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PLE PAGE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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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커미션 작업물은 신청자의 허가 및 요청으로 등장인물의 이름을 이니셜 처리해 전문 게시 및 검색 허용으로 전환합니다.

본 작업물은 웹툰 <신의 탑> 등장인물을 기반으로 SF AU로 작업한 2차 창작물임을 밝힙니다.


그 여자애의 무대는 봄에 열렸다.

계절을 닮아 허리까지 내려오는 선홍색 머리카락이 질끈 묶인 채 어깨 너머에서 너울거렸고, 아마도 일생 처음으로 접한 누군가의 리사이틀에 관하여 나는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찾아보지 않았다. 그날의 충격과 어느 고점에 이른 인류세의 비탄 같은 연주 소리는 당해 겨울까지도 머리통을 종횡무진했기 때문이다.

 

음악이면 음악이지 특정인의 음악과, 연주면 연주지 특정 누군가가 다루는 악기의 연주 소리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는 말들은 죄다 남의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내 귀는 편평하고 고루하다. 혹자는 막귀라고도 일축하는 이 귀로 대체 무엇을 듣고 어떤 소리를 분간해 악기를 세공할 수나 있을지 스스로도 모를 일이다. 그런 채로 쓰리 버튼 마이 단추를 채울 수 있는 나이까지 걸어왔다. 재능 없는 재능, 반짝임 없는 빛으로도 일생은 영위될 수 있다는 것을 반드시 증명해 내야 하는 사람처럼. 예술 하는 어린애 중 한 번쯤 고꾸라져 본 적 있는 사람은 전부 이 학교로 온다고 했다. 일이 년의 재활로 유년의 경력을 모두 날려먹게 생긴 수영 선수, 미술 학원 뻑뻑하게 다녀 대며 어디 시상집에나 나올 것처럼 획과 색이 멋들어지게 명약관화한 캔버스 그림을 겨울마다 전시하는 여자애들 무리, 동네 사람들은 다 아는 이 일대 중학생으로서 위풍당당 오디션에 나갔다가 보란 듯 거꾸러진 어떤 애들. 어쨌거나 이 학교는 예술인들의 성지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실패한 흔적이 여실한 누군가들의 연속적인 무덤이었고, 그러나 차마 무덤 안에 꿈을 밀어 넣지도 못하고 그 변변찮고 애매하기 짝이 없는 달란트로 희망의 횃불을 이고 사는 청소년들의 마지막 분향소였다. 그리고 나는 예술이란 것을 할 줄 아는 사람조차도 아니었다. 내 일은 그 사람들의 기대를 튼튼하게 작업해 주는 것이 될 터였다. 나는 간소하게 악기를 튜닝할 줄 알았고, 더 나아가 악기를 만드는 일을 할 생각으로 이곳에 입학했다. 대단한 직업적 포부가 있다기보다는 스스로 시대에 따라가지 못하고 수공예를 업으로 삼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어린 날 찾아갔던 나이 많은 큰삼촌의 악기점이 근사하게 기억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 소리는 큰 감흥이 되지 못했다. 내게는 그 소리를 하나하나 구분하는 타고난 청음력도 없었고 거기에 천착할 만한 열정도 없었다. 아니, 미력한 재주나마 있을지 몰라도 애초에 음악이라는 파장의 군집체에 대한 큰 흥미가 없었다. 온 인생을 다 이어폰이나 헤드셋 따위 귀에 붙이고 살아가는 열정적인 사람들, 댄스 음악에 맞춰 팔다리를 흔드는 인간들의 흥과 한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이토록 타고난 결핍으로 남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바르게’ 교정할 줄 안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날에 역설이 되고, 어떤 날에는 오히려 ‘나에게만 가능한’ 절대적 진리의 영역이 되었다. 어렵사리 잡은 이런 것도 꿈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꿈이었고, 예정된 미래의 울타리 안에서 나는 어른이 되려는 사람이 아니라 ‘어른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이 학교에 그 사람이 있다고 했다.

열여섯 나이에 이미 상이란 상은 휩쓸고 다닌, 기십 년에 한 번씩 각국에서 배출되는 영재, 또는 그 이상. 존재만으로도 거대한 사람. 걸어다니는 자취 각각이 모두 현으로 이루어진 음률 같은 선홍색 여자애. 한발 낙오된 예술인들의 사유지 같은 이 학교에 갑자기 들이닥쳐서 열여덟 나이에 벌써 개인 리사이틀을 열었다. 그가 리사이틀을 열었던 것 자체는 놀랍기는 해도, 아주 경대할 만한 소식은 아니었다. 으레 한 세기 가량을 풍미하는 천재들에게는 이러한 탄생 설화 같은 신비로운 유년기의 이야기가 구전되어 오고는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리사이틀이 어지간한 전성기의 현역 성인 바이올리니스트만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을 유혹하는 자리였음은 다시 그 일이 회자될 만한 이유가 되기에 충분했고, 더 나아가 그가 그런 자리에 가장 먼저 ‘앉을 권리’ 그리고 ‘들을 권리’를 선사한 상대는 매일같이 같은 밥을 먹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부대끼는 학급 동기부터 일면식도 없으며 과연 이 세상에 존재했는지도 몰랐을 완전한 타인까지를 아우르는 이 학교의 재학생이었다는 사실이 두 번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입학한 첫해 봄, 처음 그 여자애의 연주를 들었다.

 

새가 날아와 박힌 충격처럼 그 애를 봤다. ‘여자애’라는 보편타당한 규격은 전혀 맞지 않는 옷인 것처럼 긴 장신과, 그만큼이나 긴 벚꽃색 머리를 휘날리며 무대에 우뚝 선 그 여자애를. 그렇게 긴 몸을 가지고도 단단하게 대를 세운 거목처럼 반질반질한 플로링 바닥에 발을 붙이고 서서 똑바로 관중을 올려다보던 샛별 같은 눈동자를, 이미 몇십 몇백 번 그 많은 사람들을 아울러 지휘한 적이 있는 사람처럼 초연하고 당당하던 보폭을. 단단한 턱받침에 고개를 얹고 감은 눈과, 그때 팽창하듯 단단하게 무장된 상체를, 군신처럼 매몰차게 흘러나온 첫 음절을. 나는 충격에 빠진 채로 내려다봤었다. 그 여자애는, 선배는 그 낮은 곳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는 우리를 다 압도했었다.

어쩌면 먼 옛날부터 전승되어 온 세이렌의 노래는 성대에서 새어 나오는 어떤 마법적인 힘이 아니라 오로지 선득하고 아름다운 소리라는 파장의 힘만으로 사람의 이지를 무너뜨리고 굴복시켰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법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두렵고 강렬한 연주 소리에 의해 악기를 만지고 손보고 현을 풀었다 당겼다 해 온 모든 역사를 통틀어 가지고 있던 음악에의 권태라는 격벽을 완벽하게 함락당했다. 나는 박수갈채를 받은 여자애가 다시 악기를 우아하게 들어 턱에 걸쳤을 때 도망치듯 회장을 빠져나왔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그의 활이 현을 꾹 누르고 교차해 흘러내릴 때마다 내 안에 고였던 무엇도 함께 흘러내리고 있었고, 나에게는 그것을 멈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를 찾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한낱 조율사일 뿐이고, 그는 이미 온 세계의 러브콜을 받는 어린 음악가였다. 울림통, 소리의 근원을 지휘하고 섬세하게 뜯어 나만의 계율대로 이끌 수 있다는 이점에 매료되어 선택한 무기질적인 음파의 세계 어드메에서 나는 분명히 한 번의 공연으로 비가역적인 변화를 겪었고, 더는 기계처럼 소리를 재편하고 길을 인도하는 ‘객관적이고 정확한’ 사람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 몸에서 그의 선율을 들을 때 달아올랐던 용기와 기쁨을 앗아갔다. 교실에 앉아 수업을 들을 때도, 작업실에 앉아 악기 부품을 어루만질 때도, 이따금 친구들과 산책 나가 경치 좋은 카페테리아에 앉아 주문한 주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에도 문득문득 그 여자애가 연주한 바이올린 소리가 뇌파에 각인되어 머릿속을 징징 울렸다. 그리고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한낱 내가 기억으로 재현한 그의 연주는 어쩐지 실제보다 보잘것없이 느껴졌고, 그래서 나는 날이 갈수록 이따금씩 음악을 굶은 사람처럼 공허해졌다.

 

원하지 않았던 기회는 불현듯 찾아왔다.

본교 강당에서 사용하는 피아노를 이삼 주마다 한 번 조율하는 대가로 나는 소정의 봉사 점수를 받았고, 그것은 전공자 대개가 그러하듯 자기 몸의 일부처럼 애지중지 건반을 쓸고 먼지를 닦아 가며 그 악기를 예뻐할 ‘주인’이 공용품에는 존재하지 않기에 생기는 사각지대가 가져다주는 이점이었다. 나는 반년 동안 이 일을 맡았고, 앞으로 이 년 반을 더 그럴 것이었다. 그러한 루틴에 의해서라면 방과 후 교내에서 인기척이랄 자취들이 가을바람으로 닦여나간 듯 깨끗하게 쓸린 뒤에 휘적휘적 건반을 만지러 가고는 했는데, 어쩐지 그날은 피아노를 손볼 날이 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운동장 모래사장을 신발코로 문질러 긴 궤적을 남기며 가로질러 떠났다가 담임 선생님으로부터의 확인 문자 메시지를 받고 나서야 부랴부랴 왔던 길을 돌아 되짚었다. 반쯤 고개를 떨군 해와 막 허공을 밀고 올라오는 야천이 제멋대로 뒤섞여 세상은 보라색으로, 노란색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일을 마치고 돌아가 저녁 식사를 하고 싶은 마음에 책가방을 뒤뚱뒤뚱 흔들며 서둘렀던 나는 조급한 마음이 부풀어 꽉 틀어막은 귓바퀴를 거듭 두들기는 다른 누군가의 정연한 걸음 소리를 놓쳤고, 그래서 책가방을 팽개치고 강당에 달려 올라간 내가 누군가의 길어진 그림자를 밟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척수반사에 가까운 비명을 지른 이후의 일이었다.

어느덧 열린 강당 대문 사이로 붉은 햇빛이 마지막을 과시하듯 쏟아져 들어왔다.

태양을 쥐어짜 만든 넥타처럼 부드러운 선홍색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나부꼈다. 여자애는 넘어진 나를 내려다보느라 두 무릎을 양손으로 짚고 허리를 숙이고 있었고, 일전 무대에서 본 모습과는 달리 바람처럼 이리저리 너울거리는 머리카락을 간신히 귀 너머에 걸어놓은 채로 흐려질 듯 연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내가 놀라게 했구나.

당해 봄부터 나를 괴롭힌 칼리오페가 눈앞에 드리워 있었다.

 

이 학교에 아주 영특한 새끼 조율공 한 명이 들어와서 요정처럼 음률을 바로잡아 주고 떠난다던데, 그게 너였나 봐.

대가 없이 하는 일도 아니거니와 영특한 새끼 조율공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단한 솜씨를 이 다섯 손가락에 품고 살았던 적도 없었건만, 나는 어쩐지 그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수식언을 사양하고 싶지 않아서 안녕하세요, 하고 앞서 나오는 인사로 거절이나 겸손치레를 덮어 버렸다. 늦은 시간인데 아직 학교에 계시네요. 응, 그냥 궁금했어. 오랜만에 학교에 오는 날은 되도록 오래 머무르고 돌아가는 편인데, 저기 운동장 건너편에서 누가 숨 가쁘게 달려오지 뭐야. 궁금해서 그만 쫓아와 버렸네. 그게 뭐야, 나는 맥이 빠져 웃으며 중얼거렸다. 바닥에 나자빠져 있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일으키는 대신 여자애는 내 앞에 툭 걸터앉아 강당 무대 아래로 달랑달랑 다리를 떨궜다. 저기, 혹시 피아노 칠 줄 알아? 기본만 알아요. 한 곡 쳐 줄래? 피아노는 잘 모르세요? 나도 기본만 알아. 그래도 바이올린 영재면 저보다는 잘 치실 것 같은데. 날 아는구나. 이 학교 다니는 사람은 다 알아요. 너는 이름이 뭐니? Y. Y? 네, Y에요. 알고 있겠지만 나는 E야. E. 응. 그게 더 듣기 좋다. 말 편하게 해. 그게 되나요. 안 될 것 있니, 대신 피아노 한 곡 쳐 주는 거야. 어색하게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앞서 스프링처럼 퉁 튕겨나가 몸을 일으킨 나는 어색하게 모조 가죽 의자 위에 앉았다. 원래도 체르니 100이나 겨우 떼고 허겁지겁 정리한 피아노인데 아는 곡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색하게 건반을 도레미, 파, 솔…… 하고 꾹꾹 눌렀다. 건반 두드리는 소리가 끝나자마자 해일처럼 몰려온 어색한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에델바이스를 연주했다. 에에에델 바이스, 에에델 바이스, 속으로 노래를 뇌까리며. 짧은 연주가 끝나자 통통 튀는 박수 소리가 강당에 허무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그 진심으로 기쁘고 행복해 보이는 눈빛이 의아했다. 바이올린을 턱 밑에 걸고 활과 손가락으로 현을 누르기만 하면 음악의 아홉 신이 선보이는 합창처럼 아름다운 소리, 또다른 차원의 세계를 맛볼 수 있는 인재가 고작 에델바이스나 뚱땅뚱땅 두들기는 여자애를 보고 그렇게 뺨이 새빨갛게 익어서 좋아할 수 있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상해 보이니?

나는 학교가 좋아.

이 학교에서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이 소중하고, 함께 수업을 듣고 보폭 맞춰 걷는 친구가 귀해. 그래서 자주 오지는 못하지만 되도록 학교에는 올 수 있는 만큼 오고 머물 수 있는 만큼 머무르는 게 원칙이 됐어. 물론 나에게 주어진 기회와 시간도 천금보다 소중하지만, 때로는 그 모든 것과 바꿀 수 없는 중요한 기억이 있지. 고립되어 사는 건 좋지 않아. 그 누구에게라도.

 

피아노 연주도, 이토록 보잘것없는 연주 소리도 바로 그 이유로 듣고 싶어했던 것인지 물어보자 E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질문을 혀 위에 올릴 때까지만 해도 바보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 것 같아서 조금은 불안했는데, 막상 그렇다는 대답을 들으며 그 반질거리는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나니 두세 번이라도 그런 바보 같은 짓 정도는 흔쾌히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솟았다. 나는 그 마음이 더 부끄러웠다. 깊이 묻어 두었던 욕망이 고개를 내밀고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E의 연주를 다시 듣고 싶었다. 아주 절실하게. 그래서 E의 연주를 다시 들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질문했다. E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토끼 같은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제 기억난다. 너, 올봄 리사이틀에 왔었지? 즉시 낭패감이 온몸을 장악했다. 어떻게 나를 기억할 수가. 이제 내가 바보처럼 동그랗게 눈을 뜨고 석상처럼 굳었다. 귀여워서 잘 보였어. 여상한 표정으로 대답한 E는 강당 천장을 거듭 올려다보며 무엇을 세어 보는가 싶더니 다음 주 수요일 이 시간에 여기로 오라고 했다. 나는 그것이 E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자리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별안간 말도 안 되는 선물을 받아 오히려 공포를 느끼는 사람처럼, 그러나 떨쳐내지도 못하고 대답했다. 나 기다릴게. 기다릴 거야.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날, 다섯 시까지 그 강당에 가기로 했던 나는 설레는 마음을 움켜쥐고 네 시 이십이 분부터 교내 도서실을 서성거렸다. 종횡무진 갈 곳 없이 떠도는 걸음은 오히려 명확한 행선지가 있기에 애가 타는 마음을 가무리기에 충분하지 못했고, 결국 삼십 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오후 네 시 사십이 분에 달려가 밀어젖힌 강당 문은 지금까지 밀어본 그 어떤 문보다도 무겁고 단단하게 느껴졌다. 늦가을 공기는 선선하다 못해 매정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선득했고, 칼바람으로부터의 피난처가 되어준 그 강당 무대 위에는 이미 누군가가 석상처럼 바른 자세로 서서 문을 온몸으로 밀어 다시 닫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의 칼리오페, E였다.

E는 나를 기다린 것처럼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자마자 활을 끌어 올렸다. 활이 악기를 미려하게 타고 미끄러지며 독주회가 시작되었다. 통통 튀는 것만 같은 리듬으로, 그러나 이상하게도 서정적인 선율이 텅 빈 강당 내부를 휩싸고 돌았다. 윌리엄 볼콤의 <우아한 유령>이었다. 피아노의 보조 없이 단신의 바이올린만으로 연주되는 음악 어딘가에는 공허한 비감이 어려 있었고, 나는 이 반쪽짜리 무대에 매료당해 연주하는 그를 향해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한 채 문 앞에 따개비처럼 달라붙어서 멍하니 무대를 올려다보았다. 이 근사한 여자아이의 독주회에 관객은 한 명, 연주회 시작 시각은 두 사람이 한 공간에 있는 그 언제든지. 짧아진 해가 내리쬐는 늦가을 내 앞에 서서 고개를 비스듬히 꺾고 경쾌한 기악을 선보이는 길고 매끄러운 장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날부로 나에게 E는 훌륭한 연주자 따위가 아니게 되었다. 이 고요하고 담담하기만 한,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을 한낱 인생에 터진 샘물처럼 흘러 내려온 미학이었고, 소리의 파장 하나하나로 이루어져 있는 촛불이었다.

내 부끄러운 첫사랑은 그때 탄생했다.

 

E는 연주회니 레슨이니 하는 것들로 꽉 차 바쁜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고, 그래서 학교에 오는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적었다. 어린 나이에 인터뷰 같은 것도 하는 눈치였고, 여러 교수의 러브콜을 받기도 했다. E는 두 개의 휴대 전화를 가지고 있었고, 그 중 첫 번째는 모든 메신저와 전화 통화에 관한 음량 설정이 0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 휴대 전화 번호는 E의 두 번째 휴대 전화에 실렸다. 음악 공부를 하면서 이런저런 곡을 들었지만 내가 전혀 들어본 적 없는 곡도 E는 연주해 주었고, 이따금 카페테리아에서 흘러나오고는 하던 분주한 리듬의 팝 뮤직도 자체적으로 재구성해 연주할 줄 알았다. 버튼만 누르면 어떤 곡이든 재생하는 라디오 같았고, 그러나 그가 들려주는 음악은 도무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경쾌한 곡을 연주할 때도 물론 E는 근사했지만, E와 바이올린이라는 음악적 장치는 어쩐지 통한을 꽉 눌러 놓은 그릇 같았다. 그것이 E의 고유한 혼이 가진 울림이었을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그의 이면에 어린 역사가 그러한 음악을 구사하는 능력을 내린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꼭 그런 이유로 E는 어떤 곡들을 연주할 때 원형이 불분명한 정서적 통각을 자극하고는 했다. 음은 음이며 곡은 곡이라 그 어떤 음악에도 심취한 적 없는 나에게 너무나 이상하고 생경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나도 꼭 E에게 어떠한 경험을,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기억을 심어 주고 싶었다. 오 년 뒤, 십 년 뒤의 E가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는 모르지만 그토록 강대한 존재감으로 음계와 음계 사이를 활주하고는 하던 그에게 영원히 행복한 기억의 나무가 심겼으면 했다. 만일 이 학교를 졸업해 나와 다시는 만나지 못할 날이 오더라도, 어느날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아 너무 먼 곳으로 가 버리더라도.

 

그래서였다, E를 동네에 초대한 것은.

내가 사는 곳과는 꽤 거리가 있는 학교에 다닌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언젠가 나고 자란 이 소속 공동체로부터 멀리 벗어나 나 자신으로 온전히 날개를 펴고 활주하는 삶을 기대하는 사람 특유의 예행연습이라는 명분이 가장 컸다. 어느 날 이 이야기를 들은 E는 맑은 호숫가 같은 눈을 감고 무언가를 음미하는 듯 고개를 기울인 채 오래 침묵한 끝에 나를 끌어안았다. 넌 무척 용감한 사람이구나. E의 따뜻한 품에 고개를 묻고 그대로 잠들고 싶은 욕심을 꾸역꾸역 밀어내면서, 나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 뭐라고 반박을 줄줄 하려다가 입을 닫았었다. 내가 만나고 들여다본 사람 중 가장 용감하고 가장 대담한 사람은 너인걸, 같은 생각을 몰래 곱씹으면서.

그리하여 E를 초대해 이 풀과 물이 많고 고양이 우는 소리가 자주 들리는 동네에 데려온 것은 어쩌면 나의 근본까지도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욕망에서 온 행동일 수도 있었겠다.

 

해가 더욱 빨리 떨어지고 미적거리며 태어나는 계절이 빠르게 왔다. 말할 때마다 성에가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와 대기 중으로 산산이 흩어지는 그런 계절에 나는 E를 이 마을에 데리고 왔다.

도회적인 사람이기 때문이었을까. E는 오래 자라고 가지를 정돈하지 않은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이 마을을,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나는 마을을, 넓지만 사람이 없는 책방이나 카페테리아가 줄줄이 늘어져 있고 테이블이 다섯 개 이상 놓여 있는 음식점이 전혀 없는 이 동네를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오래 응시하려고 했다. 돌연 한 자리에 멈춰서서 오랫동안 그 무엇을 보고, 동네의 냄새를 맡다가, 이제 됐어, 운을 틔우며 부끄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나는 다시 E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E는 작은 숲길처럼 펼쳐진 개울 인근의 산책로를 유독 좋아했다. 그 애가 이 마을의 공기와, 소리, 그리고 우거진 녹음을 사랑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나도 사랑하고 싶어졌다. 내가 나고 자라 떠난 적 없었던 나의 근원을, 나의 역사를.

 

E는 이 겨울날 아직도 고집스럽게 푸르기를 포기하지 않는 마을의 전경이 나를 닮았다고 말하며 웃었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이며 옅은 웃음소리로 민망함을 무마하려는 그 웃음에 전염된 듯 나도 함께 웃었다. 그렇게 하면 내가 느끼는 이 부끄럽고 행복한 간질거림까지도 전부 웃는 소리 아래에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른 입술을 핥으며 어색하게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과연 이 마을은 아직도 발가벗겨진 나무가 많지 않았다. 꿋꿋하게 키우고 품은 새파란 잎들을 부둥켜안고 칼바람에 맞서는 나무들의 키가 제법 컸고, 그 줄기들은 또 고집스러운 수목 각각의 삶을 대표하듯 굵고 강직했다. 어느 겨울에도 딱히 대단해 보이지 않았던 이 숲길이 E의 발화를 새옷처럼 입고 반짝거리며 춤추는 것 같았다. E가 바라보는 세계를, E의 눈이 가진 시계를 간절히 얻고 싶었다. 나의 어린 칼리오페, 노래의 정령.

그리고 그 다리 밑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E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데려왔다는 사실이 들키기라도 할 것처럼 불안해져서, 나는 E의 손을 엮어 잡은 손에 힘을 꽉 실어대며 피아노다, 바람처럼 가벼운 탄성 소리를 냈다. 다리 밑의 피아노를 반드시 E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 악기는 한때 나에게 이해할 수 없는 낭만의 산물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다리 아래 있어도 습기가 시종일관 치고 올라오는 이 강물 옆에 우두커니 서서, 여름이고 겨울이고 그 바람과 염기를 맞으면서 같은 자리를 지키고 앉아 누군가가 연주해 주기를 기다리는 주인 없는 악기, 즉 공공물, 외롭기만 한. 나는 이런 곳에서도 음악을 듣거나 연주하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의지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 왔지만 이제는 아니다. 학교 아이들을 먼저 불러 모아 놓고 노래하듯 연주한 E의 리사이틀이 나를 이루고 있는 원소 하나하나를 그 연주 소리의 파장으로 뒤흔들어 교체해 놓았다. 그러므로 나의 고적하고 잔잔한 근원에, 이 삶의 뿌리가 되는 동네의 주인 없는 악기, 조율될 일도 다시 만들어질 일도 없을 그저 공공물 앞에 E를 데려오고 싶었다. 참을 수 없이 부끄럽고 숨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간질간질하고 낯선 행복을 견디느라 털부츠 안에 숨은 발가락이 자꾸 곱아들고 있었다. 낡은 피아노를 발견한 E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한 곡 연주해 줘.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에델바이스밖에 없어서 어색하게 인조 가죽 의자 위에 덜렁 앉아 어색한 폼으로 건반을 두드렸던 나에게 말하며.

 

*

 

오랜 기억이 머리카락처럼 한 올씩 수면 위로 올라와 긴 자취를 남기고 발칙하게도 나를 흔들어 깨운다. 칠팔 년 전 마주친 첫사랑의 옛 기억은 그때의 일이 부끄럽고 벅차 일기장에도, 그 어디에도 남기지 못한 나를 힐난하는 듯이 잊을 때쯤마다 꿈속으로 나를 호령해 그 옛날 만났던, 키가 크고 아직 젖살이 다 빠지지 않은 분홍색 머리카락의 여자아이를 그려 주었다. 쓰리 버튼 재킷이 살짝 짧고, 교복 치마 아래로 무릎이 보일 듯 말 듯 간질간질하게 가려져 있던 그 여자애, 이제는 온 세상이 다 아는 파가니니의 후손. E는 비행기를 탔다. 열아홉 살 되던 해에 아주 멀리 떠났다. 그의 연주를, 온 인류의 혼을 흔들어 적실 그런 연주를 나만 들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멀리 떠나는 E의 출항길에 따라가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고 돌아왔었다. 그런 뒤에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때까지 울기도 했었다. 세상에서 가장 부끄럽고 절박한 기억.

 

왜 벌써 깼니.

옛날 꿈을 좀 꿨어. 아직 안 잤구나.

또 내가 나왔구나. 이상하게 잠이 안 왔어. 널 안아 주는 날이라는 걸 알았나.

 

그리고 나를 울렸던 첫사랑, E는 잠시 침실 문 너머로 사라져 부스럭거리더니 물 한 잔을 손에 덩그러니 들고 돌아와 침상에 걸터앉는다. 잔을 감아쥐는 내 손등 위로 따뜻한 체온이 얇게 달라붙는다. 누웠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는지 조금 부스스하게 일어나 있는 긴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모습을 나는 멍하니 바라본다. 그 언젠가 E가 나의 마을을 볼 때 그랬던 것처럼, 잊지 않고 싶은 마음으로, 망막에 천천히 각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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