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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작업물은 웹툰 <신의 탑> 등장인물을 기반으로 SF AU로 작업한 2차 창작물임을 밝힙니다.
새벽의 석양.
그의 역사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비탄을 기술하는 데에는 며칠의 논의가 필요했다. 나의 경우, 옳고 틀리고를 떠나 그의 가장 내밀한 고통까지 써내리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오독될 여지가 있는 대목이라고 여기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에 관해서만큼은, 순수하게 읽을 수 있는 낱말 하나하나만이 철필로 쓰일 자격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그에 대해 이해하려면 그의 영혼을 가로질러 새겨진 끔찍한 흉에 대해서도 이해해야 한다. 참으로 괴로운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결국, 나는 선택했다. 그도 선택했다. 그에 대해 이해할 기회를 자타에게 주기로. 어떤 별과 종의 역사에 관해 이지의 지옥 속에 스스로 손을 내밀 기회를.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철로 맞은 바위처럼 움푹 패인 그의 영혼까지도 아름답기에 그를 시인하는 것이 옳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아름답다는 대목은 순전히 내 의견이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그의 역사에 대하여 조금 기록할 생각이다.
그의 고향별이 우리 행성에서 관측된 바가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성운 또는 이 인근의 우주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많지 않으므로 나는 여기에서 그의 모성母星에 대해 내가 새로 붙인 거오성巨傲星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할 것이다. 거대한 데다 오만하기까지 한 이 별의 거민은 간접적 경험에 의하면 그 특질이 내가 두고 온 고향별의 영장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욕심이 많고, 권위적이며 지배적이고, 강인하지만 나약하고, 한 번의 삶이 절박하고, 염오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천박한 동시에 사랑스러울 정도로 낭만적이다. 한없이 사랑하기에는 내가 너무나 작은 그릇이지만 배제한 삶을 자처하기에 인류는 때때로 너무나 따뜻하고 사랑스럽다. 어느 쪽도 고르지 못해서 결국 별을 떠나 왔다. 성장하여 무리로부터 독립한 개체가 그의 기원과 보금자리를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나에게도 지구라는 별을 향한 애틋함은 그렇게 남았다.
그러나 A의 경우는 달랐다. 그가 한 세계를 아우르는 거대한 비극의 해중에 놓여 이 무연고의 별에 뿌리를 내린 일련의 과정에서 나는 깊은 유감과 한줄기 분노를 느낀다.
일정 이상의 지성을 갖춘 모든 생물체가 그러한 것처럼 그의 고향별에 있는, 우리 영장류에 등치되거나 그 지위를 상회하는 그들도 또한 공동체를 꾸리고 특별한 개체의 지휘 아래 사회적 역할을 분업하여 역사를 잇는 양상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중에서도 A와 그의 혈통은 지휘자의 계보를 따랐다. A에 대해 생각해 봤을 때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세상, 즉 그와 같은 크기의 영혼을 가진 존재가 비일비재한 종이 존재하는 그런 세상은 이 일천하고 미진한 상상력 아래에서는 피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토피아, 또는 완전한 세계를 꿈꾸며 설계해 기록으로 남긴 역사상 수많은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의 손 아래에서도 실패한, 닿지 않는 이상향이다. 다르게 봤을 때, A는 그만큼이나 그 별에서도 특별했다. 아직 가주의 이름을 일임받지 않은 단계에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 그렇게 시인했기 때문이 아니고, 그의 날개 아래 둥지를 튼 식솔들과 가문 외 거민들이 그에게 남긴 행적으로 미루어 내가 추론한 것이다. 확신은 없다. 그러나 사실임을 안다. 이것은 확신과는 다른 궤의 견고한 믿음이다. 그에 대해 복기하고 기록하는 단계에 접어든 지금은 잘 알고 있다. 그의 배려와 통찰은 그의 일족이 가지고 있는 현안이 아니고, 그만이 가진 혼의 깊이에서 나오는 행실이었다. 아무래도 약하고 무른 것들을 돌봄은 그에게 있어 일생의 과업 같았다. 첫 순간, 그와 조우해 그 시간을 온전히 누렸던 첫 경험에서의 부드럽고, 매혹적일 정도로 자비로웠던 섬세함 또한 내 육신의 연약함을 고려한 접근이었던 것윽ㅈㅏ
“A?”
음…….
A는 묘연한 미소를 지으며 집어든 패드에서 마지막 문장을 눌러 지웠다. 기록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더니 조작법은 그것만으로도 벌써 전부 터득한 듯 썩 자연스러운 동작이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나는 문득 떠오르는 의문에 눈을 동그랗게 홉뜨고 A를 올려다보고 만다. A는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정확하게 문장을 지웠다. ‘첫 순간’부터 ‘것윽ㅈㅏ’까지를 말끔하게 지우고 다시 내 무릎 위에 내려놓는 일련의 동작. 그러나 A는 나의 모국은 물론이거니와 지구의 언어 체계로 쓰인 문장을 익힌 적이 없다. 나는 그에게 글을 읽힌 적이 없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소통은 아주 내밀한 단계로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A는 처음부터 내가 무엇을 왜 기록하는지 알았을까? 알고, 받아들였을까? 그에 대해 내가 뭐라고 기록하는지까지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한치 의심도 없이, 의아함을 닮은 경탄이 마음으로부터 활짝 피어났다.
“읽을 수 있는 거구나, A.”
A는 안개처럼 엷게 웃는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의미가 보이고, 문장 부호들이 맡은 이음매와 결절점들은 보여. “처음부터?” 처음부터. 나는 한동안 입을 닫지 못했다. 희미하게 열린 입은 기쁨과 찬탄 사이의 어드메에 머무른 채로 옅은 호선을 그렸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언어는 우리 지구별에서도 종마다, 그리고 문화마다 각기 고유한 영역으로서 절대적인 시간과 탐독에 의해 습득할 수 있는 소통의 도구이다.
“너를 따르는 그 고래와 해양 생물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거지?”
질문을 들은 A의 침묵은, 고요하고 미동 없는 파동의 깊이는 언뜻 까마득해 보인다. A는, 역시나 종족 특성상의 이유로 보이지만, 음성보다 고층위에 있는 섬세한 언어를 사용하는 만큼이나 그 자신의 번뇌나 의지의 변화가 생길 때마다 그 기운이 옅게 나에게도 전해져 오고는 했다. 나는 물끄러미 A를 지켜본다. 때때로 비감 어린 향기가 스치고는 했다. 이번에도 그렇다고 생각할 뻔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A는 지금 어떤 망설임, 또는 갈등 속에 있다. 나는 A가 돌이키기 괴로워하는 어떤 기억들을 반추하고 묘사할 때 느끼는 아릿한 고통 속에 있다. 애처롭고 커다란 나의 달.
이윽고 A는 침착하게 가라앉은, 고요한 슬픔 속에서 익숙한 듯 ‘말’을 표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건 내가 가진 힘이 아니야, Y.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에게 경청한다. 가시덩쿨처럼 완강하게 가로막힌 그의,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옛 사람을 향한 옅고 슬픈 질시를 가린 채로.
어떤 사람이 오래 전에 나와 이 세계를 연결시켜 주고 떠났어. 이 별을 외로움으로 규정하지 않을 수 있도록……. 나는 이 별에서 나고 자란 대부분의 생물과 연결되어 있어. 그들의 의지를 감지할 수 있고, 나의 의지를 전할 수 있지. 언어와 다르지 않아. 그들 각자의 지성과 감응력을 넘어서지 않는 차원 내에서 작용하는 힘이라는 점에서. 그러니까 나는 후천적으로 너와 연결된 거야, Y.
A는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는다. 그의 내장 기관 어딘가에도 심장이 있을까. 그에게도 심장은, 저 왼쪽 가슴 안에 있는 것은 생명과 영혼의 보고일까. 그렇다면 그 심장에 박힌 저 슬픔은 누구를 위한 애도일지. 나는 기운을 본다. A의 투명하고 부드러운 인영을 두르고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고통과 망설임, 그의 안에 물처럼 담긴 내약. 섬망처럼 위태롭고 옅은 상처의 향을.
“나도 알고 싶어.”
충동이었을까. 아니.
오랜 기원도 충동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충동으로 A를 들여다본 셈이다. 뜻밖의 발언이었는지 A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한다. 그 사람에 대해 물어보는 거니. 그 부드럽지만 연한 소리 안에는 놀라움과 당황을 넘어선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두려움이라니, A. 이 우주를 태워 밝히는 샛별 같은 너에게도 불안과 공포의 뿌리를 매어둔 그 사람을 나는 평생 함묵할 수가 없어. 그렇게 살 수는 없어. 달의 이면을 바라보는 사람처럼 너의 윤곽만 더듬어 살아갈 수는 없어. 내게 이제 너는 모든 것이니까. 잠시 망설이는 듯 파문이 퍼지는 물속처럼 일렁이던 A의 눈동자가 체념을 닮은 수용의 빛으로 가라앉았다.
A.
마르지 않는 슬픔과 희망의 샘물.
그가 눈을 감는다. 수류에 떠내려가듯 나는 밀려오는 그의 소리를 감지한다.
이제 나는 무엇을 써야 좋은지 알 수 없다.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도 알 수 없다. 이 우주의 기이한 인과를 가리킬 수 있는 말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이라도 쓰고 싶다. 깊은 사랑에서 오는 사명감을 느낀다. 처음부터 다시 쓸 수는 없다. 나와 A는 이미 한 번 비가역적인 변화를 겪었으나 그런 사실로 우리가 겪어온 진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쓴다. 내가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들에 대하여.
나의 첫 불시착은 그 별의 역사로 따졌을 때 약 육천 년 전의 일이었다고 했다.
그 별, 이라 함은 내가 새로 명명한 거오성을 지칭한다. 우리 별의 역사로는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A의 기억을 전해 받았을 뿐 처음의 나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별의 시간보다 이 은하의 시간이 월등히 느린 것을 감안했을 때, 세계가 흐르는 속도가 전혀 다른 별에 조난당했던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는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당시의 내가 웜홀을 거치며 몇, 또는 몇십 세기라는 시간의 간극을 불가피하게 맞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소견이다. 만일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A가 만났던 옛 ‘나’는 아마도 몇십 년 전의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다. 첫 귀에 새겨듣고 받아들일 수는 없었으나 이제는 머리로라도 알고 있다. 나는 두 번의 삶을 살았다. 영혼의 궤적을 관측할 수 있음이 A가 가지고 있는 힘 중 하나이다. 그리고 A는 그 눈을 이용해 내가 나인 것을 알았다고 했다. 참형에 가까운 비극을 일방적으로 당하고 이 별에 남겨진 그를 별 곳곳의 생명들과 연결한 것도 나라고 했다. 여전히 알 수 없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A의 증언에 따르면 나는 지구에 태어나기 전의 출신지 또한 같은 별이었을 텐데. 첫 번째의 ‘나’였던 사람은, 지구별의 인간으로 나서 인간으로 자랐음에도 거오성에 가닿고 A와 살아가는 동안 그런 능력을 얻은 걸까. 그렇다면 그때의 나도 A처럼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았을지. 육천 년이 넘는 시간을 고스란히 삶으로 떠받들어 온 A의 아주 오래된 연인은, 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나는 A에게 ‘Y’가 될 수 있을지……. 오시하는 달들의 침묵이 길다.
네가 그 사람에 대해 묻는다면, 알고 싶어한다면 나는 바다에 반사되는 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이해하니, 이해할 수 있겠니. 나는 너를 알아, Y.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 너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지. 오천 년 전, 내가 이 별로 유배당했을 적에 여기까지 따라와서 나와 이 별의 생태를 이어준 건 너였으니까. Y, 이건 네 힘이야. 네가 나의 소리를 감지하는 건 우연이 아니야. 너는 처음부터 알아들을 수 있었지. 우리가 서로 이해하고 대화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건 내 힘이 아니야. 그건 너의 능력이야. 이 견강한 우주 속 차원의 벽을 젖히고 그 누구의 의지라도 감지할 수 있는 너만의 권능. 그런 네가 기천 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다시 이 별에 불시착했지. 그렇게 잠들어 도착한 너를 처음으로 다시 발견한 날에는, 내가 너를 이 외우주나 다름없는 별로 끌어당긴 것만 같아서 몹시 괴롭고 미안했지만…… 정말 네가 나에게로 떠밀려 다시 그 고향별을 떠나야 했던 거라면 내게는 목숨 이상의 책임이 있어. 이건 사명이야. 사랑으로부터 오는 사명. 이 우주의 불문율로부터 너를 영원히 지켜내야 한다는 공준.
나에게는 그럴 힘이 있어.
꿈이 길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내가 무의식이라는 수마의 해면 아래에서 본 것들은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에 기록하기로 했다.
A는 바다와 어울리는 것을 넘어서서 이따금 바다 그 자체로도 보인다.
그곳에서도, 그러니까 꿈 속의 거오성에 기거하는 A의 모습도 그랬다. 그 별은, 이 별과 환경이 유사했다. 지면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면적의 넓고 깊은 바다가 그러했고, 각양각색의 생명들이 움트고 또 지기를 반복하는 정교한 해중 생태계가 그러했다. 그러나 그 별의 해중에 사는 존재들, 편의상 내가 사람이라고 부를 이 종족들은 하나의 종으로 아우르기에는 너무나 그 편차가 컸다. A와 같이 거의 영생에 가까운 삶을 영위하는 개체도 있는 반면, 우리 별의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짧아 보이는 일생을 살다 가는 개체도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같은 종 내에서도 이토록 현격한 차이의 생태를 조성하는지는 규정할 수 없다. 나는 그 별의 이방인이었고, 당시에는 나 외에도 두세 명 살아남은 동료가 있었다. 그때는 이 불시착과 함께 좌절된 대규모 프로젝트의 향방을 알 길이 없었지만, 꿈 속의 내가 말하고 들은 몇 가지 정보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꽤 조직적으로, 그리고 야심차게 쏘아올린 함선이 실종된 것으로도 모자라 이례적으로 많은 비행사를 싣고 출발해 생존자가 전무한 프로젝트로 끝났기에 그때의 사고는 내가 들어본 적이 있거나 지구에서 조금의 정보만 찾아봐도 금방 나올 수 있을 정도의 사건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지금의 나 역시 그 일이나 그때의 내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이름으로 실존했는가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물 아래에 정교한 문명이 조성되어 있고 거오성의 (편의상) 인류는 이 도시와 같은 요새를 탑이라고 부르는 것이 관측되었다. 우리 함선은 바다에 추락해 심해에 빠졌고, 이와 같이 불친절한 형태의 방문은 이 별의 인류에게도 뜨거운 감자였던 것으로 보였다. 인류는 대부분 이 탑 안에 있다고 판명되었지만, 전해 듣기로는 저 해면 위의 좁디좁은 육지 위에도 사람이 살기는 한다고 했다. 또한 다른 요새도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 보였다. 다만 이 요새의 어떤 법칙을 정립한, 탑의 왕이자 주인은 이 땅의 비호를 받고 사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의 이름에 대한 기억은 흐리다. 물에 물을 탄 것처럼 흐릿하고 현실과의 경계가 불분명한 꿈 이후에도 내가 맡은 공기는 지구의 바다를 닮은 짭쪼름한 해양의 냄새였기에 그 꿈으로부터 헤어나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꿈 속의 ‘내’가 누구를 어떤 이름으로 불렀는지에 관한 기억들만큼은 공정하게 안개 속에 수납한 듯 불분명하다. A를 닮은 그 발음을, A라는 이름을 입속에서 연신 굴렸던 것을 빼고는.
그곳의 인류는 이 지구의 인류와 다방면으로 닮아 있었으나, 그 중 가장 유사성을 보였던 것은 ‘만물을 지배하는’ 위치에 스스럼없이 올랐다는 뜻이다. 탑이라고 불리는 요새의 인류는 생태계의 개체 조절 작용을 위협으로 간주하고 그들 스스로가 나서서 위험 개체를 규정했다. 파이를 나누고 이전투구를 반복하며 문명의 틈을 쌓아올리고 스스로 부수었다. 그 과정에서 아까 언급한 바대로 지구의 인류와 다르지 않거나, 혹은 그보다 더 약하고 짧은 생애 주기를 향유하는 개체들이 무더기로 희생되고는 했다. 고래나 상어가 단 한 번 입을 벌려 바닷물을 통으로 물어 삼키는 것만으로도 잡아먹히는 몇십 마리의 작은 물고기들처럼. 그런 그들에게 A의 존재는 절대적이고 어쩌면 때로는 거룩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그의 증언만으로도 탑의 ‘선별인원’들이 A를 귀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은 고스란히 전해져 왔었다. 단 한 번이라도 그에게 구원받은 사람은, 그를 잊을 수 없다. 선홍색 머리카락과 당당한 걸음, 그리고 곧게 편 등. 해일보다는 대지를 닮았으되 포식자보다는 파수꾼을 닮아 있는 그 굳센 영혼은. A는 사랑받았다. 그것은 A가 더 큰 사랑으로 그 좁고 낮은 세계를 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 넓은 날개 아래 몰아치는 호우를 피했던 수혜자 중 하나였다. 탑의 ‘선별인원’이라고 불리는 인류 중에서도 가장 연약한 종족 특질과 닮아 있는 육신을 가진 나를 지나칠 수 없었던 그의 무르고 쉼없이 박동쳐 따뜻한 심장이 돌보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탑의 주인이 가진 절대적인 불문율도 잠자코 보아 넘길 수 없었던 것이리라.
A에게는 그런 힘이 있었다. 법칙을 재정립하고 이치 사이로 외면당해 추락하는 것들을 건져내 돌볼 힘이. 만물을 멸각할 듯 내리쬐는 태양을 향해서도 감히 고개를 들고 눈이 멀지 않을 수 있는, 그만한 힘이. 강대한 고결함이.
A.
어쩌면 가청 영역 밖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몸을 타고난 것은 너를 부르기 위해서였던 것만 같아. 그러니까, 나를 불러.
내가 갈게. 너를 찾을게.
기면증처럼 빠져들었던 꿈에서 퍼뜩 깬다. 이제야 뭍을 밟는 아가미 없는 생물처럼.
이 세상에, 우리 인류가 일천한 지식과 지혜로 밝히고 정리한 이치들의 윤곽 안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물리적, 화학적 작용이 있다. 나는 그것을 고스란히 겪은 사람이다. 이 별, 우주에서 우리 생태의 반대편에 떨어진 시점에서 나의 감각기관은 예리하게 벼려졌다. 인간이 인간의 귀로 감지할 수 있는 가청 영역 안의 주파수 따위는 나에게 너무 좁았다. 만물을 듣고 감각할 수 있게 된 이 육신의 어디가 어떤 형태로 발달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처음 이러한 변화를 겪었을 때의 나는 온갖 물과 사람과 네 발 짐승과, 아주 작은 미생물들의 파동까지도 온몸을 이용해 받아들여야 했기에 불면에 시달렸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이 감각을 여닫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우연히도 너를 만났지.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이것은 진화가 맞을까? 나는 강인해지지 못했다. 단단해지거나 빨라지지도 않았고, 아가미가 있는 생물처럼 수중에서도 그리고 공기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외우주에서도 숨 쉬고 움직일 수 있는 육신으로 진화한 적이 없다. 이것이 유전적 결정이라면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전략이다.
그러나 A, 너를 들을 수 있는 몸을 얻었어.
이 미력한 연결, 유대라고도 불리는 힘으로 나는 무엇을 들어야 했을까. 너를 위해 준비된 이 무르고 약한 몸의 선물일까. 몸을 포개어 본다. 너는 여전히 따뜻해. 네 등에서 심장 소리가 나. 우리들처럼, 이 무르고 어리석어 찬란한 인류처럼, 아무것도 다르지 않은 그저 원숙한 여자 아이처럼……. 이 별에 떨어지기 전, 잘 테라포밍된 이 지구라는 행성 밖으로 벗어날 생각을 하기도 전부터 이따금 떠오르고는 하던 어느 고전 소설의 등장인물이 소리친 바대로 인간이 어떻게 죄가 있을 수가 있느냐는 질문을 해야 한다면 그건 다름도 아닌 너의 몫이 아닐까. ‘감히’ 하늘을 찢어 가르고 바다보다 더 깊은 곳에, 이 별의 내핵 위에 피막처럼 은밀하게 덮은 세계의 부조리한 비밀들을 낱낱이 열어 외친 너의 몫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별들을 모두 빚어 이 광대한 허무에 걸었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신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래야 하는 게 아닐까. 이 해면 아래 전쟁의 신 같은 그 남자가 씌운 죄의 굴레라는 것도, A, 서광이 들어 그림자가 밀려나가듯 벗겨져야 하는 게 아닐까. A의 등에서는 옅은 피 냄새가 난다.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겠다. A는 도망자가 되었다. 이 별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진실을 섭취한 대가이다. 그러나 A의 욕심은 이 정도가 아니다. 나는 알아. 네가 맛본 그 선악과, 이지와 진리들을 도무지 너 혼자 끌어안을 수는 없었을 거야. 그것이 너의 윤리겠지. 그것이 내가 당한, 우리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너의 구원이겠지. 그래서 너는 A이겠지. 자비이고 바다이겠지. 나는 알고 있어. 나는 내가 너를 막지 못할 것이고 막지 않을 거라는 사실까지도 전부 알고 있어. 너의 파장 곳곳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탄식은 언젠가 평화로 귀결될 거라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어. A.
A는 깊게 잠들었다. 오늘만큼은 아주 오래 자고 일어나길 간절히 빌고 고대한 나의 바람을 받아 수행하듯이. 세계는 A의 의지를 따라 밀려 나간다. 그렇다면 A, 너는 무엇의 비호를 받을 수 있을지. 나는 일어났다. 물을 담으러 갔다. 수맥에서 나는 맑고 따뜻한 물을. A의 근원과 같이 푸른 슬픔 외의 것들을 반사해 이치에게로 돌려주는 투명하고 무거운 매질을. 물을 길어 나르는 내 발자국이 검게 젖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A가 현실로부터 손을 빼고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아주 고요한 파문 속에 스스로 투옥되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A의 머리카락을 올올이 집어 들었다. 산호 같기도, 내가 두고 온 별의 달콤한 넝쿨 같기도 한 자유롭고 섬세한 머리카락. 우리 별의 가장 오래된 신화에 등장하는, 머리를 한 번도 자르지 않아 강대했던 남자를 떠올리게끔 하는. 그러나 데릴라가 되기에는 나의 삼손은 너무나 아름답고 깨끗하다. 그러니까, A. 머리카락을 들어 조금씩 물에 풀었다. 굳은 피가 잘못 엉켰다가 제 길을 찾은 물고기처럼 희석되어 사라질 때까지. 몇 가닥이고, 몇 가닥이고. 붉음과 구분되지 않는 탐스러운 봄의 분홍이 구제받을 때까지. 불현듯 온기가 암막처럼 나를 뒤덮었다. A이다. 나는 A에게 기댄다. 불안한 엇박으로 쿵쿵 울리던 심장이 하나의 박자에 맞추어 쿵, 쿵, 함께 뛸 때까지. 너의 노력으로 언젠가 이 탑 아래에도 진실된 빛이 들까. 스스로 발광할 줄 아는 별처럼.
기면증처럼 들었던 잠에서,
퍼뜩 깬다.
다시 온몸이 소란스럽다. 해풍까지도 소리가 되어 몸을 뒤흔들었다. 눈에는 눈물이 맺힌 채다. 이제 알아들을 수 있다. A의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육천 년 전의 삶이 간신히 뻗어나와 닿았다. 어제의 일처럼. 빙하기로부터 이제 막 헤어나온 생물과도 같이 나의 존재와 존재 사이의 불협화음은 적확하게 정립된다. 파도처럼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의 아주 미약한 호흡과 간청들이 흘러들어온다. 머리가 쿵쿵 울렸다. 무엇보다 가장 강대한 기운으로 살아가는, 한 세계와 다르지 않은 여자가 옆에 잠들어 있었다. A가 말하지 않을 때에도 A를 읽을 수 있다. 아마도 이제부터 남은 평생토록. 입술이 축축하게 젖었다. 콧물이라도 흐르는 줄로 알았는데 급작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내장 기관의 호소처럼 흘러내린 피였다. 곤히 잠든 A의 머리카락 위로 떨어진 핏방울을 화들짝 놀라 닦아냈다. 수습하려는 의도가 민망할 정도로 코피 한 방울은 두 방울, 네 방울이 되었고 아찔할 정도의 양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내가 닦았는데. A, 내가 닦은 피인데. 혼비백산한 나의 불안을 감지한 것인지, 아니면 사부작거리는 소리에 깬 것인지 부스스 일어난 A가 곧장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멍하니 자리에 앉아 A의 혼란과 공포에 가까웠던 파장을 복기하는 동안 그가 다시 감지되었다. A는 돌아왔다. 아주 빨리 돌아왔다. 파리해진 안색으로, 처음 보는 풀 몇 자루를 손에 움켜쥔 채. 그리고 나도 돌아왔다.
지구에서 A의 부름을 듣고 여기에.
터질 듯한 머리의 소리들이 일순간 잠잠해졌다. 아니, 어쩌면 의식이 끊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분간할 수 없다. 나는 바로 어제 죽은 것처럼 가까운 현재에 있는 것으로 세계를 감지하고 있지만 지구를 떠나 상륙한 이 몸은 그때의 나와 같이 너무나 연했다. 가슴에서 몰아치며 부딪치고 부서지는 서로 다른 자들의 의지를 통제할 힘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멀어지는 의식의 연약한 끈을 애써 붙잡지 않았다. 대신 내가 잡은 것은 A의 뺨이다. 사랑으로 인한 사명. 너는 그렇게 말했어, A. 그건 내가 해야 하는 말이었는데.
기억한다.
이 별은, 유배지가 아니고 A를 지키기 위해 내가 정한 좌표계였다.
당시의 내가 타고 왔던 모선은, 다시 웜홀을 가로지를 수 있을 정도로 무사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내 앞에 있는 이 깡통 쪼가리들만큼이나 완벽하게 파손되지는 않았었다. 탑을 심은 ‘거오성’은 파도가 멈추지 않았다. 바람과 파도가 끝없이 교차하는 장소라는 것은 즉 에너지의 보고라는 뜻이다. 동력은 여기에서 얻어갈 수 있었다. 나에게는 그럴 기술도, 그리고 그 에너지를 저장할 함선도 있었다. 단둘이 타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고 호화로웠지만 어차피 그것을 탈 수는 없었고 내부에 장착된 비상용 공정을 활용해야 했다. 그 정도라면 마지막 비행을 끝낸 뒤 높은 확률로 시원찮은 내구도를 이기지 못하고 폭사할 선체였다. 그러므로 웜홀을 다시 건너지도 못할 초라한 공정을 사용할 것인가 따위의 고려 사항은 A가 쫓기기 전까지는 떠올릴 필요도 없는 악수이자 도박이었다. 그러나 나는 선택을 내렸다. 그래야만 했다. A는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때때로 탑의 주인이 찍은 낙인에 의해 이지를 잃고 잔인한 눈빛으로 먹이를 찾아 헤매고는 했고, 애써 저주처럼 바짝 쫓아오는 이 참람한 현상에 대항하고는 있으나 그 정신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A의 몸을 입고 A가 아닌 것, 본능이라고도 부르지 못할 원념이 이따금 눈을 뜰 때마다 자애를 상징하듯 넓게 휘날리던 옷 끝이 피로 물들었다. 이 세계를 아울러 관통하는 지혜와 힘을 가지고 있는 만큼이나, A를 상대해야만 하는 불운한 상황에 처한 ‘사냥꾼’들은 몸소 그의 앞길에 붉은 카펫을 깔고는 했다. A는 이미 오래 전에 한계에 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계를 뒤집어 가르는 사람. 나의 달, 나에게 이치이며 성간의 인력. ‘한계’를 몇 번, 몇십 번이나 수정하며 A는 여기까지 왔다. 나를 지키고 불행히도 연약한 민중을 지켰다. 더 나아가 그 자신의 영혼을 지켰다. 지금 이 순간까지.
그래서 나는 A라는 별을 다른 자리로 송전하기로 했다.
비상 기체는 원활하게 돌아갔다. 내가 있던 세계의 지평으로 돌아가거나 수집한 데이터를 송부할 수는 없지만 인근에 어떤 행성과 항성들이 있는지, 이 거오성을 중심으로 하여 반경 몇백 광년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의 데이터가 수집되어 있었다. 이 지식의 보고인 탑에 우연히 발을 걸친 나의 운이기도 했고, 또한 눈에 띄게 느린 이 우주의 시간으로부터 오는 수혜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것은 몇십 광년이라는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쌍둥이 별’로 불리는 그 별이었다. 거울. 어떤 불명확한 호칭이나 신화의 이름을 붙이는 대신 이 별의 거민 중 그것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은 그 별을 ‘거울’이라고 불렀다. 말할 것도 없이 나는 거울을 행선지로 택했다. 이 별의 거민들은 바다에 몸담아 살아가고 있다. 하늘보다는 심해에 더 깊은 관심을 두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렇기에, 아마도 몇백 년 또는 몇천 년이 지난 뒤라면 몰라도 지금 당장이라면 이 별을 떠나 다른 곳으로 도망치는 A와 나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잡으려 하지 않을 가능성까지도 있었다. 돌아오지만 않는다면 이 별을 떠나는 A는 그들에게 오히려 호재였을 것이다.
캄캄한 밤, 이 별을 굽어살피는 두 개의 붉은 별이 포개져 종적을 감추는 날의 검은 새벽에 나는 A와 함께 비상용 기체에 올라탔다.
돌아오지 않을 각오가 필요했다. 적어도 한동안은.
그러나 알고 있었던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일시적 후퇴로 여기는 한이 있을지라도 A는 이 별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A라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이 별로 돌아와 다시 진실의 선구자로서 이 생때같은 목숨들을 건져 올리리라는 것. A를 영원히 지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수명이 다한 전등처럼 깜빡거리는 A의 맑은 정신과, 이 연약한 일신의 인간으로서는 피할 수도 받아칠 수도 없는 거대한 힘을 가진 ‘랭커’들의 추격으로 인하여 기체를 외우주까지 끌어올렸을 때 A는 전에 없이 지쳐 보였다. 그러나 A의 생명력이라면, 그의 무한하고 고아한 영혼이 가진 힘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관건이 되는 것은 나였다. 나는 약했다. ‘거울’이라고들 부르는 그 별은 언뜻 보기에 이 별과 생태가 비슷해 보였지만 정작 실제로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산소의 농도가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었고, 그곳에도 문명을 이루고 살아가는 어떠한 지성체들이 있어서 우리가 발 붙이기도 전에 요격당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가야 했다. 반드시 A를 데리고 도착해야 했다. 상처를 입고 흘러내리는 생명수처럼 꺼져가는 A를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이것이 내가 그를 지키기 위해 가능한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이제 나는 별에 이름을 붙인다. 거울 따위가 아니라 제대로 된 이름을.
A■■■. 내가 거인들의 신전에서 훔쳐 온 이 별의 이름을.
패드를 내려놓았다. 폭발과 다르지 않은 형태로 써내린 기록을 다시 읽지도 않고 그대로 상체를 기울여 드러누웠다. 지진처럼 시시각각 나를 뒤흔들던 의지의 파장들이 어느 정도 걷혀 나갔다. 가장 큼지막한 의지와 영혼을 가진 누군가를 제외하고는 이제 어느 정도, 완벽하게라고는 할 수 없으나 감지되는 파장들을 차단하고 나 또한 그들을 불안에 떨게 할 정도의 강렬한 주파수로는 외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A에 대해서는 좀처럼 조절이 쉽지 않다고 느껴진다. 죽기 전보다 한참 떨어지는 제어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 보았으나 A는 고요히 웃으며 내 손을 집어들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무어라 말이 들리지는 않았으나 고스란히 느껴지는, A가 발산하는 의지의 흐름은 명확한 부정이었다.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손바닥을 벌려 그 안에 뺨과 입술을 문지르는 사랑스러운 행각에 휘말려 그에 대해 더 물어볼 적기는 놓치고 말았었다.
거인들의 신전에서 훔쳐 온 별.
“이, 읽지 마.”
Y의 달.
“읽지 말라니까.”
너는 공학도가 아니라 시인 같아…….
“부끄럽다니까……. 원래 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은 전부 철없는 몽상가야.”
사랑스러워. 밟고 설 땅이 있고 활공할 날개가 없어도 하늘을 날고 싶어하다니.
“우리 별의 인류는 욕심이 많아서 그래.”
기억나. 육천 년 전에도 그렇게 말했었지. 우리 별의 동족들과 같구나.
“그래서겠지. 내가 지구에 두고 온 사람들을 애틋하게 그리는 만큼이나 너도.”
그래. 구하고 싶어.
“그래.”
이 별에 정체한 시간을 가둬둔 얼음이 산산이 깨지는 것을 느낀다. 나는 몸을 굴려 옮긴다. A의 품에 머리를 기댄다. 그 옛날 들었던 심장 소리가 쿵쿵 울렸다. 따뜻한 소리, 사람의, 또는 생물의 연약하고 질긴 박동. 졸음이 밀려온다. 아마도, 내가 나로 역사했던 옛 기억들을 모두 되찾기까지 내 남은 일상은 갑자기 몰아닥치는 수면과 맞닿은 채일 것이다. A는 눈을 감는 나를 부드럽게 감싸 끌어안는다. 깊은 잠을 기다린다. 나는 이제 막 태어난 아이처럼 옛것이 된 나의 기억들을 먹으며 잠에서 깨어난다.
그는 내가 본 가장 따뜻하고 지혜로운 존재이다.
차원을 뒤트는 몇 가지의 우주 내 곡률 반경을 계산한 끝에 그는 빛의 속도로도 몇십 년이 걸리는 거리를 단숨에 주파해 냈다. 이 작은 기체를 이용해서 말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그는 이 처음 보는 별에 선체를 대고 내린 뒤 분주하게 움직였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것을 파악했고, 조사했고, 규명해 냈으며, 나의 모성에서 얻은 지식을 이용하여 약재와 식재들을 구분해 냈다. 강인한 사람이다. 그 자신은 믿지 않는 것 같지만.
생물적 차원에서의 적응에는 어려움이 없었으나 뜻밖에도 이 별은 너무나 외로웠다. 그와 나 외의 어떤 지성체가 관측되지 않는다고, Y는 말했다. 낭보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사실을 말할 때의 Y는기이하게도 낙담한 것처럼 보였고, 나에게 미안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쩐지, 이 별을 고를 때의 Y는 다른 별의 다른 생명체에게도 희망을 걸어보는 것 같았다. 전혀 다른 생태를 향유하는 전혀 다른 별의 종족으로부터도 연대와 감각을, 사랑과 그리움과 희생을 이미 맛보았기 때문이었을까.
이 별에 온 뒤로 나의 불안정한 상태도 점점 제 궤도에 들기 시작했다.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극렬한 자극이 없는 만큼이나 평온을 되찾은 나는 나 자신과의 전쟁에서만 승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고요한 이 별에서, 내가 나로서의 이지를 다시 다지고 나의 고향에게 어떤 진실을 등불처럼 쥐고 돌아가야 할지만을 고민하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 시간은 무엇이든 닥칠 수 있을 정도로 평온하고 아름다운 고요함이었다. Y와 나는 같은 바위에 꼭 붙어 앉아 있기를 즐겼다. 한 사람이 앉기에는 넓고 두 사람이 앉기에는 좁은 그곳에서, 나의 모성과 비슷한 속도로 떠오르고 다시 지기를 반복하는 세 개의 광원을 바라보며. 이따금 반짝거리는 갑각의 껍질이나 매끈매끈하고 부드럽게 손아귀에 감기는 두족류의 해양 생물을 건져 서로에게 건네고 뽐내면서. 슬프고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여기에서 이대로 지낼 수만 있다면 나의 의식이 캄캄한 저승으로 추락했다가 다시 솟구치는 끔찍한 고통의 기억 같은 것은,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내가 낚고 찢고 부수어 버린 어떤 생명과 삶의 터전들은 잊고도 싶을 정도로 달콤했다. 그런 욕심을 감히 내지 않기 위해 나는 자신을 갈아야 했다. 하루에도 몇백 번씩 하늘을 올려다봤다. 세 개의 달 어디에서인가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착륙하는 어떤 ‘선별 인원’, 그중에서도 ‘랭커’들이 찾아오지나 않을까 하는 무형의 불안과 죄책감으로.
그리고 어느 날, 이 별에 붉은 유성이 떨어졌다.
타오르는 듯 강렬한 붉은 빛깔은 캄캄한 밤 바위 위에 나란히 앉아 손을 맞잡고 있던 Y와 나에게 돌이킬 수 없을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고, 또한 돌이킬 수 없을 운명 또한 선사했다. 즉각 함선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자하드가 랭커라는 규격 외의 존재들을 별에 쏘아 올리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쩍 유성이 자주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눈에는 낙하하는 별의 빛깔로 보였지만 그것 하나하나가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인 힘을 가진 생명들을 무정하고 냉혹한 외우주로 쏘아 올려 별의 조각에 붙인 결과물이라고 가정했을 때, 그 비산하는 아름다움은 피로 쓰인 예술이었을 것이다. 내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이유는 그 중 몇 구의 시체가 별과 달라붙은 채 이 행성에 떨어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위대할지라도 생명은 생명이다. 대기조차 얼어붙어 무가 되는 공간에서 생존할 리가 없었다. 바짝 얼어붙었다가 그대로 가속되어 연소하고 만 그것들은 내가 알고 있던 그들의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더 작고, 별이라는 원소 덩어리의 일부와 달라붙었을 뿐 아니라 검질기게 엉킨 채 굳어 있었고, 미동도 없었다. 그 별과 이 별의 사이가 몇십 광년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들은 빛보다도 빠른 속도를 견뎠거나, 빛조차 함몰시키는 어떠한 절대적 영역을 거쳐 이 별에 추락했을 것이었다. Y는 그들을 석탄이 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별의 주인이자 탑의 주인, 그, 자하드는, 일종의 실험을 하고 있었다.
그의 영원한, 생명 전반을 사이에 두고 겨루는 정적이 돌이키지 못할 곳까지 떠내려간 것인지를.
돌을 무수히 던져 개구리들을 맞춰 보면서.
비산하는 죽음의 향은 유황과 같았고, 검었고, 타는 듯 뜨거웠다.
거기에서 나의 기억이 소등되었다.
바위산 위에 서서, 소금처럼 흩뿌려지는 유성우를 올려다보면서.
이 별에도 비는 내린다.
아니, 비를 내릴 수 있는 존재가 이 별의 땅을 밟았을 뿐이다. 나는 깨닫는다. 사무치는 슬픔은, 거대한 강보다 더 원념과도 같이 강렬한 비탄은 재해가 되어 별을 물로 씻을 수 있다는 사실을. A의 눈을 찾는다. 내가 사랑한 맑은 의지. 별과 같이 명징하게 반짝거리는 영혼의 이정표, A를. 그러나 포착한 것은 검게 죽은 혼돈이다. 분노, 또는 고통을 닮아 타들어가는 것. 뾰족하게 날이 서서 온몸을 욱신거리게 하는 강대한 범주의 파동. 나는 눈을 감는다. 눈물을 흘리지 않고 싶어서 눈을 감았으나 밀어내리는 눈꺼풀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맥없이 눈물이 떨어진다. 이것을 시발점으로 삼기라도 한 듯 목에 거대한 철심이 꽂힌 것처럼 목이 메였다. 나에게 유일한 달의 영장. 살아 숨쉬는 신비이며 지고한 바다의 주신. 풍랑 속으로 꺼지고 만, 어쩌면 다시는…….
A는 명사수이다. 아주 근사한 페르세포네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런 사람인지라 나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그 나름대로의 노력을 다했다고, 나는 멋대로 규정한다. 그도 그럴 것이 상처의 크기에 비해 이상하게도 끔찍한 고통은 없기 때문이다. 관통상을 입은 심장이 곧 꺼질 것이다. 아마도, 다시 뛰는 일 따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걱정이 돼, A. 비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희생자들의 별을 올려다보며 이렇게나 괴로워하는 너의 내일이 걱정돼. 이 사무치게 외로운 별에, 닿을 수 없는 피난처에 나는 어쩌면 너를 잘못 데려왔을까……. 그렇게 나를 잃은 채로, 너에게 이곳이 별이 아니라 벌이 되면 나는 어쩌면 좋지. 눈물로 흐린 눈앞에도 붉게 물든 선홍색 머리카락은 상냥하게 나부낀다. 나는 그에게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무기를 건넨다. 바다 생물을 무더기로 죽음에 이르게끔 타올라 증발하고 다시 비가 되어 떨어지는 이 재해의 별에, 오로지 두 발만으로 단단하게 선 A를 당겨 안는다. 꽉 안았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꺽꺽 역류해 나오는 핏물이 A의 어깨를 적시고 떨어진다. 나는 섬세하게 그린다. 전달한다. A에게 이것을 넘긴다. 어느 순간 선각과 다르지 않은 과정에 의해 나에게 날아와 꽂힌 이 능력, 의지와 사고를 감각할 수 있는 전혀 다른 차원의 매질을. 나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 보였던 이 장을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감각, 즉 여섯 번째 촉각을. 가르친다. A를 이 별의 모든 삶, 의지와 본성대로 살아가는 그 모든 것들과 연결한다. 생동하는 사랑스러운 모든 소음들에게 A를 끌어 붙인다. A를 이 생명의 장 안에 묶는다. A■■■. 이 별에 그의 닻을 내린다.
마지막 과업을 마치자 잠이 몰려온다. 아주 깊은 잠일 것이다.
희미한 웃음이 입가에 남았다. A, 웃는 나를 봐. 나는 네 앞에서 웃으며 가.
나를 불러.
내가 갈게. 너를 찾을게.
다시 만나.
우리 웃으며 다시 만나.
눈을 뜬다.
A는 내 뺨을 어루만지고 있다.
눈썹에 닿은 그의 손이 축축하다. 울었구나. 나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것처럼 급하게 몸을 일으켜 어깨에 아무렇게나 뺨을 문질렀다. 일어났니. A는 조용히 웃는다. 그러나 그의 웃음보다도 먼저 사무치게 머리를 맴도는 말이 있다. 육천 년이다. 육천 년이라고 했다. A는 기다렸다. 불렀다. A가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을 써서 나를 불렀다. 그러다가도 터져 나오는 호명을 셀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번 삼켰다. 단지 나를 이 별에 가두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약속을 저버릴 수도 있을 정도로 A에게 나의 삶은 소중했을까. 그토록 오래, 나는 귀중한 내약처럼 A의 혼에 박혀 있었을까. 닦아낸 눈물이 무색하게 나는 고개를 떨구고 만다. 부끄럽게도 눈물길이 끝없이 길어진다. 사랑으로 인한 사명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동일하게 짊어진 채 여기에 왔다. 여기, 이 자리, 망망대해와 다르지 않은 별에, 오로지 부르고 불렸다는 이유만으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A는 강직하고 사랑스러웠다. 나를 봐, Y. 웃는 나를 봐. 언젠가의 유언과 같은 파장으로 그는 속삭인다. ‘웃는 나를 봐.’ 다시 만난 A가 입버릇처럼 읊조리던 그 의지. 나는 얼굴을 벅벅 닦는다. 팔을 뺨에 연신 문질렀다. 눈물이 그칠 때까지 한참을 내도록. A를 안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이 고독한 수호자의 내면에 내밀하게 연결될 때까지, 빈틈없이 맞닿고 싶은 마음으로. 내가 왔어. 나는 말한다. A의 언어로, 최초로 나의 힘이었던 의지의 흐름, 여섯 번째 감각으로 외친다. 내가 네 부름을 듣고 왔어, A.
어쨌든 이 이야기는 행복하게 끝날 것이다. 이 기록을 남기기 위해 마음먹었던 첫 순간에 비해 지금은 너무나 많은 것들이 달라졌고, 내가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도 또한 너무나 많이 다른 것이 되었다. 그러나 A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그의 일생이 얼마나 고결하고 강인했는가에 대해서는 지우지 않기로 했다.
나는 A를 만났다. 그는 달의 영장이며, 파도의 자식이다. A는 나를 구했다.
나의 삶과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이 명징하게 남지는 않았지만 지구에서의 출생년으로 따져 보았을 때 나는 백이십사 년 전에 태어났고, A의 고향별인 ‘거오성’에서 그들만의 시간으로 따졌을 때 사오 년을 살았다. 내가 알고 있는 지구의 역사에 비해 A가 겪은 시간이 너무 긴 것으로 미루어 나의 두 번째 추론이 어느 정도 맞는 것으로 보인다. 즉, 시간을 꽈배기나 접을 수 있는 종이처럼 압축할 수 있는 어떠한 다른 차원의 좌표계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우주비행사이지 천체물리학자가 아니기에 이 이상의 인과 파악은 불가능하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이 정보를 어떻게 활용해야 접힌 시공간을 넘어서 다시 A의 고향별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탐구는 필요하다. A는 그들을 사랑한다. 그들도 A를 사랑한다. 비록 A가 그곳에서 무수한 배신을 겪었지만 그 별에는 A를 배신했으나 사랑하는 사람과, A를 사랑하기에 배신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A는 돌아가야 한다. 나 하나가 향유하기에 A는 너무나 아름답다. 이제 그 빛을 나누기 위해 이 별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순간 아끼지 않고 머리를 쓰려고 한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 아름답고 원숙한 악동을 위해서라도 오늘의 기록은 여기까지 남기기로 결정했다. 행성 A로부터, 사랑하는 A를 위하여, Y, 사백육십팔 번째 ‘세 별 날일’의 밤.
“그것도 써야지, Y.”
“아!”
추가.
오늘은 아침 천체 관측 중 어떤 기현상을 목격했다. 내 모성에서도 할 수 없었던 진귀한 경험이다. 따지자면 UFO 관측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세 광원 중 오른쪽 끝에 있는 별의 가장자리 인근에서 어슴푸레하게 유영하고 있는 미확인 비행 물체에 대해 A와 여러 가능성을 논하고 있다. 객체가 지금은 너무 먼 상공에 위치하여 확인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이나 종착지가 이 별이 맞다면 여러 변수의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만일 여기에 착륙한다면 보다 상세한 점검과 경계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의 여섯 번째 감각, 즉 의지의 길들을 읽어내는 이 힘은 익숙한 강직함을 느낀다. 어디에서 겪은 적이 있는 것만 같은데, 구체적으로 정확히 어디에서 언제 감지했던 것인가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다. 나의 직관이 정확한 관측을 내놓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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