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U404+UDI lab.

[MIU404/시마이부시마] 그 손으로 움켜쥔 것은

"그건 내 것이 아니었어."

* 17회 디페스타(220115)에 가필수정해 책으로 나왔습니다. 웹재록 샘플 겸해서 투비로그에서 이쪽으로 원문 그대로 옮겨둡니다

* 시점은 본편 종료 후 몇 년. 따라서 본편을 전부 보지 않은 분이라면 스포일러가 될 내용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 시마이부 혹은 이부시마 어느 쪽으로 읽어도 무방합니다.

* 개인적인 캐해석이 듬뿍. 저는 태양의 흑점과 달의 인력을 조명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을 최근 깨달았습니다.

* 세상의 그 모든 반짝반짝하고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들은 내 것이 아니어서. 지금 쥐고 있는 정의 정도가 내가 달려서 쥘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 그거 말고는, 꼭 누군가가 필요하더라고. 그런데 정의는 그냥 맨몸으로 내달려서 쫓아가도 괜찮았어, 하는 이부키 보고싶다.

...에서 시작은 했는데요, 점점 산으로 가고 말았다가 시마쨩이 어떻게든 해줬습니다! 야호!


이부키와 몇 년을 같이 지내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표리가 동일하고 남 속일 줄 몰라보이는 바보(그러나 시마는 이미 이부키가 누군가를 작정하고 속이려면 속일 수 있는 남자라는 걸 안다)로 비춰지는 것과 달리, 이부키 아이는 긴 팔다리로 그려내는 호들갑 사이에 스스로의 이야기를 숨겨버린다. 그건 머리로 재고 꾸민 것이 아니라 더더욱 알아보기가 어렵다. 안전거리를 본능으로 재고 간격을 벌린 자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갸웃하게 되고, 그 때는 이미 늦기 마련이다.

무엇이든지 분석하고 의심해서 그 근원을 알지 못하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시마 카즈미는 한번 거스러미처럼 올라온 파트너의 카무플라주를 조용히 관찰했다. 자고로 야생동물을 지켜볼 때는 숨소리도 조심해야한다. 특히나 그 대상이 오감이 예민한 야생의 들개라면 더더욱.

의식하고 가만히 지켜보면 도드라져 보이는 게 있다. 버디를 짜고 장장 6개월만에 처음 관사에 들렸을 때에도 느꼈지만, 평소 그토록 부산스러운 것치고 이부키의 생활공간은 잘 정돈되어있다. 겉보기 뿐만아니라 그 알맹이도 차곡차곡 탄탄하게 말이다. 계절마다 부족하지 않게 갖춰진 옷가지, 수면의 질을 위해 새로 들인 매트리스, 가짓수가 적을지언정 뭐 하나 빠짐없이 정렬된 조리기구, 과부족 없이 펼쳐진 취미생활용 공간... 그건 스스로를 가꾸지 않고서는 꾸며낼 수 없는 생활공간이었다. 그래서였다. 이부키 아이는 자기자신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어버린 것은.

그 첫 인상이 바이어스를 걸었을지도 몰랐다. 관사의 정경이 희미하게 언급됐던 과거사와 명백하게 모순되었음에도. 이부키의 곁에서 지낸 몇 년 간, 이제야 눈 뜬 의심은 과거를 되새기며 결론을 낸다. 그 정갈한 흔적은 가마고오리 부부가 제 파트너에게 쏟은 애정의 결과이고 망가질 뻔한 아이에게 달아준 보조바퀴였다는 것을.

- 카즈미, 독립하면 꼭 지켜야하는 게 있어.

경찰학교에 들어가고 독립하며 부모가 몇 번이고 강조했던 것들이다. 밥을 대강 때우지 말 것, 밀렸다가 하게 되더라도 빨래와 청소는 꼬박꼬박 할 것, 스스로를 소홀히 하지 말것. 꽤 귀찮지만 한번 손아귀를 빠져나가면 줄줄이 새어나가버리고 마는 인간성의 근간이라며.

그 노력을 다 거두어내고 바라보면, 남는 것은 앙상한 겨울나무 뿐이다. 허탈한 숨이 솟는다. 사람이 사람답기위해 필요한 그 경계면까지를 채우면, 이부키는 그 이상에는 손을 뻗지 않는다. 진열장 안쪽의 보석에 감탄만 하고 지나치는 사람처럼. 미술관에서 회화와 조각을 감상하고 빠져나가는 관람객처럼.

“~♪”

지금도 그렇다. 아기자기한 걸 파는 잡화점이 화두에 올라, 그러면 한번 가보자 했더니 신나게 구경만 하고있다. 현금 얼마 들고 있더라 하면서 호들갑 떨었던 게 겨우 삼십 분 전인데. 우와, 이것 봐. 완전 귀여워. 큐릇해! 시마시마시마-! 이런 거 유타카 좋아하지 않을까? 아, 요건 하무쨩한테 어울릴 것 같아. 어때? 예전같으면 아무 생각없이 들었을 말들이 이제는 머리속에서 차곡차곡 분류되어 쌓인다. 슬금슬금 속이 끓는다.

“이부키.”

“응?”

“네가 뭐 사려고 온 거 아녔어?”

제 부름에 몸을 빙글 돌려 웃는 낯을 했던 이부키가 이어진 질문에 몸을 딱 멈춘다. 나우튜브를 일시정지한 것마냥. 아주 얇은 찰나에 웃음기가 썰물처럼 빠진 맨얼굴이 드러났다가, 이내 잘 아는 표정으로 차오른다. 저 얇다란 틈이라도 보여주게 되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려야할지 아까부터 끓어오른 설움에 가슴을 쳐야할지 갈피가 안 섰다.

시마는 예전에 이부키가 입밖으로 내었던 말을 떠올린다. 나 인상이 험악하다는 말 자주 들어서 웬만하면 웃고 있으려고 하거든. 스마일-. 나쁠 건 없잖아? 적어도 십 년은 넘게 가진 습관이면 살갗이나 다름 없겠지. 그렇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기우뚱거리던 무게추는 이제 과감하게 엑셀레이터 쪽으로 떨어졌다. 콱 엑셀을 밟기까지가 더뎌서 그렇지, 시마 카즈미 역시 쇠고집으로는 제 파트너 못지 않다. 404 결성 후 일 년 간 대형사고를 친 쪽은 전부 저였다.

“이부키, 대체 왜 그렇게 뭔가 가지는 걸 무서워하는 거야?”

“내가 뭘 무서워한다고 그래, 시마?”

한쪽 입가만 비뚜름 올라가 으르렁 거리는 목소리가 머리꼭지 위에서 떨어졌다. 어깨끼리 맞닿을정도로 바싹 붙은 이부키는 곧 그 사나운 기세를 갈무리하더니 제 가슴팍을 주먹으로 툭 치며 실실 웃었다.

“뭐, 밖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니까. 집 돌아가서 하자?”

성인 남성 둘이 가게에서 드잡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지 다른 손님들이며 점원의 시선이 곧 파드득 흩어졌다. 그야 180cm짜리 덩치가 온몸으로 무해함을 뿜어내고 있으니까. 야생의 들개가 사회에서의 에티켓도 잘 익혔다고 감탄하기엔, 원래부터 이부키는 사람 기색에 민감했었다. 제게 쏟아지는 적의만을 받아치고 그 외에는 '인류는 모두 나의 친구' 같은 스탠스였으니.

그러나 선글라스 너머의 눈동자는 서늘했다. 들어오지 말라고 그어둔 선 앞에 서 있는 제게 가해지는 위협을 시마는 심호흡 한 번에 털어내고 받아들였다. 오히려 긍정적인 신호다. 충돌은 반드시 변화를 낳는다. 속력과 위치. 어느 것이 변할 지는 몰라도 멈춰있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건 제 파트너가 내내도록 증명해온 것이며 저 역시 이 세계에서 고통스러워하기로 한 사람이므로, 심장 밑에 고이는 본능적인 두려움은 잠시 미뤄둔다.

현관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이부키의 미소도 딱 그쳤다. 제가 선빵을 날린 직후부터의 웃음이 거짓부렁인 걸 피차간에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닥 놀라울 일도 아니다. 이부키가 운동화를 고이 정리해 랙에 올려둘 때까지 시마는 파트너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맥주, 는 필요 없겠지. 시마?”

“어. 슬슬 답은 내야겠는데 술김이었다고 뭉개도 곤란하고.”

“역시 요즘 시마가 날 계속 쳐다본다 했어. 꺄꺄우훗후한 거 아니고 완~전히 카메라 같은 느낌이었는데. 뭐야, 갑자기 동물 다큐멘터리라도 찍고 싶었어? 몇 번을 말하지만 나, 개 아니거든?”

발뒤꿈치를 축으로 빙글 돌려 마주한 엷은 호박석이 쨍쨍했다. 턱까지 당겨올려 찍어누르는 시선은 그토록 진절머리나는 마운트싸움의 전조다. 벌써부터 몰려드는 피로감에 이마를 짚을 뻔했다가, 쯧, 하고 혀를 차며 이어진 도발에 시마에게도 불이 옮겨 붙고 말았다. 강대강. 간만의 격돌이다. 아니, 실은 의도한 추돌이라 해야 옳을 거다. 시마는 이 링에 반쯤은 의도적으로 올랐으므로. 제 아무리 머리에 피가 올라도 저의 사고회로 한켠은 냉각팬이 최대로 돌아, 끊임없이 흡수하듯 관찰하고 쪼개가며 분석해 결론을 낸다. 상대가 감정적으로 날뛸 때야말로 본심을 캐내기는 쉽다.

‘원래 겁에 질린 개가 더 짖는다지.’

이부키가 알았으면 정말로 펄쩍 뛰었을 생각을 하며 시마는 지지 않고 제 파트너를 째렸다.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이 눈싸움만 이어가기를 몇 분, 그러다 정말 갑작스럽게, 아무 전조도 없이 이부키의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연이어 긴장으로 팽팽하게 몸을 부풀리고 있던 그가 삽식간에 바람 빠진 풍선인형처럼 꾸깃꾸깃 구겨지며 매트리스 위에 엎어진다. 그 모양새는 차라리 기절한 사람에 가까워, 시마는 직전까지의 험악한 분위기 따위는 다 잊고 철렁 내려앉은 심장을 붙들고서 파트너의 이름을 외치고 만다.

“이부키?! 야, 갑자기 왜 그래!”

일 초도 안 될 짧은 시간동안 오만 상상이 영리한 회색 뇌세포를 통과하며 필라멘트를 깜빡였다. 엎어진 몸뚱이를 마구잡이로 흔들자,

“―”

희미하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공산품의 미묘한 차이까지 잡아내는 청력을 지니지 못한 시마로서는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기절한 사람의 앓는 소리인지, 아니면 실제로 어디가 아픈 건지. 별 수가 없다. 귀를 바싹 가져다대는 수밖에는. 그러자,

“난 바보야…….”

“뭐?”

대체 어느 맥락에서 튀어나온지도 모를 웅얼거림에 맥이 탁 풀렸다. 그야 문장 자체를 놓고 보라면 참이었지만, 아니지, 이부키는 바보지만 바보는 아니다. 정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평가가 낮은 제가 말하는 것도 웃기지만 이부키 역시 특정한 면에서는 자기를 비하하는 구석이 있으므로. 여하튼 자기비하는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그리고 이부키 너, 자꾸 스스로 바보라고 하는 건 고쳐.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그런 바보는 아니잖아.”

“...시마, 완전 잔소리마인.”

“그래서, 진짜 뭔데?”

이미 현관에서 대치했던 일 따위는 증발해 완전히 근무 중의 404호 같은 텐션이다. 여하튼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꿀밤을 먹이겠다고 언외에 실어 묻자, 매트리스에 얼굴을 박고 있던 이부키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눈가만 간신히 드러낸 채로 우물댔다.

“생각해보니까, 나, 시마한테는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잖아. 오히려 시마가 콱 노려보니까 서글퍼져서...”

있지도 않은 강아지 귀가 축 쳐져있는 게 보이는 듯했다. 어쨌거나 갑자기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니고 그냥 찡알대느라 푹 퍼진 거였다면 차라리 안심이다. 시마도 그대로 매트리스에 몸을 기댔다. 김은 빠졌지만 오히려 이런 게 낫다. 저라고 해서 쌈박질이 좋은 건 아니다. 오히려 대화로만 해결될 수 있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거기에다 들개 본인의 경계심도 풀렸다. 제 앞에 선명하게 그어놨던 선을 앞발로 문대가며 지우고 낑낑거리는 걸 보면, 확실히 저희 사이에 신뢰가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구나 하는 감상이 든다. 이부키에게 있어 저는 배를 까고 약점을 드러내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거겠지.

그러므로 이번에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묻는다.

“밖에서 할 말이 아니라고 한 건, 우리끼리는 괜찮다는 거지?”

“응, 뭐...원래는 진짜 짜증나서 집 가면 한 방 때려야지, 하고 한 말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랬던 걸지도?”

그냥 욱 했던 거구만. 그 말은 일단 목구멍 아래로 밀어내고서 이번에야말로 본론을 꺼낸다. 추론해낸 것은 있지만 역시 핵심은 본인이 아니면 모르는 거다. 지금이라면 코사카의 맨션 옥상에서 제게 전화했던 이부키의 심정을 오롯하게 이해할 수 있다. 조사해도 그건 알 수 없었어. 그러니까 항복. 언젠가 전화로 주고받았던 대화가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알지 못함을 수치심으로 여기는 시마는 차라리 순순히 제 파트너에게 자신의 심정을 고했다.

“이부키, 난 말이지. 너랑 전력으로 뛰고 싶으니까 알고 싶은 거야. ...불공평하잖아.”

“내가 전력으로 뛰었다간 시마 못 따라오지롱~ 은, 알았어, 노려보지마! 시마 쏘아보면 눈매 완전 더러운 거 알아!? 분이기 무거워서 농담 좀 한 거 가지고 쏘아보지 말라구!”

혼나는 것 같아서, 싫어. 텐션 높게 와다다 내뱉어진 끝에 흐물텅하게 달라붙은 말은 아주 드물어서 낯선 단어이기까지했다. 추론은 재증명된다. 이부키는 의외로 싫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호불호가 아주 극명할 것처럼 구는 것치고는 그 입에서 싫다,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걸 들은 것은 지극히 희박하다. 의도적으로 피하는 단어는 오히려 핵심을 찌르기 마련이며, 시마의 직감은 이부키가 말할 준비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형사잖아. 취조하는 어투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지. ...그래서, 지금 뭘 느끼고 있어. 앞뒤가 맞을 필요도 없어. 어차피 네가 논리정연하게 말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하니까 그냥 다 뱉어내. 내가 알아서 끼워맞춰 들을 거야.”

“별로 재미있지도 않을텐데.”

“재미있자고 듣는 거 아냐. 이부키 너처럼 좋은 녀석이 자기를 안 챙기려는 이유가 뭔지 알고싶은 거지.”

“뭔 소리람. 내가 시마보다 밥도 잘 챙겨먹고 운동도 더 꾸준히 해. 바른생활의 아이쨩입니다~.”

최후의 발악은 정말이지 미약했다. 남에게 말해본 적 없는 것을 털어놓을 때는 심리적 장벽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데, 이부키의 마음이 말을 하겠다 쪽으로 잠시라도 기울어진 이상 저의 승리다. 아직 남은 필살기가 있기도 하고. 시마는 살짝 고개를 기울여 이부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뜻 아니란 거 알잖아. ...정말 싫으면 그만둘 거니까. 안 돼?”

“아, 정말! 내가 그 표정에 약한 거 알면서!”

“그럼 내 탓으로 하던가.”

“으으, 이 귀착마인. 레이코 씨, 내 파트너가 이래요.”

효과는 뛰어났다! 모 게임의 나레이션이 떠올라도 이상하지 않은 반응이었다. 이러려고 아껴두는 표정이지. 하늘나라의 레이코 씨를 찾는 파트너를 보며 시마는 속으로만 웃었다. 말수도 그 템포도 평상시로 돌아온 것으로 보아 긴장은 다 떨친 모양이다. 이제는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다행히 시마는 인내심이 깊은 핸들러였고 제 들개는 남을 오래 기다리게 할 성미는 못 됐다.

“그건 내 것이 아니었어.”

“응?”

“내 것이 아닌 걸 어떻게 가져, 안 그래? 엄청 오해받고 그랬어도, 난 훔치지 않았어. 뺏지 않았다구.”

자백은 돌연 시작됐다. 눅눅하게 젖은 미소를 마주한 시마는 곧장 이부키의 대답이 한참 전, 잡화점에서의 질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시공간 배경은 404 결성 초기, 메론빵 차에서 들었던 가난했고 썩어있었다던 시절일 거다. 독백은 계속된다.

내가 가졌던 몇 안 되는 것들도 툭하면 망가졌거나 처음부터 망가진 것들 뿐이었는데 어쩌겠어. 세상의 그 모든 반짝반짝하고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들은, 그냥 나하고는 멀었어. 시비 걸려서 싸우고 나면 다 깨지고 부서지고. 아, 말하다보니까 기억났다. 언제 큰맘 먹고 샀던 볼펜이 있었거든? 한창 유행하던 녀석. 시마도 봤을 것 같은데. 알아? 그, 여러 색 들어있는 볼펜. 응. 처음 나왔던 그거. 기분 좋게 학교에 갔는데 꺼내기가 무섭게 훔친 거 아니냐는 거야. 아니라고 해봤자 믿지도 않고, 그때의 난 성격 완전 나빴고? 주먹부터 갈겼지. 엄청 싸웠는데 선생이 와서 말리고 보니까 그 볼펜, 밟혀서 부서졌더라고. 걔 아무래도 운동부였나보다. 비실한 놈이었으면 거기까지 안 가. 아이쨩은 그때도 무적이었답니다~. 응응, 여하튼 그래서 그때부터였나? 더는 뭐, 살 의욕도 없었고. 엥? 옷하고 러닝화하고 선글라스는 이야기가 다르지, 시마. 그건 내 표준장비! 잘 달리기 위해서는 다 필요하답니다. ...아, 아아. 시마가 말한 게 그런 뜻이었구나.

“우와, 나 한번도 의식해본 적 없었는데. 진짜네? 필요한 거 아니면 안 샀구나. 시마 완전 똑똑해.”

“무의식이였냐, 진짜로...”

야생의 감으로만 살아가는 녀석이라 어쩌면 자각이 없을지도 모른다곤 생각했지만, 정말로 헤죽 웃으면서 남 일처럼 말하는 꼴을 보자니 절로 이마를 짚을 수밖엔 없었다.

“난 시마가 뭔 말을 하나 싶었어. 이것저것 제대로 사는데 말이지.”

“러닝화 사모으는 것만 보면 그렇게 착각하기 쉽긴 해. 근데 그건 취미와 특기와 직업이 일치해서니까 저항이 없었던 거겠지. 이렇게 된 거 한 가지만 더 묻자.”

“나왔다, 한 가지만 더. 그래서 어떤 거?”

“우정이고 연애고, 엄청 동경하는 주제에 손 뻗지 않은 거.”

“내가 그랬어?”

“그랬어. 당장 우리 사귀게 됐던 것만 생각해도!”

“어, 그렇네? 진짜 신기하다. 시마는 이걸 어떻게 말로 꺼낼 수 있는 거야?”

이것도냐. 시마는 탁상을 걷어찰 뻔했던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사람 속을 다 들쑤셔놓고 정작 본인은 꼬리 내빼고 도망쳤던 꼬락서니를 떠올리면 지금도 천불이 나는데 그때의 고민이 다 무색하게 군다. 잇새로 앓는 소리를 내고 있자니 아까보다 담담하게 말이 얹힌다.

“근데 그렇잖아. 물건도 가질 사람이 가지는 건데, 외톨이가 어떻게 친구라거나 애인을 만들겠어.”

“그 주제에 경찰은 되고 싶어했잖아. 정의의 편이고 싶어했고.”

“시마쨩 왜 갑자기 바보 같은 소리를 해? 정의는 내가 혼자서라도 달려가서 쥘 수 있는 거였어. 경찰도 뭐, 가마 씨가 잔뜩 도와줬지만 어쨌든 시험보고 경찰학교 들어가는 건 나 혼자서 하면 되는 거고?”

시마는 이제 완전히 결론을 내린다. 이 애는 혼자 살아온 기간이 너무 길었다. 혼자인 삶에 너무 길들여져있어 모든 생활습관이 거기에 맞춰진 거다. 습관이 형성되는 데에는 백 일이면 충분하다고들 하지만 한 번 형성된 습관을 고치려면 얼마가 걸릴까. 관성이 든 것을 바꾸려면 배의 노력이 들 텐데.

그래, 차라리 집을 합치자. 과격한 결론이지만 거기부터 시작해야할 것 같다. 어차피 이부키의 예민한 오감으로 관사 생활을 이어가는 건 불편할 거라고 계속 생각은 하고 있었으니까. 그 전에, 한 마디 더.

“이젠 혼자가 아니잖아. 조금 더 욕심내보는 건 어때.”

“그러는 시마는.”

“나야 뭐.”

“시마도 함께인 게 좋아. 있지, 날 혼자 달리게 할 거야, 파트너?”

갑자기 저에게로 화살이 돌아와 시큰둥하게 답했더니, 부메랑이 돌아왔다. 가슴에 푹 박히는, 그렇지만 고통스럽기보단 차라리 사랑스러운. 그래, 부메랑 몇 번이고 받아가며 형사 계속 하기로 했는데 개중에는 이런 말랑한 부메랑이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시마는 제게 뻗어진 손을 맞잡으며 피식 웃었다.

“봐봐, 잡을 줄 아네. 정의 말고도 다른 것도 잡히잖아.”

그 말에 이부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그래, 넌 이런 얼굴이 훨씬 어울리지. 양 손 가득 반짝이는 걸 쥐고 그렇게 행복하게 웃어줬으면 해. 이걸 보고 싶었던 거야.

카테고리
#2차창작
작품
#MIU404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