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지 않을 결말

放浪 by 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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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그어 2부 및 TFR 스포 포함.

Inspired - A Stranger

겸아, 내가 너 봐줬다.

늘 제 손에 감돌던 온기는 온데간데없이 손가락 틈으로 빠져나가는 바람은 사무치게 시렸고 코끝을 스치던 초목의 향을 뒤덮은 곳엔 비릿한 철내음이 만연했다. 상실을 말하자면 연륜 있는 세월이 아니었음에도 견딜 수 없는 공허함이 오랜 추억의 틈을 벌렸다. 습관처럼 추구했던 미래와 돌이키고자 했지만 결국 돌이킬 수 없던 과거들. 개중에 윤해주가 제 옆을 차지하는 비율을 셈하자면 이재겸에겐 꽤 난해한 사칙연산이었다. 홀로 딛고선 이 땅에선 특히나.

이재겸이 윤해주를 놓는 것이 먼저였을까, 아니면 윤해주가 손끝까지 전부 흩어져 버린 것이 먼저였을까. 재와 눈이 동시에 뒤덮인 바닥을 주먹으로 치는 바람에 피투성이가 된 이재겸의 손은 성하지 않은 몸을 일컫듯 덜덜 떨렸고 울 것 같이 벌게졌던 금색의 눈은 멍하니 주저앉아 윤해주가 남긴 유일을 바라보았다. 벌어진 사건의 타임 테이블을 나열하듯 다 허물어지는 건물을 감싸 크게 자란 거목이 드리워지는 빛을 받아 겨울의 색을 벗어던졌다. 역사에 기록될 영웅의 이름을 칭송하듯 채도 높은 녹색으로 선선하게 부는 공기를 따라 찬란하게 움직였다. 찾아오는 봄의 증명에도 살아남은 이들은 환영할 새도 없이 죽은 이들의 사해를 안고 비명을 지르거나 나란히 누운 손을 잡은 채 조용한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들의 가슴속에 오래오래 남을 편린들. 이재겸은 뒤돌아 그들을 고요하게 바라보았다. 느릿하게 감겼다 뜨이는 시선의 움직임을 따라 쥐었다 펴지는 손 안엔 안을 사람도, 잡을 손 같은 것도 존재하지 못했다. 예상 따위를 계산하지 않고 움직이는 이의 말로가 이런 것일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듯이.

그러니까, 뒤집힌 그날이 또다시 번복된 셈이다. 우리는 결국 서로를 이해하는 방식이 이런 것뿐이었던 걸까, 죽음을 짊어지던 윤해주의 발자국에 제 발자국을 맞추면 비슷한 것 같다가도 약간 더 작아 보이는 군화가 바닥을 더욱 짓누른다. 다 채워지지 못한 공백은 이재겸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윤해주만의 무던함이었을 것이고 후회하지 않을 가슴의 상처였을 것이었다. 뒤늦게 학습하고야 마는 이런 인내가 이재겸의 침묵 속에 녹아들었다.

“… … 씨발.”

그 적막 속에서 나지막하게 내뱉는 욕지거리는 결국 끝까지 참을 수 없었던 윤해주의 배려를 폄하하는 것과 다름없었겠지만.

“또라이 새끼. 봐준다는 말로 원하지도 않았던 걸 주고 지만 꺼지면 다냐고. 약속도 안 지키고, 진짜 미친 새끼.”

시선을 돌려 열 만한 입은 없고 움직임이라곤 바람 따라 약간씩 흔들리던 것이 전부였던 거목에 대고 하는 소리가 꼭 윤해주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불만스러웠다. 떨리던 손의 움직임은 잦아들어갔다. 고막을 메우던 타인의 슬픔 또한 페이드 아웃이 되어가며 비로소 눈물 속에 갇혀 있던 몸을 뱉어냈다. 이전처럼 곁에서 기다릴 필요가 없는 완연한 죽음이었다. 호소하며 윤해주에게 고했던 것들을 다시 주워 담는 듯 이재겸은 종잇장 같은 제 다리를 움직여 일어났다. 주춤거려 흐트러지는 자세를 바로 잡아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제 몰골을 훑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이라는 단어를 벗어나 수 없이 생과 사를 오가며 상기했던 버릇을 거슬러 올라가듯 이재겸은 제 가슴께를 꾹 눌렀다.

음울함의 바다 위에서 숨을 토해냈으나 한 번쯤 해볼 수 있는 생각들이 부유하며 이재겸의 머리통을 한 번씩 치고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다. 그때 윤해주를 보내줬더라면, 윤해주에게 선택지를 주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 더 나아가기 전에 그 옥상 밑으로 제 몸을 던졌더라면. 뒤늦게 더해지는 후회는 무덤 조차 될 수 없는 곳에 쌓여갔다. 꽃을 올릴 추모의 기회도 없었고 타들어가는 백골의 향기를 맡을 수도 없었다. 익숙한 통증을 느끼는 것처럼 이재겸은 거목 너머의 먼 풍경을 바라보았다. 황폐함을 담은 금색의 눈동자가 양광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 고맙다는 말 한마디는 해놓을 걸.”

버릇처럼 마지막을 상정하지 않음으로 속에 묵혀두는 문장들은 역한 내음을 풍겨댔다. 다 썩어 문드러진 후에야 건네는 솔직함이 전해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이재겸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다신 여기 오지 않을 거니까. 그래서 그래.”

“….”

“하, 뭔 미친 사람처럼 나무에 대고 이야기하고 있어…. 됐다.”

말풍선에 덧붙여지는 익숙한 말 따위가 없음을 다시금 체감하고 나서야 문드러진 손을 허공에 내저으며 이재겸은 뒤돌았다. 피가 굳어 떡진 검은 머리를 평소처럼 정리하고 쓰고 다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다 박살난 색안경을 구태여 제 콧등 위에 올리고선 무뎌진 성장통에 어깨를 으쓱였다. 윤해주가 줄곧 이야기하던 불변이 초석을 다지고선 나아가 변화해야 할 방향을 가리켰다. 유일을 등 지고 선 그림자는 맞추었던 갈색의 퍼즐 조각을 천천히 떼어냈다.

“내가 다시 돌아오면, 그땐 뭘 해도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있겠지. 그건 좀 어리석은 이재겸일지도 모르겠다.”

“… 근데 그럴 일 없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너도 이제 나 기다리지 마. 나무 말고 바람이 되어서 멀리 날아가, 해주야.”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나선 진정성 있는 부름에 응하듯 바람이 한 차례 더 불어왔다. 부는 바람 뒤로 출처 모를 꽃잎들이 나부꼈다. 사람들 틈으로 내려앉는 계절의 움직임이 새싹을 틔울 것이었다. 희생을 양분 삼아 자라나는 식물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최선이 되어줄 거라고, 낯선 외로움을 들이마신 뒤 이재겸은 한 발자국 내디뎠다. 아직 끝으로 명명할 수 없는 발돋움. 종교적인 의미를 내포한 윤회보단 이야기의 외전에 가까운 절대적인 인력. 동반자 없이 걸어갈 길을 무수하게 뒤돌아볼 이재겸이었지만, 이젠 제 등을 지켜볼, 지켜줄 이가 없다는 걸 알았기에 그것이 당연한 듯 얇은 등가죽을 달고 나아갔다.


“관리자님, … 그, 저번에 그분이 또….”

“….”

“저, 관리자님?”

“… … 아, 미안해요. 늘 하던 것처럼 이쪽으로 올려 보내요.”

그래서, 그로부터 세월은 얼마나 더 지났을까. 이젠 더 계산할 필요도 없이 아득한 과거를 문득 상기하면 심연에 침전된 것들 뿐이다. 어둑한 땅을 넓게 뒤덮는 건 숱한 절망들, 끝까지 지키지 못한 누군가들의 소중함, 맥없이 타올라 재조차 남지 못한 낭만의 유산. 불가항력 속에서 싸늘하게 식어가는 과거를 도려내고 이재겸이 돌아온 곳은 결국 선회하지 않으리라 여겼던 거목의 그림자 안이었다.

무가치하고,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이고, 비효율적인 일들. 꿈꾸는 것이 오히려 우스운 미래들. 단조로우나 가 닿기는 어렵던 희망과 행복들. 무수하게 붙은 수식어처럼 이젠 그런 것들이 사람을 살리지 못했다. 영원히 함께일 순간들은 없고 보고자 하는 햇빛 대신 또 다시 계속되는 엄동설한은 구축된 세계 속에 갇힌 채 지탱할 얼어붙은 영웅을 필요로 했다. 손끝에 감돌던 열기도, 바람이 불면 뒷목을 서늘하게 스치는 길이의 머리카락도, 늘 최선을 이야기하던 두 황금도 모두 버린 채 죽어가는 불꽃처럼, 이재겸은 숨을 죽이고 스포트라이트 위에 올랐다. 사람의 질긴 피부결이 아닌 철판들로 덧대어 모두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 따위 바랄 수 없는 평화의 무대.

가려진 반쪽짜리 눈으로 하여금 희미해진 빛이 복잡한 도시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감겼다 뜨였다. 꼬리처럼 물고 늘어지는 후회를 잘라내고 종국에 이재겸은 멈추어 섰다. 누군가의 인내를 모방하듯. 언젠가, 자신이 짊어진 짐을 돌려받기 위해 끝도 없이 뿌리 박아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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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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