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왕 시리즈

자각몽

스펙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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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년 9월 21일 브레인즈 콜라보 행사 발행 배포본 재업

* 과거 연성이라 현재 문체와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자이젠 아오이. 당신의 구원은 아직 유효합니까?

*

꿈에 비가 내렸다. 색이라곤 없는 투명한 비가. 평야를 감싸안은 나무와 풀 따위가 물방을마다 까딱거리며 피어났다. 저를 과시하듯, 칙칙한 회빛깔로 열렬히. 스펙터에게 잠의 세계란 항상 그랬다. 흑백만이 점철된 공간. 그러니 그건 분명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야 옆에 푸른 비가 내렸다. 아니, 손바닥 펼쳐 잡아챈 물기는 여전히 무색이었다. 낯선 건 기상이 아니었다. 인영이었다.

항상 그게 끝이었다. 꼬박 여드레, 매일 같은 풍경. 다 죽어가던 수풀에 새 생명이 움터갔다. 침입자를 발견한 첫 날 밤부터 싹을 틔워냈다.

말을 걸기는 커녕 누군지 제대로 확인조차 할 수 없었다. 깨고 나서야 그게 블루 엔젤이 아니었을까 짐작하는 게 고작. 근거는 없었다. 왜 그가 제일 먼저 떠오른 건지. 추측할 수록 그림자가 그와 닮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무의식이 억지로 끼워 맞추는 걸지도 몰랐다.

블루 엔젤이 왜 내 꿈에. 그와의 접점같은 건 없었다. 단 한 번의 듀얼을 이유라고 꼽을 수나 있겠는가. 더욱이 평생 그늘졌던 곳에 색을 끌고 올 리가. 스펙터에게 채도란 작지 않은 충격이었다. 무미건조했던 삶이 하루만에 뒤집힌 것만 같았다. 팔 일이나 지속됐음에도 얼얼한 쇼크가 이어졌다. 스펙터가 이마를 짚었다. 무시도 한계가 있지. 거슬렸다. 이유를 알고 싶었다.

밤, 책장 한 켠에 꽂혀 있던 동화 한 권을 뽑아들었다. '블루 엔젤'. 이 시시한 이야기 속에 해답이 들어있길 바라며.

다시 펼치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책이 쩌적 울었다. 온통 쪽빛으로 장식된 종이가 전등을 반사했다.

기억과 한 톨도 다르지 않은 내용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똑같이. 한 장 한 장 넘기던 손길이 금방 마지막에 다다랐다. 푸른 눈물을 흘리는 천사. 블루 엔젤은 동료들과 함께 상냥함을 깨달아가며 괴물의 감정마저도 이해했다.

스펙터에겐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았다. 감상은 그대로였다. 시시했다. 표지를 덮었다. 주인공이 당당하게 자리잡은 그림책. 블루 엔젤, 블루 엔젤… 몇 번을 되뇌었을까. 목소리 하나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내가 널 구원해줄게."

언젠가 들었던 대사에 조소가 고였다. 어림없는 소리. 제 손으로 찢고 불태우며 부정했던 말이었다. 제가 쓰러뜨려야 할 악. 그건 바로 당신, 블루 엔젤이었노라고. 이제 와서 마음이 동한다면 그만큼 우스운 일도 없을 터였다. 책장에 도로 채워넣고는 잡념을 지워냈다. 또 하루가 소득 없이 졌다.

꿈에 비가 그쳤다. 세상을 녹빛으로 덧씌우고 구름을 물렸다. 여전한 잿빛 하늘에서도 쾌청함은 느낄 수 있었다. 들풀이, 나무가, 있는 힘껏 푸르렀다. 여드레의 생명수에 보답하는 듯. 죽음에서 구원받은 저를 봐달라는 듯.

혼란에 잠긴 눈동자가 푸른 인영을 찾아 헤맸다. 시야 옆엔 아무도 없었다. 제 할 일을 끝냈다는 듯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구원'만을 남기고서.

*

푸른 인영이 등장하지 않은 지 일주가 되기 하루 전. 혹 기다리면 나올까 싶었던 그는 자취를 감추었다. 꿈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혼자만의 세계를 남긴 채 떠났다. 엿새, 이제는 이쪽에서 먼저 찾아갈 차례인 걸까. 모습을 지운 육 일 간 만나면 무언가 달라질 것만 같은 기대가 아득하게 피어났다. 칠 일을 채울 인내심은 없었다.

─늦은 밤 실례합니다. 스펙터입니다. 드릴 말씀과 듣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링크 브레인즈에서 만나뵐 수 있겠습니까.

스펙터가 현실의 블루 엔젤, 아오이에게 메세지를 넣었다. 링크 브레인즈를 통한 연락망. 아오이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해?

한참 늦은 텀으로 보아 무시하려다 보낸 거구나 싶었다. 당연히도 까닭을 물어오는 상대에 말문이 막혔다. 며칠 간의 조바심이 거짓말을 담을 그릇을 없애 버렸다. 펑 터져 산산조각난 잔해를 쓸어모으듯 깜깜히 타자를 적어 나갔다.

─내세울 만한 이유는 없습니다. 링크 브레인즈에서의 만남이 걱정되신다면 덴 시티에서 만나뵈어도 괜찮습니다.

관심을 끄기로 했는지 오래도록 답은 끊겼다.

─내일 오후 6시, 덴 시티 광장에 나가 있겠습니다. 강요는 않겠습니다. 해하지 않으리라 맹세합니다.

부디. 화면에 깜박이는 커서를 보며 백스페이스에 손가락을 올리다가도, 이내 전송으로 위치를 바꾸어 누르고 말았다. 무응답. 꿈의 인영과 마찬가지였다. 숨을 짧게 내쉬었다. 이토록 불확실한 미래는 처음이었다. 두 눈꺼풀을 닫았다.

그 날 밤 꿈에는 저마다 몸을 붉힌 식물들이 바람에 따라 배배 꼬고 있었다. 본연의 빛깔을 잃지 않은 걸 보면 자체 색이 변한 건 아니었다. 하늘을 올려다 봤다. 땅에 열꽃을 흡수당한 노을이 거뭇거뭇 기울고 있었다.

지금껏 해가 지고 있었던가. 흑백 태양이 묵묵히 시간을 틔우고 있었다. 내일은 달이 뜰 양이었다.

*

망설임과 후회는 다르다. 이해와 기대도 달랐다. 어째서 이토록 갈구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동시에 기대했다. 블루 엔젤과의 만남을. 오늘이야말로 해답을 찾고 말리라고. 물론 상대는 자이젠 아오이였지만─. 묘한 거리감이 둘을 별개의 인물로 보고 있었다.

광장의 시계탑이 여섯 시 십 분 전을 가리켰다. 조금 이른 설레발에 흐트러진 자세를 가다듬었다. 묵직한 초침이 태양을 쥐고 이끌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린 톱니바퀴의 회전은 순식간이었다. 여섯 번의 종소리가 세상을 불태워갔다. 일몰이었다.

스펙터는 문득 현실에 꿈을 비추었다. 어제 색이 있었다면 이랬을까. 붉디 붉게 수놓아진 풍광에 녹색을 입혔다. 공기 타고 스르르 흔들리는 이파리 한 잎. 손 가까이 대면 살랑 간질이곤 떠나 버렸다. 외톨이의 곁에 푸른 인영은 보이지 않았다.

"계속 멍하니 서 있을 거면 돌아갈 거야."

자이젠 아오이. 그가 공허를 찢고 침범해왔다. 아, 바보같은 짧은 소릴 내며 덧씌웠던 마음을 덜컥 찢어냈다. 메세지의 답은 수락이었다. 스펙터가 방황하던 눈동자를 갈무리하고 고개를 숙였다. 습관같이 입꼬리를 올렸다.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할 게 있었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불러냈어? 메세지로 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인사치레는 모두 생략. 아오이가 반쯤 뒤돈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스펙터를 바라봤다. 벤치에라도 앉아서 얘기하자는 손길은 뿌리쳤다.

"길게 얘기할 생각 없어."

"그건 저도 없으니 안심해주세요."

꼭 사족을 덧붙이는 스펙터에 아오이가 눈을 흘겼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단 소리에야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당신의 블루 엔젤이 보고 싶습니다."

무엇을 예상했든 의외의 발언이었겠지. 아오이가 갸웃 시선을 기울였다.

"블루 엔젤을?"

"꿈에 그가 나오더군요. 당신을 뵈면 이유를 알 수 있을까 하여."

지금 이 순간 진실은 가장 어색한 선택이었다. 꿈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단어에 아오이에게 불쾌감이 앉았다. 스펙터는 아오이의 표정 변화를 하나하나 조용히 새겼다.

"내가 꿈에 나왔다는 사실도 썩 유쾌하진 않은데. 그 이유를 왜 나한테 찾아?"

"당신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으니까요."

구색 없는 명분. 억지와 가까운 태도에 아오이는 저게 끝이 아니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하노이에 관련된 일인 걸까. 하면 이전처럼 부탁 없이 해킹으로 꾀어낼 수도 있었을 텐데. 꼬리를 무는 자문을 눈치챘는지 스펙터가 흐름을 잘랐다.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일로, 하노이와는 관계 없습니다. 오늘 일에 관한 당신의 안전은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무엇이 진실일까. 믿을 수 없는 돌다리를 건너기 전까지는 판가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스펙터의 눈이 곧았다.

"오늘 일로 당신이 얻는 이득은 없겠지요. 자이젠 아키라에게 연락을 넣으셔도, 현실의 제 손발을 묶고 진행하셔도 좋습니다. 그럼에도 신용이 안 간다면 돌아가셔도 할 말은 없어요. 다만 이로 인해 당신이 위협을 받는다면 제가 반드시 책임지겠습니다."

굳건한 어조로 말이 맺어졌다. 쉼 없이 내달렸음에도 가지런한 호흡, 진심. 묘한 감정이 공중을 부유했다. 원하는 게 블루 엔젤의 아바타를 보는 것 뿐이라면 얼른 보여주고 끝내는 게 나을지도 몰라. 아오이가 그리 판단 내린 계기였다.

만일을 대비하여 아키라에게 연락을 넣은 아오이가 드디어 동의를 표했다. 인투 더 브레인즈, 두 사람의 목소리가 맞물렸다.

현실과 복장만 달라졌을 뿐인 스펙터와 아오이의 형상이 남지 않은 블루 엔젤이 서로 마주섰다. 한껏 경계하는 블루 엔젤을 스펙터가 찬찬히 뜯어봤다. 한 차례 듀얼로 쓰러뜨렸던 그 때의 모습이었다. 반응 없는 눈길에 블루 엔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진짜 이유가 뭔데?"

평정이 무너진 눈동자가 닿았다. 질문이 야기한 혼란에 진득하게 감겨 있었다.

"말씀 드렸잖아요. 꿈에 블루 엔젤이 나왔다고."

그래서 확인하고 싶었다고. 그러나 모든 게 딱 떨어질 줄만 알았던 만남은 되려 뭉근한 불덩이가 되어 확신을 녹여갔다. 정말 그게 블루 엔젤이 맞았을까? 눈 앞에 선 이를 보며 뇌가 의문을 뱉어냈다.

"지금 그 표정 보면 절대 그게 끝이라고 할 수 없을 거 같은데."

표정? 상념에서 삐져나온 스펙터가 아차 하고 정돈했다. 스펙터를 향한 눈빛에 미세한 걱정이 스쳤다. 그를 보고도 눈치채지 못한 스펙터가 생각을 차곡 쌓아갔다. 자신이 무얼 놓쳤는지. 무언가에 다다르자 고개를 얕게 수그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자세를 돌리며 함께 올린 손가락을 튕기자 배경이 바뀌어갔다. 반사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한 블루 엔젤이 주변을 살폈다. 회색 노을 색깔을 양분 삼아 무성하게 자란 풀밭. 스펙터가 기다리던 그곳에 블루 엔젤이 서 있었다.

"이건 무슨 의미야?"

"제 조바심이 낸 욕심입니다."

블루 엔젤이 푸른 인영이 맞다면 모두 저 이가 구원한 생명들이었다. 하지만…. 흐물흐물 널부러진 확신은 쉽사리 복구되지 않았다. 무언가 달랐다. 믿을 수 없는 결론에 스펙터가 눈두덩에 그림자를 지웠다. 지금까지 헛고생을 한 건지. 대체 정체가 무엇인지. 블루 엔젤이 걸리는 얼굴로 스펙터를 바라 보았다.

"당신이 찾던 게 내가 맞아?"

스펙터가 눈썹을 구겼다. 블루 엔젤을 찾고 있었느냐, 그 질문에는 당연히 그렇다고 답할 수 있었다. 뇌리에 잡음이 끼었다. 블루 엔젤이 말한 '나'라는 단어가 뿌옇게 흐렸다. 장막 하나가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답답했다.

"할 말이 더 없다면 로그아웃할게."

블루 엔젤의 로그아웃과 함께 스펙터가 혼자 남겨졌다. 지난 일주일 간의 풍경. 모든 색채가 도로 사라지는 듯한 착시에 동공이 떨려왔다.

서둘러 로그아웃한 현실에는 아직 아오이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죄 알록달록한 물에서 붉게 물들어. 꿈의 세계에선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이제 가봐도 되지?"

아오이가 이상을 가늠하려 주먹 쥐다 편 손을 거두었다. 진정 아무 짓을 하지 않은 점에 더 의아를 느끼기도 하면서. 아오이를 보던 스펙터가 한참 늦게 목례하며 입을 뗐다.

"죄송했습니다."

더 이상 관계 없겠지, 스펙터가 평소보다 불안해 보이는 것도 신경 쓸 필요 없을 것이다. 의구심을 잘라낸 아오이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안녕 없이 떠나가기 시작했다. 스펙터의 속내가 왠지 모르게 뭉개진 순간이었다.

"만일 이상이 생긴다면 연락할 테니까 책임 져."

스펙터의 심장이 퍼뜩 튀었다. 아오이가 스펙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미련 없이 떠나갔음에도 스펙터는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딘가 갑갑했다. 그 날은 잠들기 전까지 연락을 기다린 것 같았다.

꿈에 밤이 내렸다. 명암만이 공존하는 깊은 시간, 평생토록 보아온 스펙터의 세계. 칠흑같은 어둠은 아니었다. 고개를 올리면 등이 있었다. 새하얗게 빚어진 둥근 보름달. 멍하니 바라보다 눈길을 내리면 먹을 삼킨 식물들이 싱그럽게 영글었다. 꽃망울 터뜨릴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서.

달은 유난히 밝았다. 눈이 부셔 앞으로 가는 걸 잊을 정도로.

식물을 손으로 쓸며 뒤를 돌았다. 촉촉한 물기의 생생한 촉감이 좋았다. 반 바퀴 돌아서 움직임을 멈췄다. 빛을 등지고 누군가 서 있었다. 착각할 수 없었다. 저건 확실히 블루 엔젤이었다.

눈이 크게 뜨였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저 사람을 놓치면 안 될 거 같았다. 앞으로 영원히 기회가 없을 것만 같았다.

"블루─."

호칭은 채 맺어지지 못했다. 달려가 그에게 손을 뻗는 순간 산산히 부서져 버렸으니까. 깜짝 놀라 물린 손에 데이터 잔해가 스쳤다. 그 때와 같았다. 또 다시 제가 바스라뜨린 꼴이었다. 무너졌다.

아니, 망가진 건 표정 뿐이었던가. 무언가 달랐다. 사라지기 않길 바랐다.

스펙터의 미련에 머물던 빛이 서서히 일대로 뻗어나갔다. 닿는 곳마다 파랗게 물들여졌다. 만개를 고대하던 꽃봉오리가 색색깔로 점멸했다. 주위에 시야를 빼앗긴 틈에 누군가가 다시 모습을 그려냈다. 자이젠 아오이. 그가 푸른 평야에 둘러싸여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바라본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눈을 뗄 수 없었다. 푸른 인영의 정체는 블루 엔젤이 아닌 자이젠 아오이 그 자체였던가. 가슴이 답답하면서도 홧홧했다. 불규칙한 북소리가 고막을 연신 때려댔다. 이유도 모른 채, 이름 모를 감정에 사로잡혀 뒷걸음질쳤다. 구원이라는 글자가 들려오는 듯 했다.

유쾌하지 못한 기분에 미간을 찌푸렸다. 울연했다. 이는 분명 불쾌한 기분이어야 했다. 다른 감정이어선 안 됐다.

가련한 연심임을 눈치챌 순 없었다.

*

다음 날 밤, 아오이의 연락망으로 메세지가 하나 도착했다.

─자이젠 아오이. 당신의 구원은 아직 유효합니까?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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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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