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착각 가이드

이세계 착각 가이드

NCP. 센티넬-가이드버스 기반. 이착헌 소규모 비공식 교류회.

위 트윗에서 시작된, 이착헌 소규모 비굥식 교류회 ‘제1회 대한민국 담당 기심체 정기모임’에 제출한 〈이세계 착각 가이드〉 입니다.

이 글은 확실하게 NCP입니다만, 추후 동일한 세계관으로 CP글이 게시될 수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글리프 에디터는 이미지를 좌우로 넘기면서 보는 기능이 없어서 웹 페이지로 볼 수 있게끔 편집하였으며, 포스타입에는 실제 출력된 책 사양으로 업로드하였으니 참고해 주세요.

PC로 읽으시는 경우, 가로 너비를 최소화하여 읽으시면 출력물과 비슷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반추反芻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도피하듯 기억을 더듬어 봐도 고대하던 퇴사 후 소시민으로서 그럭저럭, 적당히, 무난하게 잘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주목받을 만한 일을 한 기억은 없는데 말이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UTV의 이영지 기자입니다. 과거에 폭주 전조증상을 겪는 정하성 헌터를 안정화하셨다는 게 사실입니까?”

정상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그게 폭주 전조증상인 줄 몰랐다. 그걸 알았으면 나도 도망치는 사람들 중 하나였겠지.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자리에서 이들이 말하는 ‘안정화’라는 걸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인터뷰를 할 일도 없었을 거다.

이미 죽었을 테니까!

“기자분들, 위험하니까 안으로 밀고 들어오지 마세요!”

“가리온 측에서는 김기려 헌터와 관련된 소문에 대해 어떤 답변도 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정하성 헌터와 모종의 커넥션이 있었습니까?”

뭔 소리야. 난 걔 연락처도 몰라. 얼마 전까지는 얼굴도 몰랐어!

……그걸 너무 늦게 알았다는 게 이 사태의 원인일까?

“각성 검사에서 성향을 속인 이유가 뭡니까?”

“답변 바랍니다!”

나는 모여든 기자들을 쓱 훑어봤다.

그들의 눈초리에 섞인 것은 기대, 질투 호기심. 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내게는 작은 비밀이 있다.

“고위급 가이드의 첫 등장으로 국내 센티넬 능력자들의 부담이 덜어지리라는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는데요, 향후 일정에 대한 계획이 있으신가요?”

사실 내가 가이드 노릇을 하게 된 건 단순한 우연이었다.

여기 모인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각성 검사에서 성향을 속인 게 아니라…… 내 출신과 몇 가지 불운이 겹쳐 이 지경까지 온 것이다.

그래, 한마디로 나 X밥이라고.

기자들이 지금 묻는 말도 대부분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계획? 계획이 있냐고요?”

기회가 있다면 오해를 풀고 싶었다. 그동안 오해를 정정하려는 시도를 안 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 정정 시도는 불운하게도 번번이 불발되었으며, 억울하게도 거짓말을 한다고 목숨을 위협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이 벌어졌음을.

“계획이 있었으면 일이 이렇게 됐겠어?”

“예?”

“아, 이게 아니라. 어, 그러니까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면.”

이제 와서 내가 F급 센티넬이라고 주장한들 대체 누가 믿을까?

일단 나에게 자꾸만 악수하자며 손을 잡으려 드는 S급이 손대신 내 목을 쥐고 짤짤 흔들겠지? 길바닥에서 동정심 때문에 파장을 안정시켜준 그, 무슨 1위라는 놈은 과연 날 가만히 둘까?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이 세 계

착   각

가 이 드


환생 마법, 개같이 실패

인류 역사상 최악의 발명품을 하나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담배.

이 물건이 술사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아는가?

마법에 쓰이는 연료는 주변에 존재하는 ‘외부 마력’과 생물의 몸 안을 순환하는 ‘내부 마력’으로 분류된다. 마법사들은 소량의 체내 마력을 호흡기관─인간의 경우 폐─을 통해 외부의 마력과 결합하여 복합체를 만들고, 그것으로 마법을 실행한다.

그러나 내가 차지한 몸은 흡연으로 이미 폐가 시커멓게 망가져 마력 교환을 할 수 없는 상태.

부정도 해봤고(“뭐지? 새로운 환경이라 긴장했나? 내가 이런 일을 다 겪어보네. 하하.”) 화도 내봤으며(“이런 제기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으려고도 했지만(“분명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몸을 고칠 방법이.”), 지금 당장은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빠르게 마음을 갈무리했다.

이미 벌어진 일인데 뭘 어쩌겠어. 마력의 양에 눈멀어 결함이 있는 시체를 걸러내지 못한 내 탓이니 받아들이는 수밖에. 어차피 퇴사만 할 수 있다면 단세포 생물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잖아? 또한 내게는 연구할 시간만 충분하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으니.

호흡계의 문제를 빠르게 수용한 나는, 곧 다시 한번 좌절하게 된다.

‘이 육체…… 가진 마력의 양이 형편없어!’

전무후무한 환생 술식을 짜면서 알파우리의 제1마도사장은 두 가지 요소에 집중했다. 이동해야 할 ‘영혼’이라는 것의 정의, 그리고 그 영혼이 도착할 목표 생물의 육체 조건. 가장 애를 먹었던 영혼의 이동이 성공했기 때문에 육체 조건이야 당연히 충족했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설정한 육체 조건은 바로 ‘이 행성에서 마력의 양이 가장 많은 시체로 환생할 것,’

처음에는 행성의 생물 전반이 마력에 노출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 전생에 대마도사로서, 지구의 인류는 상상도 못할 만큼 광오한 마력을 다루었으니 절대적 마력량이 적다고 느낀 것이지, 다른 개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을 거라고.

하지만 성인 남성의 주먹만 한, 털 숭숭한 설치동물보다도 마력이 적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을 때는.

이 몸이 지능지수 30 가량의 기니피그만도 못한…….

‘이런 X발.’

한때 알파우리의 제1마도사장이었던 내가 기니피그만도 못한 마력을 지닌 육신에 갇혔다니? 선 자리에서 그대로 실신할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김기려의 뇌가 아는 모든 욕을 총동원해 분노를 삭이려고 노력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5평 남짓한 보금자리의 현관문을 여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고꾸라졌다.

화가 좀 머리끝까지 치솟아서 머리에 열이 오른다고 쓰러지다니, 약해빠진 몸뚱이라고 그렇게 욕을 했는데 한국의 문화적 배경에서는 화병火病이라고, 이런 증상이 종종 발생하곤 한단다. 아이고.

내 환생 마법은 실패했다.

그것도, 아주, 개같이!


가이드 맞으시죠?

“컥, 허억.”

벽에 처박히면서 머리에 가해진 충격에 시야가 암전되었다.온몸의 감각이 죽기 싫으면 어서 일어나야 한다고 아우성치는 한편, 지금 몸을 일으킨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는 비관적인 생각이 안윤승의 의지를 갉아먹었다.

이곳은 본래 F급이었으나 이상 현상이 발생해 등급이 상승한 게이트로, 입장 시 측정한 마력 밀도는 D급 던전 수준.

이상 현상이 일어난 게이트는 던전의 형태나 몬스터의 종류가 기존과 달라지므로, 데브 시스터즈 길드에서는 돌발 상황을 충분히 감안하여 C급 던전을 여유롭게 클리어할 수 있는 구성으로 조사원을 파견했다.

길드 나름으로는 인력 낭비를 감수하며 보수적으로 팀을 구성한 것인데.

“저, 저거. 픽시 글라스(Pixy Glass)로 봤는데… A급이에요. 마력치가 A인 몬스터라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D급 던전에서 왜 A가 뜨냐고!”

‘어째서 A급 몬스터가…….’

안일했다.

겨우 눈을 뜨자 골렘의 거대한 몸체가 보였다. A급 방어계 각성자가 맨몸도 아니고 방패로 막아낸 게 이 정도라니.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로 시야가 흐리고 어지러웠으나 눈가를 훔치며 일어섰다.

‘다른 사람들이 맞았다간 그대로 즉사할 거야. 내가 막아야 해.’

그는 팀의 리더로서 팀원들을 독려하려고 애썼지만, A급 센티넬 한 명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괴물이 등장하자 팀은 순식간에 붕괴했다.

“제가 틈을 만들 테니, 빨리 스킬을…….”

“나, 난 못해. 방어계 A급이 못 막는 걸 우리가 무슨 수로 처리해?”

“우린 다 B급이야. 온 힘을 다해서 공격해도 장담을 못 하는데… 그러고 나면 바로 폭주야. 자살 행위라고!”

위험할 때는 자신만 믿으라고, 이 던전에 들어오면서도 그의 정수리를 찰싹 때리며 짓궂게 웃던 남성은 안윤승이 피투성이가 된 사이 도망쳤다.

“다시 시도하면 통할 것 같아. 윤승아, 30초만 더 버텨줄래?”

“…허억, 헉. 네!”

그리고 30초 뒤, 그의 뒤편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윤승이 골렘을 막아내는 사이 도망친 것이다.

“모두 믿었는데…….”

쓰러진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흐려지는 의식으로 생각했다.

…신입생 MT 때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로 난데없이 센티넬로 각성한 뒤, 각성자로서 탄탄대로를 걸었다.

대학을 다닐 수 없게 된 건 아쉬웠으나 그것도 잠시, 이르게 시작한 사회생활은 새로운 자극이 되어 사소한 아쉬움은 금세 잊었다. A급이라는 높은 각성치 덕분에 거대 길드 여러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수 있었고, 개중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한 네오 시스터즈 길드에 가입했다.

길드 안팎으로 좋은 사람들과 팀을 맺고 게이트 공략 실적을 쌓으며 차근차근 성장해 왔다. 행운이 따라준 덕에 A급으로 각성했지만, 성장은 노력으로 이뤄낸 결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전부 운이었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띄워주니 우쭐해 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피가 섞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나는 여기서, 이렇게 죽는 건가? 게이트 안에서 죽으면 시체도 찾을 수 없게 된다고 들었는데…….

무리하게 마력을 소모한 탓일까? 육체의 고통과 더불어 공포나 무력감, 부정적 사고 따위가 안윤승을 무겁게 짓누르는 순간.

“이야! 가까이에서 @#!$#….”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어지러움과 이명으로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지만, 눈을 비비며 집중하자 상대의 형상을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정장을 입은 금발의 남자가 골렘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거대한 골렘을 앞에 두었음에도 조금의 위협조차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러한 태도가 기묘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그러나 윤승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헝클어진 마력 파장이 기어코 의식을 수면 아래로 끌어내렸으므로.

쿵!

천지를 뒤흔드는 커다란 소리에 안윤승이 번쩍 눈을 떴다.

죽음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의식을 잃다니?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지 않았나. 순간적으로 급하게 숨을 몰아쉬던 그가 본 광경은.

“허억.”

놀랍게도 팀을 붕괴시키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거대 골렘이 쓰러져 있었다. 의식을 잃기 전 보았던 남자가 그것을 밟고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무심한 얼굴로 노심을 잡아 뜯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감탄하는 것도 잠시, 골렘의 핵을 든 남자가 안윤승을 향해 다가왔다. 안심하는 것도 잠시,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안윤승이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잠깐, 협회에서 출입을 막은 게이트에 왜 다른 헌터가 있지?’

심지어 그는 무기 하나 없이 골렘을 처치한 실력자.

세상에서 제일 믿지 못할 것이 게이트 안에서 만난 각성자라는 뼈 있는 농담이 흔한 요즘, 괴한이 가까워질수록 안윤승은 공포에 질렸다.

“부축해 줄까?”

그가 오른손을 내밀며 말을 걸어올 때는,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잔뜩 긴장했던 몸이 상대의 호의를 인지하자마자 허물어졌다.

“어어, 괜찮아?”

남자는 쓰러지는 안윤승의 어깨를 잡았다가 인상을 썼다. 솔직히 말해 그는 타인을 겁주기 쉬운 인상이었으므로, 윤승은 잠시 긴장했다.

“흠, 엉망이네.”

그러고 보면 꼴이 엉망이긴 했다. 몸에 두른 장비는 골렘에게 몇 번 가격당한 것만으로 걸레짝이 됐고,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얼굴이 피범벅일 테니.

윤승이 제 꼴을 상상하며 겨우 찡그리듯 웃는데, 남자가 안윤승의 어깨를 끌어당겨 제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어?”

그의 신경 말단을 헤집으며 날뛰던 마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 돌던 시야나 귀를 울리던 이명, 상처로 인한 것과는 궤가 다른 통증 따위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한참 동안 빙글빙글 돌다가 갑자기 멈추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우웨에엑.”

보통은 어지러워서 토한다.

안윤승은 생명의 은인 앞에서 오늘 먹은 음식을 자랑하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못 볼 꼴을 보였네요. 가이드 맞으시죠?”

“나 가이드 아닌데.”

그렇지만 분명 파장이 안정되는 걸 느꼈는데……. 윤승은 반박하는 대신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강한 센티넬일수록 가이드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가이드의 숫자는 항시 부족하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한참 부족한 업계 특성상, 신변의 안전을 이유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기에.

‘가이드라는 걸 밝히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테니 숨기고 계신가 봐.’

아니다.

남자의 헌터증에는 정확히 [F급 센티넬]이라고 쓰여 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푸르게 빛나는 게이트를 통과하자, 익숙한 야산의 풍경이 보였다. 전파가 통하는 외부로 나오자마자 안윤승의 휴대전화가 맹렬히 울리기 시작했는데, 얼결에 전화를 받자마자 실장이 말을 속사포로 쏟아냈다.

- 윤승아! 살아 있어? 협회랑 119에 연락해뒀어. 사람들 가고 있다고. 조금만 기다려!

도망친 팀원 중 한 명이 길드에 상황을 전했다는 모양이다. 안윤승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감이 깃들며, 나무에 기대어 선 몸을 주저앉혔다.

“들으셨어요? 저희 회사 사람들이…….”

들뜬 목소리로 돌아보던 윤승은 미처 말을 끝맺지 못했다. 자신을 구해준 남성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 * *

“윤승아. 그런데 꼭 이래야 했니?”

길드의 실장이 인터넷 신문 기사를 확인하며 한참을 씨근덕거리다가 테이블 앞으로 다가왔다. 답답해서 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그를 힐난하는 듯해서, 소파에 앉아 있던 안윤승이 움찔했다. 실장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그래.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골렘을 잡았다는 건 알겠어. 근데 넌 그 사람 이름도 모른다며. 골렘을 단신으로 잡을 만한 사람이라면 이 바닥에선 꽤 유명한 사람일 텐데 그 사람 인상착의를 들어도 안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너무 수상하잖아.”

신문 기사 제목에 화가 나기는 했지만, 안윤승을 부른 것은 비단 신문 기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장이 주목한 것은 그의 증언이었다.

골렘을 처치한 것은 내가 아니다, 익명의 누군가가 잡았으며 그분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겠다, 혹 인연이 닿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꼭 사례하고 싶다…….

안윤승의 인터뷰 내용은 거기까지였지만.

자신을 도와준 사람을 찾고 싶으니 도와달라며 실장에게 인상착의를 알려주었는데, 그 은인이 가이드란다.

“가이드인 것 같다며? 가이드가 어떻게 몬스터를 잡아.”

각성과 동시에 육체가 강화되는 센티넬과 달리 가이드는 마력 파장을 인지하고 관여할 수 있게 될 뿐, 신체 능력 자체는 일반인과 다르지 않다.

한때 ‘마력 파장을 다룰 수 있으니 마력을 근본으로 하는 던전 몬스터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 상당한 지지를 받았지만.

「……결론적으로, 가이드는 몬스터에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한들 일반인과도 같은 몸으로 몬스터와 접촉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크므로 실제 현장에서는 활용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고는 가이드가 몬스터와 접촉을 시도하다가 발생한 것이다.

해당 던전에는 공격계와 방어계 센티넬이 동행했다. 그곳은 두 센티넬이 충분히 클리어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나 가이드를 지키면서 그가 몬스터에게 접촉할 수 있도록 몬스터를 제압하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어려웠다.

물론 몬스터가 가이드를 해칠 수 없도록 센티넬이 저지할 수 있겠지만, 그 정도로 힘의 차이가 분명하다면 센티넬이 처치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지 않겠나.」

그것을 증명하고자 게이트에 입장했던 가이드가 시신으로 돌아오고, 동행한 센티넬의 인터뷰 이후 해당 주장에 대한 관심은 급속도로 시들해지고 말았다.

‘어쩌면 그게 틀린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어.’

안윤승 역시 당시에 고인이 된 가이드를 안타깝게 생각했을 뿐 지금까지 거의 잊고 있었는데, 이번에 자신을 구해준 남자를 생각하니 문득 그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떠오른 것이다.

“그냥 네가 골렘을 잡았다고 하지 그랬어.”

“죄송합니다. 실장님, 그래도 저는 저를 구해주신 분께 떳떳하고 싶어요.”

A급 헌터라고 해도 실패한 모습을 보이면 이미지에 타격을 입기도 한다, 너는 사소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평판들이 모이고 모여서 새 팀을 꾸릴 때 손해가 될 수 있다, 끈질기게 이어지는 회유에도 청년은 완고한 태도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네가 정 그렇다면, 알겠어. 한동안 푹 쉬고.”

안윤승은 꾸벅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문 너머로 한숨 소리가 들렸다.


구원

──아, 안 되는데.

의식이 수명이 다 된 형광등처럼 깜빡거렸다. 어쩌면 알맞은 표현인지도 모르지, 지난 육 년은 수명이 다 된 형광등에 억지로 전원을 연결해서 불을 켠 것과 다를 바 없는 시간이었으니까.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적어도 협회에 도착할 때까지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도 운전대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잠이 쏟아졌다. 정하성은 몇 번이고 눈을 치뜨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들인 노력에 비해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점차 길어지고 있었다.

그의 부작용은 신체의 고통보다 과수면과 불안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떤 이들은 상처로 인한 것과는 전혀 다른 통증을 겪는다지만, 정하성의 부작용은 일반적인 통증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낫지 않는 상처를 얻은 거라 생각하며 자신을 위안했다. 강렬한 통증은 때때로 정신의 날을 세우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하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하지만 그의 정신은.

육 년간 누적된 피로가 이 순간 하성의 정신을 짓이기고 있었다.

정하성은 동조율이 높은 가이드가 없어 비효율적인 안정화와 약물로 마력 파장을 억누르며 센티넬로 활약해 왔다. 각성 후 6년이 지났지만, 가이드의 숫자는 여전히 부족했고 그는 여타 센티넬과 달리 약물 사용에 반감을 갖지 않았으므로(포기했다는 표현이 옳겠다) 협회에서는 그에게 가이드를 붙여 비효율적인 안정화를 하기보다는 약물로써 마력 파장을 내리누르도록 권했다.

하지만 그런 방식도 이제는…… 정말로 한계를 맞이한 걸까?

공식 등록된 국내 가이드는 모두 테스트를 거쳤다. 동조율이 가장 높은 경우가 30%가 채 되지 않았다. 지금도 새로이 등록을 마친 가이드는 정하성과 테스트를 거치는 게 의례가 됐다.

가이드는 유한하며 또 귀한 자원이기에, 협회에서는 동조율이 75% 이상인 경우 해당 센티넬에게 가이드를 우선 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동조율이 낮으면 마력에 대한 장악력이 낮을 뿐만 아니라 가이드의 체력과 집중력도 빨리 떨어진다. 가이드는 특히 동조율이 낮은 센티넬을 안정화하고 나면 다른 센티넬을 봐줄 수 없게 된다.

정하성은 자신에게만 어떤 특혜가 주어져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더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자원을 저에게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효율이 떨어지더라도 가이드를 통해 안정화를 거쳐야 했을까?

모르겠다.

약물로 파장을 누르는 방식이… 이제 정말로 한계를 맞이한 걸까? 명료한 정신으로 생각해도 답을 알 수 없었으리라.

정하성은 운전대 위에 몸을 누인 채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운전을, 운전을 할 수 없으면 걸어가면 된다. 좀 뛰면 잠도 깨겠지. 그는 운전석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문손잡이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손이 번번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애를 먹었으니 차 열쇠 같은 걸 뽑을 정신조차 없었다.

남자 뺨을 치듯이 쓸어내리며 비척비척 걸었다.

폭주하면 안 돼.

시민에게 피해를 주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해.

의식을 날카롭게 벼리려고 악을 쓰는데도 정신은 모래처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무너졌다. 뇌를 잘 치대어 반죽하는 것 같다. 우습기는커녕 절박한데도, 정하성의 입가로 비실비실 웃음이 샜다.

주변을 밀어내듯 요동치는 마력에 길거리의 사람들이 놀라 자리를 피하는 줄도 모르는 채 남자는 협회로, 협회로… 그것만을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 * *

김기려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태평양인지 대서양인지 바다 한가운데 있는 게이트가  관리 부실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는 바람에 수입산 과일들이 한동안 금값이 됐다. 뉴스를 보니 인근 국가 사이에서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나 몰라라 했다나? 그 탓에 과일을 마지막으로 먹은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할 정도인데.

‘오렌지 샀다!’

던전 브레이크가 어째 잘 수습이 됐는지, 오늘은 마트에서 수입 과일 할인 행사를 하더라. 아싸.

한 손에 과일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가는 길인데 오늘따라 어째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이 많다. 그것도 사색이 되어 뒤를 힐끔힐끔 보면서.

‘뭔 일 있나?’

레드 게이트라면 긴급 재난 문자가 왔을 텐데,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게이트가 생겼다면 자신이 느끼지 못할 리 없었으니 그런 문제는 아닌 듯하고…….

아무래도 이쪽 방향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거대한 마력의 소유자가 원인인 것 같은데.

“오.”

살아 있는 생물의 마력 파장이 저 꼴이 될 수가 있구나. 내 고향에서 술사를 고문할 때도 저렇게 만들지는 못 했던 것 같은데(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다. 죽었을 테니), 신기하네. 마력을 접한 지 겨우 7년, 아직 마력에 완전히 적응하지 않은 생물이라 가능한 일인가? 하등해서 견딜 수 있다니, 이건 또 새로운걸.

그런데 걷는 꼴을 보니…… 살아 있기만 한 것 같지?

김기려는 아이스크림을 다 빨아먹고 남은 나무 막대를 버리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마땅히 쓰레기를 버릴 곳을 찾지 못해서 쩝. 입맛을 다시곤 귤 향이 남은 나무 막대를 입에 문 채 점차 가까워지는 남자를, 정확히는 엉망으로 뭉친 실타래 같은 마력을 응시했다.

이거, 지금 눈앞에 뭐가 있는지도 인식 못 하고 있네.

“어디 가?”

“……협회에.”

왜? 시민들이……. 그 사람들 다 도망갔다니까 그러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이 어깨 너머를 향한다. 협회에 가야 한다고, 폭주하면 안 된다고 중얼거리면서도 팔을 붙잡은 낯선 이를 뿌리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걷는 둥 마는 둥 하는 모습이 어째 멀지 않은 과거를 생각나게 해서.

나무 막대를 질겅질겅 씹으며 고민하기를 잠시, 그는 이 어리고 가엾은 포유류에게 온정을 베풀기로 했다.

김기려는 인근에 공원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못 미치는, 나무 몇 그루와 흐트러진 덤불과 벤치가 자리한 곳까지 남자를 이끌었다.

마력의 양을 보면 이곳에서는 꽤 높은 등급의 술사임이 분명하고, 그런 것들은 으레 신체가 단단하기 마련이지만… 아스팔트 바닥에 고꾸라지게 두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벤치에 오렌지로 가득 찬 비닐봉지를 얹어놓고, 눈을 끔뻑거리면서도 순순히 따라온 남자를 떠밀어 그 옆에 앉혔다.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는 그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성난 마력의 고삐를 잡아 달래기 시작했다.

……글쎄. 과거에 이만큼은 아니지만 엇비슷한 형태로 엉망인 녀석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는 마대병자였다. 마대병은 체내 마력이 제대로 조절되지 않고 끊임없이 몸 밖으로 에너지를 유출하는 질환으로, 그것이 불치의 병이라는 것이 아직 증명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그것을 치료하고자 여러 시도가 줄을 이었다. 마법을 아예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전쟁 시기가 되어야 겨우 쓸모를 평가받을 수 있는 존재. 평시에는 일상에서 주로 사용되는 사소한 마법 하나 부리지 못하는 장애인에 불과했으므로.

새는 마력을 틀어막아 몸속에 가두면 병증의 완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인위적으로 마력을 가두자, 나갈 길이 막힌 기운이 그의 안에서 한데 엉키며 육신을 공격했고, 곧 병자의 상태가 나빠졌다. 마대병자는 스스로 마력을 조절할 수 없고 그들을 연구하는 자들은 (나로서는 놀랍게도) 마력을 다루는 실력이 미천하여 앓는 병자를 내 앞에 데리고 왔더랬다. 하긴, 마력을 내키는 대로 섬세하게 움직이는 일에는 몇천 년을 통틀어 나를 따라올 자가 없기는 했다.

‘어쩌면 지구의 원시술사는 마대병자와 비슷한지도 모르겠어.’

헝클어진 마력을 한데 모으며 속삭였다. 실타래일 수는 없지, 내가 그렇게 여기지 않으니까. 그것은 파도처럼 바짝 솟아올랐다가 이내 뭉크러진다. 물이 되어도 좋다고 허락했으므로. 타인의 손안에서 합쳐지고 둥글게 모여든 마력이, 이내 순리에 알맞게 흘러내린다.

천천히, 남자의 뺨 위로 긴 물줄기가 흐른다.

“조바심을 내고 초조해하면 네 마력도 그걸 알아.”

사냥감이 아니라 사냥꾼이 돼야 한다고. 김기려는 이제 더 일어나려 들지 않는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곁에 둔 과일 봉지에 손가락을 걸었다.

“흠.”

잠깐의 고민 끝에 남자의 양손에 오렌지 한 알을 쥐여주었다.

“이만 집에 가야지.”

오렌지는 맨손으로 까먹기 불편한 과일이니까.


Lucky Unlucky

인근 국밥집은 엄청 맛있냐고 하면 그런 건 아닌데, 지구에 와 먹은 첫 끼니라서 그런가. 귤 맛 아이스크림처럼 의미 있는 음식이 돼놔서 특별히 먹고 싶은 게 없으면 종종 먹게 된다.

익숙하게 값을 치르고 계산대에 놓인 박하사탕 한 알을 문 채 가게를 나섰다. 오늘 아침 Seri가 간만에 미세먼지 수치가 ‘좋음’이고 산책하기 좋은 날씨라고 말해주기에,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끼며 잠시 지구의 계절 변화를 즐기다 들어갈 생각이었다.

몇 가지 신뢰할 만한 수단으로 얻은 정보를 조합하면, 마력을 감지할 수 있게 된 지구의 술사는 두 종류로 구분된다.

첫째, 체내에 마력을 저장하고 방출할 줄 아는 술사. 센티넬이라고 부른다.

둘째, 마력의 흐름을 제어할 줄 아는 술사. 가이드라고 부른다.

이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황당함을 느꼈다. 마도사는 체내 마력을 다스리는 동시에 그것을 매개로 마법을 실행하는 존재인데 이곳 술사들은 둘 중 하나만 할 줄 안단다.

‘이게 무슨 말이지?’

이건 뭐 반푼이 술사가 아닌가. 아니, 이래서는 반 푼도 못 된다. 센티넬은 일회용 건전지나 다름없고, 가이드는…… 그들은 애초에 마력이 없다!

그렇다면 이 반 푼 미만의 술사들은 대체 어떻게 마법을 구사하는가?

센티넬 각성자는 각성 순간 최소 1가지의 스킬을 익힌다고 한다.

스킬(Awakening Skills)이란 센티넬 각성자의 초능력을 이르는 대중적 표현으로, 각성자는 각성 순간 이 초능력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어렴풋하게 알게 된다고 한다.

쉽게 말해 마력을 깨우치면서 술식 한 가지를 얻은 셈인데, 센티넬 각성자가 체내 마력을 방출하면 이 술식이 발동한다.

다음, 능력을 충분히 사용한 뒤 마력 방출을 중단한다. 마력이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중 갑자기 통로를 닫으면 흐름을 타던 마력이 길을 잃고 서로 부딪치며 출렁거린다.

문제는 이 충돌이 술사의 체내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정상적인 마도사라면 통로를 닫으면서 마력이 충돌하지 않도록 그 흐름을 부드럽게 뒤틀 것이다. 그러나 이 일회용 건전지들은 마력을 다스릴 능력이 없어서, 마법을 쓴 뒤 체내에서 일어나는 마력 충돌을 견뎌야 한다.

간단한 마법이거나 마력을 적게 쓰는 경우라면 마력의 흐름 자체가 크고 강하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괜찮아지겠지만, 오랫동안 마력을 사용하거나 마력을 강하게 사용한 이후에는 그 여파 역시 강해진다.

차라리 마대병자가 낫지. 마대병자는 대체로 체내 마력량이 많고, 마력의 흐름을 조절하지 못할 뿐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알고 있으니 마법을 실행하지 않을 때는 몸 밖으로 마력을 흘려보낼 수 있으니까.

그러나 센티넬 각성자들은 가진 마력이 적고, 마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몰라 술식의 발동과 취소밖에는 하지 못하니…… 마력 충돌이라는, 내 고향에서는 어린애들도 겪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이러한 상태를 ‘마력 파장이 흐트러졌다’고 말하던데, 원시인 주제에 마력의 본질을 꽤 정확히 꿰뚫는 표현이다.

체내에서 마력이 충돌하는 것은, 그러니까 ‘마력 파장이 흐트러지는 것’은 마력량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위험하다.

센티넬 각성자는 단단한 신체를 갖게 된다. 뼈와 근육, 장기, 모세혈관의 끝, 하다못해 손톱이나 머리카락에까지 마력이 깃들어 육신을 강화한다. 여기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마도사가 마력으로 육체를 강화한다고 표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신체 강화는 마도사가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마력을 깨치고 체내에 마력이 자리 잡을 때, 자신의 그릇을 보호하고자 하는 마력의 성질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마력은 마도사의 전신에 간섭한다. 그것은 혈관을 흐르는 피와 다르지 않다. 아주 작고 날카로운 가시가 혈액에 섞여 있다면, (살아 있다는 가정하에) 피가 온몸 구석구석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동안 고통스럽겠지.

마력의 충돌이란 그런 것이다.

이제 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센티넬을 도울 가이드가 필요하다.

가이드의 역할은 센티넬의 안에서 요동치는 마력을 부드럽게 흐르도록 인도하는 것. 그 자신은 마력 한 줌 없어 일반인과 다름없지만, 마력을 가진 자와 접촉함으로써 타인의 마력을 움직일 수 있다.

이 과정을 요약하면.

센티넬이 마력을 방출하여 사용한다. (한 속성밖에 못 쓴다고 하는데, 각성하면서 얻게 된 술식을 통해서만 마법을 발현하기에 한 속성만 쓸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추정된다.)

쓸 만큼 썼으면 마력 방출을 멈춘다. 나가라고 터놨던 물길을 막아놨으니 센티넬의 체내 마력이 서로 부딪치면서 충돌이 일어난다.

가이드는 마력을 움직일 수 있다. 이들이 센티넬과 접촉하여 마력의 흐름을 인도함으로써 충돌을 해결한다.

괜찮아진 센티넬이 또다시 마력을 쓴다. 그러면 마력 충돌이…….

알파우리 맙소사. 한숨과 탄식이 번갈아 나온다.

그런데.

‘파장 간수 잘하네.’

지구에 온 이래로 마력 파장이 이토록 안정적인 각성자는 처음 봤다. 와, 이런 원시인들 사이에서 저렇게 안정적이라고? 청보라색 머리의 남성은 며칠 전에 만난 검은 머리 각성자와는 또 다른 의미로 감탄을 자아냈다.

마도학자나 마도사에게 잘 정돈된 마력은 미적으로 아름답다는 감상을 준다. 마력의 흐름은 해류와 닮은 데가 있어, 해양 일부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하는 것이다. 알파우리였다면 학술당에 막 입성한 아이들 수준이니 별 감흥이 없었겠으나, 이곳은 마력을 접한 지 십 년이 되지 않은 원시 행성.

그래봤자 내 부촉수 말단에도 못 미치는 실력이지만…….

김기려는 별생각 없이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기에 그 남성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는 건 알지 못했다. 그것이 불행의 신호였다는 것도.

* * *

센티넬이 가이드를 필요로 하는 것은 단순히 초능력을 쓸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대기에 마력이 존재하기에 시간이 지나면 체내 마력이 자연적으로 회복되고,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마력에는 파장이라고 부르는, 센티넬로서는 번거롭기 짝이 없는 특징이 있다.

마력 파장이 불안정해지면 어지럼이나 메스꺼움, 이명과 같은 증상에서부터 두통, 관절통, 전신통 등 다양한 신체의 고통, 불안이나 우울감, 무력감 같은 정신적 고통을 동반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존재하지 않는 신체 부위의 환상통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는데, 뭐…….

어지럼증이나 메스꺼움 정도면 괜찮지 않냐고?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일주일, 보름, 한 달 내내 멀미를 하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게 될걸. 

이런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가이드의 능력이다.

던전 쇼크 초기, 가이드로 발현하면 로또 맞은 거라는 말이 흔하던 시기가 있었다. 비유하자면 센티넬에게 있어 그들은 사막에서의 물 한 모금이나 지옥에 내려온 천사와도 같으니까. 구원자를 떠받들리라 기대하는 순진한 자들.

하긴, 당시에는 센티넬도 그들 자신을 잘 몰랐고 비각성자는 더더욱 센티넬에 대해 알지 못했다. 평온함에 절실한 센티넬이 얼마나 게걸스러워질 수 있는지. 허기와 갈망이 인간을 어디까지 떨어뜨리는지.

그러나 성경 속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었다고 이미 기록되어 있지 않던가?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린 센티넬 각성자의 가이드 대상 범죄가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일이 흔해져 이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지경이다. 게이트를 통해 괴수가 나타나며 급변하는 세상에서, 괴수를 처치할 수 있는 센티넬의 범죄에 얼마나 엄격하겠나? 인류의 화기로는 대적하기 수월찮은 미지의 괴수를 찢고 베는 존재를 일반 교도소에는 수감하기도 어렵거니와 그가 수감되지 않았다면 처치할 몬스터는 또 몇이나 되고? 뭇사람들은 사회 봉사활동으로 게이트를 클리어하면 되지 않느냐고 아우성이지만, 다 몰라서 하는 소리다. 애초에 마력 파장이 불안정해진 탓에 범죄자가 된 자들인걸.

여러 사정으로 범죄를 저질러도 ‘장기간 마력 파장이 불안정했음을 참작하여’ 따위의 이유로 가해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하는 세상이니 가이드로 발현한들 쉬쉬할밖에.

가이드의 수가 적어진 건 발현율이 낮아서가 아니라, 제 몸 하나 지킬 능력이 없는 주제에 타인이 탐내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가이드가 사용하는 능력의 원천에 대해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으나 많은 가이드가 안정화 이후에 주의력이나 집중력, 통제력과 같은 심리 에너지가 감소했다고 말한다. 다수의 센티넬과 동조율이 높고 안정화 효율이 좋은 가이드는 대체로 주의력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센티넬의 고통에 비하면 그 정도의 영향은 충분히 감수할 만하지 않은가?

많은 센티넬이 그렇게 생각했으며, 그들의 무력이 곧 권력으로 작용하여 센티넬 수의 삼 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가이드에게 더 많은 안정화를 요구했다.

그 결과, 가이드 사망률이 급증했다. 죽음의 이유? 놀랍게도 아사한 사례가 상당히 많았다. 일을 실행하는 데에 끈기가 부족해지고, 집중을 유지하기 어려워지는 등의 ‘사소하다’고 여겼던 영향으로 자기 자신을 챙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외에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등을 겪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지만…… 사인이 뭐 그리 중요할까? 중요한 것은, 가이드에게 안정화를 쥐어짜는 일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행동과 동일하다는 것.

연이은 죽음 이후 가이드의 정신적·육체적 건강 상태에 신경 쓰고, 심리치료 및 상담을 지원하게 되었지만 죽은 가이드는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이 죽어 나가니 여론이 좋았겠나? 괴수가 사람을 죽이는 건 무섭고 끔찍한 일이지만 그뿐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죽게 하는 건 비난이 따른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현재 국내 센티넬과 가이드의 비율은 1:0.32 정도로 가이드는 센티넬 수의 1/3밖에 되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가이드 수에 비해 센티넬이 3배가량 많다. 1:0.51로 가이드의 수가 센티넬의 반을 웃돌았던 던전 쇼크 초기에 비해 가이드의 수가 급감했다.

지금까지도 많은 센티넬이 충분한 수준의 안정화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각성자 협회는 물론이고 여러 길드 역시 가이드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새 가이드가 나타나면 앞다투어 좋은 조건을 제시해 데려간다.

양질의 가이드는 대개 각성자 협회와 거대 길드에 소속되어 있으며 중소 길드는 저등급의 가이드라도 있으면 다행인 지경으로, 각성자 협회의 지원을 받거나 거대 길드와 협력관계를 맺어 보유한 센티넬의 안정화를 꾀한다.

프리랜서 가이드? 가진 능력에 비해 과한 조건을 요구했던 가이드들은 죽거나, 다치거나, 실종되었으나 찾지 못했다. 이런 사정으로 양지에서 활동하는 가이드 대부분이 사전에 강한 센티넬의 보호를 약속받은 뒤​ 각성 검사를 거친다. 보호받지 못하는 가이드는 역설적으로 센티넬의 위험에 쉽게 노출되고, 담당 센티넬조차 없는 경우에는 안정화 할당량이 많아 업무 강도가 높다. 뭣도 모른 채 정석대로 각성 검사를 받은 가이드가 어떤 꼴이 되는지를 안다면 누구든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니 센티넬은 결국 협회나 길드에 소속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어디 가서 가이드를 구하겠는가? 음지에서 받을 수 있는 불법 안정화는 질이 떨어지고 위험성이 높은 주제에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 평생을 그러고 살 수는 없다.

평생을…….

강창호는 각성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가슴에서부터 척추로, 뼈를 타고 근육을 가로질러, 장기를 감싸고 모세혈관에까지 온몸으로 뻗어나가는 무형의 족쇄. 그것을…… 대체 어떻게 기꺼워할 수 있을까?

그는 센티넬이 되어 거들먹거리는 인사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앞으로 평생 가이드에게 목매며 살아야 하는 몸을 자랑스러워하다니, 제정신인가?

강창호는, 솔직히 말하자면 억울했다. 그에게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부와 권력이 있었다. 이런 괴상한 힘이나 그에 따라오는 권력 따위 원한 적도 없는데 어느 날 각성자가 되었다. 센티넬 각성자로서 의무를 갖고, 순위가 매겨지고,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비난받는다. 대체 왜?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지만 놀랍게도, 이 새로운 힘은 쓰지 않아도 닳는다. 온몸 곳곳에 녹아 있어 먹고 자고 삶을 사는 것만으로도 소모된다. 남자는 각성 후 운동량을 줄였다. 원래 사용하던 운동기구를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은 물론이고 운동을 통해 신체를 강화한 마력이 소모되었던 탓이다. 지켜본바, 일상생활을 하는 정도로 마력 파장이 엉망이 되지는 않았기에 잠시 안심했었다. 아주 잠시.

장기간 ‘안정화’라는 것을 받지 않으면 센티넬은 천천히 무너진다.

처음에는 속이 메스꺼웠다. 각성자가 되기 이전에도 병원과 친하지는 않았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병원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다. 위장 질환으로 유명한 의사를 셋 보고 힐러와 만날 약속을 잡을 즈음 이명이 시작됐다. 밤이면 실재하지 않는 소음으로 잠 못 들기 시작했다. 힐러 역시 아무 문제가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별수 없이? 

비관하며 돌아오는 길에는 교통사고가 났다. 센티넬이 되면 동체시력이나 반사신경이 훨씬 좋아진다. 달려오는 트럭이 비틀거리는 걸 보았고 충분히 핸들을 꺾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고 차량은 반파됐다.

119와 보험사를 부르는 난장판 속에서, 강창호는 제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며 헛웃음을 지었다. 몸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다치지는 않았지만 사고 덕분에 정신이 들었다. 메스꺼움이나 이명은 안정화를 받지 않아 발생한 문제일 것이다. 비관적인 사고조차 그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불쾌한 지점은 그것이다.

지금 나는, 명징한 정신으로 사고하고 있는가?

“병신 다 됐군.”

손으로 몇 차례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바닥에 닿는 얼굴의 감촉이 낯설었다.

인상이 좋다고 보기 어려운 남성이 대수롭지 않게 곁을 지나치는 순간, 강창호는 막 느낀 이질감에 걸음을 멈추었다. 신체 겉을 감싸고 있는 마력이 타인에 의해 움직였다.

……마력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가이드뿐.

찰나에 남자에 대한 인상착의를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염색한 금발, 삼백안에, 인상이 나쁘고, 싸구려 정장, 아마 20대로 추정되는 남성.

강창호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그날을 떠올렸다. 지긋지긋한 이명 사이로 먼 데서 울리는 구급차의 소리, 내 것이 아닌 듯한 감각과 반응이 정신과 유리된 육체, 고장 난 줄도 몰랐던 남자 자신까지.

그 불쾌감이 여전히 선명한데 어떻게 우연히 만난 행운을 놓칠 수 있겠는가?


이세계 착각 가이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면 그날이 떠올랐다. 의식이 거의 없었으므로 기억이 온전하지는 않았는데, 다만 단편적으로, 어떤 장면들만은 사진처럼 선명했다.

목적지가 분명했음에도 팔을 끌어당기는 힘에 조금도 저항하지 못했다. 어깨를 누르는 손에는 조금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는데, 반대로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상대의 의지에 반해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정하성이 어찌할 수 없는 마력이 낯선 규칙에 순종했다. 숨죽여 남자의 목소리를, 손짓을, 지시를 기다렸다.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하는 듯, 설레어하는 듯 기꺼이. 헝클어진 마력은 곧 물성物性을 바꾸어 세찬 파도가 되었다. 달이 바다를 부르는 것처럼 그가 파도를 끌어당겼다가 놓아주자 마력에 생기가 넘친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자, 이제 돌아가.’ 그들을 달래는, 성별을 가늠하기 힘든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연약한 바람이 뺨에 와 닿았다…… 피부가 얼어붙은 듯한 감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척에서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밤낮으로 귀를 울리는 지긋지긋한 소리가 없었다.

바람이 나무의 가지를 흔들고 풀과 흙의 냄새를 옮겨 주었다. 하성은 이제 숨을 들이쉬면 그것을 맡을 수 있는 것이다. 어두운 갈색으로 칠한 나무 벤치에 앉아 이제는 영 새것 같은 감각을 침착하게 받아들였다. 남자가 짐을 들었다. 마트 로고가 그려진 비닐봉지에는 오렌지가 가득했다. 그는 잠시 침음하더니 하성의 손에 오렌지를 쥐여주고 떠났다.

오렌지 향기가 낯설어 서러웠다.

정하성은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음을 알았다.

* * *

“폭주 직전이었다는 신고가 들어왔는데,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아서 협회 내에서도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만에 나타난 정하성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협회 관리자가 말끝을 흐렸다. ‘생각보다 멀쩡하시네요?’ 뭐 그런 얘길 하고 싶은 거겠지.

“어떻게 된 겁니까? 안정제를 추가로 받아 가신 기록이 없는데요.”

정하성은 소파에 앉아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우선 이번 폭주 신고는 보도되지 않도록 협회 측에서 차단했습니다. S급 센티넬이 폭주했다는 기사가 나면 큰일이니까요.”

협회 관리자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안정제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맞습니까?”

안정제는 마력 파장을 정체시킴으로써 부작용이 천천히 오게끔 작용할 뿐이니 폭주에 가까웠다면 안정제는 전혀 듣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고등급 가이드가 안정화를 시도했더라도 폭주를 막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그의 마력량은 S급 센티넬 평균보다 1.5배는 많고, 안정화 효율이 높은 고등급 가이드라 한들 동조율이 낮은 상대의 거대한 마력은 제어할 수 없다.

계속해서 무응답으로 일관하는 하성의 태도에 관리자는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소파에 앉은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헌터님, 방법이 있으면 써야지요. 헌터님의 상태는 협회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가이드가 나타나는 족족 헌터님과 가장 먼저 동조율을 확인했습니다. 다른 센티넬이면 몰라도, 헌터님이 폭주하면 솔직히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발 뻗고 잘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아시지 않습니까?”

정하성의 입매가 단단하게 다물렸다.

“혹시 동조율이 높은 가이드를…… 만나신 건가요?”

그는 침묵을 지켰다. 조바심이 든 협회 관리자가 몇 번 더 질문하고 채근했으나, “그만하시죠.” 정하성의 나지막한 경고에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만약 그렇다면 그분을 꼭…….” 마지막까지 미련 어린 말을 덧붙이며.

간략하게 보고를 마치고 돌아가는 정하성을 배웅하는 협회 관리자는 건강관리에 유의하시라 말하면서도 얼굴에서 심란함을 지우지 못했다.

하성이라고 마음이 복잡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날 그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떠났다. 물론 충분한 재력이 있다면 사소한 단서 몇 가지만으로 사람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마트 로고가 그려진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으니 해당 마트 인근에 거주하고 있을 것이고, 괴상한 수탉 캐릭터가 그려진 연두색 맨투맨을 태연히 입고 다니는 금발의 남성이 흔하지는 않을 테니까.

남성을 찾아내는 일은 쉬웠다. 하지만,

“저 가이드 아닙니다.”

“뭐라고요?”

“F급 센티넬이에요. 헌터증 보실래요?”

“하지만 그날…….”

“언제를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애초에 우리가 만난 적 있던가요?”

무표정으로 답하는 남자에게서 확고한 의지가 느껴져서, 정하성은 더 말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냥,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은인을 곤란하게 하려던 것은 아니다. 언감생심 가이드가 되어 달라 부탁할 생각도 없었다. 정하성은 던전 쇼크 초기에 각성한 센티넬로 그동안 많은 가이드를 보았고 그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잘 알았다. 동조율이 낮은 가이드에게 안정화를 받는 대신 약물을 고집하는 이유의 반 정도는 그 때문이었다.

남자는 더 보채지 않고 고개를 꾸벅 숙이는 하성을 물끄러미 보다가 사막처럼 건조한 목소리로 권했다.

“저는 그쪽이 말한 가이드는 아니지만, 오신 김에 차라도 한잔하고 가세요.”

질 좋은 녹차의 향기 때문일까? 차를 마시는 동안 하성은 자신의 마력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남자의 이름은 김기려, 형이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어봤는데 저보다 두 살 아래라고 한다.

정하성에게 기묘한 친분이 생겼다.

* * *

“이거 미안합니다. 운전이 오래간만이라 엑셀이랑 브레이크가 헷갈려서.”

형편없이 구겨진 빨간 스포츠카 운전석에서 어떤 남자가 느긋하게 내렸다. 짙은 청자색 머리카락, 그리고 까만 선글라스……. 택시 기사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저 사람을 알고 있다.

어제 국밥집 앞에서 본 그 각성자.

턱, 남자가 운전석 문을 닫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윽고 내 앞에서 멈춰서더니 말했다.

“안녕, 김기려 헌터. 합의하고 싶은데 연락처 좀 알려주겠어?”

미친놈인가?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미친놈을 미친놈 보듯 쳐다보고 있으니 곧 지갑에서 지폐를 몇 장 꺼내 택시 기사에게 쥐여주고 내게로 시선을 돌린다.

“나는 강창호라는 사람인데, 방금 현금을 다 써서. 네 치료비는 천천히 합의를 봐야 할 것 같거든.”

“제 이름은 어떻게 아시는지?”

“궁금해?”

그의 뺨이 움푹 패며 미소라는 것을 만들어 냈다. 분명 ‘웃는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김기려의 뇌가 위험 신호를 보냈다.

“아뇨.”

‘고작 번호 하나인데 뭐.’

휴대전화를 조작해 연락처를 입력하고 돌려주려는데, 내민 손을 강창호가 꽉 붙잡았다. 순간 맞닿은 손을 타고 전해지는 마력. 타인의 마력을 반사적으로 차단했다가 아차 싶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진해진다. ‘월척이네?’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

남자는 시치미를 뚝 떼고 휴대전화를 넘겨받더니 바로 전화를 걸어 내 번호가 맞는지 확인하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조만간 다시 보자고. ‘합의’를 봐야 하니까.”

아… 이거 X된 거 맞지?


저는 죄송하다고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고 괜찮아지는 것은 아님…)

덧붙여, 어쩌다 보니 이 책이 조금 남게 되었는데요.

정말로 위 내용이 전부이기 때문에 책을 갖는 의미는 없습니다만 표지가 귀여우니 갖고 싶으신 분이 있으시면 가져가셔서 제 부동산을 덜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트위터 계정으로 멘션이나 디엠 주시면 보내드리겠습니다.

뒷 내용은…

제가… 어떻게든 수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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