진이 대립할 때 모르는 사람을 언급했던 그 사람의 목소리가 이 목소리였던 것 같다. 바로 하진 씨 이름이 나올 정도면 친한 사이인가, 그렇다면 그건 애당초 하진을 두둔하기 위해 했던 말일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 생각한 승연이 눈을 여러 번 끔뻑인다.

그나저나, 승연이 문득 느낀 사실이지만 하진은 쉘터 안에 있는 사람들의 건강에도 예민했다. 누가 열이 나더라, 누가 아프다고 하더라, 누가 요리하다 화상을 입었다더라, 바깥에 나가 탐색하다가 나뭇가지에 긁혔더라……. 그러니 승연의 건강에 대한 특이사항을 하진이 알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 이 상황에 하진의 이름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닌데 어쩐지 기분이 묘해졌다. 그 모든 사항을 알고 관리하는 사람이 리더가 아니라 하진이라면 리더의 존재 의의랄 것이 있긴 한가. 그리고, 자신의 이름 옆에 하진의 이름이 붙는 것은 또 언제부터 이토록 자연스러워져서 자신 또한 위화감도 느끼지 못하는 건지. 머리를 긁적이던 승연이 안으로 들어서며 의무실에 앉아있는 이의 명찰이 달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시선이썩 익숙한지 상대가 입을 열었다.

“보람이요~ 이보람.”

“아, 네! 죄송해요, 보람 씨. 여기 잘 안 왔더니 성함을 여쭤볼 일이 없어서…….”

“괜찮아, 내 이름은 못 외우는 편이 좋지.”

맞는 말이긴 하다. 사적으로 친하지도 않은데 의사의 얼굴이며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아픈 일이 잦다는 의미거나 혹은 기억력이 아주 좋다는 의미일 텐데, 전자건 후자건 이런 사태에서는 좋은 특성이 될 수 없는 법이다. 쓸데없는 것은 잊는 것이 나아, 무조건 많은 것을 기억하려 애쓰지 마.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승연은 보람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러니까 아파서 온 건 아닌데, 뭐라고 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승연은 자신의 얼굴을 훑어보는 보람의 시선을 바라보았다. 안 아파 보이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기울이는 보람의 표정을 보고서야 입을 연다.

“그냥 저 오기 전에 분위기가 어땠는지 좀 여쭤보고 싶어서…….”

“아, 그냥 그런 거? 그냥 개판이었지. 그거 말고 더 재밌는 얘기 해주고 싶은데, 거기 앉아있어.”

뭘 마시겠냐는 물음도 없이, 의무실에 간단히 마련된 탕비실 안으로 쏙 들어간 보람이 곧 승연의 앞에 음료를 내려두었다. 제 앞에 놓인 음료를 바라보고 여러 번 눈을 끔뻑인 승연이 보람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딸기 우유? 세상 다 무너진 와중에 딸기 우유가 왜 이렇게 자꾸 보이는 거지. 아니, 그건 둘째치고 커피도 있고 차도 있을 와중에 굳이 딸기 우유……. 그렇게 어려 보이나. 의아하다는 시선을 감추지 못하자 보람이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하진 씨가 너 오면 그거 주라고 맡기고 갔는데? 싫어해?”

“싫지는 않은데…….”

싫어하는 건 아닌데, 이 난리통에 먹고 싶다고 떼를 쓰거나 아주 좋아하는 티를 내지도 않았는데 남은 물자를 여기에 다 맡겨두었다는 것이 어쩐지 기분을 이상하게 했다. 심장 안쪽이 간지러운 느낌이라고 해야 할는지. 고마운 일이긴 하지……. 승연은 별말 없이 음료를 목 너머로 넘겼다. 이런 난리통에도 음료는 별 이상 없이 맛있기만 했다. 그저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어젯밤엔 진짜 놀랐어, 그 하진 씨가 피 뚝뚝 흘리면서 들어온 건 처음이었거든.”

“잘 다치는 편은 아니세요? 되게 위험한 일 자주 하시잖아요.”

“의외로 민첩하기도 하고 조심성도 많으셔서 다치진 않으셔. 안쪽에서는 대놓고 누구랑 싸우는 일도 없으신 분이고, 원래.”

리더와 하진의 싸움이 그간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겠으나, 적어도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싸우거나 서로에게 상해를 입힌 적은 없었다는 것이 보람의 설명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두가 다 보는 앞에서 리더가 하진에게 시비를 거는 일은 예삿일이 아니었고, 그가 가진 열등감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리더의 태도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으나 하진만은 늘 참아주었다는데 어제의 일은 특이할 정도였다는 말에 승연은 눈을 몇 번 끔뻑였다. 커피에 곁들여 먹으면 좋을 디저트를 꺼낸 보람이 말을 이었다.

“어제 자려고 누웠는데 누가 여기 문을 막 두드리길래 나가봤거든. 하진 씨인 거야.”

“…….”

“피 뚝뚝 떨어트리면서 이 시간에 미안한데 처치 \부탁한다더라.”

그 시간에 누군가를 찾아간다는 것이 무례인 줄을 알면서도 부탁하는 사람이 아닌데, 하진이 답지 않은 용기를 이런 곳에 썼나 보다. 거기까지 생각한 승연은 애써 입을 열었다.

“많이 놀라셨겠어요…….”

“당연하지! 깜짝 놀라서 바로 앉혔는데 다른 손에 누굴 끌고 왔더라고. 보니까 리더는 기절해있고.”

리더까지 깨워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감염자들을 내보내는 것을 유예하기로 한 결정 때문에 부딪혔던 모양이었다. 하진은 여론이 여론이니 내내 우리를 위해 봉사한 이에게 그 정도 예의는 차리길 바랐다고 주장했고, 당장 내일 변해서 쉘터가 난장판이 되면 그 책임은 네가 질 거냐는 대꾸로 리더가 응수했다고 했다. 감염자들은 대개 물린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부터 발열이 생기며 그 일주일의 유예가 있는 동안은 타인에게 바이러스를 옮기는 법이 없지 않냐는 보람의 이야기에 하진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리더는 자신이 쉘터의 안전을 총괄하는 사람인데 더 조심하려 하는 것이 뭐가 이상하냐며 윽박지르곤 약을 뺏어 들고 자신의 방으로 도망치듯 떠났다고, 보람이 말했다.

그리고 자리에 남은 하진과 한참이나 리더가 떠난 자리를 응시하다 들은 말이, 진짜로 싸움이 난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저렇게까지 당장 내쫓으려 드는 이유가 따로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당장 내쫓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내내 그것을 의문으로 두던 하진이 리더에게 나간 이들 중 너만 멀쩡하게 돌아온 것이 그들이 사라져야 하는 이유와 관련이 있느냐고 물었고,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더가 하진의 몸을 걷어차고 손에 집힌 칼을 휘둘렀다고 이야기했다는……. 진실이라기엔 조잡하고 만들어 낸 이야기라기엔 지나치게 신빙성 있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승연이 우유컵 위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자기 하나 살려고 함께 남은 사람들을 이용한 걸까요, 리더요.”

“솔직히 주어가 하진 씨였으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걔가 그랬다니까 그럴 수 있을 것도 같더라고.”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서 함께 나섰던 사람들은 다 내쫓고, 눈치챈 하진 씨를 죽이려다 실패한 거고요?”

“솔직히 사람이 그렇게 밑바닥일까, 싶긴 한데…….”

밑바닥이지. 새삼스러운 사실을 되짚은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 이득만 아는 이기주의자, 오로지 저 하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태도의 사람. 리더. 하진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당장 하진이 빠르게 반응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진조차 잃을 뻔한 셈이다. 리더보다도 더 제대로 리더 노릇을 해주는 사람을. 비스킷 하나를 입에 문 보람이 입을 연다.

“아무튼, 진짜 죽겠다 싶으니까 일단 패놓고 기절시켰는데 딴소리하거나 다른 사람 괴롭힐 것 같아서 일단 데려왔다고 하시더라고. 그러시는 거 치료해드렸는데, 치료받자마자 나가셔서 리더 방문 앞에서 못 나오게 지키다 사람들 나오기 시작하니까 방으로 들어가더라, 어제.”

“……그럼 두 분 다 아예 안 주무신 거예요?”

“어어, 난 이제 너 나가면 잘 거야. 하진 씨가 걱정이지. 그 사람은 또 나갔지?”

그 말을 듣자마자 승연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남은 음료를 한 번에 마시고, 의무실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그럼 그 사람은 어제 아픈데도 쉬지 않고 종일 창고 정리를 하고, 싸움 난 것도 중재하고, 새벽에 싸우고, 그걸 아침까지 감시하다가 아침에 또 싸울 뻔한 걸 수습해놓곤 쉬지도 않고 다시 나갔다고? 지금 어디 있지, 그 사람? 승연은 초조한 낯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말고 급하게 장비를 챙겨 쉘터 밖으로 뛰어나갔다. 피곤할 때 돌아다니는 것은 아무리 하진이라도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데리고 들어가야 해, 그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으나 떠올려보면 그가 알법한 공간은 너무 많았고 세상은 지나치리만큼 넓었다. 다시 들어갈까.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 바라본 쉘터는, 문득 역겹다 싶을 정도로 그대로였으며 그 모든 것이 한 명의 완벽한 희생으로 성립된 역겨움임을 승연은 이제 알았기에……. 그대로 걸음을 옮겨 쉘터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보급 시간 전에만 돌아가면 되는 게 아닌가. 그를 찾지 못한다면 조금 쉬고 가기라도 해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한 승연이 갈 곳은 당연히도, 혹은 우습게도. 제 발로 나오기를 택했던 자신의 집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그렇듯 평화롭기 짝이 없었다. 오가는 좀비가 몇 번 걸음할 법도 하고 그들의 발걸음이 한 번은 닿아 이곳에서 무리를 형성했을 법도 한데, 이 거리는 결벽적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저 깨끗하기만 했다. 그게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지긴 하였으나 어찌 되었든 승연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승연의 걸음이 그대로 집을 향한다. 그나마 쉴 수 있는 곳에 다다른다는 감각이 제법 달콤했다. 아파트 단지에 다다라서도, 아파트의 입구에 들어가는 문에도 좀비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만 보면 좀비 사태로 인해 폭격을 맞은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들이 죄다 사라진 동네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좀비 사태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다 사라진 것이 좋은 것일까, 이유도 모른 채 주변 사람들이 죄다 사라져 그들이 산 지도 죽은 지도 모른 채 고립되는 것이 좋은 것일까. 의미 없는 생각을 하던 승연이 계단을 올랐다. 이상하게도, 걸음이 예전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조금 차오른 숨을 억지로 가라앉힌 승연이 집의 문고리를 잡았다. 아, 그러고보니 잠그고 갔지. 그럼 열쇠를……. 그건 또 어디다 숨겨놨더라? 아, 저기다. 화분 아래에 숨겼던 열쇠를 집어든 승연이 바로 문을 열어 젖혔다. 오랜만에 느끼는 가벼운 철문의 느낌,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 집 안의 익숙하고도 그리웠던 공기. 당분간 혼자 수색 나간다고 하고 여기서 쉬다 갈까, 물자야 뭐 옆집 따서 옆집에 있는 거 챙겨도 되는 거고. 그렇게 생각한 승연은 챙겨입은 옷을 갈아입고 제 집 침대에 몸을 던졌다. 여기서 조금만 쉬다가, 하진 씨 계실만한 곳을 조금 둘러보는 게 좋겠다. 그때 그 마트부터 천천히 돌아보다가 나가자. 아, 근데 너무 졸려……. 중얼거리던 승연의 눈이 내려감겼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승연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 엇비슷한 것이 들리는 것 같다는 기분에 몸을 일으켰다. 이 시간에 문 두드릴 만한 사람이 누가 있겠어. 좀비가 아니고서야. 근데 이 주변에 좀비는 없었는데, 그 짧은 새에 계단을 올라올 수 있는 좀비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같고. 이상한 좀비인가? 뭐지? 아니, 그냥 잘못 들었나. 그렇게 생각하려니 다시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승연은 그제야 몸을 바로 세웠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간 승연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이렇게 두드리는 걸 보면 사람인 것 같은데, 몸을 박는 것도 아니고 정확히 노크 소리니까. 그렇다면 누가? 따라온 사람이 있나? 승연은 불안한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다 입을 연다.

“누, 누구세요?”

“……아, 계실 줄 몰랐는데. 접니다.”

그러나 의외로 들려온 것은 하진의 목소리였다. 승연은 눈을 이리저리 굴린다. 하진 씨, 하진……. 하진 씨? 하진 씨! 안 그래도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요.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 문을 여는 것이 훨씬 빨랐다. 승연이 바로 문을 열어 젖히자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급하게 열린 문에 이마를 부딪힌 듯 하진이 이마를 손으로 눌렀다.

“어, 하진……. 어어, 죄송해요!”

“아파요…….”

평소 같았으면 괜찮다고 했을 사람인데,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한 것을 보니 농담인 것 같기도 해 승연은 정말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연거푸 하다 말고 저도 모르게 크게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하진도 그런 승연의 반응을 기대했던 것처럼 승연의 얼굴을 바라보다 모처럼 소리내어 웃었다. 승연은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금은 충동적인 질문을 건넸다.

“어쩌다 오셨어요?”

그리고 이어진 잠깐의 침묵. 하진 역시 조금은 혼란스러운 눈빛이었다.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 혹은 입 바깥으로 사유를 일일이 내기에는 조심스럽다는 듯. 어느 쪽이든 당장 말하기는 힘들어 보인다는 생각에 승연은 무작정 하진을 집 안으로 이끌었다. 벌 세우는 것도 아니고 내내 세워둘 생각도 없었을뿐더러 어차피 집에 들일 거라면 조금이라도 빨리 들어오게 해 쉬게 해주고 싶었으니까. 하진이 승연을 바라본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여전히 고민하는 듯한 낯에 승연은 별다른 말 없이 하진의 곁에 앉아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말하기 힘들어요? 짧은 물음에도 하진은 답하지 않았다. 그나마 고개를 조금 젓긴 했으니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그게 다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한참 동안 고민하던 하진이 승연의 얼굴로 시선을 돌린다. 그러게, 왜 이 타이밍에 굳이 당신의 집으로 오고 싶었을까. 사실 쉴 만한 곳이 여기 말고 없는 것도 아닌데.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실은 당신을 처음 쉘터로 들이려고 할 때부터 그랬다. 까닭조차 눈치채지 못했다면 그런가보다 싶겠는데, 까닭을 아는데도 아직은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게 우습다면 우스울 일이다. 어쨌든 간에, 잘 왔네. 그런 생각을 한다. 승연의 얼굴을 오래 보고 나서야.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하진이 그제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 댈 수 있는 핑계가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냥, 좀 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요?”

“예, 그랬는데. 폐가 될 거 아는데, 그냥 여기만 생각나서…….”

더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승연은 하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런 승연의 행동에야 하진은 비로소 안심한 듯 눈을 여러 번 감았다 뜨다가, 눈을 감고 제 어깨에 있는 승연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느낌만 조금 났지 무게가 느껴지지는 않는 걸 보면 기대는 시늉이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답지 않은 어리광에 괜히 웃음이 나와 승연은 가볍게 몸을 일으키고 하진에게 손을 뻗었다. 잡고 일어나라고? 하진은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기울이다가도 승연의 손을 붙들고 일어났다. 곧 승연이 하진을 이끌고 간 곳은 자신의 방이었다. 줄곧 몸을 눕혔던 침대까지 하진을 끌고 가서야 승연은 걸음을 멈췄다. 이 덩치에 이끄는 대로 질질 끌려오는 걸 보면 정말 피곤한가, 그렇게 생각하던 승연이 말했다.

“좀 자요, 어제 한숨도 못 주무셨다고 보람 씨한테 들었어요.”

“걔는 입이 너무 가벼워……. 그렇게 폐 끼치러 온 건 아닙니다.”

“안 주무시면 제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서 그래요. 네에?”

반짝이는 눈빛에 하진은 한숨을 내쉰다. 누구 자던 곳에서 편히 자본 적이 없는데, 여기라고 썩 다를까 싶긴 했던 데다 정말로 그렇게까지 민폐를 끼치고 싶었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완고히 거절하려 했으나 승연은 그조차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침대 아래에 앉아 하진의 팔을 붙들었다. 그제야 하진은 침대에 몸을 눕혔다. 사실은 그다지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을 지도 모른다. 걸음 한 번 떼기도 힘들었던 찰나에 침대에 누우라는 유혹은 지나치리만큼 달콤하게 들렸고, 다른 곳도 아닌 승연이 내내 누워 있었던 침대보다 마음이 편할 수 있는 곳이 제게 있진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실례 좀 하겠습니다. 많이 하셔도 돼요. 농담 섞인 대화가 오간다. 승연은 별 말 없이 눈웃음을 지으며 하진을 바라보다가, 곧 하진이 가늘게 뜬 눈을 감고 나서야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렇게 보면 정말로 자는 얼굴이 순한 사람이다, 웃는 얼굴도 이러려나. 나중에는 꼭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 저도 모르게 졸음이 밀려와 승연은 입을 가리고 짧게 하품하다 벽에 붙어 자는 하진의 몸을 바라본다. 침대의 남은 부분을 가늠하던 승연이 곧 하진의 옆에 눕는다. 남자 둘 누워도 꽤 넉넉하네, 내가 이렇게 큰 침대를 샀던가. 그냥 저 사람이 옆으로 자고 있어서 그런가. 그런 것 같긴 하다……. 그나저나 그냥 오고 싶어서 오셨다니, 찾으러 갈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안심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느껴주신다는 데에 기뻐해야 하는 건지. 그런데 내가 없으면 어쩌시려고 그랬지. 앞에서 계속 기다리셨으려나. 졸음이 밀려오니 여러 잡념도 동시에 밀려들었으나, 승연은 곧 사고를 뒤덮는 수마에 몸을 맡기고 만다. 조금만 더 자자, 하진 씨도 주무시니까 나도 조금은 더 자도 되잖아. 승연은 천천히 눈을 감는다. 잠결엔가, 자신을 끌어안는 손길을 느낀 것도 같다.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승연이 조용히 숨을 고른다. 하진의 품에서.

한참이 지나고서야 머리카락이 제 이마를 간지럽히는 느낌에 승연이 눈을 떴다. 앞머리로 이마를 덮고 있으니 당연히 그럴 법도 하지만, 이런 느낌은 누군가가 만지고 있을 때나……. 문득 시선을 올린 승연이 민망하다는 듯 웃는 하진의 얼굴을 마주한다. 아, 그냥 자니까 쓰다듬어 주신 거구나. 승연은 저도 모르게 짧은 미소를 흘리며 하진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잘 잤으면 됐다는 듯, 승연의 뒷머리를 쓸던 하진이 승연의 허리로 손을 내렸다. 승연 또한 와닿는 손길을 굳이 거부하지 않자, 하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얘기들 듣고 오셨습니까.”

“들어보니까 거기 있기 싫어서…….”

이해한다는 듯 하진이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승연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다.

“하진 씨가 계속 바깥 돌아다니시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구요.”

“뭐, 그 애들이 말하는 죄책감도 아예 없는 건 아닌데……. 그냥 들어가기 싫어서 들어가는 게 가장 큽니다. 가족 보기 싫다고 집 안 들어가는 사람들 종종 있잖습니까, 그런 느낌으로.”

그게 뭐예요. 그제야 웃음을 터트린 승연이 고개를 들어 하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오전에 봤을 때보다는 표정이 좋아 보였다. 오래 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예 눈을 붙이지 못한 것과는 차이가 있을 테니까. 무엇보다 아침에는 기분이 정말 좋아 보이지 않았는걸. 승연은 무심코 손을 뻗어 왼쪽 눈을 찌를 정도로 기른 하진의 앞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런 손길도 나쁘지 않다는 듯 얌전히 받고 있던 하진의 표정을 보다가는 문득 장난기가 돌아 앞머리를 아예 이마가 보이도록 넘겨버린다. 어라, 이쪽이 이미지는 조금 더 강해보이기도 하고……. 눈이 잘 보여서 이쪽이 더 마음에 드는 것 같기도 하고. 애 대하듯 웃음기 섞인 시선으로 승연을 바라보던 하진이 승연의 콧볼에 자신의 코 끝을 맞댄다. 갑작스레 좁혀진 거리감에 승연은 적잖이 당황한 낯을 감추지 못했으나, 곧 그가 일부러 좁힌 거리감에서 불쾌감 같은 것은 일절 느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그저 웃음으로 화답했다.

“하진 씨 눈 다 잘 보이니까 훨씬 잘생기셨다…….”

“그냥 봐도 못난 얼굴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당신한테는.”

“당연히 잘생겼죠! 저 말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걸요.”

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 그냥 당신만 그렇게 느끼면 되는 건데. 그렇게 말하면 부담스러워하기라도 할까 염려되는 마음에 하진은 구태여 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어색하게 앞머리를 매만지던 하진이 승연을 흘끔 바라보았다.

“……우리 쉘터에 미용하던 애가 없어서 아쉽네. 그럼 눈 다 잘 보이게 잘라달라고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앗, 그렇지만 가려진 건 가려진 대로 섹시하달까…….”

이해하긴 어려운 말이었지만 대강 승연이 하는 말이니 맞겠지, 그렇게 생각한 하진이 성의 없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인다. 일순 가늘어진 승연의 시선이 하진의 얼굴을 바라본다. 지금 조금도 납득 못 하신 얼굴인데요, 그럴 리가요……. 아니, 진짠데. 아닐 텐데. 시답잖은 대화가 채 끝나기도 전 하진이 승연의 뒷목을 끌어안아 제 품에 고개를 묻게 했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동시에 흘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주 즐겁다는 듯이 다정하게.

“그나저나, 보람이한테 가서 들었다고요.”

“네, 왜요?”

“걔 얘기도 재밌는 거 아는데.”

남 이야기를 함부로 하는 사람이 아닌 하진인데,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할 정도면 얼마나 재미있길래. 승연은 고개를 기울인다. 잠시 눈을 굴리던 승연의 얼굴을 바라본 하진이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걔 의사 아닌데 거기 앉아있는 거다…….”

“네?! 그럼 뭐예요? 자기 이름 박힌 가운도 있었는데?!”

“비슷하긴 해, 그냥 그쪽 연구하던 연구원이었다더군요. 약대 나와서 대학원 갔다나.”

거기서도 여기서도 노예로 지내고 있으니 이만저만 곤란한 게 아닐 것 같아. 장난스러운 하진의 목소리에 승연은 눈을 여러 번 끔뻑이다, 처음 하진이 자신을 만났을 적에 쿠키를 가져가던 모습을 떠올리며 그제야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면 가져간 이유가……. 하진은 곧 승연이 생각하는 것이 맞다는 듯 손을 뻗어 승연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무슨 성분 들었는지 궁금해서 가져갔습니다, 그때.”

“그래서 무슨 성분이었대요?”

“마약성 수면제였나……. 일반적으로는 처방 안 되는 거라던데. 이런 거 어디서 구했냐고, 여기 제정신 아닌 놈 있는데 하다하다 병원까지 터냐고 한 소리 들었지.”

제정신 아닌 놈이라 하면……. 당연히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 승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하진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얼굴에 붙은 밴드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영 무거웠다. 괜찮다는 듯 자신의 등을 토닥여주는 하진의 손길을 받아도 마냥 괜찮지만은 못했다. 그런 것이 괜찮은 삶은 누구도 살아가면 안 되지 않겠는가. 조금 복잡해보이는 승연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던 하진은 그저 손을 뻗어 승연의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그렇게까지 위로가 필요한 건 아니었는데. 조금은 얼떨떨한 낯으로 올려다 본 하진은 웃고 있었다. 곧 승연의 머리카락으로 손가락을 옮겨 승연의 머리카락을, 피부를 가벼이 간지럽히던 하진이 짓궂게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자다 가자, 오늘 좀 늦게 가고 싶은 기분이다…….”

그렇게 말하고서는, 처음 실례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반복하던 하진은 어디다 버리고 온 건지 다시 눈을 감는 모습을 바라보며 승연은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하진이 이렇게 마음을 놓고 있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누구고 경계하는 사람, 그러니 누구에게든 경계의 대상인 사람. 예외라 해봤자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일 텐데, 접은 손가락 중에 가장 소중한 손가락은 제 몫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야 많이 아껴주시니까, 헷갈리면 안 되지. 그렇게 생각한 승연이 손을 뻗어 하진의 밴드 위를 다시금 가볍게 쓸어내린다. 오히려 거친 손길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자마자 몸을 가볍게 움찔이는 것을 바라보며 하진은 저도 모르게 웃어버린다. 안 그래보여선 은근히. 간지럼도 조금 타는 것 같고……. 간지럽혀볼까? 아니, 일어나시면 혼날라. 승연은 다시금 쓸데없는 생각을 머릿속에 가득 채우다 말고 몸을 일으켰다. 그나저나, 아침 먹고 한 일이라곤 내내 잠을 잔 것밖에 없는데 그런데도 슬슬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럴 테니 하진은 더더욱 그럴 테지. 승연은 걸음소리를 죽이고 주방으로 걸음을 옮긴다. 다행히도 예전에 채워둔 물자가 있어 두 사람 몫의 호화로운 식사는 무리도 아닐 것 같았다. 매일 그렇게 먹었다간 꽉꽉 채워둔 물자도 사흘 만에 동날 테지만, 매일 여기서 식사를 챙길 것도 아니지 않나. 이렇게 먹고 또 채워두면 그만이니까. 오늘은 조금 안일하게 생각하고 싶었다, 뭐가 됐든, 어떤 일이든 해결해주는 하진이 곁에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그가 안겨주는 안정이 지나치리만큼 익숙해서. 안일하게 굴어도 언제고 자신을 붙들고 바른 길로 이끌어 줄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어도 믿어 의심치 않으니까.

오래도록 요리에서 손을 떼어서……. 솔직해지자, 손재주가 워낙 없는 터라 요리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가끔 벅차다고 생각했는데, 남이 배급해주는 밥을 먹거나 즉석식품으로 식사를 때우는 일이 빈번한 나날을 몇 달 살아가다보니 요리를 위한 기본적인 센스도 죄다 사라진 모양이었다. 몇 개는 겉이 좀 탔고, 아무리 말아도 김밥은 모양이 안 잡히고, 어떤 건 덜 익고, 어떤 건……. 무언가를 더 하려던 승연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그락거렸을까, 잠에서 깼는지 하진이 방에서 나와 승연이 움직이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밥 해주려고요? 고맙네…….”

“앗, 그, 그거 보시면 안 돼요!”

하필 하진의 손이 간 곳이 뒤집어 둔 육전이었다. 그거 그쪽 전부 다 타서 따로 빼둔 건데! 뭐라 말하기도 전에 새가만 육전을 확인한 하진이 승연을 바라보았다. 승연이 간신히 하진의 시선을 피한다. 아니, 내가 태우려고 태운 것도 아니고.

“당신은……. ……웬만하면 밥상 차려주는 사람 만나요.”

“그, 그래도 해주고 싶어서……. 아, 앉아요! 밥 먹게!”

“그건 감사합니다민…….”

감사하면 그냥 조용히 하고 앉아요! 빽 소리를 지르는 승연을 보고 한참을 웃은 하진이 밥솥에서 밥을 덜어낸 공기와 수저를 먼저 놓고 식탁에 앉았다. 입이 댓발 나온 승연이 그나마 멀쩡히 살린 김밥 몇 개와 반찬거리들을 탁탁 내려놓으며 하진을 조금 째려보았다. 그러나마나 웃음 어린 얼굴로 승연을 계속 바라보던 하진이 다시금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며 숟가락을 먼저 들었다. 충분히 뜬 밥 위로 반찬을 올리더니, 곧 먹여주겠다는 듯 승연의 입가에 숟가락을 가져다 댄다.

“제가 한 밥으로 생색내시는 거예요?”

“아냐, 아냐. 미안해. 좀 먹어. 귀여워서 놀렸어.”

짜증나……. 진심일 수도 없는 말을 중얼거리니 더 소리 내어 웃는 하진을 보던 승연이 식탁 아래에서 발을 움직여 하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제야 아프다는 듯 몸을 조금 웅크리는 하진을 바라보던 승연의 표정이 의기양양해진다.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던 하진도 그런 승연의 웃음을 보고는 네가 좋으면 됐다며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이어서는 그저 평화로웠다, 승연이 공들여 준비해 준 밥을 먹고, 하진은 뭘 입에 넣든 다 맛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그거 탔는데요, 그래도 맛있는데? 안 태우면 어떻게 할지도 궁금하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건네면서. 쉘터에서 식사를 할 때는 그렇게까지 많이 먹는 사람 같지도 않았는데, 하진은 기어코 승연이 준비해 준 식사를 깔끔히 해치우고는 설거지까지 마쳤다. 간만에 편안해 보이는 얼굴의 하진을 바라보던 승연이 그제야 뿌듯하다는 듯 웃었다.

“밥 잘 안 드시는 줄 알았는데 되게 잘 드시네요.”

“기초대사량 채워야 하니까…….”

“……평소에는요?”

“쉘터 밥은 내가 욕심내서 먹으면 안 되니까. 나가서 대충 칼로리 채울 수 있는 것 위주로 주워 먹습니다, 에너지바 같은 거.”

아, 그냥 그런 이유……. 지금 되게, 뭐랄까, 헬스장에만 박혀있을 법한 사람의 말이 들렸던 것도 같은데. 안 채우면 무슨 일이 일어나죠? 근손실이 오지. 두 사람은 장난스러운 대화를 나누며 소파에 기대 앉았다. 그런 농담이나 오갈 수 있는 상황만 오래 이어질 수 있다면 하루 정도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 슬슬 해가 지기 시작할 시간이었다. 통행금지 시간이 가까워진다는 의미였다. 그럼 쉘터로 돌아가야지, 아, 진짜 가기 싫어. 그렇게 칭얼거리려던 승연은 문득 자신의 손을 가볍게 붙잡아오는 하진의 손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래, 그렇지. 지금은 이 사람이 곁에 있으니까.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마냥 불쾌해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승연은 일어났다. 하진의 손을 깍지 껴 붙든 채로. 곧 집 바깥으로 나서던 승연이 하진을 향해 몸을 돌려 말했다.

“하진 씨, 저 여기 화분 밑에 열쇠 숨겨두니까요. 혹시라도 또 도망치고 싶으시면 여기로 오세요.”

“……그래도 됩니까?”

“네, 제 아지트 공유해드리는 거예요. 대신 하진 씨도 그런 거 생기면 알려주시기예요!”

의아한 표정의 하진과 달리 승연은 웃는 얼굴이었다. 그런 게 생기면 꼭 알려주세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새끼손가락을 내밀던 승연의 모습을 하진은 오래 바라보았다. 아지트라. 좋은 단어다. 그와 동시에, 입 바깥으로 채 내지 못하고 삼켰던 어떤 말을 이제야 고해한다는 듯 하진은 천천히 손가락을 걸며 말했다.

“사실 준비하던 게 있긴 한데, 거긴 아마 조만간 남이랑 공유할 일이 생길 거라.”

“유리 씨랑 도영 씨요?”

하진은 무언가를 고민하듯 눈을 굴렸다. 그 애들에게 먼저 공유하긴 해야겠다, 그걸 생각을 못 했네.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 속에는 분명 거기에 들일 사람이 따로 있긴 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을 테지만, 승연은 구태여 그가 삼킨 말 속으로 파고들지 않았다. 할 만한 말이라면 분명히 제게 건네주었을 것이다. 우리 사이에 그 정도 신뢰는 있으니까, 이제. 찰나의 공백 끝에 하진이 입을 연다.

“응, 아마도. 그러니까……, 거기 말고. 당신만이 쉴 수 있는 아지트를 만들게 되면, 그땐 꼭 공유하겠습니다.”

거긴 이제 사람들 몰리면 시끄러울 테니까. 윤도영 입이 가볍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는 하진의 얼굴은, 오롯이 승연을 걱정하는 낯이었던 탓에 승연 역시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걱정이 참 많으시네, 특히 도영 씨와 관련되어 있으면 더 걱정을 많이 하시는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함께 내려가는 계단도, 함께 돌아간 쉘터도 예전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심호흡을 하고 들어간 쉘터 안도 승연이 나가기 전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다만 도영과 유리만이 계속 쉘터 앞을 지키고 서 있었는데, 승연의 얼굴을 보자마자 유리가 승연에게로 달려들어 승연을 꼭 끌어안았다는 것만이 달랐다.

“어디 갔었어요! 사라진 줄 알고 우리가 얼마나 찾았는데!”

“아, 죄송해요. 하진 씨 찾으러…….”

“그 양반이야 어딜 가든 멀쩡히 돌아오지!!”

“그래, 멀쩡히 들어왔으니까 떨어져라. 길 막지 말고.”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유리를 밀어낸 하진이 그제야 개운하다는 낯으로 승연을 바라보다가, 함께 안으로 들어가자는 듯 손을 뻗었다. 둘이 저러는 게 뭐, 한두 번 있던 일인가, 그렇게 생각한 유리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도영을 끌고 안으로 들어갈 즈음, 승연이 그 손을 붙든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를 찾듯 내내 입구 방향만 기웃거리고 있던 보람이 하진과 승연에게 다가와 심각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오셨어요, 하진 씨.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급한가?”

“이번에 물리신 분 얘기예요, 그동안 봐온 감염자들이랑 조금 다른 데가 있어서…….”

목소리를 최대한 낮춘 보람과 하진이 조용히 나누는 이야기였지만, 그렇다 해서 바로 곁에 있는 승연이 듣지 못했을 리는 없다. 승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람과 하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다른 감염자와 다른 점이 있다는 사실을 리더가 알게 되면, 그들은 분명히 쫓겨날 것이다. 지금, 우리 말고 듣는 다른 사람 있나? 다행히도 주변에는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승연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묘하게 인상을 구긴 하진이 몸을 숙여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말고 아는 사람은.”

“아직 없어요, 안에서 마저 얘기할까요?”

“여기서 얘기해, 문 근처에 김지혁 친구들 붙으면 피곤해진다.”

“그래도…….”

여기도 사방이 뚫려 있어서 위험하고, 방 안은 또 나름대로 방음이 되지 않아 여러모로 곤란했다. 어느 방향이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잠시, 하진은 곧 맞춰주겠다는 듯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맞춰줄 거면서요. 투덜대는 듯한 보람의 말은 오래 듣지 않고, 하진은 승연과 함께 먼저 의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 아무 사람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보람이 따라서 안으로 들어왔다. 곧 목소리를 낮춘 보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래 좀비 바이러스 감염 증상이 뭐죠?”

“감염 이후로 미열 지속, 일주일이 지나면 24시간 고열 발생, 그리고 24시간 의식 회복. 그 후 6시간 가사 상태, 깨어나면 좀비가 되지.”

“그거 말고는요?”

“……사흘 차에 촉각 개념 상실? 다만 24시간 의식을 회복할 때는 촉각이 돌아와서 다 나은 상태와 구분이 안 될 정도고.”

일전에 하진에게 들어보았던 말이었으니 승연도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뒷말은 처음 듣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몇 번이고 가르쳐준 것을 굳이 잊었을 리도 없고 잊으려 노력하지도 않았으니 자연스럽게 기억하게 된 것인데, 거기에 무슨 변수가 생길 수 있단 말인가. 승연이 의아하다는 듯 보람을 바라보자, 보람은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낯으로 고개를 떨구다 곧 반짝, 고개를 든 채 하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린 게 어제가 맞죠.”

“그래, 오늘이 이틀 차.”

“다른 분들은 패닉이 너무 심하신 터라 협조를 안 해주셔서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는데요, 유진 씨가 오늘 촉각 기능을 잃었어요.”

이틀 차, 촉각 기능의 상실. 이전에 없던 유형. 하루 정도의 차이가 뭐가 그리 큰 문제겠느냐 싶겠지마는 모든 사람에게 일괄되게 나타나던 증상이 단 한 무리에서만 다른 양상을 보였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특히, 당장 사람 생명이 걸려 있을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서는 더더욱. 심각한 표정을 짓는 하진을 바라보며 승연 역시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보람 역시 썩 개의치 않다는 낯으로, 정확히는 동료를 향해 이 이상으로 모질어지고 싶지는 않다는 낯으로 고개를 숙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가능성을 유추해볼 수 있죠.”

“변종 바이러스…….”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목소리에 승연은 무심코 제 입을 틀어막았지만, 그렇다 해서 그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 말에 부정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없었다. 변종 바이러스. 바이러스 감염의 새로운 양상을 고려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것보다 더 긍정적인 해석을 할 수 있나? 아니, 안 되는 것 같은데. 승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곧 심각한 표정을 갈무리한 하진이 보람의 낯을 바라보다 말고 손을 뻗어 보람의 이마를 짚었다. 고개를 잠시 기울인 하진이 똑같이 승연의 손을 이마로 짚는다. 두 이마 모두 제법 따뜻하기만 했다.

“이봐요, 그쪽 손으로는 온도 못 잰다고. 손도 찬 사람이.”

“승연이랑 비슷한데. 열은 없네.”

“옮을 거 걱정했죠? 나부터 먼저 확인했어요, 일단 당분간은 다른 사람이랑 접촉 안 할 거긴 한데.”

하진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곧 승연의 손을 조심히 잡고 제 뒤까지 끌고 왔다. 황당하다는 듯 하진을 바라본 보람이 입을 연다.

“아니, 내가 애 잡아먹을까 봐?”

“옮겼다간 뒤져, 진짜.”

“그럴 것 같았으면 안 불렀거든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 보람을 바라보던 승연이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일단 하진은 다른 감염자들과 유진 사이에 뚜렷한 차이점이 있는지를 조사하고, 자신이 잘 달래볼 테니 다른 사람들의 상태도 조사해달라는 말을 남기며 몸을 일으켰다. 급하게 걸음을 옮기는 것 같기도 했던 것이, 승연은 하진이 정말로 제 걱정을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했다.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것은 불쾌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때로는 그것만으로도 완전해지는 설명이 있기 마련이다. 곧 하진은 다른 사람들을 잘 달래보겠다던 말 그대로 격리실로 걸음을 옮겼다. 격리실로 향하기 전 승연이 옮을까 두렵다는 말을 몇 차례고 건넨 탓에, 승연은 차마 그 뒤를 따르겠다고 고집할 수는 없었다. 다만 제게로 다가오는 도영과 유리를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올 것만 같은 눈빛들이었기에 승연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잠시 정리하기로 한다. 그냥 근처에 있는 집 들어가서 같이 쉬고 왔다고 할까? 하진이 쉬었다는 말을 믿을지도 모르겠다. 도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진은 무리가 퍼스널 컬러인 사람이었으니까……. 승연은 고개를 가볍게 젓고 어느새 제 곁으로 다가온 도영과 유리를 바라보았다. 뭐라 입술을 달싹이던 도영이 곧 승연의 등을 가볍게 두드린다. 어라, 이건 생각 못 했는데. 유리 역시 다가가 승연을 꼭 안아주었다. 뭐, 뭐지. 갑자기 왜 그러지? 눈을 몇 번 끔뻑이던 승연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일 있었어요?”

“그냥 팀장님 찾아와준 게 고마워서…….”

아, 그렇구나. 물론 쉘터 사람 모두가 하진에게 일정 정도 이상의 빚을 지고 있었지만, 도영과 유리의 경우에는 특별했다. 애당초 쉘터에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좀비 무리 사이에서 두 사람을 구해준 하진 덕분이었고 어쩌면 여전히 지금처럼 살아갈 수 있는 것도 하진 덕분이라고 두 사람은 생각할 법도 했으니까. 하진이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구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리더와 크게 싸우자마자 할 일이 있다고 쉘터를 나간 일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그게 아무리 하진의 일과이며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아마 두 사람도 보람을 통해 하진이 잠조차 제대로 자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었을 테니 그런 상황에서는 부상 또한 염려되었을 것이고. 불안했구나, 입구에서 말은 그렇게 했어도. 승연은 말없이 팔을 뻗어 유리와 도영을 동시에 끌어안았다. 잠깐이지만 흐느낌이 들렸다. 승연은 구태여 울음의 주인을 찾지 않았다. 그렇지, 하진이 너무 멀쩡해 보여서, 하진과 함께 있는 이들이 너무 밝아 보여서 잠시 잊었던 것이 있었다. 그래. 다들 괜찮지만은 않겠지, 나처럼.

우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저 역시 눈물이 나올 것도 같았지만 그렇다고 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잠시 격양되었던 호흡이 가라앉는다. 그와 동시에 세 사람의 호흡이 동시에 잦아든다. 모든 감정이 가라앉았다는 듯,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가를 훔친 세 명은 고개를 들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즈음, 격리실에 들어갔던 하진이 격리실에서 나오자마자 의무실로 향했다. 설득하는 데에 성공하신 모양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승연의 모습과, 유난히 조심스러운 보람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던 유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안에 무슨 일 있나, 승연이가 너무 대놓고 안심하는데. 보람 씨도 조금 이상하고. 원래 저렇게까지 심각하게 행동하지는 않는 분인데……. 그에 비해 하진은 또 원래 모습 그대로라, 영 확신이 드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만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자신이 이렇게 이상함을 눈치챘을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 또한 그럴 것이라는 사실 정도. 유리는 무심코 생각한다. 오늘 돌아오시면 팀장님한테 따로 말씀드려야겠다, 무슨 일 있으면 더 숨기셔야 할 것 같다고.

그 후로 세 사람은 짜기라도 한 듯이, 보람과 하진이 다시 들어간 격리실의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런 것도 있고,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던 마음도 있고. 삼십 분을 그렇게 문만 바라보고 있으니 보람이 먼저 자리에서 빠져 나왔고, 십 분이 더 지나고 나서야 하진이 문 바깥으로 나왔다. 시선을 잠시 내린 하진이 모여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고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바보들, 모여서 뭐 하냐. 입 바깥으로 내뱉을 뻔한 말은 대강 삼키고-하지 못할 까닭이 없기는 하였는데, 승연을 바보 취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가선 하진이 승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곧 아까 전 운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는지 다시 눈시울을 붉힌 도영이 하진에게 다가가 팔을 뻗었다.

“안아주세요…….”

“사내 새끼가 징그럽게 뭐라는 거야. 유리 너도 팔 내려라. 가족끼리 왜 이래.”

팔까지 뻗으며 다가갔던 도영도, 그 뒤에서 슬쩍 팔을 벌리던 유리도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보고 있으니까 진짜 웃기고 귀엽긴 한데, 안는 거 싫어하시는 건가? 그런 것치곤 지난번에 나를 안아주셨는데. 조금 의아하다는 듯 세 사람을 바라보던 승연이 곧 징그럽다고 중얼거리며 두 사람의 이마를 밀던 하진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팔을 뻗었다.

“……저 안아주세요!”

“응? 응.”

그 말에 하진은 고민도 없이 몸을 돌려 승연을 품에 꼭 끌어안다 못해, 아예 아이를 안듯이 골반을 받치고 몸을 최대한 붙인 채로 안아 들었다. 도영과 유리의 얼굴이 일순 짜증, 그보다 더 정확하게는 질린다는 듯한 감정으로 물들었지만 두 사람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안아달라는 대로 안아주고 달래줬다면 그야말로 정말 큰일이니까. 안 하던 짓 아닌가.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댔다. 그러니 그저 그가 죽는 것은 아닌가를 염려하게 될 뻔한 것을 잘 무마해 넘겼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그건 그거고, 놀리고 싶은 것은 놀리고 싶은 것이다. 유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승연과 하진을 바라본다.

“승연이는 가족도 아니다?”

“너희랑은 좀 다른 느낌이지…….”

“하여간 가족은 아니다?”

1절만 해라. 그렇게 중얼거린 하진이 도영의 신발을 가볍게 밟았다. 아, 악, 아파요, 아파! 세게 밟지도 않았는데 오버란 오버는 다 떨어대던 도영이 곧 짓궂게 웃는다. 승연도 이 사람들은 정말 못 이기겠다는 듯 잠시 웃다가, 하진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이젠 내려가도 괜찮다는 듯 신호를 보냈다. 곧바로 바닥으로 자신을 내려주며 기울인 몸을 세게 끌어안는다. 두 발을 땅에 디디고, 오늘 하루도 고생했다고. 이런 일들이 있어도 하진 씨가 있어 힘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고. 그렇게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면이 없잖아 있으니까, 그저 이 정도로만. 주춤주춤 다가온 도영과 유리가 승연의 뒤로 향해서는 하진과 승연의 몸을 동시에 끌어안았다. 저 지금 승연이 안아주는 거예요. 말도 되지 않는 핑계에 하진은 웃는다, 어쩔 수 없겠다는 듯이.

그 이후로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보급 시간을 보냈고, 하진과 승연이 먼저 방에 들어가 함께 잠을 자기 위해 눕고. 사람 몇 갇혀있는 것을 제외하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들이 지난다. 그렇게 사흘, 일이 이렇게 되었다 해서 보급을 위한 수색을 멈출 수는 없었으므로 하진과 승연을 포함한 수색조가 쉘터 바깥으로 나간 어떤 날이었다. 혹시 모르니 도영과 유리는 남겨두고 왔다마는, 그저 별일 없겠지. 지금껏 그랬으니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얼마나 팔자 좋은 소리인지, 또 허황된 소리인지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음에도. 그날은 모처럼 얻은 물자도 많았고, 확보할 수 있는 무기도 많았다. 웬만한 물건은 다 욱여넣을 수 있던 하진의 가방은 꽉 찬지 오래였고 승연의 가방도 거의 다 채워져 갔다. 그즈음, 하진과 승연이 동시에 눈을 맞췄다. 돌아가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려고 이런 좋은 일들만 주구장창 생기는 것인지. 들어가는 게 두려워질 정도였다. 물론 돌아가지 않을 수도 없었지만.

하진이 두 사람 몫의 가방을 메고, 그러니까, 물자를 넉넉히 챙기고 돌아간 쉘터는……, 하진은 문득 과거의 조각을 떠올렸다. 한 번 나갔다 왔다고 사람이 죄다 사라졌던 날을.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두지 않으려 유리와 도영도 남겨두고 갔는데 왜 격리실 문이 열려 있는 건지. 그리고, 그 안에는 왜 유진 외의 다른 사람이 없는 건지. 쉘터 안을 한 번 둘러본 하진이 인상을 구겼다. 아직 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 승연은 급작스레 나빠진 하진의 표정에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또 머리가 아프신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 정도로 끝나는 문제였다면 좋긴 했을 테다. 하진이 돌아온 것을 확인하자마자 보람이 뛰듯 다가왔다. 어디서 온 거지? 문득 시선을 돌려 보람이 처음 있었던 위치를 가늠하던 승연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도영과 유리가 그 자리에 쓰러져 있던 탓이다. 승연은 무작정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가 그들의 상태를 확인한다. 멀쩡히 숨은 쉬는데, 정신을 전혀 차리지 못한다. 이건…….

“유리 씨랑 도영 씨가 못 일어나요, 수면제 같은 걸 먹인 것 같은데.”

“비품 정리할 때 재고 확인했는데, 진즉 다 먹었잖나. 여기 수면제가 어디,”

어디……. 있었지. 하진은 다시금 두통이 몰려오는 기분에 이마를 짚었다. 내 실책이다, 이건. 입 가벼운 윤도영의 실책이라고 봐야 할지, 그냥 내다 버리라니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구태여 보관해 둔 보람의 실책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 연구해보라고 들고 온 내 문제다. 하진은 버릇처럼 시선을 옮겨 승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 저 애가 받았던 쿠키 속에 들어있었던…….

“그러게요, 어디…….”

“……그때 내가 가져다준 쿠키에서 뺀 수면제, 지금 있나 확인해.”

“아, 미쳤나……. 안 봐도 돼요. 그거일 수밖에 없다.”

보람은 인상을 구기며 따라 승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영 차리지 못하는 도영과 유리의 손발을 가볍게 주무르며 상태를 확인하는 모습이 꽤 절박해 보여서, 그래도 이런 애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잠깐 하다가 말고 잠시 고개를 들었다. 마약성 수면제라고 들었다, 일반적인 경로로는 구할 수 없는. 먹었다간 몸이 성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그것도 분명히 들었을 테다, 김지혁, 그 정신 나간 놈이라면. 하진은 급하게 몸을 움직여 도영과 유리를 눈으로 훑었다. 겉보기에 이상한 점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부작용 뭐 있어.”

“뭐 약 부작용에 있을 법한 거 다 있고, 다행히 한 알이 다였고 두 사람한테 나눠 먹인 걸 테니까 중독 같은 게 오지는 않을 것 같은데 당분간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는 않으실 거예요.”

그 정도면 다행이었다. 물론 오한이나 발진, 또는 고열 따위의 문제가 추가로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며 그것으로 트집을 잡아 리더가 유리와 도영마저 쫓아낼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그건 일단 당장 생각할 일이 아니다. 하진은 승연이 몸을 돌리고 있는지를 한 번 확인했다가, 손을 돌려 격리실 방향을 가리켰다. 깊게 한숨을 내쉰 보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또 그 일이 일어난 것이다. 제멋대로 사람들을 바깥으로 내다 버린 일이. 유진을 남겨둔 이유는 뭘까. 그래도 유진이 개중에선 하는 일이 가장 많았고, 그러니 급하게라도 필요할 일이 있으면 불러야 하니까? 아니면, 대놓고 대립한 상대에 대한 억하심정? 어느 쪽이든 리더의 마음을 밝혀내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진은 충동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런 짓을 하고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자신과 친한 사람들과 모여 앉아 낄낄대는 목소리가 들려 바로 그쪽으로 향했다. 그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등을 눌러 밟고 노기 섞인 목소리를 기어코 흘려낸다.

“내가 내 허락 없이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하, 하하! 상전 노릇을 하시겠다? 정신 차려, 이하진. 사람 몇몇이 따라준다고 정신 놓고 있나 본데, 여기 리더는 나야. 내 쉘터라고. 우리가 정한 규칙에 맞게 사람을 내보냈을 뿐인데 이게 도대체 뭐가 문제지?”

돌아본 낯빛이 불콰하다. 낮술까지 처먹고, 작정하셨네, 아주. 상대할 가치도 없는 놈에게 이렇게까지 시간을 할애해야 하나 싶었으나 어쨌든 이것도 제가 할 일이었다. 발끝에 체중을 실은 하진이 분노를 애써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음주 금지는 조항에 없었던가?”

“내 쉘터라니까! 나는 좀 내 마음대로 해도 괜찮, 발 치워!!”

그제야 고개를 든 승연이 하진을 말리러 뛰어오다가, 잠금이 풀린 격리실을 바라보더니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더 해도 싸지, 저런 인간은. 아무리 그래도 사람한테 그러는 건 아닌가, 싶긴 했다만 저 사람이 인간도 못 되는 짓을 한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게다가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또 누군가를 내쫓았다는 건 그때 했던 결정을 여즉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증명과 다를 것이 없었으며, 그 후로 일어난 모든 일도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의미였을 테고, 또. 본인이 물려도 똑같은 취급을 받아도 된다는 의미였을 테다. 하진은 그제야 승연의 눈치를 살피듯 승연을 흘끔 바라보다가, 곧 한 발짝 물러나는 모습을 보며 짧게 안도했다. 승연도 말리지 않으니 구태여 행동을 멈출 필요가 없었다. 곧바로 등을 걷어찬 하진이 앞으로 넘어진 리더의 목가를 눌러 밟는다.

“지금 같은 행동은.”

“놔, 이 새끼야, 진짜 사람 죽이려고 작정했어?!”

“앞으로 네가 물리면 바로 내쫓아도 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누구 하나 감히 할 수 없었을 말을 내뱉은 하진이 그를 한참 내려보다 말고 승연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대로 발을 뗐다. 바로 일어나서 달려드는 꼴까지 예상했다는 듯, 어김없이 일어나 달려든 리더의 목을 쳐 기절시킨 하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면상에 가래침이라도 뱉어놔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는데, 애 보는 앞에서 그러면 안 되지. 하진이 숨을 돌릴 즈음 리더와 함께 술판을 벌이던, 분명히 사람들을 내보내는 데에 협조했을 이들이 주춤대며 몸을 뒤로 빼기 시작했다. 끌고 가, 내가 만지기도 싫으니까. 짓씹듯 내뱉은 말이 닿았는지는 구태여 확인하지 않았다. 당장 눈앞에 있는 승연이 여전히 당황해 있다는 것이 저것보다 큰 문제였으니, 하진은 별말 없이 승연에게 다가가 조용히 승연을 끌어안았다. 품에 안긴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무서웠겠지, 이렇게까지 난장판인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저 사람이 틈만 나면 이런 짓을 하고 있고, 쉘터의 사람들은 하진이 없으면 그에게 감히 반항하지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승연이 느리게 하진의 품에 고개를 묻는다. 괜찮아. 하진의 속삭임에 그제야 몸에서 힘을 풀다가, 슬쩍 시선을 들어 유리와 도영이 누운 곳을 바라보았다. 유리의 손끝이 작게 움직였다.

“어, 하진, 하진 씨. 유리 씨 일어나신 것 같아요!”

곧바로 상체를 일으킨 유리는 정신을 차리기 어렵다는 듯 눈을 여러 번 감았다 뜨다가, 앉은 자리에서도 몸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다시 그 자리에 누워버렸다. 여전히 눈만을 움직이는 것을 보면 정신이 채 들지 못한 모양이다. 곧바로 옆에서 도영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는 모양새가 유리와 똑같아 하진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저딴 게 닮아, 닮아도. 들어오자마자 몰려왔던 두통이 심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약품이 사라진 게 맞는지 잠시 보러 갔다 온 보람이 혀를 차면서 돌아오다가, 두 사람의 상태를 확인하곤 한숨을 쉬었다. 그 약이 맞다, 이제는 정말로 아닐 수가 없다……. 그래도 전후 사정 정도는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상태도 조금 더 보고 싶고.

“상태 좀 바짝 확인하고 싶은데 마법의 주문을 외워보시는 건 어때요?”

“마법의 주문이요?”

그게 뭐지? 승연이 고개를 기울이자 하진은 한숨을 쉬었다. 애들 깨울 때 하던 짓을 또 해야 한다니. 깨우는 게 맞긴 했는데 지금 같은 상황에 속아 넘어가긴 할까. 몸을 낮춘 하진이 두 사람에게 정확히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읊조린다.

“기설동에서 변사 사건 접수 들어왔다. 태림서 강력 1팀, 출동 준비.”

“흐어어…….”

“으어……. 주, 준비…….”

좀비? 승연이 생각한다. 이걸 속네, 머저리들. 하진도 생각한다.

어쨌든 비틀비틀 상체를 일으킨 두 사람은 그 이후로는 딱히 몸을 가누지 못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다행이에요, 예후는 좋겠네요. 부작용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고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는 듯 흐렸던 시선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다른 사람이 건네주는 커피를 마신 게 다였는데, 지금 여기는 어디지? 아까 들렸던 목소리는 또……. 고개를 든 곳에는 하진의 얼굴이 보였다. 평소답지 않게 착잡한 얼굴이기에, 유리는 왜 또 죽상을 쓰고 있냐고 말하려다 자신과 도영의 상태를 한 번 점검하고는 깨달았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문제였다, 커피에 약이라도 탔나 보지? 꽤 독한 약인가. 머리를 흔들려다 만 유리가 쉘터 안을 가만히 눈으로 훑다가, 잠금이 풀린 격리실의 문을 바라보고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저희 믿고 바깥 다녀오신 건데.”

“일부러 저지른 실책이 아니면 사과할 필요는 없지. 엄밀히 말하자면 네 잘못도 아니니 괘념치 말고.”

하진은 몸을 숙여 유리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도영도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건지, 유리와 비슷하게 쉘터 안을 둘러보다 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는데, 대처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강제로 내쫓겼을 이들에 대한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하진은 정말로 괘념치 말라는 듯 도영에게도 손을 뻗어 어깨를 몇 번 두드려주다가, 유리와 도영의 앞에 앉아 두 사람의 손을 붙잡아주었다. 하진이 끌어안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때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하더니, 그런 손길은 또 익숙해보이는 모습에 승연은 눈을 몇 번 끔뻑였다. 경찰이라 그런가, 일반적인 직장 동료들보다도 거리감이 가까운 것 같았다.

하기야. 사람 죽는 일도 같이 몇 번 했으면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시는 날도 많았을 테고. 그런 과정에서 부하 직원을 달래는 상사의 모습을 한 하진이 아주 상상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니 승연은 어렵지 않게 납득했다. 생각해보면, 하진은 직장에서도 제법 좋은 상사였을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여기까지 와서도 그를 따를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 첫 번째 근거, 두 사람이 그렇게 거리감 없이 대하는 데도 받아준다는 것이 두 번째 근거. 그리고, 하진이 손을 잡아주자마자 두 사람의 표정에서 죄책감이 조금은 지워졌다는 것이 마지막 근거였다. 본업에 충실한 사람은 아무래도 좋은 사람이지. 막연한 생각을 하던 승연이, 하진의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엄지 손가락을 움직여 두 사람의 손등을 쓸어주던 하진이 입을 연다.

“내가 틀린 말 한 적 있나?”

“없습니다.”

“그럼 이것도 너희 잘못이 아닌 거야. 따지자면 뭘 먹이려 들었던 간에 내가 진즉 막아야 했던 일인데, 내가 다른 업무 본다고 너희 못 챙긴 거니까. 자책하려면 차라리 나를 탓해라. 알겠어?”

“……네.”

직장에서도 실수를 자주 덮어주는 상사였겠다. 그렇게 생각한 승연이 같이 쪼그려 앉아 도영과 유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두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니까. 두 사람은 곧바로 승연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러고 놀아라, 그래. 그제야 조금 분위기를 풀어주겠다는 듯 그런 이야기를 던진 하진이 몸을 일으켰다.

“승연이랑 같이 쉬어. 승연 씨, 얘네 몸 상태 좀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상한 애들 따라붙으면 바로 소리 지르고요.”

“아, 네! 걱정 마세요.”

“짐 정리만 하고 금방 올게요, 오늘 주워온 게 너무 많아서 안 하면 큰일날 것 같아.”

오늘 설렁설렁 정리했다가는 그 지겨운 청소를 다시 해야 할지도 모른다며 너스레를 떤 하진은 승연이 메고 갔던 가방에 자신이 메고 간 가방까지 들고 창고로 향했다. 무리하시는 게 아닌가, 짧은 걱정을 했지만 당장 갈라진 목소리로 물을 가져다줄 수 있겠냐는 질문을 하는 유리 덕에 정신이 팔려 승연은 곧바로 가까운 곳에 보이는 뚜껑을 따지 않은 물을 가져왔다. 라벨을 벗겨내고, 그 속에 주사기로 약물 같은 것을 주입한 흔적은 없는지까지 확인하고서야 물을 넘겼다. 이제야 조금 살겠다는 듯 애써 미소지은 유리가 승연의 등을 두드렸다.

“우리 봐달라는 거 진심 아니셔, 너 쉬라는 거지.”

“네? 그렇지만…….”

“쉬게 하려면 명분은 필요하잖아. 자, 자. 승연이 너도 눕자. 여기 와봐봐.”

엉겁결에 붙들린 승연은 유리의 손길에 이끌려 유리과 도영 사이에 누웠다. 아, 그런데 이렇게 있으니까 마음이 편한 것 같기도 하고. 아까 전 세 사람이 언급했던 단어를 승연은 새삼스럽게 떠올린다. 가족……. 지금 제 진짜 가족들이 뭘 하고 있는지는,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무사히 살아있기야 하겠지만. 여기에서도 새로운 가족이 생긴 것 같은 이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삼십 분 정도를 누워 있었나, 하진이 창고에서 나오다 말고 누워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귀엽긴 하네. 그렇게 중얼거린 하진이 가물가물 졸기 시작한 승연을 바라보다가, 남은 두 사람의 상태를 한 번 확인하고는 그대로 승연을 안아 들었다. 너희도 괜찮은 것 같으니까 일단 승연이 데리고 들어간다. 그 말에 유리와 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방에 들어가서는, 다시 열리지 않는 두 사람의 방문을 바라보던 유리가 곧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하진은 의도적으로 승연을 혼자 두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유난히 하진을 잘 따르는 사람이고, 그것은 곧 리더가 승연을 노릴지도 모른다는 의미가 되니까. 이하진이라는 사람의 기반을 무너트리려 애쓰는 사람이 사람 하나 묻어버리는 짓을 하지 못하랴. 유리는 가만 눈을 끔뻑이다가, 웬만해서는 도와줘야겠다. 짧게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 승연을 고립시키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도영도 유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지 가만히 턱을 괴다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아니, 가까이하는 게 나쁘지는 않은데 좀 부럽네. 그런 생각을 한 탓이다. 대단한 질투심은 아니었지만.

방 바깥에서 어떤 시선이 오가고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는 하진에게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오늘 자의 다이어리를 작성한 하진은 곧 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소란스러워지면 승연이 깰 테니 빨리 나가는 편이 나갔다. 누구세요, 저 영제인데요. 짧게 들려온 목소리에 하진은 대꾸 없이 문을 열었다. 오늘 쫓겨난 이의 가족이다. 문이 열리자마자 울음기 어린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로, 정리되지도 못한 말을 한참이고 중얼대는 이의 얼굴을 바라보던 하진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내일부터는 오늘보다 더 바빠질 것 같았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제 의지도 아닌 일로 바깥에 고립된 사람이 늘었으니까.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설령 그것 때문에 자신이 피해를 보았다고 해도, 어찌 되었든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은 찾아와야 했다. 하진은 손을 뻗어 방문 앞 불청객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그가 돌아가는 모습까지 확인하고 문을 걸어 잠갔다. 곧이어 하진이 침대 위로 몸을 눕힌다. 근처에서는 승연의 고른 호흡이 들렸다. 이상하게도, 그것 하나면 충분히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우스운 일이지. 문득 생각한다.

다음 날 아침부터 하진은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던 것은 그만둔 지 오래인 사람처럼 아침 해가 뜨자마자 식사만 대강 챙기고 바깥으로 나서기 시작했고, 와중에 앞으로는 찾아야 할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에 조금은 바빠질 것 같다는 이야기를 승연에게만은 건네고 갔다. 유리와 도영은 들은 것이 없었는지, 아침밥을 거의 마시듯 먹고 바깥으로 나선 하진의 모습을 보고 적잖이 당황한 표정을 했지만 어쨌든 그 역시 하진의 행동이라 어느 정도는 납득가는 구석이 있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굳이 설명해야 할까? 뭐라 입을 달싹이던 승연은 이내 입을 닫았다. 하진의 소식을 남의 입으로 전해 듣는다면 속상해할 사람들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말하지 않아도 하진이 가장 이른 시간부터 쉘터 바깥으로 나가는 사유를 가장 잘 알 사람들도 사실 두 명이었으니까.

하진이 홀로 나가는 쪽을 선택한 이후로는 쉘터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가족을 찾겠다며 쉘터 바깥으로 뛰어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무슨 일을 하든 내 자유가 아니냐며 친한 사람들을 죄다 이끌고 쉘터 바깥으로 나서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 모든 것을 중재하던 하진은 아주 드물게 남들과 같이 나갈 일이 있어도 탐사 중에 사라지는 일이 잦아졌고 개인 정비 시간에도 얼굴을 들이밀지 않게 되는 일이 잦아졌다. 분위기가 그토록 어색해지니 리더는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이 모든 것이 충분히 예상한 범주 내에 있었던 승연은 하진이 아침에 여러 번 쓰다듬고 간 제 머리를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그러니까, 달리 말하자면 승연은 나갈 일이 없었다는 의미다. 하진이 몇 번이고 강조했던 것은 그 자신의 안전이 아니라 승연의 안전이었고, 승연 역시 그의 과보호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이상 그에게 걱정을 끼칠만한 일을 늘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유리와 도영이 하진과 함께 나간 날에는 종일 보람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승연 자신이 의도한 행동은 아니었고, 귀찮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도 연구에 매진하고 있던 보람이 말 상대가 없으니 제발 의무실에 같이 틀어박혀서 사운드나 채워달라고, 너는 스트리머도 했다고 들었는데 그런 걸 잘 하지 않느냐고 이야기하며 억지로 끌고 갔던 덕이긴 했다. 그게 특별히 나쁘게 느껴졌던 날은 없었으므로 승연은 고개를 끄덕이다 보람과 별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거나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쏟아내며 웃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전부 듣고 있는 보람이 영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기야 했지만, 승연은 자신의 존재가 보람에게 귀찮음이라는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굳이 따지자면 연구나, 혹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이 귀찮은 것이 아닐까. 막연히 생각한다. 그럼에도 틀린 생각일 것이라는 추측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정신없이 지난 이틀, 여즉 정리되지 않는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쉘터 내에서는 리더에게 반발하는 여론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일을 처리해준 것이 하진이었는데, 시간 조금 지나면 내보낸다는 약속까지 하고 격리까지 시킨 사람들을 구태여 내쫓은 것이 하진에게는 여기서 더 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되지 않았겠느냐고, 그로 인해 보장되지 않는 자신들의 편의는 어떡하느냐는 것이 그들의 논지였다. 굉장히 이기적인 사유라고 승연은 문득 생각했으나 어떤 방향이든 간에 리더에게 반발하는 여론이 생기거나, 리더 무리의 결정이 올바르지 않다는 여론이 강화되는 것은 썩 나쁘게 보이지만은 않아 그저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고개를 몇 번 끄덕이기만 했다. 승연 역시 그들에게 동의하는 모습을 보이자, 다음으로 리더와 그 무리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하게도 유리와 도영이었다.

진퇴양난 같은 상황이었으나 리더는 구태여 사람들을 대면하지 않는 것으로 눈앞의 문제를 손쉽게 회피했다. 방 바깥으로 나오지도 않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겠냐, 끌어내자, 따위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자 그제야 방 바깥으로 기어 나온 리더는 어쨌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유진이었으며, 나머지 사람들의 업무는 다른 사람이 넘겨받아 대개 안정되었고, 어쨌거나 그 유진을 내보내지 않은 것만 생각하더라도 약속은 어느 정도 지켜진 것이 아니냐는 궤변으로 사람들의 비난을 아슬하게 피해 가려 했다. 그 이야기가 전해진 이후로 하진은 보고서를 검토하는 일도 그만두었다. 사람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는데 이런 정보를 전달해주는 것은 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내 몫의 보고서는 내가 알아서 정리하고 따로 보여주지도 않을 테니 알아서 처신하라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곧이어 리더에게 적잖은 비난이 다시 쏟아졌지만 하진은 제 생각을 철회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승연 역시 마땅히 할 일이 없어졌다. 보고서를 검토하는 일을 돕는 것이 승연의 일이었는데 하진이 거기서 손을 떼었다는 것은 자신 역시 굳이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니까. 다만 강승연도 별거 안 하는데 그냥 내쫓지, 따위의 여론이 생기기 전 하진은 빠르게 창고에 쌓인 물건들을 확인하고 재고를 검토하는 업무를 승연에게 넘겼다. 말이 단순한 업무이지 쉘터 내에서는 꽤 중요한 역할이었으므로 승연도 큰 불만 없이 바뀐 보직을 받아들였다. 사실 문장을 검수하는 것보다는 물건이 몇 개나 있는지를 세고 재고가 맞는지 확인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었으니 승연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기야 했다. 하진 씨는 혹시 이것까지 생각하고 업무를 바꿔주신 걸까. 곁눈질로 바라본 하진은 평소보다도 더 지쳐 보였다. 그런 일이 생긴 지 사흘이 채 되지 않았는데, 그간 제대로 잠 한 번 자지 못했던 모양이다. 보급을 마치자마자 재고 정리를 끝낸 승연이 내일은 하진을 따라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눕혔다. 피곤한 밤이다. 유난히 길었던 밤을 지나 일어난 승연은 옆 침대가 비어있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졸린 눈을 비비며 아침 식사를 배급받으러 걸음을 옮겼다. 그 아침부터 격리실에 갔다 온 건지, 한참 보이지 않던 하진은 승연을 비롯한 일행들이 기다리는 테이블에 앉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유진 씨 물린 지 일주일 째 되는 날 아니던가?”

“맞죠?”

“……오늘 너희 둘은 쉘터 안에 있어. 김지혁 저기 못 들어가게 막아라.”

그렇게 이야기한 하진은 몸을 또 평범하게 식사를 챙기는 것이 아니라 마시듯 음식을 전부 입에 밀어 넣고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지금 놓치면 다시 나가시겠다. 그렇게 생각한 승연도 급하게 식사를 밀어 넣고 식판을 정리하는 하진에게 다가갔다. 누구지? 짧게 생각하던 하진의 낯이, 자신에게 다가온 사람이 승연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풀어졌다. 급하게 먹었나 보네, 체하겠다. 걱정되네. 그런 걱정은 덤이다.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승연은 하진을 바라보며 잠깐 눈을 굴리다가 모르겠다, 싶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같이 나가요,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그러지요. 내가 가고 싶은 곳 먼저 가도 된다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듯 하진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가고 싶은 곳? 승연은 고개를 기울이다 말고 이내 따라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진과 함께 나갈 채비를 마쳤다. 새벽 어스름이 다 지지 않은 길로 나서며 하진과 승연은 문득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시선에 든 감정은 해방감을 닮아 있는 것처럼 보였던 탓에,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바라본 그대로 조금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곧 하진의 손이 승연의 손을 얽어 쥔다. 승연도 별말 없이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일주일간 그리워했던 손길이다, 좋아하는 손길이기도 했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하진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승연은 문득 익숙한 풍경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 우리 집 가는 길인데?

“우리 어디 가요, 하진 씨?”

“당신 집 갑니다. 같이 쉬고 싶어서.”

“어, 나도 거기 가자고 하려고 했는데. 우리 통했네요?”

하진이 승연의 집을 두고 자신의 집이라도 되는 양 말하는 것에 불쾌감을 느낄 까닭은 없었다. 쉬고 가도 된다는 이야기를 했고, 잘 사용해주고 있다면 저로는 좋을 일이다. 승연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하진의 등을 두어 번 토닥인다. 그래도, 자신의 곁에서 쉬는 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사람. 보기에 나쁠 이유가 없었다. 그 손길에 하진 역시 조금은 소리 내어 웃어버린다. 계단 올라가기 힘들죠, 같이 갑시다. 그렇게 말한 하진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승연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이런 것도 버릇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승연은 하진의 목에 팔을 두른다. 그렇게 집이 있는 층까지 도착해서야 승연은 집 화분 밑에 있는 열쇠를 꺼내 들고 집의 문을 열었다. 오지 않은 지 한참은 된 것 같았다, 실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정말 그리워하던 공간은 여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승연은 그런 평소에는 하지도 않았을 생각을 머릿속에 담는다. 익숙하게 겉옷을 벗은 하진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승연의 침대 맡에 앉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승연이 저도 모르게 웃다가 하진의 손을 잡고 침대 위에 누웠다. 바로 옆자리에 누우며 눈웃음을 짓는 하진의 얼굴이 새삼 마음에 들어 승연은 손을 뻗었다. 그러고 보면, 베인 자리가 나았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떼면 덧나려나. 승연은 무심코 하진의 얼굴에 붙은 거즈를 만지작거린다.

눈을 감고 승연의 손길에 얌전히 응하던 하진은, 승연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 잠시 웃음소리를 흘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떼어내도 된다는 의미였다. 무언의 허릭을 받은 승연이 큰 망설임도 없이 하진의 뺨에 붙은 거즈를 떼어냈다. 아침부터 약을 바르고 나왔는지 약간 번들거렸고, 상처는 이제 거의 지워졌다. 얼굴을 뚫어질 기세로 쳐다보지 않으면 남아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인 것을 보니 상처는 얼마 전 나은 모양이었고, 다만 흉터를 지우기 위해 약을 바르고 거즈를 붙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의 행동에서 이유를 읽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긴 했지만, 상처 남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승연은 충동적으로 하진의 얼굴에 붙은 거즈를 뗀다. 아무 반항 없이 승연의 손길을 받아들이던 하진이 작게 웃었다.

적어도 승연의 눈에는 거즈를 떼는 쪽이 훨씬 나아 보였다. 물론 쉘터로 돌아가기 전에는 자신의 집에 있는 거즈를 다시 대어주긴 하겠지만 적어도 둘이 있을 때는 가릴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하진을 곁눈질로 바라본 승연은 곧이어 자신의 몸을 꼭 끌어 안아오는 손길에 이길 수 없다는 듯 눈을 여러 번 끔뻑거리다가, 곧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뭐예요. 장난 어린 목소리를 내면, 내가 원래 뭐 안고 자야 잘 자. 같은 방을 쓰고 있는 처지에 거짓말인 것을 모를 리도 없는 이야기로 대꾸하는 하진을 바라보면서는 결국 명랑한 웃음소리를 숨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구나, 내가 잘 몰라준 거네요. 가볍게 대꾸한 승연이 하진의 등을 여러 번 토닥인다. 따라 입꼬리를 올리던 하진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쉬고 싶을 때마다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자신에게 적잖은 행복이다, 승연을 만나서 다행이었다. 하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승연 역시 그간 쌓인 피로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던 덕분에, 오늘은 식사를 준비할 생각도 따로 하지 못하고 하진을 꼭 안은 채로 깊게 잠들었다. 잠을 자는 와중에도 가벼운 잠꼬대를 하거나 뒤척이는 일이 잦았는데, 하진은 승연이 소리를 내거나 뒤척일 때마다 잠에서 깨어 승연의 몸을 토닥이거나 이불을 정리해주곤 했다. 실은 무언가를 안고 자야 잘 잔다는 것만큼 하진에게 큰 거짓말이 없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곁에 있으면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도 그럴 것이 본래 경찰이었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소리에 둔감할 리가 없을뿐더러, 얼마 전 발견한 특성으로는 좀비가 밤에 더 활발하게 움직인다는 점이 있었으니까. 자던 중에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소리가 난다면 빈번히 잠에서 깨곤 했다. 그것이 설령 자신이 움직여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여도 그랬으니 다른 사람이 있는 환경에서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리는, 아무래도 없었다. 그래도 하진은 문득 생각한다. 정말, 그래도. 승연을 안고 잠들어서 다행이라고. 그게 못내 마음을 편하게 한다고.

본래 승연이 잠꼬대가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편한 장소에 몸을 눕혀서인지 혹은 그간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가 상당해서인지 오늘의 승연은 이상하리만큼 잠꼬대를 많이 중얼거렸다. 쉬겠다며 몸을 눕힌 보람이 없게도 승연의 목소리에 계속 잠에서 깨던 하진은 실은 예상 범주에 있던 일이라는 듯이 승연을 바라보다가, 그가 무언가를 말할 때마다 옆에서 간단히 대답해주었다. 형, 엄마, 아빠. 가족을 부를 때만은 온전히 대꾸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내 가족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지. 무언가를 생각하려던 하진이 그대로 생각을 멈추었다. 생각할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기야 했으니까. 승연과는 조금 다른 유형의 판단이었다.

해가 다 넘어갈 즈음, 승연은 잠에서 깬 듯 눈을 여러 번 끔뻑이다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잤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하진 씨는……. 그렇게 생각하며 내려본 자리에서 하진은 편안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 시선이 새삼스럽게 마주하기 힘들어 슬쩍 시선을 피한 승연이 크게 기지개를 켠다. 왜 안 봐주지, 조금 서운해하는 티가 확실히 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주 보고 있자니 지나치게 민망했다. 곧 승연이 애교를 부리듯 하진의 허리를 끌어안고 품에 파고든다. 귀여우니까 봐준다. 그렇게 중얼거린 하진이 승연의 뒷머리를 느릿느릿 쓰다듬었다. 그런 손길이 좋아서 승연은 작게 미소지었다.

그새 하진이 준비한 식사를 저녁으로 챙기기 위해 거실로 나간 승연은 적잖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집에 있는 음식은 아무래도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것치고도 꽤 괜찮은 식사를 차려둔 탓이었다. 하진 씨 요리도 잘하시네요. 자취 오래 해서. 짧은 대꾸와 함께 승연의 몫이 될 수저를 건넨 하진이 자리에 앉아 밥을 천천히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오래지 않아 승연도 밥을 넘긴다. 이거, 엄청 맛있다. 승연은 오히려 평소보다도 더 빠르게, 그리고 많은 양을 먹어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태가 일어나기 전 평소 먹던 양만큼 먹은 것이었지만 좀비 사태가 터진 이후로는 이렇게 먹은 적이 없으니까. 잘 먹으니까 좋네. 텅 빈 그릇을 바라보며 하진은 그런 생각을 했다. 상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마치고 나니,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어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오늘 좀 이상한 일이 있었지, 그거 여쭤보고 싶은데. 슬쩍 하진의 눈치를 살핀 승연은 다시 하진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눈을 피했다. 오늘 얘 좀 이상하네. 그렇게 생각한 하진이 집 바깥으로 나오면서 문을 잠갔다. 곧이어 열쇠를 화분 밑에 놓아두고는 승연의 얼굴을 바라본다. 뭔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도대체 뭘까. 고민하던 하진이 가볍게 입을 연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할 말 하려다가 만 것 같아서.”

“아, 그. 유진 씨요. 왜 리더 들어가는 거 막으라고 했어요? 많이 아파 보이세요?”

이건 또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라는 듯 눈을 굴리던 하진이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상태가 안 좋으신가, 못 내보내게 하실 정도면 정말로 그렇겠지. 많이 아프셔서 어떡하지, 유진 씨. 그런 걱정을 하던 승연의 생각이 무색하게도, 느긋하게 입을 연 하진이 건넨 말은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형태의 것이었다.

“증상이 없습니다.”

“네?”

“그래서 면역이라도 되나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은 게, 촉각은 여전히 못 느낍니다.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아무 일이 없다는 근거를 들어 면역임을 확신할 수도 있었겠지만, 남들보다 조금 이르게 나타나던 증상과 여전히 촉각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복합적으로 바라본 하진은 결국 리더에게 유진의 상태를 숨기는 쪽을 택했다. 리더는 일일이 날짜를 확인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던 데다가 날이 지나간다는 감각조차도 거의 없는 사람이었으니 사실 4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해도 적당히 속아 넘어갈 사람이니까. 그래도 만의 하나의 가능성이라도 배제하기 위해 유리와 도영을 그 자리에 세워 둔 것이다.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난 승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현명한 판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변종 바이러스의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지 않았나. 그런 상황에서, 일주일 후에도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어쨌든 이와 관련해서 가장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보람과 하진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의견이 합치되는 순간 안에 들이든 내보내든 둘 중 하나가 결정되는 것이다. 지금의 경우에는 전자였으며, 승연은 내심 앞으로도 전자이기를 가벼이 바랐다.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정이 쌓인 쪽은 리더보다는 유진에 가까웠으니.

“놀라셨겠어요, 들어갔는데 안 아파 보여서.”

“나보다 유진이가 더 놀라던데……. 나 왜 멀쩡하냐고. 혼자 있으니 심심해 죽겠다고, 앓아눕기라도 하고 싶다나.”

유진 다운 대답이긴 했다.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 승연이 그게 뭐냐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래도 유진의 몸상태가 심각한 것은 아니라니 그건 다행이었다. 짧은 생각을 흘린 승연이 하진의 손을 잡고 쉘터 방향으로 걸어갔다. 하진 역시 그런 승연의 손길이 싫지 않았으니 구태여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앞으로도 유진이 아프지 않았으면 했다, 오만 핑계를 다 대서라도 한 사람이라도 더 남기고 싶은 것이 솔직한 승연의 심정이었으니까. 실은 분위기가 이렇게 흐려지고 난 이후로 홀로 나갔다 돌아오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아졌다. 그 원인이라 해도 무방할 리더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와중에, 물린 사람이 멀쩡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오래지 않아 사라질 믿음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렇게 다시, 사흘이 지난다. 그 사이 하진은 아침마다 보람을 통해 유진의 상태를 점검하고 홀로 나가는 것을 반복했고, 특히 바로 전날에는 유난히 지친 것 같은 낯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승연은 쉘터 안에서 복잡한 일만 생겼다 하면 하진을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가서는 시답잖은 이야기들과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런 승연의 손길이 싫은 것은 아닌지 얌전히 끌려 오던 하진도 그러게요, 그건 걔 문제야. 그런 방식으로 늘 승연을 두둔하는 이야기를 건네주고는 했다. 그렇게만 지냈다면 평화로웠을 텐데. 바깥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 날의 아침, 승연과 하진은 두 사람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급하게 문을 연 곳에는 보람이 있었다. 적잖이 당황한 표정을,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예견한 사람의 표정을 지은.

“새벽부터 유진 씨한테 열이 너무 많이 나요…….”

“몇 시 정도부터 그랬어.”

“한 시 정도, 일시적인 증상일 것 같아서 두고 봤는데 다섯 시간이 지났는데도 열이 안 가라앉아요. 온도 재봤는데 전조 증상이랑 똑같고…….”

정말 당황하긴 한 건지, 말이 장황해지긴 했지만 요약하라면 결국 좀비화 전조 증상이 일어났다는 의미다. 물린 지 열흘이 지나고서야. 잠깐 할 말을 잃은 하진이 승연을 흘끔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일단 씻고 나와, 유진 씨랑 접촉했을 때 입었던 옷 다 태워야 하니 지퍼백에 넣어서 나 가져다주고, 다시 갈아입고 오고.”

“와중에 누구 걱정을 하는 거예요?!”

“네 걱정을 하지, 인마. 네가 옮으면 큰일이다. 빨리 갔다 와, 이제 나도 나갈 테니까.”

누가 봐도 승연의 걱정을 하는 모습이었는데, 하진은 그러면서도 능청스러운 낯을 유지했다. 뺨이라도 한 대 칠까, 고민하던 보람은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판단에 급하게 몸을 옮겨 깨끗한 옷을 챙기고 샤워실로 뛰어 들어갔다. 이런 대처가 생각보다 더 능숙하시네. 승연이 하진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하진 또한 힘 빠진 웃음을 지으며 승연을 바라보았다.

“제일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라서, 혹시 일어나면 바로 대비하려고 준비했습니다. 예전부터.”

그럴 만도 하지. 승연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하진은 어쨌든 우리 사이에서도 리더나 다름없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예상하지도 못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어쨌거나, 하진은 내려가자마자 아침 식사를 하러 모인 사람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유진의 감염 사실을 알렸다. 개중에는 그렇게 될 것 같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이때가 기회라는 듯 튀어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다름 아닌 리더였다.

“그럼 이젠 바로 내쫓지. 감염 증상 나왔잖아.”

“그래서 말인데 투표를 좀 해볼까 합니다.”

리더의 말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하진은 잘라둔 종이를 쉘터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네 사람 당 하나씩 펜까지 나눠 가지게 한 하진이 작은 박스 하나를 가져오며 입을 열었다.

“유진 씨가, 어차피 물리고 하루면 정신 멀쩡해지지 않느냐고. 정신 멀쩡해지면 제 발로 나갈 테니까 아픈 동안에는 여기 있게 해달라고 했는데.”

“…….”

“여기 있어도 된다고 생각하시면 찬성, 바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면 반대라고 적어서 이 박스에 넣어주시면 되겠습니다. 지금 바로 해주시면 좋겠군요.”

저 말을 듣고 어떻게 거절하라는 말인가. 그 난리를 피운 사람이 정말로 바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해서 바로 나가겠냐고, 리더가 비꼬는 말을 던지긴 했다만 하진에 의해 재제받은 이후로는 말을 더 잇지도 못했다. 여기에 머무르던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던 걸까. 곧바로 기표 내용이 적힌 용지가 박스에 쌓이기 시작했다. 나오는 사람의 수를 확인한 하진은 마지막 사람이 종이를 내자마자 알아서들 식사하시면 결과를 가져오겠다며 그 자리에서 바로 박스 안의 내용물을 열어보기 시작했다. 결과는 단 다섯 표 제외 전원, 찬성. 상황이 급박한 것은 모르지 않지만 모든 사람이 유진의 말을 믿었고, 믿기 위해 노력했다. 아픈 사람에게 모질어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진이 던졌던 말을 기억한 까닭이다. 모질어진다는 것은, 본인이 같은 처지에 처하더라도 말 한마디 할 자격조차 잃는 것이라던 그 말을.

투표의 내용을 인정할 수 없다며 짜증을 내기 시작한 리더를 또 억지로 막은 하진이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또 자신이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 나가지도 못하고. 좀처럼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하진의 옆으로 유리와 도영이 다가와 낮 동안 저 앞은 책임지고 막고 있을 테니 염려 말라며 호언장담을 했지만 그래도 하진은 리더를 믿지 않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대놓고 적대적인 모습을 계속 보이는 것은 하진에게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하진 자신이 모를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곧 크게 한숨을 내뱉은 하진이 몸을 돌려 승연을 바라보았다. 잠깐 같이 들어갈까요, 그 중얼거림을 들은 승연이 얌전히 하진의 뒤를 따라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곧바로 승연의 손을 붙든 하진이 몇 번 승연의 손을 주물렀다. 왜, 왜 그러시지? 의아한 눈빛으로 하진을 바라보는 승연이 눈빛에도 하진은 별다른 말이 없다가, 곧이어 입을 열었다.

“당신 손 따뜻한데 혹시 내 이마 좀 짚어줄 수 있어요?”

“응? 어렵진 않은데…….”

“저기 의무실까지 가면서 같이 해줘요, 그럼. 약 좀 타오게.”

뭐지? 일단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승연이 하진의 이마 위로 손을 얹는다. 가끔 뜨겁다고 느끼기도 했던 그 손이 이마를 짚자마자, 어느 정도 열감을 전달받는 기분이 들어 하진은 조금 웃고 만다. 곧 하진과 승연이 의무실 앞까지 내려간다. 한참이나 하진의 이마를 짚던 승연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하진이 의무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의무실 안에는 리더와 보람이 있다. 친밀한 모습은 결코 아니었고, 리더가 보람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고 보람은 이걸 어떻게 피할지 둘러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마침 들어온 하진의 모습에 보람의 낯에 화색이 돈다. 순식간에 입을 다문 리더가 도망치듯 바깥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하진은 약이 든 서랍장을 뒤적거렸다.

“내쫓아줘서 고마워요. 저게 수면제 내놓으라고 난리 치던데요, 요새 잠이 너무 안 온다고.”

“지랄. 어제 코 골고 뻗어서 자는 거 들었으니까 주지 마.”

“주지도 못하고 있지도 않다니까 그럼 지난번에 그건 뭐였냐고 하더라고요. 자백까지 하네? 근데 하진 씨는 뭐 하러 왔어요?”

“해열제 없냐, 열이 좀 나는 것 같은데.”

열? 이하진이? 그의 중얼거림을 듣고 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뭐, 아프지도 않고 아프지도 못하나. 그 중얼거림을 들은 보람이 비접촉식 체온계를 켜고 하진의 이마를 찍었다. 뭐야, 정말로 안 나는데. 이상하다.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자면 하진이 몸을 살짝 기울였다.

“그냥 열이 받는 건가……. 열감이 좀 심하긴 해.”

“36.8도긴 한데……. 아니, 하진 씨 원래 체온 35도 후반이죠? 하진 씨 기준으론 미열인 것 같기도 하고. 일단 해열제랑 몸살감기약 처방해드릴게요.”

해열제와 몸살감기약을 알아서 챙겨 나간 하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보람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거 잡고 귓속까지 재볼 걸 그랬나, 뭐가 이렇게 찜찜하지. 그러든 말든 약을 잘 받아왔다며 눈웃음을 짓는 하진을 바라본 승연이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런데 하진 씨가 약을 받아올 이유가 어디 있지? 고민하며 하진의 걸음을 따라가니, 하진이 가려는 곳은 다름 아닌 유진이 있는 곳이었다. 잠시 승연을 바라본 하진이 가볍게 물었다.

“들어갈 거예요? 얘 가져다주려고 타온 겁니다, 약.”

“아…….”

아무리 좀비화가 되는 과정에 있다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상당한 고열에 시달리는 모습이 관찰된다는 보고를 들으니 하진의 마음이 그다지 편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상냥한 사람이네, 내가 물려도 저렇게 행동해주실까? 잠시 생각하던 승연은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여러 번 가로저었다. 뭘, 내가 물려도 저렇게 굴어. 나는 안 물릴 거야. 양 뺨을 가볍게 두드린 승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자신도 유진이 걱정되는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승연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하진은 방진용 마스크와 라텍스 장갑을 승연에게 하나씩 건넸다. 받아든 것을 얌전히 착용한 승연이 같은 것을 끼기 시작한 하진의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아예 안 들여 보내줄 줄 알았는데 여러모로 걱정되는 마음은 이해해주는 모양이었다. 곧 문을 열어젖힌 하진이 구석에서 앓는 소리를 내는 유진에게 다가갔다.

“나 왔다. 많이 아파?”

“아파……. 열, 열이 안 내려…….”

“하진 씨가 해열제랑 몸살약 가져왔어요! 이거 드셔야 해요!”

그나마 이 방의 좋은 점은 물이나 식사 대용으로 쓸만한 음식이 쌓여 있다는 점에 있었는데, 그러니 약을 넘길 물을 구하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승연이 물이 든 페트병을 가져오자마자 하진이 약의 포장지를 뜯어 유진의 입에 약을 가져다 댔다. 얌전히 약을 입에 머금은 유진이 승연의 도움을 받아 약을 넘긴다. 고마워요, 푹 잠긴 목소리로 겨우 말을 흘린 유진이 그것만으로도 제 기력을 죄다 소비했다는 듯 푹 쓰러지더니 하진과 승연의 얼굴을 눈짓으로 올려다보았다. 꽤 놀란 낯의 승연과는 달리 하진은 익숙하다는 듯 가볍게 혀를 차는 것이 전부였다.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원래 저렇게 픽픽 쓰러지는 애였어…….”

“아, 덕분에 잠은 올 것 같아……. 나 잘래……. 나가…….”

호의를 뭘로 보는 거지. 작게 중얼거린 하진이 나가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승연의 손을 붙들고 문 바깥으로 나섰다.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만 확실히 사람한테 약을 직접 먹여주려면 이래저래 붙어있긴 해야겠구나, 위험한 일이긴 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런 것을 새삼 깨달은 승연이 하진을 따라 마스크와 장갑을 벗고 비닐봉지 안에 착용한 것들을 욱여넣었다. 곧이어 비닐봉지를 넘겨받은 하진이 말없이 승연을 바라보고 눈웃음을 짓더니, 그의 머리를 여러 번 쓰다듬었다. 하진이 천천히 입을 연다.

“아침에 보람이가 입은 옷이랑 이거까지 다 해서 좀 태우고 올게요. 도영이랑 유리랑 같이 있을래요?”

“아, 네에…….”

또 아이 취급……. 문제가 있다면 이런 게 슬슬 익숙하다는 것이다. 마냥 나쁜 것 같지도 않고. 어쨌든 잘 타일러주려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아서 그런가. 별 영양가 없는 생각을 안고 있던 승연이 걸음을 옮겨 도영과 유리가 있는 계단 방향으로 향했다. 무언가가 영 모자라다는 듯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유리가 승연을 보자마자 표정을 갈무리했다. 왜 저런 표정이셨지? 이유를 모르니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승연이 고개를 기울이다 유리와 도영에게 다가갔다. 와중에 도영은 여전히 무언가 모자라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지, 두 분 뭐 심각한 일 있으신가. 뭔가 더 생각하기도 전에 도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식후땡 못 한 지 며칠째지…….”

“야, 애기 듣는데 뭔 소리야.”

“애기가 어디……. 으어억, 으헉, 승연 씨 언제 왔어요?!”

음, 아이 취급 맞군. 새삼스럽지도 않은 것을 자각한 승연이 잠시 눈을 끔뻑인다.

“담배 피우세요?”

“우리 다 피워, 팀장님도 원래 하루에 한 갑 피우셨고…….”

“하진 오빠는 담배 남은 거 있을걸? 지금 나간 것 같은데 이따 가서 빌어봐, 한 대는 주겠지.”

피우는 걸 본 적이 없는 건 둘째치고 담배 냄새가 나는 걸 맡은 적도 없는데. 하진이 정말로 흡연자였다면 담배 냄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승연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정말로 흡연자라면……. 담배가 남은 것이 없거나, 어떤 계기로 인해 담배를 끊었거나. 둘 중 하나겠지. 뭔가 생각하는 눈치였던 승연이 문득 하진이 나간 문 바깥을 바라본다. 태울 게 있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셨구나, 흡연자니까. 아주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물론 하진이 여기서 불을 붙일 수 있는 도구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테지만, 딱히 창고에 들리지 않았던 건 상시로 라이터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왜 담배 피우실 거란 생각을 못 했지, 그런 이미지가 아니셔서 그런가. 잠시 생각하던 승연이 아무래도 좋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데 뭐 태우러 가신 거야? 둘이 유진 씨 만나고 왔어?”

“네, 마스크랑 장갑이요.”

“아하. 안에서 무슨 소리 하는지 궁금해할까 봐 너도 데려갔나 보다.”

그렇게 하진이 옷을 태우고 돌아온 후로는, 그저 평소 같은 날의 반복이었다. 그렇구나, 그냥 신경 쓸까 봐 미리 마음 써주신 거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승연이나, 반드시 갚을 테니 담배 한 개비만 주면 안 되냐며 떼를 쓰는 도영이나, 담배 찾는 것 하나 못한 놈이 무슨 수로 갚겠냐면서도 담배 한 통을 그대로 넘겨주는 하진이나, 나눠서 피우자며 도영과 함께 바깥으로 나가는 유리나……. 그새를 못 참고 유진을 보러 다녀온 것이냐며 가볍게 타박하는 보람까지.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으니 어느 하나 특별히 맘에 둘 것이 없었다. 그래서 승연은 도리어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난리가 났는데도 마냥 괜찮기만 한 하루일 수가 있나. 하진 역시 적잖이 예민한 낯이었으므로 비슷한 생각을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그것만으로 제법 안심이 되었다. 하진이 위협에 대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도 큰 의미로 다가온 것이다. 하루를 마무리할 즈음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방으로 들어와, 그가 소지한 다이어리에 무언가를 기록하는 하진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승연은 그가 페이지를 덮자마자 침대를 팡팡 두드렸다. 얼른 누우라는 의미임을 알아들었는지 픽 웃은 하진이 침대에 몸을 눕혔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들었다, 그러면서도 승연은 조금 불안하다고 생각했다. 춥다고 생각했나, 그럴지도 모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새벽녘, 이상할 정도의 한기에 승연이 잠에서 깼다. 일어나니 자리에 하진이 없기에 시간을 확인했건만 아직 시간은 다섯 시가 조금 안 된 시간, 평소의 하진이었다면 한참 잠을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왜 안 계시지? 화장실에 가셨나, 싶었으나 방에 붙어 있는 작은 화장실에서는 인기척이랄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은 조금 일찍 나가셨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진 씨는 통행금지 시간도 크게 개의치 않고 다니는 편이시니까. 그래도 아침은 좀 먹고 나가시지. 그렇게 생각하던 승연은 문득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대놓고는 아니고, 아주 살짝. 어제 창문을 덜 닫고 잤나. 하긴 어제 자기 전에도 춥다는 생각을 했지. 정말 창문이 열려 있어서 춥다고 느낀 거였나보다. 대수롭지 않은 생각을 갈무리한 승연이 몸을 일으킨다. 이렇게 일어나니 목이 말라 바깥에서 물이라도 한 병 가져올 생각이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걸음을 떼던 승연은 문득 의아하다는 듯 문을 바라보았다. 문 너머에서 소음이 들려온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소리기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 사이에 하진의 목소리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혹시. 승연은 급하게 문을 열어젖혀 아래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는 리더와 유진, 그리고 하진이 있었다.

저 세 사람이 왜 이 시간부터 모여있지. 그나저나 유진 씨, 아, 슬슬 정신 차리실 시간이 되셔서 저기에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승연이 세 사람의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유진은 리더의 등에 업혀 있었고, 하진은 쉘터의 입구 앞에 서서 리더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진 씨 표정이 그렇게 좋진 않으신 것 같은데, 혹시. 그렇게 생각할 즈음 리더의 등에 업혀 있던 유진이 크게 몸을 움찔거렸다. 그제야 승연의 귓가에 유진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발로 나간다고 했잖아……. 그게 환청이었는지 혹은 정말로 실체가 있던 목소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게 정말로 자신이 들은 말이 맞다면, 그렇다면 분명히. 또 사람들이 자는 사이에 리더가 손을 쓰려 한 것이다. 하진이 이른 시간에 나간 것도 동일한 맥락이었을 테다. 최근 들어 소음에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하던 하진이었으니-원래 그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승연은 잠시 했지만, 그렇게까지 유효한 발상은 아니었다-, 리더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나 혹은 격리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도 아니라면 유진의 힘 빠진 중얼거림이라도. 지금의 승연처럼. 승연은 무작정 계단을 타고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승연이 뛰어 내려오는 소리를 듣자마자 하진의 표정이 구겨졌다. 누구 깨기 전에 적당히 해결하려고 했는데, 하여튼 이놈은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그 깨어난 사람이 자신에게 호의적인 사람이라는 부분에 있었고, 그 속에서 다른 불행을 찾으라면 깨어난 사람이 하필이면 하진이 잘 보이고 싶었던, 늘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호감 외에도 쉘터에 대한 호감까지 심어주고 싶었던 사람. 당신이 몸담은 곳은 영영 안전한 곳이리라 이야기해주고 싶었던 사람. 하진은 잔뜩 구긴 인상을 겨우 펴며 리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즈음에야 리더와 하진의 대화가 귓가에 정확히 꽂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하다하다 투표 결과에도 딴지를 거냐는 하진의 목소리, 평소와 다른 증상을 보이는 사람을 어떻게 쉘터에 둘 수 있냐는 리더의 목소리. 정말 그게 두려운 것이 맞냐는 하진의 비꼬는 목소리까지 어느 하나 차분하게 두고 볼 수 있는 것이 없어 승연은 걸음을 떼어 하진의 옆으로 다가갔다. 확실한 것은, 막아야 했다. 여기서 누군가를 더 잃고 싶지는 않았다. 이 새끼들이 이젠 단체로……. 리더의 중얼거림이 승연에게 날카롭게 꽂혀들 즈음, 리더의 등에 매달려 있던 유진이 덜 잡힌 초점으로 눈을 들었다. 자신이 누구에게 업혀있는지 이제야 완전히 이해했다는 듯, 유진의 짓씹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나, 가도.”

“허?”

말할 기운이 있었나? 리더가 유진의 얼굴을 확인하려 몸을 돌리기도 전, 리더를 밀치곤 비틀거리며 자리에 선 유진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리더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그대로 얼굴에 들이박은 탓에 중심을 잃고 두 사람 모두 고꾸라졌으나 유진은 넘어지지 않았다. 바로 달려온 하진과 승연이 유진을 붙들어준 덕이다. 그나저나 둘이 들러붙었는데 한 사람만 구했다니. 하진과 승연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거,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 조금 웃기네. 유진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힘없는 웃음소리를 흘리다 리더의 몸 위로 주저앉았다. 이거 놔, 놓으라고! 급하게 몸부림을 치는 리더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여기 없었다. 곧 멱살을 틀어쥔 유진이 리더의 코로 제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아, 아니, 저거 코피 나는 거 아닌가? 승연의 생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그의 코에서 피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하진은 유진에게 비키라는 듯 곁눈질을 하다, 코피가 정말로 넘어가기 전 그의 몸을 억지로 잡아다 앉혔다. 뚝, 뚝. 바닥에 피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네가 알아서 치워라. 건넨 말이 영 성의 없다.

“나가도 내, 발로 나가. 씨발새끼야.”

“야, 너 이 코가 얼마짜리……!”

“왜? 네가 내쫓은 친구 중에 성형외과 하던 애도 있지 않아? 걔 좀비 된 거 찾아다가 코 다시 째달라고 해보든가…….”

그랬어요? 응. 의사라서 친하게 지냈나? 뭐 두 번째 아버지라고 모시고 살던 걸 제 손으로 내쫓긴 했지……. 수술해준 사람이구나, 친아버지도 내쫓는 놈이 의사 아버지라고 못 내쫓진 않을 것 같긴 해요……. 심각한 상황임에도 심각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 승연과 하진이 시답잖은 대화를 나눌 즈음 유진이 발을 들어 리더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그즈음에야 하진은 승연의 눈을 가려주었다. 봐서 좋을 게 없는 꼴이었으니 보여줄 이유가 없다. 곧 유진이 그런 하진의 행동을 눈치챈 건지, 죄송하다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일단 걔가 죽든 말든 제게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니 마음대로 하라는 듯 하진이 손짓하자 유진은 더는 물러설 생각도 없는 것처럼 리더의 몸을 마구잡이로 걷어차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 그래도 이건 좀 곤란한데. 하진이 급하게 승연을 안아 들고 계단 방향으로 향했다. 하진이 승연을 내려두자마자 타이밍 좋게 문을 열어보기 시작한 쉘터 사람들이 유진과 리더가 선 방향을 바라보고, 직후 하진과 승연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입구에서 일어난 리더와 유진의 폭력 사태, 이상함을 감지하자마자 튀어나온 듯 이제 막 계단에서 내려온 하진과 승연의 모습. 그렇다면 이것은, 리더가 또다시 유진을 내다 버리려고 한 것이 아닐 수가 없다. 바깥을 내다본 쉘터 사람들의 시선에 경악이 맴돌 즈음, 몸이며 머리를 지나치게 얻어맞은 탓에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도 못하는 리더의 모습을 확인한 유진이 문득 시선을 돌려 하진의 위치를 눈으로 훑었다. 그제야 하진이 그만큼이나 멀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지독한 사람이다, 이 상황에서도 리더를 파묻으려고 나를 이용하려 해……. 그러나 하진의, 리더의 평판을 어떻게든 바닥에 처박고 사후에라도 유진에게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시키겠다는 의지를 유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유진에게 가장 호의적이었던 사람이 하진이었다. 그러니 그가 구태여 그 귀찮은 짓들을 해서까지 자신을 속이려 들진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목숨처럼 붙들고 있었던 유진은, 그래, 기분이다. 작게 중얼거리며 리더의 멱살을 잡아 몸을 끌어올렸다. 기침에도 피가 섞이기 시작한 모습은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잠깐만요, 승연 씨. 눈 가리고 있어요. 승연에게 짧은 당부를 건넨 하진이 그제야 걸음을 떼었다.

“날 또 내다 버리려고 해?! 내 동생도, 내 친구도 너 하나 때문에 다 내쫓겼는데?!”

“유진아, 그만. 유진아.”

타이밍 좋게 끼어든 하진을 흘끔 바라보던 유진은 겨우 리더를 붙든 손을 떼었다. 분노 어린 표정이었지만 눈은 식은 그대로였다. 그나마 가까이서 보고 있는 승연과 코앞에서 보고 있는 하진이 아니고서야 저 속에 든 감정이 무언가 더 있을 거라고는 더 생각할 수도 없도록. 하진은 잠시 생각한다. 지금 제 계획 아닌 계획에 유진이 조금 맞춰주었다고 해서 지금 한 말에 그의 진심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것은 아닐 테다. 아주 연기인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진심은 아닐 감정 속, 사람의 시선을 불러모으기 쉬운 진심을 내보이며 눈을 잠시 굴리던 하진이 느리게 숨을 내뱉는다. 곧 하진이 유진의 손을 붙든 채 유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적잖이 놀란 낯의 유진이 하진을 바라본다.

“일어나요, 아니, 하진, 하진 씨.”

“애초에 내가 있었어야 했는데. 못 막은 내 잘못이야. 미안해.”

하진이 그 일에 얼마나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지, 어렴풋이라도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다. 그러니 승연 역시, 아니, 승연이 가장 명확하게 알았다. 하진도 아마 유진에게 쭉 저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보인 모든 것이 리더의 평판을 떨어트리기 위한 수작이었다고 해도 저 말만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무릎까지 꿇으며 사과를 건넨 것은 일종의 쇼맨십이 맞긴 하겠지마는, 정말로 어쩔 줄 모르는, 당신에게 그러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사과를 받아 개운하다는 감정이 섞여 어쩔 줄 모르는 유진의 표정을 바라보고 있자면 아주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일어나세요, 괜찮…….”

“찾아보려고 계속 주변도 돌아다녔는데, ……여기서 할 말은 못 돼. 진정 됐으면 좀 나가서 얘기해도 될까.”

그 말 자체가 일말의 기대감은 안아도 된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유진은 순식간에 울음이 고인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일어나세요, 하진 씨한테 받을 사과는 아니었어요, 처음부터……. 이어진 말에 하진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아, 자다 나와서 그런가, 좀 어지럽네. 하진은 이런 짓도 피곤하다는 듯 굳어있던 낯을 쓸어내려 표정을 갈무리한다. 곧 쓰러진 리더의 몸을 한 번 걷어찬 유진이 비틀거리며 쉘터 바깥으로 나섰다. 하진 역시 한참이고 리더의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눈을 들어 승연이 아직 자신을 보고 있음을 확인하곤 말없이 쉘터 바깥으로 향했다.

시체나 다름없는 꼴이 되었지만 옅은 숨은 쉬고 있는 리더를 도와주려 선뜻 나선 사람은 없었다. 어느 틈에 나온 건지 승연의 옆에서 마른세수를 하던 보람이 그제야 책임이랄 게 다 뭐냐며 제 신세를 한탄하더니 몸을 숙여 리더의 상태를 확인했다. 엉겁결에 보람을 따라간 승연이 거즈를 대는 것을 거들었다. 곧 애가 무슨 이런 것을 돕냐며, 들어가서 쉬기나 하라는 이야기를 건네며 유리가 그 옆으로 다가왔다. 유리가 오니 당연히 도영도 그 옆을 따랐다. 어쩐지 익숙한 멤버들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보람이 흘끔, 리더의 얼굴을 바라본다. 저거 코는 진짜 다시 째든가 해야겠네, 잡념이나 품고 있다 입을 연다.

“지금 김지혁 도와준 거야, 하진 씨가?”

“트롤새끼라도 쉘터 사람은 쉘터 사람인데, 시체 치울 일은 만들지 말아야죠. 팀장님 철칙이에요.”

“그렇게 우리 도영이도 직장 다니는 동안 우리 팀에 잘 붙어 있었지.”

“왜 저를 패요, 갑자기?”

짜증 가득 어린 낯으로, 도영은 리더의 몸에 감고 있던 붕대를 단단히 잡아당겼다. 숨을 쉬기 힘들다는 듯 컥, 소리를 낸 리더의 몸이 가볍게 늘어졌다. 그제야 애당초 일부러 그런 것이라는 듯 개운한 표정이 된 도영이 콧노래를 부르며 붕대를 두르다,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승연의 모습을 잠깐 바라보았다. 조금 놀랐을까. 유리가 몸을 일으켜 괜찮다는 듯 승연의 등을 몇 번 토닥여주었다. 곧 정신을 차린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던 승연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일할 때 그렇게 다친 적 많으셨어요?”

“우린 없었고 팀장님은 가끔……. 도영이 구하다가 다친 적도 있으시고.”

“그러니까 이젠 화나게 하는 사람도 없는데 왜 날 패냐고…….”

이제 정신 나간 놈은 있는 놈 취급도 안 해준다는 건가. 없는 편이 나은 사람이기야 했으므로 승연은 적당히 수긍하기로 한다. 그렇게 리더를 어디로 옮겨야 하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람이 절대 의료실에 그를 다시 들이고 싶지는 않다며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그의 방에 있는 침대로 옮기고 분위기를 정리하고 나서야 하진은 돌아왔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이 새벽부터 움직이는 것이 영 피곤했는지 하진의 인상은 구겨질 대로 구겨져 있었다. 그런 얼굴이 못내 걱정되어 승연은 하진의 눈치를 살폈다. 그제야 하진이 웃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바보. 그게 더 걱정된다는 걸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정말로 바보 같다. 언제고 똑똑하게 구는 사람이 나랑 있을 때는 왜 그러는 건지. 승연은 괜히 어깨를 으쓱이며 시선을 돌렸다.

“지금이 몇 시지?”

“여섯 시 반이요.”

“……유진이 열 안 내렸던데, 24시간은 지났네.”

하진의 질문에 유리가 시계를 내려다보다 무심히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하진이 건넨 대답에, 보람과 승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어제 보람의 말에 따르면 유진이 처음으로 열감을 호소한 것은 새벽 한 시 정도의 일이었다. 보편적으로 좀비 바이러스는 24시간 이후에 잠시 자연 소멸한 것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다가, 6시간 이후 가사 상태에 빠지고 그 이후에 좀비로 깨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일진대 유진의 증상은 그렇지 못했다는 의미다. 24시간 이후로도 사라지지 않은 열, 그렇다면 그 이후는? 하진이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본다. 다행히 당장 특이사항이 보이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지금은 안심해도 되나 싶긴 했다만, 언제나처럼 낙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나의 변수가 생겼다는 것은 이 이상으로 계산할 것이 너무도 많아진다는 의미였으니까. 문득 승연은 하진의 바로 옆까지 다가간다. 담배 냄새……. 평소에는 정말 안 피우더니 도영이 한바탕 난리를 피워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자신이 끊으라고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음을 승연은 알았기 때문에, 그저 그에게서 한 발짝 다시 멀어지는 것을 택했다. 의아한 낯으로 승연을 바라보던 하진도 곧 고개를 돌렸다. 생각할 것이 아주 많았던 탓이다. 일단 아침들 다 먹이고,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조금 정리도 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리스트를 뽑아두고. 하나하나 생각하던 하진은 그중 어떤 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듯 기지개나 켜다 말고 제게 와닿는 시선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보람도, 유리도, 도영도. 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연이야 눈을 조금 돌리긴 했지만 그렇다 해서 하진에게 아주 신경을 쓰지 않는 태인 것은 아니었다. 그럼 왜들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 거지, 짧게 생각하던 하진이 머잖아 입을 여는 유리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얘기 했어요? 나가서.”

“그게 궁금해서 쳐다보고 있던 거였어?”

“안에서 못 할 얘기라는데 당연히 궁금하죠.”

“그제 나갔다가 지혁이 때문에 쫓겨난 애 좀비 된 거 봤다고.”

아, 확실히 여기서 할 만한 얘기는 아니다. 숙연해지는 분위기에 하진은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를 풀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던 탓이다. 밥이나 먹죠, 네에, 입맛은 없지만……. 시답잖은 대화를 나눈 네 사람이 함께 걸음을 옮긴다. 오늘의 식사도 묽은 수프와 딱딱하게 굳은 빵이었다. 며칠째 아침 메뉴는 거의 비슷하다. 유진이 감염되고 감금되자마자 획일화된 식사 메뉴에 딴지를 걸 법도 한데, 쉘터의 사람들은 그 누구도 섣불리 불만에 가까운 의견을 입 바깥으로 내지 않았다. 사유를 논하라면 그들이 가진 깊은 슬픔과 갑자기 생겨난 업무의 고충에 대해 공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불만이랍시고 들고 일어나면 하진에게 그럼 처먹지 말라는 이야기나 듣고 가지고 있던 밥그릇마저 뺏길 것을 알고 있던 탓도 있었을 테다.

어느 쪽이든 간에, 오늘의 식사는 단조로운 주제에 간까지 맞지 않았다. 소금을 들이부었나 싶을 정도로 짠 수프 탓에 쉘터 구석에 비치한 식수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지만, 간조차 맞지 않는 식사도 사람들은 아무 불만 없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오늘따라 간이 맞지 않는 이유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탓이다. 유진마저 그렇게 쫓겨났다, 일 하나 제대로 한다고 해서 보호받지는 못할 것이라는 의미다. 다행히 하진이 분위기를 잘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큰 사건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하진도 감당하기를 원치 않는 일이 생기고야 말 것이라는 불안이 암암리에 돌기 시작했다. 그래, 일단 애초에 하진은 리더가 아니며, 이런 일을 죄다 감당해야 할 책임이 없는 사람이니까. 군말 없이 식사를 밀어 넘기던 하진이 불안한 표정으로 근처 테이블에 앉은 식사 당번을 바라보다 식판을 비우고 몸을 일으켰다. 수프를 한 입 넘기고는 놀란 표정을 짓던 상대의 머리카락을 성의 없이 몇 번 쓰다듬고 나서야 먹은 자리를 전부 정리했다. 그래, 다들 힘든 거야. 하진 씨는 그걸 알아주는 사람인 거고. 그 하진 씨도 아무 말 없이 먹는데 우리도 그냥 먹자. 말없이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이들의 침묵에는 아마 그 정도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이하진도 군소리를 안 하는데.

“하진 씨, 유진 씨는 그러니까…….”

“제 발로 나간 것으로 하고 싶다더군요.”

하나둘,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하진에게 다가와 건넨 질문에 하진은 무던히 대답했다. 유진이 한 말인 것은 맞았다, 어차피 몸 가라앉자마자 나갈 작정이었으니 그냥 내가 내 발로 나간 셈 쳐요. 그렇게 해야지 하진 씨도 편할 거 아니에요. 유진의 목소리 뒤로 유진과 하진 사이에 다른 이야기가 더 이어지긴 했었으나 하진은 일부러 그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지금으로는 불필요한 정보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자마자 적잖이 화가 난 기색으로 한숨을 내쉬던 이들이 하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말도 안 돼요, 김지혁 어딨어요?”

“자기 방에 누워 있을 겁니다만, 혼자 가지 마세요. 나한테도 칼 들고 설치는 놈인데.”

그제야 정말로 가둬야 하는 사람은 리더가 아니냐느니, 그 사람이 리더로서 하는 일이 대체 뭐가 있냐는 여론이 크기를 키워갔지만, 와중에도 리더의 편을 드는 사람들은 애당초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유진을 처음부터 쫓아내야 했었다든가, 이 모든 일은 결국 하진이 우유부단하게 리더도 유진도 막지 못했으니 일어난 일이므로 직접적인 책임은 하진이 지고 그가 나가든가 다른 방식으로 책임을 다하든가, 어쨌든 그런 행동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내뱉었다. 그 몇 마디 되지도 않는 말들에 선동되어서는 그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며 저들끼리 입을 모아 떠드는 꼴까지 죄다 듣고 그 자리에 서 있던 하진은 깊은 한숨을 내뱉고서는 내내 불만을 토로하던 사람들의 옆에 앉았다. 더 떠들어보라는 의도였음이 분명했지만,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더 말을 얹지 못했다. 리더가 다시 나와서 칼부림이라도 하면 그때는 어떡해요, 하진 씨가 도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그들의 의견에 슬쩍 동조하던 이들이 하진에게 그런 요구까지 하자 하진은 정말로 질린다는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유진이 떠나는 것만 슬퍼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그 책임까지 또 자기보고 지라는데, 저들이 동의한 리더에게는 한 마디 불만조차 말하지 못하면서 제게 와서는 아무 말이나 다 하는 걸 보는 꼴이 아무래도 달갑지만은 않았다. 당장 화를 누르고 있는 티가 나서였을까, 슬쩍 다가온 유리가 하진의 눈치를 보더니 까치발을 들고 하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주먹 푸세요, 승연이가 봐요…….”

“씨발…….”

승연의 불안한 시선을 그제야 눈치챈 듯 한숨을 내뱉은 하진이 저도 모르게 쥐고 있던 주먹을 풀고 대신 이마를 짚었다. 두통이 또 올라온다, 곤란한 일이다. 이럴 때는 평소였으면 참았을 법한 일도 참고 넘어갈 수 없게 되지 않나. 뭐라 말해야 승연이 많이 놀라지 않을까. 뭐라 말해야……. 몇 번이고 말을 고르던 하진이 입을 연다.

“내쫓아라 책임을 져라 하실 거면 저 새끼가 처음 사람들 내쫓았을 때 안 말린 사람들이나, 아니, 애당초 저거 리더 세우는 게 맞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져야지. 손 놓고 산 사람들도 본인들이면서 이제는 그냥 그 책임도 다 내 몫이라고.”

“아니, 하진 씨.”

지금까지 별다른 불만 한 번 입 바깥으로 내지 않았던 하진이다. 그러니 이 정도의 말에도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라 생각했을 텐데, 그러기엔 하진도 참은 것이 많았다. 애당초 내가 할 일이 아닌데. 그래, 애당초 김지혁이 다 했어야 하는 일을 대신 해줬더니 고마운 줄도 모르고. 거기서부터 기인한 감정에 하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잘못됐다, 그 생각에 자리에 있던 이들의 입이 순식간에 다물렸다.

“쉘터 세워진 이후부터 내내 그쪽들 지랄 받아줘, 싸우면 다 막아줘, 새벽에 일 터져도 나와서 수습해, 덕분에 근 두 달 동안은 하루에 세 시간이 넘게 자본 날이 손에 꼽습니다. 그런데 내쫓는다고. 그래, 알아서들 해. 나야말로 내 발로 나가주면 되는 거잖아.”

“하진 씨, 지금 너무 감정적…….”

“멀쩡한 사람들 다 내쫓은 새끼한테 그놈의 감정 때문에 한 마디 못했으면서 내가 지랄 좀 하니까 이제 와서 내 감정을 논해. 내가 감정이 있는 사람인 걸 알면 애당초 그따위로 대하시면 안 됐지.”

정말로 나가겠다는 듯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던 하진을 바라보던 유리가 승연의 등을 떠밀었다. 물론 그러지 않아도 승연도 나설 생각이었다. 승연은 급하게 몸을 움직여, 방 앞에 다다라서야 하진을 붙잡고서는 그의 손을 꼭 붙들었다. 그 행동 하나로 순식간에 감정이 가라앉은 듯, 하진은 승연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젓는 승연의 얼굴에 어린 울음을 마주한다. 그 시점부터 하진은 더 모질어질 수 없었다. 승연도 안다. 하진이 여기 있는 것이 하진에게 좋은 일은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승연은 안다. 평소의 하진이었다면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한 번만 더 참고 말지 정말로 뛰쳐 나가 스스로를 사지로 내몰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 장소에 애정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여지까지 버티고 선 하진의 노력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다. 하진의 노력에 대한 애정이, 승연에게는 지울 수 없는 부류에 속했다. 문을 열어 젖히려던 하진의 손길이 완전히 멎는다. 여러 번 짧은 숨을 가라앉힌 하진이 겨우 승연의 손에 이끌려 아래로 내려온다. 정말로 하진이 떠날 것을 걱정하고 있었는지, 사방으로 튀는 시선을 승연과 하진은 두 눈으로 바라본다. 우스운 일이다. 그냥 그 말을 듣고서도 참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해줬으면 했던 셈이지 않나, 하진이 마음 없는 존재도 아닌데 그냥 그렇게 대하고 싶었다는 자백들이나 다름 없지 않나. 하진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내가 진짜 나가겠다고 하기 전에 다들 잘 좀 합시다. 리더 방에서 날붙이는 다 가지고 나왔고, 날붙이 근처로 접근할 수 없게 막아놓았으니 그 손에 날붙이 한 번이라도 쥐여지는 일 있으면 주인까지 책임 물어 리더와 묶어 내보냅니다.”

“…….”

“각자 할 일 하시죠.”

흩어지라는 명령이었다. 눈치껏 자리에서 흩어지는 사람들을 보던 하진이, 그제야 열린 의무실의 문을 바라보며 실소를 터트렸다. 일이 이 지경인데 푹 자고 일어난 사람이 있네, 팔자 좋은 것도 재주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머리를 벅벅 긁은 보람이, 이제는 승연과 하진, 유리와 도영. 네 사람만이 남은 중앙 테이블로 나와 의자 하나를 끌어다 앉았다.

“하암……. 아니, 아침부터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요…….”

“잤냐? 유진 씨 쫓겨났다.”

“그것 때문에 팀장님 나가시려다가 승연이가 잡아서 남았어요…….”

충분히 예상 범위에 있었던 일인지, 보람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테이블 위에 놓인 페트병의 뚜껑을 따 안에 든 물을 목 너머로 넘겼다. 크, 살겠다. 중얼거린 보람이 입 주변을 닦는다.

“강승연 큰일 했네. 저 사람 없으면 우리 다 죽잖아.”

“잘한 건지 모르겠어요. 하진 씨 고생하는데, 매일.”

“다 죽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나부터도 말려줘서 고마운데 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한 하진의 말에야 승연은 조금 안도했다. 하루의 시작이 어수선하긴 했지만, 달리 말하면 절망적인 시작은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을 둬야 할지도 모른다고. 승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맙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바라보았다. 잘한 선택일까, 어쩐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이후, 쉘터의 분위기는 농담으로도 좋다고 말할 수 없을 지경이 됐다. 하진을 내쫓니 마니 할 때부터 예상한 일이긴 했지만 하진은 평소처럼 분위기를 좋게 풀어줄 생각도 없어보였고, 지금껏 그렇게 했으면 앞으로도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노력이라도 하든 혹은 없던 셈 치고 잊어주기라도 하든 둘 중 하나는 해야 하지 않냐며 입을 모아 비판하던 사람들도 이야기를 듣던 보람이 커피를 마시던 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리쳐 깨트리니 이제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아도 된다며 웃던 하진도 적극적으로 그를 말릴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승연은 이런 분위기가 꽤 낯설었지만, 난리를 피우는 주체가 하진과 그 측근들이라는 사실만이 조금 달라졌지 실은 엉망이 되었던 분위기들 자체는 아주 낯설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이 난장판에 한 발짝 정도는 발을 걸쳐도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보람처럼 컵을 대놓고 깨거나 유리처럼 난리를 피우지는 못했지만 괜히 시비를 거는 사람들을 째려보고 지나가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으므로.

리더가 공백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리더다운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던, 일각에서 한참 떠들어대던 목소리들에 하진은 한참이나 반응하지 않다가도 문득 말했다. 대단히 희생해서 원하시는 대로 해드려도 불만만 가득했으니 이제는 해드릴 마음이 거의 사라졌으며, 조금이라도 남은 희생정신 사라지게 하지 마시고 알아서들 리더 정해서 그렇게 하시면 되겠다고. 그게 영 힘들면 저 구석에 처박혀서 코나 붙들고 있는 지혁에게 요구해보라고, 그러면 되지 않겠냐고. 그렇게 말하면 대부분이 입을 다물었다. 가볍게 혀를 찬 하진이 담배를 입에 물며 바깥으로 나섰다. 담배 끝에 담뱃불을 붙이고 연기 섞인 숨을 내뱉는 하진은, 그렇게 한 번 나가면 밤이 될 때까지 돌아오지도 않았다. 하진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루 이틀 정도는 걱정하던 사람들도, 그러다가도 밤이 되면 보급품을 손에 한가득 안고 돌아오는 하진을 바라보면서는 그래도 그가 쉘터에 완벽히 정을 뗀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안도하곤 했다. 하진이 많은 것을 통제하지 않게 된 이후로 쉘터의 많은 것이 엉망이 되었지만 하진은 그 혼란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갈수록 혼잡해지고, 또 혼탁해졌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이 처음부터 하진이 알 바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승연에게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원래 하진은 그런 사람이다. 나쁜 의미로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애초에 쉘터 사람들의 안위는 하진이 반드시 계산해야 하는 범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구태여 정성을 기울여주는 쪽에 가까웠던 것이다. 이유를 논하라면, 그럼에도 그가 본래 희생정신이 뛰어나고 이타적인 사람이라서? 승연은 그 말을 몇 번이고 곱씹다가, 그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도영과 유리를 앉혀놓고 한참을 이야기하던 끝에 하진은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만을 얻었다. 뭐가 희생정신이 뛰어나고 이타적이야, 물론 그런 면이 아예 없는 사람은 아니지. 경찰인 이상 그런 마음이 없을 수는 없어. 그렇지만 승연아, 팀장님이 네가 오기 전에도 저런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면 그건 네가 정말 팀장님을 모르니까 할 수 있는 소리가 돼……. 저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이타적인 행동을 하려는 사람은 아니었어, 그 이유를 네가 한 번 생각해 봐, 뻔한 결론밖에는 나오지 않을 거야. 유리도 아니고 도영이 한 글자씩 다정히 내뱉는 말에 승연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이해는 하겠는데, 그 와중에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긴 탓이다. 그렇다면 하진은 왜 바깥에 나갈 때 자신에게 통보하고 가지 않는가. 예전에는 번거롭더라도 자신이 일어난 후에, 자신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 먼저 일어나서. 그렇게 나가기라도 했는데 왜 이번에는. 역시 화가 조금 나셨나. 승연은 오늘도 보이지 않는 하진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렸다. 이상하게도, 그의 웃는 얼굴이 오늘따라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좋은 일은 아니다.

말마따나 하진은 그날 이후 쉘터 안쪽보다는 쉘터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더러는 그가 아직도 쉘터 바깥에 유기된 사람들을 찾는 것 같다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그가 이제야 쉘터 바깥에서의 삶을 명확하게 그리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도영과 유리도 며칠 동안은 그래도 어딘가에는 계실 것 같다고 이야기했는데, 승연은 그 말을 들으며 저들끼리 공유하기로 한 아지트에 가 계시는 건 아닐까, 생각하다가 정확히 이틀 정도가 지나자 정말로 어디 계시는지를 모르겠다며 초조한 모습을 드러내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그것도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들끼리 꾸민 아지트에 가봤는데 없으니까 저렇게나 초조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겠나.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승연은 통행금지 시간이고 뭐고, 꼭 돌아와야 하고 뭐고. 그런 생각들을 죄다 내려놓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점호 시간이 지나도 돌아가지 않는 날이면 꼭 점호 시간에서 삼십 분이 지난 후 집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젖히면 하진이 보였다. 매일 그랬다, 자신이 없는 날이라면 매일. 달빛에 가려진 그의 표정이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다만 승연은 그저 팔을 뻗어 하진을 품에 안고는 했다. 그렇게 하면, 하진은 늘 자신을 안아 들어 다시 침대에 눕혀주었으니까.

이 일도 세 번이 반복되었을 때였을까. 어렵게 말하자면 그렇고, 쉽게 말하자면 승연이 쉘터로 돌아가지 않은 지 사흘째가 되었다는 의미다. 정확히는 보급 시간에 쉘터에 머무르지 않은 지가 사흘이 된 것이지마는. 사실 승연도, 그 모든 일이 있었으나 쉘터에 머물러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찌 되었든 하진을 잡은 사람은 자신이고, 하진 또한 승연이 머물러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 자리에 남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이상하게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버거웠다. 사유를 짚어보려 해도 명확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분위기가 많이 이상해진 탓이 가장 크긴 할 테지만 말이다. 하진이 실무에 손을 놓은 이후 정말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예컨대, 검증 없이 사람을 데려오는 일이 암묵적으로 허용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가져다 놓는 보급품에도 마구잡이로 손을 대기 시작했으며 아무도 그것을 관리하거나 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진이 언젠가 돌아와 많은 것을 바로잡아주겠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꼴이 눈에 보이는 것이. 승연은 문득 역겹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갈 수가 없었다, 머무를 마음이 들지 않아서. 하루가 다르게 모르는 사람이 들어오고 규칙은 지켜지지도 않으며, 하진이 지쳐가는 꼴이 눈에 보이는 것을 맘 편하게 지켜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사흘째가 되는 날도 일부러 돌아가지 않았다. 그날 밤에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여러 번 울렸다. 승연은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었고, 여전히 표정을 알아볼 수 없는 하진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를 향해 조용히 팔을 뻗으면 그는 아무 말 없이 승연을 마주 안았다. 이제 안아 들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품에 고개를 한참이나 묻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하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승연의 어깨에 가만히 고개를 묻고 있었을 뿐이다.

“하진 씨?”

“…….”

“하진 씨, 왜 그러세요?”

지금 보니 하진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어디가 아프신가, 승연은 그제야 걱정스럽다는 듯 시선으로 하진의 몸을 훑는다. 겉보기에 아픈 곳은 없어 보였다, 체온은 그저 평소처럼 차갑기만 했고. 그러니 더더욱 두려웠다, 그에게 무슨 이상이 있는 건지 가늠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렇게 한참 침묵하던 하진이 겨우 입을 연다.

“……사라진 줄 알고.”

“네?”

“네가…….”

띄엄띄엄 나온 말을 이해하려 이어 붙이던 승연은 곧 하진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했다는 듯 그저 하진을 마주 안았다. 그렇지. 이 사람이 보기엔 내가 갑자기 사라진 거니까. 늘 있는 곳에 오늘도 있으리라는 확신은 어디에도 없다. 그게 지금 상황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승연은 조용히 하진을 끌어안은 채 등을 느리게 토닥였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어디 안 가요, 여기 말고는 갈 곳도 없는걸요. 장난스럽게 내뱉은 승연의 목소리에 그제야 안심이라도 한 건지, 하진은 평소처럼 승연을 안아 들고 승연의 침대로 향했다. 승연을 침대에 눕혀두고서는 늘 본인은 소파에 가서 눕든, 바닥에 가서 눕든 승연에게 크게 거슬리지 않는 곳으로 이동하곤 했는데 오늘의 하진은 그러고 싶은 마음조차도 없어 보였다. 승연을 구석에 눕혀두고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하게 몸을 옆으로 눕힌 하진이 승연을 바라본다. 하진의 긴 고민을 알고는 있는 건지 알지도 못하는 건지, 승연은 어느새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하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와.”

“왜 그러시지.”

“머리가 안 닿아……. 근육 때문에 그래요? 나 진짜론 처음 봐요.”

굳이 대꾸하지 않은 하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만 신경 쓰지, 뭐든 간에 나만…….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은 하진은 팔을 뻗어 승연을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제야 하진이 무슨 의도로 제 곁에 누웠는지 알겠다는 듯, 승연은 하진의 품에 고개를 묻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또 나갈 거야? 안 그럴게요. 조곤조곤 나눈 대화가 안정궤도를 찾는다. 두 사람은 이 정도면, 이것이면 서로 안심할 수 있음을 그제야 마음 깊이 깨달았다. 하진도 이제 시간 나는 대로 바깥을 돌아다니지 않을 것이며, 승연도 보급 시간이 되면 쉘터에 머무를 것이다. 그 깨달음이 주는 안정감이 남달라서, 승연은 아무 말 없이 하진의 품에 고개를 부볐다. 그런 승연의 행동이 귀여워서인지, 좋으니 행동마저도 귀여워 보이는 건지. 어느 쪽인지 명확하지는 않았으나 하진도 별다른 말 없이 웃으며 승연의 등을 토닥였다. 그래, 오늘만 여기서 자고 일어나자. 오늘은 그래도 괜찮지. 마지막일 테니까.

그렇게 자고 일어난 두 사람은 평소처럼 아침 식사를 챙겨 먹고, 과거 하진이 두고 갔던 라디오를 켜 답지 않게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이나 새로울 것 없는 좀비에 대한 정보를 듣다가,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나 쉘터로 향했다. 왜 자꾸 나가냐는 유리의 타박이나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았다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도영을 보니 우습게도 정말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아, 그래. 걱정하셨겠구나. 그제야 그런 생각을 한 승연은 앞으로는 별일 없이는 말도 하지 않고 나가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두 사람에게 얄팍한 약속을 건넸다. 그렇게 승연도, 하진도.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게 두 사람에게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마는.

그로부터 이틀 즈음이 더 지나고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승연이 쉘터에 오래 머무르게 되었다 해서 한 번 난장판이 된 공간이 제정신을 찾지는 못했다. 하진이 이곳에 다시 신경을 쓰게 된 이후로는 그나마 조금 나아지긴 했다마는, 새로 온 사람들의 적응 문제도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고 며칠 전 유진을 비롯한 감염자들이 죄 내쫓길 때 리더에게 품게 된 불만을 채 가라앉히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전자야 하진이 공을 들이기 시작했으니 대강 해결되긴 했다만, 후자는 그러지도 못했다. 하진이 나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탓이다. 와중에 리더는 사과를 하고 분위기를 풀지는 못할망정 또 한 구석에서 사람들을 선동하기 바쁘고……. 오늘은 뭐라 떠드나 볼까. 한창 난장판이 된 쉘터의 분위기를 지적받은 건지, 의자에 기대앉아있던 리더는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고 있었다.

“솔직히 나 없을 때 대장 노릇 하던 게 누군데, 이하진이잖아.”

또 내 이름. 하진은 욕을 한 바닥 쏟아놓을지 혹은 이번에야말로 뒤집어엎을지 고민하듯 책상 끄트머리를 붙들었다. 의도를 바로 눈치챈 도영이 하진에게 달려가 하진의 팔을 붙든다. 아, 진짜로 엎고 싶은데 왜 말리지. 하진은 세게 인상을 구기며 도영을 바라본다. 제발요, 제발, 지금 승연이 있어요, 팀장님, 제발요! 급하게 움직이는 입 모양을 바라보던 하진이 그제야 손에 실은 힘을 푼다. 그래, 애가 보는데 한바탕 뒤집어엎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진은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더 떠들어보라는 듯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하진의 시선은 사실 정말로 더 떠들어보라는 의미는 되지 못했겠으나, 눈치가 없는 건지. 리더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자꾸 나가니까 사람들이 중심도 못 잡는 거 아냐. 쟤가 개별행동 안 하고 이탈만 안 해도 이럴 일이 없…….”

“애초에 네가 제대로 했으면 하진 씨가 그 고생 할 필요도 없었어, 지금도 다시 네가 안 하는 거 수습해주고 계시는데. 생각이 없으면 염치라도 있어야지, 지금까지 고마웠으니 내가 제대로 하겠다고 말해도 모자랄망정, 뭐?”

바로 치고 들어온 것은 의외로 보람이었다. 말마따나, 리더의 태업으로 가장 많이 고생한 사람이 누구냐 묻는다면 첫째로는 당연지사 하진의 이름을 말하겠으나 두 번째로 고생한 사람이 누구냐는 물음에 보람 외의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을 테다. 하진이 분위기를 가라앉히면 부상자를 데리고 와 치료해주는 것은 보람의 몫이었고, 심지어 보람은 전문적으로 남을 치료하는 데에 매진하던 사람도 아니었으니 그 고생이 배로 느껴졌던 탓이다. 그러니 사실 보람과 하진 사이에는 일종의 전우애가 있기 마련이었는데, 그 중요한 감정들이 리더에게는 조금도 자라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태업을 방증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것마저 하진 씨 탓을 해. 욱하는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한 보람이 씹어뱉듯 말하자 주변 사람들도 조금씩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야 한 사람을 몰아가는 데에 여러 사람이 말을 얹는다면 선동되기 쉬운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지만, 대놓고 반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매일 같이 살 맞대고 살아가던 사람이, 아플 때면 제일 먼저 찾아갔던 사람이라면. 다들 동요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리더가 그대로 보람의 멱살을 쥐어 잡는다. 질 마음은 애당초 없었다는 듯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세게 내려친 보람이 비틀거리는 리더의 손에서 벗어나 빠르게 하진의 뒤로 숨었다. 뭘 하는 거야. 중얼거리던 하진도 결국 보람을 제 등 뒤에 숨겨주고는 리더를 가만히 바라본다. 이 짓도 지겹다, 잠깐이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을 도와주려 했던 의도를 알기 때문에 굳이 입 바깥으로 내지는 않았다마는.

리더의 얼굴에 일순 당황이 어렸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까지 보람이 치료 외의 분야에서 비난에 가까운 말을 했던 적이 있던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람 자체가 시니컬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사적인 영역까지 뻗거나 불만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았으니 그저 그런 성향인가, 하고 넘길 수 있는 정도였는데. 그럼 저 성질머리까지도 이하진이 전부 컨트롤했다고? 지금까지 그렇게 사람 하나하나를 다 챙겨다 이 상태를 유지한 거라고. 그게 말이 되나. 저렇게 한둘 정도만 튀고 나머지는 얌전한 사람인 게 맞겠지, 아마도. 애써 생각을 제가 유리한 방향으로 돌린 채로 헛웃음을 흘리던 리더가 입을 연다.

“둘이 정분났어? 꼭 붙어서 아주…….”

“대꾸할 가치도 없군.”

작게 중얼거린 하진이 들고 있던 클립보드를 리더의 얼굴에 대고 던졌다. 저놈의 코는 또 고쳐도 이제 회생이 어렵겠군. 그런 의미 없는 생각도 잠깐 하다가, 뭐 어떻게 잘 해보면 될까, 그런 생각도 잠깐 하다가……. 어쨌든 제 사정과는 영영 먼 처지에 있을 생각이라는 것을 자각한 이후로는 더 생각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개소리였고 심지어는 여기 있는 사람들도 그 사실만은 다 알 것 같았는데, 왜 지금 당장 저 멀리 있는 승연의 눈치를 살폈는지는 모를 일이다. 승연도 불쾌해하는 기색이긴 했지만, 그것이 자신을 향한 불쾌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하진은 코를 붙들고 있는 리더를 바라보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고만 있어도 짜증이 일었다. 근데 이게 내 잘못인가, 제 주제도 모르고 저러고 있는 놈 잘못이지.

애당초 대체로 맞는 생각이었다, 모든 사람을 통제한 것이 하진이라는 사실을 포함하여 리더가 판단하고 부정한 모든 것들이. 다만 리더의 오해가 딱 하나 있다면, 한둘 정도면 튀고 나머지는 얌전한 사람인 것이 아주 아닌 것도 아니겠지만 하진 스스로가 가장 집중적으로 제어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스스로의 성질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죄다 승연에게 잘 보이기 위한 수작이긴 했지만, 이제는 수작이고 뭐고 성질 한 번 부리지 않으면 말라 죽겠거니 싶었다. 얌전히 당하고 있고 싶지도 않았으니 하진은 그저 자리에서 일어선다. 또 나간다고 하려나. 순간 불안한 시선이 하진에게 가닿았다만 하진의 표정은 지나치리만큼 초연했다, 억지로 화를 누르는 사람들이 응당 그러하듯이. 그러니 또 나간단 소리는 하지 않겠구나. 본능적으로 직감한 하진의 동료들이 이제야 조금 마음이 편하다는 듯 승연을 붙들고 자리에 누웠다. 이제 구경이나 하면 돼. 네? 네. 심각한 상황과는 다르게 평안한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승연은 엉거주춤 그들을 따라 누웠다. 누워 있으니 좋긴 하다, 확실히. 웃긴 생각인가……. 그것이 정말로 우스운 생각인지 아닌지를 가늠하기도 전 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더 있다간 속이 터져 죽든 스트레스로 쓰러지든, 하여간 몸이 성치는 못할 것 같은데.”

“…….”

“네 면상 보면서 생각 정리하는 건 힘들 것 같아서 나갔다 온다. 나갔다 온 사이에 사람 몇 사라지거나, 보람 씨 비롯한 내 동료들 다치면 그땐 진짜 죽여버릴 거니까 알아서 처신해.”

내, 동료들. 쉘터에 균열을 일으키지 않으려 애쓰던 하진이 처음으로 직접적인 선을 그었다. 너는 내 동료로 생각하는 범주 내에 있는 사람이 아니며, 자신은 그런 사람을 위해 희생할 만큼 대단한 희생정신을 안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어쩌면 쉘터의 사람들도, 죄다 자신이 생각하는 동료들은 아닐 수도 있다고. 기민한 사람들은 그 의도까지 읽어냈겠지만 실은 그럴 만한 분위기도 아니었고, 리더의 초점은 오로지 죽여버린다는 말에 맺혀 있었으므로 대화 중에 이 이상으로 하진의 의도가 드러날 일은 없었다. 그나마 의도를 눈치챈 승연과 유리, 도영, 그리고 보람까지. 네 사람은 급하게 시선을 옮기며 시선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저렇게 대놓고 말하신다고? 아니, 원래 저렇게 생각하시는 티는 났잖아요. 입 바깥으로 내는 건 좀 다른 문제 아니야? 하진 씨 그냥 쉘터 사람들이면 다 자기 동료라고 생각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승연아, 넌 뭘 모른다……. 말 한마디 없는 대화에 승연이 반박할 즈음 목소리의 끝을 떨며 리더가 입을 열었다.

“……경찰이 그런 말 해도 돼?”

그래, 이하진은 경찰이다. 그렇게 살아온 시간이 길었다. 경찰이 아닌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삶을 감내해왔으므로 그런 지적도 제법 합당한 지적처럼 느껴지기야 했다만, 이야기를 듣고 있는 하진이 짜증이 날대로 난 상태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렇게 유의미한 지적도 되지 못했다.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린 하진이 대꾸한다.

“일반인은 사람한테 칼 휘두르고 멀쩡한 사람 내쫓아도 되나?”

그 말에 리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곧 자신을 바라보는 하진의 눈빛에 한 번 크게 몸을 움찔거리다가, 조용히 시선을 옮기다 못해 아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심한 새끼. 작게 중얼거린 하진도 말없이 쉘터 바깥으로 나간다. 당장 분위기가 수습된 것을 느낀 네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가 볼까요? 놔둬, 좀 혼자 둬야 해. 너무 혼자 못 계셨어, 원래 사람 있으면 스트레스받는 사람인데. 엥, 안 그런 것 같던데. 몰라서 그래……. 시답잖은 대화가 잠시 오간다. 그럼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거겠지, 오늘은. 그런다고 정말로 신경 쓰지 않을 건 아니고, 신경 쓰이지 않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승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밀린 일들이 있긴 하였으므로 일을 하나둘 처리하다 보면 하진도 돌아오겠거니, 그런 막연한 기대, 혹은 확신을 안은 채로.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뜬 하진은 예상과 다르게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승연이 모든 기록물을 한 번씩 훑고 다시 정리하는 동안에도, 보람이 의약품을 정리하고 혹시 주변 사람이 아프면 먹이기 위해 몇 개를 빼돌리는 동안에도, 유리가 리더의 방문 앞을 기민하게 감시하는 동안에도, 굳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도영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헛소리나 하다 이마를 얻어맞는 동안에도. 그러다 말고 오늘은 새로운 정보가 있을까 하며 모두가 라디오 앞에 모여 일전에 하진이 일러준 주파수에 채널을 맞추고 내용을 들을 때까지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정보가 연구소에서 실험에 도움을 주실 분들을 찾고 있다는 의례적인 안내 문구로 맺어질 즈음에도, 그리하여 노을이 눈에 보일 지경에 다다라서도. 기껏해야 한두 시간이면 돌아오겠거니 싶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도영이 문 바깥을 흘끔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는 것을 여러 번 반복했다. 이제 한 시간만 더 있으면 저녁 먹을 시간인데 어딜 가셨을까. 그 자리에 있는 네 사람이 다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모두가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말고 결국 승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보 같은 일이다, 그냥 어디 있는지 찾으러 가면 될 일 아닌가. 이렇게까지 눈치를 볼 일도 아니었다, 하진이 설마 찾아간다 해서 왜 여기 왔냐는 소리를 할 사람도 아니었고. 어차피 가봤자 내 집에 가지 않았겠는가, 내 집인데 왜요, 그냥 내 집이라 온 건데 하진 씨가 왜 뭐라고 해요. 그렇게 투덜대면 이길 수가 없다는 듯 웃어버릴 사람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승연은 유리에게 간단한 양해의 말을 전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다녀와, 조심하고. 너 다치면 팀장님 우리한테 성질낸다. 이제는 당연해진 걱정 섞인 말을 들으며 승연은 웃었다. 괜찮다는 듯이, 그리고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는 듯이. 그렇게 승연은 쉘터 바깥으로 나섰다. 그런데 여기, 원래 이렇게 담배 냄새가 심했던가? 아닐 텐데. 아, 혹시 다른 생존자가 있다거나.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하진 씨가. 그렇게 생각한 승연은 담배 냄새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동화 속 주인공은 바닥에 떨어진 과자나 빵 따위를 주워가며 길을 찾았다는데 나는 담배 냄새로 사람을 찾고 있네. 우스운 일이었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향을 따라간 곳에 선 검은 인영을 본 탓이다. 보통 사람보다도 큰, 평소였다면 겁이라도 지레 먹었을, 그러나 그 주인이 누군지 알아 두려워할 수 없는…….

우습게도 하진은 쉘터의 바로 앞, 본래의 규칙대로였다면 쉘터에 사람을 받아들이기 전 이상 현상이 나타나지는 않는지 하루 정도 지켜보는 격리소 앞에 앉아 있었다. 아니, 집에 안 가고? 승연이 의아한 얼굴로 하진을 바라볼 즈음에야 하진도 사람이 왔다는 걸 눈치챈 건지, 흐릿한 시선을 애써 들어 올리고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가온 사람이 승연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물고 있던 담배를 들고 있던 재떨이에 비벼 껐다. 이젠 내 집에 들어가는 것도 조심스럽나, 혹은 싫나. 그런 거면 어떡하지. 그나저나 사람이 왜 저렇게 정신을 못 차리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왜. 약이라도 했나. 보람 씨가 지금은 그런 거 없다고 했는데. 그럼 왜 저러는 거야. 복잡한 감정이 얽혀 염려인지 짜증인지 모를 승연의 목소리가 섧게 흘러나왔다.

“……여기 계셨네요?”

“당신 집에 가고 싶었는데.”

충분히 예상했던 질문이라는 듯, 하진은 그렇게 말하며 휴대용 재떨이에 쌓인 담배꽁초를 바라보았다. 사태 전에도 들고 있던 재떨이였는데 이것만은 남에게, 특히 도영에게 넘겨주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하진이 그렇게 말하고는 말을 더 잇지 않으려 해서, 승연은 조금 짜증이 난다는 듯 하진을 바라보다 말고 하진이 든 재떨이를 빼앗아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승연의 힘에 뺏길 리도 없었는데 하진은 아무런 반항 없이 승연의 손에 재떨이를 넘겨 주었다. 이렇게까지 쉽게 뺏길 분이 아닌데. 의심 어린 눈초리로 하진을 바라보던 승연은 어느새 꽉 찬 재떨이를 바라보며 경악을 삼켰다. 담배가 쌓이게 둘 만한 사람이 아니지 않았나, 지금까지 담배 냄새가 나는 꼴은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그렇다면 이게 다 지금 피운 거라고. 승연의 가는 눈빛에 하진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담배 냄새 배게 하면 안 될 거 아닙니까.”

“아니, 하…….”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 그래도 집에 가는 편이 마음이 낫지 않았겠냐고 해야 할지, 사람이 왜 이렇게 바보 같고 멍청하냐고 얘기라도 해야 하는 건지……. 하여간 이상한 사람이다. 자꾸 마음만 쓰게 하고. 그나저나 갑자기 담배를 많이 피우면, 특히 공복에 그렇게 하면 꽤 어지럽다고 유리 씨가 그랬는데. 하진 씨는 괜찮을까. 그제야 승연의 시야에 벽에 기댄 하진의 모습이 보였다. 하긴 아까도 초점이 좀 덜 잡히셨던 것 같고, 그렇게 다가가고서야 내가 누군지 알아보셨으니까. 그냥 담배 많이 태워 생긴 부작용이었구나. 왜 진즉 눈치채지 못했지, 힘들어할 수밖에 없는데. 승연은 조금 찡하다는 듯 하진을 바라보다 결국 그의 옆에 앉았다. 담배 냄새는 조금도 달갑지 않았고, 하진의 꼴을 보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이 모든 것이 하진의 잘못인 건 아니니까. 사실 하진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내가 떼를 쓰고 싶은 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승연은 조용히 하진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다.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승연을 바라보던 하진이 몸을 기울여 승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나마 한 번도 담배는 쥐지 않았던 손이다. 평소 같았으면 양손으로 번갈아 가며 피우든 말든 스스로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오늘만큼은 담배를 쥐지 않은 손을 남겨두고 싶었다.

왜 그랬던가. 이유를 정말 모르나. 아니, 알고 있었지. 강승연이 결국 자신을 찾으러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혹은 찾으러 나와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후자에 가깝기야 하겠다, 하진이 보는 승연은 겁이 많은 사람이었으므로 자신 하나가 오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구태여 나와볼 수고를 더하지는 않을 것 같았던 탓이다. 지난번에도 그냥 우연히 마주쳤던 거 아닌가. 나를 찾으러 나온다는 건 핑계였을 테고. 그래도, 혹시 만난다면. 손을 잡거나 뺨을 쓸거나, 그것조차 어렵다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어서. 하진은 말없이 승연의 얼굴을 바라본다. 자신에게 와닿는 시선을 마주한다. 입이라도 맞추고 싶은 기분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그런 하진의 눈빛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는 승연의 모습에 하진은 결국 조금 웃어버렸다. 됐다, 정말. 애 데리고 뭘 하는 거야,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승연은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자신에게 그다지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서, 승연은 일부러 눈을 가늘게 뜨고 하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즐겁다는 듯 들리는 하진의 웃음소리가 곧 달갑게 느껴져 승연은 아예 하진의 무릎 사이에 들어가 앉고는 편하게 그의 품에 기댔다. 잠시 몸을 움찔거리던 하진이 별말 없이 승연을 뒤에서 안은 채로 어깨에 고개를 기댄다. 좋았다, 정말로. 좀비고 뭐고 쉘터고 뭐고, 리더고 뭐고 인간관계고 뭐고. 이렇게만 살아갈 수 있다면, 승연을 안은 채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이대로 세상에서 뚝 떨어져 도태되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지금 같은 꼴이면 오히려 그런 것이 포상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혹은 우스운 생각을 하고 있자면 승연이 고개를 돌려 하진을 빤히 바라보다 가볍게 웃었다. 그 웃음 하나면 모든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았다. 애당초 이렇게 나와서 줄담배를 피울 일도 아닌 것 같았고, 짜증에 잠겨 있을 일도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승연이를 보면 되니까. 승연이를 보고 있으면……. 무언가를 더 생각하던 하진이 곧 더 생각하지 않겠다는 듯 승연의 어깨에 고개를 완전히 파묻었다. 그게 퍽 즐겁다는 듯, 명랑한 웃음소리를 흘리던 승연이 조금 더 편한 자세로 하진에게 기댔다. 하진이 워낙 피워댄 탓에 코끝에는 담배 냄새가 맴돌았고 심지어 날씨는 조금 더웠으며, 바깥에서 이렇게 있다가 좀비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이상하게도,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진만은 이것이 어떤 마음인지 이해해줄 것 같았다, 승연 자신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며 감각이었음에도, 하진만은.

하진은 손을 옮겨 천천히 승연의 손을 붙들었다. 승연의 손등을, 손가락 마디를, 손가락 틈 사이를 느리게 훑는다. 조용하지만 노골적인 손길에 승연이 하진에게로 시선을 돌리려 할 즈음, 승연을 안은 하진의 팔에 힘이 실렸다. 돌아볼 필요는 없다는 의미임을 눈치챈 승연이 다시 정면을 바라보다 시선을 툭 떨군다. 그러고 보면 맨손인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오늘은 맨손이다. 아니, 나랑 있을 때는 꽤 자주 그랬나. 어쨌든 간에. 승연은 이제야 하진의 손을 제대로 들여본다. 손가락 부분은 왼손 검지와 중지 사이 첫 번째 마디 즈음에 남은 굳은살 외에는 이상할 정도로 깨끗하지만, 손등에는 베인 자국이나 화상 흉터 따위가 남은 손. 남들이 보았을 때는 흉하다고 할 법도 한데, 손 모양 자체는 예뻐서 그런 건지, 하진의 손이라 그런 건지. 승연은 이상하게 이 손이 좋았다. 하진을 따라 손가락 사이의 굳은살을 매만지던 승연이 고개를 문득 기울였다. 펜을 자주 잡으시나 보네, 아. 하긴 다이어리도 계속 쓰고 계셨으니까. 경찰이기도 했고. 상념을 이어가다 보면 문득 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담배 싫어해요?”

“네.”

고민도 없이 내뱉은 승연이 아차, 하며 하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 보면 흡연자들은 정말 힘들 적에 담배를 많이 찾는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하진 씨도 사실 많이 힘들었던 게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담배를 싫어한다는 말이 조금은 철없이 들렸을지도 모르고, 하진에 대한 배려가 없는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몰랐다. 어떡하지, 언짢아하실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승연의 고민이 무색하게도 하진은 곧 웃음소리를 흘리더니 승연의 머리카락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그런 승연의 솔직함이 좋다는 듯이. 그 손길에야 승연은 조금 안도했다. 귓가에 바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그리고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어느 하나 싫은 구석이 없었기에…….

“그럼 끊을게.”

물론 이런 말은 조금 갑작스럽긴 했지만. 놀란 얼굴을 당장 보여주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짤막하게 생각하던 승연이 눈을 굴리다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힘들면 피우셔도 돼요, 제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냥 그러고 싶어, 내가.”

그냥 네 맘에 들게 행동하고 싶어, 내가. 그렇게 말하려던 하진은 애써 말을 골랐다. 그렇게까지 힘든 것도 아니고, 사실. 그냥 담배 생각이 좀 났을 뿐인데 끊으려면 끊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몸에 좋은 것도 아닌데 피워서 뭘 하나 싶고. 주절주절 이어지는 하진의 변명을 귀에 담던 승연이 이내 모르겠다는 듯 하진의 품에 다시 고개를 기댔다. 정말, 내 눈치를 볼 필요도 없는 사람이 종종 이렇게까지 내 눈치를 본다. 나는 그게 좋았던가, 아니, 조금 미안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아주 싫은 건 아닌 것 같기도 해. 그렇게 생각하던 승연이 결국 조금 웃었다. 그 웃음 앞에서 하진은 늘 어쩔 도리를 몰랐기에, 하진 역시 조금 웃어버렸다.

어쩐지 당장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진도 나와서 줄담배를 피울 정도였고, 승연도 모처럼 쉘터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숨을 돌리던 참이었다. 물론 집에 갈 때도 있었다마는, 실내에 있을 때와 실외에 머무를 때의 기분은 완전히 다른 것을 모르지 않는다. 지금은 완벽히 안전한 실외니까. 승연은 하진을 흘끔 바라보다 그대로 손을 뻗어 하진의 뺨을 쿡, 찔렀다. 왜 그러냐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을 바라보고는 시답잖다는 듯 웃어버린다. 진짜 유치하고 웃기다, 우리 둘 다. 다를 바 없는 생각을 머릿속에 품고 있었던 건지 하진도 곧 손을 뻗어 승연의 한쪽 뺨을 가볍게 주물렀다. 손힘이 센 사람이니 제법 아플 줄 알았는데, 아픔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보.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을 애써 내려놓을 의지는 없다는 듯 승연은 하진의 손을, 얼굴을,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드물게 즐겁다는 듯, 웃는 표정을 도저히 감추지 못하는 그를 보면 마음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든다. 그러니 어느 순간부터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큰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하진은 의아하다는 듯 승연을 바라보다가도, 자신 역시 승연을 바라보면 눈을 맞추지 못할 때가 있었으므로. 제가 의아해할 일은 아니라는 듯 다시 시선을 돌렸다. 손을 내려 승연의 손을 다시 맞잡으면서.

몇 없는 휴식처였다, 서로는 서로에게.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두 사람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결국 돌아가자는 승연의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가지 않으면 걱정할 사람들이 있고, 곧 보급 시간이니까. 내일은 함께 뭘 하자고 할까. 주변 사람들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거라면 같이 가보자고 할까, 어제 담배도 그렇게 피우신 거 보니 정신적으로 피곤하신 것 같은데 같이 한 번 쉬러 가자고 꼬셔볼까. 어느 쪽이든 간에 하진은 웃으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주겠다고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행동이, 섬세함이라곤 조금도 없이 그저 너라면 다 된다는 듯 행동하는 것도 승연은 새삼스럽게 좋았다. 보급을 마친 두 사람이 언제나처럼 두 사람의 쉼터로, 비좁은 방으로 들어섰다. 승연을 흘끔 바라보다 다이어리를 쓰는 하진을 승연은 기다려주고, 조용히 잠드는 밤. 내일의 햇살은 두 사람을 해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 날, 전례 없는 소음에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에서 깨어났다.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오는 비명이 이다지도 선명하다. 바깥으로 나간 것이 아닌 이상 좀처럼 들을 일 없던 소리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혼란스러운 낯의 승연과 달리 하진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를 다시 귀에 담았다. 총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최소한 김지혁이 총을 들고 난리를 피우고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의미다.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연유로 일어난 난리인지 알 수가 없었으니 나쁘다면 나쁘고, 총에 맞아 머리 날아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 그렇게 생각하면 나쁠 것도 없다. 아니지, 잡념을 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하진은 곧바로 문을 밀어젖혀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쉘터 입구에 이상하리만치 사람이 모여있었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진과 함께 나갔다 물렸던 동료 한 명이 그 자리에 있었다, 눈동자를 까뒤집은 채로. 내쫓았으니 당연히 좀비가 되었을 것 아닌가. 도대체 누가, 문을 열어서, 함부로. 사람을 받는다고 설치다가 쉘터 안에 좀비를. 파악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린 동료의 동생이 상대를 붙들고 있었다. 여깄었구나, 잘 왔어, 보고 싶었어. 정신을 놓은 듯 중얼거리는 그의 어깨에 이빨 자국이 남는다. 고통스러운지도 모르는 건지, 어깨에서 피를 뚝뚝 떨어트리던 그의 동생이 선명한 초점으로 리더가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아니, 고통을 모르는 게 아니다. 차라리 저건 복수를 위해 그를 이곳으로 데려온 방향에 가깝지 않겠는가. 하진을 뒤이어 따라 나온 승연이 그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몸을 작게 움츠렸다. 소름이 돋았다, 진심으로. 그때, 아래에서 잔잔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형, 다시 인사해야지……. 쉘터 사람들한테, 응?”

사방으로 울리는 비명, 걸어 들어오기 시작한 좀비. 소리를 듣고 이끌린 건지 열린 문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하는 좀비 무리까지……. 하진은 이를 갈며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죽이려고 작정한 것이다, 자신의 가족을 해치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을, 그를 방관한 사람들을. 그의 의도를 눈치챈 사람들이 급박하게 리더가 머무른 방의 문을 두드린다. 무슨 소리야, 짜증 어린 낯으로 문 바깥으로 나오던 그가 밀려 들어오는 좀비들을 보고 비명을 내질렀다.

“이하진, 저거 안 막고 뭐……!”

“야, 팀장님이 저걸 어떻게 알고 막아!!”

“저 사람도 그쪽 아니었으면 미칠 일도 없었던 사람이잖아요!!”

저 사람? 그 말에야 리더는 쉘터의 문을 연 사람을 바라본다. 아아, 저 사람이……, 그러니까, 누구더라. 잘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는 리더에게 달려가 뒷통수를 후려친 하진이 급하게 주변을 둘러본다. 퇴로, 퇴로부터 확보해야 했다. 여기가 괜히 쉘터라고 불린 건 아니니 앞뒤로 나갈 구석은 있으니까. 입구가 뚫렸다면 다른 출구도 있는 법이다. 어안이 벙벙한 낯으로 하진을 바라보던 리더가 급하게 방으로 뛰어 들어가 꼭 필요한 짐을 챙겨 나왔다. 그 와중에 손에 총을 챙겨 든 모습을 확인한 하진이 고맙다는 듯 눈짓하더니, 리더의 손에서 총을 뺏어 들어 제 손에 쥐었다. 야, 이거 너 쓰라고 가져온 거……. 더 말하기도 전 하진의 총알이 입구에 몰린 좀비를 꿰뚫었다. 좀비들의 시선이 소음의 방향, 하진과 리더가 선 곳으로 향했다. 노린 대로 됐다는 듯, 하진은 그제야 조금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강유리, 윤도영. 생존자 최대한 데리고 A구역으로!”

“네!”

“승연아, 여기! 이쪽!”

A구역? 리더는 자신도 들어보지 못한 구역이라는 듯 여러 번 눈을 끔뻑였지만, 하진은 리더의 무지에 맞춰 줄 시간이 없다는 듯 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좀비가 사람만큼 빠르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유리와 도영이 승연을 비롯한 일반인들을 창고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뭐가 있다고? 의아한 낯으로 따라 들어간 승연이 철제 선반을 치우자마자 모습을 보인 비밀 통로를 보며 입을 벌렸다. 아니, 저런 게 있었다고. 뒤이어 들어온 리더도 놀란 낯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진이 다시 리더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놀랄 새가 있냐 타박을 주지만 않았어도 조금 더 오래 넋을 놓을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아니었다.

이미 좀비에게 뜯기기 시작한 사람들은 과감하게 등지고, 하진은 좀비를 따돌리기 위해 한 번 쉘터 바깥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오고는 아직 물리지 않은 사람들까지 죄다 데려와 창고 안에 욱여넣었다. 창고 문을 한참이나 막고 있던 하진이 유리가 신호를 주자마자 문을 막았던 몸을 떼고 유리가 열어둔 철문 안으로 몸을 던졌다. 바닥을 구른 하진이 바로 몸을 일으켜 유리과 함께 문을 막는다. 쾅, 쾅! 철문을 두드리는 육중한 소리가 한참 들렸으나 안쪽 구역으로 들어간 그 누구도 아무 말 않은 덕인지 오래지 않아 소음이 멎었다. 주변에 마땅한 인기척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마음이 조금은 풀어진 건지, 벽에 기대 서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주저앉는다. 문고리에 쇠지렛대를 끼워 열리지 않게 고정한 하진 또한 그제야 한숨 돌렸다는 듯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그제야 쉘터 안에 자신이 알지도 못한 구역이 있었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낀 건지, 불만 가득한 낯의 리더가 벽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이게 다 뭐냐, 처음 보는데.”

“너희 아버지께서 알려주셨다.”

도영과 유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사실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하진은 객관적으로 봐도 시간이 없는 사람이었고 도영은 단번에 이런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유리야 하진에 비해서는 시간도 많고 이런 것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머리는 되는 것 같았는데, 이정도 정교함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하진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만큼은 자명했고 그가 아니라면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을 테니까. 그러니 세 사람만 알고 있는 이상 신빙성이 없는 말은 아니라고, 자리에 있던 대부분이 생각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리더는 그 사실이 못내 불만스러웠다. 자신의 아버지가 남긴 흔적인데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도 짜증이 났고, 이 모든 일이 사실 자신만의 탓이라고 말하기에도 어폐가 있는 노릇인데 모든 사람이 그런 것마냥 구는 것도 짜증이 났다. 리더는 나인데, 왜 아무도 그런 취급을 하지 않는 건지. 내가 그저 만만하게만 보이는 건가. 장난해? 단 세 음절만을 중얼거린 리더가 짜증 어린 손길을 뻗어 벽을 세게 내리쳤다. 그때였다, 사라진 줄 알았던 외부의 소음이 다시 들려온 것이.

쾅! 다시 울리기 시작한 몸 부딪히는 소리에 안에 있던 모두가 숨을 삼켰다. 리더의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리더의 등을 세게 내리쳤지만 그런다 해서 다시 몰려든 좀비들이 떠나갈 일은 없다. 속으로 있는 욕이든 없는 욕이든, 할 수 있는 말은 죄다 곱씹던 하진이 몸을 일으켰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쇠지렛대를 붙든 하진이 짧은 숨을 내쉰다. 빼면 다 죽는 건데, 그렇게 소리치려던 사람들도 하진이 쇠지렛대를 잡고서 소음이 줄어든 것을 인지하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그냥 잡고만 있어도 확실히 소리는 덜 들리겠지, 게다가 하진 씨는 힘이 좋으니까 버티실 수 있을 거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하진의 눈에는 보인 것인지 하진은 잠시 사람들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그러다 승연에게로 시선이 머문다. 그렇게 생각하면, 버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버텨낸다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러다 뚫리면 몇 배로 위험해지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은. 하진이 승연을 바라본다.

“내가 열어주기 전까지 나오지 마.”

“네? 하, 하진 씨. 그럼 하진 씨는…….”

“열어주러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하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이대로 있다면 모두가 죽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하진 씨는. 무사히 돌아오실 수 있나. 그럴 수 있는 환경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붙들 수는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하진의 시선 속에 든 다정을 알고 있었던 탓이다. 승연은 한참 동안 눈을 굴리다가, 또 아무 말도 없이 시선을 내리깔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진 씨인데. 무턱대고 뛰어들려 하시는 건 아니겠지. 뭔가 생각이 있겠지. 그렇게, 뻔히 아닌 줄 알면서도 스스로를 속이기 쉬운 핑계를 서두에 세우면서.

승연은 마른 침을 삼켰다. 곧이어 계획을 말하러 간 건지, 유리와 도영에게로 몸을 옮긴 하진이 유리의 끄덕임을 보고 나서야 다시 승연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의 손을 꽉 잡았다가, 처음 만났던 날처럼 혹시 모르니 챙겨두라며 자신이 내내 들고 다니던 무기 하나를 다시금 쥐여주고는 몸을 일으킨 하진이 옅게 웃으며 승연의 머리를 흩듯 쓰다듬었다. 우습게도, 그 행동 하나만으로 하진은 무사히 돌아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지, 정말 대수롭지 않은 행동 하나일 뿐인데. 그게 마치 우리의 영원과 꾸준함을 증명하는 모습이 되는 것만 같았다.

“나 나가자마자 문 닫아. 승연이 혼자 힘으로 어려우면 강유리, 네가 뒤에서 총 쏘고. 윤도영 네가 도와주고.”

“네.”

“네!”

곧 하진이 몸을 기울여 승연의 귓가에 입술을 댄다. 몸을 크게 움찔거린 승연도 오래지 않아 그가 속삭일 말을 기다리듯 침묵했다. 곧 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나보다 머저리들이 먼저 문 열면 저기 있는 책장 치우고 안으로 들어가요. 일주일 정도 버틸 수 있는 물자는 있어.”

“……조심하셔야 해요.”

어차피 막을 수 없다면 무운을 빌어주는 편이 낫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진의 옷소매를 애써 붙든 승연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하진은 네 덕에 괜찮을 것이라는 양 천천히 승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서야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방검조끼 따위를 둘러 입고, 몸 외의 무게는 최대한 줄인 채로 문 바깥으로 나서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승연의 표정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곧이어 밀고 들어오려던 좀비는 총알 하나 쓰지 않고 막을 수 있었다. 도영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도와준 덕이다.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던 거겠지, 그런 생각을 이제야 한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들이다, 하나같이.

승연은 무심코 주변을 둘러본다. 남은 사람은 이제 스물다섯 남짓, 총 오십 명이 넘었던 쉘터가 이 꼴이 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마는 실제로 벌어진 일을 없는 일 취급할 수도 없다. 남아 있는 사람은 누가 있지. 확실한 것은, 쉘터의 음식을 배부하는 등 식량과 관련된 상황을 총괄하거나 창고의 재고를 확인하는 중책을 맡았던 이들이 전부 좀비에게 뜯겨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기적이 일어나거나 혹은 하진이 말했던 대로, 그리고 하진이 뜻하는 대로 일이 풀리게 된다고 해도 쉘터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는 것은 어려울 것이 자명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면 더더욱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어, 승연은 그저 무릎을 세워 고개를 파묻었다. 울기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다 해도 바뀌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데. 우는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 나갔다가 곤란해지기라도 하면 하진을 볼 낯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곧 익숙한 손길이 와닿았다. 그 사람을 닮은 손길, 아마도.

“야, 이하진은 죽어도 살아 돌아올 것 같은 사람인데 뭐하러 그러고 있어.”

보람 씨……. 목소리의 주인을 찾듯 가볍게 그 이름을 읊조린 승연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 남들 눈엔 정말로 그렇게 보일 사람인 것 같긴 했다. 죽어도 살아 돌아올 사람, 죽어도 죽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람. 당장은 그 사람을 걱정해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니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하진의 걱정까지 머릿속에 차올라버린다. 매일같이 괜찮기만 한 사람이 어딨겠는가. 그 상황에서 멀쩡히 살아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무 말 없이 보내주긴 했다만 본능적으로, 우리는 작별일지도 모르는 짧은 인사를 나눴다는 감상을 공유했는데. 더 바닥을 치는 기분에 승연은 몇 번 정도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다가, 죄 없는 바닥만 한참을 노려보았다. 한구석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울음에 편승하고 싶었으나 그럴 이유도 자격도 어디에도 없었다.

이게 정말 다 내 잘못이라고. 그러다가 다른 방향에서 들려오는, 중얼거리는 울음 어린 목소리에 남은 이들이 리더를 바라본다. 승연은 그제야 이 사람이 아버지의 마지막도 지키지 못하겠다고 울어대는 행동에 쉘터 사람들이 죄 속아 넘어가 준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연기 잘하네, 가식적이고. 차게 가라앉은 시선이 그에게 가닿는다. 여기서 유일하게 죄책감 따위는 조금도 갖지 않고 있을 그에게, 그러나 누군가는 여전히 속아 넘어가고 싶은 마음을 안고 바라볼 그에게. 승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리와 도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쌓인 게 있었던 건지, 그 난장판에도 약이 가득 든 가방을 가져온 보람만은 한숨을 내뱉었다.

“네 잘못 맞는데 뭘 잘했다고 즙을 짜.”

“보람아!”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물려온 건 그 사람 잘못이라 쳐, 근데 허락도 안 받고 내쫓은 사람은 누구였어? 그거 사과 하나 하라니까 그조차도 못 하겠다고 버틴 놈은 누구였냐고? 그거 하나 지적하는 놈이 하나도 없으니까 여기까지 온 거 아냐?”

거기까지 말한 보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뭘 처 불러. 뭘 잘했다고. 중얼거린 보람이 리더의 앞으로 다가갔다.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는지, 눈 한 번 맞추지 못하는 모습에 보람은 저도 모르게 조금 웃어버린다. 아, 지랄 나셨다, 진짜…….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린 보람이 깊은 한숨을 내뱉는다. 리더의 눈에 맺힌 눈물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리더의 어깨를 툭, 툭. 발로 밀며 말을 이었다.

“이 지랄이 났는데도 즙 좀 짠다고 또 불쌍해하고 싶다고? 제정신들 차리세요, 진짜……. 여기에 나 말고 이하진 씨 계셨으면 이 새끼 강냉이를 털든 이 새끼를 좀비 밥으로 주든 했어.”

그런 이야기를 듣는데도 리더는 아무 말 않고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평소에 이하진이 저런 말 하면 화내던데, 뭐지? 의아하다는 듯 리더와 보람을 바라보던 유리도 이내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던 리더의 낯에서 울음기가 완전히 지워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였다. 그러던 와중에도 승연은 두 눈을 느리게 끔뻑거리기만 했다. 하진 씨가 그렇게까지 나쁘게 굴지는 않을 텐데. 잡념도 잠깐이다. 오래지 않아 몸을 일으킨 리더가 문 방향으로 다가갔다. 쿵, 쿵……. 간헐적으로 들리던 소리가 잠시 조용해진다. 그렇게 오 분 정도가 지났을까, 여전히 바깥에서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자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의아하다는 듯 리더가 서 있는 문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서 저렇게 있을 이유가 있나.

그 무렵, 리더의 입이 열렸다.

“……야, 근데 창고에도 밖으로 나가는 문 있지 않냐? 그쪽으로 나가면 그만 아냐?”

“아까 들어올 때 보니까 거기 문 흔들리던데, 거기는 좀비가 없을 것 같아?”

“아니, 내 말은…….”

“나갔다가 돌아오지 말든가, 긁히거나 물려놓고 치료 부탁한다고 질질 짜지 말든가 그래. 지금 문 열면 난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그런 줄 알아.”

그 말을 듣고서야 사릴 마음이 생긴 건지 리더는 찰나 침묵했다. 다만 승연만은 그런 그의 변화가 오히려 불안해, 그제야 안도한 듯 몸을 편히 눕히려는 도영과 유리에게 눈짓했다. 어쩌다 그 눈짓을 보람이 알아들었는진 모르겠지만 곁에서 승연을 바라보던 보람이 곧 도영과 유리를 잡아끌어 승연이 자리를 옮긴 책장 방향으로 몸을 옮겼다. 책장은 왜? 의아해하는 낯이었지만 승연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입 바깥으로 낸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침묵이 문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당연하게도. 곧 시선을 나눈 두 사람이 리더에게로 눈을 돌린다. 얌전히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이 조용하다는 건 정말로 사건인데. 눈치 빠른 몇몇이 승연과 보람의 곁으로 다가올 즈음, 리더의 걸음이 대뜸 문을 향했다.

불안은 틀리는 법이 없다. 별일 없을 거라는 말 한마디도 없이 열린 문이 조용한 것도 몇 초였다. 아무 일 없지 않냐며 큰소리를 치려던 리더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다시 몰려들기 시작한 좀비 무리가 입구에 앉은 사람을 덮쳤다. 몰려드는 좀비 떼에 놀라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든 유리가 그나마 구할 수 있는 범위의 사람들을 구하는 동안 놀랄 새도 없이 책장을 밀어 드러난 문을 연 승연이 내부 문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그런 두 사람이 답답하다는 듯 도영은 유리를, 보람은 승연의 손목을 잡아채 제 쪽으로 끌어오며 소리쳤다.

“무리하지 마시라고요!!”

“승연아, 죽을 사람들 사정까지 다 봐주고 기다리면 우리가 죽어! 들어가!!”

도영이 한 사람만이라도 더 구하게 해달라고 소리치는 유리를 억지로 끌고 나오는 동안 보람은 승연을 문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다. 곧 안쪽에 있는, 아래로 길게 이어지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보람이 문득 뒤를 살폈다. 뒤따라오는 리더, 아니, 저 새끼는 안 죽었어? 어쨌든. 리더, 그리고 서너 사람, 도영이, 마지막으로 유리. 오다 말고 갑자기 반대쪽으로 돌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좀비 무리……? 저것들은 왜 안 따라와. 따라오지 않는 것은 분명 호재였으나 갑작스럽게 몸을 돌리는 좀비 떼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 양상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재고 생각하며 떠올릴 타이밍이 아니니까. 유리가 들어올 때까지 문 앞을 지키던 보람은 유리가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야 문을 닫았다. 뒤이어 출처가 어디인지 가늠하기도 어려운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승연이 조용히 눈을 옮겨 리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또 저 사람 하나 때문에 몇 명이 죽은 거야. 그래놓고 저 자식은 살아 돌아왔다고. 내다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함께 리더를 바라보던 유리는 곧 마지막까지 끌고 들여오려 애썼고 또 그리하여 구할 수 있었던 서너 명의 사람을 바라보다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일단 몇 명 더 살렸으니 됐는데, 저건 중간에 정말 버리고 올 것을 그랬나. 다시 리더를 바라보던 유리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화를 이기지 않은 도영이, 그리고 보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리더를 한 번씩 후려친 탓이다.

“사람들을 그렇게 죽이고도 정신을 못 차려요?!”

“야, 승연아. 근처에서 밧줄 찾아와라.”

보람의 명령조에 승연은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밧줄을 찾기 위해 몸을 돌렸다. 며칠 정도는 족히 버틸 수 있는 식량을 준비해두었다더니 과연 내부에는 물품을 쌓아두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며칠 버티는 것이 목적인 곳이니만큼 음식 위주로, 그것도 유통기한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보존식품 위주로 정리된 물품들을 뒤지던 승연이 문득 뒤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려다 제 어깨를 감싸 안고 함께 물건을 보기 시작하는 유리 덕에 물품으로 눈을 돌렸다. 그제야 등 뒤에서 들리던 소리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내리치는 소리, 고통 어린, 그러나 억눌린 신음. 승연이 굳이 눈여겨볼 것도 귀 기울일 필요도 없는 것들의 집합. 그러니 승연은 그저 순순히 눈을 돌리는 쪽을 택했다.

그나저나 음식이 정말 많긴 하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음식을 먹는대도 잘 아껴먹으면 일주일 정도는 먹고도 남을 것 같았다. 하진 씨가 주기적으로 채워두셨나? 아닐 리가 없다 싶다가도, 어디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정확하게 아는 듯 익숙한 시선을 돌리고 있는 유리를 보면 하진만 여기에 온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승연은 생각했다. 아닌가, 그러고보면 물건 배치가 그냥 쉘터 안쪽 창고랑 똑같긴 하네.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물을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물을 필요가 있는 문제도 아니었으므로 승연은 유리의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저거 밧줄 아니야?

“밧줄 있으셨어요?”

“올 때부터 들고 있었는데?”

아니, 그럼 그냥 가져다주면 그만인걸. 어이가 없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승연의 시선을 감내한 유리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뒤쪽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이제야 끝난 탓이다. 같이 가자, 짧은 말을 건네며 승연의 손을 잡아 이끈 유리가 난장판이었던 안쪽으로 다가가 쓰러진 리더의 곁에 앉았다. 유리가 리더의 손과 발을 단단히 묶자마자 보람이 그를 구석에 처박아버린다. 그제야 구석에서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리더에 대한 염려일 수도 있었을 테고, 지금의 처지에 대한 비관일 수도 있었겠으나 머리끝까지 짜증이 난 보람과 도영이 한마디 않는 것을 보고 있자면 전자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승연도 무심코 시선을 돌린다. 누가 우는 거지.

그러나 얼굴을 보고서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리더의 최측근이었던 사람이었던 탓이다. 쌍둥이 형제였나 남매였나 그렇지 않았나. 그런데 왜 한 사람밖에……. 아. 승연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눈을 내리깐다. 마지막까지 함께일 줄 알았던 가족을 떠나보낸 거구나, 최소한 이 자리의 정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 탓에. 인간 개인으로는 안타까울 일이나 유진이 감염되었을 때도 내보내지 못해 안달이었으며 하진에게도 좀처럼 협조하지 않았던, 그러니 하진의 측근이었던 네 사람 모두에게 모질었던 사람이었으니 관계를 생각하면 그를 안타깝게 여겨야 할지 혹은 역겹다고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승연은 생각했다. 사건만 떼고 보면 안타까울 일이다. 그러나 제가 자초한 일이 아닌가, 애당초 초장부터 리더를 막아주는 데에 협조했다면 지금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승연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리더의 곁으로 가는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오래지 않아 다가온 보람이 승연의 귀에 이어폰을 꽂아준다. 구식 MP3 플레이어와 연결된 이어폰이다.

“어, 이런 게 있었어요?”

“너 오기 전에 하진 씨가 주워서 나 주셨던 거야. 내가 시끄러우면 못 쉬어서 쉴 때 노래 좀 듣게 구해달라고 했었어.”

그렇다기엔 재생되는 음악이 헤비메탈인데……. 어이가 없다는 듯 승연이 귓가에 들려오는 노래에 정신을 맡기면, 보람은 고요히 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총성이 들렸다. 시끄러운 노래 하나면 묻을 수 있을 정도의 소음이. 당장 안쪽에서도 남자 비명 하나가 지겹게 들리고 있었고, 승연도 정황상 그것 탓에 이어폰을 꽂아줬다고 생각할 것이 자명했다. 그래야 했다. 이하진이 밖에서 뭘 하고 다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뭐든 강승연이 알아서 좋을 일은 아닐 것 같았다. 이런 예감은 원래 틀리지 않으니까.

리더를 있는 대로 때리던 사람들의 분노가 조금 가라앉고서야, 그리고 너머에서 총성이 더는 들리지 않게 되고서야 보람은 승연에게 주었던 MP3 플레이어를 다시 뺏어왔다. 나 노래 들을 거야. 짧은 핑계에 승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구석 즈음에 몸을 눕히는 보람을 바라보았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MP3를 조금 조작하더니 바로 눈을 감는 보람에 승연은 잠시 눈을 끔뻑인다. 진짜 저거 들으면서 주무시나? 곧 고요하고 일정한 호흡을 반복하는 보람을 바라보던 유리가 보람에게 다가가 MP3 플레이어에 찍힌 제목을 슬쩍 보았다. 클래식이군. 그나저나 얘도 정말 자다가 누가 업어가도 모르겠다.

“……진짜 헤비메탈 들으면서 주무세요?”

“엥?”

바로 뒤로 다가와 소곤거리는 승연을 바라보던 유리가 대강 상황 돌아가는 꼴을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진짜구나.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던 승연이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그나저나 소란 때문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도 했고, 바로 뛰기도 했고, 이것저것 신경쓸 게 많았어서 그런가. 나도 좀 졸리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물품 한쪽에 고이 놓여있는 겉옷을 집어든 유리가 바닥에 옷을 깔고 승연에게 눈짓했다.

“저기 누워서 자.”

“앗, 저 옷 비싸보이는데 바닥에 깔아도 돼요?”

“팀장님이 자주 입으시던 코트야. 우리가 깔고 자면 사건인데 네가 깔고 자면 별 말 안 하실걸.”

요컨대 하진의 옷이라는 의미다. 그 말에 승연은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코트 위로 몸을 눕혔다. 눕자마자 옷 안쪽에서 하진의 향이 풍겼다. 새삼스럽게 그게 좋아서, 승연은 저도 모르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뭐, 하진 씨도 금방 오실 거고. 사건도 다 금방 해결될 테니까. 그럼 조금만 잘까. 그게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승연은 막연하게 그런 희망을 품으며 눈을 감았다. 그가 눈을 감을 즈음 굳어지기 시작한 유리의 얼굴이나, 한숨을 내쉬며 문 방향과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는 도영 같은 것은 눈치채지 못한 채로.

그렇게 승연이 잠든 지 체감 스무 시간 정도가 넘었을 즈음, 좀 깨워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물음들을 들으며 승연은 자리에서 겨우 일어났다. 실제로 시계를 보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여기에 창문이 달린 것도 아니었으니 실은 몇 시간이 지났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어쨌든 간에. 눈을 뜬 승연은 금세 가라앉은 분위기에 눈을 몇 번 끔뻑였다. 승연이 자는 동안 잠들지 못했던 사람들의 불안이 극에 달했다. 아직도 하진 씨가 오지 않으신 건가, 짧게 생각하던 승연은 문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제 멀리서도 두드리는 소리가 안 나네, 그건 다행인 걸까. 고민하던 와중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면 안 돼? 여기 몇 시간이나 있었는지 모르는데.”

“MP3에 시간 떠요. 열두 시간 정도 있었던 것 같네요.”

보람 씨는 언제 일어났지? 의문 어린 눈으로 보람을 바라보던 승연이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살짝 시선을 피했다. 실은 승연도 자도 된다는 분위기를 만들어주기 위해 자는 척을 했던 거지, 실제로 잠들었던 건 아니었던 보람 역시 그가 시선을 피해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거짓말에 재능이 있는 성격은 아니라서 그런 건지. 어쨌든 자고 일어나자마자 또 바깥에서 작지만 총성이 들리기도 했고. 그건 환청이었나? 뭐가 됐든 간에 일어난 이래로 주변을 둘러보던 보람은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가볍게 답했다. 하긴, 밀폐된 공간에 있다보면 사람이 불안해지지. 체감 스무 시간이니 어쩌니 떠들던 걸 보면 창문 없는 곳에서는 시간 개념도 희박해질 수밖에 없는 법이고.

“불안해서 그래…….”

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보람은 생각했다. 반대로 뛰어가던 좀비들, 이제는 들리지 않는 총성. 사실 이 모든 것이 시사하는 바는 뻔했다. 우리를 보호하는 문이 열렸을 때 이하진이 바깥에서 좀비를 몰아줬겠지. 총성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그 좀비들이 바깥에 없다는 의미일 거고. 그렇다면 최소한 지금, 바깥은 안전할 것이다. 물론 그가 직접 와서 문을 열어준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만 지금 불안해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 그런 상황에서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마냥 좋은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 무엇보다 정서 자체가 불안정한 사람이 적지 않은데, 이런 사람들을 좁은 방 안에 가둬놔봐야 좋을 것도 없다. 하진 씨가 있다면 컨트롤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니까. 곧 보람이 몸을 일으켜 문의 잠금을 풀었다. 그러니까, 일단 믿어보자. 이하진이 많은 것을 해결해두었을 거라고.

“그럼 지금 나가죠. 조심히 따라오시고, 선두엔 유리, 맨 마지막에는 도영이가 붙어서 따라오는 걸로 할게요. 이건 바깥이 안전할 거라고 확신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 다들 제정신 아닌데 갇혀 있기까지 하면 크게 사고 한 번 날까봐 나가자고 하는 거예요. 알겠어요?”

보람의 말에 못마땅하게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정한 상황은 맞았으니까. 리더의 발을 묶은 밧줄을 푼 보람은 도영의 바로 앞, 그리고 제 바로 뒤에 리더를 세우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보람의 바로 앞에 서서 곁눈질로 리더를 바라보던 승연이 한숨을 내뱉었다. 저 사이에 세우려니 불안하기도 하고. 그나저나 급하게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 계단이 생각보다 잘 관리되어 있었다. 그간 하진은 이런 곳에도 신경을 썼던 걸까. 여러 생각들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긴 계단을 오르고, 한 번 문이 열렸던 A구역으로 향한다. 당연히 많이들 들어왔을 줄 알았던 좀비는 한 마리도 없었다. 그대로 창고를 지나 쉘터 본구역으로 향하는 걸음들에 갈수록 힘이 실렸다. 여기는 안전하다. 그런 직감이 든 덕이다.

말마따나 다시 들어선 본구역은 처음 벙커로 갔을 때와는 달랐다. 나가는 문은 닫혀 있었고, 안쪽에 쌓여 있으리라 생각했던 좀비나 혹은 인간의 시체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두세 사람 정도 가담해서 적당히 창문 바깥으로 던져두면 괜찮을 정도의 적은 시신. 그렇다면 그 많은 좀비들은. 잠시 생각하던 이들이 조용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 중 시신조차 찾을 수 없으리라 확신했던 가족의 시신이 섞여 있는지, 한 번 난리를 피웠던 이는 반쯤 뜯어먹혀 더는 인간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시신 하나를 붙들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나마나 제 알 바는 아니라는 듯 옆에 놓인 시체들을 창 바깥으로 버리던 유리가 울고 있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시체 어떡할까요. 같이 나가서 묻어줄까요?”

“……그래도 돼?”

“안 될 게 어딨어요? 바깥도 조용하다면, 이야기지만. 일단 나머지 시체 좀 버리고 올게요. 나가는 김에 버린 시체들도 실어서 어디 버리고 와요, 같이.”

그 말을 듣다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툭, 건드린 승연은 의아한 얼굴로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이쯤이면 흔들리기라도 해야 하는데 흔들리지도 않는 건 둘째치고 아예 안 열리네. 의아한 눈으로 도영을 바라보자 도영 또한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승연이야 힘이 약한 편이니까 문을 열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뭐, 무슨 생각으로 문을 열려고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승연이도 다 생각이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도영이 눈을 끔뻑인다. 어라.

“진짜 안 열리는데?”

“비켜봐.”

곧바로 다가온 리더가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그렇게 해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뭐야, 이대로 안에 갇힌 거야? 되려 불안하다는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리더가 마지막 시신을 창문 바깥으로 버리던 유리와 눈이 마주쳤다. 곧바로 인상을 구긴 유리가 문 근처에 모인 이들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뭘 걱정하냐는 듯 태연한 태도였다.

“꼭 나가야 하면 창문으로 빠져나가든가 해도 되니까 갇힌 건 아니잖아. 나랑 저 분은 창문으로 다녀올게.”

“그거야…….”

“그러니까 소란스럽게 굴지 말고 앉자. 지금 바깥에 좀비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잠긴 거 확인했으면 그냥 안 열면 그만이잖아. 더 열려고 하는 순간 뒤져, 진짜로.”

시신을 안은 이와 함께 창문 바깥으로 나간 유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래 봤자지. 중얼거리는 리더를 흘끔 바라보던 도영이 작게 소곤댄다.

“이거 그쪽 오래 본 정이 있으니까 말하는 건데요.”

“뭔데?”

“지금 우리 되게 봐주고 계신데, 우리 경찰서에서 하진 형 다음으로 센 게 강 경위님이셨어요…….”

하진과 비교할 정도는 안 됐지만, 이라는 뒷말은 삼켰다. 말해봐야 좋은 말도 아니고 겁주려면 이것만큼 좋은 말이 없지. 같이 있던 승연까지 눈을 크게 뜨게 된 것은 조금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자연스럽게 슬금슬금 문에서 떨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도영도 어깨를 으쓱이곤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막혀 있어서 팀장님이 못 들어오시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도 잠깐이다. 막은 사람도 팀장님이시겠지. 알아서 풀고 들어오실 테다. 그가 일 처리를 허술하게 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막연한 믿음과 함께 도영은 승연의 뒤에 붙어 그의 등을 느리게 토닥였다. 그걸 안다고 해서 팀장님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니까. 무엇보다, 나보다 팀장님을 더 걱정하는 건 승연이겠지. 그런 생각에.

맞는 말이었다. 승연은 이 순간 누구보다도 하진을 걱정했다. 해가 뜰 즈음 자리를 벗어난 그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아무래도 불안했으니까. 그래도 괜찮아, 일단 좀 쉬자. 승연의 등을 내내 두드리던 도영과, 안색이 왜 이러냐며 승연을 내내 돌보던 보람, 그리고 몇십 분 정도가 지나 함께 나갔던 이와 무사히, 그러나 쉘터 바로 주변은 그나마 상황이 조금 낫지만 아직 바깥에 좀비가 상당히 많아 약식으로 장례만 겨우 치르고 돌아왔다고 말하는 유리까지 다가와 제발 좀 쉬라고 말하고 있으니 승연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겠지만. 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방 안으로 들어선 승연이 억지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우울하기만 하다.

이런다 해서 잠을 잘 수 있을까, 아닐 것 같았다. 당신의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겠지. 그 생각대로 승연은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잠을 많이 자서 그런가, 그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졸음이 오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까. 자려고 할 때마다 제 스스로 놀라 깨는 것이 문제지. 눈을 감으면 자신을 등지고 뛰어 나가던 그의 뒷모습이 떠올랐고 다시 눈을 뜨면 그를 다시는 마주칠 수 없게 될까봐 겁이 나 눈을 돌렸다. 어두운 것에 오래 시선을 두면 늘어나는 것은 불안뿐일진대 주변의 모든 것이 어두운 지금 그가 안을 수 있는 감정이라고는 불안밖에 없었다. 별일 없는 거죠, 괜찮죠? 그렇게 물으면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침대에서 내려와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자신이 잘 때까지 머리맡에 앉아 손을 잡아주던 손길이 없다는 것이 그를 잠 못 들게 했다. 밤이 원래 이렇게 길고 두려웠던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승연은 눈을 감는다.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래도, 눈은 감았다. 눈을 떠봐야 당신이 없다는 사실만 체감하게 되니까.

그렇게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지났다. 밤새 걱정으로 잠 못 이루던 승연이 겨우 눈을 붙인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동이 트기 시작했다.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온 햇빛에 승연은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함께 잠들었던 모든 사람이 비슷한 처지인 듯, 하나둘 몸을 일으키는 사람 중 낯빛이 멀쩡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누군가는 오지 않는 하진을, 또 누군가는 혹시 올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누군가를, 혹은 좀비가 올 것을 걱정하며 지새운 밤이 무색하게도. 해가 떠오른 시간까지도, 그 누구도 여기까지 다다르지 않았다. 이런 지금도 평화라 일컬어도 되는 건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쉘터에 남은 생존자들이 구태여 아침부터 쉘터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보람은 자신의 가방으로 약품을 빼돌리기 시작했다. 재고를 기록하던 차트의 내용을 조작해가며 꼭 챙겨야 하는 약들을 챙기기 시작하는 모양이 꼭 지금보다 먼 미래를 고려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목격자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보람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 되었다. 그러고서는 자료실에 모아 두었던 보고서를 중앙으로 가지고 와 자신이 조작할 수 있는 모든 서류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이 역시, 구태여 보람을 의심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으니 아무래도 좋을 일이다. 유리는 무기 보관실로 들어가 남은 무기들을 살피다가, 혹여나 리더가 또 난리를 피운다면 잠재우기 어려울 테니 최소한 총기는 빼돌려야겠다 싶어 총기류를 죄다 빼돌려 다른 장소에 가져다 두었는데 이 또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으므로 그저 묻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되었다. 하진이 돌아온다면 하진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려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겠으나, 하진이라면 어떻게든 상황을 잘 타파할 것 같았다. 막연한 믿음이지만 일단은 하진을 믿기로 했다. 뭐, 누가 와서 총기가 있는지를 열어보겠냐마는.

그리고 도영은 창고에 몰래 숨어 들어가 그나마 남은 음식 중 실온 보관에 무리가 없고 일행들의 선호도가 높은 음식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창고에 들어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들어간 이후에 물건을 가져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몰래 뒷문으로 빠져나온 도영이 방에 달린 창문 중 열린 것을 타고 넘어와 자신의 가방에 음식들을 쑤셔 박았다. 이 난리통에 음식 몇 개 사라진 것은 눈치챌 수 있는 일도 아닐 테고, 물품을 관리하던 사람은 오롯이 하진이었으므로 하진이 없는 지금 자신의 행위가 완전범죄가 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그는 알았다. 말마따나, 그의 행동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방문 안에서, 하진이 밤마다 누워있던 침대에 하염없이 앉아 있는 승연이었다. 그가 자신의 탓을 할 리는 없다고 도영은 찰나였으나 생각했다. 옳은 판단이다.

승연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한 사람 걱정으로 가득 찼던 탓이다. 그나마 이전에 하진이 주었던 라디오를 창고에 가져다 두긴 했는데, 그게 다였다. 평소 같았으면 보고서를 쓰거나 다른 일을 해서라도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썼을 텐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제 몫 알아서 하는 사람들이라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일어나려고 하면 쉬라는 소리나 하고 있고. 그러니 승연은 하진이 있던 자리에 하염없이 앉아 있다가,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돌아오지 않으니 조용히 침대 위로 몸을 눕혔다. 그 침대에서는 익숙한 향이 났다. 그 덕분일까, 뜬눈으로 지새웠던 밤이 무색하게 승연은 조용히 잠에 빠져들었다. 자고 일어나면 그 사람이 있겠지. 말도 안 되는 생각임을 알면서도, 그런 희망을 품으면서.

안겨 잘 때와 비슷한 향기 덕에 승연은 깊게 잠들 수 있었으나, 자고 일어나도 하진은 승연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해도 이제 넘어가려 하는데 왜 여즉 오질 않는 건지. 눈을 비비며 일어난 승연이 방 바깥으로 나갔다. 중앙 테이블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계속 문을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면 확실히 아직도 하진이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도영이 마련해둔 빈자리에 앉은 승연이 바로 옆에 있는 유리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유리가 이해한다는 듯 승연의 등을 두어 번 두드리자 누군가의 입이 열렸다.

“왜 안 오지…….”

누구를 말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비슷한 생각을 했을 테니까. 지금같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중심을 잡을 사람은 하진밖에 없었다. 리더 이전에 인간 같지도 않은 리더도 도움이 될 수는 있었겠지만, 그가 나서서 복잡한 일을 할 거라는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옆에 있던 리더가 비아냥거리듯 입을 열었다.

“뭐, 죽었겠지.”

냉소적인 말이었다. 그와 하진 사이의 갈등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한층 더 가라앉는 분위기에 그 역시 말실수를 했나, 짧은 생각을 하기야 했다만 그렇다고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이었으며 실은 주워 담을 의지조차도 없어 보였으니 무의미한 감상이었다. 한숨을 내뱉은 보람이 손을 뻗어 리더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듯 잡더니, 그대로 잡아당겼다. 비명을 지르는 리더에게 유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최소한 지금은. 제 실수를 수습하기 위해 뛰어든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일이 깎아내리는 것뿐이라니, 저보다 치졸한 사람이 어디 있겠나. 허공을 부유하던 승연의 시선이 테이블로 향한다. 이대로 돌아오지 않으시면 어떡하지. 뭐라 말이라도 해볼걸.

하진뿐만 아니라 하진이 알려준 지하 벙커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마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죄다 죽은 것은 자명했다. 그 사람들 사이에 하진도 끼어 있을까. 그냥,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그냥 같이 들어가자고 할 걸 그랬나. 잡을 수 있었잖아, 내 말은 들어줄 것도 알고 있었잖아. 여차하면 한 번 울어버리면, 그렇게 하면 내 이야기를 들어줄 걸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나는. 뭘 해도 제 탓을 할 수밖에 없었다. 눈을 내려 감은 승연이 깊은 한숨을 내뱉는다. 정말로 죽었다면, 그러면…….

“어?”

그때, 한쪽에서 도영의 얼빠진 목소리가 울린다.

창문 사이로 석양이 흘러들어오던, 여름이라기엔 지나치게 서늘한 어느 저녁. 저마다의 상실과 불안을, 그리고 불만을 안고 있던 사람들은 도영의 말에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별일 아니겠지, 별일도 아닌 일로 윤도영 난리 피우는 게 하루 이틀인가. 그런 유리의 타박이 이어질 법도 한데 유리 역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문을 바라볼 뿐. 창고의 문도 폐쇄되었으므로 현재로는 외부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경로였던 그 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체 누가, 또 좀비가, 혹시……. 낯빛에 피어나는 익숙한 절망을 무시하듯 오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석양이 짙다.

터벅, 터벅. 천천히 쉘터 안으로 들어오는 얼굴이 역광 탓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친 기색이 가득한 걸음은 좀비의 비정형적인 걸음과 완전히 달랐으므로 앉아 있는 모든 사람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큰 덩치, 기운 없는 걸음, 그러나 쉘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지나치리만큼 익숙한 그 모든 것이. 그러니까.

“하진 씨…….”

승연의 중얼거림에 그제야 그는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웃는 것도 같았다. 가까이 다가오려던 하진이 걸음을 멈춘 것도 그때였다. 반갑다며 제게 하나둘 달려들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바라봐서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승연은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는 하진의 시선에 잠시 숨을 멈췄다. 저 얼굴만 보면 안심할 수 있으리라 확인했는데, 왜일까. 당신이 있는 지금이 당신이 없던 밤보다 어렵고 곤란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쁜 예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를 가만히 두고 싶지는 않았다. 승연 또한 하진에게 달려드는 무리에 섞여 그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제게 다가오는 승연을 바라보던 하진은 어딘가 편안해 보였다. 안심한 것 같기도 하고, 되려 불안한 것 같기도 하지만 내려두려고 애쓰는 것 같기도 하고. 반갑다며 소리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승연은 손을 뻗어 하진의 얼굴을 쓸다가, 그대로 손을 떨어트리고 고개를 숙였다. 울 것 같았다. 그 많은 일이 있었어도 당신은 기어코 살아서 곁으로 돌아왔구나, 그게 정말로 안심이 돼서, 그게, 뭐라고 해야 하지. 울음을 참으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승연을 바라보던 하진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누구한테 하는 사과인지도 모를 이야기가 울렸다. 그 말에 승연은 고개를 든다.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자신에게 사과를 건넬 이유가 어디에, 그러니까, 미안하다는 말이. 승연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러니까 설마……. 승연은 놀란 낯으로 하진에게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그의 곁에 다가가서, 정말 그 밖에 보이지 않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정말로 조용해진 거였다. 그 말은. 승연은 그제야 눈을 내려 하진의 몸을 눈으로 훑는다. 뜯어지고 찢어진 옷, 나갈 때까지는 분명히 목폴라였는데 드러나 있는 목, 그사이 선명하게 남겨져 있는 이빨 자국.

이빨 자국?

떨리는 손과 시선으로 훑은 하진의 몸은 엉망이었다. 목뿐만 아니라 팔뚝도, 확실하지는 않으나 다리의 어디 즈음도. 적당히 찢어진 옷들을 바라보던 승연의 표정에 울음기가 어렸다. 그러나 하진은, 조용해진 주변도 금방 울음을 터트려도 이상하지 않을 승연도 전부 예상했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중앙의 테이블로 향했다. 저렇게 태연하게 굴 거라면 미안하다는 말은 왜 했을까. 그건 누구한테 한 사과일까. 정말로 모르겠다고, 혹은 알고 싶지 않다고. 대원들과 승연은 생각했다. 그들의 혼란은 제가 고려할 것이 아니라는 것처럼 걸음을 옮긴 하진이 자리를 멈춘 곳은 종이 더미가 쌓인, 보람이 조작을 위해 내내 작성하던 보고서가 놓인 곳이었다.

“여기 써놓은 거 봐라.”

하진이 집어 든 종이 뭉치를 가볍게 두드리더니 곧 무리가 있는 방향으로 던졌다. 엉겁결에 종이를 받아든 리더가 페이지를 넘긴다. 그간 하진이 작성한 보고서가 그 자리에 있었다. 리더도, 쉘터의 사람들도 몇 번을 보았던 보고서. 최근 들어 내용이 조금 부실해지기야 했다지만 그 신빙성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던 자료. 일행은 하진이 바라보던 페이지를 확인하며 내용을 훑는다. 좀비 바이러스 감염자의 특징. 물린 지 사흘이 지난 후 촉각 기능이 상실된다. 일주일 후 고열을 동반한 몸살 증상이 하루 나타난다. 24시간 후 완전히 의식이 돌아왔다가, 24시간 후 가사 상태에 빠지고, 가사 상태가 처음 발현된 시간을 기점으로 6시간 전후로 좀비화된다. 완전히 좀비화가 되기 전 타인에게 전염되는 경로는 없다. 하진이 검증했고, 어딘지 모를 라디오 채널에서도 반복적으로 들려왔으며, 모두가 듣고 보았던 정확한 정보. 그것을 당장 눈앞에 들이민 하진은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물린 이상 나가야 하는 건 모르지 않지만, 쉘터 정리 나 빼면 누가 할 거고 내가 당장 자리 비우면 분위기는 또 어쩔 것이며, 일은 누가 무슨 수로 할 건데.”

“…….”

“너희 살려줬잖아. 일주일만 신세 지자. 앓다 정신 차리면 바로 꺼질 테니까.”

당장 목숨을 빚진 와중에 그럴 수는 없다며 화를 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 벽창호 같은 리더도 지금 같은 분위기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 나머지는 정말로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있을 수도 없었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른다. 당연하게도, 모두가 그의 말을 완전히 신임하는 것은 아니었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코앞으로 다가온 사람이 어떤 극단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지는 지금껏 리더와 유진, 그리고 그간 자신들의 주변을 떠난 사람들을 보며 학습해왔으니까. 그러나 지금 와서 그를 의심하기에는, 하진의 표정이 지나치리만큼 초연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물릴 줄 알았으며 그러므로 예측한 일이라는 듯, 전혀 놀랍지 않다는 것처럼. 생명과 삶을 너희들에게 구걸하는 일은 없을 테니 염려 말라는 듯이. 그런 얼굴을 바라보던 승연은 문득 속이 울렁거린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달가운 기분이 될 여지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진이 오기 전까지는 어땠던가. 목숨을 빚졌으니 어떤 꼴로 나타나든 감사해야 할 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정말 물려서 오니 바로 적개심을 드러낸다고. 그리고, 목숨까지 내다 바쳤으면서 그런 것들로부터 초연하다고, 이하진은. 마음에 드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승연은 먹은 게 없어서 다행이라는, 어쩌면 공허한 생각을 한다.

일행의 침묵에 하진은 보고서를 쓰기 위해 빈 종이를 집어 들다 말고 깊은 한숨을 뱉었다. 실은 정말로 초연한 것은 아니었다, 목숨 내다 바쳐줬더니 돌아오는 것은 고맙다는 말보다 이제는 무리에 끼지 말라는 시선이라는 것이 달가울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나가라고 한마디 제대로 할 줄 아는 놈도 없고. 우스운 일이다. 그냥 나가, 그 한마디만 하면 군소리 없이 나가줄 텐데. 그런 사람인 걸 모르지도 않을 텐데, 다른 사람들이 그러지 않았다 해서 나 또한 그러지 않을 리도 없는데. 그 순간 좀비 소굴로 뛰어든 사람이 정말로 나는 다치지 않을 거라 확신하고 뛰어들었겠는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뛰어들지. 내가 뭐, 소설이나 드라마 속 주인공도 아니고. 그러니 어차피 자신이 어떤 각오를 했을지는 여기 있는 사람들도 다 알 일인데, 다만 지금 이 상황에서 나더러 나가라고 하면 본인이 나쁜 사람이 되니까. 하여간, 좋은 사람인 척하는 것들은 참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이래서 돌아오고 싶지 않았는데. 그런데 왜 돌아왔더라, 아, 사실 이유야 확실하다. 확인해야만 할 것이 하나 있었던 탓이다. 그것만큼은 확실히 두 눈으로 보았으므로 이제야 안심이 되기는 했다. 그건 그거고, 왜 저 사람마저 말 한마디 않는지는 의문이다. 하진은 문득 시선을 옮겨 곁눈질로 승연을 바라본다.

화가 많이 났나. 이야기조차 하고 싶지 않은 건가, 내가 제멋대로 굴다 물려 돌아와서. 나 같아도 그랬기야 했겠다. 그러다 하진은 시선을 옮겨 승연의 몸을 가볍게 훑었다. 그 좁은 곳에 여러 사람과 함께 갇혀 있었으니 꼴이 멀쩡하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물리거나 아파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으니 이 정도면 다행이다 싶었다. 그래도 정말 다행이었다. 그 고생을 하고서도 기어이 살아 돌아온 의미도,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서도 뛰어든 보람도 있기야 했다. 네가 무사하니까, 네가 무사한 걸 봤으니까. 그걸로 됐다. 하진은 그런 얄팍한 생각을 갈무리한다. 곧 승연을 바라보던 시선을 뗀 하진이 빈 종이를 책상 위로 내려두었다. 이렇게 불편하게 이어지는 침묵은 오래전부터 제 것이라 여길 수 있었던 적도 없었다.

“꼬우면 꺼진다. 그렇게들 살다 뒈지든가 해.”

“……아, 아냐. 여기 있어야지. 당신 말이 일단은 맞기도 하고.”

의외로 하진을 막아선 것은 리더였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모두의 시선이 리더를 향했으나 리더는 애써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다시금 빈 종이를 하진의 품에 안겨주었다. 그제야 하진이 웃는다, 달가운 것은 아니었으며 그저 비웃음이었다. 아, 일하기가 싫으셔서……. 이하진이라는 사람이 없으면 그 일이 정말로 자신에게 넘어올 테니까. 속 보이는 행동에 승연은 정말로 속에 든 것을 죄 게워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한참이나 리더를 바라보긴 했지만, 일단은 알겠다는 듯 종이를 받아들고 묵묵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남은 이는 누구도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차마 말을 얹는 이도 없었다. 죽음과 너무도 닮은 침묵이 지독하게 내려앉는다.

쉘터 사람들에게 믿는 구석이랄 것이 있다면 틀림없이 이하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하진만은 무사할 것이며, 이하진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기어코 여기로 돌아올 것이다. 어떤 난장이 벌어져도 이하진만큼은 결국 이 자리로 돌아와 무너진 분위기를 수습하거나 달래줄 것이다. 그것이 쉘터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안고 있는 생각이었다. 그야, 하진은 빈틈을 쉽게 내어주는 사람도 아니었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살아 돌아왔으며, 늘 위기보다는 기회가 가까운 사람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쉘터의 처음과 어쩌면 모두가 끝을 직감했던 순간까지 하진이 쉘터에서 떨어져 있던 적은 실은 없었다. 그러니 언젠가 우리에게 끝이 찾아온대도 하진만은 이 자리에 영원히 있을 줄 알았는데. 당장 눈앞으로 닥쳐온 그의 부재가 쉘터의 모두에게는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연히 세상에 영원 같은 것은 없는 법인데 하진은 언제나 그런 것이 실재한다 믿어도 되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니 믿을 수밖에 없었는데, 인제 와서는 일주일 후면 떠날 사람이 된다니. 그건 정말로 버거운 일이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막막한 일이었다, 모두에게.

한숨을 내쉰 유리가 발에 채이는 캔을 무작정 발로 차 날렸다. 자신이 이렇게나 갑갑한데 승연은 오죽할까 싶었다. 자신에게도 하진은 상사 이상의 의미였고 때로는 정말로 피를 나눈 가족 같기도 했지만, 그것 이상으로 승연과 하진 간에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으니까. 이 난장판 속에서도 제 손으로 데려온 강승연은 하진이 마음을 연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 애를 만나는 데에 평생의 행운을 소모했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고, 평소보다도 밝은 목소리로 말하던 하진의 이야기를 유리는 기억한다. 그 속에 든 감정이 사랑을 넘어선 지 오래라는 사실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사랑보다 길고 무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서약하고 싶은 영원뿐일 텐데……. 하진이 그렇게 느낄 정도라면 승연은 어땠겠는가. 유리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승연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런데, 쟤 표정이 너무 안 좋은 것 같은데. 창백해진 승연의 낯에 시야에 들자마자 유리는 아랫입술을 물고 하진이 올라간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오래지 않아 유리와 함께 나온 하진이 방 바깥으로 나와 승연의 앞에 섰다. 승연은 순간 무너지는 표정을 감출 재간이 없어 하진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익숙하게 승연의 몸을 안은 하진이 그대로 승연의 골반을 받쳐 안아 들었다.

“몸 많이 안 좋아요?”

“……하진 씨가 하실 질문이 아니잖아요.”

“난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일단, 보람아. 승연이부터 좀.”

그 말에야 정신을 차린 듯 보람이 치료실의 문을 열었다. 바로 의료용 간이침대에 승연을 눕힌 하진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을 승연은 그제야 눈치챈다. 바보 같아, 지금 그런 표정을 지을 사람은 당신이 아닌데. 더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면서, 정말 바보 같아. 승연은 정말로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 눈을 꾹 감았다. 곧 보람이 승연의 몸을 살피곤, 상비약을 모아둔 곳에서 약 여럿을 꺼내 들어 몇 개를 승연의 앞에 둔다. 곧 남은 것은 가져가 먹는 용으로 포장해주겠다는 듯 작은 지퍼백에 담는다.

“체한 것 같아. 일이 많았어서 그런가, 몸 자체가 좀 약해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런데. 유리는 냅다 올라가더니 그냥 강승연 아프대요, 그 한마디 하러 갔던 거야?”

“……아파서 어떡하냐. 뭐, 유리니까 그렇게 해주지.”

“좀비에 물리신 건 맞아? 지금 그쪽이 남 걱정을 할 때야? 태연하셔…….”

이리 와보라며 하진을 이끈 보람의 손길이 평소보다 억셌다. 그제야 눈을 떠 보람이 건넨 약을 삼키려던 승연이 약을 내려두고 하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하진이 눈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괜찮다는 듯이. 그것만 보고는 사실 좀비에 물리지 않은 걸까, 그런 철없는 기대를 하기도 했으나 바로 옆에 있는 보람의 표정이 초 단위로 심각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는 괜한 기대를 했던 것이라는 사실만 깨달았다. 저 사람은 왜 자꾸 철없는 기대를 하게 만드는 건지. 안 아플 것도 아니면서. 곧 보람의 벼락같은 고함이 귓가에 꽂혔다.

“아니, 사람이 이렇게 물려놓고 안 아프다고? 진짜로?!”

“센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피 뽑아서 연구라도 해봐.”

“진짜 해도 돼요?”

와중에도 재미없는 농담. 울컥한 승연이 몸을 일으켜 하진의 등을 세게 내리쳤다. 진짜 싫어, 미워……. 그렇게 말하려던 입이 순간 다물어졌다. 그 정도 충격을 가했는데도 하진이 여즉 돌아보지 않은 탓이다. 오히려, 어떤 소리가 들려왔음을 인지하고서야 고개를 돌려 바로 뒤에 서 있는 승연의 얼굴을 확인하고, 아까와 다를 것 없는 웃음을 지었다. 이런 상황과는 잘 맞지도 않는 웃음을.

“더 누워있지. 몸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아무 느낌 안 들었어요?”

“무슨 소리야?”

정말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얼굴로 저의를 되묻는, 하진의 태연한 얼굴을 바라본 승연이 인상을 구겼다. 이제는 정말로 참지 못하겠다, 본능적인 확신에 승연은 급하게 몸을 일으켜 치료실 안에 있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변기 안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먹은 것도 없었으니 노란 위액만이 새어 나오는데도 도저히 속이 괜찮아지지 않았다. 뒤이어 화장실로 따라 들어온 사람이 승연의 등을 규칙적으로 두드린다. 그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를 수 없어서 승연은 몇 배로 서러워졌다. 이제는 울음을 감추는 법도 모르겠고, 울음을 감춰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차오르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미안, 나 뭐 실수했어요? 잘못했어.”

곧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속에 든 것을 몇 번 더 게워낸 승연이 타액이며 눈물로 번들거리는 얼굴을 들어 하진을 바라보았다. 별다른 기색 없이 휴지를 들어 승연의 눈가와 입가를 훔친 하진이 아까처럼 눈웃음을 지었다. 왜 웃는 거야, 조금도 괜찮지 않은데 대체 왜. 일반적인 증상과는 다르다는 것이 얼마나,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큰 두려움으로 다가올지 알고 있잖아. 잠깐이면 몰라도 점점 증상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눈치채게 되면 결국 쫓겨나는 결말 외에는 남지 않을 텐데. 못내 서러운 낯으로 하진을 바라보던 승연이 하진의 부축을 받아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 물렸어요?”

“입부터 헹구고. 어제……, 아니지. 오늘 새벽이었습니다.”

하진이 건넨 종이컵으로 겨우 입을 헹군 승연은 하진의 말에 할 말을 잃은 듯,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24시간도 되지 않아서 촉각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 그것이 떠난 유진의 증상과 너무도 유사하지 않나. 되려 유진보다도 빨랐다. 승연의 시선을 더는 가볍게 여기지 못하겠는지 하진은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그러고 보니, 내가 돌아보았을 때 승연이 너무 가까이에 있지 않았나. 그 사실을 이제야 떠올리고는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갑작스럽게 반응하는 까닭이. 그나마 사전에 유진 같은 케이스가 있었으니 다행이었다. 열흘, 어쩌면 그 이상을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 아닌가. 그 생각들은 하나같이 제 건강상태를 걱정하는 꼴과는 다르기만 했다. 하진이 고개를 숙인 채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도 머리가 조금은 복잡해진 탓이다.

“……미안합니다.”

“뭐가요.”

“그냥 다.”

얼버무리지 말고 제대로 말하라고, 그렇게 화라도 내야 할 것 같았는데. 그렇게 말하는 하진의 표정이 이제는 정말로 심각하게 보인 탓에 승연은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하진의 손을 잡았다. 괜찮다는 듯 건네는 손길이 퍽 다정해 하진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승연 역시 걱정을 도저히 감출 수 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하진을 바라보고 있어서, 하진은 잠시 눈을 굴리다 말고 승연의 눈치를 살폈다. 화가 난 건 아닌가. 곧 승연이 손을 뻗어 하진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어라, 의외로 엄청 말랑해. 심술 조금 부리려고 한 일이었는데 감촉이 생각보다 좋아서, 승연은 한껏 누그러진 낯으로 하진의 뺨을 여러 번 주물렀다. 의아한 낯으로 승연을 바라보던 하진은 결국 못 이기겠다는 듯 웃어버린다.

“왜 그래요.”

“볼 엄청 말랑말랑해요…….”

“처음 듣는 말인데.”

그야 당연히 처음 듣겠지, 누가 하진의 뺨을 이렇게까지 떡 주무르듯 주무를 수 있었겠는가. 이것도 나라서 허락된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차올랐던 분노와 짜증이 이 사람에게는 얼마나 무용했던 것인지를 새삼스레 떠올리게 된다. 하여튼, 이 지경이 되어서도 온전히 미워할 수 없는 사람. 승연은 울음 어린 낯으로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하진은 그제야 그 모든 위협과 위험 속에서도 쉘터 바깥으로 뛰쳐나간 것을, 그리고 기어코 돌아온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게 되었다.

하진이 쉘터를 떠나 있던 하루하고도 반, 사실 하진에게 빈말로라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 따윈 없었다. 스물이 넘는 것을 파악하고서는 더 세지도 않았던 좀비 무리를 죽이는 것이나 물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이 없는 이들을 쉘터 바깥으로 끌어내는 것까지는 감당할 수 있었으나 이 난리통을 만든 이가 끌고 온 좀비의 수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지금 막 물린 사람들이 죄다 좀비들에게 산 채로 뜯어 먹히고 있을 정도의 숫자였으니 홀로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지혁이 하나 끌어내서 좀비 밥으로 던져주면 되었을 것을 왜 이렇게까지 큰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군. 잠시 생각한 하진은 지혁에게 뺏은 총에 든 총알을 다 쓰자마자 다시 쉘터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좀비 무리를 보고서는 다른 생각은 더 잇지도 못하고 총을 바닥에 버린 채 쉘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순전히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하진이 본래 이토록 희생적이고 정의로운 사람이었나. 전혀 그렇지 않았고, 그것은 그 자신도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다. 경찰 시절에는 어땠지. 크게 다를 것도 없음을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때도 실적을 위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지 않았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 좀비가 떼로 몰려 있는 소굴로 돌아간다는 것이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몰랐나? 아니다. 살아가는 동안 죽음보다 삶이 가까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죽음이 목전에 다가올 행동이 무엇인지 모를 수는 없다. 죽음과 삶의 경게에 있는 이를 오래도록 상대해봤자 가까워지는 것은 삶 아닌 죽음이라는 사실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지만. 저 안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이성적이지 못한 판단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저 안에 들어간다 해서 과거 꿈꾸었던 명예나 금전 따위는 하나도 떨어지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그 안에는 하진이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지켜야만 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에 유기하고 싶지 않은, 과거 꿈꾸었던 그 어떤 영광보다 눈부시며 소중한 사람이.

하진은 문득 승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몇 년을 밤낮없이 붙어있던, 그리하여 가장 아끼는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지켜냈던 후배들보다 당신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는 사실은 우습게 느껴질까. 그러나 본래 사랑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온전히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감정. 그래, 이보다 우스울 수는 없다. 만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구하겠다고 뛰어든다니. 차라리 승연만 데리고 빠르게 도망치는 쪽이 몇 배로 합리적인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승연은 그렇게 살아남는 것을 원하지 않을 테니까. 쉘터에 있던 얼굴들을 매일 밤 떠올리며 울음으로 밤을 적실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 게 맞아. 내가 어떻게 되든 간에.

유리와 도영을 구할 때 대가로 바쳤던 것은 가장 아끼던 차였다, 집 외에는 무언가 가지고 싶었던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삶에 큰 욕심을 내어 구매했던 차. 허나 그것이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목숨값에 비하랴. 사랑은 그런 것이다. 나 자신 정도는 몇 번이고 손에서 놓을 수 있는 것 말이다. 벙커, 전 리더와 주요 멤버들 사이에서는 A구역이라 임시로 명명했던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을 두드리는 좀비의 뒷통수를 쇠지렛대로 내리친다. 특유의 소음과 함께 철문에 세게 부딪히는 소음, 좀비가 더 몰려들 것을 직감하자마자 최대한 크게 발소리를 내며 쉘터 안을 달렸다. 모든 좀비의 주의를 끌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므로 오래지 않아 바깥으로 나왔다. 이대로 잘 따돌렸다가 돌아간다면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 좀비가 이 주변에 계속 머무르는 이상 쉘터는 결코 안전지대일 수 없다. 그것은 곧, 승연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과 동의어다. 하진은 한숨을 내쉬며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권총을 허공에 발포했다. 공포탄은 나갔고, 이제부터 실탄. 총알 다섯 발로는 결코 상대할 수 없는 좀비 무리가 몰려드는 것을 바라보며 하진은 짧은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웃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백이라도 할 걸 그랬지…….

쉴 틈 없이 이어진 전투 탓에 힘이 빠진 하진은 결국 새벽 즈음 팔뚝과 목덜미, 그리고 다리 한 쪽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으나 쉘터에서 먼 곳까지 좀비를 유인하는 것은 성공한 덕에 쉘터 주변에 남은 좀비는 이제 없다시피 했다. 다리 한쪽은 피까지 흘려 제대로 걷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고 싶었다. 네 얼굴을 보면, 네 얼굴을 봐야 이게 죄다 헛수고였던 건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래서, 하진은 기어코 돌아왔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승연을 보고서야 비로소 안심했다. 온몸은 피로로 몸부림치고, 당장 아무 곳에나 누워 잠이나 자고 싶었다. 그렇지만 승연이 무사했다. 승연이, 이제야 웃었다……. 그것만으로도 며칠 밤은 더 지샐 수 있었다. 많은 것이 괜찮아졌다, 정말로.

하진의 피곤 섞인 낯에 그제야 안심하는 기색이 돌자, 승연은 조금 무거워진 마음을 안고 하진과 함께 화장실에서 나왔다. 곧이어 시야에 들어온 것은 평소 건강검진에 갔을 때나 보는 피를 빼는 도구나, 혈청……. 저거 뭐라고 하더라? 너무 황당했던 탓에 이름도 잊은 승연이 도구를 전부 세팅한 채 싱글벙글 웃는 보람의 낯을 바라보았다.

“……이건 뭐예요?”

“하진 씨 피 뽑게.”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고? 승연이 황당해하든 말든 오랜만에 적성 살린 일 좀 하겠다며 신난 표정을 지은 보람이 하진을 끌어다 앉혔다. 쌓인 피로로 인해 종이 인형마냥 끌려간 하진이 얌전히 팔을 내밀고 앉았다. 이건 줘야 끝난다.

“나 사실 하진 씨 피 진짜 뽑아보고 싶었는데!”

“그건 무슨 말이에요?!”

“아니, 팔에 핏줄 봐. 주삿바늘 대충 던져도 혈관에 착 꽂힐 것처럼 생기지 않았어? 탐나는 혈관이라니까?”

“애들이 점점 윤도영처럼 되어가는 것 같아…….”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린 하진이, 그제야 긴장이 다 풀린 건지 벙찐 얼굴을 한 승연을 바라보다 결국 웃었다. 승연이 화를 내지 않는다면 그깟 피 좀 내줄 수 있다 싶었다.

“그래서 그런데 주삿바늘 던져봐도 돼요?”

……역시 아닌가……. 하진은 별 헛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썩어가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쉽다며 중얼거리고는 피를 뽑아가는 보람을 바라보던 승연이 잠시 고개를 기울이며 고민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거 뽑아서 뭐 검사하실 거예요?”

“유진이랑 증상이 비슷한 것 같아서. 같은 바이러스인지 볼까 싶어, 맘에 걸리는 게 좀 있거든.”

그러나 당장은 하진과 승연, 둘 중 누구에게도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는 듯 보람은 이야기를 그쳤다. 무언가 고민하는 기색이었던 하진도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알코올 묻힌 솜으로 제 판을 눌러주는 보람을 보곤 승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별말 없이 근처에서 밴드를 찾은 승연이 주삿바늘이 들어갔던 자리 위로 밴드를 붙이고 하진을 바라보았다. 가까이 있는 승연의 얼굴이 새삼 좋아서 콩, 가볍게 이마를 맞댄 하진이 체념한 듯 조금 웃었다.

“……나 촉각이 벌써 다 사라졌구나.”

“그럼 제가 왜 다 게워냈겠어요, 그거 아니면…….”

“속상했겠다. 미안. 슬슬 일어날까?”

무언가에 아주 집중하기 시작한 보람을 바라보던 하진과 승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열자마자 보이는, 연장을 든 리더와 패거리들을 보고는 그대로 다시 닫을까 싶었다만……. 말없이 승연을 제 등 뒤로 보낸 하진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 이상 현상까지 있는 마당에 부딪히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마는 하진은 본능적으로 제 등 뒤에 선 승연의 표정을 살폈다. 겁먹었네, 그렇다면 부딪히는 것은 좋은 결정이 아니다.

“어쩔까, 나가줘?”

“쓸모 있는 놈이라 나가는 것까진 좀 그렇고, 격리는 해야겠다.”

“투표 결과인가?”

“……그래.”

잠깐의 공백. 거짓말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실제로 투표를 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여기 강승연과 이보람을 따로 빼두고 투표를 했다는 것은 리더의 의견에 선동당하지 않거나 불합리한 의견에 반항할 사람들은 고려 대상으로 두지도 않았다는 말. 우습기만 했다. 하진은 다시 승연의 얼굴을 바라본다, 여전히 긴장한 얼굴……. 손을 쓰고 가는 편이 낫겠다 싶어, 하진은 한 발짝 나서려다 말고 그대로 리더의 손에 들린 쇠지렛대를 뺏어 들고 그의 복부를 걷어찼다. 눈치 빠르게 쥐고 있던 것도 내려두고 달려온 보람이 승연의 눈을 가린 덕에 승연은 거기까진 보지도 못했다마는.

“말로 해. 가줄 테니까. 고맙다, 이보람.”

“뭘. 아기 강승연 하나 키우는데 쉘터 하나가 필요하다는 옛 속담도 있잖아요?”

언제부터 그런 속담이 있었다고. 무슨 꼴이 일어나는지 봐야겠다는 듯 비틀거리던 승연도 오래지 않아 반항을 포기한 것처럼 긴장을 풀고 몸을 늘어트렸다. 그새 손에 든 쇠지렛대를 흔들던 하진이 무기를 내려두지 않으면 원하는 대로 가줄 의향은 전혀 없으니 알아서 협조하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거나, 그러니 무기는 알아서 이쪽으로 버리라는 듯 보람이 손을 뻗었다거나, 그래서 결국 의료실에 연장을 그대로 헌납하게 된 리더의 일행들 같은 이야기는 승연은 모를 일이다. 그들이 빈손으로 몸을 물리고서야 보람이 승연의 눈을 가린 손을 내렸다. 빈손이 된 사람들의 맨 뒤에서, 쇠지렛대를 든 하진이 작은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애 보기 쪽팔린 줄들이나 알아. 가자.”

그러는 와중에도 작은 소란이 일었다. 예컨대 보람이 솔직히 리더에게 하진이 갇혀 있게 될 곳의 열쇠를 맡긴다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보다 위험한 일이니 차라리 자신에게 맡기는 편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거나, 그 말에 동조한 승연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하진도 들었냐며 고개를 까딱였다거나, 리더의 일행도 그 말에는 동의하는 바이지만 보람이야말로 하진에게 호의적인 사람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냐고 이야기했다든가, 그 이야기를 들은 보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진에게 가기 전에 저 사람이나 좀 여기 침대에 묶고 가라고, 실험체가 필요하다고 난리를 치다 승연이 겨우 진정시켰다든가……. 어쨌든 보람의 손에 열쇠가 맡겨졌고, 당연하게도 보람은 하진이 갇힌 곳의 자물쇠를 걸지 않은 채 승연을 끌고 하진이 방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확인했다. 들어가 봐도 될까요? 네가 가면 좋아하긴 하겠다.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던 승연과 보람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진이 갇힌 방에 들어갔다. 가져온 쇠지렛대를 팔 닿는 곳에 두고 그새 큰 쿠션을 끌어와 누워있던 하진은 이전과 다르게 지나치리만큼 편안해 보였다. 그제야 두 사람은 안도했다, 나 졸려 죽겠다. 가벼운 축객령에 나선 두 사람은 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제 뒷목을 긁적였다. 저렇게만 보면 진짜 안 아픈 사람 같다, 그런 현실감 떨어지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자발적이라 해야 할지 등을 떠밀렸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하진이 그렇게 격리실로 들어간 것을 알게 된 쉘터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하진을 구석에 처박는 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드냐는 의견도 있었고, 어쨌든 물린 사람이 돌아다니는 것은 불안한 일이니 이번에야말로 지혁이 리더다운 일을 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하진을 당장 꺼내지 않으면 쉘터에서 나갈 것이라고 협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하진만은 어떤 이야기를 전해주더라도, 누가 어떤 말을 해도 그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의견이라고, 확실히 투표는 안 한 게 맞는 것 같다고. 그렇게 건조한 이야기를 건네며 고개를 끄덕이기나 했지 제 발로 방 바깥으로 나가려고 들진 않았다. 적어도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그랬단 것이다. 그렇게까지 희생해놓고, 그 희생으로 인한 수혜자들이 등을 돌리는 것이 꼴 보기 싫다 느껴진 적은 없느냐고 질문하면 내가 왜 남을 미워하는 데 시간을 사용하겠냐며 그저 웃어넘기기 바빴다. 애당초 그들을 구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는 듯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가, 지켜보는 사람으로서는 제법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도영은 하진을 만나고 나올 때마다 저 사람은 그렇게 잘 내던 화를 인제 와서는 하나도 내지 않느냐며 제 가슴팍을 두드렸고, 유리는 문 안으로 들어갈 때부터 나올 때까지 내내 깊은 한숨을 내쉬기만 했다. 그에 반해 보람은 늘 방역복을 걸친 채 지나치리만큼 들뜬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서기 바빴고, 나설 때는 하진의 피로 추정되는 붉은 액체가 담긴 병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승연은,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로 들어갔다가도 나올 때만큼은 직전보다 밝아진 얼굴로 나오곤 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방 안에서 대단한 것을 한 건 아닐 텐데도 말이다. 한참 기대있거나, 그러다 조금 졸거나, 있었던 이야기를 가볍게 나누었거나. 다만 그 정도였을 텐데, 그것만으로도 풀어질 마음인데 왜 바깥에서는, 하진이 없는 곳에서는 안녕할 수 없었을까. 타인에게만은 의문이었을 테다.

그렇게, 하진은 안에서 이야기를 전해 듣다 쉘터 자체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자명하나 개개인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대화를 몇 마디 나누고 그 대가로 넘겨받은 책에 고개를 처박는 시간들이 지났다. 도영은 팀장님이 읽을 것 같다며 돈의 속성, 같은 책을 가져다주었고, 시체를 치우러 갔다 온 김에 책도 찾으러 다녀온 유리는 여즉 잘 읽는 걸 보셨는데 지금 읽으시면 또 다르지 않겠냐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책을 가져다주었다. 와중에 승연은 딱히 주운 책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을 건넸고, 하진은 그럼 여기 앉아서 재미있는 이야기나 들려주면 되겠다며 승연을 이끌곤 했다. 무슨 이야기가 재밌을까 싶어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하나둘 내려놓다 지쳐 눈을 감으면, 하진이 손을 뻗어 승연을 제 품에 기대게 해두고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도, 두 사람에게는 지금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일상의 한 조각처럼 느껴졌다. 서로가 있고, 서로와 함께 평안한 시간이니까. 다른 건 하나뿐이다, 하진이 물렸다는 것. 그게 지나치게 크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시간이 지나 이틀 뒤, 부족한 부분을 메워야 했을 하진의 자리가 완벽하게 공백이 되자마자 쉘터의 질서는 완전히 무너졌다. 창고에서는 계속 물자가 사라졌고 식사의 배급조차 평소처럼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당연히 보급 시간에도 보급품은 분배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 것들은 본래 각자 맡은 바 책임을 다하기로 약속한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이나 지금은 그 사람들조차 전부 물려 쉘터 바깥으로 내쫓긴 상황이고, 그렇다면 그 일은 당연히 리더가 챙겨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리더의 역할을 대신 해주던 이는 방 안에 갇혀 나오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그러니 이 자리에는 무리를 위해 그나마의 희생조차 할 의사가 없는 리더가 다시 수장의 위치에 서 있다. 그러므로 이곳은 결코 예전 같을 수 없었다. 그 모든 무례와 무질서를 견디던 이가 방 안에서 나오기를 포기한 이상, 당연한 일이다. 하진이 정말로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나니 웬만해서는 리더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던 생존자들도 그 무렵부터는 이제는 참기도 힘들다는 듯이 하나둘 리더에게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 보급조차 안 돼요, 식사 배급조차 안 되면 양심껏 창고에 손 안 대고 규칙 지키는 사람들은 뭐가 돼요? 굶는 거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냐고요. 창고에서 물자도 계속 사라지는데 재고 정리를 하시든가 그게 싫으면 재고 정리를 할 사람을 정해주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것도 안 하시는 게 눈에 보이는데 그럼 대체 뭘 하고 계세요? 당연히 오갈 수 있는 비판에 리더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사흘간의 공백을 메우려 노력했으나, 그가 무언가에 손을 댈수록 쉘터는 엉망이 되어갔다. 우스운 일이다.

창고에서 사라지는 물자의 양은 아무 사람이나 담당자로 세워둔 이후로는 오히려 늘어났고, 식사 배급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어떤 근거도 없이 아무나 잡아 주방에 세워뒀더니 그 날은 온 쉘터에 탄내가 진동했다. 일이 마음대로 풀리지 않으면 언제고 그 모든 일을 맡아서 처리하던 하진에게로 가서 도움이라도 청하면 그만일 텐데 리더는 하진의 격리실이 있는 방향으로는 발조차 들이지 않았다 못해 그 자리를 아예 없는 장소로 취급하기 바빴다. 탄내 나는 쉘터 안에서, 리더의 기행을 전해주기나 할까 싶어 승연은 하진의 방으로 들어선다. 그대로 격리실 안의 풍경을 눈에 담고는 잠시 숨을 멈췄다. 은은하게 드는 햇살, 창 바깥으로 보이는 잿빛 하늘, 쿠션에 기대어 책을 넘기는 하진의 태연한 얼굴, 그리고서야 자신에게 옮겨오는 시선. 승연은 한참이나 멍한 낯으로 하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홀린 듯 하진의 곁에 앉았다. 당연히 자신의 옆자리에는 승연이 앉는 것이 맞다는 듯, 쉽게 자리를 비켜준 하진이 승연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 손길이 새삼 좋아 승연은 여기로 들어선 용건도 잊고 바보같이 웃어버렸다. 웃음소리를 듣던 하진도 모처럼 기분이 좋아졌는지 한참 풀어진 낯으로 가볍게 운을 띄웠다.

“여기에만 있으니까 심심해 죽겠다, 진짜.”

“죽는다는 말 금지.”

왜 왔냐는 질문이나 탄내가 심하지 않냐는 간단한 질문도 아니고, 바로 시답잖은 말로 서두를 여는 것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얼마나 익숙해졌는지를 증명하는 것 같았다. 그건 그거고, 죽는다니. 토라진 얼굴로 하진의 입가를 두드린 승연이 곧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입가에 손을 대자마자 손끝에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입술을 비죽인 하진 탓이었다. 쉘터 분위기 다 휘어잡던 그 대단한 어른은 어디 가고 이렇게 애처럼 구는 사람만 남았는지. 뭐, 내 눈에 귀여우면 그만이지만. 승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문득 눈을 내려 그가 읽던 책이 무엇인지를 눈으로 훑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애 같다는 생각 취소. 무슨 애가 이런 책을 읽어, 귀여워할 틈도 안 주네. 제멋대로 생각이 휙휙 바뀌는 승연이 꽤 귀여워서인지 하진 또한 작은 웃음소리를 흘리다 승연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이 정도 스킨십은 자주 있던 일이긴 한데, 평소와 달랐던 점이 하나 있었다면 꼬집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느낌이 왜 안 들지? 혹시 나도……. 승연은 놀란 낯으로 하진을 바라보다 말고 제 손으로 뺨을 세게 꼬집다가…… 아, 아파! 눈을 꼭 감았다 떴다. 갑작스러운 자해공갈에 놀란 건지 괜찮냐며 손을 뻗는 하진의 손끝이 옅게 떨렸다. 승연은 그제야, 왜 하진의 손에서 어떠한 감각도 선명히 느낄 수 없었는지를 체감한 듯 느리게 눈을 끔뻑였다. 곧 눈시울이 뜨거워져 고개를 숙이고 만다. 어떡해, 울 것 같아…….

자신의 감각이 상당히 무뎌졌다는 것을 하진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감각을 감당하는 사람에게도 독이었지만, 누군가에게 감각을 전해야 할 때는 더 무겁게 느껴졌다. 사실 그 누구도 굳이 승연에게는 말하지 않았으나 하진이 갇힌 지 얼마 되지 않아 도영과 유리가 한 번에 찾아왔을 때 그 사실을 체감했다. 도영이 너무 까불길래, 평소처럼 힘을 조절했다 생각하며 등을 가볍게 내리쳤는데. 엄살이라고는 조금도 묻어있지 않은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살려달라는 말을 내뱉은 덕이었다. 그렇게 아파? 너무 진심으로 치셨잖아요. 살살 쳤어. 아니라니까요, 지금 힘 조절 안 되세요. 그 이야기를 듣고 옆에 있는 유리가 자신의 팔을 잡아보라고 하기에 잡았는데, 엄살이라곤 웬만해선 부리지도 않는 유리가 비명을 질러대는 덕에 정말로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도 크게 조심하지는 않았는데 상대가 승연이라면 당연히 다르게 행동해야 할 일이다. 그야, 만약에라도 아프다는 말을 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저런 표정일까, 아프게 했나. 걱정 가득 어린 표정으로 하진은 몸을 숙여 승연의 뺨을 쓸었다.

“아팠어요? 미안해.”

“아,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럼 왜 그래…….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왜 당신은 잘못 하나 않아놓고 매번 내게 잘못을 고하고 용서를 고하는지. 누가 봐도 당신 잘못은 조금도 없는 상황에서. 승연은 붉은 눈시울을 가리지도 못하고 눈을 들어 하진을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정말로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하진은 조심히 승연의 몸을 안는다. 여전히 힘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눈앞에 갓 태어난 어린아이를 데려다 놓아도 이보다는 조심스럽지 못할 것 같은 힘이, 섬세함이. 과분할 정도로 좋았던 만큼 울고 싶었다. 승연이 하진의 품에 완전히 고개를 묻고서야 하진은 겨우 팔에 힘을 싣는다.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그의 등을 토닥이면서. 그러기도 잠깐, 급하게 하진이 머무는 격리실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급박한 소리에, 잠시 울음에 잠겼던 승연도 그를 안고 있던 하진도 고개를 든다. 그와 동시에 격리실의 문이 열렸다.

“하진 씨, 와서 좀 도와주세요!!”

“처박아두라더니 이젠 나오라니.”

“그게 아니라, 김지혁이 지금!!”

“……승연이랑 같이 여기서 기다려.”

그 이름 하나만으로 자신 외에는 나설 수 없는 상황임을 직감한 하진이 달려온 보람을 방 안으로 들였다. 곧 쇠지렛대를 들고 방 바깥으로 나서는 걸음에 보람은 그제야 조금은 안도했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물론 졸지에 쿠션 위에 소중히…… 눕게 된 승연은 별말 없이 눈을 끔뻑일 수밖에 없었다. 막 울다 그친 그의 얼굴을 보던 보람이 숨을 내쉬더니,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들다 말고 제목을 확인했다. 곧 질렸다는 표정을 짓고 책을 내려두기야 했다마는.

“다이어리인 줄. 훔쳐 읽어볼까 했는데 뭔 철학책을.”

“저, 바깥에 무슨 일 생겼어요?”

조심스러운 승연의 목소리에 보람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뭐 뻔하지 않겠어. 익숙한 서두였다.

“애들이 하진 씨라도 다시 꺼내오자니까 열등감 터져서 칼부림하는 중.”

그러니까, 이렇게 된 것이다. 리더가 움직이면 풀리는 것은 없고 도리어 일이 꼬여만 가니 사람들의 분노가 높아졌다, 까지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고. 항의해도 나아지는 것이 없으니 결국 어떤 사람이 적절한 조치를 취한 후 하진을 다시 데리고 나오는 것은 어떻겠냐는 제안을 건넨 것이다. 리더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지든 말든 그저 합리적으로, 지금껏 쉘터에서 반드시 지키기로 약속한 규칙 같은 것은 좋은 부분이든 싫은 부분이든 하진이 개입하여 정한 부분이 일정 부분 있었으므로 하진을 데리고 나와서 일을 배우면 많은 것이 괜찮아지지 않겠냐고. 리더의 표정은 신경도 쓰지 않고 떠들어대는 대화가 몇 사람의 입으로 전해지자 결국 리더가 뒤집어졌다. 내가 걔보다 못하는 거냐고, 리더에게 굉장히 무례한 소리인 줄은 아느냐고 소리를 지르던 그가 한 쉘터 사람의, 하진에 비하면 모자란 것이 맞지 않느냐는 반문에 구석에 놓인 칼을 쥐어 들고 설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거기까지 설명한 보람은 텀블러에 든 정체불명의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아니, 누가 다칠 수도 있는데 너무 태연하신 게 아닌가. 승연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물론 보람도 보통이었다면 누가 다칠지 모르는 상황이니 옆자리를 최대한 지키고 있었겠지만, 구태여 승연에게 설명하지는 않은 어떤 말 때문에 오늘은 나서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까, 뭐랬더라. 그놈의 적절한 조치가, 뭐? 하진 씨가 필요한 건 맞지만 언제 바이러스를 옮길지도 모르는 일이고 당장 물겠다고 설칠지도 모르는 일이니 입마개를 채우고 협조를 구하자고 했던가? 지랄. 새하얘진 승연의 낯을 바라보던 보람이 텀블러에 꽂은 빨대를 승연의 입에 물려주었다. 엉겁결에 내용물을 마신 승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되게 달아.

“아이스티 가루가 있더라?”

“이거 너무 오랜……. 이, 이게 아니라. 말씀해주시지 않은 일이 더 있었던 거죠? 그냥 여기 계시는 게…….”

보람이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 승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파에 깊게 몸을 기댔다. 여기 사람들은 이상하게 말을 하다 마는 버릇이 있더라……. 오늘의 생략된 맥락은 뭐였을까, 고민하던 승연이 문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들리는 것이 리더의 비명밖에 없다. 그럼 별일 없는 거겠지, 승연도 이제는 쿠션에 깊게 몸을 기댄 채 태연한 숨을 내뱉었다. 그 망나니, 팔자 망치든 말든.

“그나저나 이 지경까지 왔는데 사람들은 왜 저렇게 리더 편을 드는 걸까요?”

“아무래도 안정성의 문제 아닐까? 하진 씨도 그렇게 됐으니까.”

아, 그래. 하진 씨도. 침울해진 낯을 채 감추지 못하는 승연의 낯을 바라보며 보람은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말실수했다……. 어색해진 분위기도 오래가지 않았다. 하진이 다시 돌아온 덕이다. 팔뚝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깊게 베인 것은 아닌 눈치였다. 바로 구석에 놓인 구급상자에서 소독용 알코올 솜과 연고를 가지고 온 승연이 하진의 팔에 남은 상처를 치료해준다. 깊이도 깊지 않고 길이도 길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가, 이런 거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숨기지 않으니까 혼내진 말아야 하나. 어쩐지 생각이 복잡해졌다. 곧 보람의 무심한 목소리가 울린다.

“나온 김에 있으라고들 안 해요?”

“하던데, 입마개 차고 다니래서 내가 너희 편의도 봐주고 내 불편도 감수해야 하냐니까 별말 안 하길래 들어왔지.”

무슨 말을요? 놀란 듯 바라보는 승연과 달리 보람은 태연했다. 아, 애당초 감추려는 말이 이거였구나. 하긴 내가 들으면 기분 나빠할 소리니까……. 그게 나름 보람의 배려였다는 점에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그럼에도 기어코 제 귀에 들어온 말에 기분 나빠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승연은 잠시 생각했다. 어느 방향이든 간에 보람이 할 행동이 바뀌는 건 아니다. 보람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으음, 그 소릴 면전에서도 했어? 다친 사람 없어요?”

“없는 셈 쳐.”

있다는 뜻이다, 치료할 가치는 없다는 뜻이기도 했고. 그렇다면 뭐. 짧게 덧붙인 보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하진은 그렇게 자리를 뜨면서도 오는 건 막지 않을 테니 필요하면 오라는 말과 함께 너희가 바라는 대로 입마개를 차줄 마음은 없으니 알아서들 하라는 이야기를 건넨 모양이었다. 그 이야기까지 전해 들은 승연과 보람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하진이 그렇게 결정한 까닭이 있겠지, 간단한 판단하에 완전해진 생각이다.

그 이후로, 말 그대로 하진은 제 방에 들어오는 사람을 구태여 막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찾아가는 사람은 늘 한정된 법이었는데, 일단 보람은 또 매일같이 피를 뽑는 도구를 들고 오가곤 했고 유리는 무언가 듣고 싶다는 듯 메모장을 들고 찾아가서는 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오곤 했다. 도영은 연유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매일같이 들르면서도 나올 때는 눈시울이 붉어져서 나왔는데, 그런 와중에 승연은 늘 하진의 방에 있었다. 당장 해야 하는 것도 없는 처지에 하고 싶은 일은 하진의 곁에 붙어있는 것밖에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진의 방에 들어가면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것도 그 자리에 머물기로 한 사유가 되었을 테지. 그런 승연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진은 늘 승연을 제 품에 앉혀놓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곤 했다. 확실히 알면 못 그러겠거니 싶지마는.

그러다 승연이 깜빡 잠이 들 때면, 하진은 언제나 쿠션을 승연에게 넘겨주고는 품속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평소 적던 것과 하나 다를 것 없는 내용을 쓰기 시작했다. 그 정도 소음에 일어날 만큼 잠자리에 예민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끔 종이가 크게 펄럭일 때면 잠에서 깬 승연이 하진이 무언가를 쓰는 모습을 한참이고 바라보는 순간이 종종 생겼다. 지금도 그랬다, 한참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다 잠든 승연이 눈을 감고 있으니 하진이 무언가를 쓰기 시작한 게. 그 소리에서인지, 혹은 계절에 맞지도 않도록 추워서인지. 잠에서 깬 승연이 하진을 바라본다. 무언가에 집중하는 그의 모습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잠결에나 물을 수 있는 질문이 있는 법이다.

“맨날 뭘 그렇게 써요……?”

“궁금해?”

줄곧 궁금했지, 고개를 끄덕이는 승연의 모습에 하진은 별말 없이 웃었다. 그럼 계속 궁금해하면 되겠다.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승연이 입을 비죽였지만 하진은 말 한마디 제대로 해주는 법이 없었다. 승연이 토라진 티를 많이 내는 날에는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다음에. 그렇게 다음을 기약한다. 그냥 지금 보여주면 어디가 덧나나, 뭐, 보여줄 의무가 있는 건 아니긴 한데. 그렇게까지 생각하다 보면 지나가던 보람이나 대화를 나누던 유리와 도영이, 자신에게는 알 필요 없다는 이야기나 했지 내용을 보여준다는 말은 다음으로도 기약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건네주곤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름 특혜를 받는 건가?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무난한 하루하루가 지났다. 언제나 승연이 하진의 격리실에 함께 있고, 도영과 유리, 보람도 심심찮게 오가며, 가끔 쉘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 조언을 구하러 오는 사람들을 상대하기도 하면서.

적잖이 시간이 지나, 하진의 첫 감염일로부터 정확히 일주일째가 되던 새벽. 혹시 모른다는 이유로 하진의 곁에서 하루를 꼬박 지새운 보람과 승연은 그런 두 사람의 속은 아는지 모르는지 푹 잠든 하진의 낯을 몇 번이고 훑었다. 본래 몸에 손을 대는 것을 지나치리만큼 싫어하는 하진이었으므로, 직접 손을 대는 것은 조심스럽다는 사유로 보람은 굳이 그의 몸에 손을 대지는 않았으나, 그러나 마나 승연은 하진이 자신의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며 손을 뻗어 하진의 이마를 몇 차례 짚었다. 열감이 느껴지는지를 확인하기도 하고, 손을 잡아가며 그의 촉각이 여전히 유실되어 있는지를 확인한다. 평소 같았으면 누군가가 건드렸다는 이유만으로도 일어났을 하진이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고른 숨을 내뱉고 있었다. 촉각이 사라진 게 확실히 크긴 한가, 그렇게 생각하던 보람이 하진의 호흡을 확인하려 한 발짝 다가가려던 찰나, 잠에서 깬 건지 하진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제야 무언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은 보람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 만다.

“징하다, 진짜. 몸 어때요.”

“……너 싫은 거 아냐.”

“알아요, 이 양반아. 몸 어떠냐고!”

저게 무슨 대화지? 말이 묘하게 안 맞는데……. 고개를 갸웃 기울이던 승연이 곧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는 하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괜찮다는 뜻이겠지. 어제와 크게 다를 것도 없다는 의미였으리라. 승연은 그제야 비로소 안심한 듯 작게 웃었다. 하긴. 보람과 유리, 그리고 도영과 자신. 전부 유진이 감염됐을 때 어땠는지를 보지 않았나. 그것이 변종 바이러스로 추정되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의 평균이라면 하진 또한 벌써 증상이 나타날 리는 없기야 했다. 염려 말라는 듯 가벼운 미소를 흘린 하진이 손을 뻗어 승연의 뺨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그러기도 잠시, 다시 문 방향에서 바쁘게 들려오는 발소리에 세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하진은 곁에 놓아둔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보람은 하진의 상태를 본격적으로 확인하는 척 몸을 숙여 하진의 한쪽 팔에 혈압 측정기를 채웠다. 엉겁결에 보람과 눈높이를 같이 한 승연 또한 보람을 보조하듯 하진의 옷소매를 끌어올릴 즈음에야 문이 열렸다. 들어온 얼굴을 마주한 보람의 표정이 썩어들었다. 기껏해야 유리나 도영 정도 올 줄 알았고, 그러니 이 잠깐의 난리에 실없이 웃으며 우린 뭘 한 거냐는 이야기나 건네게 될 줄 알았는데 들어온 사람이 다름 아닌 리더였다. 여즉 단 한 번도 온 적이 없으면서 갑자기 왜? 승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얼굴을 바라볼 즈음, 맞은 편에 선 리더의 얼굴이 굳었다. 그 표정을 보고서야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보람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못 버리시겠어요, 아직 열도 안 나고 멀쩡하셔서.”

“……왜? 일주일 지났잖아.”

“우리 하진 씨는 바이러스도 피해 가는 귀인이신가 봐. 나도 지금 확인하는 중이니까, 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럴 수는 없다는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리는 리더의 말에 승연은 다시 인상을 구겼다. 저 사람, 유진 씨의 증상이 길었던 건 조금도 모르지 않았나? 그런데 하진 씨가 언제 감염되었는지는 바로 알아챘네. 심지어 웬만하면 다 자고 있을 시간에 찾아왔다는 건, 정말로. 보람 씨 말대로 가져다 버리려고 했던 건가, 유진 씨에게 그랬던 것처럼. 문득 이제는 정말로 사람이 역겨울 지경이라는 생각이 들어 승연은 입을 가리고 헛구역질을 했다. 책을 보던 손도 내려두고 등을 쓰다듬으려 하는 하진의 움직임을 보니 속이 조금은 괜찮아졌고, 그 손이 채 등에 닿기도 전에 팔뚝을 얻어맞은 하진이 뭐냐는 눈빛으로 보람을 바라보는 것을 보니 또 조금은 나아졌고, 어디 혈압을 재는 중에 움직이냐며 하진을 타박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이제는 정말로 괜찮아졌다. 말로 해도 충분히 알아들으니 웬만하면 말로 하면 안 되냐며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하진을 바라보고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의사 선생님 말씀은 들어야죠, 장난스럽게 덧붙인 승연의 목소리 덕에 엉망이 될 뻔했던 분위기도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졌다. 그 분위기 속에서 리더는 그저 완벽한 이방인에 불과했건만, 그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진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혹은 믿고 싶지 않다는 듯이.

물렸다는 말 자체가 거짓말이었나. 찰나 의문스러웠으나 물린 자국은 제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고, 그 감정 잘 숨기는 유리와 보람도 함께 하진을 보고 나오자마자 부둥켜안고 우는 것을 보았는데. 그가 물린 것부터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은 낮다…… 라고, 리더가 머리를 굴리는 것이 눈에 죄다 보이는 기분이라 하진은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하진은 새삼스레 제가 지닌 불온한 가능성을 떠올린다. 변종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가능성. 그 바이러스가 타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초래하는 종류의 바이러스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하진이야말로 제 증상이 만에 하나라도 쉘터 사람에게 끼칠 피해를 대비하여 제 발로 걸어 나갔을 텐데. 그 바이러스 감염 당사자와 치고받느라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리더조차 여즉 멀쩡한 것으로 보아 변종 바이러스로 추정되는 지금의 감염 상황이 타인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하진은 함구하기로 했다. 감염의 실태에 대한 것도,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불안히 떨려오는 시선 속에 담긴 의문에 대한 답도.

“……혹시라도 아프다고 하면,”

“아프다고 하시면 그때 얘기해. 나가랬다.”

지겹다는 듯 응답한 보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승연은 아주 새삼스럽게 보람과 리더를 한 번씩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무례하게 굴고 특히 하진 씨에게도 그런 사람인데. 보람 씨한테는 나쁜 말을 안 하네. 그런 생각을 하던 승연은 곧 자리에서 나가는 리더와, 혈압 측정기를 정리하며 다른 검사 도구도 가져오겠다며 뒤이어 나간 보람을 흘끔 바라보더니 하진의 품에 안겼다. 익숙하다는 듯 승연을 받아준 하진이 그의 등을 두어 번 토닥인다. 승연도 이런 손길이 익숙한지, 몇 번 눈을 끔뻑였다.

“리더가 보람 씨 좋아해요? 엄청 얌전해서…….”

“모르겠는데. 그냥 여미새 아닌가…….”

하진의 태연한 대답을 듣던 승연이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어버린다. 저런 말도 쓸 줄 아는 사람이었나 싶다. 험한 말은 그렇다 치고 유행 타는 줄임말은 영 멀리 두는 사람인 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나? 그즈음 다시 문 바깥에서 급한 발걸음이 들렸다. 벌컥, 열린 문으로 유리와 도영이 들어온다. 한바탕 난리가 났다는 것을, 혹은 리더가 왔다는 것을 들었는지 표정조차 심각했지만 웃음을 갈무리하지 못하던 승연과 눈이 마주치고는 두 사람 모두 고개를 기울였다. 뭐지. 곧 의문 어린 표정의 두 사람이 입을 연다.

“이상하다. 이하진 개그 센스가 얘 이렇게 웃게 할 만큼 좋진 못한데.”

“뭐랬는데 애가 이렇게 웃어요?”

안 그래도 적잖이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하진이었다, 그게 그렇게 웃긴 말인가 싶기도 했고, 제 딴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만한 말이 아닌데 왜 웃는지 모르겠다 싶기도 했고. 어쨌든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하진이 머리를 긁적이다 말을 이었다.

“김지혁 여미새라는 소리만 했어…….”

“흠? 그냥 사실적시인데?”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인 도영과 달리 유리는 어떤 포인트가 승연의 웃음을 자아냈는지 이해했다는 듯, 승연의 어깨를 짚다 말고 결국 승연과 함께 웃음을 터트렸다. 의아하다는 시선의 두 사람의 시선을 한참 받고 나서야 웃음을 멈춘 승연과 유리는 타이밍 좋게 돌아온 보람에게 앉을 자리를 내어주었다. 겸사겸사 다섯 명 분의 식사도 챙겨온 보람이 각자의 앞에 일회용 젓가락을 쥐여주고는 자리에 앉았다. 보람도 직전까지 들린, 이 방에서 들릴 까닭이 없는 큰 웃음소리의 사유가 적잖이 궁금한 눈치였지만 굳이 질문을 입 바깥으로 내지는 않았다.

“팀장님이 김지혁 여미새라니까 승연이 막 웃더라.”

“와……. 진짜 맞는 말이긴 한데 진짜로 이하진이랑 안 어울리는 단어 선택…….”

그래도 궁금해보여서, 라는 이유는 구태여 입 바깥으로 내지 않고 유리가 아무렇지 않게 운을 띄우니, 조금 식은 표정의 보람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제야 두 사람이 왜 그렇게 웃음을 터트린 건지 알겠다는 듯 하진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졸지에 다시 웃음이 터진 승연이 애써 호흡을 가라앉히며 허공을 바라본다. 아, 정말 실없는 이유로도 수없이 웃을 수 있는 날이다. 이런 날만 계속될 수 있으면 좋겠네. 앞으로 영원히 이런 날만 반복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와 함께하는 아침 식사는 오래간만에 입에 맞았다, 신기하게도.

그러나 시간은 무심히 지나갔다. 보람이 하진의 증상이 유진보다도 특이한 것 같다고 심각하게 말하는 날이, 그로 인해 이제는 거의 승연과 하진의 방이 된 격리실에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고, 그러다 말고 보람이 꼬박 하루 간 자리를 비우는 날까지 생겼다. 보람이 증상을 읊을 때마다 진지한 표정을 짓던 하진이 제 다이어리에 증상을 기록하는 듯 무언가를 빼곡하게 적는 날도, 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가도 기어코 괜찮다는 위로에 하진의 품속으로 안겨든 승연이 그 품에서 당연한 울음을 터트리는 날도. 잦아졌고, 일상이 됐다. 그렇게, 정말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곧 다가올 재난을 감내하는 태풍의 눈 속에서 흘려보낸 사흘. 하진이 좀비에게 물린지 열흘째가 되던 새벽.

승연은 귓가에 들리는 거친 호흡에 감은 눈을 뜬다. 이건 무슨 소리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든 곳에는 평소보다 들뜬 낯의 사진이 있었다. 풀린 동공, 몰아쉬는 호흡. 승연은 제 몸을 안은 하진의 팔을 조심스럽게 풀어낸다. 손이나 팔에 힘을 싣는 것도 버거운지 승연이 억지로 떼놓은 하진의 팔은 바닥으로 툭, 맥없이 떨어졌다. 그제야, 애써 수면 아래로 가라앉힌 승연의 불안이 고개를 든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로……. 하진의 마른기침 소리가 귓가에 닿는다. 이토록 끔찍하고 또 생생한 것은 결코, 악몽일 수 없다.

승연은 급하게 몸을 일으켜 방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쉘터의 사람이 줄어들고 난 후로는 룸메이트를 임의로 배정한다는 것이 사실상 의미가 없어졌고, 그래서 사실상 리더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유리와 보람, 그리고 도영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같은 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니 승연 또한 그들이 모여 있는 방으로 달려가 닫힌 문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 같은 얼굴로 문을 연 보람도, 아직 덜 깬 졸음을 깨우려 안간힘을 쓰던 유리와 도영도. 승연의 표정을 보자마자 잠이 전부 달아난 듯 몸을 일으켜 하진의 격리실로 뛰었다. 다행히도 아직 리더가 도착하지 않았다. 유리와 도영이 주변을 살피는 동안 보람이 하진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곧 다급한 목소리가 울린다.

“체온 39도, 의식 거의 없어. 의무실로 이송…….”

“무리야.”

“그럼 약 챙겨와!!”

단칼에 뱉은 유리의 목소리에 응하듯 보람이 크게 소리쳤다. 곧바로 의무실로 뛰어간 유리가, 그 앞을 지키고 선 인영에 그제야 헛웃음친다. 아, 왜 안 오나 했다.

“왜, 곧 죽을 새끼한테 의약품 낭비하게?”

“그 곧 죽을 새끼 아니었으면 시체였을 새끼가. 비켜.”

바로 앞에서 자리를 지키고 선 지혁의 모습을 바라보던 유리가 그를 위협했으나, 그는 비킬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듯 가소롭다는 것처럼 웃었다. 강유리, 빨리!!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보람의 목소리에 유리는 바로 눈앞의 리더에게 달려들어 배를 가격했다. 그대로 몸이 뒤로 밀린 리더가 의무실의 문에 크게 부딪혔다. 거의 문짝이 떨어질 기세로 부딪혀서인지 통증에 신음하던 리더가 그대로 몸을 일으켜 유리에게 달려들자마자, 보람의 재촉에 한 번 가보겠다며 내려온 승연과 도영이 문 사이로 뛰어들어 눈에 보이는 의약품과 보람이 가져오라고 몇 번이고 강조한 의료용 아이스박스를 챙겨들어 의무실을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리더의 고함이 들렸다.

“이하진도 지금까지 너희처럼 약 빼돌렸지, 개새끼들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 처먹으려고 가져가는데!!”

함께 고함을 지른 도영이 가운뎃손가락을 펼쳐 내밀자마자 유리가 리더의 목을 노려 쳤다. 급히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으나, 동시에 고꾸라진 몸에 유리는 가볍게 숨을 흘렸다. 죽었나, 뭐, 내가 알 바인가? 급히 자세를 바로잡은 유리가 걸음을 재촉해 격리실로 뛰었다.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는 하진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승연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적잖이 놀란 낯, 어쩌지도 못하고 들이마시는 급한 숨. 그 모습에 유리는 조심히 승연에게로 다가가 그의 두 눈을 가렸다. 그제야 승연의 몸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한다. 하, 하진 씨. 하진 씨.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걸려있는 울음기가 짙다. 곧 거칠게 제 머리카락을 쓸어올린 보람이 입을 열었다.

“하진 씨, 우리 다 예상했던 거잖아. 괜찮아.”

“……승연, 승연아?”

“하진, 하, 야, 강승연 내보내!!”

그 와중에도 승연을 알아본 건지, 하진의 목소리 끝이 떨려왔다. 그제야 벼락처럼 떨어진 보람의 목소리에 유리는 승연을 부축하며 일어났다. 분명 지금의 기억이 승연에게 큰 트라우마로 남을까 봐, 그래서 건넨 보람의 염려는 틀린 판단이 아니었을 테지만 타이밍이 조금 늦었다. 흐려지는 정신 속에서도 승연을 알아본 하진이 그가 있는 방향으로 손을 뻗는다. 놔요, 놔주세요, 지금 나 불렀잖아요……. 다 우는 얼굴로, 그러나 눈이 가려져 지척에 있는 하진도 알아보지 못한 채 승연은 강제로 문 쪽으로 끌려나갔다. 있는 대로 버틴 탓에 문이 열리지는 못했지만, 당장 의식이 흐려진 하진에게는 그런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승연은, 자신을 두고 갈 생각만 품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서러웠다. 가지 않았으면 했다, 그가.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만 더 곁에 있어주었으면 했다…….

“가지 마…….”

“가지, 가지 말라잖아요. 나 좀 놔요……!”

“내보내, 빨리! 도영 씨도 붙어야죠!!”

그제야 일어선 도영이 승연의 몸을 붙든다. 승연아, 조금만. 괜찮아. 팀장님 괜찮을 테니까 좀 진정되시면 다시 오자, 우리가 너 못 오게 할 거 아닌 거 알잖아. 달래는 목소리 너머에서 갈라진 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좀…….”

죽여줘.

아니, 살려줘…….

환청이었는지, 정말 들린 목소리였는지. 이제는 분간할 수 없는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승연이 떠난 격리실의 문이 닫혔다.

그가 진정 갈망한 것은 삶이었을까, 죽음이었을까.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다시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세 사람은 그대로 쓰러지듯 자리에 앉았다. 그의 입에서 나올 리 없는 말이라 생각했던 말이 나온 것이 충격이었는지, 와중에도 간절히 찾은 사람이 언젠가 평생 그리워하리라 생각했던 가족, 특히 동생이 아닌 승연인 것이 충격이었던 건지. 한참동안 어떤 말도 하지 못하던 유리와 도영이 서둘러 승연의 눈치를 살폈다. 그 역시 제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없어 혼란에 빠진 얼굴이었다. 동시에, 어쩌면 울 것 같은 얼굴이어서. 유리는 손을 뻗어 승연의 몸을 끌어안았다. 잘게 떨리던 승연의 몸이 유리에게 완전히 기울어진다. 그 와중에도, 문 안의 소리는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일평생이 될 것만 같았던 침묵이 깨진 것은 지친 낯의 보람이 문을 열고 나오고서였다. 혹시 모른다며 쓰고 들어갔던 마스크까지 벗으며 나온 보람이 망설임 없이 승연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흩어놓듯 쓰다듬었다. 무슨 걱정을 하냐는 듯 여상스럽게 지은 웃음에 승연은 그제야 뜨거운 숨을 흘렸다. 하진 씨, 괜찮으신 건가. 그게 아니면 웃고 계시지 않으시겠지. 그렇지만 괜찮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거의 울 것 같은 승연의 얼굴을 마주 보며 보람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주무셔. 몸이 약을 못 버티나 봐.”

“……괜찮으신 거죠?”

“확신은 못 해. 유진 씨랑 증상이 비슷한데, 우리가 유진 씨 증상을 다 본 건 아니었잖아. 다른 무언가가 생길지도 모르는……. 악!”

빈틈없이 이어지는 말에 유리가 보람의 등을 내리쳤다. 그제야 분위기 파악이 된 것처럼 보람은 몇 번 눈을 끔뻑이다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니, 왜 때려. 하지만 그래서 다른 희망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게 내 입장이야, 정말로.”

실제로는 그렇게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닐 수도 있는 건가. 맞을 수도 있는 거고. 괜히 울적해지는 기분에 승연은 축 처진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를 벅벅 긁은 보람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환자만 신경 쓰면 되는 줄 알았는데 여기는 신경 쓸 게 왜 이렇게 많은지. 의사 체질은 아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보람이 승연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다 입을 열었다.

“살고 싶다고 하더라.”

“…….”

“고마워.”

뭐가요. 채 물을 새도 없이 보람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모르니 하진은 자신이 관찰하고 있겠다는 이야기만을 내려두고서. 하진의 컨디션을 생각하면 보람이 아니라 승연을 곁에 둬야 하는 게 아닐까, 잠시 생각하던 유리와 도영도 오히려 보람이 머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라는 생각을 한 건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하진이 유독 이성을 잃는 상대는 아무래도 승연이니까. 그게 두 사람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실이 될 가능성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마주한 하진의 태도만을 생각한다면. 조금 서운하다는 듯 시선을 떨군 승연도 이내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봐도 그러는 쪽이 합리적인 판단이었던 탓이다.

그렇게, 불의의 사고는 일어나지 않겠으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 불안의 요소는 아예 없애버리겠다며 방역복까지 챙겨 입은 보람이 격리실 안으로 들어간 지 하루가 되었다. 남은 세 사람은 그즈음부터 몰골이 초췌해지기 시작했다. 나아졌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고, 들어간 보람도 좀처럼 나오지 않고. 하루 세끼 챙겨 먹으라고 음식을 들여보낼 때도 고맙다는 쪽지 하나가 나오는 게 다였지 하진의 상태를 알려주는 것도 아니었다. 갑갑하기도 갑갑했지만, 걱정도 됐다. 두 사람 모두. 하진 씨는 괜찮은가, 보람 씨는 옮은 건 아닌가. 안에서 쓰러진 거면 어떡하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자면 세 사람이 모여 앉은 격리실 앞으로 리더가 다가왔다. 어제의 몸싸움으로 조금 다친 건지, 표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뭐야?”

“하루 지났으니까 멀쩡해졌을 거…….”

“밖에 뭐야, 김지혁 왔어? 우리 바쁘니까 꺼지라고 해!”

안쪽에서 들려오는 보람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하진의 상태가 아직 멀쩡해지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하긴, 리더는 채 눈치채지 못한 사실이었다마는 유진 씨도 24시간이 지났는데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지. 그렇게 생각하면 두 사람의 상태는 유독 비슷한 데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게……. 정말 변종 바이러스인가. 염려 어린 시선을 내린 승연의 시야에 리더의 얼굴이 들었다. 한숨을 내쉬던 리더가 고개를 들어 세 사람을 바라본다.

“일단 와. 투표해야지.”

“무슨 투표.”

“내쫓을 건지.”

실제로 하진의 처우에 대해 투표를 받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했다고 말만 했지 실제로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간 적은 없으니까.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 굳이 투표를 받는다는 것은……. 정말로 쫓아낼 명분이 필요한 건지, 리더로서의 권위를 이제 와서라도 조금 챙겨보고 싶은 건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리와 승연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만 도영만은 일어서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로 투표를 받아? 대단하네.”

비꼬는 듯한 도영의 말에도 리더는 아무 말이 없었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 고민하던 낯의 도영이 이내 문에 푹 기대앉는다.

“안 가. 알아서들 하고 오세요.”

혹시 누가 와서 문을 억지로 열려고 할지도 모르니까. 리더의 친구들이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한 건지 유리와 승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리더의 걸음에 맞춰 중앙의 테이블까지 다다른 두 사람은, 새삼스럽게 인원이 많이 줄어든 쉘터 안을 바라보며 침음을 흘렸다. 정말로 거의 다 죽었네. 남은 사람이 얼마 없는 걸 보면. 확실히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러나 마나, 리더는 두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고려할 정도로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오래지 않아 투표용지를 전부 나눠준 리더가 짧은 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하진의 처우에 대한 투표가 시작됐다. 증상이 발현한 후 제정신을 차리면 반드시 제 발로 나갔다고 하진이 이미 약속했던 만큼, 동그라미를 그리면 하진이 제 발로 나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의견이며 엑스를 그리면 하진의 입장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고 정신을 차리든 말든 내보내겠다는 의견이니 알아서 기재하라는 리더의 말을 들으며 유리는 주변을 눈으로 훑었다. 이상하리만치 불안해하는 사람이 많다. 승연도 그 사실을 눈치챈 건지, 주변을 훑다 말고 유리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여론은 알아서 조작한 것 같고, 그 이후에 벌인 투표인 것 같다는 결론만이 도출됐다. 그럼 우리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안에 있는 보람이 도와주면 비등비등한 결과가 나오기라도 할 텐데, 나와서 한 표라도 보태라고 해야 하나?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제각각의 문자를 종이 위로 그려낸 사람들이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넣기 시작했으므로.

승연과 유리는 당연히 동그라미를 그린 투표용지를 제출하고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몸을 숙여 바로 곁의 사람도 겨우 들을 법한 목소리로 두 사람은 가볍게 의견을 나누었다. 결과 개같이 나오면 어떡할까. 일단 당장은 도영 씨가 앞을 지키고 있으니까 도영 씨가 버텨줄 거라고 믿고, 그래도 바로 뛰어 올라가서 같이 막아요. 네 몸으로 뭘 막을 수는 있니? 노력할 거거든요. 투닥대며 주고받는 이야기가 끝날 즈음, 개표가 시작되었다. 결과에 따라 해야 할 일이 바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새삼스럽게 신발 끈을 고쳐 묶었다. 그러기도 아주 잠깐이었지만.

동그라미와 엑스의 개수를 세어 하나씩 셈하여 도출된 결과는, 비율로 따지면 8대 2. 바로 내보내자는 의견이 2, 하진의 말을 믿고 기다리자는 의견이 8이었다. 의외의 결과에 승연과 유리는 눈썹을 까딱였다. 뭐지, 하는 꼴만 보면 리더가 다 포섭한 것 같았는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온 거지. 리더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투표용지를 바라보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사방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진 씨가 뱉은 말 안 지키는 사람도 아니고……. 적어도, 우리를 구해준 사람한테는 예의를 지켜야 하는 거 아냐?”

“애초에 일일이 찾아와서 표시 제대로 안 하면 내쫓을 거라고 협박이나 할 정도면 본인도 켕기는 게 있었던 거잖아.”

“그냥 이하진 쫓아낼 건덕지 찾아서 신났다고 하지.”

리더가 협박을 한 건 맞았던 모양이다. 다만 이제 남은 사람들은 거의 리더의 협박이 먹히지 않을 정도로 지쳐있거나, 그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무엇보다 시체를 수습하는 것이나, 어제까지 함께했던 동료를 수습하고 장례를 가볍게 도와주던 사람이 하진의 사람인 유리라는 것을 다들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보았으니까. 리더는 이제야 신뢰를 조금 잃은 것이다. 꼴이 우습네. 전후관계를 되짚던 유리는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모든 게 다 제 손바닥 위에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 벌인 투표일 텐데 결국 나온 결론은 그가 진심으로 피하고 싶었던 결과라는 것이 진심으로 우스웠다. 웃음을 터트리는 유리를 흘끔 바라보며 승연은 생각에 잠긴다. 그렇구나,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정말로 모두가 믿고 따른 리더는 저 사람이 아니라 하진 씨였구나. 잃으면 다들 정말 슬퍼하겠다. 물론 내가 제일 슬프겠지만.

결과를, 그리고 쏟아진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리더는 테이블을 걷어차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바깥에서 잠가버려. 사방에서 쏟아지는 조롱 섞인 어조에 유리와 승연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바로 계단을 타고 올라간 격리실 앞에 멍하니 기대있던 도영이 아무 일 없이 돌아온 두 사람을 바라보며 웃었다.

“결과는요?”

“다들 걔한테 지랄하지 말라고 하고 끝났어.”

“옳게 됐네요.”

그때 격리실의 안쪽에서 누군가가 문을 발로 차는 느낌이 들어, 도영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다 말고 몸을 일으켰다. 도영이 일어서자마자 문을 열고 나온 보람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읽은 건지 몇 번 눈을 끔뻑이며 방역복을 벗었다.

“뭐냐? 뭔 일 있었어?”

“내보낼 거라고 투표 받았는데 걔 뜻대로 안 된 게 다라는데요.”

“잘됐네. 하진 씨 주무셔서 나왔어.”

상태는 어떠냐는 듯 와닿는 시선들에 보람은 뺨을 몇 번 긁적였다.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는 기색이었는데, 그 고민은 그의 상태가 극단적으로 좋지 않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정말로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나은지 알 수 없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그래서, 세 사람은 조금 안도했다. 처음보다는 확실히 나아진 상태이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좀비로의 변이가 일어난 상태는 아님을 시사하고 있었으니. 한참 동안 말을 고르던 보람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좋지만은 않아. 열도 계속 올라갔다 떨어졌다 하고, 어제는 춥단 소리 하셔서 격리실 이불 다 끌어다 덮어드렸는데도 춥다고 하신 거 보면 오한도 같이 오고. 근데 또 첫날처럼 정신 못 차리실 정도는 아닌 게 대화는 잘하셨어. 졸고 일어나서도 무슨 얘기 했는지 기억하고 먹으라니까 밥도 드시고.”

듣고 있자면 꼭 심하게 감기를 앓다가 나아가는 사람 같은데. 고개를 기울인 승연이 보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정말로, 그의 상태를 진솔히 이야기하기로 택한 보람을.

“금방 괜찮아지실 것 같긴 한데, 원래도 좀비화되기 직전에 상태가 괜찮아지니까.”

괜찮아진다는 것이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마냥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의미다. 금세 시무룩해지는 승연의 얼굴을 바라보던 보람이 방역복과 장갑을 봉투 안에 넣고 맨손으로 승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이어 시선을 돌린 보람이 유리와 도영을 바라본다. 얘네 둘은 또 표정이 왜 이래. 혀를 찬 보람이 입을 열었다.

“아빠 죽는단 얘기 들은 애들 같다……. 일단 추이 보면 내일은 멀쩡해지실 것 같아.”

본인 입으로 괜찮아지면 바깥으로 나가겠다고 했지. 중얼거린 보람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했다는 듯 세 사람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렇다면, 어쩌면. 하진과 세 사람에게 허락된 시간은 내일이 전부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깨를 으쓱인 보람이 세 사람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하진 씨가 지금에서야 안 나간다고 할 사람은 아니잖아. 당장 좀비로 변할 수도 있는 마당에. 그럼 가기 전에 좋은 모습들 보여주셔야지.”

말은 상냥한데, 쉽게 말하자면 거슬리게 하지 말고 빨리 나가서 잠이나 자라는 축객령이다. 이해했다는 듯 기운 없이 걸음을 옮긴 세 사람이 같은 방에 틀어박혔다. 마음 편하게 쉬며 좋은 대화나 나누기에도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데, 세 사람을 가만히 놔둘 생각은 없다는 것처럼 세 사람이 머무른 방의 문을 두드리는 손길이 잦았다. 찾아온 사람들은 저마다 하진의 이야기를 했다. 직접적으로 용기를 내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달라는 이야기, 리더를 내쫓게 된다면 하진을 리더로 삼고 싶었다는 이야기, 하진이 나가게 되면 세 사람도 나갈 것이냐는 물음……. 마지막 질문에는 세 사람 모두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하지 않았다는 쪽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도영과 유리는 이미 거처를 정한 상태였지만, 승연에게 의견을 구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물론 우리가 나간다고 하면 따라 나갈 것 같긴 한데 일단 물어는 봐야지. 그런 얕은 생각이었다. 상황이 나빠지면 그냥 끌고 나가겠지마는.

몰려드는 사람들을 감당하기도 귀찮아 승연은 일찍 잠들기로 했다. 자봤자 악몽을 꾸기밖에 더하겠나, 싶긴 했지만 그렇다고 잠들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정신도 아니었으니까. 딱딱한 매트리스에 몸을 눕히며 승연은 눈을 감았다. 그제야 조용해지기 시작한 주변에 승연은 속절없이 잠들었다. 꿈이라도 다정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진이 결국 낫지 못하고 좀비가 되어 쉘터를 뒤집는 꿈을 꿨다. 그 와중에 가장 먼저 노린 것이 자신이었던 것도, 살려달라는 애원도 듣지 못하는 그가 자신의 살을 뜯는 것도. 꿈보다 가까운 현실인 것만 같았다. 악몽이라면 부디 깨게 해달라고 믿지도 않는 신에게 몇 번을 빌었는데도 깨지 못했던 것을 보면 더더욱. 손끝에서 시작된 고통이 심장까지 와닿았을 때, 그가 기어코 제 심장을 쥐는 순간. 시야가 암전된다. 동시에 새로운 빛이 들었다.

튕기듯 몸을 일으킨 승연이 주변을 훑는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었다. 시간은, 새벽 즈음일까? 어느새 소란스러워진 방 바깥이나,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유리의 눈빛 따위를 보고서야 승연은 현실감을 되찾았다. 역시 꿈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하자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아침부터 누구지, 궁금해할 틈도 없이 문이 열렸다. 보람 씨? 왜 저렇게 기쁜 얼굴로. 아, 설마. 그 뒤로 바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하진이었다.

“팀장님!!”

“귀 안 먹었어, 작게 불러.”

여유로운 말투와 이어지는 짓궂은 웃음소리. 틀림없이 하진이다. 멍한 얼굴로 하진을 바라보던 승연이 침대에서 내려와 하진의 몸을 끌어안았다. 자신을 안는 팔에 스민 이상한 냉기도, 그 출처가 그저 그의 남들보다 낮은 체온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도. 그다지 오래된 것이 아니므로 생경할 것도 없었는데 왜 이렇게 남다르게 와닿는지. 승연은 하진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꿈속에서도 멀쩡하지 못했던 그가 멀쩡하게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곧 웃음을 터트린 하진이 승연의 몸을 안고 등을 여러 번 토닥였다. 괜찮다는 듯이, 또는 미안하다는 듯이.

“……이제 괜찮아요?”

“일단은 그렇습니다.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그 말은 결국 다시금 승연을 집요한 현실로 끌고 들어온다. 그렇지, 현실에 가까운 것은 낙관과 희망이 아니라 걱정과 절망이었다. 그는 완전히 나은 것이 아닐지도 모르고, 그러므로 결국 쉘터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현실. 그래도 인사 나눌 시간은 확실히 얻어서 다행인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듯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승연의 머리카락을 여러 번 쓰다듬은 하진이 눈을 돌렸다.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한 도영이나, 지나치게 들뜬 얼굴로 자리에서 방방 뛰고 있는 유리와 보람이나,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자신의 품에 안겨 눈치만 살피고 있는 승연이나. 다 바보 같네. 남들이 듣는다면 조금 매정할, 그러나 제 딴에는 그보다 더 귀엽다는 의미가 될 수 없는 생각을 내려놓은 하진이 걸음을 옮겨 승연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전히 승연을 품에 안은 채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지는 않았냐는, 언제나와 같은 하진의 물음에 유리와 도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간 있었던 일을 간단히 브리핑했다. 예컨대 말도 안 되는 투표 판이 벌어져 뒤집어엎으려고 했으나 생각보다는 우리가 원했던 결과와 가까운 결과가 나와 그러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는 이야기나, 이 방을 찾아온 사람들이 전해달라고 했던 이야기가 많았다는 이야기나. 시답잖은 일상을 이야기하던 도영이 문득 승연을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큰일이 하나 있었는데요.”

“뭔데.”

“애가 오늘 악몽을 꾼 것 같아요, 빨리 달래주세요.”

아니, 그게 뭐가 큰일이냐고……. 승연이 어이가 없다는 듯 도영을 바라보려는데, 하진에게는 정말 큰일처럼 다가오기라도 하는 건지 그의 표정이 꽤 가라앉았다. 곧 하진이 손을 뻗어 승연의 낯을 가볍게 쓰다듬는다. 그 이틀 동안 고생을 한 건지, 혹은 몸부림을 친 건지. 손끝이 평소보다도 거칠었으나 손길은 평소보다도 조심스러워 어쩐지 승연의 마음 한쪽이 간질거렸다. 설마 아직도 촉각이 안 돌아오셨나,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바라보면서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저렇게 온전히 염려만이 담겨 있는 시선을 바라보면서는 더더욱.

“괜찮아요?”

“그럼요! 하진 씨 괜찮으셔서 진짜로 괜찮아요.”

요컨대 하진이 잘못되는 꿈을 꿨다는 의미다. 한숨을 내뱉은 하진이 승연을 꼭 끌어안고 등을 여러 번 토닥였다. 이런 상황인데도 앞으로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거라든가, 괜한 걱정 하지 말라든가. 그런 뻔한 위로조차 건넬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언짢았다. 긍정적으로 말해봐야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었고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아마 좀비가 될 테니 실제로 그런 꼴은 보지 않게 미리 나가주겠다는 이야기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진은 그저 승연을 안은 팔에 힘을 실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문득 의문 어린 얼굴로 하진을 올려다보던 승연은 그저 웃었다.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보니까 좋네. 딱 그 정도 외의 다른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진 건지, 혹은 워낙 시끄럽게 이야기를 하니 우연찮게 들린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격리실 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고 눈치챈 건지. 다섯 사람이 모여 있는 방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겼다. 멀쩡한 하진의 얼굴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언짢은 얼굴로 바로 방문을 닫는 사람도 있었으며 울음을 터트리는 사람도 있었으나 하진은 그중 누구의 기분에도 호응해주지 않았다. 기뻐해 줘서 고맙다든가, 성질내지 말라든가, 울지 말라든가. 그런 뻔한 말을 한 번 건넬 법도 한데 죄다 귀찮아하는 표정만이 하진의 낯에 맴돌았다. 승연이 하진의 뺨을 검지로 쿡, 찌르고 나서는 표정 관리를 했지만.

그렇게 오는 사람은 다 받아주고 대화도 나누다 보니 아침은 본의 아니게 건너뛴 지 오래가 되었고 점심 식사를 챙겨야 할 시간이 되어, 다섯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움직였다. 점심 식사를 위해 준비된 식량이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인원이 줄어서인지 그럭저럭 먹을만한 양이긴 하였으므로 다들 군말 없이 식사를 넘겼다. 잘 먹나? 하진을 여러 번 흘끔거린 승연은 평소보다도 더 많은 양을 넘기는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안심한 듯 제 식판에 있는 음식을 싹싹 긁어먹었다. 저 얼굴을 봐서 밥이 잘 들어가는 건지, 아니면 오늘따라 식욕이 도는 건지. 어느 쪽인지는 명확했다만 굳이 정의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웬일로 디저트까지 있네. 중얼거린 보람이 한 사람 몫에 하나씩 배분된 젤리를 마시듯 입안으로 털어 넣다 크게 사레가 들러 폐가 찢어질 기세로 기침을 해대는 것을 보며 남은 네 사람이 웃다 물을 떠다 주기도 하고, 그 와중에도 심심찮게 하진의 안부를 물으러 찾아오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도저히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던 하진이 간단히 씻고 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찰나에 한 사람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한 손에는 공책을, 다른 한 손에는 필기구를 든 모습이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독특했으나 시선으로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나서는 그 의도를 알겠다는 듯 모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하진 씨한테 일 배우러 왔구나. 타이밍 좋게 젖은 머리를 털며 돌아온 하진이 제 자리를 차지한 이를 바라본다. 아, 쟤가 대타? 짧게 중얼거리던 하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상대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어째 나가라고 재촉들을 안 하네. 다들 그런 분위기예요. 유리와 도영이 소곤소곤 대화를 나눌 즈음 상대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하진 씨가 스스로 나가겠다고 하셨으니까. 다들 기다리겠대요. 나가실 때까지.”

“지혁이더러 말하라 시키시지.”

“……나가시기 전에 일 배우고 싶어서 그냥 제가 왔어요. 보람 씨 말로는 가르쳐줄 사람 찾고 계시다고도 하셨고.”

아하, 안 내보내겠다는 이야기는 못 하겠나 보군. 당신이 온 건 그렇다 치고, 그놈이 저 멀리서 노려보고 있는데 괜찮은 거 맞나. 잠시 생각하던 하진은 곧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눈을 돌렸다. 어쨌든 일을 배우고 싶은 의지가 있다는 사람이 있으면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이다. 앞으로도 쉘터에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중 한 명이 승연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진은 지금껏 써둔 보고서와 일부러 따로 기재해 둔 업무와 관련된 기록물을 전부 가져왔다. 관리했던 일들은 전부 기록으로 남겨두었던 건지 분량이 적지는 않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람이 많이 줄어든 고로 기록을 전부 활용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보면. 짧게 중얼거린 하진이 스프링 노트의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멀리서 바라보던 리더가 다가왔다. 하진은 별말 없이 그를 내려본다.

“집어치워. 어차피 너 없으면 다 갈아치울 규칙인데 뭐 하러 다 알려줘.”

“이 새끼는 살려줘도 지랄이고 앞으로 사는 거 도와주려고 해도 지랄이야.”

“뭐?”

데려다 때리면 때렸지 심각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구태여 날카로운 말을 건네지는 않았던 하진이었는데, 하진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며 스프링 노트를 다시 접었다. 나갈 마당인데 굳이 남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자신이 없으면 아예 근본부터 바꿔버리겠다는 공동체에 헌신할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하진은 접은 스프링 노트의 모서리로 리더의 머리를 툭, 가볍게 밀었다.

“나 있는 쉘터가 얼마나 편했는지 이제는 알아야 할 거 아냐.”

“이하진.”

“그러다 죽든 뭐 어쩌든, 이제는 내 알 바 아니니까 그렇게 살아. 가르쳐주기로 했는데 미안합니다, 지혁이가 안 뺏어가면 이 노트나 읽어봐요.”

마지막 호의로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냐는 듯, 일을 배우러 온 이를 바라보던 하진이 웃으며 기어코 몸을 돌렸다. 어디로 가나 했는데, 그 틈에 언제 나갈 짐을 꾸려둔 건지 커다란 배낭을 메고 돌아온 하진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리더를 흘끔 바라보다 자리에 멈춰 선 유리와 도영의 머리카락을 한 번 쓰다듬었다. 가시려고요? 그래야지. 짧은 이야기를 마친 하진이 그제야 몸을 숙여 승연의 몸을 끌어안았다. 멍하니 끌어안겨 채 그를 마주 안지도 못한 승연은 하진이 나가는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말고 그를 뒤따랐다. 짐 하나 챙기지 않은 입장에서 따라갈 수야 없었을 테니, 할 얘기 적당히 하고 돌아오겠지. 당연하겠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했다.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듣고 싶은 말도 많았다. 이대로 놓치면 정말로 아쉬울 것 같았다. 아니, 아쉽다는 말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일까. 벌써 멀리 떠났을 줄 알았던 하진은 승연의 발소리를 듣자마자 자리에 멈춘 건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입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사실은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승연이 한 번쯤은 따라 나와주기를. 하진과 시선을 맞춘 승연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무슨 말을 해도 되는지도 고민하다가. 볼품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입 바깥으로 내고 만다.

“어디로 가세요?”

“일단은……. 발 닿는 대로.”

그렇게 말하는 하진을 보고서도 이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같이 가자고 말하고 싶기도 했고, 그냥 모른 척 여기 머물러 있으라고 하고 싶기도 했다. 저기 격리실에 모른 척 들어가 있다가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면 그때 나가면 되지 않느냐고, 그렇게 말하고 싶기도 했고, 다른 것들은 다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집으로 가라고 말하고 싶기도 했다. 그 자리로, 함께.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하진 역시 같이 가자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 말이 얼마나 큰 무게감인지 두 사람은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승연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 해서 이렇게 보내고 싶은 사람인가, 그건 더더욱 아니었다.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승연을 바라보던 하진은 짧게 웃었다.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으나. 그 마지막을 배웅해주러 나온 사람이 승연이라 마냥 좋았다. 그가 듣는다 해서 좋아할 법한 말은 아니었으므로 구태여 제 감상을 입 바깥으로 내지는 않았다마는.

곧 하진은 제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안에 든 무언가를 찾는 듯, 겉옷 안주머니를 뒤지는 제스처를 취하다 잠시 뒤 무언가를 든 손을 내려두었다. 승연 역시 하진의 손으로 눈을 돌린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그러니까, 다이어리. 지금껏 하진이 하루도 빠짐없이 적었던 하진의 세계. 승연은 아무 말 않고 하진의 얼굴을, 그리고 다이어리를 한 번씩 바라보았다. 곧 하진이 제 손에 든 다이어리를 승연에게 내밀었다. 네? 짧은 물음에 하진은 그저 웃기만 했다.

“……이게 뭐예요?”

“내내 쓰던 거. 궁금하다며.”

그렇게 말하며 하진은 다시 웃었다. 왜일까, 그 웃음을 언제고 다시 볼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 까닭은. 당장 내일, 아니, 한 시간 안에 죽을지도 모르니 내쫓기는 처지인 사람인데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승연은 고개를 숙인 채 하진의 다이어리를 바라보다가, 결국 손을 뻗어 넘겨받았다. 누군가는 그의 공상이 들어 있으리라 비웃었고, 자신만은 그가 안에 어떤 세계를 넣어두었을지 의문이었던 그 다이어리. 이런 방식으로, 하나의 세상을 넘겨받는다. 그것이 퍽 달가웠던가, 그랬는지 그렇지 못했는지는 영 모를 일이다. 이렇게 전해 받고 싶은 세계가 아니었다. 그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하진은 손을 뻗어 승연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괜찮다는 듯이, 그리고, 애당초 네가 봐야 하는 것이었다는 듯이.

“꼼꼼히 읽어봐요.”

그렇게 말한 하진이 조금 웃었다. 승연은 그 품에 고개를 파묻으려 조금 더 다가가다가, 어차피 이제는 구하려 애써도 구할 수 없는 온기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은 탓인지 하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저 따라 웃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런 승연의 모습을 바라보던 하진이 문득 허리를 숙여 승연과 눈을 맞춘다. 키 차이가 큰 편은 아니었으니 구태여 몸을 숙일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승연이 구태여 고개를 드는 게 아니라, 자신이 숙이는 것. 생각해보면 쉘터 생활 내내 두 사람에게는 이 정도의 거리감이 익숙해졌다. 마주 보는 시선이 새삼스레 좋아서, 그러나 더 볼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서러워서. 아무 말 않던 승연이 손을 뻗어 하진의 뺨을 쓸었다. 촉감 같은 것도 이제는 완전히 느껴지는지, 손가락이 닿자마자 웃음소리를 흘린 하진이 승연의 손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어리광을 조금 더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게 마지막이라 생각하면 마냥 마음이 편하지만은 못했다. 속 타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어 눈을 굴리던 승연은 곧 하진의 표정에 시선을 고정한다. 그러고 보면, 하진의 표정이 아까부터 무거웠다. 떠날 생각을 하니 그도 마음이 무거워진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 안쓰럽기도 해서, 승연은 느리게 하진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늘 자신이 위로를 받는 위치였는데 이번만큼은 자신이 위로를 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정말로 하진의 생각은 조금도 모르니까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보면, 두 사람은 가까이 있던 시간은 길었으나 그에 반해 서로에게만큼은 솔직하지 못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이유야 뻔하다. 하진은 그 이유랄 것을 몇 번이고 되짚다, 기어코 승연에게서 한 걸음 멀어진다. 이제는 이별을 위한 준비를 다 했다는 듯이, 승연이 온전히 기다릴 틈 하나 주지 않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이니까 하는 말인데…….”

그리고 정말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하진은 승연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승연 또한 하진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고, 때로는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주고받을 수 있는 이야기는 정해진 법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전달할 이야기랄 것이 무엇일까. 승연은 조금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다 이내 끄덕였다. 지금 해도 되는 말인지, 지금 전하는 게 맞는 말인지. 승연의 손을 붙든 하진의 고민이 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이렇게까지 뜸을 들이게 될까. 그의 성격이라면 사과가 나올 법한 타이밍인데, 그런 것은 모르겠다는 듯 심장이 지나치리만큼 빨리 뛰기 시작했다. 하진의 긴 망설임이 멎는다. 곧 입 바깥으로, 다정한 한 마디가 새어 나온다.

“……좋아합니다.”

“……네?”

하진도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렇게 말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이왕이면 많은 것이 안정된 이후에, 당신의 손을 소중히 붙들고. 그렇게 전하고 싶었다. 허나 어쩌겠는가. 지금이 아니면 이 이야기는 전하지도 못하고 사라질지도 몰랐고, 하진은 그런 것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당신의 얼굴을 보면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당신의 손을 잡고 싶다는 것도,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당신의 삶에도 내가 첫 번째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그렇지만 그런 것을 바라는 게 과욕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고, 지금 같은 처지에 진정으로 당신에게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도 아니지만. 그냥, 그저. 사랑했다는 것만큼은 전하고 싶었다고. 행동이나 시선으로 진즉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한 번쯤은 꼭 입 바깥으로 이 말을 내어보고 싶었다고.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당장 내일부터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도 없을 사람이 이런 고백을 해서 뭘 하겠는가, 그래도. 말하고 싶었으니까.

“많이 사랑했어, 당신을.”

전부 사심이었다고, 당신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에 뛰어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이 있다고. 당신이, 그렇게나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하진은 손을 뻗어 승연의 뺨을 쓸었다. 그대로 얼어붙은 승연의 낯을 눈에 가득 담고, 조심히 몸을 기울여 이마에 입을 맞췄다. 승연은 반항 하나 하지 않는다. 그게 좋기도 했고, 내가 무섭나 싶기도 했고. 하긴, 사람 대 사람으로 좋아하는 줄은 알았겠지만 떠나는 와중에까지 이런 말을 건네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줄은 몰랐겠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줄만 알았겠지, 연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생각하면 다시금 미안해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는 없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보다야 몇 배는 낫다고,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기적인 생각이라 해도 달리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이기적인 것을 알고도 전하고 싶은 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잘 지내고. 잘 있어요.”

“…….”

“또 보고 싶다, 꼭.”

승연은 하진의 말에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건넨 말인 것은 아는데, 자신에게 닿기에는 지나치리만큼 겉도는 말인 것 같았다. 제가 쥘 수 없는 말인 것 같았으나 언제건 자신이 쥐길 원했던 말이기도 했다. 어떻게,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승연이 하진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한참 동안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을, 하진은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본래 긴 침묵은 거절과 지나치게 닮아 있는 법이며, 하진은 자신과 승연이라 해서 그 당연한 사실에서 멀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 차이고 가는 게 낫다. 생각을 갈무리한 하진이 승연의 손을 잡아끌어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허리를 바로 세웠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니 이제 고해야 할 말은 완전한 안녕.

“잘 있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하진은 쉘터를, 승연을 등졌다.

떠나는 뒷모습이 어떤지, 그가 마지막 순간 웃고 있었는지 혹은 울고 있었는지, 서툴게 내뱉은 불완전한 고백이 제 귀로 전해졌을 때 하진이 어떤 표정이었는지. 승연은 어느 하나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자신을 등진 순간에는 시야가 흐려졌고, 자신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법을 잊었으며, 그러니 그의 표정 하나 읽어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침묵을 지켰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지금의 승연에게 다가온 사실은, 오로지 하나. 고백을 내려두고 답 하나 듣지 못한 하진이, 기어코 자신의 곁을 떠났다는 것뿐이었다.

말했으면 다인가. 대답 하나 듣지 못하고 그냥 떠나면, 그렇게 자기 마음 하나 편하면 그만인가. 그럴 거라면 차라리 말하질 말지. 그냥, 내 머릿속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팔자 좋고 때 하나 맞추지 못하는 상상 정도로 두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이기적일 수가 있나. 그냥, 자기 혼자 전했으면 다인가. 나는 어떡하라고, 당신이 떠난 자리에 혼자 서게 된 나는 어떻게 하라고. 그렇게 얘기할 거면 데리고 가기라도 했어야지, 사랑한다고 이야기했으면 그러니 같이 가고 싶다는 이야기라도 해줬어야지. 그냥, 그렇게, 혼자 이야기하면, 다인가……. 툭, 툭. 붉어진 눈시울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터지기 시작한 울음을 애써 막는 방법도 그가 다 잊게 하지 않았던가. 울어도 된다고 해줬으면서, 울고 싶을 때마다 안아줬으면서, 그래놓고…….

…….

기어이 승연이 다시 쉘터 안으로 들어간 것은 그로부터 삼십 분이 지난 뒤, 승연이 너무 오래 들어오지 않는다며 염려한 유리가 울다 지쳐 자리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떨구고 있는 그를 업어 들고 온 다음이었다. 하도 많이 운 탓인가, 온몸에서 느껴지는 열감에 보람이 해열제를 가져다 먹였다거나, 그러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해 모두가 승연을 걱정했다거나, 그 와중에 걔도 아픈 거면 가져다 버리라고 말하는 리더를 보던 도영이 결국 그를 쥐어팼다거나, 이하진 닮아 정신 나간 새끼들밖에 없다고 소리치는 리더에게 쇠파이프를 들어다 던진 유리가 넌 지금까지 그 사람 눈치 보느라 살려둔 거였다며 고함을 질렀다거나……. 이야기를 듣다 못한 보람이 환자 늘리지 말라며 모두를 한 대 쥐어박았는데 와중에 리더는 발로 차버렸다거나. 그 모든 일이 승연에게는 그다지 와닿지 못했다. 먼 세계의 일인 것 같았다, 하진이 완전히 떠났다는 사유만으로도 승연에게 이 장소는 더이상 쉼터일 수 없었으므로.

승연은 좀처럼 가눌 수 없는 몸을 겨우 움직여 세 사람의 방으로 들어섰지만, 그랬다 해서 세 사람과 멀쩡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루를 꼬박 잠들었다가 보람이 튼 라디오 소리에 겨우 일어난 후에도 그랬다. 객관적으로도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로 승연에게 먼저 말을 걸 만큼 눈치 없는 사람은 방 안에 없었으며, 그 당사자 또한 남은 이들에게 말을 걸어 신경을 분산시킬 여력이 없었다. 세 사람이 승연을 배려한답시고 일부러 방을 비워주면 승연은 침대 구석에 처박혀 하진이 남기고 간 다이어리를 읽었다. 그가 매일 써 내리던 공상, 혹은 현실. 첫 페이지를 연 승연은 보고서에서 자주 보았던 익숙한 필체에 숨을 멈췄다. 첫 페이지에 적혀 있는 것은 익히 아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좀비의 특징이 어떻고, 어쩌고……. 그나마 모르는 건 의미를 알 수 없는 주소 정도. 그럼 쭉 이런 실용적인 내용들만 써두셨던 걸까, 페이지를 넘기던 승연이 다음 페이지에 적힌 글씨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3/25: 야근이 씨발 무슨 퇴근 2분 전에 잡혀…… 뭔 신종지랄이지

……일기? 그나저나 3월 25일이라면. 승연은 문득 좀비 사태가 처음으로 발발했던, 그러니까, 자신의 방송에 해당 사태를 언급한 도네이션이 왔던 날을 떠올렸다. 3월 25일. 그러니까, 아. 그렇지. 유리 씨랑 도영 씨가 팀장님은 뒤늦게 합류하셨다고 말씀하셨으니까. 하진이 야근 탓에 그들과 함께할 수 없었다는, 기존에 알고 있던 내용과 부합하는 내용이 적힌 메모를 바라보며 승연은 확신했다. 일기구나. 아래로 익숙한 필체가 이어진다. 승연은 어느 하나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글씨를 읽어내렸다.

4/1. 유리랑 도영이를 다시 만난 것까지는 그렇다 치겠는데, 여기서도 리더랍시고 상사랑 그 아들새끼 설치는 걸 보고 있어야 하는 게 제일 좆같네……. 지혁이 젠체하는 거 보는 게 제일 좆같다. 저 새끼는 언제 철드나.

4/2. 좆같아서 못 해 먹겠다. 두 번째 거점 찾아보든가 해야지.

4/19. ……빨리 돌아왔어야 했는데.

전 리더, 그러니까, 하진 씨의 상사라는 사람도 그렇게까지 좋은 리더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진 씨에게만 그랬나, 쉘터 사람들에게도 그랬나. 이건 나중에 조금 더 자세히, 경찰이 아니었던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승연은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대강 어떤 일이 어떤 날 일어났는지 알 수 있는 기록들은 새삼 흥미로웠지만, 그렇다 해서 하진이 이것을 남기고 간 이유가 온전히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승연은 느리게 눈을 내린다. 그러니까…….

4/26. 생존자를 발견했다.

그 부분에, 승연은 오래도록 눈을 두었다. 생존자. 좀비 사태가 발발한 지 한 달째 되는 날 마주친, 생존자. 그 사람은 분명히. 건조한 기록과 함께 남아 있는, 생존자의 위치가 대략적으로 그려진 약도. 나를 만난 거다. 살아있는 사람 건지는 것이 당신에겐 대단한 일도 아니었을 텐데, 이게 기록씩이나 남길 정도로 대단한 사건이었나. 기분이 이상해졌다.

4/27. 물건 두고 왔다. 라디오 귀한데. 김지혁은 모르겠지, 쉘터 돌아가서 물품 수량 다시 기재하기.

5/5. 물자 떨어질 때 됐는데 안 보이네. 두고 와야지.

5/6. ……그 사람이 쉘터에 왔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반갑다. 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들여오는 게 조금 곤란한 기색이길래 그냥 조금 도와줬다. 지혁이 그 멍청이는 비호감부터 사고…….

처음에는 내가 불편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더니 그게 정말 진심이었나보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승연은 그 페이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후로는 거의 하진이 본 승연에 관련된 이야기만 적혀 있었다. 정말로, 죄다 싫어하고 자신을 어려워 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가 서술한 자신은 정말 민망할 정도로 다정하고 부드러우며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살면서 이런 애정을 몇 번이나 더 받아볼 수 있을까,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만큼. 승연은 느리게 시선을 내렸다. 솔직히 민망했다. 내가 뭘 얼마나 잘 해줬다고. 한참 동안 시선을 내리던 승연은, 결국 한 페이지에 시선을 멈춘다. 그럴 수밖에 없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6/2. 쉘터 뒤집어진 마당에 할 생각은 아닌데. 미쳤다 싶긴 한데……. 좋아하는 건가 싶다.

이때가, 언제였더라. 승연은 아래로 조금 더 시선을 내린다.

6/2. 미쳤지. 나도 안다. 지금 누가 죽니 마니 누굴 내쫓니 마니 하는데, 겁 먹은 그 사람 얼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유진 씨가 일을 열심히 했던 것과는 별개로 그 사람 일은 완전히 남 일인데.

왜 나서고 싶었을까. 이유가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이상형이 뭐냐고 묻더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답이 정해져 있다는 걸 깨달아서.

유진 씨가 감염되었을 때……. 승연은 느리게 눈을 끔뻑인다. 거의 한 달 전인데, 그럼 이 사람은 그때부터. 왠지 또 울고 싶은 기분이 됐다. 새려는 울음을 겨우 참으며 승연은 다시 눈을 내린다.

6/11. 유진 씨에게 어디로 가실 거냐고 했더니, 갈 곳이 따로 있단다. 당신은 모르냐고 묻길래 모른다고 했다. 그런가보다, 하고 가는데 그게 영 찝찝하네. 윤도영이랑 강유리가 알려준 건가?

6/15. 혹시나 하고 아지트에 가봤는데, 물자를 사용한 흔적이 보인다. 연구소의 위치가 적힌 쪽지가 사라졌다. 가져갔다면, 혹시…….

아지트. 승연은 급하게 첫 페이지로 다시 돌아갔다. 좀비들의 특징, 행동 양상, 감염 시 특징, 그리고. 알 수 없었던 두 개의 주소. 이건 유리 씨한테 물어봐야 할까. 여기가 어디냐고, 하진 씨가 여기에 갔을지도 모른다고. 고개를 들었으나 유리는 자리에 없다. 내일, 아니면 오늘 오후에, 돌아오시면 여쭤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페이지를 훑는다.

6/19. 지혁이 그 새끼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6/22. 강승연이 다이어리 좀 보여달란다, 고백받고 싶단 말을 특이하게 해, 쟤는.

내리면 내릴수록 지금에 가까워지는 기록들. 승연은 기어코, 그제와 어제의 기록에 가닿는다.

6/27. 유진 씨와 증상이 똑같다. 물자를 가져간 게 유진 씨라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까, 최소한 지성을 갖춘 좀비가 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건 확신할 수 없는 문제니까……. 일단은 내일 나갈 짐부터 싸놔야겠다. 다이어리는 어디 둘지 고민할 필요도 없고. 일단 나가자마자 짐 중에 괜찮은 건 승연 씨 집에 가져다 놓아야겠다. 그렇게 하고, 집에 가야지. 오랜만에.

6/28. 조만간 생일이라면서요, 윤도영이 그러더라. 직접 말하고 싶었는데 버티질 못했네.

바로 어제의 기록. 승연은 숨을 멈췄다. 읽을 사람이 누구인지, 이 모든 기록을 읽게 할 사람이 누구인지 진즉 정해놨다는 듯 상대를 정확히 고른 문장. 이 길고 긴 기록이 실은 당신에게 부치는 편지였다는 듯, 글자는 평소보다도 정갈했다. 편지의 마지막을 언제나 사랑으로 맺는 오래된 로맨티스트의 문장처럼.

6/28.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보고 싶을 겁니다. 이르지만, 생일 축하해.

“무슨 생일 축하가 이래…….”

잊고 있었다, 곧 생일이라는 것도. 세상에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알 수도 없는 것들이 범람하는 시대에 내가 태어난 날이 뭐가 그리 특별하단 말인가. 지금 같은 시대에 중요한 것은 새로 들이마신 호흡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오늘로 숨이 멎지 않았음을 감사해야 하는 마음일진대 이 사람은 이런 와중에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내 생일을 축하해주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버텨보려 노력했다고. 승연은 결국 헛웃음을 흘리고 만다. 바보 같은 사람, 언제라도 스스로가 우선이어야지 내가 우선이어서 어쩌자는 거야. 살고 싶어서 살아가는 거여야지, 님을 이유로 두면 어떡해. 승연은 이불 속에 고개를 파묻었다. 얼굴에 열이 오른다. 소리 내어 우는 법을 잊어 다행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더 지났다. 울음과 함께 잠들고 또 울음과 함께 깨어 다이어리를 넘겨 보던 승연도 다시 해가 밝고 난 후부터는 방에 있는 세 사람에게 인사는 건넬 수 있을 정도의 컨디션이 되어, 남은 세 사람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승연을 대해주었다. 그렇다 해서 세 사람 모두의 마음에 남은, 누군가를 유실했다는 데에서 비롯된 상실감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무슨 일이 있든 아침은 먹어야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깥으로 나선 네 사람이 배급된 음식을 받아 테이블에 앉았다. 오늘도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잘 모르겠고, 그저 피곤하기만 하지만 어찌 되었든. 보람은 쉘터 중앙으로 걸어가 설치되어 있는 라디오를 실행시켰다. 좀비와 관련된 방송이 오늘도 나올 예정인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쉘터 사람들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밥을 넘겼다.

좀비에 대한 상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라디오 채널. 생각해보면 이것도 하진이 가르쳐준 채널이었다. 괜히 기분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어 승연은 나온 반찬을 뒤적거리다가, 들려오기 시작한 목소리에 아예 젓가락을 내려두었다. 오늘 밥은 왠지 맛이 없네, 그냥 내가 입맛이 없는 건가.

[한 생존자분의 협조를 통해 증명된 바로는, 좀비 바이러스 최초 감염 시 8일에서 열흘 이후 발열이 발생한 생존자의 경우에는 기존에 안내해드렸던 내용과는 다르게, 48시간의 발열과 환청 등에 시달리는 현상이 관찰됩니다.]

새삼스러운 정보, 그리고 최근에 새로 접하게 된 정보. 그것들이 섞여 들리자 쉘터에 있는 이들은 오늘도 비슷한 내용만 말한다며 가볍게 혀를 찼다. 한 생존자분의 협조라. 저 이야기가 진짜라면, 검증을 위한 시간도 제법 들였을 것이 분명하니 누군가가 협조를 했다 해도 이 쉘터의 사람은 아닐 것이다. 유진 씨가 살아계실 때 연구소로 향했다면 유진 씨가 도움을 제공해주시고 좀비가 되셨으려나.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하진이 떠난 자리는 그대로 남겨둔 채 테이블에 모여 앉은 승연과 유리, 도영은 라디오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아주 새로운 정보이긴 하다. 쉘터에 몸담은 입장에서는 그다지 대단하게 특별한 정보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미 그런 사람을 둘이나 봤는데. 이쪽은 정보가 조금 늦는 것 같다며 우스갯소리를 나누던 사람들이, 이어지는 말을 들어나 보자는 듯 눈을 몇 번 끔뻑였다.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다시금 이어졌다.

[이 경우, 48시간이 초과한 이후에는 좀비 바이러스 감염 증세가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 발생하며…….]

여기까지도 아는 내용이다. 조금 더 많이 앓고 조금 더 많이 힘들어하던 사람. 떠나기 전의 유진을, 그리고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혹은 죽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중얼거리던 하진을 떠올린 세 사람의 표정이 낮게 가라앉았다. 보통 그 정도로 열이 나면 사람은 죽기 마련이니까. 이틀 내내 그렇게 앓는다면 말이다. 라디오를 실행시키곤 의무실에 잠깐 들렀던 보람도 곧 의무실 바깥으로 나와 세 사람이 앉은 테이블에 앉았다. 여전히 하진의 자리는 비어 있다. 저 자리만은 영영 비워두지 않을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니까. 하진은, 자리를 비워두고 싶은 사람이니까. 언젠가는 돌아올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안게 하는, 그런 사람. 부질없는 생각이다. 자리에 앉은 보람이 턱을 괸 채 라디오를 바라본다.

그나저나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 감당하기 어려운 소식이 있기라도 한 건지, 단순한 방송 사고인지. 지금까지 이렇게 오래도록 목소리가 끊긴 경우는 거의 방송 사고였는데. 주파수 바꿔볼까요? 아니야, 일단 듣고 있자. 또 뭐가 있을지 모르잖아.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에 뒤에 앉아 있던 쉘터의 사람들도 다시 자리에 앉았다. 평소 같았으면 일어났을 텐데, 평소와 다른 정보를 주고 있으니 정보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건네주는 정보에 다소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그런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승연은 치직, 자잘한 소음을 내는 라디오를 바라보다 다이어리를 꺼내 마저 페이지를 넘겼다. 자신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다이어리,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아지트의 방향. 두 개의 아지트……. 승연은 문득 고개를 돌려 유리에게 메모의 내용을 보여주었다. 눈을 크게 뜨고 승연을 바라보던 유리가 소곤대며 물었다. 팀장님이 너 주고 갔어? 승연은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적힌 내용을 천천히 눈으로 훑던 유리는 제일 위에 적혀 있는 아지트의 주소를 짚으며, 여기가 유리, 도영, 그리고 하진이 따로 꾸미고 있던 아지트라고 이야기했다. 혹여 무슨 일이 생기면 너까지 데리고 나가려고 방이 많은 곳을 찾아보았는데 이 장소가 제격이었다면서. 그럼 왜 자신에게는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승연이 투정이라도 부리듯 질문을 건네자 유리는 웃었다. 도와준다고 할 것 같으니 부르지 말라고 팀장님이 그러셨는데. 그 말에는 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랬겠지, 분명히. 그게 사실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거고. 금방 지쳐 나가떨어져서 방해만 되지 않았을까. 그럼 난 원래 하진 씨한테 방해였나? 공연히 우울해지는 기분에 잠식된 승연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실수했다, 작게 중얼거린 유리가 승연의 머리를 쓰다듬다 두 번째 주소를 짚었다. 여기는 자신도 처음 본 주소라는 목소리가 조금 의아한 낯의 승연에게 와닿았다. 유리 씨도 모른다니. 그러다 말고, 승연은 적혀 있는 메모를 다시 확인한다. 그나저나.

“여기 보니까, 첫 번째 주소에 있는 아지트에 물자가 좀 사라졌대요. 두 분이 가서 쓰셨어요?”

“아니? 아, 어? 아니. 우린 안 썼는데.”

“그럼 아지트에 대해 아실 법한 분은요?”

“팀장님 안 계신 시간에 유진 씨 돌볼 때 유진 씨한테 말해주긴 했는데, 유진 씨는 아닐 거 아냐?”

그냥 도둑이 든 건가. 그럴 수도 있지, 살아있는 사람이 이 쉘터에 죄 모여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기에는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다. 정말 유진 씨가 가져다 쓰신 건가, 하진 씨가 의심한 대로. 고개를 기울인 승연이 의아하다는 듯 쓰여 있는 글자를 한참이나 바라본다. 어딘가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 그즈음, 모든 상념을 깨부수듯. 라디오의 음성이 다시 송출되기 시작한다.

[죄송합니다. 잠시 송출 오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좀비 바이러스와 관련된 증상이 완전히 소멸, 좀비로 변이하지 않습니다. 희귀 케이스로 추가 검증이 필요하지만,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면역자로 추정됩니다.]

뭐?

그 순간, 모두가 동시에 시선을 돌린 곳에 리더가 있었다.

처음부터 있는 사람들은 죄다 내쫓으려 애썼던 사람. 쉘터의 분위기를 망치던 주범. 살아있는 한 모든 사람에게는 기회가 주어져야 하며, 그것이 생존에 직결된 문제라면 더더욱 너그러워야 하고, 살아있는 사람은 일단 받아들이고 이용할 수 있는 부분은 적절히 이용하자는 것이 실질적인 리더였던 하진의 의견이었는데 그것마저도 끝내 반대한 사람. 하진에게 의사 결정의 주도권이 있었으므로 온전한 합의를 통해 이루어진 결과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어쨌든 물린 이들의 격리에 찬성한 것이 주된 의견이었음에도 구태여 그들을 내보낸 사람. 면역자일지도 모르는 유진을 밤사이에 몰래 내버리려 했던 사람. 쉘터는 결국 그의 실수와 죄악들로 인해 발발한 멸망이 예정되어 있던 셈이었는데, 그것을 알고서도 좀비들 사이로 뛰어들었던 하진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던 사람. 그리고, 돌아온 하진을 기어이 내쫓은 사람. 어떻게 활용해도 손색이 없을, 그리고 승연만 이 자리에 있다면 자신 하나 정도는 기꺼이 활용해도 된다며 쉘터를 위해 희생했을 하진을, 돌아오지 못하게 만든 사람. 김지혁. 와닿는 시선에 담긴 적의를 리더 본인이 읽어내지 못했을 리가 없다. 무섭게 왜들 그러냐는 능청도 지금만큼은 통하지 않았다, 통할 수 없었다. 결국 하진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모든 것이 괜찮아졌을 텐데, 네가, 감히 네가. 곧 탐색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무장 상태로 무기를 쥐고 있던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승연은 일어서는 이들과 리더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욕지기가 치민다.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유진 씨를 내보내는 데에 찬성한 것도, 하진 씨 격리한다는 데에 동의한 것도, 나가는 것을 막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던 것도 다 저 사람들인데 저런 작태라니. 하나같이 당신을 잃어 마땅한 사람들이다.

그나마 저 자리에 있는 것이, 이제 수도 없는 공격을 홀로 감내해야 할 것이 리더여서 다행이라고. 승연은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보람을, 한숨을 내쉬고 있는 유리를, 버석한 낯을 쓸어내리는 도영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이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아서 다행인 걸까.

“……샘플 분석이 빨리 됐나 보네.”

“네?”

“유진 씨 피랑 하진 씨 피에서 나온 바이러스 항체 반응이 똑같았단 말이야……. 최대한 빨리, 더 자세히 연구해달라고 연구소 쪽에 샘플 보내놨는데, 그게 지금 나온 거지.”

아, 그러고 보니. 보람은 애당초 연구원이었지, 의료진이 아니라.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은 승연은 곧이어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말해줄 수도 있었던 게 아닌가. 하진은 두고 봐도 괜찮을 것 같다고. 그렇게 이야기해줄 수도 있었던 게 아닌가…….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승연이 보람을 가만히 바라본다. 보람 역시 승연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야, 그럼 내가 거기서 너한테 하진 씨 살아있을지도 몰라, 하고 얘기했다가 아니었으면. 이게 진짜 항체 반응인 게 아니라 변종 바이러스 반응이었으면, 어? 넌 그러면 나 원망 안 할 수 있었을 것 같아?”

“…….”

“나도 진짜 검증 결과 언제 나오나 마음만 졸였어, 맞으면 못 말한 거 미안해서 네 얼굴 어떻게 보나 싶었고 아니면 우린 어쨌든 좀비가 된 하진 씨를 만날 수도 있는 거잖아, 그거 어떻게 너 못 만나게 해야 하나 싶었다고…….”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죄다 맞는 말이긴 했다. 그런데 그냥, 내가. 내가 너무 버거워서……. 승연은 고개를 숙였다. 하진은 알고 있었을까,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좀비가 되는 게 아니라 살아남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리고, 살아 돌아오더라도 쉘터로 돌아올 수는 없었으리라는 사실까지. 보람은 그렇다 치겠는데, 하진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었고 또 모르고 있었는지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로 짜증이 났다, 이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승연은 곧 시선을 돌려 아수라장이 된 쉘터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총을 들고 있는 리더, 사람들의 비명, 혹은 악을 쓰는 소리. 왜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 모든 풍경이 나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의 것 같은 건지. 승연이 멍하니 리더가 선 방향을 바라본다. 리더와 눈이 마주칠 찰나, 유리가 급하게 몸을 던져 승연의 몸을 끌어내렸다. 바로 옆에 박힌 총알에 승연이 작게 몸을 떨었다. 급하게 몸을 숙이고 다가온 보람이 승연의 등을 토닥인다. 괜찮아, 하진 씨가 너 신경 쓰라고 부탁하고 갔어, 네가 걱정하는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아. 그제야 승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일행 모두의 몸을 애써 끌어내린 유리가 몸을 돌렸다. 하나, 둘, 셋. 하면 바로 보급 창고로 뜁니다. 거기 벽 방탄 소재인 거 팀장님이 확인해주시고 가셨으니, 가서 문 잠그고, 짐 챙기고, 그쪽 뒷길로 나갑니다. 아시겠죠. 그리운 사람을 닮은 말투로 유리가 그렇게 이야기하면 남은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셋. 들려오는 목소리에 맞춰 네 사람이 모두 보급 창고로 뛰었다. 문을 잠그자마자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네 사람 모두 그런 소리에 신경을 쓸 새는 없었다. 유리는 박스를 집어 들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죄다 챙겨 들기 시작했고 보람은 의료품을 챙겨 들기 시작했다. 라디오를 챙기던 승연의 뒤편에서 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도 셋, 세면 바로 나갑니다. 하나.

아수라장이 된 쉘터, 돌아올 수 없는 사람, 귓가에 들려오는 철문에 가닿는 소리와 발포음, 그리하여 이제야 보인 빈틈. 승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당장 나가야 했다,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벗어나고 싶었다는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당장 그를 찾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조심성 많은 사람이 우리가 함께 기억을 나누었던 공간으로 돌아갔을 리도 없겠지만. 그러니 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집에서 기다릴 자신을 다시 찾아오거나, 그러지는 않겠지만. 그러지는 못하겠지만. 그렇지만……. 지금까지는 그가 자신을 찾아주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냥, 내가 찾아가면 되는 문제가 아닌가. 조금 헤매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둘.

그러니 승연은 이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사람을 구해낸 당신을 구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당신이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다. 여기를 벗어난 곳, 적어도 둘 이상의 낙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자리. 당신과 나만 있든 당신의 사람들과 함께 있든, 어쨌든 당신과 나는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곳으로 향하리라. 셋.

유리가 센 세 번째 숫자에 맞춰 승연은 후문으로 뛰어나갔다. 최근 그 난장판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뒷문에서는 좀비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는 쓰러진 좀비의 시체까지도. 이유가 뭘까. 도대체 왜, 어떻게, 이 거리는 이다지도 강박적으로 깨끗한 걸까. 승연은 문득 자신의 집으로 향하던 거리를 떠올렸다. 언제고 좀비 시체 하나 찾아볼 수 없었던 거리, 혼자만 남겨진 처지라는 것을 몇 번이고 상기할 수밖에 없었던 거리, 그 거리를 걸어 집으로 향하면 언제든 찾아오던 하진…….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리는 기분이다. 저를 앞질러 가며 뛰는 사람들의 등을 바라보던 승연은 문득 자리에 멈춰 선다. 몇 달 머물렀던 것이 다인데, 집이나 다름없는 공간이 되기를 바랐던 희망은 완벽히 무너진. 고요하고도 심란한 공간을. 하진이 제 손에 쥐여주었으나 이제는 무너진 낙원을, 쉘터를 바라본다.

“뭐 해, 뛰어! 같이 가야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도영의 목소리에 승연은 다시 몸을 돌린다. 그가 받은 상처가 잠들어 있던 공간에서 이제는 완벽하게 벗어난다. 이제는 그가 그의 측근들과 꾸렸던 그만의 낙원으로 향할 시간이다. 오늘이 어제와 다를 것 없던 하루, 뺨을 스치는 바람이 계절감에 맞지 않게 지나치리만큼 시원한 이 여름에. 승연은 쉘터를 딛고 뜀박질하기로 한다. 처음 발을 들였을 때보다 가벼워진 걸음이 무리에 섞인다. 제 등을 떠밀어주는 바람이, 꼭 곁을 떠나간 사람을 닮아 있었다…….

지루한 일상, 반복되는 하루, 네가 없는 오늘. 승연은 생각했다. 나의 영웅이 살아있다면, 부디 다시 제 곁으로 돌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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