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기려

[하성기려] 이름불러 이자식아

2023.11.27

이름불러

이자식아


“김 헌터님.”

옛 중국에서는 한국을 일러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지리적으로 동쪽에 있는, 예와 의가 바른 나라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단다. 동쪽에 있다니? 지나치게 자국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데다가, 이런 말을 저들 딴에는 칭찬이라고 했다는 데에서 예와 의, 다시 말해 싸가지가 얼마나 없는지 알 수 있는데, 더 웃긴 건 이 땅의 사람들이 그걸 정말 칭찬으로 듣고 자신들 사이에서도 써먹었단 사실이다. 예의 바르다는 말과 순진하다는 말이 같은 뜻인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물론 나 역시 존경받아 마땅한 자에게는 그에 걸맞은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보다 플랑크톤 좀 더 먹었다고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거든.

“김기려 헌터님?”

……그런 나라도 이건 좀 그렇지, 아무래도.

나이도 어린 데다 순위도 낮은 주제에 자신의 이름에 어떤 존경의 칭호도 붙여 부르지 않고 반말을 찍찍 갈기는데 언짢은 기색 한번 하지 않은 예의 바른 헌터 정하성과 대화하기? 처음에는 S급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으나 최근에는 타인의 찌르는 듯한 시선에 식은땀이 흐른다.

사유: 정하성 27세, 김기려 25세.

두 살 연하─공식적으로는, 공식적으로 말이지! 이런 표현을 하기 민망할 지경으로 내 나이가 많다는 건 나도 알아!─라는 건 꽤 전에 밝혔는데도 굳이 ‘김기려 헌터님’이라는 호칭에 경어를 고수하는 정하성 덕분에 주변에 사람들이 있을 때 꽂히는 시선이 따갑다. 첫 대화를 반말로 시작한 탓일까? 이제 와 존댓말을 하자니 정하성이 원하지 않거니와, 무엇보다도 나는 알파우리 시절에도 내가 원해서 경어를 써본 적이 드문 사람이다. 나에게 있어 정하성은 존중하고 싶은 자이지, 존경할 만한 자는 아니었으므로.

그래도 최근에 감정적 교류를 지속하면서 좀 더 친밀한 관계가 되었으니 호칭이나 언어표현을 달리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정정 시도는 하지 않고 있다. 왜지? 얘는 정말로 언어표현에 격을 차리는 게 편하단 말이야?

“……기려 헌터님.”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머그잔을 감싸 쥔 채 까맣게 변한 TV 화면을 노려보고 있는데, 무언가 손등을 툭 건드린다. 소파 옆자리에 앉은 정하성이다.

“응? 왜.”

“끝났는데 화면을 계속 보고 계시기에……. 무언가 곱씹고 있으신가 해서요. 다시 보고 싶으시면 돌려볼까요?”

아, 그런 건 아니야. 손을 내저어 그를 제지하고 머그잔에 담긴 내용물을 홀짝거렸다. 적당히 뜨거운 차에서 고소한 풀냄새가 났다. 이제 잘하네. 오늘의 과제는 약 120분가량의 다큐멘터리 영상이 끝날 때까지 머그잔 안의 찻물을 너무 뜨겁지 않지만 미지근하지도 않게, 마셨을 때 입안을 데지 않을 정도로 뜨거움을 유지하는 거였고, 방금 마신 찻물은 내가 주문한 대로 알맞게 뜨거웠다. 60℃에서 65℃ 사이를 유지하라는 명확한 지시보다 마셨을 때 입을 데지 않을 정도로 유지하라는, 다소 불분명한 지시에 훨씬 정답에 가까운 결괏값을 낸다는 게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교습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로 머릿속에 입력해 두었다.

“저도 같은 컵을 들고 있어서 수월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했는지 설명해 볼래?”

조금 불그스름한 뺨에 내리뜬 눈, 보일 듯 말 듯 올라간 입꼬리. 칭찬받는 일이 부끄럽지만, 한편으로는 기쁜 모양이다. 정하성이 조곤조곤 설명을 늘어놓는다. 이전에는 컵 아래에 아주 작은 불꽃을 만들어 차를 데우려고 했었는데, 그러면 내용물보다 컵 전체의 온도가 먼저 올라가서 겉면에 닿아 있는 손이 화상을 입게 되더군요. 이번에는 찻물 안에 작은 불꽃을 짧은 시간 여러 개 발생시켜 온도가 유지되도록 해봤습니다. 설명 끝에 눈을 맞추며 묻는다. “……어떤가요?” 저 나름으로 찾아낸 방법이 적절한지.

“내가 생각한 방식과 유사해. 잘했어. 이제 물체 내부에 불꽃을 발생시키는 건 곧잘 하는 것 같네. 최근에 처리한 몬스터 사체를 보니까 내장 전체를 태우는 것 같은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뇌와 심장, 폐같이 생명 활동에 꼭 필요한 장기 한두 개만 잘 익혀놔도 죽일 수 있으니까, 다음에는 그렇게 해 봐. 물론 그렇게 하려면 몬스터의 주요 장기 위치를 알아야겠지만, 늘 새로운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아니잖아? 많은 마력을 갖고 있어도 낭비하기보다 효율적으로 쓰는 게 좋아. 언제 어떤 상황에 처할지 모르니까.”

마법을 다뤄서 곤란할 뿐 물리력 자체는 떨어지는 상대라면, 방금 이 컵에 했던 것처럼 호흡기 내부에 작은 불꽃을 발생시켜서 무력화할 수도 있어. 팁을 전하는 것으로 수업을 마무리했다. 정하성은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듣다가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신체 강화 계열의 적을 상대할 때 전투 불능으로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싸우는 도중에 틈을 만들 수 있을까요? 나는 눈을 굴리며 잠깐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누굴 상대하려고.’ 짐짓 모르는 체하며 대답했다. 응. 하지만 신체 강화 계열은 자기 약점을 잘 알기 때문에, 마법 저항력을 높이는 아이템을 착용했을 가능성이 있어. 마법 저항력이 높은 상대의 내부에는 마력을 응집시키기 어려우니 주의할 것. 이상.

내 대답에 정하성이 잠시 침묵한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몬스터는 아이템을 착용하지 않는다. 이 행성에서 아이템을 사용하는 건 아직까지 인간뿐. 누굴 가리켜 답한 것인 줄 알았을 테지. 너를 믿으므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리라 판단했다는 것 역시 이해했으리라. 이 아이는 인간 중에는 영리한 축에 속하니까.

남은 차를 마저 입에 머금고 찻잔을 내려두자마자 정하성이 제가 치우겠다며 쟁반을 들었다. 다소 빠르게 주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여상히 넘기며, 수업이 끝났으니 좀 흐트러져 있어도 괜찮겠다 싶어 앉은 자세 그대로 옆으로 몸을 허물어뜨렸다. 이대로 푹신한 이불에 돌돌 말려 전기장판 위에 누우면 딱 잠들기 좋겠는데. 물소리가 나기에 목을 꺾어 주방 쪽을 바라보자,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관계의 형태가 달라지면서 서로의 집에 방문하는 일이 늘었다. 내 한 몸 뉘면 딱 알맞은 내 집보다야 정하성의 집이 당연히 넓고 좋았으니, 만나서 밖을 돌아다닐 게 아니라면 자연스레 그의 집으로 향하곤 했다. 처음 들렀을 때에는 저 TV도 없었는데, 다음에 오니 거실 벽면에 떡하니 걸려 있더라. TV 생겼네, 가볍게 말을 던졌는데 허둥지둥 볼 일이 생겨서 들여놓았다고 답하는데 글쎄.

“피곤하십니까?”

“조금. 잠을 좀 미뤘더니…….”

잠을 미루셨다고요? 젖은 손을 닦고 가까이 다가오기에 머리를 들어 올렸다. 머리 아래로 들어오는 허벅지를 베고 누우면 “응, 좀 손보고 싶은 게 있어서. 열중하다 보면 밤을 새우게 되더라고.” 정하성의 얼굴이 부드러워진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베개에 비할 바 아니지만, 얘가 기분 좋다잖아. 머리카락 사이를 헤집는 손길을 느끼며 한참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렇군요. 김 헌터님은,” 아, 이거 좀 거슬리는데.

“하성아. 우리…… 호칭을 좀 바꿔보자.”

나서서 밝히지 않아도 헌터의 개인정보는 알아서 잘 퍼뜨려 주는 언론 덕분에 정하성과 내가 몇 살인지, 누가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는 전 국민이 다 안다. 어딜 가든 이야기하고 있으면 헌터는 물론이고 일반인들의 시선에 지져질 것 같다. 정하성은 모르겠지. 호칭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이야기해 봤지만, 자신은 이렇게 부르는 게 더 편하다며 거절했던지라 더 말하기도 뭐해서 되도록 사람 많은 곳을 피했었는데…….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렇고 그런 사이니까, 거리감이 느껴지는 호칭을 고수하는 건 좀 아니지 않을까? 다른 말보다도 이 한마디가 통했다. 두피에 닿는 손가락 끝이 뜨거웠다. ‘그, 러면…… 이름을 불러도 될까요?’, ‘당연하지!’ 이 대화의 흐름은 김기려가 의도한 바였는데, 장장 1시간에 걸쳐 늘어놓은 설득의 말로 ‘너도 말 편하게 해라’를 극적으로 타결해 낸 외계인은 외딴 행성에서 일궈낸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업적에 속으로 여섯 개의 촉수를 흔들며 기뻐할 틈도 없이 이름이 불렸다. 아니, 공격당했다.

“……기려 씨.”

약간의 실랑이와 망설임 끝에 꺼내놓은 부름이 기려 씨, 고작 한 마디였는데.

이건, 이런 건…… 정신적으로 타격을 주니까, 그래, 공격과 다름없지 않나? 어떻게 남의 이름을 나비 날개를 만지는 것처럼, 민들레 홀씨가 날아갈까 저어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부를 수 있단 말인가? 고작 이름이 불렸을 뿐인데 미지근한 해류가 촉수 사이를 지나가는 듯 가슴이 간지러워질 수가 있단 말이야? 이게 말이야?

아니, 내가 이름을 부르라고 권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부른다고?

물론 사실관계를 정확히 하자면 김기려라는이름의주인은이미고인이며그의시체를차지한알파우리일짱대마도사인이몸의이름은아니지만?

하성이 너 다른 사람도 이렇게 불러?!

감히 남의 가슴에 돌을 던져놓고도 던진 줄을 모르는 괘씸한 상대를 추궁하고자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귀까지 온통 붉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시선을 맞추고 반응을 살피는, 이 어리고 다정한 영혼을 마주하면. “……응, 하성아.” 추궁은 무슨, 울렁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한껏 풀어진 목소리로 속절없이 받은 만큼의 다정을 흉내 내고 마는 것이다. 아, 정하성 이 자식…….

바로 누운 탓에 얼굴을 숨길 데가 없어 그만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는 추태를 보였으나 괜찮다. 정하성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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