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U404

익숙한 비참함

분명 그랬을 터인데.

살다보면 적응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언가에는 쉽게 적응하고 무언가는 언제가 되었든 며칠이 되었든 몇 년, 몇 십년이 지나도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것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중 한 가지를 뽑으라 한다면 다양한 대답이 나오겠지. 누군가는 패배라고 할 것 이고 누군가는 실패라 할 것이며 누군가는 역설적으로 성공을 말하는 이 또한 존재할 것이다. 다만 그가 내놓은 답은 좀 더 본질적인 것이었다. 익숙하면서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 아마 평생을 가도 그 누구 하나 익숙해지지 못할 것이라 감히 자부할 수 있는 것이 하나. 불완전하면서도 완전하고 그중에서도 제일 잔혹한⋯ 것에 시마 카즈미는 아마 평생 완전하지 못할 것에 이름을 붙였다. 아, 그것은 사랑이었노라고.

아연하게도 몰려오는 것은 허탈함이다. 설마가 설마일까 했지만 그게 진짜일줄은. 약간의 부정을 포함하여 발버둥 친 나날들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꽤나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이 감정 앞에서는 언제나 반항기가 한창인 사춘기 소년으로 돌아가는 기분도 들었다. 다른점이라 한다면 들뜨는 것이 아니라 지친다는 것일까. 그만큼 당하고 자각하고 결심했으면서 또, 반짝이는 것들을 사랑해버리는 꼴이.

취향 참 한결같다⋯. 고 말하는 건 누군가에게 실례가 될 것 같으니 사리겠다만. 제 집 거실에서 캔맥주를 한 손에 쥔 시마 카즈미의 안에서 절망과도 가까운 한숨이 터져나오는 것은 본의가 아니었다. 그냥.. 입을 여니 나오는 게 한숨인 걸 어떡하나. 이쯤되면 좀 봐주라.. 그런 푸념들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누구에게 말하고 있느냐고? 글쎄.. 제 자신에게 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겠지. 어느쪽이든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이자면 사랑이었고 시마 카즈미는 그걸 이 이상 부정할만큼 멍청하지 못했다. 뭐, 정확히 말하자면 멍청한 짓은 현재 진행 중이고 이미 시작된지 오래 됐다는 것부터가 문제겠다만.

자각 후 결론 도출 그리고 인정.. 거기까지 가니 고요해진 집 안에서 째깍대며 울려대는 시계 초침 소리가 있었다. 시마는 무감히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며 허튼 생각을 이어갔다. 예의 그 소리가 귓가에 닿는 것을 거슬려하지 않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다고 한다. 평소에 들리지 않았던 것들이 들리는 걸 낯설어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이유야 뭐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글쎄. 그자식은 전부 귀에 들어오는 쪽이 일상이겠지. 그럼 둘이 있을 때 말이 많은 건 이 소리가 거슬려서인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군. 그도 시마도 타인보다 익숙한 소리를 이제와서 거슬려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다 마신 캔을 손 안에서 찌부러뜨리는 것과 동시에 일어선다. 캔은 캔에다가 넣고.. 일단, 자야지.


시마 카즈미는 평범하게 출근했다. 평범하게 파트너의 얼굴을 보았고 시덥잖은 말장난에 어울리며 20시간을 붙어있었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붙어있는데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나? 그럴리가. 일하는데 마음이 생기고 말고가 어딨는지. 시마는 제게 주어진 한자락의 변명거리를 곱게 접어 쓰레기통에 던졌다.

이유를 붙여봤자 소용없다. 어떤 이유든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미 사랑하고있고 그리고, 또.. 저 바보는 모르고. 그렇다면 이 감정은 수장시켜 마땅하다. 묻자, 묻어 없애자. 방금 버린 생각처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오로지 나만 알고 있었던 비밀로 하자.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제 사랑은 언제나 대부분이 그러했다. 시마는 간단한 결론을 내렸다. 싹을 잘라버려야지.

"그래서 말이지? 근처에 반찬가게가 쉰다는 거야~. 아~, 귀찮게 됐어."

"관사에서도 간단한 요리 정도면 할 수 있지 않나?"

"있어~. 근데 역시 볶음밥이나 카레 정도가 한계려나?"

"카레 정도면 충분하잖아.."

"냄새가 눈치 보인다고~~."

"아 그러셔. 그것 참 곤란하게 되셨겠습니다."

"영혼이 없다니까... 있지~, 좀 더 진심으로 안타까워해줄 순 없는 거야?"

"그것 참... 안타까움을 넘어서 안쓰럽게 느껴지네요...이부키 형사님."

"⋯."

투정어린 푸념을 뒤로한 채로 시계를 본다. 앞으로 4시간. 길기도 하지. 제 팔자려니 생각하면 넘기지 못할 것도 없다. 얌전히 팔을 내린다. 일은 일이다. 감정은 감정일 뿐이니 공과 사를 혼돈하면 안되지. 문제는 언제나 하나다. '나' 그리고..뭐 이번에는 하나 더, 이 자식도 확실히 문제가 있다. 아니, 문제가 있는 건 나고 도움이 안 되는 쪽이다.

"그래서~ 저기 시마 듣고있어?"

"아니."

"어이."

작은 한숨을 뒤로 시마 카즈미가 입을 열었다.

"그래그래.. 관사에서만난오카타씨께서전에나누어주신반찬통을돌려드리려고하는데시간때문에만나지못해서곤란하다고?"

"시마쨩, 랩해?"

"겠냐."

"아무튼 잘 듣고 있었잖아~. 있지, 시마..어떻게 하는게 좋을 것 같아?"

"알바냐.. 대충 문고리 앞에 걸어두면 되잖아."

"그럼 감사인사를 못하잖아! 나는 얼굴을 보고 감사 인사를 드려야하는 타입이라고."

"그러니까 내 알바냐고. 카드라도 써서 넣어."

"역시 다음 운명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나..?"

"안 들을거면 대체 왜 물어봤지?"

짜증나는 녀석이다... 짜증나기만 하면 모르겠는데 성가시다. 대체 이게 뭐가 좋아서 이 모양 이 꼴이 됐지? 의미 없는 탐색을 재촉하는 뇌에 제동을 가한다. 모르는 게 나아. 짜증이 나면 오히려 다행인 게 아닌가? 정이 뚝 떨어지는 것의 효과를 볼 수 있을테니까. 어느순간부터 좋아하는 것이라 정의한 것처럼 비록 가깝지는 않더라도 멀지 않은 미래에 어느 순간부터는 고작 정이라는 것으로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는 수 밖에 없었다.

실로 안일한 생각이 아닌가? 시마 카즈미는 무시했다. 또한 외면했다. 수장시켜 마땅한 것이기에. 파헤칠 필요 없이 그대로 묻어두면 되는 것이다. 영원히, 아래로 그 밑바닥보다 더 아래로. 한 때 그러했던 것 처럼. 첫째로 감정에 발목잡히고 싶지 않았고 둘째로는 일에 방해되었으며 셋째로는 제 자신에게마저 민폐였다. 사랑은 죄인가? 누가 그에게 그리 묻는다면 그는 대답할 것이다. 사랑은 죄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하는가? 그에 대해서도 대답할 것이다. 자신이 하는 것은 죄가 될 수 있다고.

무엇에? 그것은 의심에, 추론에, 판단에, 결과에 그 모든 영역에 편견을 불러오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직업은 형사였다. 그렇기에 처음엔 자기자신부터 의심했다. 제가 하는 것은 사랑인가? 동료애를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내가 하는 것은 사랑이라 정의해 마땅한 것들인가? 감정을 정의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 모든 것에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는가, 없는가. 결론은 쉽게 나왔다. 아주 끔찍한 결론도 함께.

시마 카즈미는 그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무엇보다 휘말리게 하고싶지 않았다.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애초에 그자식은 남자를 좋아하지도 않을 것이다. 대놓고 여자에게 들이대는 성격에 그의 이상형은 '큐릇'한 여성이고 -아직까지도 이게 정확히 무슨 말인지 시마 카즈미는 느낌 외에는 와닿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되짚어보면 밤마다 제 생각이 나서 기분이 나쁘다 라는 소리까지 들은 적이 있으므로.

도망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도 어쩔 것인지. 제 자신을 위한 도망이 아니다. 서로를 위한 것이다. 그 또한 변명이 아닌가? 예, 변명이면 어쩔겁니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도 시마 카즈미였으며 질문에 대답을 하는 것도 시마 카즈미였다. 이 또한 의미 없는 연속극의 한 장면처럼 누군가 보면 폭소할지도 모르는 자문자답. 아니, 웃음이라도 나오면 다행이지.

시마는 피곤한 낯으로 차에서 내렸다. 평소보다 배는 피곤하군. 제 얼굴을 뭉개듯 마른세수를 한 뒤 걷는다. 그런 저를 따라걷는 발소리가 들린다. 저와는 다르게 꽤나 팔팔한 낯이지만 들어가서 보고서를 작성하는 내내 징징거릴 것이 눈에 선했다. 그의 손아귀 안에서 팽팽 돌아가는 차키가 서로 찰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울렸고 저 멀리에서 엇비슷한 시간에 도착한 진바씨와 인사하며 분주소 내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노트북을 꺼내 자판을 두드렸다. 일상적인 일과중에 가장 일반적인 일상이다. 그리고 퇴근 직전에 하는 것이기도 했지. 커피를 내리기 시작한 진바씨를 뒤로 벌써부터 힝.흥.행.훙 하는 소리가 옆에서 들려오는 걸 무시했다. 물론 얼마 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지.

"아아아아아....쓰기 싫어어억."

"싫어도 해."

"할, 거약. 그래도 하기 싫은 건 싫.은.거.야."

"사회인이면 싫은걸 참고 하는 법도 좀 배워."

"참고 하고 있거든?! 완전 열심히. 전심전력으로 될 수 있는 최선의 선으로!"

"기왕이면 입도 좀 열심히 참아보는건?"

"네!! 거기까진 무리~!!"

"그만 싸워, 시끄럽다! 커피나 마셔 커피나."

"감사합니다."

"세상은 나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앗."

"그런 너를 매일 보고있는 내 노고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지⋯."

"그거 무슨 의미?!"

이부키! 아 저에요?! 결국?! 그리 시끄러워지는 분주소를 응시하지도 않은 채 자판을 누른다. 24시간 내내 붙어있는 것도 모자라서 징징거리는 것까지 듣고있자니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다. 이미 실컷 이야기했으니 더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고 나눌 말도 없으며 감정도 없다고. 정확히는 오늘 이 이상 소모하고 싶지 않다. 정신력을 말이지. 준비된 정신과 감정이 모두 소진되었으니 부디 휴식을 취해주세요. 라고 뇌가 말하는 기분이다.

"그럼,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탁, 하고 접힌 노트북을 가방에 집어넣는다. 엑 벌써?! 그리 황망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어깨를 으쓱, 얄미운 표정을 한 번 지어주고 가방을 챙긴다. 일어서 지나치려는 몸을 잡아채는 손길이 있다. 아니, 정확히는 미약한 힘으로 '잡았다.'가 옳았다. 우뚝 멈춰선 시마는 마음속으로 큰 한숨을 쉬었다.

"왜."

"시마.."

"그러니까 왜."

"아침 안 먹을래?"

"⋯됐습니다."

"쳇."

그렇게 떨어져나가는 손으로 시선이 무심코 향하다가 만다. 시마 카즈미의 사랑은 언제나 고요하고 적막하다. 그렇기에 아무도 모르게 할 수 있으며 당사자를 속일 수 있고 아무도 모르게 그만둘 수도 있는 것이다. 너무 늦지 않게 걸었다. 제 캐비닛으로 걸어가 열쇠를 꽂고, 열고, 겉옷을 꺼내 입고 다시 닫는다. 하지만 고요할 뿐이지 티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심코 가는 시선까지 컨트롤 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한 사람도 아니었다.

방금 전 몇 번 정도 쳐다봤지? 상대가 보고서에 집중해 눈이 맞지 않은 게 다행이다. 단단히 미쳤군. 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쓰고 있는 꼴이 기특해서 쳐다봤다고 할까. 머리는 언제든 변명거리를 생각해내고 모방하고 사고한다. 다시금 열쇠를 걸어 잠군 뒤 분주소를 나간다. 눈 앞에 보이지 않으면 일순간의 해방감마저 든다. 아침밥을 뭘로 해야하나. 기어이 버텨낸 끝에 돌아온 일상이 소중했다.

가는 길에 편의점이든 도시락 집이든 들러서 밥을 산 다음, 집에 가서 배를 채우고 샤워를 한 다음 침대에 누워서 자면 된다. 그 사이에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는 미지수이나 겨우 찾아온 평온을 깨뜨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여전히 무음이 아닌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꾸겨넣은 채로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시마는 평범한 퇴근길을 맞이했다.

***

맞이하긴 개뿔. 차라리 눈 앞에 얼쩡거리는 꼴이 나을 뻔 했다. 사람은 왜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가? 시마는 퍽이나 불합리한 생각까지 도달하고 말았다. 사람이니까, 생각을 하는 거겠지. 사람만큼 생각이 많은 동물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사람만큼, 생각을 많이 하는 동물은 없을 것이다. 그래, 그게 문제라고. '그게' '제일' '문제'라고

왜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 왜 인간은 감정에 휘둘려서. 이성을 가지고서도 본능과 감정에 휘둘린 채로 살아가는가? 시마 카즈미는 제자신이 통제되지 않을 때마다 답답함을 느끼곤 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제 몸인데 제 의지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그렇다면 뇌는 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급기야는 뇌과학쪽 서적이라도 펼쳐보아야하나 싶은 쓸데없는 감상까지 드는 것을 시마 카즈미는 제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린 채 그만뒀다.

생각을 그만둘 필요가 있었다. 남의 탓을 해보자면 그 자식이 말이 너무 많은 탓이다. 하루 종일 들었던 이야기 중 대부분이 이부키가 말한 이야기와 목소리 그리고 얼굴이었으니 싫어도 생각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싫었냐고? 차라리 싫은 것이 나았을 터다. 라고 시마 카즈미는 반쯤 환장하며 대답했다. 숨을 들이키고, 내쉰다. 누구든 들었다면 땅이 꺼지겠다며 농담이라도 던졌을 법한 깊이였다.

하, 그럼에도 헛웃음을 치는 것을 멈출 순 없었다. 그까짓 밥 한 번 먹어줄 걸 그랬나. 그런 생각부터, 괜찮은 도시락집이 어디 있었는지, 편의점이 열린 곳이 어디였는지.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리는 것을 말린 것도 한 두 번이다. 그가 고른 것은 가라아게가 담긴 도시락이었다. 시마 카즈미는 음식에 대한 호불호가 크지 않았다. 맛있는 것을 먹고싶은 마음이야 사람이니 존재한다지만 굳이 매 식사 끼니마다 맛있는 것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메뉴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보통 파트너의 선택대로 휘둘린다. 시마는 언제나 큰 불만없이 먹었다. 몇 번은 자신이 사오기도 했지만 그건 이번에는 시마가 사오라는 녀석의 재촉 탓이었지. 그때마다 시마가 사오는 것은 대강 정해져 있었다. 햄버거, 빵, 컵라면, 간단히 밀행 중 먹을 수 있고 가능하면 빨리 익고 빨리 조리되며 빨리 먹을 수 있는 것들. 그래, 아주 효율적인 것들.

그러나 이부키는 혀 또한 민감한 것인지 입맛이 까다롭다고는 말하지 않겠으나 꽤나 가리는 것이 있었다. -대체로 주면 먹긴 했다. 가끔 불평을 하는 것 빼면.- 첫째로 야채보단 역시 고기파였다. 가끔씩 사오는 편의점 도시락 같은 것들을 보면 대부분이 고기였다. 그래, 고기. 오늘 사온 가라아게 도시락 같은...아 또 생각했다. 와작, 부러지는 소리가 났고 상념에서 깨어난다. 나무젓가락이 연약한 탓이다.

이미 비어버린 도시락 통을 정리하며 일어섰다. 싱크대에서 쓰레기가 없도록 헹구고 구별해서 넣는다. 플라스틱, 플라스틱, 일반 쓰레기. 자, 자자. 제정신이 아닌 것은 분명했으니 정신을 차리기 위해선 수면이 필요했다. 대낮에 암막커튼을 치고 어두워진 방 안에서 젖은 머리를 말리지 않은 채로 침대에 대충 몸을 던졌다. 이정도로 감기에 걸릴 일은 없고 제게 중요한 건 아무 생각 없는 수면이었다. 질 높은 수면. 제발.

***

알람조차 울리지 않는 새벽, 괴로운 신음과 함께 탁자 위 핸드폰을 들어올린다. 시간을 확인하면 새벽 4시. 지금 일어나서 어쩔 건데.. 미약한 짜증이 섞인 채로 핸드폰을 엎어둔다. 그러고보니 이 시간대 즈음 러닝을 한다고 했나.. 아, 젠장 또 생각했어. 눈 뜨자마자 생각하는 게 이딴 생각이라니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참 대단했다. 시마는 다시금 이불을 뒤집어썼다. 오늘은 비번이었다. 즉 휴일. 죽어도 그자식을 만날 일은 없었다. 어차피 몇 시간 후면 싫어도 저절로 눈이 떠질텐데. 뭐가 그렇게 급해서 평소보다 2시간이나 일찍 깨어난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괴로울 바엔 차라리 고백해버리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누군가는 쉽게도 말하겠지만 그 또한 하나의 스위치다. 고백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마음을 전한다는 것은 비단 좋은 쪽으로만 흐르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사이보다 친한 사람일 경우 더 곤란해진다. 시마 카즈미는 이부키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지 사귀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다. 바라지도 않았다고. 또 하나의 끔찍한 결론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날밤 불현듯 깨달은 것은, 세간에서 말하는 사랑을 빼고서라도 나는 이자식을⋯.

고백이라는 건 하나의 시한폭탄이다. 타인에게 제 감정의 덩어리를 그대로 던져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 준비되지 않은 상대에게 고백이란 말 그대로 재앙이며 혼란이다. 시마 카즈미는 그냥 이대로 이 감정이 썩어 없어지길 간절히 소망했다. 곤란하게 만들고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 자신이 곤란하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다.

실상 시마 카즈미는 누군가를 심도깊게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며 그의 생각은 보통 추론을 위해 준비하고 추론은 범인과 사건 현장을 정리하기 위해 발동되는 무언가라 보는 것이 조금 더 타당했다. 그는 배운대로의 배려와 법, 도덕적 관념을 옳게 행하려 노력하는 사람이나 실시간으로 타인에게 따뜻한 말을 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는 언제나 이성이 한 발 앞서 있는 사람이었고 타인을 감싸는 것은 피해자와 일반인에게 발휘되었으며 그 외의 신경들은 날카롭게 벼려져 상대를 들쑤시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 주로 범인들을.

그러니 그가 어느쪽이냐 묻는다면 퍽이나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고. 그리 자부할 수 있었으나.

"그거랑 이거랑은 다른 문제지⋯."

시마 카즈미는 새로이, 어쩌면 다시 자부하건데 그는 지극히 현실적이었고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싫어했으며 도울 수 있는 것은 돕고 살아가자 정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남에게 폭탄을 떨어뜨리는 놈으로 살 배짱도 생각도 없다는 말이었다. 답지않게 철학적인 사고에 잠식되고 만다. 시마 카즈미는 형사다 철학자도 아니고 그저 생각이 많은 인간일 뿐이며 뇌와 관련된 과학적 지식조차 없고 -있다고 해도 겉핥기식일 뿐이다. 논문 몇 개 읽은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감정이 무슨 원리와 사고를 기점으로 불러일으켜지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알 수 없으며 알고싶지도 않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말이라는 것에는 힘이 있어서 누군가는 언령이라고도 부른다. 미신적인 이야기를 하고싶다는 게 아니라 실제로 말에는 적어도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 힘이 존재한다. 무언가의 '스위치' 그런 역할을 하기엔 지극히 충분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렇기에 사람은 '말'은 신중히 뱉어야만 하며 함부로 뱉어서 좋을 것이 하나 없다. 즉, 시마 카즈미는 죽었다 깨어난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 이부키 아이에게 고백할 생각이 없었다. 전혀.

"아침부터 혀가 잘 돌아가네요. 그쵸~?"

젠장할, 하지만 결국 그는 마저 잠을 청하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낮게 읊조리는 것은 흔하다 못해 이제는 거진 욕으로조차 정의되지 못할 말들이었으나 침음과 함께 삼켜진 감정들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을 문지르는 것은 덤이다. 어차피 날아간 잠을 붙잡아오려는 멍청한 짓을 하진 않았다. 졸리면 잘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긴급상황만 아니라면 오늘 하루는 평화롭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일적인 면에서는 말이지.

***

그렇게 욕실에 들어갔다 나온 시마 카즈미는 핸드폰에 찍힌 부재중 전화에 미간을 구기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야 당연하게도 발신자는 이부키 아이였다. 무슨 일이 생겨서 전화를 한 걸까, 아니면 시덥잖은 일로 전화를 한 것인가. 시간을 막 6시를 넘은 시점이었다. 샤워를 오래 하진 않았으니 망할 시간과 정신의 방 체험이라도 한 모양이지. 이부키는 바보가 아니다. 휴일에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연락하지 말자. 만나지 말자 그리 먼저 제안한 것은 시마 카즈미였고 이부키는 이에 간단히 동의했다. 아니, 암묵적인 제안과 동의였다고 할까. 이 또한 기억의 편견이다.

그들은 직접 말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암묵적으로 둘 다 휴일에는 연락하지 않았다. 특별한 일이 있거나 용건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지. 이 법칙을 먼저 깨뜨린 것은 시마 카즈미였으므로 그는 이 상황에 항의도 불평도 할 수 없다만⋯.

생각을 끊어낸다. 시마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시간낭비다. 잠금을 풀고 망설임 없이 부재중 전화를 두드린다. 신호음, 스피커 폰으로 전환한 뒤 소파에 앉아 상대가 받을 것을 기다렸다. 일반적인 신호음이 세 번을 넘어가기 전에 달칵, 그런 소리가 났다.

"여보세요~ 시마쨩~?"

"무슨 일이야."

"그게 말이지? 뭔가 걸고 싶어져서."

"하?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 자각은 있고?"

"오전 6시 13분. 딱히? 그냥 왠지 오늘은 시마쨩한테 이시간에 전화를 걸어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이었달까~."

허, 작게 헛웃음이 튀어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실소에 가까웠나? 이걸 야생의 감으로만 취급해도 되나?

"자고 있었으면 어쩔 뻔 했어."

"그땐 미안하다고 해야지~, 아니 뭔가 삐릿~ 하고 왔다니까?"

"그 삐릿이든 뭐든 보통 6시에 사람한테 전화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알고 있대도. 시마라서 건 거라니까. 보통 이쯤엔 일어나잖아? 출근시간이니까."

"휴일에도 내가 이 시간에 일어나 있다는 보장은 없어."

"그리고 시마가~"

"내가 뭐."

"뭔가 시마가 날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

아, 망할. 시마 카즈미는 가볍게 제 입술을 핥았다. 목이 말랐다. 한숨을 삼킨다.

"뭐야뭐야~? 왜 말이 없어? 아이쨩 정답? 딩동댕동? 뭐 그런 거였어?"

"시끄러.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을 뿐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거든."

"그렇게 말해도 날 엄~청 좋아하는 주제에~."

"하....본론이나 말해."

"밥 먹자."

스피커폰으로 해뒀으면서도 습관적으로 손목시계를 본다.

"어디도 안 열었을 시간인데."

"안 먹는다고는 안 하는구나? 역시 거절한 거 미안했어? 왠지 그런 느낌이었걸랑~."

만나서 입을 꼬매버려야 하나⋯.

***

휴일에 만난 복장은 생각보다 더 간편했다. 시마 또한 가벼운 브이넥의 면바지 차림이었고 상대는 티셔츠 한 장에 트레이닝 바지 차림이었다. 아쉽게도 입을 꼬맬까 했던 것은 역시 생각만으로 그쳤다. 그보다 겉옷조차 입고 나오지 않은 꼴이..아니지, 그런 걸로 감기에 걸릴 인간상은 아니었다.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 쪽으로 시선이 갔다가 돌아온다. 다 말리고 나와도 될텐데. 약속시간을 너무 타이트하게 잡았나?

"다 말리고 오지 그랬어."

"응? 아~ 머리? 어차피 금방 마르는걸~"

"그러니까 네 머리가 개털인거야."

"어찌되든 좋잖아~, 머릿결 같은 건!"

"그래서. 먹고싶다는 게 뭐라고?"

"덮밥~."

"갑자기 뭔 바람이 불어서."

"큐쨩이 추천해준 가게걸랑. 나중에 시간나면 가보라고 했는데 말이지~ 뭔가, 뭔가.. 이런 곳은 혼자보단 둘이 가고 싶잖아?"

"모르겠는데."

"냉혈한!"

나와줬잖아. 그건 그래~. 그런 시덥잖은 말장난들이 이어지며 두 명의 남자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가게는 그리 멀지도 특별히 가깝지도 않았다. 중간지점에서 만난 것 만큼 걸어가는 와중 채워지는 소리들은 거진 이부키의 것이었고 그에 따라 시마가 종종 대꾸했다. 새벽에 안개라도 꼈던 모양인지 물기를 머금은 공기는 늦여름의 시원함을 느끼게 해주는 듯 했고 이젠 덥지도 축축하지도 않은 계절에 가을이 오는 것을 실감할만 했다.

그래서 저번에 큐쨩이 엄청 화를 내지 뭐야. 진짜냐, 아 그러고보니 세일 하던데. 엑, 진짜? 시덥잖은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평범이라 말할 수 있는 대화들이 이어진다. 아, 안되는데. 휴일까지 이녀석과 같이 있는 것은. 이미 저지른 사람이 말하기엔 늦은 감이 있었으나 그렇다고 나오지 않을 수도 없었다. 거절했다면 의심했으리라.

정말, 그 이유뿐이야? 글쎄. 자문자답은 짧게 끝난다. 제대로 된 대답조차 자신에게 돌려주지 못한 채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는 두 남자의 보폭을 생각하자면 생각보다도 더 짧게 느껴졌다. ..아니면,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인지도 모르지. 걸음을 멈춘 제 옆의 남자를 가만히 올려다본다. 시마는 입을 열었다.

"여기?"

"응 여기~. 들어가자 들어가."

가게는 꽤나 단출했다. 목재로 이루어진 인테리어는 퍽 그리운 향수를 불러일으켰고 사장은 카운터석을 권했다.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은 적당한 사이즈의 식당에 자리잡아 앉은 두 남자는 메뉴판을 보며 고민했다. 생각해보면 딱히 입맛이 서로 맞는 편은 아니었지. 둘 다 무엇이든 잘 먹지만 굳이 취향을 들춰보자면 정반대였다. 이걸로 할까.. 대충 메뉴를 정한 시마가 주문을 같이 하기 위해 옆을 봤,

"....뭐하냐?"

".....고민..."

엄청난 기세로 얼굴이 꾸겨져있는 이부키를 발견했다. 뭐하는거야? 고작 주문 하나를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고민할 일인가? 이해할 수 없는 진지함에 눈썹이 팔자로 휘어진 시마는 얼떨떨한 낯으로 물었다.

"...뭘 고민하는 중인데. 설마 메뉴냐?"

"돼지랑 소중에 고민이야..."

"어느쪽이든 됐잖아.."

"좋지 않아! 이런 건 제대로 고민해서 먹어줘야한다고."

"목소리가 커, 바보야."

"젊은 친구가 뭘 좀 아는구만."

"그쵸~? 시마는 낭만을 몰라."

낭만까지 가는거냐. 그보다 처음 본 사이면서 뭘 한 10년정도 아는 사이처럼 사장님하고 대화하는건데? 이 친화력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럼 내가 소로 시킬테니까 니가 돼지로 시켜."

"어, 그래도 돼?"

"대신 나머지는 내 마음대로."

"넵, 명 받들겠습니다아~. 그럼 난 이걸로."

메뉴 하나 고르는 데에도 이렇게나 우여곡절이. 어이없음에 픽, 하고 웃음이 새어나온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벌써부터 덮밥, 덮밥이라며 알 수 없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인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시덥잖은 잡담, 일이 아닌 일상에 대한 이야기. 고기가 튀겨지는 소리, 구워지는 소리, 간간히 들려오는 사장님의 말소리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나쁘지 않았다. 평소의 휴일이 아니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었고 특별한 사건이 없으니 재잘거리는 소리들이 거슬리지도 않았으며 일일히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도 없었다. 바보같은 말을 해도 받아칠 여유가 있었고 이상한 말을 하면 골려주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 주문했던 음식이 나왔고 각자 젓가락을 꺼내 식사를 시작했다.

유일하게 고요한 시간은 그러했다. 시마, 그거 하나 주라. 가져가, 여기 간장. 땡큐~. 누가 나누어도 이상하지 않을 대화를 친구도 아닌 사이가 우연히 만난 것도 아니고 서로 연락을 해서, 혼자 오기 좀 그렇다는 이유로, 휴일에, 너랑, 나, 둘이서. 모든 것을 나열한 시마 카즈미는 제 자신을 가볍게 비웃었다. 얄팍한 감정이 고개를 치켜들고 외치는 것 같다. 그만 좀 인정해. 보고싶었잖아? 라고.

시마 카즈미는 씹었다. 그리고 넘겼다. 음식은 맛있었다. 이로 잘게 부수고 씹어 넘기고 물과 함께 삼키고 그 밑에 있는 밥 또한 함께. 전부, 전부, 전부. 잘게 씹어서 삼켰다. 목구멍 아래로. 그러면 마치 이 고개를 꼿꼿하게 뻗은 감정마저 잘게 부숴 소화될 것 처럼 느껴져서.

"있지 시마."

시마는 시선만을 던졌다.

"요즘~ 신경쓰이는 거라도 있어?"

남자는 젓가락질을 멈춘지 오래였다. 1/3정도 남은 물을 느리게 흔들면서. 입 안에 음식물을 전부 씹어 삼킨 시마는 그제서야 입을 연다.

"딱히."

"진짜로~?"

끈질기네. 드는 감상은 그정도였다. 무슨 말이 듣고싶은 걸까.

"너랑은 상관없어."

"개인적인 일이라서?"

"그래,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지."

"흐~응..그래?"

"어, 그래."

둘 사이에 간극이었던 것이 침묵으로 바뀐다. 입을 열지 않아 생긴 것들이 쓸데없이 그의 생각에 살을 붙인다. 너무 매몰차게 거절했나? 방금은 명백하게 선을 그었다. 실제로, 그러기도 했고. 그래야하기도 했다. 시마 카즈미는 제 자신이 틀린 선택을 했다 생각하진 않았으나 언제나 그의 파트너의 앞에서 배로 매몰차지는 것 같은 언어습관을 되돌아 볼 때도 종종 있었다. 이는 이부키 아이라는 인간이 시마 카즈미의 선을 침범하려 들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는 이부키가 언제나 시마 카즈미의 폐부를 찔러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제 파트너를 상처입힐 이유가 되진 못했다. 다 먹은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씹어삼킨 것들이 위에 가득 찬 기분이다. 결국 먼저 입을 여는 것은 시마 카즈미이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될 일이야."

그래야만하고 그렇게 만들 것이었다.

"나 저번에 들은 적 있단 말이지~."

종종 남자는 뜬금없는 서두를 띄울 때가 있었다.

"다들 자기 일로 바빠서, 남을 생각할 정신이 없다고 하던가?"

"..."

"후리카케." *후리카케:밥에 뿌려먹는 일본의 조미료

"...후리카케?"

"이게 아니던가? 음~ 그니까. 남의 말을 빌려온 거 말이야."

"아, 난 또 뭐라고...그건 인용이지. 후리카케가 아니라."

"그래 그거~. 아무튼 내가 한 말은 아닌데. 그 말이 가끔 생각난단 말이야... 들은 이후로 계속."

"...뭐,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개인적인 일이라면~ 뭐어 나는 시마를 믿으니까. 잘 해결할 거라고 생각하고 더 안 파고들 거지만."

아, 정말 싫다.

"그래도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는 거지."

싫어.

"우리, 파트너잖아?"

파트너니까. 힘이 되어주고 싶다고 그렇게 말해오는 남자를 앞에 두고 시마 카즈미는 씹어 삼킨 모든 것들이 아우성치는 감각을 느꼈다. 누구때문에 이러고 있는데. 그런 원망섞인 말을 뱉기엔 새벽녘에 어스름히 올라오는 빛처럼 반짝였고 그 누구에게도 똑같은 말을 던질 순수한 진심이라. 그게 싫었고 또 그만큼 좋았다.

"..임시지만."

"나왔다 냉혈한~, 있지 그런 말은 좀 이 타이밍에서 아웃이지 않아?"

"네네, 멋지게 말해봤자 3년 후에는 반드시 바뀌니까."

"그러니까 그래도 지금은 파.트.너 잖아. 내가 틀려?!"

"네네, '임시' 파트너님.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임시'는 떼고 말해도 좋은데 말이지이~.."

"사장님, 여기 계산해주세요."

"무시하지말라니까~!!"

임시여야만 하니까. 임시여야만 했다. 어디까지고, 어디까지고. 시마 카즈미는 영원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루 앞의 내일을 말하는 사람이었지. 도움...도움이라. 정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을 주제다. 평생, 이걸로 도움을 요청할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아서. 픽, 새어나오는 웃음소리를 들은 남자 또한 심통난 얼굴은 오래가지 않은 채 웃음기가 흐른다.

뭐가 그렇게 좋을까. 그러는 나는 또 뭐가 그렇게 좋아서. 이유를 대자면 수도 없이 튀어나올 것들을 다시금 집어삼킨 채로. 쌓인 음식물들이 그대로 고여 썩어 문드러진다고 해도 시마 카즈미는 절대. 이부키 아이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 방금으로 확신했으니까.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아. 어쩌면 당연한 결론이었지.

이부키 아이에게 시마 카즈미는 소중한 '파트너' 다. 그렇다면 시마 카즈미는 그것을 지켜주고 싶었다. 굳이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도 이부키 아이는 나름 소중한 파트너였다. '임시' 파트너. 가끔 속 터지는 일이 자연발생하는 일만 제외하면, 썩 나쁘지 않은 파트너였다. 하나 문제라면 그것을 빼고서라도 소중했다.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러니까 절대.

그것은 시마 카즈미에게 가장 익숙한 하나의 감정이며 확신이다. 이 관계에 대한 확신, 또는 편견. 어느쪽이라도 좋았다. 지금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베스트다. 범인은 시마 카즈미였다. 범인을 심문하는 것 또한 시마 카즈미였다. 시마 카즈미는 잘못하지 않았으나. 그는 스스로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들이쉬는 숨 아래에 물기가 깔린다. 해는 비스듬히 머리 위에 위치했다. 그는 숨을 뱉지 않았다. 잠깐 모았다가 한숨과 함께 뱉는다. 아, 몰려오는 것은 비참함이라. 후련하리만치 비참했다. 반짝이는 것들을 탐내지만 닿지도 못하고 닿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겁쟁이처럼. 하지만 그게 옳아.

"그럼 시마~."

"어."

"내일 봐~."

그게 옳아.

"그래, 내일 봐."

껄렁한 자세로 걸어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돌아섰다. 포기는 빠른 편이 나았다. 이제 흔들리지 않을 준비를 해야했다. 자신이 없어 비참했다. 하지만 하는 수 밖에. 막연한 감정에 몰려오는 것들을 스스로 감당해내면서 파트너에 대한 불순한 마음을 하루빨리 정리하지 않으면 기어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말 거라고. 그렇게 제 자신을 겁주면서. 그럼에도 나는 또 그녀석과 마주하면 속절없이 흔들릴 걸 알아서. 그래서 비참했을 뿐이다. 그 외에 다른 문제는 없었다.

하루

이틀

그 이상의 날들이 지나도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다.

일주일, 한달, 1년...까지 말하기엔 시간은 제 편이 아니었고 시마 카즈미는 여전했다. 빌어먹게도 여전히 사랑했다. 어쩔 수 없었다. 24시간 내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일터에서도 거리에서도 그의 얼굴을 보며 대화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면서 도저히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누구라도 탓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지만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그야 죄인은 자신이었으니.

언제부터였는지 어느새부터였는지 어느 타이밍에서 어느 순간에서 어떤 이유로.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무엇을? 그런 이유들을 들 새도 없이 몰아치는 것이 사랑이라고. 세상에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언제나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이며 비논리적이기까지 한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허용되는 때가 있었다. 치기 어리고 젊고 어릴 때. 당당히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나이. 사랑이 부끄럽지 않은 나이. 사랑에 나이가 어디있느냐 묻는다지만 적어도 사람마다 사랑을 어느정도 포기할 때가 오기 마련이지 않은가.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누구나 사랑을 꿈꿔본 적이 없진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운명적인 사람을 기다릴 수도 자신이 사랑에 빠지기를 기다릴 수도 누군가 나 자신을 사랑해주길 기다릴 수도 있겠지. 안타깝게도 저는 그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에게 사랑이라는 것은 언제나 불쑥 찾아와 심장께를 모조리 헤집어 놓고 사라지는 자연재해에 더 가까웠다.

통제되지 않는 감정이라는 것은 위험하다. 인간은 이성으로 본능을 제어하고 감정을 어느정도 컨트롤 해 나가며 사회적인 생활을 하고 살아가는 동물이다. 그래,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것. 사랑은 혼자 하느냐고. 그의 사랑 전적은 안타깝게도 실패, 실패, 실패 뿐이다. 전에도 아마 앞으로도 계속해서. ...언젠가 이 연쇄가 끊어질 날이 오기나 할까. 이정도면 어디 저주받은 건 아닌가. 취향에 문제가 있나. 그런 시덥잖은 생각들로 연명하는 나날들이라

잡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속절없이 끌려갈 것 같아서. 삼켜질 것 같아서. 정의할 단어라도 있는 것이 다행인가. 그도 아니라면 그 단어가 존재함에 절망해야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들이 또 너라서. 기어이 다시금 처음으로 돌아와 인정하고만다. 그러나 입 밖으로 뱉지 못한 채 나는 여전히 너를, ...

"요새 자주 마주치지 않아?"

"응?"

"눈 말이야."

"눈?"

"시마랑 나~."

"아.. 뭐 기분탓 아냐?"

또 너에게로 시선이 향하는 제가 있음을 네가 확인시켜주는 꼴이 우스워서. 프슬, 웃음이 새어나가면 또 의아한듯 입을 여는 남자가 있다.

"아아니 뭔가 요즘 시마 계속 이상하지 않아?"

"뭐가 그렇게 이상한데?"

"뭔가...날 보고 계속 웃는단 말이지."

"니가 웃긴가보지."

"이거 칭?찬이야?"

겠냐. 그리 말하는 대신 웃는다. 웃기지도 않은 상황에 새어나오는 걸 멈출 수 없는 것도 통제되지 않는 감정에 몸서리치는 것도. 금방 웃다가도 다시금 뚝, 하니 감정이 끊어지는 것도. 아, 미쳐가나? 싶을 지경이기도 했다. 전에는 어땠더라. 아마 이렇게까지 자주 마주칠 일이 없어서 몰랐을 수도 있겠지. 그때는 그래도 조금 더 어른스러운 느낌으로 상대를 사랑했던 것 같은데.

상대가 이녀석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내 본질이 원래 이렇게 형편없는 것인지. 유치원생도 하지 않을 감정들이 불쑥 고개를 내미는 것을 내리누르고 미약한 억울함과 원망까지 다시 접는다. 웃다가 진절머리를 치다가 다시금 턱을 괸 남자 앞에 드는 것은 비참함이라.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에게 사랑을 갈구하고싶어지는 것만큼 비참한 것은 없어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나는 언제까지 이부키 아이를 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솔직히 지금도 꽤나 한계였다. 못할 것은 없었지만 하고싶지 않은 마음이 자꾸만 들었다. 파트너, 바꿔달라고 할까. 또 그건 싫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도 귀찮아질 터다. 갈등을 초래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아마 죽어버리겠지. 누가? 내가. 시마 카즈미는 죽기 싫었다.

그렇다면 천천히 멀어지면 되는 일이다. 아주 천천히. 다행히도 시간은 많았고 한정되어 있었으며 싫어도 몇년 후에는 헤어질 사이니까. 참 다행이지 않은가. 스스로 끊어내지 못하는 것을 시스템적으로 끊어내준다는 것은 시마 카즈미에게 하나의 자비에 가까울지도 모르지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도 변함은 없다. 퇴근까지 약 2시간 정도 남았을 적이었다.

-경시청에서 각국⋯.

-기수 404 현장으로부터 가까운 위치에 있습니다. ⋯에서부터 출발합니다.

***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가 내려앉는 듯한 발밑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무저갱 속으로 떨어지는 듯한 그런 감각이 소름끼치도록 싫었다. 판단에 주저를 불러왔다. 가까스로 범인을 잡았지만 놓칠 수도 있었다. 이번에 달리는 것은 그녀석이 아니었다. 주저했다. 시마 카즈미는 눈 앞에 동료를 두고 주저했다.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듯 손으로 느리게 쓸어올렸다.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하지? 조절할 수 있는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통제되는 것들이 단 하나도 없었다. 실타래처럼 불어나는 것들이 뇌속을 가득 채우는 기분이라. 시마 카즈미는 감정에 삼켜지는 것 같았다. 까드득, 입 안의 살을 물면서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릿한 피맛이 돌았다. 틱,틱,틱⋯. 들려오는 소리가 미친듯이 거슬렸다.

"시마."

퍼뜩,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괜찮대?"

"괜찮아 괜찮아~, 몇 바늘 꼬매고 말았어."

"어디 봐."

가벼운 손짓에 허리를 숙인 채 제게 머리를 내어주는 남자가 있다. 시마 카즈미는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카락을 올려 상처부위를 확인했다. 그의 말대로 몇 바늘 꼬매고 만 상처지만 정작 맞은 사람은 잠깐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너는 몰라.

"CT는?"

"정상~"

"튼튼하네."

"아니 엄청 아팠으니까."

"그거야 그렇겠지. 머리라고. 그러니까 내가 범인하고 대치할때는 조심하라고 몇 번을⋯"

"알겠으니까! 알겠으니까! 오늘은 내가 부주의했다는 거 나도 알고 있다고."

아니야,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야.

"조심좀 해."

그래, 조심좀 해.

"어라~ 걱정했어? 역시 역시 많이 걱정했구나?"

"..."

익숙한 비참함이 고개를 들이민다. 네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어. 입으로 할 수없는 말들이 목 밑에서 아우성친다. 들이마신 숨마저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어라 혹..혹시 화났어? 라며 눈치를 보는 이 바보같은 들개녀석에게. 시마 카즈미는 그의 옷깃을 '잡았다'. 기어이 나는 감정에 삼켜졌다. 이제 익사를 기다려야한다.

"...그래, 그러니까 제발."

사람이 익사할 때까지의 시간은 몇 분 정도인가? 시마 카즈미는 시인한다.

"⋯제발, 부탁이니까."

걱정했다고. 나를 흔들지 말아달라고. 아니, 그 무엇이든 좋으니 제발, 제발⋯. 평생 썩어문들어져도 좋으니까. 다치지 말라고.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죽지 말고, 살아서. 너는 그대로 행복하게 오래도록. 하지만 형사에게 위험한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은 안 하느니만 못해서.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가장 비참한 고백을 하고 마는 것이다. 제발, 제발. 제발이라며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그 누구도 알아챌 수 없는 고백을.

"...시마?"

이상을 감지한 들개가 제 주인의 상태를 살피듯 고개를 기울인다. 시마 카즈미는 너무 늦지 않게 통제권을 되찾았다.

"몸 좀 아끼라고. 몸이 재산이잖아. 망가지면 어쩔건데?"

"열심히 관리해주고 있거든. 그보다 시마아."

가까스로 떨어진다. 퇴근시간은 이미 훌적 넘어있었다. 시마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일어섰다. 정말, 못해먹겠다. 빌어먹을 감정이다. 견딜 수 없는 감정이다. 빠져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빠져죽지 않기 위해 걸었다. 뒷따라 오는 원인이 존재했다. 시마 카즈미는 그것을 밀어낼 힘조차 없었고 이길 생각조차 없었으며 무력하게 패배하기만을 반복하겠지.

"시마, 시마? ...시마아."

그리고 결국 너의 부름에, 나는 언제나 멈춰서는 것이다.

"왜."

속절없이 흔들릴 것을 예상했음에도 그것을 현실로 확인하는 단계란

"괜찮아?"

나지막히 새어나오는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제 자신을 비웃어버리는 꼴이란.

"글쎄."

단 하나의 대답도 제대로 돌려주지 못하는 꼴이란.

"이대로 살다간 제 명에 못 살 것 같은데."

딱, 네가 사랑스러운만큼 비참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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