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라토주인] 길

아쿠네코 라토x주인♀️

Scarlet by 스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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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글에는 불쾌한 성적 추행 묘사가 있습니다. 열람 시 주의해주세요.



백발의 남성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 위에, 가지런히 긴 머리를 꼭꼭 땋아 묶어 내린 철쭉 색 머리칼의 청년이 바이올린으로 새로운 멜로디를 써넣는다. 품위는 없지만 고운 그의 몸짓처럼, 자유롭지만 멜로디의 큰 흐름을 끊지 않는 아름다운 기교다. 3층 건물이 들어서고도 남을 만큼 높은 천장의 댄스 홀에 두 사람의 연주가 생기를 불어넣자, 비로소 화려하게 치장한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들며 사교의 장을 이룬다. 주인은 수다를 떠는 사람들부터 멀리 떨어진 무대 바로 옆의 간이 의자에 앉아, 플루레가 작은 접시에 담아 가져다준 스펀지케이크 조각을 오물오물 입에 머금는다. 그녀의 시선은 무대에 올라선 두 집사에게 머문다.

꺼림칙하단 이유로 악마 집사들의 주인은 그동안 어떤 귀족에게도 초대장을 받지 못했지만, 오늘의 파티는 작은 귀족의 사교 파티였다. 아무래도 인원수를 맞추기엔 주최자의 인맥이 영 시원찮았던지라, 초대장을 받지 않은 이들도 쉬쉬하며 들여보내 준다는 모양이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미야지에게 전해 들었을 때, 딱히 참여하고 싶단 생각이 든 건 아니었다. 혹여나 실수라도 하면 집사들에게 민폐가 될 뿐이고, 귀족에게서 춤 신청이 들어오면 거절하지도 못 할 텐데.

"이번 파티에선 저도 연주에 참여합니다."

라토가 싱글벙글 웃으며 주인에게 말했을 때, 주인은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라토가? 그렇지만 라토는.."

평소 라토의 정서가 불안한 탓에, 미야지의 합주자 자리엔 언제나 플루레가 서지 않았던가. 차마 그 말을 당사자 앞에서 직접 할 수는 없어서, 주인은 말끝을 흐리는 대신 미야지에게 눈짓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주인 덕분에 최근 라토의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사람들 앞에서도 서도 괜찮을 거 같아. 그 파티는 라토의 첫 공식 무대가 될 거야."

한때 의사였던 미야지가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면, 정말 상태가 많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주인이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자, 라토는 평소처럼 음산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사실 주인님께 청이 하나 있는데, 라토와 함께 이번 파티에 동행해주지 않겠어? 주인이 함께 있어 준다면, 많은 인파 속에서도 라토가 혼란스러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미야지는 혼란스러워하지 않을 거라 돌려 말하긴 했지만, 주인은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정확히 읽어냈다. 자신이 그 자리에 동행한다면 라토도 귀족들 앞에서 돌발행동을 하진 않으리라. 자신과 함께 라토의 이중 안전장치가 되어주지 않겠느냐.

괜한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단 라토가 더 안정될 때까지 이 저택에 머무르는 게 낫지 않아? 그런 생각이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저번 파티에서도 집사들이 없는 저택에서 외롭게 플루레와 미야지를 배웅하던 라토를 떠올리자 어쩐지 가슴이 미어졌다. 라토도 한평생 저택에서만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잠시 고민하던 주인은 결국 미야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마침 연습무대가 아닌 실제로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하는 두 사람을 보고픈 참이었다.

그녀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평소 입는 셔츠마저 단추를 잠그지 않아 느슨히 가슴팍을 드러내고 다니던 라토가 무대 위에서 매끈히 정장을 차려입고  바이올린을 키는 모습은, 무대에 서는 게 처음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또 능숙했다. 주인도 어릴 적에 잠깐이나마 바이올린을 몇 개월뿐이지만 잠시나마 배워본 적 있었다. 자신이 잡았을 때는 쇳소리만 내던 악기가 굳은살과 흉터가 빼곡히 박힌 그의 투박한 손안에서 저리 아름다운 소리를 낼 줄 누가 알았을까.

'그동안 저택에서만 연주하느라 답답했겠다.'

주인은 홀린 듯이 홀린 듯이 무대를 바라보느라,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거기 계신 아름다우신 부인, 저와 한 곡 추시지 않겠습니까?"

주인은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다가온 남성을 올려다보았다. 기름기로 얼굴이 번질거리는, 두툼한 체형의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지금 나한테 지금 춤 신청을 한 건가? 척 봐도 조카뻘인 내게?'

원래 있던 세계에서 이런 일을 당했더라면 거리낌 없이 인상을 쓰며 불쾌감을 드러냈겠지만, 이게 추파를 던지는 건지 이쪽 세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인지 헷갈려서 섣불리 반응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상대방이 작업을 건다기보단 친절한 옆집 할아버지처럼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지라, 더욱 의중을 알기 힘들었다. 플루레가 있었더라면 요령 좋게 거절해줬을 텐데, 하필 그는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주인은 남자의 옷을 빠르게 스캔했다. 허리춤에 걸려있는 은색의 회중시계와 비단처럼 고운 그의 셔츠 원단을 보컨데, 분명 귀족이겠지. 거절하면 집사들이 곤란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신청을 받아들이겠다는 표시로 드레스 자락을 살짝 잡고 무릎을 굽히며 예를 표했다.

"... 잘 부탁합니다."

실크 면장갑에 싸인 남성의 손을 잡고, 주인은 남성의 리드를 따라 서서히 댄스 홀로 자리를 옮겼다. 긴장감 때문이었을까. 순간 댄스홀을 배우던 바이올린 소리가 멎은 것 같은데. 주인이 고개를 돌려 무대를 올려다보자, 거기엔 여전히 현 위로 자유로이 활시위를 놀리는 라토가 있었다. 주인과 눈이 마주치자 여유롭게 싱긋 웃는 그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니, 일순의 침묵이 자신의 착각이었단 사실을 깨달은 주인도 그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남성의 손이 그녀의 허리에 올려지고, 두 사람은 잔잔한 왈츠에 맞춰 느릿하게 스텝을 밟았다. 주인은 라토에게 배운 왈츠 스텝을 떠올리며, 연습 때 입으로 읊었던 구호를 속으로 셌다.

'할 수 있어. 하나둘 셋, 하나둘 셋.'

주인은 배운 그대로의 정박자 스텝을 밟았지만, 상대방이 자꾸 엇박자로 움직이는 탓에, 그의 불룩 튀어나온 배와 다리가 자꾸만 그녀의 몸을 스친다. 왈츠란 건 원래 이렇게 밀착해서 추는 거였나. 상대방의 몸짓이 조금 부담스러웠던 주인이 살짝 몸을 뒤로 빼려던 찰나, 허리에 얹혀있던 손바닥이 우악스럽게 드레스 위로 주인의 엉덩이를 움켜쥔다. 갑작스러운 추행에 주인도 얼굴을 구기며 상대방을 밀쳐내려던 찰나,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푸근히 웃고 있던 신사는 어디 갔는지 차게 가라앉은 그의 싸늘한 표정이 그녀를 압박한다. 그 한마디에 주인은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대체 당신이 누군데? 자신의 세계였다면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쏘아붙였으리라.

그러나 이 남자가 집사들의 직속 귀족인 그로브너 가문과 관련 있는 사람이라면?

혹시라도 자신의 무례로 집사들이 뒷감당을 떠안게 된다면?

이 순간 나만 잠깐만 참으면, 아무 일 없이 넘어갈 텐데.

그런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찬지라 주인은 홀에 깔려있던 바이올린 소리가 사라졌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누군가 두 사람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도.

쾅-!

바로 다음 순간, 바이올린이 날아와 눈앞에 있던 남성의 관자놀이에 부딪혀 박살 난다. 어찌나 세게 후려쳤는지 현의 줄이 모두 끊어져 사방으로 튕겨 나오고, 박살 난 파편이 댄스홀 한가운데 어지러이 흩어진다.

머리에 가해진 충격으로 중년 남성은 눈을 까뒤집으며 그대로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댄스 홀에 적막이 흐른다. 주인과 쓰러진 남자, 그리고 바이올린을 휘두른 이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쏠린다. 주인은 자신을 구하러 무대에서 내려온, 아름다운 난봉꾼을 올려다보았다.

참으로 이상하다. 그 남자가 자기 손목을 억세게 쥐고, 자기 엉덩이를 움켜쥘 때는 집사들 걱정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막상 사건이 터지고 나니 이상하게 시리 마음이 평안하다. 자신은 애초에 라토의 돌발행동을 막기 위해 이곳에 왔을 텐데, 이 휘몰아치는 해방감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쩐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웃고 있나? 전율로 광대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게 느껴졌으니까.

박살 난 바이올린의 목을 붙들고 있는 라토의 흉터투성이 손은 아직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저질렀다는 생각에 좀처럼 흥분감이 가질 않았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우리 속의 가둬진 맹수를 지켜보듯, 수많은 시선이 그에게 비수처럼 날아와 꽂힌다.

이제 어쩌면 좋지? 또 주인님을 곤란하게 해버렸어. 주인님을 볼 낯이 없어.

아아. 미야지 선생님. 선생님이 마련해주신 소중한 바이올린이...

그렇게 웅성거리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오로지 자기 심장 소리만이 쿵쿵 적막을 메운다. 마치 보름달이 뜬 그날 밤처럼. 미야지 선생님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더라. 진정하라고 했지.

그런데 진정은 어떻게 해야하는거지..?

생각의 소용돌이 속에서 라토의 의식이 옅어지려던 찰나, 그의 눈앞에 하얀 손이 내밀어졌다. 라토가 고개를 들자, 거기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맑게 웃는 주인이 서 있었다. 이 소란 속에서도, 그녀의 표정은 기이할 정도로 평온했다.

"구해줘서 고마워, 라토."

자, 이제 집에 갈까? 그리 말하는 주인을, 라토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주인님은, 제게 실망하지 않으신 건가요. 당연히 화가 났겠다고 생각했건만. 라토는 주인에게 무언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뻐끔거렸지만, 어쩐지 말이 목 안에 울컥거리려 나오질 않았다.

주인은 그런 라토의 손을 채어서, 두 손으로 꼭 붙들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진정해.

이번에는 내가 널 구해줄테니까.

맞닿은 손 너머로 전해지는 온기가 따스하다. 라토는 자신을 붙잡았던 주인의 손을 다시 제대로 쥐어 잡으며, 주인이 시키는 대로 차분히 숨을 들이쉰다.

"주인님..."

"피곤하지? 이 지긋지긋한 곳을 어서 빠져나가자."

이 난제 속에서 길을 제시하듯, 주인이 달콤히 속삭인다.

"나를 믿어. 이 파티는 구식만 갖춘 지방 귀족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파티라, 난동을 부린 이들을 잡을 경비대는커녕 일손조차 부족할 테니까."

그녀의 유혹하는 듯한 목소리에, 라토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 끌어당기는 손길에 이끌려, 라토는 주인을 따라 성큼성큼 출구까지 일직선으로 걸어 나갔다. 주인의 예상대로, 방관자들은 그 누구도 잡겠다며 나서지 않고 너무나도 손쉽게 난리 통을 빠져나가는 두 사람의 퇴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밑의 결제선은 채널에 문제가 생기거나 사라지더라도 작품을 영구 소장하고 싶은 분들을 위해 만들어진 결제란입니다. 아래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소장본의 금액은 글자수에 맞춰 책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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