赤
(*심리적 압박, 시선 집중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흑과 백 이외에는 존재할 수 없는 호랑이 굴에 새빨간 거짓이 굴러왔다. 거짓은 곧 배반의 대가를 치뤄야 했다.
시로토라 나기사는 본가에 가는 일이 드물다. 이전 지부에 있을 때에는 그를 극진하게도 생각하는 그의 부모님이 그의 곁을 맴돌았지만, 그들도 감히 이 넓은 바다를 쉬이 돌진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대신일까, 나기사에게는 언제나 수많은 편지가 도착했다. 그의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로부터, 고모로부터, 할아버지로부터, 당숙으로부터, … 평소 떠들썩한 가정을 부러워하던 모습과는 달리 그의 집에도 혈육은 넘쳐났다. 그 대궐같은 집에, 잉어가 있는 큰 연못과 아이들이 뛰어노는 넓은 잔디밭이 있는 그 집은 시로토라 집안 중에서도 가장 큰 집이었다. 분가의 사촌들은 명절 뿐 아니라 평소에도 이 큰 저택에 들락날락거렸고, 그럼에도 소음은 존재하지 않는 별난 집이었다. 아니, 어쩌면 소음은 존재했다. 그러나 그 소음에 무뎌진 나머지, 그 누구도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나기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걸 읽는 당신은 처음으로 앨리스가 타인에게 드러났던 날을 기억하는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겨졌다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를 것이다. 시로토라 나기사 역시 다를 것 없었다. 나기사는 한 번도 그 때를 잊은 적이 없다. 그는 방학 중 책상 위에 수북하게 쌓인 편지를 읽는 과정 속에서도 그 일을 잊은 적이 없다. 산더미 같은 편지 중 가장 얇고 빳빳한 종이를 발견하고선 손으로 집어든다. 하얀 고급 용지 위에 찍혀있는 것은 익숙한 호랑이 형태의 도장이다. 읽어보지 않아도 선명하다. 이것은 아버지의 편지다. 나기사는 웬일로 얇아진 편지 봉투를 의아하게 여기며 천천히 봉투 속에서 가지런하게 접힌 편지지를 꺼냈다. 기묘한 예감 속에 그 내용을 읽어나가며, 나기사는 처음 앨리스가 모두에게 드러났던 그 날을 떠올렸다.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던 7살의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몹시도 추운 겨울이었고, 창 밖으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기사는 친척이 모두 모인 큰 방의 가장 앞, 어머니의 옆 자리에 바르게 앉아 창 밖의 눈이 쌓이는 소리를 들으려 집중했다.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친척들이 모두 모인 이 중요한 자리에서는 자제해야 할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며, 두리번 거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린이 같은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들의 눈을 한 번에 마주하는 것은 좋지 않은 행동이다. 여기서 수 많은 사람들의 속 마음을 한 번에 읽었다가는 어지러워 쓰러지고 말테니까. 그러니 나기사는 손 끝에 힘을 주며 최선을 다해 참았다.
그리고 그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큰 문을 열고 시로토라의 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기사는 아버지를 반기기 보다는 열린 문 틈으로 잠시 보인 설원의 저택을 보며 설레었다. 이 지루한 시간이 끝나면 분가의 아이들을 모아 눈사람을 만들어야지. 가장 못 만든 눈사람은 삼촌에게 주어야겠다. 실없는 상상을 하며 다시 인내심을 키우고 있었다.
저녁 식사가 한창 무르익자, 삼촌이 일어나 아버지의 술잔에 술을 채웠다. 삼촌과 아버지는 함께 웃는다. 아버지가 큰 소리로 뭔가 좋은 말들을 외친다. 가족들은 전부 술잔을 들어올린다. 나기사는 모두가 뭐라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어머니가 술잔을 드니 옆에서 같이 물잔을 들었다. 그리고 어른들의 입에 술이 다시금 채워진다. 술기운에 기분이 좋아진 어른들은 각자 집안을 향한 덕담을 이어간다. 나기사는 이것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대충 번영하고,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삼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흥분한 목소리로 외친다.
“시로토라를 위하여!”
그리고 나기사는 그 한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거짓말.”
가족들의 이목이 나기사를 향한다. 나기사의 시선은 한 곳을 향한다. 나기사는 작은 손가락으로 삼촌을 가리킨다.
“새빨간 거짓말.”
수많은 백호의 시선이 한 곳을 향한다. 수많은 흰색의 시선이 새빨간 거짓을 바라본다. 삼촌은 나기사를 바라본다. 삼촌의 눈에 나기사가 비춰진다. 그것은 귀여운 조카가 아니었다. 숨겨진 진실을 모두 뱉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조카가 아니다. 그것은 호랑이었다. 나를 잡아먹으러 온 설산의 호랑이. 삼촌의 식은땀이 흐른다. 백호들은 여전히 그를 바라본다. 나기사도 그를 바라본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에 몰린다. 삼촌은 두려웠다. 도망가야했다. 그러나 이곳은 호랑이 굴이다. 미처 빠져나오기도 전에 모든 것이 흩어진다. 삼촌의 거짓은 곧 우두머리가 될 어린 백호의 발톱과 시선에 의해 갈갈이 찢어져 흩어진 살점처럼 그 곳에 드러난다.
안타깝게도 시로토라 나기사는 그 이후의 일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어른들은 곧바로 아이들을 큰 방에서 내보냈고, 어른들의 실랑이 소리는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소리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나기사는 곧바로 앨리스 학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호랑이 굴은 나기사를 부르고 있다. 나기사는 편지의 가장 마지막 줄을 읽었다.
삼촌이 널 보고 싶어해.
나기사는 편지를 도로 책상 위에 던졌다. 나기사는 이번 방학에도 본가에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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