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웅
문틈 사이로 더운 바람이 새어들었다. 직각으로 내리꽂히던 햇살은 어느덧 기울은 지 오래였고 거리를 장식한 꽃과 나무 사이로 봄 특유의 산뜻한 향과 빛이 흩날렸다. 잔바람이 치맛자락을 간질이는 가운데, 둥그런 눈동자 안에 밝고 옅은 색채로 가득 찬 길거리가 담겼다. 곤란한 듯 얕게 숨을 흘린 여자가 꾹 쥐었던 손잡이를 놓고 베이지색 플로피햇을 고쳐 썼다.
그제야 다시금 열린 문에 남자의 시선이 모자에 가닿았다. 피곤하겠네. 언어를 통해 정제되지 않은 생각은 다시금 불어온 바람에 지워졌다. 바람이 길었다. 앞서 나간 여자의 긴 머리채며 사내가 걸친 코트 자락이 어지러이 흩날리며 가게에서 흘러나온 찬 공기를 품고 스러졌다. 가까스로 제 모자를 붙든 여자가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빙글 돌아섰다.
“당신이 후회하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는 그게 다예요. 아키토는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결국 시라미네 치유리는 그 말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두 사람을 이은 인연의 실이 언제까지고 이어지는 한, 그녀는 계속하여 반절뿐인 답안지를 들고 정답을 반추하게 되리라. “……아키쨩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워요.” 가게를 나서기 전의 여자는 그리 투덜거렸으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시라미네 치유리는 여전히 누군가의 선택에 제 욕심을 불어넣기를 두려워했고 그것은 설령 애정과 염려에서 비롯된 마음이라 하여도 마찬가지였다. 후회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그가 상처 입지 않기를 바라는 욕심이다. 한때는 동기 중에서도 유달리 강한 사내가 넘어지는 모습을 궁금해하기도 하였다. 허나 실상은 평소와 같은 탐구욕이 아닌, ‘저만 이리 아프게 넘어지는 것인가?’ 따위에서 피어난 이기심에 불과하다.
“어쩔까. 위로해줘?”
“……제가 그만큼 상심한 것처럼 보였나요? 당신이 이런 말도 하고...”
“뭐, 제법… 많이 상심한 것 같긴 해서.”
시간이 흘러, 시라미네 치유리가 간직한 상처는 딱지가 졌다. 그러니 이제는 충동보다 이성이 먼저 손을 들 때가 왔다. 그가 상처 입길 바라는 것은 답잖은 위로까지 건네주던 그에게 품어선 안 될 감정이라고. 우리의 상처나 고민은 그 섬들에 모두 두고 올 때가 왔노라고. 그러니 여자는 제 욕심을 차곡차곡 접어냈다.
‘하지만…… 뭐였을까요, 그거.’
좀처럼 말을 아낀 적 없던 제 동기를 곁눈질한 여자의 걸음이 잠시 느려졌다. 두 번 보채지 않은 덕인지 타니무라는 다시금 기회를 주진 않았다. 기실, 그의 성정을 미루어 보자면 알려주려거든 처음부터 알려주었을 테니 보챘다 하더라도 그가 답을 들려줄 일은 없었을 테다.
“…너네 집, 이쪽이었던가?”
“응? 아니요, 전 아키쨩 바래다주러 온 건데요~?”
“뭣 하러 그렇게 해. 네가 따라오는 게 더 귀찮은 거 알지.”
“또 못된 말 하죠…. 당신 보내고 나면 좀 더 놀다 갈 거예요”
못된 말이 아니라 맞는 말. 네 인지도를 생각해. 가볍게 핀잔을 준 타니무라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성실하게 질답을 이어가던 것이 오래전 이야기라도 되듯 문학청년 같은 낯 위로 설핏 귀찮은 기색이 스쳤다. “역시 종잡을 수 없네요.” 저 얼굴이 양순하게 느껴진다는 것이 가장 신기하다며 중얼거린 여자가 사내와 나란히 걸었다.
전광판의 광고, 도란도란 나누는 연인들의 대화와 까르르 터지는 높고 새된 웃음소리, 바삐 걸음을 옮기며 통화를 이어가는 사람들…. 번화가의 소음이 두 사람을 훑고 지나쳤다. “택시 탈 거예요?” “응, 갈아타기 귀찮아.” 오래 걷지 않아 금세 큰길에 다다른 사내의 발이 멈췄다.
“여기까지면 됐지? 너도 이만 가.”
“엑― 내쫓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아요!?”
“놀다 갈 거라고 한 건 네 쪽 아니었나….”
하긴 그것도 그렇죠.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선 시라미네가 빙그레 웃음을 그렸다. 둥그런 눈매가 휘어지는 것과 동시에 새벽밤처럼 반짝이던 눈동자가 모습을 감췄다.
“잘 가요, 아키쨩. 다음에 또 놀아요―!”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