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마 리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이 순간을 위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후기


이름이 많은 영화인지라 무엇이라 불러야 할 지 모르겠다고 생각했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라는 제목 자체도 너무 길지 않나? 한국어 제목을 붙이는 게 더 낫지 않나? 하고 생각 했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그럴 수가 없었겠구나 싶었다.

충분한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했겠지만 이 제목으로 충분하다. 모든 것, 모든 곳, 한꺼번에.

원래 영화 후기는 잘 쓰지 않고 짤막한 인스타 글로 남겨두는데 <에에올>은 왜 달랐을까? 별 이유는 없다. 나는 사랑과 다정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야기에 약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부질 없고 우리가 한낱 우주의 쓰레기, 먼지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에서도 위로를 얻을 수 있는데 여기서는 조금 비틀어서 보여준다. 

우리가 가진 다정함도 모두 의미 없는 거야. 애써도, 아무리 노력해도, 힘들여서 공을 들여도 결국은 부질 없는 거야. 그러니까 그냥 멋대로 굴면 안돼?

우리가 가진 다정은 너무나 나약하고 쉽게 부서진다. 그러니까 그걸 소중하게 간직하지 않으면 안된다. 무시하고 포기하는 것도 어렵지만 다정을 유지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원래 가치 있는 것일 수록 가지기 어렵고 그 가치는 평가 절하 되기 쉽다.

처음에 왜 남편, 웨이먼드 였을까? 생각했다. 주인공을 이끌어줄 사람이 남편이라니 너무 뻔한 거 아니야? 게다가 무술을 잘 하는 동양인이 쏟아지는 영화라니 우습다고 생각도 했는데... 감독은 다 생각이 있었다.

주인공 에블린은 남편 웨이먼드를 무시하고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유니버스에서 능력을 끌어와 쓰며 무술도 잘 하는 알파 웨이먼드와는 비교되는 심성이 착하고 부드럽고 유약해보이는, 나쁘게 말하면 소심해 보이는 사람. 쿠키와 장황하고 횡설수설하는 말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사람이라고. 그러나 결국 세상을 구하는 것은 수많은 유니버스, 세계들에서 웨이먼드가 포기하지 않은 하나의 전략, 다정이다.

힘 쎄고 멋진 알파 웨이먼드는 다른 유니버스의 힘을 끌어와 쓸 수 있는 능력을 알려 주었지만 결국 세상을 파멸로 이끌 조부 투파키를 막을 방법은 알지 못하고, 당연히 에블린에게 알려주지도 못하고 죽었다. 에블린에게 조부 투파키이자 허무와 공허에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 넣는, 사랑하는 딸인 조이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준 것은 아무런 능력도 없고 한심해 보이기까지 하는 남편 웨이먼드다. 다정함을 전략으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 한 없이 나약한 다정과 사랑을 가지고 있어서 이혼을 생각하면서도 아내의 아버지를 성심성의껏 돌보고 집안일을 돕고 여전히 에블린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모든 거절과 그 모든 실망이 당신을 여기로 이끌었어. 이 순간으로."

세계를 구하고 조부 투파키이자 조이인 딸을 구하는 에블린은 모든 유니버스에 단 유일하게 존재하는 한 명으로 그 어떤 세계보다 무능력하고 거절과 실패와 실망을 무수히 겪은 에블린이다. 그는 아무것도 제대로 해낼 줄 모르고 능력 없기 때문에 다른 세계의 능력을 끌어 쓸 수 있다. 그것이 원래는 불가능한, 개연성이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가장 위로가 되었다. 우리의 힘 없음을, 능력 없음을 빛나는 잠재력으로 불러주었기 때문에.

에블린은 딸의 타투, 여자친구, 태도, 말투,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고 둘은 비틀어진다. 에블린은 남편이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이혼이 코앞까지 다가오는 것도 모른다. 에블린은 아버지가 나이 많은 동양인 할아버지이기 때문에 딸 조이의 여자친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딸의 여자친구 벡키를 그저 친한 친구라고 소개해버리고 만다. 거기에서 생기는 수많은 비틀림은 그저 우리가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를 못해서 서로를 상처 주는 행위일 것이다. 그럼에도 에블린은 떠나는 딸에게 떠나라고 했다가도 가지 말라고 다시 붙잡는다. 에블린은 당연히도 세상을 부수어버릴 조부 투파키가 될 가능성이 있는 조이를 죽이지 못한다. 딸이니까. 소중한 사람이니까. 당연하다. 모든 비틀림은 칼을 들고 딸을 죽일까 고민하는 순간에서 스스로 테이프로 칭칭 감아 묶어버린 딸을 다시 풀어주는 행위로 풀어진다. 

어떻게 보면 에블린은 아주 평범한 사람이다. 세계를 구하는 것보다는 그냥 바닥에 누워 버리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에블린이 구하는 것은 세계가 아니고 사랑하는 딸 조부 투파키다. 조부 투파키 역시 세계를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허무를 끌어안고 자신을 이해해 줄 한 사람, 엄마인 에블린과 함께 죽기를 원할 뿐이다. 그래서 조부 투파키가 싫지 않았다. 살다 보면 그런 허무를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으니까. 우리의 공허와 허무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베이글이 둥글게 이어져 있고 블랙홀이 둥근 형태를 하고 있고 손과 손을 맞잡았다가 벌리면 그 사이로 생기는 구멍 역시 그렇다.

조부 투파키와 에블린이 손을 잡고 다시 그 사이를 벌리는 것은 관계에 대한 메타포라고 생각했다. 이어졌다가 비틀리며 생기는 그 간극에서 소중한 것들이 새어나가 버리는 것이 그렇게 느껴졌다. 베이글은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조부 투파키의 공허함을 대신하기에 충분하다. 그가 그 베이글 위에 쌓는 것은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소중한 것일 수도 있고 동시에 아무 의미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관점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조부 투파키에게 그것들은 너무 중요한 것들이었기 때문에 허무해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의미 없고 소중한 시간은 아주 짧게 이어지다 끊어진다. 우리는 그 짧은 한줌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다정해야 한다. 우리의 다정은 작고 약해서 짧게 이어지다 끊어지며 사라지기 때문에. 그렇기에 우리는 그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 반복이 인생이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덧붙이자면 우울증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특히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우울은 공허의 다른 이름이므로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는 모든 삶의 순간에서 공허 너머에 있는 한 순간의 소중한 시간을 붙잡으라고 말해주는 이 영화를 본다면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모든 세계에서 개연성 없는 일이란 사실 없을 지도 모른다. 손가락이 핫도그(?)인 세계도 있는데 무엇이 불가능할까. 우리는 어쩌면 다른 세계에서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에블린이 그가 싫어하는 동성애자인 세계에서 동성 세무관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는데 무엇이 불가능하단 말인가?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스스로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에에올>이 말해주는 '가능성', '다정', '위로' 를 모두가 느꼈으면 좋겠다.

가능하면 옆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꼭 껴안아주자. 세계의 충돌은 서로를 안아주는 것에서 시작하고, 충돌 이후에는 자신이 깨어지며 우리는 우리의 세계에서 더 나아갈 수 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후기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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