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명명
애프터
길고 길었던 크레딧 끝에 영화관 안에 불이 들어왔다. 혹여 쿠키 영상이 있을까 싶어 숨을 죽이고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도 하나둘 떠나가는 가운데, 여즉 눈물을 훔치기 바쁜 동행인을 보던 남자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만 가자.”
“네에….”
짧은 응답과 함께 반쯤 비운 팝콘 통과 음료수를 챙겨 든 여자가 걸음을 옮겼다. 뭉그적거리던 것치고는 꽤 빠른 속도였다. 기실, 시라미네 치유리에게 있어 영화를 보고 운다는 것은 흔히 일어나던 일이다. 더군다나 운 것이 저 하나만도 아니었으니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었지만…….
흘끔, 눈을 굴린 여자가 제 머리보다 한 뼘쯤 위에 자리한 사내의 낯을 훑었다. 짙은 밤하늘 빛 머리칼은 조명을 받아 얼핏 새벽녘처럼 보였고, 기다란 속눈썹 아래로 자리한 오페라색 눈동자는 심해 속에서 마주한 등불처럼 선연히 빛났다.
타니무라 아키토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여자가 소녀 시절부터 극찬했을 정도로 정제된 미를 갖춘 이였다. 그러나 그 정갈한 낯 어디에도 물기라고는 존재치 않았다. 조명 탓인지 얼핏 창백하게도 보이는 얼굴 위로 옅게 드리운 피로나 곤란 따위는 제법, 그를 미처 언어로 정돈하지 못할 서글픈 감상이나 기구한 사연이라도 간직한 문학청년처럼 보이게 하였으나……
글쎄다? 그런 오해를 품기에 시라미네 치유리는 타니무라 아키토의 십여 년 넘은 동기였고, 나고 자란 동기가 무심한 성정을 가졌다는 것을 잊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영화 보고 났더니 지쳤나 보네요…….’
요컨대 저 수려한 얼굴을 보고도 이런 추측이나 했다는 것이다. 제 소속사 사람들이 보았으면 얼굴 밝히는 주제에 왜 이런 데선 감상적이지 못하냐, 신비주의 컨셉으로 가자, 당장 계약서를 가져오겠다느니 하는 설레발을 쳤겠지만―그들은 시라미네 치유리가 아이자와 유헤이와 친하다는 것을 안 이후부터 부쩍 그녀의 인간관계를 보석 밭처럼 보기 시작했다.―.
여하튼 시라미네는 조금 부끄러움을 느꼈을 지언정, 담담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의 의문을 떠올렸다.
아키토는 왜 하필 이 영화를 골랐을까요.
시라미네 치유리가 아는 타니무라 아키토는 누구보다 이방인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달나라에서 온 왕자님 같다고 해야 할까. 그도 사람이니만큼 희로애락을 느끼는 것은 분명했으나, 종종 타니무라 아키토는 숨 쉬는 방법이 ‘보편적인 기준’과 다른 것처럼 굴 때가 있었다. 혹은 타인에 비해 그 효율이 떨어지는 것 같기도 했고.
여자가 아는 타니무라 아키토는 인간관계 형성에 타인보다 쉬이 피로감을 느꼈고 애착 형성에는 많은 공을 들여야 가능했다. “아키쨩은 우리를 너무 좋아한다니까요.” 그러니 그의 삶에서 가장 공이 들어간 것은 섬에서 동고동락한 저희였으나, 그는 그네들에게조차 쉬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갑자기 웬 로맨스 영화예요? 아키쨩, 이런 데엔 관심 없잖아요.”
“그냥. 직장 동료들이 요즘 저 영화 얘기 많이 하길래.”
“직장 동료가? 듣다 보니 궁금해져서―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그거 중요한가요?”
“아닌 거 맞아. 직장 생활을 조용히 보내려면 투자가 필요하거든.”
그런 타니무라 아키토가 사회와 타협하며 살아간다는 선택을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심지어 가끔은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노력해가며. 대화하며 곤란해져 본 적이랄게 없던 여자에게 있어, 그의 삶은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이었다.
“어렸을 때 말이에요, 전 아키쨩이 음지의 해커 같은게 될 줄 알았어요.”
“너한테 나, 그렇게 수상한 이미지야?”
“성격은 전혀 안 수상한데 역시 포장지가….”
포장지라니 재밌는 평가네. 슬핏 웃은 타니무라의 손을 잡아챈 시라미네가 베시시 웃었다. 영화관 내부의 에어컨 덕인지 손바닥에 닿은 장갑의 감촉은 적당히 서늘했다.
“안 바쁘면 카페 갈까요? 딸기 라떼 사줄게요.”
가게를 소개한 자가 시라미네 치유리였으니만큼 두 사람이 찾은 카페는 그 특유의 취향대로 인테리어는 물론, 식기마저 몽글몽글한 디자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점심시간을 조금 넘긴 후였으므로 채 오래지 않아 휘핑크림이 듬뿍 얹어진 딸기 라떼 두 잔과 뉴욕 치즈케이크 두 조각이 테이블 위로 자리했다.
“아깐 왜 울었던 건데?”
예절샷이니 뭐니하며 사진을 찍는 여자를 두고 담담히 딸기 라떼를 맛본 타니무라가 눈을 깜빡였다. 음료에 대해 별다른 평가가 없는 것을 보니 입에 맞기는 한 모양이었다. 시라미네는 제 몫의 케이크를 한입 크기로 잘라내며 잠시 눈을 굴렸다. 말해봤자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데….
“아키쨩은 안 슬펐어요?”
“뭐가?”
“뭐가? 라고 해도…….”
솔직히 말하여 시라미네 치유리가 생각하기에 두 사람이 본 영화는 그렇게 특색 있는 영화는 아니었다.
라일락(Lilac)이라는 제목처럼 첫사랑과 그 이별에 대해 담고 있었다지만, 사실 그런 영화가 한둘은 아니지 않은가. 사랑하는 두 연인이 가치관 차이와 약간의 우연으로 인해 갈등을 빚다, 이윽고 오해를 해결하지만 두 사람의 미래와 꿈을 위해 사랑했던 마음, 추억 같은 것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담아두기로 약속하는.
흔하디흔한 클리셰 덩어리의 영화였지만 일단 주연 배우들의 연기력이 출중한 덕에 몰입이 쉬웠고, 감독이 원체 빛과 색을 사용한 몽환적인 미장센을 좋아하는지라 시각적인 만족감을 줬다. 원체부터 그런 취향이던 시라미네 치유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전에는 그 취향을 갖고도 호러, 스릴러, 고어 계통으로 눈을 돌려서 어쩌다 그렇게 된 거냐고 편지를 보내고 싶었는데….
“왜 말을 하다 말아.”
생각이 딴 길로 샌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곧장 작은 타박이 이어졌다. “미안해요, 잠깐 다른 생각을 했어요.” 사과의 뜻으로 잘라낸 케이크 조각을 그의 입에 들이민 여자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 서로 여전히 좋아하지만 헤어져야 했잖아요.”
“하지만 합의했잖아.”
“……아키쨩은 너무 삭막하다니까요.”
도대체 왜 저의 동기들은 유달리 삭막한 것인지. 이따금은 그들에게 한 톨 남은 감상마저 제가 흡수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피어올랐다. 쪼로록―. 한숨 대신 딸기 라떼를 들이킨 여자가 말을 골랐다.
“합의했으니까―로 끝날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감정은 남아있는걸요.”
“넌 내 앨리스가 뭔지 종종 잊는 것 같지 않아?”
“아니, 그건, 저기… 그 사람들한테는 타니무라 아키토 씨가 있진 않으니까…….”
이 이야기에 앨리스는 반칙 아닌가요. 있는 걸 쓰는 건데 반칙까지야. 아무튼요~! 할 말을 잃은 여자가 툴툴거리자 타니무라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학창 시절부터 종종 보아왔던 ‘별걸 다 우기네’라는 시선이었다.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타박을 알아들은 시라미네가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애초에 말이야.” 장갑에 뒤덮인 손이 투명한 유리잔 끝을 훑었다.
“잊었다면 겨우 그 정도의 가치였던거지.”
그 사람에 대한 사랑도, 기억도. 그답다면 다울 대답에 입술을 비쭉 내민 여자가 돌연 화풀이를 하듯 케이크 해체 쇼에 집중했다. “애초에 저는 쿠키 영상에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나길 바랐는데….” 뒤늦게야 펑펑 울면서도 꾸역꾸역 영화관에 붙어있던 이유를 듣게 된 사내의 눈동자에 얼핏 어이없다는 기색이 스쳤다.
“그랬으면 결말을 그렇게 내진 않았겠지.”
“역시 아키쨩, 너무 냉정하잖아요….”
“새삼스럽게. 나야말로 네가 말하는 게 이해가 안 가는데. 그래서 너는 어떤데?”
“정말 사랑한다면 잊을 수 없는지 말하는 거죠?”
“응, 그거.”
……저 머리 쓰는 거 못하는 거 알죠? 당신이 원하는 만큼 논리적으로 설명 못 해요.
으레 있던 질의응답 시간이 돌아왔음을 깨달은 시라미네가 포크를 내려놓고 눈을 굴렸다. 한순간의 기억이나 감정조차 줄곧 간직하고 그것을 보답받는 창작물과 달리 현실은 각박하다. 세상에는 수천, 수만 명의 인간이 있고 그네들이 품은 기억은 결국 그 사람만의 것이라 똑같은 추억조차 각자가 소중히 간직하는 파편, 감정 같은 것들은 저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기억은 태초부터 객관성을 잃은 채, 풍화되고 왜곡된다.
“뭐어…. 부정하고 싶지만, 아무리 사랑해도 시간이 지나면 퇴색되니까 잊을 수밖에 없죠.”
기억이 그렇다면 감정은 어떨까. 시라미네 치유리는 감정이야말로 인간을 움직이고 욕망케 하는, 가장 강력한 근원이라 여겼다. “순간이여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수 세기 동안 쌓아 올려진 창작물과 기술부터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을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발전시키는 것은 행운이나 희망이 아니라 누군가의 욕심이라고.
그러나 감정이라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여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풋풋하고 싱그러운 마음조차 꽃무릇이 저물 듯 작은 충격에도 스러지고 말았다. “사랑해주세요.” 이제는 흐려진 가족애를 떠올리던 제비꽃색 눈동자에 그늘이 졌다. 샛별이 진 뒤에 남은 것은 여명의 잔해다.
“욕심껏 말하자면 잊게 되더라도, 그리고 설령 잊히더라도 그 마음만큼은 의심하고 싶지 않아요. 사랑하고 사랑 받았던 기억, 그때의 기쁨 같은 것들은 진실이었을 거잖아요.”
진실이라 해도 사람은 계속해서 변하니까 영원히 같을 수는 없을 뿐이죠. 마음도, 기억도 그렇고. 사람을 의심하고 경계하라고 쉼 없이 가르침 받은 아이가 웃었다. 다년간의 경험과 토론 끝에 망각 앨리스의 가장 강력한 파훼는 ‘의심’임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일까.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야기인 거 알지?”
“물론이죠. 이렇게 말하지만, 솔직히 저도 못 지킬 때가 많은걸요.”
누군가 A라고 말했다면 그게 정말 A든, 실은 F든 간에 그냥 그걸 믿어주면 될 텐데. 낙관적인 상상을 이어가며 느릿하게 목을 축인 여자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마음이라는 건 0과 1로 이루어진 수식이 아니라 난처하죠.” 언젠가 했던 투정을 되새기듯 낭랑한 목소리가 똑같은 이야기를 담았다.
“그럼, 이제 제 차례죠?”
“……이거 차례도 있는 거였나.”
“없었지만 오늘은 있는 셈 쳐요. 정답보다는 당신 대답이 궁금한 거니까 답 안 해주면 의미가 없거든요.”
근데 귀찮으면 못 들은 척하고요. 보험약관처럼 길고 긴 만약의 경우를 읊는 모습에 타니무라의 고개가 가만 기울어졌다.
“내가 언제는 답 안 해줬다고. 그냥 물어봐.”
“아니, 그래도 이거 중요한 절차라고요. 혹시 모르잖아요. 아키쨩은 맨날 귀찮아하면서도 답해주긴 했지만…….”
“거봐. 넌 쓸데없는 것에 너무 집착하더라.”
“쓸데없다뇻……!”
크윽…. 침음을 삼키던 시라미네가 K.O 대신 라떼를 입에 담았다. 여자가 다시금 입을 뗀 것은 긴 유리잔 가득 담겨 있던 새빨간 음료가 반쯤 비워진 후였다.
“있죠, 아키쨩은 진정한 사랑의 존재를 믿어요? 있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사랑’의 기준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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