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왕 시리즈

태양, 어항, 식물

스펙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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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년 8월 28일 연성 재업

* 과거 연성이라 현재 문체와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불그스름하게 물결진 노을을 뒤로하고 로그아웃한 현실은 어두침침했다. 흐린 날도 벌써 며칠 째더라. 가정용 안드로이드가 눈을 빛내며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기분 전환용 링크 브레인즈 접속도 잠깐. 평화로운 나날 속 지루한 숨을 내쉬었다.

"아키라 님은 오늘 조금 늦으십니다."

그래, 건조한 말을 내고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물 좀 마실까. 주방으로 이동하는 길 푸르게 점등하는 어항에 시선이 가닿았다. 물 한 잔 컵에 따라 홀짝이며 어항 곁으로 허리를 숙였다. 유유해야 할 관상어들이 날씨처럼 축 처져 수중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얘네들 왜 이러는지 알아?"

"기운을 못 차리고 있는 건이라면 먹이의 주문이 늦어 제대로 못 먹은 탓입니다."

심심할 때면 종종 밥을 주며 구경했었는데. 조금 지난 기억을 그려갔다. 물고기마저 마냥 힘 없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가벼운 외투를 집어 입고는 현관으로. 안드로이드가 아오이의 뒤를 뽈뽈 뒤쫓았다. 어딜 가시느냐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금방 올 거야."

채 마르지 않은 접이식 우산. 겨우 잠근 버튼 안으로 천이 꾸깃하게 주름져 있었다. 내내 내린 비로 정리할 새도 없었으니. 꼬리에 습관적으로 손목을 끼우다 미끄러졌다. 아, 이거 끊어졌었지. 익숙지 않은 손잡이를 고쳐 쥐고는 현관 문을 열어젖혔다.

건물 입구 짧은 가림막 끝에서 비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물 웅덩이에 작은 파문이 일고, 사라졌다. 비는 그쳐 있었다.

걷는 틈새마다 자박이는 물소리가 마를 틈이 없었다. 도시 한복판까지 죽 걸었다. 목적지는 중심가 옆쪽의 중소형 수족관. 문 앞에 다다르니 안이 훤히 비치는 유리가 양 옆으로 비켜섰다. 냉방 중인 실내 공기가 바람이 되어 머리칼을 스쳤다.

조금 두꺼운 걸 입었어도 될 뻔했네. 예상보다 짙은 찬 기운에 팔을 가볍게 움켜 쥐었다. 화려하게 단장한 물고기들이 떼지어 모여 있었다. 느린 움직임도 여유로울 뿐 생동감이 넘쳤다.

관상어 먹이 찾으려 하는데요. 직원의 안내에 따라 모퉁이 너머 선반에서 발견한 목표. 제일 적은 양마저 대용량이라 어쩔 수 없이 계산대에 올려 두었다. 영업 막바지 정리하던 직원이 부랴부랴 달려왔다. 우산을 내려두고, 카드를 꺼내고. 추운 탓에 계산이 끝나자마자 빠르게 밖으로 벗어났다. 잠깐이나마 바깥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 온도에 이끌린 탓일까, 계절을 그린 녹음에 관심이 끌렸다. 투명하게 가로막힌 바로 건너편의 녹색지대. 화원 가게 한 가운데에 얼핏 아는 얼굴이 보였다.

현실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링크 브레인즈 아바타랑 똑같구나. 역시 현실에서도 식물을 돌보는 걸까.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가만 서 있으려니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익숙한 모습과는 복장만 다를 뿐인 그, 스펙터. 어쩐지 흠칫하고는 발걸음을 그대로 옮겨 버렸다.

저 사람 링크 브레인즈에서의 날 알고 있었지. 흠칫했던 이유를 뒤늦게 끼워 맞췄다.

집 안 불은 켜져 있었다. 식사거리의 배달을 알기라도 하는지 힘써 꼬리를 파닥이는 생명들. 신경 못 써줘서 미안해. 조곤한 사과를 건네며 뜯은 봉투 머리를 물가로 기울였다. 찬찬히 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채 바닥에 닿기 전에 입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만찬. 밥을 만나자 언제 풀죽었냐는 듯 생기가 돌았다. 그러고보니 가게에 우산을 두고 온 거 같은데. 어항 속 기상을 보다 바깥 창을 향했다. 가게는 이미 닫았겠지. 내일은 날이 맑기를. 보글보글 피어오르는 산소방울 너머로 머리를 기댔다.

*

거뭇거뭇 주름진 하늘이 편 게 얼마만이더라. 맑게 다려진 세상을 올려다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날지 않은 물 내음이 폐부를 채웠다. 축축함은 빠진 상쾌한 향이었다.

간만에 기분 좋은 아침. 학교까지 태워다 줄까, 하는 아키라의 제안을 거절한 보람이 있었다. 등교까지 앞으로 몇 보. 살풋 웃음기 올리던 얼굴에 당혹이 서린 건 그 때였다.

저거 스펙터 맞지. 정문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가만 서 있던 그의 고개가 돌았다. 아오이를 담은 시야가 반가움에 젖어들었다. 날 기다렸다거나 하는 얼토당토 않은 상황은 아니겠지. 아오이는 무시한 채 그의 앞을 지났다.

"자이젠 아오이."

지나려 했다. 우뚝 선 걸음이 스펙터를 향했다. 나를 부른 거냐는 표정이, 여기 말고 당신이 또 있느냔 능청스런 눈빛으로 맞받아쳐졌다.

"좋은 아침입니다."

"할 말은 그게 끝?"

"그럴 리가 있나요."

스펙터의 뒷짐 뒤에 숨어있던 우산이 형체를 드러냈다. 어, 일순 아오이의 눈동자가 튀었다. 의아함이 그를 뒤따랐다.

"수족관에서 주인을 찾고 있더군요. 놓고 간 거 아닙니까?"

단지 그 이유만으로 찾아왔을 리는 없을텐데. 그 이전에 어떻게 안 사실일까. 물론 근처에 그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여러 생각을 번갈자 안 받을 건가요? 하는 물음이 돌아왔다. 망설이던 손을 뻗어 '고마워'라는 말을 머금으려던 찰나.

"찾아드린 대가로 부탁 하나가 있습니다."

손잡이 끝에서 움찔 손을 물렸다. 아오이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접촉이 실패한 현장에도 스펙터는 제자리를 지켰다.

"그렇게 나올 거라면 돌려주지 않아도 돼. 부탁은 다른 사람 알아 보는 게 좋을 거고."

"당신이 가장 먼저 떠올랐거든요."

당신이라면 생명을 소중히 대할 것 같았으니까. 떠나려는 이를 붙잡지도 않은 채 그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아오이가 멈춰서야 한 발짝 튼 방향에 맞춰 몸을 돌려 섰다.

"실제로 직접 수족관을 찾으셨고요."

"본론만 말해."

"화분을 하나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웬 화분, 하는 심정으로 바라보니 그의 말이 이어졌다.

"어제 화분을 하나 들였더니 료켄 님께 꾸지람을 들었거든요. 둘 자리가 없는데 또 들였다며."

"그게 나랑 상관이 있어?"

"말씀 드렸잖아요. 당신이라면 생명을 소중히 대할 것 같았다고."

자리를 마련할 며칠만이라도 좋으니 부탁 드립니다. 정중함에도 현실성이 없어 아오이가 입술을 비죽였다. 고작 눈 마주쳤다는 것만으로 떠안아달라는 것과 다를 게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없다고도 볼 수 없으리라, 그리 의심이 들어야 할 터. 그러나 식물을 대하는 태도에서 거짓이란 느낄 수 없었다. 필요한 지원은 뭐든 들어주겠다는 조건. 가벼운 말에 비치는 간절함과 순수한 호의가 더욱 낯설었다.

"왜 그렇게까지 나한테 의지하는지 모르겠어."

"그건…."

처음으로 막힌 입. 생각에 잠긴 시선 끝에서도 답은 찾지 못했다.

"그게 중요한가요?"

되돌아온 물음에 위화감이 짙게 일렁였다.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던가. 고개가 갸웃 기울여졌다. 상대는 뭐가 이상한지도 모르는 듯 보였다.

"말도 별로 안 붙인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의지하는 이유, 보통이라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정, 믿음이 안 가신다면 거절하셔도."

"며칠만이야. 꼭 도로 데려가야 해."

힘겹게 떼던 말이 가로막혔다. 스펙터의 놀란 낯이 설핏 미소를 졌다.

"혹 마음을 바꾼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게 중요해?"

시간을 뺏기기 싫어서, 진짜 의도를 알고 싶어서. 부유하는 여러 답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을 내세울 뿐. 스펙터가 한 발 물러서 실소를 흘렸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우산을 아오이의 손에 쥐어 주었다. 비가 그친 날씨만큼 말끔히 말라 정리되어 있었다.

"하교 시간에 다시 뵙도록 하죠."

연락 드리겠습니다. 소리 끝무리에 맞춰 고개가 수그러졌다. 함께 살짝 감았던 눈꺼풀이 뜨였을 때야 아오이는 발을 떼낼 수 있었다. 가셔도 좋습니다, 하는 가벼운 눈짓에야. 정문을 통한 걸음마다 녹빛 가로수 그늘이 앞길을 깔았다. 이파리 사이사이 구멍마다 따끔따끔 태양빛이 내렸다.

징, 진동이 울린 휴대폰은 확인하지 않았다. 스펙터일까. 묘하게 기분 좋아보이는 입꼬리가 뇌리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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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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