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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커미션 작업물은 신청자의 허가 및 요청으로 등장인물의 이름을 이니셜 처리해 전문 게시 및 검색 허용으로 전환합니다.
본 작업물은 웹툰 <신의 탑> 등장인물을 기반으로 SF AU로 작업한 2차 창작물임을 밝힙니다.
미끈하다.
흘러내린다.
세상으로부터.
이 지상으로부터, 달의 피막으로부터.
나는 이 정교하게 기름칠된 세계의 톱니바퀴를 밟고 미끄러져 추락한다. 동시에 함몰된다. 녹아들어 하나가 된다. 야만의 것들 속으로, 역사라고 부르는 ‘쓰인 시간’의 바깥으로 스며드는 듯이 내동댕이쳐진다. 부드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찢어진다. 빛의 밖으로, 깊은 외우주의 품으로.
분해되어 나부낀다. 전에 없던 중량감과 함께 노란 탄식으로 분화한다.
희미하게, 쇳소리가 들린다.
살아 숨 쉬는 자들의 쉴 틈 없이 맞부딪치며 이동하는 소리가 종소리처럼 퍼진 끝에 엷게 든 잠을 뒤흔들어 떨친다. 여자는 아무런 소리도 없이, 놀람과 충격으로 발작처럼 몸을 떨치지 않고, 처음부터 그 자리에 깊이 박혀 있던 돌처럼 초연하고 무겁게, 눈꺼풀을 밀어 올린다.
유황 냄새 같은 것이 코를 간질인다. 두려운 것은 없다. 의문도 없다. 낯선 감각이다. 공포와는 멀되 의문과는 가까운 삶이었다. 일생 그 무엇도 감히 이 일신 포 비더의 고명딸을 위협할 수 없으되 거룩하게 오시하는 눈 아래 그 어느 것도 공정하거나 참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알 수 없는 찬란함과 비탄을 한데 담은 이 세계의 그릇을 해문하는 것이 그의 과업이었다. 그러한 과업이라면 우아하게 그 자리에 앉아 두 발을 모은 채 창틀을 타고 흘러드는 미풍을 맞으며 행해도 좋았을 것이다. 그는 이 천지에 관한 학자이고, 탐구자였다. 평생을 내도록 두 손가락에 피도 물도 묻힐 일이라고는 없어도 좋았을.
그러나 그의 피에 맺힌 사명이 있다.
이 별의 핵, 끓어오르는 바다 아래 거름이 되어간 것들을 대변할 의무, 이 세상에서 그들의 삯을 대신 받아낼 이유가. 작일에 그가 따르려 했던 어떤 남자를 반추한다. 이 지상에 그가 풀어헤치기로 작정하고 훔쳐낸 판도라의 상자를 기억한다. 뼈처럼 끌어안고 버틴 진실을, 목숨을 기억한다. 선혈의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발소리가 쿵쿵 울린다. 한 쌍, 아니 둘, 아니 넷, 아니, 아니……. E는 눈을 감는다. 공명하는 듯이 그의 심장을 두들기는 인기척이 새까맣게 오밀조밀하다. 그의 눈꺼풀 아래 그려지는 대로변을 검게 덮고 횡진한다. 단지 이 세계의 법칙에 준거하는 남자로부터 받은 명령만으로 까마득하게 높은 거목이나 다름없는 그, ■■■■ E를 수색하기 위해 땅과 하늘을 뒤진다. 희미한 웃음이 E의 입가에 번졌다. 아, 사랑스러운 자들이여. 이토록 연약한, 손 아래 거스러미처럼 부서지고 버려지기 쉬운……. 여자는 양팔을 반대편 어깨에 올리고 단단하게 끌어당긴다. 그 자신을 껴안는 것만 같은 동작으로 그는 세계를 품는다. 그를 쫓는 세계를.
아버지.
당신의 선견을 지혜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왔을까요? 하지만 내가, 이 E가 그를 인정하면 그들은 무엇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까……. 여자는 눈을 연신 껌뻑거린다. 붉게 물드는 시계가 일렁인다. 다가온다. 아니, 달려든다. 순진하고 용맹한 저들의 발걸음. 셋, 아니, 네 명이다. 맺힌 피가 어룽져 떨어진다. 중력을 받아 낙하하는 유체보다 빠르게, 날카롭게 쇄도한 손은 손톱 대신 손바닥을 내세운다. 저지하는 듯 뻗은 흰 손바닥으로부터, E는, 우박처럼 날카롭게 비산하는 힘 대신 그들을 억류하는 바람을 일으킨다. 오만을 부리고 있군. 익숙한 남자의 음성이 뇌리를 뒤흔들고 있다. 너의 힘은 그 정도가 아니야. 속삭인다. 바로 그 전능함이 너의 패착이 될 것이다. ■■■! 여자는 호령한다. 화려한 침묵 속으로, 응신할 이 없는 소란을 향하여. 누구든 새끼손가락으로도 없앨 수 있는 너의 그 강인함, 그 강고함에서 비롯하여 알량하게 피어오른 선심이야말로.
너에게 덫이 되고 낫이 되리라.
지고한 것들은 지고한 것들의 순리대로의 시간에 순응하여 살아갈 것이니.
그럴까?
여자는 흐린 눈빛으로 웃는다. 그렇게 될까? 고통스런 예감이 가슴에 맺힌다. 내가 보살피고 어루만진 그 모든 세태를 모두 후회할 날이 올까? 눈가에 맺힌 피가 뺨을 타고 흐른다. 기이하리만치 뜨뜻하고 투명한 감촉으로. 여자는 다시 팔을 뻗는다. 손끝으로 바람길을 만들어 북풍을 끌어당긴다. 칼날처럼 휘도는 날카로운 바람이 병장기를 가르고 방패를 갈라 흉터를 남긴다. 속에서, 그 속에서 불길이 솟아오른다. 넋을 잃고 E를 올려다보는 남자의 흉갑을 꿰뚫고 치솟는다. E에게로, ■■■의 옛 신부를 향하여, 그 고결한 품으로.
업을 태우고 말 화마처럼.
누군가의 소행이었을지는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기, 바로 이 세계의 지금이라는 역사 속에서 ■■■■ E를 처형해야만 하는 사람은 단 한 명이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모든 장병들은 가짜이다. 명령받은 신실함, 눈을 가린 충성심 따위야 E에게 그 무엇도 되지 못했다. 그가 이제껏 어르고 돌보아 온 어리고 가련한 영혼들의 숲 속 일신일 뿐. 그러므로 그 무엇이 그의 수족이 되지 않을 수 있으랴. E는 고개를 젓는다. 벼락처럼 치솟는 불은 다른 곳을 향했건만 눈앞이 검게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다. 여자는 불에 벗겨져 선혈을 물고 드러난 팔목의 여린 살을 움켜쥔 채 달린다. 허공을 짚어 누르며 활공할 수도 있었을 전능한 두 발을 흙바닥에 디뎌 박찬다. 심장이 조급한 마음만큼 급한 박자로 내달린다. 그보다 더 먼저 향한다. 그 여자에게로, Y에게로.
이제, 두려운 것은 없다. 의문도 없다.
혼란이 지나고 다만 절식에 가까운 고요함이 남았다. 이제 그에게는, 모든 것이 명징하다. 해야 할 일과 해도 좋을 일, 그리고 그 언젠가 자타의 발치에 버려진 혼들이 명약관화한 형상으로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다. 외면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기에 자명하다. 그의 앞에 깔린 길은 가시밭길일지언정 모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몸소 언어가 되고 파장이 된 그 여자는.
어디로도 쓸려갈 수 있을 것처럼 무르고, 연하고, 그러나 견강한 눈빛의 그 여자, Y는.
거듭 그를 떠올릴 때마다 미세하게 갈라진 바위틈의 빛처럼 새어나오는 옅고 투명한 공포는, 피처럼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는 간절한 혼란은.
E는 눈을 부릅뜨고 저 위의 해면을 오시한다. 이때 심해의 육중한 물길을 가르고 전격처럼 쏟아지는 빛이 있다. 그러니까 이 탑에도 하늘이라는 것이 있다. 흡사 천지창조를 이루어 내듯 거룩한 금색 남자가 쌓아 올린 하늘, 생태와 그리고 법칙들. 하늘이라는 미명 하에 그어진 거룩한 불가침의 선, 신, 또는 ■■■라고 불리는 것. 여자가 맨손으로 쳐내어 뿌리친 섬광은 반대편으로 날아가 꽂힌다. 반파되어 흘러내리다시피 기울어진 옛 건물 사이로 찌르고 들어가 뱀처럼 자취를 감춘다. 굉음과 함께 석벽이 뭉그러진다. 비로소 E는 겁도 없이 지면을 박차고 두드리던 발끝을 놀린다. 달려온 자리를 따라 패인 홈 안으로 핏자국이 늘어진다. 섬세하게 채색된 장미꽃밭처럼 점점이 퍼진다. 씻은 듯 밀려 나갔던 단정한 공포가 다시 비가역적인 변화와 함께 일그러져 썰물처럼 밀려든다. 그의 도주, 또는 그의 반역 따위가 일으킨 어떠한 참상의 아래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꺼져간 어떤 목숨들을 가늠한다. 그의 정신이 명멸하듯 꺼진 뒤에 그 자신의 일신을 이끌어 여기까지 옮긴, 알 수 없는, 어떠한 이지도 인류에의 호혜도 기대할 수 없는 날것의 본성으로 응집된 무엇을, 그 안에 잠든 채 금색 눈을 굴리고 있는 그것을 곱씹는다. 돌아본다.
E는 그의 벌어진 핏줄이 가시꽃처럼 남긴 발자취를 돌아본다.
사냥을 피해 어디로 달아날 수 있나.
그의 고장, 그의 환향이 될 그 여자에게로.
마침내 모든 권능을 다 소진하고 축 늘어진 그를 대신해 몸을 지탱할 어떠한 야수의 손에 의해 단말마조차 없이 찢겨나갈, 그의 연약하고 애처롭기 짝이 없는 어린 봄에게로.
이제 막 피어나서 핀 줄도 모르게 꺼져갈…….
그는 다시 발길을 돌린다.
어쩌면 그를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거칠게 흔들리는 이 닻 잃은 배와 다르지 않은 삶에, 그를 다시 편입시키고 빛처럼 새어드는 연하고 따뜻한 삶의 냄새를 맡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어쩌면 여기에서 이대로, 다음 세대의 그 누군가에게 일을 내맡긴 채로, 꼭꼭 숨겨놓은 보물처럼 ‘아직 읽히지 않은’ 역사를 잘 묻고 토닥토닥 재워 그 위에 일신을 안치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 인류는 살아 있기에 역동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힘을 믿지 않았던 적이 단 한 순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름도 때와 장소도 모르는 그 누군가의 탄생과 그들이 불러올 어떠한 불길을 맥없이 기다리며 여기에 비석과 다르지 않은 몸을 우두커니 세울 수도 있다. 필연 가능했을 것이다. E는 그 자신이 부친에게 대체 얼마만큼이나 지고하고 깊은 빛이 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그의 무차별에 가까운 냉엄한 탐구욕이 이 땅 위를 향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그의 미온의 사랑이 얇게 덧씌워진 이 세계의 기대器臺와, 또한 E를 둘러싼 거대한 비호를. 죽어도 죽음이라는 간결한 두 글자로는 화하지 못하는 것이 권세를 짊어진 자들의 운명이다. 그는 역사가 될 것이다. 축소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어째서 포기하지 못하고 있나.
아집과 다르지 않은 질감의 이 거친 투쟁심은 어디에서부터 피어오르는가.
아니, 아니. 어째서 포기하지 못하고 있느냐니. E는 실소와 함께 다시 자문한다.
포기라니, 다음 세대라니, 감히 어찌 그런 짧고 무른 기약을 남긴단 말인가. 여자는 시큰거리는 흰 발꿈치로 지면을 짚어 일신을 돌린다. 무색의 십이월을 감아쥔 손아귀에 단단하게 힘이 어린다. 유황과 불의 향, 바짝 마른 정광을 내려다본다. 어찌 너의 죽음 뒤로 밀려오는 평화와 평등 따위에 희망을 걸 수 있으랴.
이 내가,
살아서 이 땅을 밟고 있는데.
이 바다를 가르고 하늘을 찢어낼 수 있는 ■■■■ E ■■■의 이름이, 아직 꺾이지 않았는데.
활강한다.
빛깔 없는 그의 전능한 퀴니에가 허공을 가르자 지면이 울린다. 물들이 그의 부름에 화답해 쇄도한다. 찰나 벌어져 진공 상태가 된, 십이월이 가르고 지나간 자리를 빼곡하게 메우고 날카로운 창이 되어 허공을 춤춘다. 투명하게 얼비치는 물줄기 사이로 봄철 만개한 꽃송이처럼 나부끼는 선홍색 머리카락이 있다. 무른 마음, 강인함으로 인하여 싹트고 무성하게 뿌리를 내린 ‘알량한 선함’으로, E는 그를 향하여 쇄도하는 일신을 갈라 뭉개는 대신 꿰뚫어 떨군다. 그의 무의식 사이로 분화한 광증이 대신할 살해 따위 없도록 하리라는 의지로, 날아드는 새를 격추하여 숨통만 남기는 듯이 말끔하게. 일사불란하게 가라앉아 강을 이루며 흐른 물들이 경례하듯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갈라진다. 선혈을 머금고 이 마른 땅, 화약과 고성의 고장에 스민다. 다른 생명을 예고하듯. E의 느린 걸음이 비로소 또렷하게 길을 그린다. 흔들리지 않고, 비틀거리지 않고, 곧은 걸음, 일정한 보폭과 균등한 패임을 남기며.
*
Y.
바람처럼 속삭이는 소리에 비로소 소녀의 얕은 잠은 떨쳐진다. 퍼뜩 눈을 뜨고 튕겨나가듯 지친 몸을 일으킨다. 이 나무 너머에 봄의 얼굴을 지닌 사신이 있다. 그러나 그가 페르세포네라면 내 혼이 안착할 자리는 이 흙 아래 깊은 저승의 품이어도 좋으리라. Y는 숨죽인 채 길게 드리운 버들을 양손으로 움켜쥔다. 여기에, 떨리는 손이 있다. 희게 질린 입술이 있다. 공포와 기대 중 어느 쪽이 더 큰가를 감히 저울질하지 못하는 어리고 맑은 여자가 있다. 문 너머의 사신은 그런 그를 기다린다. 이 얇고 가느다란 줄기 따위 새끼손가락으로도 뜯어내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격하시킬 수 있는 전능한 어떤 여자가 그의 환대를 기다리며 서서 기다리고 있다. 고강한 퀴니에를 움켜쥐고, 저승의 우아한 몸짓으로. 드리운 어둠과 세밀하게 늘어진 버들가지의 그림자 사이로 E의 흰 발등이 일렁거린다. 피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방금 찌르고 온 누군가의 목숨과 더불어 제멋대로 엉킨 E의 혈향. 진득하게 눌러붙은 발, 흰 발. 여느 그와 같이 부드럽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망토, 그리고 쉴 틈 없이 부는 바람과 소연한 버들가지의 그을린 신음들. Y는 눈을 질끈 감은 뒤에 드리운 나뭇가지들을 젖혀낸다. 임박할지 모르는 어떤 고통을 향한 다부진 결심과 함께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그러나 비로소 따뜻한 무게감이 얹힌다. Y. 다시 속삭이는 소리가 그의 귓가에 조용히 스며든다.
알 수 있다.
Y는 질끈 붙인 눈꺼풀을 천천히 밀어올린다. 시계가 흐린 탓에 E의 마지막 눈동자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가 익히 알고 있는 그런 투명한 눈동자는 아니리라는 것을 직감한 채로도, 그러나 사랑하는 나의 큰 고래……. 당신의 눈을 마주볼 수만 있다면. 소녀의 속눈썹 아래 맺힌 눈물이 알알이 뭉쳐 뺨을 타고 미끄러진다. 알 수 있다. 알 수 있어, E. 이제 당신이 나를 부를 수 없는 것을. 그러니 아마도 이 부름은. 하나 맹랑하게도 소녀는 여자의 일신을 끌어안는다. 어깨 너머로 팔을 두르고 목에 걸어 당긴다. 아득히 먼 저 위에 걸려 있었을 E의 심장을 그의 가슴께에 당겨 붙인다. 나의 지혜, 빛의 샘, 만인에게 봄이고 또 미풍이었을 당신. 아니, 나는 후회하지 않아. 당신을 찾아 나선 이 길을, 외따로 유약한 이 몸으로 파도에 쓸리고 바람에 깎이고 혹한에 얼었다가 다시 작열하듯 타오르며 걸어온 이 모든 길을, 당신을 만나기 위해 달려온 여정을 후회하지 않아. 소녀는 여자의 뺨에 뺨을 문지른다. 고생했다고…… 이제는 조금 쉬자고 말하지 못하게 될 조금 뒤의 그를 대신하여 떨리는 음성으로 부른다. E.
E.
점멸하는 충격과 같은 고통이 소녀의 부드러운 심장을 꿰고 지나간다.
영혼까지도 찢어발길 수 있을 듯이 날카롭고 충격적인 통증, 데인 듯 작열하는 환부, 무너지려는 작은 몸과 그리고 변함없이 따뜻한 E, E, 당신의 체온. 멀어진다. 소녀는 쓰러진다. 검은 눈동자의 E는 그를 무정히 내려다본다. 본능과 같이 부른 두 글자 발음 따위 씻은 듯 지워버린 몸짓으로,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툭 털어 떨쳐내며. 차다. 아니 그러나, 따뜻하다. 뜨거운가? 역류해 입을 타고 터져 나오는 피를 닦아낼 힘까지도 잃은 채로, 소녀는 입술을 달싹인다. 가엾게도, 나의 아름다운 상어. 다음 삶에서도 당신의 위성이 될 수만 있다면, 다시 한번 그럴 기회가 주어진다면.
E. 반쯤 파먹히다시피 곱아든 음성으로, 핏물에 틀어막힌 성대를 간신히 비빈 끝에.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나.”
들었을까.
들렸을까.
그런데 말이야, E.
너무 추워. 다음에는 나를,
*
E.
물어보고 싶은 말이 많아. 세계가 뒤집혀 돌아가고 있는 것만 같아. 당신을 한 번이라도 맛본 적이 있다면, 당신의 그 맑고 부드런 눈과 한 번이라도 맞닥뜨려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당신을 의심할 수 없을 텐데 이 온 세상이 다 당신의 피를 기다리고 있어. 그러나 이상한 일이지. 어쩐지 오래도록 예견해 왔던 것만 같은 기분이야. 이 미력한 힘, 살아 있는 모든 의지를 감각하고 지휘하는 투명하고 부끄러운 힘으로도 당신의 그것이 읽혀. 똑바로 서 있고, 스스로 타올라 밝히는 당신의 끓어 넘치는 영혼의 무게가. 어쩌면 나는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전부터 당신을 기다렸는지도 몰라. 이 하늘과 다르지 않은 천장을 갈라 비와 진짜 해가 될 당신을, 피어나는 의지의 꽃을. 당신도 나를 기다린 날이 있었을까? 나는 이제 가려고 해. 당신은 어디에서든 초신성처럼 타오르고 또 행성처럼 우직했으니 당신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을 거야. 마치 내가 당신의 궤를 따라 회전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기껍겠지. 걷다가 보면, 그렇게 당신의 궤적을 찾아 되짚다 보면 너무 늦지 않은 때에 당신을 만날 거라고 믿어. 혹자는 당신을 미친 공주라고 부르고 있어. 비통한 소문이 널리 퍼지고 있어. 슬픈 일이지 않니. 하지만 E, 걱정 마. 나에게 소문의 진위 따위야 상관없어. 미친 공주라면 어때? 사신이라면 또 어때? 당신이 하데스라면 나는 기꺼이 페르세포네가 될 수 있는걸. 나에게 당신이 필요한 것과 다르지 않은 크기로 당장,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도 내가 필요해. 느껴져. 원한다면 어디로든 갈 수 있어. 나를 불러. 우리는 만날 거야. 웃는 얼굴로 만날 수 있을 거야. E, 당신의 곁이라면 어디든 단잠이 아닐 수 있을까.
당신을 만나서는 안 될 백 가지 이유보다 당신을 만날 백한 가지 이유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이제 당신을 만나러 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E.
보고 싶어.
보고 싶어서 찾아가려고 해.
웃어줘.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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