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

개인작

A씨는 소소한 취미가 생겼다. 베란다 한 켠에서 산세베리아를 키우는 것. 개도 고양이도 아닌 화초를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물은 한달에 한번만 주셔도 충분해요. 영혼 없이 읊조리던 점원의 목소리. 그렇게 A씨는 옆자리 동료의 축하 선물을 사러 간 꽃집에서 사천 오백원짜리 조화 바구니와 오천원짜리 산세베리아 화분을 하나씩 사들고 나왔다.

화분을 사들였다고 해서 A씨가 그것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일은 없었다. A씨는 본래가 무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지겨운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칙칙한 집안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 하나가 그로 하여금 화초를 사들이게 만들었다. 집안에 약간의 생기가 추가된 후에도 A씨의 삶이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산세베리아는 말을 하지도, 움직임을 보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조금씩 조금씩 길이를 달리하는 것이 그것의 유일한 변화였다. 때에 따라 물을 주는 것만으로 알아서 자라나는 생명이란 얼마나 편리한가. A씨는 따로 산세베리아의 성장을 관찰하지 않았지만 집에 들어오는 날이 워낙 적었던 덕에 늘 풀포기가 부쩍부쩍 자란다 느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때처럼 느지막한 시간에 퇴근한 A씨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베란다 한 켠에 놓여있던 산세베리아가 사라진 것이다. 잘못 본 것일까 하는 생각에 급히 밖을 확인했으나 사라진 산세베리아가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화분은 남겨두고 화초만 사라지다니 희한한 일이다. 그리 생각한 A씨는 별 생각 없이 화분을 씻어 정리했다. 내일 아침 출근길에 내다 버릴 작정이었다.

A씨는 두 시가 다 되어서야 침대에 누웠다. 가끔씩 건드리는 방치형 게임의 밀린 보상을 받고, 이제는 이름도 희미해진 지인들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훑어보고, 쓸모없는 뉴스 기사를 훑어보고… 열없이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고 있던 중 똑똑, 하는 소리가 신경을 거슬렀다. 창문에 비둘기가 앉기라도 했나? A씨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욕지기를 뱉었다. 썩을놈의 비둘기 새끼. 그러나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한참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긴 한숨을 내쉰 A씨는 몸을 일으켰다. 역으로 창문을 두드려 비둘기를 쫓아낼 셈이었다.

그러나 막상 창가에 선 A씨는 황당함을 참지 못하고 어, 하는 소리를 뱉고야 말았다. 창가에 서 있는 것은 까마귀도 비둘기도 아닌 풀잎 몇 줄기였다. 그것도 꽤나 익숙한 모양새를 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사라진 산세베리아가 왜 침실 창틀엘 올라가 있단 말인가. 어쨌건 창밖에서 풀포기가 썩는 것 역시 비둘기가 똥을 싸지르는 것만큼 짜증스러운 일이리라 판단한 A씨는 창문을 열었다. 산세베리아를 밀어 떨어트릴 생각이었다.

…문을 너무 늦게 열어주는 것 아닌가요? 하마타면 얼어죽을 뻔 했잖아요. 산세베리아가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A씨는 눈을 굴렸다. 밤잠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피로가 쌓여있을 줄은 몰랐다. 지금이라도 휴대폰은 내려놓고 밀린 잠을 청하는 것이 좋을까. A씨가 딴청을 피우는 사이 점잔을 빼던 산세베리아는 조심스래 집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뿌리를 나풀대며 간신히 균형을 잡는 것도 걸음이라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비타민제가 다 떨어졌던가? 마그네슘과 칼슘제도 추가하고…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던 A씨는 그 희한한 작태를 감상하며 조용히 창문을 닫았다. A씨는 추위를 잘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산세베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짙은 녹색의 풀포기가 쉴새없이 사방으로 떨리고 있었다.

산세베리아는 힘없는 목소리로 노래하듯 읊조렸다. 당신이 나를 돌보는 동안 제대로 된 정보를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다는 건 참 통탄스러운 일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그 말에 A씨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천 원에 산세베리아 화분을 사온 이후 한 번도 식물을 기르는 방법에 대해 찾아본 일이 없었다. 그가 산세베리아를 구입한 이유는 한 달에 한 번만 물을 주어도 충분하다는 이야기 때문이었으니까. 때에 맞게 물을 주고 볕이 드는 장소에 화분을 놓아준 것만으로도 A씨는 자신의 소임을 충분히 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봐요. A씨. 우리는 추운 계절이 되면 휴면에 들어가고, 휴면 상태에서는 이전만큼의 물이 필요치 않게 돼요. 당신이 아무 생각 없이 뿌린 물 덕에 내 몸은 과습 상태가 되어버렸답니다. 말을 마친 산세베리아는 제 뿌리를 가리켜 보였다. 잿빛과 흑록빛 사이의 색을 띈 뿌리는 산세베리아의 움직임에 따라 힘없이 흐늘대었다. A씨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내가 뭘 어쩌길 바라는 거야? 산세베리아는 여전히 새침한 어조로 대꾸했다. 날 다시 화분에 담아줘요.

네 뿌리는 이미 썩었다고 하지 않았어? 맞아요. 하지만 그 화분은 내 세계나 다름없었으니까요. 흙은 필요 없으니 조심히 담아주세요.

A씨는 화분을 가져와 그 안에 산세베리아를 담았다. 스스로가 꽤 우습게 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의 아침 방송에서 한 의사가 하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수치심 대신 향상심을 가지세요. 당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부끄러움은 언젠가 그 이상의 부끄러움으로 갱신될 것입니다. A씨는 그 말에 제법 일리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산세베리아를 옮겨 담는 와중에도 꾸준히 그 이야기를 곱씹었다. 생각해보자면 고작 풀포기를 화분에 담는 것 가지고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마침내 화분 안에 안착한 산세베리아는 만족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날 창가로 옮겨줘요. A씨는 그렇게 했다.

내 뿌리는 이미 썩어버렸고 난 삽목 따위에 관심이 없어요. 이대로 날 밀어서 저 아래 풀밭에 떨어트려 주세요. 잡초의 양분으로 쓰이는 한이 있어도 서서히 말라죽어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일보다는 나을 테니까.

A씨는 그 말도 제법 일리가 있다고 느꼈다. 그는 가벼운 플라스틱 화분을 검지 손가락으로 밀어내었다. 산세베리아는 밤바람을 느끼기라도 하듯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원한 것도 제법 나쁘지 않네요.

그 말을 끝으로 오천 원짜리 산세베리아 화분은 아래로 떨어졌다. A씨는 창문을 닫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움직이는 산세베리아가 등장하는 꿈은 제법 우스운 감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다크써클 짙은 눈가를 비비며 집 밖으로 나온 A씨는 가만히 바닥을 응시했다. 길거리 하수구 위로 뒤집어진 플라스틱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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