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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주인] 만우절

아쿠네코 유한x주인♀️

Scarlet by 스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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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순전한 호기심이었다. 상대에겐 얄궂다면 얄궂은, 그렇지만 자신이 차마 억누를 수 없었던 호기심. 항상 제게 다정하고 온화한 그녀의 담당 집사에게 정말로 그녀에 대한 호감이 한오라기만큼도 없는지. 그게 궁금했을 뿐이다. 만우절이라, 참으로 구실 좋은 핑계 아닌가. 이날을 만든 누군가도 분명 자신의 파렴치한 속내를 덮기 위해 그럴싸한 날을 만들었겠지.

"사실 너를 좋아해, 유한아."

그 날의 일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일어났다. 마치 날이 화창하단 이야기를 하듯, 주인의 고백은 그녀의 입에서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잔잔한 호수와 같던 유한의 차분한 표정은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누군가에게 돌팔매질을 당한 호수의 물결처럼 일렁이며 당혹스러움으로 번져갔다.

유한은 현명한 남자였다.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지만, 그는 그저 마른 입술을 뗐다가 다시 다물기를 반복할 뿐. 그가 말을 꺼낸 것은 할 말을 입 속에서 다듬고도 한참이 지나고 나서서였다.

"주인님, 제가 정말로 무례한 질문을 하고 있단 사실을 알지만..."

혹시 그건 만우절 거짓말입니까?

유한의 날카로운 질문에 주인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간다. 역시 통하지 않는 건가. 유한은 머리가 좋은 편이니까, 단박에 간파하리라 생각하긴 했지만.

"장난으로 들린 거야? 조금 섭섭한데... "

너무 쉽게 들키니 되려 괜히 오기가 생기지 않는가. 주인은 그가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녀의 얄팍한 수가 들키기도 전에, 주인은 입에 침 바를 새도 없이 새로운 거짓말로 빈틈을 덮어버렸다.

"아냐, 방금 한 말은 잊어줘. 만우절이니까."

깔깔 너스레를 떨곤 마치 부끄러운 소녀처럼 살짝 그의 시선을 피하며, 고백이 의도치 않게 튀어 나간 것처럼 곱게 포장하기까지. 평소 자신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큼 다정한 말을 듬뿍 쏟아내곤 잊어달라던 그의 말버릇까지 차용하니 제법 그럴싸하게 들린 모양이다. 동백꽃 꽃잎처럼 붉고 동그란 유한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으니까.

어디에 눈을 두어야 할지 몰라서 갈 곳 잃은 그의 검은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리자, 주인은 자신의 가느다란 손가락 뒤에 숨은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려는 것을 꾹 참아야 했다. 아, 방금 그건 내가 생각해도 명연기였지.

곤란해하는 유한에게 실은 전부 짓궂은 농담일 뿐이었단 사실을 알려줄까 싶던 찰나, 유한이 결연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제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곤 털썩 한쪽 무릎을 꿇어오는 바람에 주인은 그만 모든 게 장난이었다고 고백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거짓말인지 여쭤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감히 집사 주제에, 주인님의 호의를 조롱하려 할 의도가 없었다는 점을 부디 헤아려주십시오."

"아하하, 괜찮아..."

오늘은 만우절이잖아, 그리 말하려 했건만. 문장이 다 끝내기도 전에 유한이 깨지기 쉬운 물건을 다루듯 자기 손을 살며시 감싸오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눈치채기도 전에, 매일 저녁 꿀과 창포물로 잘 관리된 촉촉한 그의 입술이 주인의 첫손가락 마디에 닿았다. 갑작스레 손가락에 퍼지는 온기에, 주인의 미간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쪽, 가벼운 소리를 내면서 떨어진 그의 입술은 다음엔 그녀의 손가락 두 번째 마디로, 세 번째 마디로. 물기 어린 소리를 내며 주인의 손등과 손바닥에 마킹하듯 키스를 퍼붓는 유한의 행동에, 주인은 그대로 굳고 말았다.

"유한...?"

"저도 주인님께 구원받은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처음  뵌 그 순간부터... 주인님의 아름다움과 온화한 성품에 감히 당신을 마음에 품어왔습니다."

그리 말하며 고개를 든 유한과 마주쳤을 때, 주인은 자신의 장난이 어떤 결과를 불러온 건지 비로소 마주하고 말았다. 황홀경에 취한 듯 반쯤 풀린 유한의 눈은, 절대 만우절 장난 따위를 치고 있는 사람이 지을 표정이 아니었으니까. 만일 이것이 연기라면, 단언컨대 그는 악마 집사나 군인 따위가 아니라 극단의 간판 배우가 되어 마땅한 인물이리라.

그래도 어느 정도 심증이 있었기에 유한의 의중을 떠보려 했건만 - 유한이 예상보다 더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치고 들어오자, 주인은 열이 귀 끝까지 뜨겁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주인님도 저와 같은 마음임을 알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주인님. 아니, OO님... 유한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서서히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의 부드러운 섬섬옥수가 살며시 주인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진다. 평소의 충성 어린 그였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과감한 행동에 주인은 이것이 자신이 알던 유한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꿀이 떨어질 듯 다정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주인은 깨달았다. 사랑이 담긴 그의 눈동자가 이상하리만치 익숙하단 사실을.

왜 평소엔 몰랐을까. 그의 눈에선 언제나 이토록 애정이 넘쳤단 사실을. 이토록 시선만으로도 몸이 거미줄에 얽매일 듯 무거운 마음이 느껴지는데.

마치 심연처럼 자신을 빨아들이는 유한의 잿빛 눈동자에 사로잡힌 사이, 우아하되 절대 가늘지 않은 그의 단단한 손이 먹잇감을 가두는 뱀처럼 허리에 감겨온다. 저도 모르는 새 성큼 다가온 유한의 뜨거운 숨결이 바로 코 앞에서 느껴지자, 주인은 그제야 자신이 새끼고양이가 아니라 범을 갖고 놀려 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뒷일을 우려할 때가 아니었다. 주인은 그제야 목까지 차올랐던 한마디를 기어코 뱉고 말았다.

"만우절 농담이야...!"

그녀의 다급한 외침이 울려퍼지고, 그녀의 숨소리와 쿵쾅거리며 귀에 울리는 심장 소릴 제외한 모든 소음이 진공 속에 집어삼켜지듯 사라졌다. 숨 막힐 듯 이어지는 침묵에, 주인은 어찌 된 일인가 싶어 살며시 눈을 떴다.

언제나 도자기 인형처럼 매끈하고 태연자약한 얼굴로 사람들을 응대하던 유한이, 놀랍게도 귀는 물론이요 목까지 잔뜩 붉힌 채로 얼어붙은 게 아닌가.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에, 주인의 입에서 오. 감탄사가 흘러나오고 말았다. 태엽이 고장 난 병정 인형처럼 오도카니 서 있던 그는, 그녀의 감탄사를 기점으로 태엽이 역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처럼 절뚝절뚝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저기, 유한아..."

"죄송합니다, 주인님! 부디 방금 제가 한 말은 전부 잊어주시길...!"

진즉 거짓말이란 사실을 털어놓지 못한 자기 잘못도 있으니 괜찮다고 하려 했건만. 주인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유한은 깔끔한 단발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납작 엎드리며 용서를 빌어왔다. 고지식할 정도로 솔직한 행동이 우스우면서도 올곧은 게 참으로 그다워서, 숨 막힐 정도로 그녀를 무겁게 누르던 무안함이 순식간에 달아나버렸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잡아먹을 듯 다가오던 짐승 같던 남자는 대체 어디로 간 건지. 잠깐이나마 유한에게 긴장했던 자기 모습을 떠올리니 어쩐지 웃음을 참을 수 없어서,  그녀의 입술에서 김빠진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도 역시... 잊는 건 힘들지 않을까?"

플루레가 짠 드레스 아래로 가늘게 뻗은 다리를 삐딱하게 꼬며, 주인은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그녀의 말에 유한은 손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주인의 말대로다. 잊어달라는 부탁 하나로 자신이 한 행동을 잊기엔 그동안 주인을 상대로 꾹꾹 눌러담아 왔던 욕망을 너무나 진득이 드러내지 않았던가. 아무리 마음이 앞섰다지만 설마 자신이 이런 바보 같은 실책을 저지를 줄은. 평소 같았더라면 그 비범한 머리를 침착하게 굴려 제법 그럴싸한 대답을 내놓았을 텐데. 오늘만큼은 사안이 사안인지라 표백제를 들이부은 것 마냥 머릿속이 새하얗게만 느껴졌다.

주인은 입만 뻐끔거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유한을 내려다보며, 까딱까딱, 자신이 걸터앉은 의자의 팔걸이에 손가락을 두드렸다. 그러다 더는 안 되겠는지 지루한 침묵을 깨고 그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하던거, 마저 하지 않을래?"

... 방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건가? 유한이 바닥에 숙였던 고개를 들어 멍청한 표정으로 주인을 올려다보자, 주인이 유혹하듯 혀로 앵두 같은 입술을 날름 훑는 게 아닌가. 유한은 괴로운 듯 미간을 짚었다. 대체 주인님은 무슨 생각이신지. 왜 자신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건지. 도통 의도를 헤아릴 수 없어서, 주인님의 속 읽어내는 것보다 사르디스의 전장에서 적들의 움직임을 읽는 게 되려 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 송구스러운 질문이지만, 혹시 이번에도 거짓말입니까?"

"글쎄. 직접 확인해볼래? 내가 중간에 또 멈추나 안 멈추나..."

주인이 그 말을 뱉을 때 자신은 대체 무슨 표정을 지었더라.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손바닥에 멍이 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단 것이다. 유한이 그것을 깨달은 건 주인과 질척한 시간이 모두 끝나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 밑의 결제선은 채널에 문제가 생기거나 사라지더라도 작품을 영구 소장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만들어진 결제란입니다. 아래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소장본의 금액은 글자수에 맞춰 책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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