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 서술자

9월 첫 주, 일요일, 오후 3시 말살 알람

ㄹ님 실제 커미션 / 오마카세 / 위치즈하트 드림, 독백 및 캐해 성격 有

창포물 by 창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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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첫 주, 일요일, 오후 3시 말살 알람

 ㄹ님 실제 커미션 / 위치즈하트 간접 스포일러 포함

 

 

 

 

 

한낮. 한적한 공원 벤치에서 잠든 피어 위로 금색 볕뉘가 쏟아졌다. 늦여름의 따스한 오후였고 애시 브래들리는 제 동행인을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방법은 모른다. 이를테면 지금 이 자리를 떠나버려도 될 것이다. 앞으로의 행방은 정해지지 않은 고로 피어는 그의 뒤를 쫓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애시에 대해 수소문할 수도 있으니 아예 어딘가에 가두어버릴까. 알맞게 준비된 구덩이나 지하실 같은 건 당연히 없는데도 어쩐지 상상은 쉬웠다. 적당히 외진 곳에 감금하면 하루나 이틀쯤 지난 후 구출되겠지. 멀리 떨어지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만약 그래도 뒤쫓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애시는 조금 더 확실한 방법을 궁리해본다. 가장 확실하게 피어를 떨어트릴 수 있는……. 금색 눈동자가 휙 움직였다. 시선 끝에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심장께가 닿았다. 무심결에 소매 안의 나이프를 쥔다. 가장, 확실한. ……

이윽고 애시의 입에서 소리 없이 긴 숨이 흘러나왔다. 그를 따라 손에 들어갔던 힘이 빠진다. 아직은 나이프에 제대로 된 피를 묻혀본 적이 없었다.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하물며 고작 사람 하나와 결별하자고 죄악을 저지르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애시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저만치 눈길을 옮겼다. 단지, 모든 가능성을 고려할 만큼 그는 강렬한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저 사람을 시야에서 치워버리고 싶다는 충동. 결국 자신이 이행하지 않을―혹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하계의 선선한 날씨는 모든 게 평화롭다는 착각을 주곤 한다. 바람이 살랑댄다. 기분 좋은 정적이 이어진다. 그 완벽한 풍경 속에서는 사람조차 완벽해졌다. 피어의 낯빛에서는 어떤 불안이나 삭막함도 보이지 않았다. 꿈도 꾸지 않은 채 깊이 잠든 것 같았다. 불꽃, 차갑게 변해버린 존재들, 돌아올 길 없는 어제. 비극이 부재한 피어는 잔잔하다. 그리고 이 모든 평온을 애시는 문득 견딜 수 없었다. 일상의 온기 하나하나가 그를 숨 막히게 했다. 그는 차라리 피어가 껄끄럽기를 바랐다. 아니, 변하지 않기를 바랐다. 아주 달라져 버린 지금에 영원불멸 고정되었으면 한다. 변화란 으레 제 존재를 일깨우는 법이고 애시는 피어의 무게를 재정의하길 원하지 않았다.

피어, 란 인간은 이따금 형용하기 어려운 불쾌감이다. 겉보기에는 온건한 가족 흉내를 내고 있는데도 그랬다. 애시는 안다. 그는 과거 티 없던 애시 브래들리가 실재했음을 입증하는 유일한 증거였다. 피어에게 있어서의 애시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찬란한 행복의 편린. 그래서 더없이 귀중했고 분명히 유일했으며 또한, 기분이 나빴다. 애시 브래들리는 자기 자신이 깨끗하게 행복하기를 거부하는 결벽증 환자나 마찬가지다. 언젠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듯 웃으며 끝내 말해버린 적이 있다. 당신, 가끔 정말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러자 피어가 답했다. 알고 있어. 이어진 침묵은 이렇게 덧붙이는 듯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잔존하지. 죽지 못한 채로.

그날의 불길은 아름다운 것들을 모두 잡아먹고 사라졌다. 애시 브래들리는 오늘의 자신이 그 화마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아무리 아무것도 남지 않은 체해도 걸음걸음을 뗄 때마다 신발 밑창에서 떨어지는 불티를 자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재는 애시의 족적을 그대로 그려냈다. 저 가루 사이 어딘가에 지난날의 유해가 있다. 짓눌려 뭉개졌는데도 비늘 가루와 핏자국이 남은 나비 주검처럼, 으깨진 행복의 흔적들이 섞였다. 불씨로는 추억을 태우는 게 고작일 테니 처량하게 식는 열기만 늘어간다.

그러니 떠나지도 떠나보내지도 못한 채 남아있는 것이다. 그들이 서로의 곁에 머무는 건 그들이 생존한 이유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저 운 나쁘게 죽질 못해서. 사상누각과 함께 침몰하는 법만 알지 떠날 줄은 모르는 바람에. 보라, 피어는 여전히 살아 있다. 한 폭의 풍경화 같은 시공간 속에 건재하지 않는가. 그를 바라보는 애시의 손에는 아직도 차가운 나이프의 감촉이 맴돌았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저 심장에 마녀의 마음이 있다면, 그래서 확 도려내어 바친다면. 그럼 당신이 죽음으로써 나도 당신도 그들도 살아갈 수 있을 텐데. 그건 더없이 완벽한 과거로의 회귀가 될 것이다. 애시는 진심으로 그러기를 바랐다. 하지만 피어는 애시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다. 갈빗대를 들어내고 혈관을 파헤쳐봤자 저 안에 있는 건 나약한 인간의 마음뿐이다.

인간의 마음으로는 무엇을 할 수 있죠?

울고 웃을 수 있지. 어쩌면 사랑을 할 수도.

애시는 코웃음 친다. 그는 피어를 깨우지 않았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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