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ndange
케이다이
케이아 x 다이루크
<일꾼 구함, 숙식 제공, 급여 협의 가능.>
간결한 홍보 문구 하단에 와이너리로 통하는 약도를 그려넣은 전단지가 몬드 거리 곳곳에 나붙었다. 가을 무렵 몬드의 성벽은 그 어느때보다 넘기 쉽다는 말이 있다. 출신이 확실하지 않은 외부인의 손까지 빌려써야 할 만큼, 농가며 과수원이며 할 것 없이 일손이 부족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몬드의 치안을 지키는 페보니우스 기사단의 책임도 막중해지는 때…여야… 하지 않나…?
“정말 괜찮은 거예요? 저분이 여기서 일해도?”
“안될 건 또 뭐 있어?”
새참을 전하러 온 어린 하녀의 눈이 노골적으로 한 사람을 향했다. 평소보다 단출한 옷차림의 남자가 좋게 말하면 목가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늙수그레한 농부나 쓸 법한 밀짚 모자를 눌러쓴 채 포도가 한가득 담긴 통을 옮기고 있었다. 이마며 등이며 땀투성이였으나 그의 얼굴에서 힘든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버드나무처럼 낭창낭창한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너무 대놓고 쳐다보지 마. 도련님 눈치가 얼마나 귀신 같은 줄 알아?”
감독관은 그렇게 주의를 주면서도 제 말이 통하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젊은 일꾼에게 신경이 쏠린 사람은 비단 그녀만이 아니었다.
‘요즘 주머니 사정이 많이 궁해서요. <천사의 몫> 앞에 달아놓은 외상도 갚고, 용돈도 좀 벌 겸.’
갓 뽑은 것처럼 깨끗한 전단지 한 장을 말아쥐고 다운 와이너리를 찾아온 남자는 언제나처럼 뜻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꾼들 면접을 진행하다가 예고 없이 그와 마주한 감독관은 할말을 잃었다. 어디부터 토를 달아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기병대장 씩이나 되는 양반이 돈이 궁하다고 과수원 일용직을 자처한다고? 정말 급전이 필요하다면 하녀장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면 그만이지 않나? 선대 라겐펜더가 세상을 뜨기 전부터 일찌감치 홀로서기에 나섰다지만— 케이아는 여전히 이 가문 사람이었다. 또 한 명의 라겐펜더가 홀연히 자취를 감춘 후에 그의 존재감은 한층 두드러졌다. 가문의 내부 사정을 모르는 몬드인들은 라겐펜더 가가 운영하던 사업의 경영권이 그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다이루크가 위임장을 하녀장 앞에 남겨뒀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밝혀진 뒤에도 그랬다.
그런 시선을 의식한 건지 업무 때문에 꼭 필요할 때가 아니고선 이 근처에 얼씬도 않던 사람이 갑자기 돈이 필요하다며 찾아왔으니, 꿍꿍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가 이제 와 가문의 재산을 탐낸다고 한들 비난할 이유는 없다. 기사들이 박봉을 받는다는 건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현실은 늘 낭만에 앞서는 법이다. 감독관의 보고를 들은 하녀장은 별다른 언질없이 그가 원하는 대로 일하게 두라고만 했다.
기사단 본부와 라겐펜더 저택에 버젓이 남아있는 자기 방을 두고 굳이 양조장 일꾼 숙소에 자리까지 잡은 케이아는 주어진 업무에 수월하게 적응했다. 알이 상하지 않게 포도를 따는 그의 솜씨는 스무해 넘게 일한 베테랑 못지 않았다.
클립스는 두 아들이 라겐펜더의 유서 깊은 가업에 대해 제대로 알고 또 이해하길 바랐다. 이 땅에서 난 것들이 너희를 먹이고 키웠음을 기억한다면, 언젠가 신념을 잃고 헤매는 날이 온대도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거다. 오늘의 기억이 너희의 뿌리가 되어줄 테니까. 어린 케이아는 그의 말이 정말로— 동화적이라고 생각했다.
감상이야 어쨌든 그는 양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몇 년간 꾸준히 양조 수업을 들었고, 독립 전에는 종종 실습 구실로 와이너리의 일을 도왔다. 보기 드문 경력자인 셈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지켜보는 사람들이 심란해하거나 말거나 케이아는 수확한 포도들을 창고로 옮기기 바빴다. 그가 창고에서 나왔을 때 마침 점심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사람들이 반색하며 천막 아래로 모여들었다. 작업 효율을 위해 아침과 저녁은 식당에서, 점심은 야외의 간이 쉼터에서 해결했다. 배식 줄이 천막 밖까지 길게 이어지는데 케이아는 울타리에 기대어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기만 했다. 통에서 슬쩍 골라낸 짓무른 포도 한 송이가 무척 달았다.
이윽고 마차 한 대가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 내려왔다. 운전석에는 마부와 콧등까지 모자를 푹 눌러쓴 사람 한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접객을 위해 나선 하녀와 모자를 쓴 사람 사이에 대화가 오갔다. 케이아가 있는 곳에선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입이 움직이는 것만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대화를 마친 하녀가 곧 돌아섰다. 그 얼굴엔 난처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케이아는 빈 포도 껍질과 앙상한 줄기를 흙바닥에 휙 던지고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배식된 음식을 채 몇 수저 뜨지 못하고 천막을 나온 감독관이 하녀에게 물었다.
“몇 년 산이든 상관 없으니 가장 비싼 술로 세 통 팔아 달래요.”
“참나, 우리 와인 가격이 얼만지나 알고 하는 소리래? 세 통? 모라를 수레 가득 싣고 와도 모자랄 판에….”
감독관이 마차를 눈짓했다. 짐칸은 방수천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바퀴 하단이 땅에 묻힌 정도로 봤을 때 많은 짐이 실려 있진 않은 듯 했다.
“하녀장님께 여쭤봐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자리에 안 계셔요…. 어쩌죠?”
“어렵게 생각할 필요 있나요? 적당한 품질 골라서 몇 통 더 얹어주면 될 것 같은데.”
케이아가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감독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와이너리의 신용을 떨어트리는 짓이에요, 도련님.”
“속이잔 게 아니라 설득하잔 얘기에요. 물건의 값어치를 알든 모르든, 여기까지 와인을 사러 찾아온 이상 엄연한 손님이잖아요?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건 예의가 아니죠.”
뭘 어떻게 설득하겠단 소린지…. 감독관과 하녀가 시선을 교환했다.
“저한테 맡겨줄래요?”
케이아는 회유하듯 물었지만, 누가 들어도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무언의 동의를 얻은 그가 고객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그럼에도 변화는 빠르고 명백했다. 케이아와 마주한 고객의 표정은 선명한 불신과 꺼림칙한 흥미를 거쳐 오묘한 미소로 마무리되었다. 내용물을 1/3 정도를 덜어낸 가죽 주머니가 케이아의 손으로 넘어왔다.
“235,000 모라예요. 한번 세어 봐요. 혹시 모르니까.”
감독관 앞으로 돌아와 모라 주머니를 던지듯 건넨 케이아가 하녀에게 지시했다.
“드리밍 다운 레드 블랜드 재고 있죠? 작년과 재작년 산으로 다섯 통. 거기다 그랑 리저브 한 병 곁들이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이러고도 사기가 아니라고? 감독관은 돈을 세다 말고 경악 어린 눈으로 케이아를 쳐다 보았다. 케이아는 어깨만 으쓱했다. 주문한 물건은 금세 준비되었다. 따로 챙긴 빈티지 와인의 라벨을 확인한 케이아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다녀올게요.”
“예?”
“외지인들이라 지름길도 모르고 빙 돌아온 모양인데 서비스하는 김에 제대로 해야죠.”
당연히 해야하는 일인 양 말하곤 짐칸에 올라타는 그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감독관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멀어지는 마차를 지켜보았다.
와인을 실은 마차가 샘물 마을을 지나 숲으로 진입했다. 숲을 가로지르는 길은 좀 험하긴 했지만 마차를 끌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참을 안으로 들어가자 허름한 외관의 2층짜리 산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케이아는 술들을 옮긴다는 구실로 산장 안을 일부 둘러볼 수 있었다. 뒷문을 통해 들어간 주방은 어수선했다. 인근 농가나 식당을 돌면서 구입한 게 분명한 음식과 과일 따위가 조리용 카운터에 쌓여 있었다. 그러나 화덕엔 불을 뗀 흔적이 전혀 없었다. 뒤따라 온 심부름꾼이 물건을 어디에 둬야하네 마네 하며 괜한 참견을 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케이아는 열린 창문과 주방 건너편 복도를 통해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는 몰라도 머릿수 정도는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넉넉잡아 스물. 산장 안팎으로 호위를 서는 녀석들까지 합치면 서른 남짓인가.’
최근 몬드 성 외부 농가들의 유통 경로에 눈에 띄는 변화가 보였다. 새로운 거래처가 나타났다는 뜻이었다. 성 밖에서 귀족들이 비공식적인 연회를 여는 일이야 심심찮게 있지만, 그런 경우는 유사한 패턴이 반복되기 때문에 파악하기 쉽다.
이번 회합을 주최한 자는 리월을 경유해 들어온 스네즈나야인 사업가였다. 동향끼리 은밀하게 모여 얼싸안고 외지 생활의 고됨을 토로하려 자리를 마련한 것이라면 정말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수확철을 맞이하기 전부터 몬드의 성벽은 허물어질 조짐을 보였다. 곳곳에 균열이 생겼고 쥐새끼들이 그 틈으로 끊임없이 들락거렸다. 벽 틈새에 구멍을 낸 건 밖에서 불어든 바람이 아니었다. 침식은 언제나 내부에서 시작된다.
숲을 빠져나가 신호를 보내면 정찰 중인 기사들이 지원을 보낼 것이다. 이곳에 모인 자들을 일망타진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그건 너무—
휙!
케이아는 제 뒤에서 날아든 단검을 가뿐히 피했다. 무게를 실어 돌려 찬 발에 목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심부름꾼이 소리도 못 내고 비틀거렸다. 카운터 위로 엎어지려는 몸을 얼른 붙잡았다. 심부름꾼은 그새 눈을 까뒤집고 의식을 잃었다. 케이아는 그를 바닥에 눕히고 바깥 기척을 살폈다. 마부는 호위를 서는 자들과 섞여 수다를 떠느라 이쪽 일은 완전히 잊은 눈치였다.
길 안내를 맡겼을 때부터 자신을 순순히 보내줄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본거지의 위치를 아는 외부인을 섣불리 보냈다가 꼬리를 잡히면 곤란할 테니까. 케이아는 재갈을 물리고 포박한 남자의 몸을 주방과 이어진 지하 저장고로 끌고 내려가 숨겼다. 그리고 복도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와 다른 입구를 찾았다.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한 덕에 몸을 숨기고 움직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벽을 타고 올라가 열린 창문을 통해 2층으로 들어갔다. 인기척과 목소리가 한층 가까워졌다.
술이 떨어졌다고 누군가를 꾸짖는 목소리, 유리 깨지는 소음, 경직되려는 분위기를 자연스레 무마한 익살과 잇따른 웃음, 서둘러 1층으로 뛰어내려가는 하인들의 발소리…….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쏟아져들어오는 정보들을 능숙하게 주워담으며 케이아는 방 안을 둘러 보았다. 오래된 침실이다. 회합을 준비한 누군가가 이곳을 생활공간으로 활용한 듯 보였다.
케이아의 발이 낡은 나무판자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는 동안 그는 조금의 기척도 내지 않았다. 역시 난 기사보다 도둑으로 일하는 편이 훨씬 적성에 맞는 것 같은데. 그는 버릇이나 다름없게 된 생각을 주워 섬기며 웃옷을 벗었다.
“почему так медленно?”
“Я думаю, было бы гораздо веселее пойти в переулок проституток.”
삼삼오오 모인 자들이 스네즈나야어로 무어라 투덜거렸다. 말투와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것이 무색하게, 자신들의 정체를 숨길 생각이 전혀 없는 눈치였다.
케이아는 와인잔을 든 채 난간에 기대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1층은 산장의 외관을 보고 가늠한 것보다 훨씬 넓었다. 와인을 서빙하는 사람들의 동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손님 대부분이 새로 들어온 술을 거절하지 않았다. 와인의 맛과 향기를 품평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위층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스네즈나야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몬드 주류 협회 소속이란 사실을 동네방네 알려야만 직성이 풀릴 모양이었다.
케이아는 정보들을 켜켜이 기록한 머릿속의 서고를 뒤적이며 귀에 익은 목소리의 정체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산미가 높고 타닌이 세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재작년에 출하한 와인이군. 다운 와이너리에 주문을 넣은 건가?”
고양이 가면을 쓴 자는 상델 가의 차남.
“그 해 라인업이 아주 치열했지. 이 물건도 2년만 일찍 나왔으면 적어도 은상 정도는 수상했을 텐데 말이야.”
개 가면을 걸치고 남색 옷을 입은 자는 노던록 와이너리의 장주,
“한 잔 더 마셔야겠어. 자네는….”
“난 됐네. 일할 때는 마시지 않아.”
“딱딱하게 굴기는.”
가장 뒤쪽에 선 남자,
저 자는…….
서고의 기록물을 뒤적이던 손도, 자연스럽던 호흡도, 좌중을 훑던 눈도 일순간 멈췄다.
케이아가 흐트러진 것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동물적인 감각을 타고난 자에겐 그 찰나도 치명적인 단서로 작용했다. 시선을 느낀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아무 장식 없는 검은 가면 너머의 눈은— 머리색과 같았다. 한껏 영글어 수확만을 기다리는 적포도의 빛깔. 먹먹한 비구름을 걷어내고 보는 사람의 눈을 시리도록 찔러대는 노을.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처럼 타오르는 불꽃. 폭우가 미친듯이 쏟아지던 그날과는 달리,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지난 4년간 케이아는 곧잘 이 순간을 상상했다. 우연이든, 우연으로 가장된 필연이든, 어떤 상황이 닥쳐도 당황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으면서 상대에게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너무나 쉽고 당연해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실제로도 그는 웃었다. 그러나 상상과는 많이 달랐다. 입매는 밀랍을 발라 굳힌 듯 뻣뻣하고 눈가는 미세하게 떨렸다. 가면을 쓰고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목례를 대신해 가볍게 들어올린 잔 속의 액체가 크게 찰랑거렸다. 잔물결 속의 반짝임이 그를 비웃는 듯 했다. 무시 당하겠지. 미소를 보내며 예상했다. 기병대장 자리도 와이너리도 라겐펜더 가의 사람들도 모조리 팽개치고 떠난 그날처럼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돌려 자신을 외면할 거라고.
그의 예상은 또 한 번 틀렸다. 상대는 그를 노려보듯 주시하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물러나.
케이아는 진짜 웃음이 작위적인 미소를 비집고 나와 터지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저런 점은 여전하다. 딱히 착한 동생 노릇을 한 기억이 없는데, 그는 어째서 자신이 그의 지시를 고분고분 따를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떤 제스쳐를 보이기도 전에 다이루크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케이아는 그 시선의 궤적을 집요하게 좇았다. 그 끝은 부리가 뾰족한 새 가면을 쓰고 두꺼운 코트를 걸친 거구의 남자에게 이르렀다. 이번 회합의 호스트였다.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듯, 사람들을 제껴가며 목표물에 접근하는 다이루크를 따라 케이아도 걸음을 옮겼다. 작은 심술이 케이아의 안에서 고개를 들었다. 클립스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다이루크는 대체로 친절하고 신사적으로 행동했지만, 타고난 무심함이 그 친절함을 무마해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독서나 검술 연습에 열중할 때의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 케이아는 그의 발치에 작은 돌을 던지거나, 랜턴의 유리 덮개를 돌려 불을 꺼버리는 식으로 그를 방해했다. 그가 한숨을 쉬고 어쩔 수 없단 표정을 지을 때까지.
단숨에 1층으로 내려가서 호스트에게 당신을 노리는 암살자가 있다고 고발해버리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당장 손에 든 잔을 실수인 척 떨어트려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다면……. 장난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위험한 발상들이 케이아의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 위험천만한 계획을 실천하기도 전에 예상 못한 방해꾼이 등장했다. 회장에 뛰어든 남자가 호스트에게 다가가더니 귓속말을 했다. 웃음을 머금고 있던 호스트의 입가가 굳는 것이 보였다. 그는 남자의 멱살을 틀어쥐었다가 던지듯 놓고는, 몸을 돌려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다이루크도 걸음을 재촉했지만, 주최자의 뒤로 진을 친 경호원들에게 떠밀린 사람들이 넘어지고 아우성을 치면서 길이 막혔다.
어디서 정보가 샌 거지? 초조함을 느낀 다이루크가 이를 악물었다. 불길하게 빛나는 붉은 사슬이 소매 밖으로 빠져나와 목표물을 겨눈 찰나에, 그와 어깨를 부딪힌 사람이 맥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쨍그랑!
그의 손에 들린 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그 파열음이 어떤 신호라도 된 듯이, 곳곳에서 사람들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변의 원인을 알아챈 누군가가 외쳤다.
“약이야! 누가 술에 약을 탄 거야…!”
회장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깨어있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경호원들은 그들 중에 침입자가 있으리라 확신하고 무기를 뽑았다. 다이루크도 더는 지체하지 않았다. 송곳니를 드러낸 뱀처럼 허공에 솟아오른 사슬들이 공기를 갈랐다. 사슬 끝은 경호원들의 팔목과 가슴 등의 급소를 정확히 겨냥했다. 대부분이 그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무기를 놓치거나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소음을 듣고 회장 안으로 들어오려던 자들의 앞으로 가파른 얼음벽이 솟아올랐다. 난간을 뛰어넘어 사뿐히 1층에 착지한 케이아가 용케 다이루크의 공격을 막아낸 경호원의 등을 검으로 베었다.
“회포를 풀기엔…”
“잡소린 나중에 해.”
부적절한 타이밍 같네. 케이아는 뚝 잘린 뒷말을 혀로 쓸며 도주자가 남긴 흔적을 따라 달렸다. 다이루크는 그보다 몇 걸음 앞서 달렸다. 산장을 벗어난 여러 개의 발자국은 말발굽 자국으로 바뀌었다. 아무리 다이루크라도 맨다리로 말이 뛰는 속도를 따라잡는 건 무리였다.
“수배령 내리면 금방 잡을 수 있어.”
다이루크는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휘이익! 휘파람을 불자 컴컴한 하늘 위로 매 울음소리가 응답처럼 길게 돌아왔다.
“그런 식으로 무작정 따라가는 건 시간낭비야!”
발에 용수철이라도 달린 건지, 점프 한 번에 어렵지 않게 나뭇가지 위에 발을 디딘 다이루크를 보며 케이아가 외쳤다. 다이루크는 잠깐 그를 돌아보았다. 너한테나 무리겠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다이루크의 실루엣은 순식간에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남겨진 케이아는 입안의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따라가려면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사고를 치는 사람이 있다면, 수습을 맡는 사람도 있어야 했다. 다이루크의 뒤를 보아줄 의무 같은 건 더 이상 없다. 정의감 넘치는 기병대장과 그의 보좌로 활동한 시절을 반복한다고 한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과거는 이미 무너졌다. 돌이킬 수 없다.
그렇다고 해도…….
“하.”
그는 마른 세수를 한 번 하고는 몸을 돌려 제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갔다.
다음날 오후, 느즈막히 다운 와이너리를 찾아온 케이아를 본 감독관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갑자기 그렇게 가버리시더니, 하루 꼬박 연락도 안 되고…. 저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기사단에 실종 신고하러 가야 하나 고민하느라 한숨도 못 잤다고요.”
“아— 미안해요, 임무라서 어쩔 수 없었어요. 내부 정보를 함부로 유출할 순 없잖아요.”
감독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케이아는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연신 사과했다. 진정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태도였다. 케이아는 라겐펜더 저택을 눈짓하며 물었다.
“다이루크 어르신은요? 돌아왔나요?”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알아야죠. 이렇게 보여도 명색이 기병대장인데.”
“…….”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의도적으로 와이너리에 들어온 건지, 어디서부터 알고 있었는지, 와인을 주문한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건지. 하지만 어떤 진실은 모르는 게 약이었다. 감독관은 케이아가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도련님 오시면 바로 들여보내라고 하셨어요. 서재에 계실 겁니다.”
“고마워요.”
케이아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라겐펜더 저택의 분위기는 어제와 다름없이 고요했지만, 그는 침묵 아래 깔린 들뜬 분위기를 느꼈다. 먼지 한 톨 없이 닦은 창문 너머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는 두 하녀의 얼굴이 밝았다. 라겐펜더 일가의 초상화 주위를 장식한 생화는 새벽에 갓 꺾은 듯 생생했다. 단 한 사람. 한 사람이 돌아왔을 뿐인데.
서재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란 답이 돌아왔다. 다이루크는 책상 앞에 앉아 문서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4년 넘게 쌓인 일감을 오늘 전부 처리하기라도 할 기세였다. 햇볕 아래 드러난 다이루크의 맨 얼굴은 당연하게도 과거와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성실하기도 하셔라. 케이아는 따분하단 생각으로 수런한 가슴을 가라앉히고 카우치에 앉았다.
“아델린한테 허락도 구하지 않고 와인을 팔았다면서.”
“잘도 그 거구를 성문에 매달아놨던데. 따라가서 잡는 것보다 그게 더 힘들었겠어.”
“산장에 모인 녀석들이 혐의를 인정하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했지? 하마터면 와이너리의 명성이 크게 실추될 뻔 했어.”
“그러는 넌 무슨 대책이라도 세우고 거길 처들어간 거야? 내가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으려고?”
“그랬다면 일이 훨씬 수월하게 풀렸겠지.”
“…….”
“…….”
두 사람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부딪혔다. 먼저 눈길을 거둔 것은 다이루크였다. 그는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넌 해고야. 네가 챙긴 빈티지 와인 한 병이면 급여는 충당하고도 남겠지.”
“인색하긴.”
“기사단에 항의하지 않는 걸 고맙게 생각해. …그리고 이 집 팔 거야. 남겨둔 가구나 소지품 중에 필요한 게 있다면 챙겨가.”
갑작스러운 선언에 케이아의 말문이 막혔다. 다이루크다웠다. 도피하듯 떠날 땐 언제고, 혼자 다 정리한 양 산뜻한 얼굴로 돌아와서는 멋대로 모든 걸 치워버리려고 드는 게. 달라진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새 무슨 사고를 쳐서 돈이 궁해졌냐고 비아냥댈 수도 있었고, 아무 관심도 없는 저택의 역사적 가치를 운운하며 물고 늘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을 하든 결과적으론 자해와 다를 게 없었다.
구역질이 날 것 같다. 케이아는 쓴 침을 바늘처럼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케이아가 떠난 뒤 다이루크는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포도밭 위를 휘돈 바람이 열린 창을 타고 들어와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무르익다 못해 곪아가는 과실의 단내가 책상 앞까지 훅 끼쳤다.
수확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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