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PLE PAGE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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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by 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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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커미션 작업물은 신청자의 허가 및 요청으로 전문 게시 및 검색 허용으로 전환합니다.

본 작업물은 웹툰 <합법 해적 파르페> 등장인물을 기반으로 작업한 2차 창작물임을 밝힙니다.

 


그곳에 있다.

흐르는 호수, 역진하는 폭포가.

마르지 않는 진실의 샘이.

 

젊은 선장은 끝없이 역류하는 폭포를 망연히 서서 올려다보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는 돌과 돌 사이에 걸려 꼼짝없이 걸린 닻처럼 우두커니 박혀 있는 것이다. 선장을 대신하여 그림자가 빙글빙글 지면을 다 돌아가도록. 대개 일없는 해면처럼 요동 없이 반들거리고는 하던 두 눈동자를 통하여 박힐 자리를 잃고 망연하게 거슬러 오르는 폭포를 반사하는 채로. 그러니까 바다를 삼십 년 넘게 누비며 자신하는 그의 지론에 의해서라면 바다는 너무나 넓고 깊어서 모든 인류가 당장 빠짐없이 바다를 조사한다 하더라도 밝혀지지 않을 신비들이 안개의 베일을 벗고 드러날 신이보다 압도적으로 많고, 그러한 미지의 품에서 나고 자란 선장은 단연 이 푸르고 선득한 근원에 대하여 영원한 무지의 영역에 있을지라도 보통의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망망대해에서 몇 년을 먹고 자며 길들여진 해상인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이 불가해의 지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중앙에서 내려온 지시 중 몇 가지는, 다소의 위험은 따르더라도, 어느 정도의 지략과 바다라는 품을 땅으로 삼은 원주민 특유의 해박함과 기막힌 운 몇 가지만 따라 준다면 그런대로 군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아주 처음부터 얼이 빠져서 하늘만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무식하게 붕 뜨는 종류의 임무를 받은 적은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하늘로 향하여 용솟음치듯 흘러내리는 폭포를.

선장은 생각한다. 아니, 저것도 ‘흘러내린다’라는 형용어에 걸맞는 현상인가? 뭐 흘러오른다? 아니, 이건 너무 파르페 같은 생각이야. 이상한 장소와 이상한 사건에 두 시간 동안이나 던져져 있었더니 글쎄 지성이 퇴화해 버렸군.

선장은 선수에 서서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다.

자, 이제 이 폭포를 어떻게 타고 오른담.

 

도결문은 바쁜 사람이다. 뱃사람이라면 누구나가 퍼질러 누워서 음식이나 축내는 게으름과는 담을 쌓고 사는지라 향락과 유희를 즐기고는 하던 해적 출신의 벨 선장, 또는 그의 부하들 역시도 몸을 부지런히 놀리며 부려대는 사치에 익숙하지만 도결문은 그들과는 결이 다소 다르다. 직접 몸을 굴리고 발을 분주하게 놀려대는 종류의 일과는 거리가 먼 자리에 있으면서도 몸소 업무의 ‘현장’에 뛰어들기를 불사하는 대담함과 도통 속을 종잡기 어려운 무사태평함이 그렇다. 반면 그 평온한 낯짝이 진정 평화를 머금고 있느냐면 그 면모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보다 악랄한 사람은 도처에 널렸지만 그만큼 화가 많은 사람은 손에 꼽힌다. 그토록이나 지시와 총괄에 익숙한 듯 보이면서도 단신으로 여러 일들을 조용히 수행해 내는 기묘함도 또한 다르다. 해적이란 휘황찬란한 것들, 바다란 뽐내기를 좋아해 윤슬처럼 번쩍거리며 멸광해 가는 자들. 그러므로 산딸기 호의 그 누구와도 도결문은 본질적으로 섞이지 않는다.

그러나 도결문의 완전히 유리되어 있는 행적이 때로 이들을 끌어당길 때가 있다. 

앞서 명시한 대로 도결문은, 바쁜 사람이다. 이 배의 그 누구보다도. 중앙의 어떤 일로 불쑥 사라졌다가 애먼 곳에서 마주치는 경우도 있고 알아서 배에 돌아와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가 대뜸 튀어나와 타의로 유령 행세를 해댈 때도 있다. 그러나 이번의 도결문은 달랐다. 다녀와야겠어요. 무심한 표정과 건조한 걸음걸이로 그는 그렇게 말하고 배를 걸어 나갔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불시착한 이 섬의 그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했을까? 대체 무엇에 이끌려 흡수당하듯 조용히 걸어가 땅을 밟았을까. 비밀 임무라도 있었나? 아니면 선홍색으로, 보라색으로, 또는 깊은 파랑으로 물결치는 이 세이렌의 바다가 그에게 무엇을 보여주었던가? 아니, 아니지. 후회나 정 따위로 움직일 만한 사람은 아니야. 이쑤시개로 찔러도 과즙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과일 모조품 같은 사람인걸. 짧은 호기심을 금방 희석시키고 벨은 술잔을 부딪쳤다. 그랬었다, 그때는. 그랬다, 그날은.

 

그러나, 도결문.

일주일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 당신에 대해 이 섬의 누구도 알지 못하잖아요. 이 세상으로부터 깨끗하게 유리되어 나간 사람처럼요. 선장은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파르페가 기별도 없이 사라진다면 괜찮다. 키우는 개가 가출 좀 했다고 해서 집의 냄새를 잊지는 않을 테니까. 파르페는 모르는 모양이지만 그는 이미 바다에 예속되어 있다. 벨은 그것을 기민하게 포착했다. 지면보다 바다에 어울리는 사람. 아니, 흙도 물도 그 무엇으로도 가둬둘 수 없는 산만하고 열렬한 검정. 그러므로 그가 돌연 자취를 감춘 일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도결문, 도결문. 당신은. 벨은 눈을 감는다. 도결문에 대해 떠올린다. 이상하게도 그 작고 무른 몸 어디에서도 약점을 찾을 수 없는 사람. 어느 해일이나 광풍이 그를 집어삼켜도 뚝뚝 바람의 손발을 으스러뜨리고 걸어 나올 것만 같은 그런 사회적 강자. 내가 본 당신이 진실이었을까. 배에서 내린 선장은 역진하는 폭포의 지근거리에 다가선다. 주먹으로 대충 움켜쥐어 뜯은 잔디 모가지들이 끽끽깩깩 비명을 질러대는 소리에는 개의치 않고 그것들을 모조리 ‘흘러오르는’ 폭포의 강가 속으로 쑤셔 넣는다. 풀잎들은 꼬르륵 깨르륵 하며 물길을 따라 올라간다. 선장은 유영해 ‘떠올라가는’ 잎들의 족적을 눈동자로 쫓는다. 이 물길을 따라 올라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배가 거꾸로 뒤집힌 채로 항진하려나. 돛을 아래로, 닻을 위로 치켜세운 채로. 저 뒤집힌 쪽의 강물 위는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을까. 이런 곳에 산딸기 호라는 주사위를 던질 수는 없는 법이니 따로 나룻배를 구해 올라가야겠다. 벨은 다시금 기가 차 애매하게 웃으며 까마득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가 본디 모험과 탐구에 대한 넘치는 욕구 그리고 기이한 행운을 통하여 선장이라는 자리를 꿰차기는 했지만 자의로 험지에 달려드는 것과 어쩔 수 없이 목을 내놓고 기요틴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 사이에는 거대한 강이 흐른다. 그러나 이 섬의 ‘땅 위 하늘 아래’에서 찾을 수 있는 도결문의 자취는 이미 이 역류하는 강의 상류를 가리키고 있다. 벨은 밤하늘과 포도주를 마구 풀어놓은 듯이 넘실거리는 수류를 넘어 무엇을 수행하러 떠났을 도결문의 일견 무념해 보이며 평온한 얼굴을 그려 본다. 참, 내가 대체 무슨 악행을 그렇게 저질렀기에 (물론 저지른 악행의 개수만 따졌을 때 나에게 일방적이고 불리하며 편협한 결과가 나오겠지만) 행방불명 파르페도 아니고 행방불명 도결문을 찾아야 한단 말이에요. 꽉 닫힌 입 안에서 움찔거리는 혀로 궁시렁대며 울창한 숲길을 돌아 터덜터덜 밟는다. 땅과 하늘이 거꾸로 빙빙 도는 것처럼 울렁울렁 제멋대로 움직인다. 저기, 숲의 바깥에서, 벨의 수난기가 파도처럼 와르르 몰려오고 있다. 이름만 알고 있는 외딴 섬의 불시착으로부터.

 

가엾고 딱한 선장은 숲을 가로질러 나가 마을을 수소문했다. 그 방법은 간명하며 전통적이다. 그의 주머니에 고이 간직해 두었던, 반짝반짝 오색찬란한 빛깔의 보석을 꿴 장신구 중 한 가지를 꺼내 흔들며 사람들의 욕망을 주무르면 된다. 이번에는 투명한 금빛 호박이 사용되었다. 안에는 날개옷을 입은 요정이 잠들다시피 가버린 시신이 든 고요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박제본. 둥글둥글하고 반질거리는 알약처럼 생긴 주민들은 호박을 걸 수 있는 굴곡도 없는 몸으로 이 보석을 차지하기 위해 작고 튼튼한 나룻배와 몇 가지 정보, 그리고 생존에 필요한 물품 몇 가지를 바리바리 준비해 주었다. 그러나 벨이 보수로 내놓은, 요정 안은 호박을 받아들고 갑충의 등처럼 매끈한 몸 어디에 걸지 못해 안절부절하던 주민이 보수를 결국 어떻게 했더라? 호박을 뾰족한 브로치에 붙여 송곳을 반질거리는 몸 어딘가에 박았던가? 벨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그는 톡톡한 보상을 건넸다. 그것이 어떤 사람들을 어떻게 움직일지 잘 알았기에.

 

가엾고 딱한 선장은 호박으로 산 나룻배에 앉아 노를 젓는다. 와글바글 몰려다니고는 하는 것이 꼭 해적만의 버릇은 아니겠으나, 어쨌든 이런 고적한 경험은 제법 오랜만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근래, 특히 산딸기 호를 떠맡은 뒤로 선장의 삶은 군림이 아니라 군집에 가까운 형태로 굳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만하기 짝이 없는 바보가 하나 이 배에 탄 뒤로는 더더욱 뱃사람의 공허한 고독을 체험할 겨를 따위가 없었다. 이 섬을 둘러싼 바다와 강물은 이상한 빛이다. 기름 낀 듯 반짝거리고, 어떤 신이 마시던 포도주를 종일 흘리고 잠든 듯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보라색 물길이 청량하고 어두운 암색 급류 사이마다 가닥가닥 끼어들어 미끈하게 굴러가고 있다. 그러나 강물은 중력과는 정확히 반대로 흐르고 있다. 완만한 경사를 따라 꾸역꾸역 ‘흘러오르고’, 절벽의 폭포는 우뚝 선 격벽처럼 행로를 틀어막고 있다. 그러나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말지어다. 벨은 노를 회수해 배를 꽉 움켜쥔다. 이 폭포수는 ‘중력에 순응해 추락하는 것과 꼭 똑같은 속도로’ 벨을 올려줄 것이다. 이미 아주 많은 것들을 저 물 안에 던져 확인해 봤으니까! 믿어 의심치 않으며 벨은 호기로운 기색으로 허리를 굽힌다. 유체저항을 줄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벨의 결정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관측한 바와 달리 까마득하게 올라간 끝에 거구의 여성과 그를 실은 나무배 쪼가리는 폭포수 안으로 왈칵 먹혀들어간다. 허리케인처럼 수평으로 이 폭포수를 한껏 빨아들이는 소용돌이 속에 삼켜지며, 선장은 그 자신의 가엾고 딱한 처지를 다시 곱씹는다. 강물은 이상하게도 씁쓸한 맛이다.

 

가엾고 딱한 선장,

눈을 뜬다.

아직 입안에 쓴 강물이 남아 혀 아래와 이 사이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니는 것만 같다. 그러나 누군가가 있다. 이 푹신하고 어두운 공간, 물건이 명과 암에 의해서만 덩어리져 보이는 기이한 질감의 습하고 안락한 바닥 위에. 이상하게도 유기적인 감촉을 감지하고 벨은 눈을 오래도록 감았다가 다시 뜬다. 한결 편하다. 뱃사람의 눈은 육지 인간의 그것보다 더 암순응에 빠르다. 그러나 메슥거리지 않는다. 오장육부가 제멋대로 춤추며 몸 바깥으로 빠져나오려 애쓰지 않는다. 쿵쿵 발을 굴러대며 존재를 피력하지도 않는다. 이상하게도 잠잠하다. 그와 하나인 것처럼, 있어야 할 곳, 즉 풍랑 위에 있는 것처럼. 이곳은 어디인가? 벨은 옅은 탄식과 함께 엉덩이로 뭉개고 앉은 바닥을 살며시 더듬어 본다. 이곳은 지면 같지 않다. 썩은 젤리처럼 말캉하면서도 외압과 타협하지 않는 질감의 탄성을 자랑한다. 어쩌면 어떤 거대한 것의 혀 위, 또는 목구멍 안, 이를테면 위장 안 같은 자리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섭취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이곳은 어디인가?

가엾고 딱한 선장, 몸을 일으키지 않고 바닥을 더듬어 기어간다. 이 어둡고 이상한 곳의 윤곽을 파악하기 위해 손에 잡히는 것이라고는 모조리 만져대며 사지와 무릎으로 천천히 걸어 나간다. 새까맣게 잊은 어떤 존재감을 상기한 것은 돌연 부드럽고 축축한 면 한 장이 손에 잡혔을 때이다. 이곳이 빛 아래가 아님에 안심하며 벨은 빠르게 몸을 뒤로 물린다. 반듯하게 앉았다가 목을 길게 빼고 눈앞의 인영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익숙한 모양이다. 마치 그가 찾아 헤매던 것과 같은. 사물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뜬다. (실제로 사물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철컥, 장전하는 소리를 포착하고 무심코 비명을 지른다.

벨 선장?

도결문이다.

 

도결문.

산딸기 호의 총괄 감독, 상사 비슷한 사람. 이 배의 풍류와는 놀랍게도 반대로만 가는 사람. 관성처럼, 바람 불면 날아갈 것처럼 둥실둥실 떠서 해류 위에 살아가는 그들을 닻처럼 끌어내려 매어두는 중력처럼. 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별안간 앞뒤 가리지 않고 어떤 말이 조르르 그를 앞서 달려나간다. 왜 여기 있어요? 도결문은 침묵한다. 음, 지루한 침음성으로 텅 빈 공간을 밋밋하게 채울 따름이다. 재미없고 비밀이 많은 사람, 도결문이 맞구나. 긴장이 풀려 벨은 덜렁 드러눕는다. 누운 채 눈을 깜빡거려도 저 위에는 보이는 하늘이 없다. 불쑥 밀려오는 갑갑함을 곱씹는다. 나는 언제나 하늘을 보는 삶과 비비며 살아왔는걸. 왜 여기 있어요? 이번에는 벨의 성대를 문지르지 않은 질문이 허공에 메아리처럼 부딪쳐 돈다. 왜 여기 있냐고요?

당연히 당신을 찾으러 왔죠.

언제나처럼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실수했네. 뇌까리는 소리를 시작으로 도결문의 입이 열린다. 

도결문은, 이곳이 검은 파도의 입 속이라고 설명한다. 편의상 입 속이라고들 부르지만 실제로 소화를 실행하는, 즉 위장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기관은 없고 원할 때면 언제라도 똑바로 길을 찾아 나갈 수 있다고 덧붙인다. 그러니까 보옥을 숨긴 동굴에 좀 더 가까운 장소인 것이다. 다만, 이곳은 원체 빛이 잘 들지 않는 자리인지라 물건을 찾는 데에 애를 먹느라 나가지 않고 있었다. 더불어 이 검은 파도에 속한 것들은 느리게 살게 된다는 설명도 곁들인다. 그래서 열흘이 다 되도록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구나. 하지만 이러한 전후 상황을 감안한 뒤에도 벨은 기이함을 느낀다. 지금 당장 보이는 도결문에게서는 이상할 정도로, 어떠한 친절이 잘못 잘린 케이크의 무너진 속처럼 흘러나오고 있다. 왜일까? 왜 도결문은 친절하게 사건의 발단과 전개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일까? 도결문을 찾아 몸소 여기까지 기어 들어온 벨의 수고로움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아니면 작당하고 있는 속이 따로 있으려나? 그것도 아니라면, 이 지역이, 검은 파도의 입 속이라는 것이…… 어떤 특수한 상태를 유도하는 힘이라도 가지고 있는가?

계산에 천착한 끝에 벨은 고개를 갸우뚱 떨군다. 벨이 무엇을 어떻게 하느라 뜸을 들이고 있는지까지는 도결문에게 포착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장소가 있다면 전설이 될 법도 한데 나는 왜 몰랐을까요.

잊으니까요.

잊어요?

네. 여긴 지도에 표시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따지자면 아공간……. 바다의 꿈 속이거든요. 자고 일어나서 꿈을 의식적으로 복기하지 않으면 대부분 날아가 버리죠. 그건 꿈이 일종의 무의식, 즉 실존하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현상적인 차원이기 때문에. 이곳도 같은 원리죠. 어쩌다 검은 파도의 입 속에 들어오더라도 그런 사실을 모두 잊어버려요. 여기에서 한 행동, 있었던 일, 들어오고 나가는 과정까지도 전부.

그래서 친절하구나.

무슨 의미인지 알 만하네요. 쇠를 긁는 듯한 미세한 마찰음에 벨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뒤로 뺀다. 서늘한 감촉이 이마를 지그시 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쩜 이 어둠 속에서도 상대방의 급소만큼은 귀신같이 파악해 겨누는지. 그렇다면 여기는 바다의 꿈 속. 그러니까 나의 꿈도 도결문의 꿈도 아닌 채로, 실존하면서 밟고 있는 어떤 거대한 추상과 이념의 장. 그렇다고 해도 꿈의 주체가 도결문이 아닌데 어떻게 그는 이토록 평소와는 다르게 행동하고 있을까? (비록 그가 지금 당장 총으로 내 머리를 겨누고 있을지라도.) 아니, 그보다도. ‘실제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공간을 도결문은 어떻게 찾아와서, 게다가 대체 무슨 물건을 여기에서 찾는 것인지. 벨은 물컹거리고 탄성 있는 바닥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러 짚었다. 손에 걸리는 것은 없다. 

 

찾으려는 게 뭔데요? 기왕 들어왔으니 같이 찾아줄게요. 산딸기 호가 기다리고 있어요. 선장이 찾을 수 있는 물건은 아닌데……. 정 돕고 싶거든 와서 머리카락이나 비춰 줘요. 여긴 바다의 무의식이라서, 모든 빛을 다 마실 수 있지만 유일하게 푸른 파장만큼은 뱉어내거든요. 그래서 당신의 머리카락이 빛처럼 작용하네요. 신기해라. 벨 선장도 써먹을 구석이 다 있네요. 그것 참 사략선 선장을 남의 꿈에서 등불로 써먹기 전에는 무슨 생각으로 나와 일한 건지 궁금해지는 말인걸요. 벨은 머리카락을 몇 가닥 똑똑 뽑아낸다. 도결문, 손 어디 있어요? 손? 이상하게도 손? 하고 되묻는 도결문의 시큰둥한 표정과 굳게 닫힌 눈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진다. 난 당신을 그렇게까지 깊이 눈여겨본 적이 없는데 이상한 일이지요. 더불어 요청에 응하듯 어떤 어두운 덩어리가 움직여 다가오자 벨은 그것을 덥석 잡는다. 이건가? 허튼 짓거리를 할 거라면 총 맞지 않도록 조심해요. 검은 바다에서 밝게 둥둥 떠다니는 당신 머리 정도는 눈 감고도 맞출 수 있어. 눈은 항상 감고 다니잖아요. 대꾸한 벨은 문득 생각한다. 그래. 도결문은 눈을 항상 감고 다니지. 무슨 버릇이라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지간해서는 눈동자를 보여주는 일이 없단 말이야. 파르페는 그런 도결문의 눈동자 색을 어떻게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을까. 파르페랑 눈 뜨고 대화한 적 있어요? 없어요. 이상하네. 여기 당신보다 이상한 게 있나, 신기하네. 그거야 많죠. 늘 신비로울 정도로 화가 나 있는 도결문과……. 탕! 총성이 울리고 귓가를 스치는 사나운 날파람이 총알의 궤적이었음을 포착한 벨은 입을 닫는다. 혀를 놀려 떠드는 대신 손을 놀린다. 양손에 움켜쥐고 있는 것을 더듬어 손바닥과 손등을 찾는다. 빛을 반사해 빛난다고는 하나 아주 희미하고 연약해 그 자신의 윤곽만 겨우 보여줄 수 있을 따름인 이 머리칼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건지 몰라도 그런 요청을 빌미로 도결문에게 짓궂은 짓을 저질러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곧 낯선 느낌이 엄습한다. 이런 장소가 아니었다면 도결문의 손을 잡을 날이 평생에 한 번이라도 왔을까. 이 부드럽고 야윈 손을, 뼈가 잘 만져지고, 굵게 도드라진 흉터가 없는, 그러나 자잘한 흉으로 마른 흙처럼 아주 미세하게 갈라진 손등을 잡아볼 날이라는 것이. 한동안 도결문의 왼손을 성서처럼 움켜쥐고 멍하니 서 있던 벨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도결문이 손아귀를 비틀어 빼내기 전에 검지와 중지 손가락을 잡고 각각 뽑아낸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감았다. 꼭 반지처럼, 아주 깊이,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얇은 갈퀴살과 교차하면서. 과연 빛을 반사하는 푸른색이 은은한 빛처럼 작용한다는 말대로 몇 번을 되감아 단단하게 얽힌 벨의 푸른 머리카락은 한 가닥만으로도 겹겹이 포개진 끝에 선명하게, 푸르고 밝은 띠가 되어 도결문의 손가락에 감긴다. 

뭐 하는 거예요? 머리카락을 비춰 달라고 했잖아요. 이렇게 묶어 달라는 뜻은 아니었는데요. 도결문이 가는 곳마다 내가 쫓아가서 머리통을 들이밀다가는 둘 중 한 사람은 죽어서 영원히 잘 테고 높은 확률로 그게 내가 될 것 같아서 말이에요. 그건 맞지. 잘했어요. 그래서 뭘 찾으러 온 건데요? 돌아오는 침묵은 익숙한 향이다. 귀찮고 성가셔서든, 짜증이 나서든, 대답할 만한 일이 아니어서든 간에 도결문은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거나 질문하지 않아도 알아서 술술 앞뒤를 친절하게 짚어 주는 일이 그렇지 않은 일에 비해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에이~ 어차피 여길 나가면 아무것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면서요? 나는 기억해요. 나는 기억 못 하는데. 나도 기억 못 했으면 좋겠네요. 그럼 당신을 쏴버리고 나가도 완전범죄가 될 텐데. 죽는다면 여기가 좋긴 하겠어요. 난 바다의 심장에서 태어났으니까. 바다의 심장이라, 그럼 바다의 꿈에서 죽기 전에 유언이나 남겨 봐요. 다 썩고 나면 뼈나 찾으러 다시 한번 와 줘요. 여기가 무덤이 되는 건 싫은 모양이지. 선장은 배로 돌아가야지 않겠어요? 얼떨결에 앉은 것치고는 선장 자리가 꽤 적성인가 봐요.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네요. 역시 중앙은 다르네. 당연하죠. 하지만 난 도결문에 대해 전혀 모르는걸요. 전혀? 벨은 웃는다. 꼭 그 웃음을 도결문이 볼 수 있는 것처럼. 내가 보는 당신이 진실인지 확신이 서지 않을 뿐이에요. 짧은 정적이 스타카토처럼 뚝뚝 끊어져 흐른다. 축축한 바다의 품, 또는 꿈의 경계. 도결문은 묵묵히 걸어 내려간다. 어디로든 그가 향하면 거기에 바닥이 생긴다. 그것이 무의식, 현상뿐인 세계의 법칙.

 

꿈꾸는 바다의 품에서 자라는 나무만이 맺을 수 있는 열매가 하나 있다고 해요. 예고되지 않고, 비밀스러울 정도로 작은, 도결문의 잔잔하게 읊조리는 그것 이상으로 숨을 죽인 은밀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벨은 기척을 따라 걸으며 이 앞 어딘가에 덜렁 놓여 있을 도결문의 머리통을 멀끄러미 쳐다본다. 크기는 한 이 정도…… 아, 안 보이겠구나. 대충 당신 눈알만한 크기라고 생각하면 돼요. 하지만 투명해서 잘 보이지 않죠. 잘 만지면서 찾아야 해요. 일전 중앙에서 누가 그걸 꼭 먹어야겠다고 징징댄 적이 있어요. 당시에는 철이 아닌 데다 그것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모이기 전이라 어쩔 수 없이 넘어갔지만 슬슬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죠. 생각보다는 감이라고 할까……. 그래서 왔어요. 그리고 나도 하나 가지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았거든요. 어떤 열매이길래 도결문이 탐을 내요? 가지고 있는 쪽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에요. 당신, 그리고 산딸기 호 말이에요. 그 열매는 이 바다와 닮아 있거든요. 웬만해서는 썩거나 시들지 않아요. 적어도 당신들이 살아가는 기간 동안에는.

그때 앞을 끊임없이 더듬으며 천천히 나아가던 도결문의 손가락에 걸린 푸르스름한 미명이 굴절된다. 벨의 빛이다. 빛이 굴절되어 보이는 것은 투명하나 분명히 형상이 있는 물건을 렌즈처럼 투과했기 때문에. 도결문은 앞을 조금 더 더듬는다. 오래도록 빛을 간신히 머금은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에서 벨은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본다. 도결문은 너무 작고, 반면 그의 손가락에 걸린 신비로운 열매는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도결문이 팔을 쭉 뻗어서야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벨은 그를 돕는 대신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사부작거리는 작고 캄캄한 인영을 지켜본다.

그게 어떤 열매죠?

소망.

뜻이나 소망, 살았다는 기록, 마음, 감정, 영혼의 편린, 그 무엇이든 단 한 가지를 담을 수 있는 열매예요. 한 번 보관된 것은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지만 대신 그 열매는 현상이라는 비료를 먹었으니 나무가 될 수 있죠. 담긴 것에 따라 다른 품종이 되기 때문에 보통은 전혀 다른 땅에 심겨서 죽어 버리기 마련이에요. 하지만 아쉽게 됐네요. 하나밖에 못 찾겠어요. 아~ 어쨌든 하나는 있는 거네요? 네. 하지만 이건 중앙으로 가져갈 몫이에요. 내가 탐낼 걸 알면서 왜 지금 그 열매에 대해 알려줬나요? 집요하게 물어봐 놓고 대답해 준 게 불만이에요? 그보다는 이상하게 계속 미끼를 던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요. 글쎄, 착각도 유분수지. 범인이라면 설마 간이 부어서 중앙 감시원의 주머니를 털어 먹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을 테니까요. 그리고 섬광처럼 도결문의 무사무려한 검은색 눈동자가 눈에 들어온다. 이 짙은 파도 사이에서, 검은 파도의 입 안에서.

 

하지만 당신은 왜 이것을 우리에게 주려고 했을까.

마지막 의문과 손아귀에 들어온 줄도 모르게 투명한 구체에 관한 인지 따위는 쏟아지는 폭포처럼, 또는 스치는 벼락처럼 순식간에 벨의 뇌리에서 암전되어 버린다. 의식의 수면에서 두어 번 미동한 끝에 감겼던 눈꺼풀이 퍼뜩 벌어진다. 축축하게 젖어 무거운 머리카락, 갑판의 눅눅하고 익숙한 비린내, 맑고 높은 하늘과 저 멀리 보이는 시큰둥하고 건조한 백의의 여자. 바다 따위는 내다보지 않는 중앙의 법칙, 그러나 지금 바다를 내다보고 있는.

살다 살다 갑판에 드러누워서 퍼질러 자는 선장은 또 처음 보네요.

왼손을 주먹으로 꽉 말아쥔 채 미동도 없던 작은 인영이 천천히 갑판을 향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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