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왕 시리즈

단비

스펙아오

연전 by 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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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년 10월 29일 연성 재업

* 과거 연성이라 현재 문체와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 이만. 볼일이 끝났음을 알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삼스레 인사를 나눌 필요는 없었다. 아오이가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료켄은 눈길 한 줌 주지 않았다. 언제나와 같이.

하노이의 기사단 감시역으로 코우가미 저를 찾는 것도 익숙해진 참이었다. 접대실을 나서 계단을 내리면 몇 보 앞에 현관이 나오는 단순한 구조. 평소와 다른 점은 문 밖에 떨어지는 비의 존재 뿐이었다.

오면서는 괜찮았었는데 그 새 내리는 구나. 도착했을 때도 우중충하긴 했었지. 세워둔 차까지 거리가 얼마나 됐더라. 차내 딱히 쓸 도구가 없었음을 생각하면 운전수에게 대기를 이른 게 다행이었다. 아오이가 지닌 건 아담한 크기의 일인용이었으니.

"어라, 아직 안 가셨나요?"

가방을 뒤적이고 있자니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의식적으로 돌린 시선에 스펙터가 들어왔다. 목소리의 주인쯤이야 안 보고도 알 수 있었으나.

"우산 좀 찾느라."

때마침 손에 잡힌 물건을 꺼내며 대답했다. 아오이의 소지품에 눈동자 한 쌍이 가닿다 바깥으로 흩뿌려졌다.

"그렇군요."

말이 이어질까 기다림도 무색하게 대화는 종결. 싱거운 반응에 나갈 타이밍을 놓친 아오이 옆으로 스펙터가 끼어들었다. 신발장 옆 공간에서 두 명은 족히 쓰고 남을 장우산이 끄집어내졌다.

스펙터도 어딜 나가는 건가? 작은 물음은 부러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맺은 질답을 애써 끄집어낼 필요는 느끼지 못했기에. 뭔가 어색해지겠는데, 그런 생각만 자잘하게 찍으며 한숨을 삼켰다.

풍, 팡. 겹치지 못한 탄성이 서로 다른 무게를 담았다. 시작이 다른 하모니는 곧 같은 가락을 퉁겨냈다. 투두둑 쏟아지는 불규칙한 박자가 공백에 대한 그나마의 위안이었다.

그 작은 안식에 너무 기대고 있던 걸까. 찰박이는 웅덩이의 경고를 듣지 못했다. 짧은 비에도 깊게 고인 물구덩이. 첨벙, 채 신경쓰지 못한 홈에 발을 담가 버렸다. 아, 차가움을 느낀 순간엔 이미 술렁이는 파문에 죄 잠긴 지 오래였다.

"괜찮으십니까?"

급히 무른 걸음에 물살이 튀겼다. 눈치 못 채는 게 이상한가. 돌아본 스펙터가 반사적으로 아오이를 향했다. 겉옷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빼니 손수건이 들린 채였다. 아오이가 잠깐 고민하다 스펙터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두 사람이 맞닿는 틈에 스펙터의 손등에 비 한 방울이 톡 떨어졌다. 아오이에게 옮겨간 천 조각이 입술을 먼저 적시고 떨어졌다.

"고마워."

"마르기까지 시간이 걸릴 테니, 오늘은 쓰시고 다음에 돌려주세요."

양말이고 신발이고 짝짝이로 물든 건 여전했으나 손 끝에 밴 습기만큼 기분은 한결 나았다. 아오이가 허리를 펴자 스펙터가 뒤로 물러섰다. 숙이며 기울어진 우산 틈에 새는 비를 막아준 모양이었다.

어찌 보면 애초 스펙터 때문에 벌어진 일이면서도─. 아오이는 자신의 부주의가 더 컸음을 돌이키며 인과 관계를 정리했다. 이걸로 거리감은 물리친 거 같아 우습기도 했다.

"어디까지 가?"

"도로까지, 차를 대기시켜뒀으니까요."

혹시 차로 나가는 길까지 겹쳐 버리는 걸까. 마음이 풀려서 그런지, 이대로 동행해버리는 걸 떠올리면 정말 웃어버릴지도 몰랐다. 스스로도 왠지 모르겠는 소소한 웃음 포인트. 묘하게 즐거워 보이는 듯한 아오이에 스펙터가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제가 무언가 즐거울 만한 행동이라도 했나요?"

"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하노이의 기사 리더와의 대면보다 그 비서와의 몇 보에 더 쩔쩔맸다, 라. 끝내 미소짓는 아오이에 스펙터가 의문을 표했다. 가벼운 혼란에 빠져 제 행동거지를 돌아보는 게, 이건 '즐거울 만한 행동'이려나 하며 아오이가 고개를 으쓱했다.

"이만 가자. 거의 다 왔어."

해사한 아오이에 비해 한껏 구불구불한 표정의 스펙터. 아오이가 몸을 틀자 영문을 모르는 채 함께했다. 코우가미 저의 영역은 금방 끝. 빼꼼 목적지에 다다르자 정차된 자가용 한 대가 헤드 라이트 반짝이며 아오이를 반겼다.

한 대? 저건 솔테크 직속 차량이 맞는데.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스펙터가 탈 만한 교통수단은 보이지 않았다. 멈춰 선 아오이에 스펙터가 말을 걸려던 찰나.

"차 대기시켜뒀다며, 아직 안 왔나 봐?"

"무슨 말씀이신지?"

"도로까지 나온다던 거, 나가는 거 아니었어?"

스펙터가 아, 소릴 내더니 실없이 숨을 내보냈다. 아오이 쪽에 물음표가 떠돌았다.

"오해가 있었나 보군요. 제 외출 일정은 없습니다. 여기까지 나온 건 배웅을 위함이고요."

어라? 아오이의 눈에 빛이 팽글 달렸다. 뭐야, 그럼 나 혼자 신경쓰고 오해하고 다 한 거야? 괜히 바보같아져서 속절없이 실소가 터져나갔다. 오가는 문장은 없어도, 스펙터는 그제야 아오이가 보이는 태도의 의미를 파악할 것 같았다.

"평소엔 이런 거 없었잖아. 왜 하필 오늘?"

"수행원 없이 비가 오고 있었으니까요. 어쨌든 손님이시니, 차까지 젖지 않게 바래다 드릴 생각이었습니다만."

의도와는 반대로 따라 나왔기에 젖어버렸단 걸 저 사람이 알까. 도리도리, 더 이상 쓸모 없어진 상념을 지우고 차를 향해 폴짝 뛰었다. 방수 천에 맺힌 물방울이 통 튀었다.

"웃고 가는 것도 덕분에 처음인 거 같네. 일 말고 다른 볼일도 생기고."

이것도 분명 이곳이 너무 익숙해진 탓이겠지. 아오이의 우산을 따라 미끄러진 빗줄기가 스펙터의 신발코에 물길을 두드렸다. 그 노크를 눈치라도 챘는지, 스펙터가 차 문을 열고 자그마한 지붕을 덧댔다.

"저로 인해 소소하게나마 얻는 게 있으시다니 다행입니다. 또 뵙도록 하죠."

"손수건 돌려주러 올게."

한 천장을 공유하는 짧은 순간을 지나 차 안으로. 서로 꾸벅 고개를 기울이는 것으로 인사는 끝이 났다. 접은 우산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기가 바닥을 적셨다. 축축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비 오는 거 가끔은 괜찮을지도. 단조로운 일상 속 낯선 단비에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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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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