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인과 변화

AKCU by 에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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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초롬한 눈꼬리가 부드러이 휘는 것과 동시에 오페라색 눈동자에 빛이 내려앉았다. “이번엔 만족할만한 대답이 됐어?” 두 사람의 질의응답이 끝날 때면 타니무라 아키토는 종종 이렇게 낯선 표정을 보여줄 때가 있었다.

 

기실, 시라미네 치유리는 그의 그런 미소는커녕 질의응답의 마무리 절차조차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했으니 그 미소에 담긴 규칙도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정반대 편에 서 있었으므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똑같지 않던가. 그러나 그렇게 웃는 타니무라 아키토는 퍽 행복해 보였으며 시라미네 치유리는 타인의 행복만으로 만족하고 살기로 결심한 인간이었다.

 

“아키쨩, 변했네요.”

“새삼스럽게. 음… 나도 사람인데 당연한 거 아닌가.”

“그것도 그렇지만…….”

 

“저는 우리 중에서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일 줄 알았어요.” 여상스레 말을 이은 여자가 손끝으로 유리잔을 두드렸다. 가지런히 정돈된 손톱이 경면에 닿을 때마다 맑은 음이 울려 퍼졌다.

 

만족했느냐고? 글쎄. 십여 년에 걸친 시간 동안 눈앞의 사내가 녹았듯 시라미네 치유리도 변했다. 열두 살의 시라미네 치유리였다면 애초에 잊혀지는 것을 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까지 극복해내는 게 사랑의 힘이라구―!” 같은 말도 안 되는 억지나 부렸겠지. 진정한 사랑과 입맞춤 한 번이면 모든 고난과 역경을 해결하는 것이 동화 아니던가.

 

열다섯의 시라미네 치유리는 “어렵기 때문에 값진 법이잖아요~? 진정한 사랑이 그렇게 쉬워야 되나요. 좀 더 꿈을 가져봐요!” 같은 소리를 하며 웃었을 것이고. 열아홉의 시라미네 치유리는 그의 대답을 곱씹으며 제 사랑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후회했겠지.

 

그리고 이제, 스물 다섯의 시라미네 치유리는 영원을 부정하되 그 마음만큼은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했다. 그것이 그녀가 아는 최선이자, 지금의 그녀가 짜낼 수 있는 최대한의 긍정이자 희망이었고. 어찌보자면 퍽 우스운 이야기였다. 꺾이고 부러진 파편을 그러모으고 나서야 그와 같은 결론을 내고 있으니.

 

“아키쨩이 변했기 때문에 우리가 같은 결론을 낸 걸까요, 아니면 제가 변했기 때문일까요?”

“글쎄.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인 이야기 아닌가. 너와 나, 둘 중 하나만 변한다는 건 불가능하잖아.”

“하긴. 당신을 로봇으로 만들 수도 없으니까요.”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지….”

 

다시 토옥. 유리잔 표면에 맺힌 물방울을 짓누른 여자가 헤실 웃었다. 그네들의 토론은 늘 이런 식이었다. 머리 아픈 이야기를 줄창 늘어놓아도 결국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늘하게 귀결되고 마는. 하지만 뭐 어떠랴. 그는 어떤지 몰라도, 시라미네 치유리에게는 이 정도가 딱 적당했다. 머리 아프고 어려운 이야기를 질색하는 것은 머리가 좀 굵어졌다고 해도 매한가지였다.

 

“있잖아요, 옛날에 했던 이야기 기억나요?”

“한 이야기가 많아서 그렇게 말하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그렇겠다며 키득거린 여자가 버릇처럼 가만 고개를 기울였다. 움직임에 따라 기다란 머리채가 고개를 타고 흘러내렸다.

 

“옛날에 저, 당신이 후회하게 될 때가 궁금해졌다고 했었는데.”

“………아, 그거.”

“잠깐, 방금 진짜 너무해! 기억 못 하고 있었죠, 그런 날 오면 말해주기로 해놓고.”

 

“그야 그때도 말했지만,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고 하지 않았나.” 곧장 이어진 타박에도 사내의 목소리는 심드렁하기만 했다. 5년 전, 그것도 스치듯 한 약속을 기억하는 쪽이 이상한 일이다. 하물며 실현 가능성이 1%에 수렴했다면 더더욱. “아무튼, 그래서?” 지루한 영화를 시청하는 것처럼 턱을 괸 타니무라가 한가로이 눈을 깜빡였다. 섬에서 벗어난 덕인지 봄볕 아래에 몸을 누인 고양이 같은 태도였다.

 

“아뇨, 뭐…. 그때는 그렇게 말했었는데,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뭐, 네 말 한마디에 내가 후회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상관은 없는데. 이제는 궁금하지 않기라도 해?”

 

날카로운 시선이 제비꽃색 눈동자에 가닿았다. 햇빛을 투과했음에도 선연한 극채색은 이제는 익숙해진 기억의 색이다. 아무리 지워내도 잊힐 것 같지 않은 여름의 향기, 별것 아닌 일에도 다 함께 까르르 웃던 목소리처럼 그것은 어떠한 각인에 가까웠다.

 

“아뇨, 그럴 리가 있나요.”

 

그래, 그러니 그의 말대로 시라미네 치유리는 다시금 기억해내리라. 그네들을 좋아하는 감정이 모두 녹아내리지 않는 이상은 쭉 그러할 테지. 여자가 품은 작은 바다를 설탕물로 만든 것은 그들이 아니었던가. 이 사실을 그녀 자신보다도, 대척점에 선 이가 한발 먼저 깨달았다는 것이 유쾌해져 얕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 인생에서 당신만큼 흥미로운 사람 찾기도 힘들 걸요.”

“그 흥미, 십 년 넘게 봤으면 가실 때도 되지 않았나.”

“또또또, 고운 얼굴에 못된 말을 하죠.”

 

당신도 계속 변하니까 흥미로운 거잖아요. 자연스레 책임 전가를 가한 여자가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긴 머리채가 손 틈 사이로 빠져나가며 아롱아롱 매달린 빛을 흩트렸다. “이대로면 10년 후에는 당신이 후회하는 것도 보여줄 것 같아서 한 말이에요.” “사람을 앞에 두고 악담을 하네.” “당신이야말로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하네요.” 이런 부류의 악담은 처음 들어본다며 중얼거리는 사내의 목소리는 가볍게 흘려넘긴 시라미네가 슬핏 눈을 휘었다.

 

“당신, 아닌 것 같으면서도 주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잖아요. 상대에게 곧잘 맞춰주려고 하고.”

“음? 뭐… 옛날에도 말했지만 번거롭거든. 바깥에서는 실수했을 때 되돌리기도 힘들고.”

“솔직히 저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을 때도 있는데요. 그쪽이 더 피곤하지 않나 싶어서?”

 

뭐, 그러니 당신이 후회하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는 그게 다예요. ‘아키토’는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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