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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작업물은 웹툰 <합법 해적 파르페> 등장인물을 기반으로 작업한 2차 창작물임을 밝힙니다.
바다란 무엇인가.
이 땅의 심장이며 핏줄, 먹어 치우는 아귀이며 아주 멀리 동떨어진 눈썹을 빗지 못하는 절대자. 그 언제 날름거리는 혀를 내밀어 뭇 위대한 탐험선들의 닻을 잘게 부수어 먹고는 하는 배고픈 여인. 살아 있게 될 것들과 살아 있었던 것들의 영원한 동산. 흘러내리는 뺨과 손톱이 붙어 있는 계절 없는 계절. 즉 불가해의 고장이며 만물의 무덤이라.
벨 선장은 변덕스러운 어린 아가씨처럼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 대며 끈질기게 선체에 달라붙어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다. 그의 삼십 년이 조금 넘는 해양 생활에서 얻은 교훈과 법칙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역행하지 않을 것. 이 바다가 등 위 벼룩과 다르지 않은 나의 존재를 포착하게 하지 않고 쥐 죽은 듯 돛을 펼쳐 흘러내릴 것. 숨죽인 채 잘 기다리다가 보면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드넓게 펼쳐진 고요한 망망대해로 뱉어질 것이다. 결론만 내놓고 보면 역시나 이번에도 벨 선장의 어머니를 향한 행실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때로 ‘가만히 있기’라는 것은 선택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저절로’, 자연의 이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벨 선장은 이 들끓는 죽음의 무덤들이 그중 후자를 유도하고 있음을 안다.
산딸기 호가 접어든 이 섬은 바닷길과 연결되는 강줄기의 폭이 무척이나 좁고 바위가 많으며 나무가 낮고 앙상하다.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 아래에는 검고 푸른 심해가 아니라 녹색의, 그리고 이상하게도 잘못 포장된 선물처럼 번쩍번쩍 빛나는 은색의 심해가 끓어오르고 있다. 이곳은 바다의 종양, 영원히 낫지 않는 바다의 상처. 그리고 이제 배는 완전히 멈추었다. 선장이 달콤한 단잠에 빠져 있었을 바로 그 무렵에 항해사는 지도를 거꾸로 든 채로 열심히 항진해 바로 이 안개가 짙고 바다가 늪처럼 높은 점도를 자랑하며 배를 야금야금 먹어 치우고 있는 섬의 입속으로 뛰어들었다. 애석하게도 일이 그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달콤한 단잠 끝에 영원한 잠과 다르지 않은 섬으로 입항하다니, 몹시 신비롭고 불행한 인과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란 원래 그렇다. 그 일로 인하여 갑판에는 구멍이 세 개 뚫렸고, 갑판을 뚫고 지나간 총알 중 딱 하나는 그뿐 아니라 벨 선장의 망토도 꿰뚫고 지나갔다. 도결문이 쏜 총의 궤적이다. 그러나 분노는 이미 지나갔으며 도결문은 여기 벨과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서서 스며들기 시작하는 바닷물을 지켜보고 있다. 벨 선장은 점도 높은 바다가 울렁울렁 파도 비슷한 들썩거리는 것을 느낀다. 이 묵직하고 잘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물이 몸을 풀어댈 때마다 배도 함께 들썩거리며 한 움큼씩 파먹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곧이다. 아! 이제 곧 위대한 산딸기 호의 선장과 그 선원들은 (그리고 슬프게도 이 멍청함에 빚지지 않고 있는 중앙 관리국의 도결문 또한) 배를 타고 들어온 그대로, 이 모습 그대로 바다에 머리끝까지 잠길 것이다.
다만 천만다행인 것은 벨 선장이 이 섬에 대해 (지난번의 여행과는 달리)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죽은 것, 죽었던 것, 그리고 죽을 것들이 항진하듯 스쳐 지나가는 이 섬과 이 바다는, 산 것들은 먹지 않는다. 그러니까, 입안에 날름 넣고 맛을 볼 수는 있을지라도 그 혀끝에 살아있는 맛이 감지되면 도로 뱉어 버린다. 그러므로 허둥거리며 이 바닷물의 늪에 저항하다가 ‘진짜 죽은 것’이 되어 버리느니 얌전히 침몰했다가 다시 반질반질하게 태어나는 편이 낫다. 죽은 것들만을 삼키고 다시는 뱉지 않는 곳. 그리하여 편식하는 어린 바다를 품은 이 섬은 신성한 것들의 작일, 핼러윈이 되었다.
아, 곧이다.
이제 먹힌다.
불쾌한 녹색이 낀 바닷물이 높은 점도로 인하여 바로 배 안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천천히 선미에서부터 흘러내리고 있다. 겁에 질린 선원들은 짙게 갑판 위로 깔린 안개를 올려다보며 두려움에 흠뻑 젖어 제각기 부둥켜안은 채 견디고 있다. 주소를 잘못 찾은 파르페는 한쪽 팔에는 벨 선장을, 그리고 한쪽 팔에는 산 공주를 끼워 미어터지는 품 안에 부둥켜안는다. 벨은 이를 저지하지 않는다. 저지하는 대신 파르페의 팔을 쥐고 적당히 당겨 내림으로서 숨 쉴 공간을 확보한 뒤에 입을 연다. 저기, 저 여자. 이 죽음 같은 바다의 늪 따위로 젖지 않을 것처럼 빳빳하고 가벼운 백의를 입은 채 감은 눈을 들어 점차로 멀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여자를 향한 질문이다. 손에 잡히는 사람은 죄다 부둥켜안을 속셈이라면, 도결문도 안고 있는 게 낫지 않겠어요? 가까이 오기만 해요. 철컥, 장전하는 소리는 간명한 답을 보강한다. 어차피 뭐, 가까이 갈 수도 없는데. 벨 선장은 그를 꽉 조르고 있는 파르페를 힐끔 올려다본다. 망토에서 풀 냄새가 나네. 이 사람은 그새 또 어딜 싸돌아다니고 온 거야. 그리고 이 생각을 마지막으로, 느린 속도로 그러나 확실하게 범람한 바다의 해면 아래 완전히 빨려 들어간다. 아, 맞아. 도결문. 이 꿉꿉하고 이상한 바닷물에 닿은 도결문의 옷은 어떻게 됐을까. 그걸 꼭 보려고 했는데 파르페 때문에 까먹어 버렸잖아.
눈을 뜬다.
갑판의 잘 건조된 나무 냄새도, 바다의 짭조름하고 살짝 비릿한 냄새도 없다. 대신 파르페의 망토가 얼굴을 덮고 숨을 틀어막고 있다. 벨 선장은 벌떡 몸을 일으킨다. 배가 없다. 산 것은 들어온 모습 그대로 내보내 준다는 것이 그쪽 바다의 규율이자 상식이었건만 그렇지 않단 말인가? 아니 설마, 배는 생물이 아니어서 먹어 버렸나? 그보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선장은 먼저 푹 젖은 생쥐 꼴이 되어 건어물처럼 빤빤하게 말려지고 있는 선원들의 수를 세어 본다. 좋아, 다 됐어. 아니 한 명 부족한데. 아, 뷔슈 드 노엘. 저기 산타나의 품 안에 들어 있군. 좋아, 이제 다 맞아. 산길과 다르지 않은 습도를 머금은 잔디밭은 이들이 드러누워 있는 형태 그대로 그림처럼 젖어서 납작하게 누워 있다. 선장은 선원들을 하나하나 걷어차며 깨우는 대신 아직 조금 무거운 몸을 일으켜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머지않아 풀썩 엎드려 메슥거리는 속을 꿰뚫고 올라오는 토기를 처리한다. 우웩, 땅과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군. 자고 일어나 보니 바다라는 저승의 품에 납치되어서 오르페우스를 기다리는 에우리디케처럼 땅에 널려 있을 줄이야 몰랐으니 어쩔 수 없지. 어쨌든 상황을 좀 알아볼 필요가 있어. 여기에는 날 대신해 총을 맞아줄 갑판이 없으니까 말이야. 그에게 희소식을 좀 전해야지.
바람은 시원하고 하늘은 높으며 풀 냄새가 만연하기에 일견 잔디밭인 줄로만 알았던 여기는 잔디밭이라기보다 사실 무덤인 것으로 보인다. 멀지 않은 곳에 봉긋하게 쌓인 토분이 일정한 오와 열에 맞추어 드넓게 펼쳐져 있고, 아무 의심 없이 녹색이라고만 생각했던 이 짧고 잘 관리되어 촘촘한 잔디들은 각도가 조금 바뀌자 다른 감색으로 반짝거리고는 한다. 어쨌든 이곳이 죽은 것들의, 즉 신성해진 것들의 고장이라면 오히려 무덤이 필요 없지 않은가? 무덤이니 비석이니 하는, 사람이 가고 남은 자리에 놓는 잉여물은 모두 남겨진 자들을 위한 것일진대 이곳에는 공평하게 이미 간 자들만이 머무른다고 했는걸.
재미있는 문제야. 죽은 동네에 있는 무덤이라니.
이게 재미있나. 선장 것도 하나 만들어 줄까요?
아뇨. 소름 끼치도록 부드럽고 적요한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자마자 무릎을 얻어맞은 사람의 킥처럼 재빠르게 대답한 벨은 천연덕스럽게 뒤로 돌아본다. 푹 젖었으나 때까지는 타지 않아 반질거리는 흰 코트를 입은 도결문의 눈이 평온하게 접혀 있다. 본래 신출귀몰한 등장이 예삿일인 작자라지만 대체 어느 틈에 일어나서 여기까지 따라왔담. 머리 굴리지 말고 계속 움직여요.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야 탈출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은근한 분노를 응축해 낮게 깔린 도결문은 그러나 여전히, 여상하고, 평온하고, 쫄딱 젖은 머리카락과 옷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줄기를 빼면 어디 나들이라도 다녀온 듯 태연하다. 벨 선장은 이 물 냄새와 풀 냄새가 혼재하는 막연한 섬을 하필 화가 많은 집행관과 오로지 단둘이 탐색해야 한다는 뼈가 시린 진실을 혀 아래로 밀어 넣는다. 맛보지 않을수록 좋은 쓴맛이 혀 아래에서 알싸한 맛으로 찌르고 올라온다.
무덤들은 즐비하되 인기척은 없다. 물론 산 것들의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 좌로, 우로 일제히 춤추며 바람에 따라 노래하는 짧은 키의 잔디들은 좌로 고개를 기울일 때 짙은 녹색으로, 우로 고개를 기울일 때는 일제히 묵직한 감색으로 얼굴을 휙휙 탈바꿈하며 두 사람을 올려다본다. 일제히 고요하다. 산 것들의 자취라고는 없는 이곳, 소리라고는 바람 소리, 바람에 들풀이 부딪쳐 휘날리는 가벼운 소란과 그리고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나무와 나무가 부딪쳐 나는 일정한 소리, 딱딱, 딱딱?
벨은 우뚝 멈추어 선다. 그 자리에서 고개를 기울인 채 한참을 좌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경청한다. 딱딱, 딱, 딱딱딱, 쿵, 잘 들어 보니 진동까지도 느껴지는 듯하다. 잘 들어 보니, 어떤 악기 소리 같은 것도 나는 듯하다. 아, 아닌가? 이건 그냥 새 우는 소리일 수도 있겠군. 소리가 들려요. 소리? 뭐가 계속 딱딱거리는데요. 난 안 들려요. 벌거벗은 딱따구리가 이런 곳에서도 서식할 수 있던가. 일단 가 보죠. 판단을 공유한 두 사람은 달린다. 언덕처럼 비죽비죽 일정한 박자로 솟아 있는 누군가의 몸 위에 덮인 흙을 밟는다. 까딱까딱 고개를 움직이며 그들을 일제히 올려다보는 잔디를 눌러 밟고 달린다.
묘지를 넘어간다. 숲에 들어선다. 투명한 은색과 보라색의 나뭇잎들이 우거진 이 나무 수풀은 소리를 반사하는 버릇이 있어 벨 선장과 도결문의 숨소리, 숲을 주파하는 두 쌍의 발이 땅을 밟을 때마다 우지끈 부러지는 나뭇가지의 소리까지도 앵무새처럼 따라 부른다. 찰나에 지면과 하늘이 일렁일렁 파도처럼 솟아오르고 융기하며 뒤집히는 바람에 멈추어 서서 먹은 것을 게우고 마는 벨 선장의 신음까지도. 그러나 이들은 이 모든 소란과 사건을 넘어서서 숲을 지난다. 벨은 별안간 다시 바닥에 엎드려 토악질하고 해쓱해진 낯빛으로 고개를 든다. 저기에 있다. 마을, 마을이 있다. 불이 있다. 등불들이 지붕 위로 노랗게 붉게 번지며 캄캄한 하늘을 밝힌다. 어느덧 명약관화하고 큼지막한 소리가 되어 귀를 때리는 일정한 리듬의 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딱딱, 딱, 딱, 딱딱딱……. 아, 벨과 도결문은 거의 동시에 탄식 같은 한숨을 길게 내쉰다.
그 소리는 뼈였구나.
뼈가 부딪치는 소리였어.
반질반질하고 흰 해골들이 제멋대로 무대를 꾸며 놓고 춤을 추며 박수갈채를 (이마저도 딱딱딱딱 하는 소리라니!) 한 몸에 받는 광경을 멍청하게 지켜보던 벨은 신음하듯 입을 열어 도결문에게 묻는다.
이제 어쩌죠?
나한테 물어보지 말아요, 나도 이런 건 처음이니까.
비단 춤을 추며 공연하는 해골들과 그를 우러러보고 있는 해골 그룹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총체적으로 본 적 없는 광경의 연속에 도결문과 벨은 불가해한 불쾌감과 기시감을 느낀다. 뱃사람은 축제에 익숙하다. 핑계와 이유만 만들어진다면 선상에서 술잔을 부딪치며 밤을 지새울 때도 많거니와 배를 타고 유유자적 이 땅 저 땅을 밟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무엇을 축하하는 자리에 여러 번 동참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해골들의 잔치 따위에 대해서야 이름만 들어봤지 진정 겪어볼 이유가 없다. 이미 시간이 흐르지 않게 된 자들이 대체 무엇에 스스로 축배를 들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가능하다.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섬은.
낡아 자빠진 천을 아무렇게나 기워 올리고 나뭇가지로 받친 천막들은 두 사람이 이미 지나온 숲의 나뭇잎들을 엮어 만든 밝은 은색의 나뭇잎들을 촘촘하게 엮어 가랜드처럼 줄줄이 걸어 장식했고, 이 고도가 낮은 천막 아래에 구겨져 앉은 노천상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다른 물건들을 판다. 일견에는 쓸모가 없으며 보기에 아주 예쁠 뿐인 이파리며 소라게 껍질, 이상하게 생긴 돌멩이 따위나 한 움큼 늘어놓은, 뭐 얼굴이 반만 있는 시체도 있고, 손에 잡히지 않고 흐물거리며 흘러내렸다가 다시 제멋대로 모습 갖추기를 반복하는 괴이한 보라색 망토를 걸어 두고 관광객이 지나갈 때마다 텅 빈 눈을 빛내며 그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해골도 있다. 갈빗대 사이에 현을 엮어 간단한 동요를 연주해 보이며 ‘악기 문신’이 단돈 얼마밖에 안 하느니 떠드는 오색찬란한 해골도 있고, 무엇보다 나비 튀김과 지렁이 꼬치 따위를 이로 잘근잘근 씹고 그대로 텅 비어 뼈밖에는 없는 몸 안으로 넣어 잘게 쪼개진 음식물을 흘리며 거리를 활보하는 해골 관광객들이 거듭 포착된다. 뼈와 가죽과 상처밖에 남지 않은 것들끼리 모여 이렇게 잔치를 벌인다. 노는 기분이라도 내겠다는 것인지 제각각 걷는 호박과 박쥐에 줄을 매달고 풍선 혹은 장식품처럼 들고 다닌다. 넝마뿐인 낡은 천을 기워 입는 방식도 제각각 다르다. 인류의 문명과 다르지 않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죽은 것들은 언젠가 반드시 ‘살아 있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축배를 들고 있다. 이제 영원히 삶이 아니게 된 것들을 온 힘을 다해 즐기고 있다. 벨 선장과 도결문은 그들 앞에 우두커니 서서 이 번쩍거리는, 눈부신, 어떻게 보면 ‘살아도 있는’ 광경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먼저 발을 떼는 것은 도결문이다.
어쩔 수 없다. 이 섬에는 좋든 싫든 죽은 자들만이 시민으로 남아 있을 것이며, 그를 감안한다면 이 해골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돌아가 다른 곳을 탐색한다 해도 결국 자문해야 할 대상은 비슷할 테지. 중요한 것은 그 상대가 여기저기 불을 피워 놓고 춤판에 정신이 온통 빠진 예술쟁이 해골인가 ‘좀 멀쩡한 해골’인가 하는 문제일 뿐이다. 숲을 달리는 동안에 제법 말라 물이 떨어지지는 않게 된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각각 밀어 넣고, 도결문은 느린 걸음으로 그 광경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벨은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말고 천천히 발을 뗀다. 의식적으로 도결문에 비해 보폭이 늘어진 작태이다. 저 안에서 해골들이 축제를 벌이고 있는데 저래도 되나? 뭐 중앙 사람인데 별일이야 없겠지. 저 사람은 안전하니 위험해지면 도결문을 방패로 내세우고 도망쳐야겠다. 그때 앞서 걷던 도결문의 머리통에서 고요한 일갈이 떨어진다. 머리 그만 굴리라고 했을 텐데. 그리고 냄새나니까 자꾸 토하지 말아요. 그것참 미안하지만 나도 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다음 토한 건 아니에요. 총 맞느라 경황이 없어서 약을 안 가져왔더니……. 그러니까 검은 회오리 때문이라는 거죠? 악랄한 상사를 둬서 고생이 많네. 너무 그러지는 말아요. 도결문도 그렇게 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 테니까. 탕! 축제 한복판을 점거하듯 울려 퍼지는 총소리와 함께 도결문은 뒤에서 그를 따라 걷다가 위협사격이 박힌 자리를 내려다보는 벨을 향해 고개를 반만 돌린다. 다시 말해봐요.
그러나,
이때 발포 소리에 주목한 것은 선장뿐이 아니다.
여기, 일제히 돌아가는 텅 빈 눈들과 눈알만 남은 뼈로 이루어진 목이 있다. 뼈를 딱딱 경쾌하게 두들기고 뼈와 뼈 사이에 엮은 줄을 당겨대며 내던 모든 소리가 일제히 고요하게 가라앉는다. 도결문은 총을 다시 장전하며 느긋하게 웃는다. 그것이 도결문의 방식이다. 그것은 언제나 도결문의 방식이었다.
애써 부르지 않아도 알아서 주목해 주니 편하네. 여기, 산 사람은 어디로 가야 나갈 수 있는지 알고 있어요? 아, 그리고 분실물이 하나 있는데 그것도 좀 찾고 싶으니 협조 부탁할게요. 크기는 좀 커서 발견은 누구나 할 수 있을 거예요. 배 한 척이거든요. 지금 기분이 좀 좋지 않아서 말인데, 협조를 좀 해 줬으면 해요. 총으로 당신들을 두 번 죽일 수는 없을지 몰라도 불구로 만들 수는 있으니까.
쥐 죽은 듯한 정적을 깨고 조근조근 속삭이는 음성은 축제와 어울리지 않게, 그러나 반면 이들과는 꼭 어울리는 듯 스산하고 차다. 벨 선장은 도결문이 몹시 짜증 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총구부터 들이밀었을 사람이 예고도 없이 일단 쏘고 본다는 것은 그만큼 화풀이의 대상이 간절하다는 뜻이고, 이미 죽어 나자빠졌다가 벌떡 일어나서 몸을 흔들고 불을 붙이며 축제판을 벌여대는 이들은 딱 도결문이 화풀이하기 좋은 대상이리라고. 그 상대가 만만하지 않고 수가 많다면 더더욱. 그러므로 감독관을 말리는 대신 그들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캄캄한 바다를 향한 기도 반, 저주 반을 입속으로 읊조린다. 슬픈 표정이 되어 허리춤을 더듬는다. 덜 말라 눅눅한 코트 아래 제자리에, 아직 멀쩡하게 검이 들어가 있다. 물론 벨에게 있어 육지 위의 전투 따위는 정말이지 원하지 않는 일이지만…….
그러나 이때 도결문이 총을 든 오른손 대신 코트 주머니 안에 수납하고 있던 왼손을 뺀다. 툭, 손아귀에 쥐고 있었을 무엇을 뒤로 던진다. 벨은 이를 반사적으로 낚아채 손안을 들여다본다. 약. 멀미약이 든 통이다. 도결문이 챙겼구나. 시간 없으니까 빨리 먹어요. 물 없어요? 장난해요? 장난이죠, 그럼. 그러니까 당신이 싫다는 거야. 벨은 재빨리 바짝 마른 목 안에 알약을 털어 넣은 뒤에 연신 침을 삼킨다. 억지로 약을 넘기려는 때에 총격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이들을 원형으로 빙 둘러싸기 시작한 해골 무리 중 하나가 웬 허름한 가죽 주머니를 건넨다. 벨은 오래 살지 못해 죽기라도 한 건지 키가 벨의 반절이나 겨우 되려나 싶은 어린 시체, 아직 뺨 위에 피부가 조금 붙어 있고 녹색 눈동자를 가진 그것이 내밀고 있는 가죽 주머니를 들여다본다.
물이다.
구체적으로는 다소 썩은 가죽 안에 간신히 담겨 시큼한 냄새가 나는, 그러나 점도 높은 예의 그 바다와는 달리 맑고 가죽 사이로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는, 진짜 물. 어……. 벨은 주저한 끝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마신다. 남이 주는 건 함부로 받아먹으면 안 되는데. 더군다나 이런 곳에서 총질한 뒤에는 말이야. 하지만 거절할 수도 없었는걸요. 아~ 물을 왜 주는 거야? 도결문이 이미 시원하게 협박해 버렸는데. 나는 이 시체들을 죄다 깨부수고 자를 생각까지 했는데 물을 왜 주는 거냔 말이에요. 불편하게. 일련의 불만스러운 사고를 거친 뒤에 벨은 가죽 주머니를 어린 시체에게 다시 건넨다. 고마워요. 주저한다. 저기, 도결문…….
그러나 벨이 도결문을 부르려는 이때 소란이 있다. 해골 군중의 어딘가에서 웅성거림이 새어 나온다. 어어, 밀치지 마요, 언성이 올라간다. 촉발되는 혼란이 있다. 문제는 도결문과 벨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들의 맞은편, 축제의 장 한복판에서 무엇이 다가오고 있다. 해골과 시체들을 마구 밀치며 큰 해골이 달려온다. 앙상한 몸으로, 흰 뼈와 검은 눈동자만을 가진 그 몸으로, 헐레벌떡 달려온다.
아니, 산 인간이잖아!
철컥, 장전 소리가 들린다. 산 인간 처음 봐요? 미리 말하지만 우린 이 섬에 있을 생각 없어요. 물의를 빚고 싶지도 않고. 나갈 길만 알려주면 조용히 떠날 테니 협조해요. 나갈 길? 이 섬에서 나가겠다는 거야? 당연하죠, 우리가 여기 살러 들어온 사람들 같아요? 그게 아니고. 바쁘니까 빨리 말해요. 그건 안 돼. 오늘따라 되는 일이 없네, 정말……. 아니야, 잠시만! 쏘지 말고 들어봐. 정말로 안 돼. 우리는 너희를 내보낼 수도 없고, 안내할 수도 없어. 산 인간이 여기 들어온 게 한두 번이겠어? 우리는 이미 죽었어. 아직 살아 있는 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어, 절대로. 그러니까 너희가 이 섬을 나갈 길을 알려줄 수는 없어. 하지만, 이 섬에 법칙이 하나 있어. 매년 모여서 이렇게 축제를 여는데, 여기에서 먹고 마시며 함께 즐기고 나면 알아서 돌아갈 수 있게 될 거야. 어떤 사람은 너무 안 좋은 때에 와 버려서 여기에서 거의 일 년이나 축제가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진짜로 죽어 버려서 여기에 집을 짓게 됐어. 너희는 운이 굉장히 좋은 거라고. 오늘만 놀아주고 나면 내일은 다시 돌아가서 너희의 항해를 이어갈 수 있어. 아까 뭘 찾는다고 들었는데 그게 여기 오면서 사라진 거라면 그것도 감쪽같이 돌려받을 거야. 이건 우리도 어쩌지 못하는 법칙이야. 이 섬에 들어온 산 자들은 모두 그래야 해. 죽은 자들을 잊지 않았고, 죽음으로부터 흉하고 천박하게 달아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증거로 우리와 놀아줘야 해.
그리고 싸늘한 침묵이 가속된다. 커다란 덩치의 해골은 순한 양처럼 총구 앞에 서서 살아 있는 인간들의 반응을 기다린다. 도결문은 그를 향해 겨누고 있던 총을 천천히 내린다. 떨구어진 총구는 바닥을 노려보고 있다. 소름 끼치는 정적이 두 사람과 시체들을 가파르게 가르고 지나간다. 벨은 그 뒤통수에서 점차로 응축되어 가는 분노와 고통을 읽어낸다. 아, 곧 쏘겠는데. 역시나 도결문은 땅을 향해 총을 세 발을 연달아 쏘고 긴 한숨을 내쉰다. 지친 듯 고개를 들며 한숨을 쉬는 도결문의 검은 머리카락 위로 붉은 등불의 빛이 어룽어룽 미끄러진다. 총소리가 울리자마자 꺅, 소리를 질러대며 서로 존재하지도 않는 귓가를 감싸고 틀어막기 시작한 해골들은 여전히 도결문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채로 이들을 멀뚱멀뚱 지켜본다.
좋아요.
그렇다면 일행을 데려와야겠으니 좀 기다려요.
도결문은 돌아서서 벨과 마주 본다. 일행은 내가 데려올 테니 선장은 여기에서 적당히 어울리고 있어요. 하는 김에 어떤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떠봐도 좋고, 떠보다가 잘 안되면 협박하거나 뼈 두세 개쯤 빼도 괜찮아요. 아, 그리고 먹을 만한 음식이 없는지도 좀 살펴봐 주고……. 음식다운 음식이 있다면 직접 먹어서 몸에 이상은 없는지 확인도 해 줘요. 그럼.
도결문은 벨의 어깨 위에 손을 가볍게 얹어준 뒤 그를 지나친다.
도결문이 숲속으로 사라지자 꼼짝없이 죽은 듯 침묵하던 해골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른다. 와! 축제다! 공연이다! 먹을 거다! 손님이다! 사람이다! 산 사람이다!
*
왔어요?
그게 무슨 꼴이죠?
도결문이 일행을 이끌고 돌아왔을 때 이미 축제는 원점으로 돌아가 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시끌벅적하고 불이 많아 밝은 축제 한복판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선장의 목덜미에는 오색찬란한 뱀의 허물이 두 바퀴 휘감겨 있고, 새파란 머리카락 위에는 살아 있는 불가사리와 온갖 반짝거리는 쓰레기들이 붙어 있다. 금으로 도금된 틀니 같은 이가 선장의 망토를 물고 있고, 무엇을 먹은 것인지, 아니면 취식을 당한 것인지 모를 입가에는 새파란 소스가 묻어 있다. 선장의 살과 가죽이 탄탄하게 휘감긴 열 손가락에 각각 키가 저마다 다른 어린 시체들이 주렁주렁 붙어 있다. 어린애 시체 네댓 명에게 둘러싸인 채 움직이는 모습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불편함과 못내 져주고 싶은 무른 의지까지도 묻어난다.
벨의 차림새가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엉망이 된 것을 보고 산 공주와 파르페는 삿대질해 대며 숲이 떠나가라 웃는다. 바보, 바보. 어린애들답게도 등불을 휘날리며 소란스럽게 이루어지는 이 축제 안에 들뜬 채로 나란히 손을 잡고 달려 들어가 버린다.
알아보니 좀 어때요? 글쎄요, 알아낸 거라고는 모두가 도결문처럼 꿍꿍이속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정보 정도? 오늘따라 간이 좀 크네요. 즐기고 돌아가자는 뜻이에요. 그들의 말이 진실이라면 우리는 천운에 가까운 기회를 얻은 거잖아요. 내년에는 이 사람들과 함께 여기에 올 일이 없을 테니까요. 그거 정말 개운한 소리네요. 에이, 매정한 소리만 하고 재미없어요. 짜증 나는 소리 하지 말고 안내나 해요, 선발대답게. 선장은 도결문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알겠어요, 가요. 쓱 경쾌하게 몸을 돌려 앞서 걷는다. 어깨에 시침 된 망토가 그를 스쳐 지나는 뼈와 부딪칠 때마다 힘없이 밀려 부드럽게 구겨졌다가 금방 다시 원형을 찾아 펄럭거린다.
별반 다를 건 없어요. 원래 사람이었던 것들이 죽어서 자축하기 위한 잔치를 꾸린 거니까. 음식은 대부분 시취가 나거나 오히려 생고기이거나 중 하나지만 디저트는 그런대로 봐줄 만했죠. 무서워서 재료는 안 물어봤어요. 선장은 엉성하기 짝이 없는 설명을 연발하며 미적미적 걷다가 멈춰 선 뒤에 그새 익숙해진 듯 손가락 두 개를 치켜들고 턱짓한다. 이인분 주세요. 주문을 받은 머리가 반쯤 파먹혀 눈알이 두개골 위로 튀어나온 시체가 분주하게 손을 놀린다. 기분을 내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시꺼먼 장례용 드레스의 가슴팍에 야광 박쥐를 목걸이처럼 달랑달랑 걸고 있다. 목걸이 주변의 창백한 보라색 피부가 박쥐의 빛을 받아 형광색으로 빛난다. 이에 더해 썩어 문드러진 듯 끄트머리가 갈색으로 바래 버린 상아색(원래는 흰색이었을) 프릴 앞치마까지 걸치고 있는 모양새가 영 어울리지 않는다고 봐야 할지, 아니면 오히려 아주 근사하기까지 한 매치업인지 영 알 도리가 없어 도결문은 적당히 그를 외면한다. 그것은 커스터드 크림의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둥글둥글한 판나코타 덩어리를 멋없게 척척 갈색 코르크 쟁반에 쌓아 올린다. 대체 왜 코르크 판때기 따위를 쟁반으로 쓰는 거야? 플레이팅이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양 원초적이며 둔탁한 재질로 수북하게 쌓인 판나코타 위에 엉성하게 딴 탓에 이파리가 아직 붙어 있는 산딸기를 얼기설기 부수어 뿌린 뒤에 턱 건넨다. 선장은 이를 뺏다시피 받아 든다. 돈은? 아~ 맞다. 어쩐 일로 순순히 삯을 지불하려는 눈치인지 허리춤에 덩그러니 꼬질꼬질하게 걸어둔 가죽 주머니를 (있는 거라고는 겉멋뿐인 선장이 저런 주머니를 가지고 다녔던가?) 꺼내 뒤적거리더니 웬 손톱 쪼가리 두어 개와 껍질이 벗겨진 알사탕을 건넨다. 쓰레기를 주네. 멕이자는 건가요? 내가 원한 게 아니에요. 그쪽에서 화폐 대신 손톱을 깎아서 쓰라고 하던걸요. 근데 내 손톱이 많지 않고 길지도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아이들 사탕을 조금 뺏어서 쓰고 있죠. 참 초지일관한 쓰레기라 안심이야.
점포 안에 서서 판나코타처럼 생긴 쓰레기를 건넨 그것은 진짜 쓰레기를 건네어 받고 신이 나서 사탕 알갱이를 호박등의 불빛에 이리저리 비추어 본다. 붉은 안료가 들어 반질거리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산딸기 맛이겠지. 누가 산딸기 호 선장 아니랄까. 도결문은 판나코타를 물끄러미 내려다본 뒤에 느릿하게 입을 연다. 그런데 스푼은요? 질문을 들은 시체가 아주 설레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죽어 물컹거리는 눈동자를 빛내며 불쑥 허리를 숙인다. 이윽고 벌떡 일어난 그것은 길이가 짧고 아주 오래된 태가 나는 나무 스푼 두 개를 건넨다. 고마워요. 뭘, 또 필요하면 말해. 아직 여든여섯 개가 남아 있으니까. 아니, 그렇게까지는 필요 없어요. 도대체 죽은 자들의 축제에서 무슨 쓸모가 있다고 스푼은 챙겨 뒀어요? 그야 우리 축제의 주인공은 우리지만 또 다른 주인공은 너희들,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이니까. 가끔이긴 하지만 너희가 분명 오니까. 운 좋게 살아서 우리의 축제를 맛보고 돌아간 산 인간 중 더러는, 아주 가끔이지만, 또 일부러 우리 섬에 찾아올 때가 있어. 그 사람들은 스푼과 젓가락이 없으면 안 돼. 나도 살아있을 때 그랬거든. 가끔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녀석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사백 년 전 이후로는 본 적 없지. 그래서 산 인간을 위한 접시와 식기를 꼭 챙겨두는 게 우리의 의례야. 언제 어느 때에 귀한 손님인 너희가 오더라도 대접할 수 있도록.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우리도 한 입 줘요!
구구절절 설명하며 눈을 반들반들 굴리는 시체의 얼굴을 물끄러미 감상하는 도결문의 어깨 뒤에서 익숙한 듯 투박한 검은색 팔이 쭉 뻗어 나와 스푼 두 개를 낚아챈다. 하나는 그의 어깨에 무등을 탄 채로 달랑거리는 산 공주에게 건넨 뒤, 스푼으로 두어 번 판나코타를 깨작거린 장신의 선원은 이내 어떤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기라도 한 것인지 벨 선장의 손 위에 덩그러니 들려 있던 코르크 쟁반을 빼앗는다. 이런, 또 스푼이 필요하겠네. 몇 개나 필요해? 아직 여든여섯 개가 남아 있어. 두 개면 돼요. …… 아니, 더 필요하겠는걸요. 삼삼오오 몰려들어 고개를 들이밀고 기웃거리는 선원들과 벌써 코르크 쟁반을 말끔하게 비우고 입술을 쓱쓱 핥아 먹는 파르페를 돌아보는 해쓱한 안색의 벨 선장이 내는 목소리에 진이 빠지는 기색이 있다. 여기, 여기에 주세요. 이 친구가 받아줄 거예요. 이 친구 머리 위에 올려 주세요. 분홍 머리의 선원이 뷔슈 드 노엘의 대가리를 내놓는다. 가만, 돈은 누가 내나? 난 돈 없는데. 나도 없어. 아까 봤는데 선장이 손톱을 내놨어. 여기 화폐는 손톱인가 봐. 손톱을 깎아서 내놓자. 그럼 우리 중 손톱이 제일 긴 사람이 내는 것으로 합시다! 좋아, 재 보자고. 빨리 손 내밀어. 빨리 내놔, 장갑 벗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손등이 불쑥불쑥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통에 떠밀린 파르페가 다시 나무 스푼을 떨군다. 봐, 많이 준비해 두길 잘했지?
오싹할 정도로 높은 밀도로 밀려오는, 갖은 고성과, 함성과, 게다가 여기저기에서 툭툭 밀치며 좁혀오기 시작하는 포위망에 거북함을 느낀 도결문이 이들 사이를 적당히 어깨로 밀어 빠져나가려는 무렵에 무리의 반대편, 이 우글거리는 선원들의 가장 바깥에 선 누군가가 그를 힘껏 끌어당긴다. 도결문은 꽉 쥐어짠 젤리가 외압을 견디지 못하고 비죽 옆구리를 터트리는 모양새처럼 푹 튀어나와 구겨진 코트를 가다듬는다. 가공할 힘으로 그를 당겨 억지로 끄집어내 준 ‘살이 붙어 있는’ 은인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 자리에 파란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있다. 그의 손을 꽉 움켜쥔 손은 손바닥 안쪽이 살짝 거칠거칠하고, 망설임이 없어 단단하고, 이 뼈와 싸늘한 거죽 사이에서는 지나치게 뜨끈하다. 선장의 푸른 머리카락을 타고 호박석처럼 진한 색의 전등 빛이 쏟아져 내린다. 빛을 반사해 번쩍거리며 눈을 아리게 찌르는 벨의 망토 위 장식품들에서, 간신히 눈을 뗀다. 손아귀를 움켜잡힌 채로 벨의 빠른 보폭을 쫓아가는 도결문은 이제 거의 달리는 모양에 가까운 모양새로 가까스로 걷는다. 언제 빠져나온 거야. 빨리 따라와요. 지금 자기 선원으로부터 도망치는 건가요? 알면 협조해 줄래요? 육지에서의 다대일에는 약하거든요, 특히 건드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더. 봐줄 테니까 가이드 노릇이나 마저 해요. 좋아요, 이제 어디로 갈까요?
나도 사탕이나 좀 살게요.
아는 곳 있어요?
잘됐네요. 멀리 갈 필요 없어서.
그건 나도 팔 수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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