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 속에서 신념을 지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영화 '서울의 봄' 스포 후기
알랭 드 보통 '불안'의 관점으로
영화 서울의 봄 스포후기입니다.
좋은 영화이며, 요즘 시국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만한 영화이니 한 번 보고 오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군중群衆: 수많은 사람.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끌어들여 집단적인 의사라는 것을 만들어 내고 마는 군중이라는 존재를 처음 내 눈으로 본 경험에 어리둥절해 있었다.
<<김승옥, 그와 나>>
어떤 동기 때문에 높은 지위를 구하려고 달려드는가? 정치적 이론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단어로 우리가 바라는 것을 요약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다. 사회적 위계에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를 바라는 것은 그곳에서 물질이나 권력보다는 사랑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돈, 명성, 영향력은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보다는 사랑의 상징으로서 -그리고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 더 중시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알랭 드 보통, 불안, 2012>>
사람은 모두 사랑받고 싶어한다. '모두'가 아니라 '사랑'이 중점인 문장이다. 누군가에게라도 사랑을 받고 싶어 필사적이고 어릴 때의 그 무조건적인 애정을 찾아 필사적으로 평생을 찾아헤맨다. 그러기 위해 권력을 탐하고 명예를 탐한다. 전두광의 속마음따위는 알고싶지 않지만 그를 따르는 군중들의 심리는 따져볼 만 하다. 그리고 그들을 따르지 않고 군중과 반대편에 서서 홀로 외롭게 서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그저 '멋있다'정도로만 끝날 것이 아니라, 이태신이라는 캐릭터와 실존인물이 어떤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명예와 할 일을 수행하였는지 우리는 제대로 기억하고 고뇌해봐야 한다.
인간이 속해있는 집단에서 배제당한 다는 것은 인간에겐 감정적으로 굉장한 고문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세상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존중이라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정의해볼 수 있다. 누가 우리한테 사랑을 보여주면 우리는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무시를 당하면 우리는 '울화와 무력한 절망감'을 견디지 못하고 차라리 고문을 당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윌리엄 제임스, 심리학의 원리, 1890, 재인용; 알랭 드 보통, 2012) 그리고 이태신이란 캐릭터는 왜 차라리 고문당하는 쪽을 선택했는가. (심지어 신체적-정서적 고문을 둘 다 당했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기 못하고 괴로워 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알랭 드 보통, 2012).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즉,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는대로 나 자신을 결정하게 된다. 동료 한 사람이 인사를 건성으로 하기만 해도, 연락을 했는데 아무런 답이 없기만 해도 우리 기분은 시커멓게 멍들어버린다. 누가 우리 이름을 기억해주고 과일 바구니라도 보내주면 갑자기 인생이란 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환희에 젖는다(알랭 드 보통, 2012). 이 말을 반대로 한다면, 간단하다. 내 인생에 어딘가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그 한 사람이 '나 자신'이어도 좋다) 내 신념을 긍정해준다면 우리는 인생을 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환희에 젖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태신은 그런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불행하게 권력을 탐했던 전두광과 군중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들과 달리, 아주 소수의 사람들의 긍정에도 자신의 인격을 신뢰할 수 있고, 그 인격에 따라 살 수 있는 성숙한 캐릭터인 것이다.
해당 글은 신념을 지키는 일이 이렇게 괴로운 일이니 그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었다는 옹호의 글이 아니다. 이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기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비겁함을 강하게 대비시킨다. 인간은 사랑을 원해 미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사랑을 기반으로 헌신할 수도 있는 존재이다. 그렇게 군중과 이태신이란 캐릭터가 갈리게 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착각하지만, 사람은 명예와 권력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저 사랑받고 싶어하고, 자유롭고 싶어한다. 자유로워도 혼나지 않고, 실수해도 혼나지 않을 그런 궁극적인 자유를 원하는 것이다. 막상 노예들은 자유를 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뭘 알지도 못하는 것들의 빌어먹을 말장난에 속아넘어가서는 안된다. 그들 내면의 진정한 자유를 찾을 기회와 시간조차 주지 않은 자들의 말을 들어서는 안된다.
지위와 관련된 근대의 이상에 대한 회의적인 불만의 한 줄기는 바로 이렇게 부에는 '품위'가 따라붙고 가난에는 '상스러움'이 따라붙는다는 생각을 겨냥하고 있다(알랭 드 보통, 2012). 사회적 위계 때문에 아무리 기분이 상하거나 난처해지더라도 우리는 그런 위계가 너무 뿌리가 깊고 너무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그 위계를 지탱하는 공동체나 신념을 바꾸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이런 위계가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하여 체념을 하고 그냥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알랭 드 보통, 2012).
정치적 관점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이다. 분석을 통하여 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밝혀 그 뇌관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어리둥절한 채, 우울한 표정으로 대응하던 태도를 버리고, 눈을 똑똑히 뜨고 그 원인과 결과를 계보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알랭 드 보통, 2012).
혼자만의 싸움은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그런 이태신을 보여주지 않았다. 실패한 싸움이고, 비극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을 걸고 싸우고 이태신에게 긍정하고, 이태신이 스스로를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이것이 이 영화에서 봐야하는 또 다른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 시대에서 살아갈 때, 내 신념을 고수할 때, 이런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단 한 명이라도 나를 긍정해준다면 우리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마지막 순간에 잘 모시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부하가 있고, 나를 믿고 다음을 부탁한다고 해주는 동료가 있다면 영원히 싸울 수 있는 것이다. 그 수의 상관없이, 그 존재자체 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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