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PLE PAGE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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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by 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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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커미션 작업물은 신청자의 허가 및 요청으로 등장인물의 이름을 이니셜 처리 하에 전문 게시 및 검색 허용으로 전환합니다.

본 작업물은 웹툰 <신의 탑> 등장인물을 기반으로 한 2차 창작물임을 밝힙니다.


어쩌면 이곳에도 너무 밝은 날이라는 것은 존재하고는 했다. 이상할 정도로 저 바깥 물길이 투명하고 기이할 정도로 햇살이 작열하는 그 어느 날마다 정오와 자정의 명암은 극적으로 드러난다고 뭇 사람들이 외치고는 했으나 남자는 그것이 기반한 것 없는 낭설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빛 하나 들지 않는 고압의 오지에 뿌리를 내리고 선 이 세계를 침투하고 창 안까지 감히 직립보행하듯 스며드는 태양이라니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하여, 남자는 유달리 ‘밝아 보이거나’ ‘어두워 보이는’ 아침 또는 새벽에도 가치를 매기지 않았다. 즉 여느 날처럼 여상하게 눈을 뜨고 펜을 드는 겹겹의 아침 중 한 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생각한다. 눈이 잘 뜨이지 않는군.

 

피칠갑으로도 안와를 타고 흘러내리는 핏물 따위 하등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는 의지로 눈을 부릅떠야만 생환할 수 있었던 역사가 길었다. 눈을 찌르는 빛도 눈물처럼 쏟아지는 피도 남자의 명징한 시계를 침범할 수는 없다. 그것이 가주의 이름이다. 그러나 이 아침은 다르다. 아귀를 잘못 쥔 채로도 꾸역꾸역 항진하는 시계 태엽처럼 무질서와 부조화 속에 조찬이 덩그러니 차려져 있다. 거기에 손을 댈 사람은 없다. 대개는 충격과 부상으로 인하여 가사 상태로 진입했고, 한 줌 이지가 남아 자리를 지키는 영생의 가주는 사람의 피로 눅진하게 반죽된 식사를 취할 생각이 없다. 작열하는 태양을 견디는 듯이 몸 어딘가의 감촉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인지할 수 있다. 환상통이나 다름없는 이 무형의 통증을, 관성처럼 작용하는 정신계의 통점을. 바르게 선 등으로 떠난 어린 딸의 금의환향이다. 남자는 자조한다. 생각보다 충격적이지 않고, 생각보다 비통하지 않다. 드물게 정신계를 뒤흔드는 천변에 반응하기 위한 얄팍한 방어기제일 뿐이라는 사실까지는 사고가 이르지 못했다. 짧아졌기 때문이다. 현격히 짧아진 시계와 사고법으로 그는 생각한다. 나락에 끌려들어간 딸의 정신은 어드메에 걸려 있을지. 한 번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불문율의 영역에 대해 다시 복기한다. 발치에 은제 포크가 날아와 꽂힌다. 딸의 영혼 중앙에 다시 이지를 끼우고 숨을 불어넣는다 한들 그 자신이 딸을 다시 바라볼 수 있을지 생각한다. 웃고, 꽃을 엮어 반지를 끼우고, 머리를 쓸고, 노래를 들으며 잠들 날이 과연 찾아들지.

 

잘린 고목의 단면은 깔끔하다. 절규처럼 누군가 딸의 이름을 부르짖는다. 남자는 걸음을 옮긴다. 모든 군상이 향하는 방향의 반대편으로, 영산홍처럼 밝게 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지축을 뒤흔드는 여자를 향해. 손은 발보다 빠르다. 딸은 순수하게 도륙을 목표로 둔 것처럼 뛰어 달아나는 연하고 약한 남자들의 무릎을 꿰어 으깬다. 흐느끼는 여자의 울음이 그의 절망처럼 지면을 따라 떠내려간다. 남자는 굳게 닫았던 입을 비로소 연다. 열리지 않아 어슷하게 비틀며 이와 이를 꽉 짓물고, 간신히 떨리는 숨을 가다듬는다. 기척을 감각한 여자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비로소 눈이 보인다. 만물을 반사해 그 빛을 맺던 눈동자가 검게 꺼진 채 거칠게 요동하고 있다. 타고 만 재처럼 광원을 잃은 눈동자에 어슴푸레하게 그의 모습이 얼비친다. 정직하고 바른 걸음과 꼿꼿하게 편 어깨를 가증스럽게 뽐내며.

 

A.

 

명명되자 비로소 여자의 눈동자에 빛이 든다. 깊은 어둠 속 첨예한 바늘을 밀어넣은 것처럼, 그러나 그가 아는 딸의 안색은 간데없다. 여자의 입꼬리가 경쾌하게 말리며 올라간다. 더는 걸릴 수 없을 것처럼 까마득한 뺨 언저리에 입꼬리를 걸고 여자가 입을 크게 벌린다, 진미를 눈앞에 둔 아귀처럼. 활짝 웃는다. 전에 없던 형언되지 않는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다녀왔습니다. 남자는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잡아 가둔다. 보라, 내게 무엇이 남았던가.

 

고기 같은 형체가 딸의 오른켠 관자놀이를 향해 활공한다. 아니, 중도에 궤를 바꾼다. 이윽고 반대편으로 날아가 폭음과 함께 먼지 속으로 사라진다. 남자는 그것이 딸을 저지할 의무를 가지고 창을 세웠던 기병의 일신임을 포착한다. 여자는 성가신 벌레를 털어 버리듯 손을 내젓는다. 여자의 머리 위로 드리웠던 그림자가 찰나에 걷혀 나간다. 퉁겨 나간 갑병의 몸이 대기를 찢어 가르는 소음과 함께 나가떨어진다. 여자는 아주 잠깐의 일별로도 사람을 쥐어 터트릴 수 있다. 능히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다. 힘과 지혜를 차곡차곡 작은 몸에 쌓아 균형을 유지했던 강자의 품위는 그 궤를 잃고 참람하게 여기저기 난사된다. 빛을 잃은 여자의 눈동자가 고양된 표정으로 허공을 물끄러미 올려다본 끝에 서서히 고개를 돌린다. 남자를 본다. 올려다본다. 늘 그러했듯 아주 작은 시차로 느릿하게. 남자는 직감한다. 아니, 알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아니 다른 어느 곳에서라도 그를 제대로 틀어막을 수 있는 것은 남자를 제외하면 그 수가 많지 않다. 딸의 행보를 틀어막아 저지하고 지금 당장 여기에서라도 봉인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어떤 힘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의 안에 내재된 모든 지혜와 권능의 샘이 바짝 말라붙은 것처럼. 남자는 차게 얼어붙었다. 찌릿한 불길의 내음과 더불어 진득한 철비린내가 물씬 풍긴다. 전쟁, 또는 학살과 같은 그것. 고래의 뱃속으로 미끄러져 빨려들어가는 듯한 수축감. 남자의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를 향해 미끄러진다. 하나 다행인 것은 이지를 상실한 딸이 '살해'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부러지고 찢어지고 얼어붙었을지언정 사상자는 우연히도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 천운이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저 전능한 힘으로 잘 익은 복숭아를 쥐고 으스러뜨리듯 하나의 생명이라도 손쉽게 파손하고 만다면.

영원히도 싱그러울 것 같았던 이 아이의 손톱 사이로 필견 지워지지 않을 피가 스며드는 날이라도 온다면.

 

서늘한 얼음이 발끝부터 피어올라 파도처럼 전방을 쓸기 시작한다. 차고 시린 바람이 피어올랐으나 거기에 포 비더의 가주만이 선사하고는 하던 날카로움은 없다. 에일 듯 언 바람은 딸의 발목을 타고 오를 뿐 아니라 그에게 무참히 튕겨나간 피투성이 하수인들을 두르고 돌았다. 의도적으로 배제했는지, 시큰하고 무르게 움츠러든 그의 심장이 의도한 안배인지는 분간할 수 없다. 발이 묶인 여자는 당장이라도 뿌리칠 수 있을 얼어붙은 공기를 떨쳐내는 대신 빳빳하게 턱을 들고 유속을 통제하는 남자를 응시한다. 검게 죽은 눈동자에는 감정이 없다. 입이 찢어질 것처럼 깊이 끌어올려 웃던 모습과 같이. 텅 비어 거울처럼 반듯하게 남자의 일신을 반사할 뿐이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쪽은 그렇지 않다. 남자는 그 속에서 비명을 읽는다. 치떨리는 원한과 비탄을 읽는다. 좌절과 고통을 읽는다. 배신감을, 읽는다. 남자는 떨리는 숨을 가다듬는다. 이대로 딸의 발목을 조금만 잡는다면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포획할 수도 있다. 구금할 수도,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는 자녀의 영혼이 피로 점철되지 않을 수 있으리라. 여생을 죄책감과 터져나갈 듯한 폭음처럼 내재한 원분 속에 잠겨 살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과 진배없이 희로애락을 거세당한 채 살아간다면 그것이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형태인가. 딸을 정말로 그 말라붙은 자리에 묶어 두고도…… 감히 그를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남자는 가까스로 얼렸던 대지에 다시 미풍을 인도한다. 산 것들의 시간과 공간을 모두 예속할 수 있는 힘을 그 자신의 손으로 회수한다. 바람길을 그리는 손가락 끝이 저릿하게 아파 온다. 태양에 닿는 듯 손쉽게 녹은 물이 발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감각하자 여자의 발목은 즉시로 비틀린다. 땅을 박차고 도약한다. 쇄도한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다가온다. 남자의 눈앞에 돌풍이 드리웠다가 이윽고 흩어진다. 안 되겠어. 비탄에 가까운 결론을 곱씹는다. 여자를 밀쳐낼 만한 크기의 바람들이 가닥가닥 흩어져 원형을 잃었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 구체적인 연유까지는 알 도리가 없으나 살육으로부터 빗겨나간 딸의 화살은 적확하게 이 자리에 선 모든 사람의 생명줄을 간신히 붙잡아 땅에 매어놓고 있었다. 다만 원념의 위상을 떨치는 것만이 첨예한 목적인 것처럼. 거기에 감상적인 분석은 붙이지 않을 생각이다. 오직 여자의 본성이 그러하기에 생명을 앗으려는 본능을 한 줄기 이성으로 억누르고 있다는 식의 어설프고 무르기 짝이 없는 전제를 깔아 가며 딸을 억누르느니 죄책감에 못 이겨 그가 원하는 대로 갈기갈기 찢겨 주는 편이 나았다.

 

공중에 선 여자의 발이 날카롭게 다시 허공을 짚어 도약한다. 달려든다. 눈물처럼 비산하는 선홍색 머리카락을 흐느러뜨리며 남자의 목을 움켜쥔다. 파열음과 함께 두 인영이 땅에 박힌다. 흙먼지가 안개처럼 그들과 주변 사이를 차단한다. 원망하는 소리라도 듣고 싶었으나 딸의 입에서는 어떤 무른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오직 고양된 숨소리, 알 수 없는 열망으로 타는 눈동자, 그리고 완강하게 목을 조이는 손아귀의 연하고도 강인한 힘. 비로소 경멸하는 자들의 비소처럼 올라가는 입꼬리. 남자는 눈을 감는다. 눈을 감아도 선연히 느껴진다. 차마 죽지 못하고 숨만 간신히 남아 다가올 앞날을 기다리고 있는, 연약한 갑충 같은 인간들의 곧 꺼질 듯한 흐름이. 긴 숨을 뱉는다. 단 한 번의 호흡으로도 바람은 창날이 되어 미처 돌이킬 수 없는 상흔을 입은 것들을, 안개처럼 펼쳐진 흙먼지 너머의 몇 부상자들을 향해 쇄도한다. 이때 단말마조차 없이 꺼진 목숨이 있다. 여자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높이 든다. 딸의 얼굴로 웃고 있는 이 이지를 잃은 생물도 딸이라고, 거기에 분명히 그 자신의 책임이 피할 수 없이 도사리고 있다고, 고작 그런 이유로…… 그들의 숨을 앗은 것이 아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대신 죽여준 것이 아니다. 딸의 손에 피를 묻힐 수는 없다. 지상만물을 다 사랑해서 멋대로 피어나고 선홍색으로, 노란색으로, 그리고 보라색으로 물들여 무수히 작고 약한 생명들을 피워올린 봄처럼 여자는 순진하고 강직한 면모가 있었다. 그가 세상을 열렬히 사랑하지만 않았어도 이 텅 빈 눈으로 집에 돌아올 수는 없었으리라. 그렇기에 희고 긴 손에는 어떤 핏자국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공명정대하며 선의는 갑절로, 악의는 기회로 받아치는 이 심해 속 성자. 딸의 영혼이 어디부터 어디까지 밝힐 수 있는 빛인지 그는 잘 안다. 그런 그에게 살육의 기억을 심을 수는 없다. 그 어떤 변명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박을 수는 없는 법이다. 만일 그래야만 한다면, 누군가가 살의 업을 등에 지고 가야만 한다면 그것은 온당히…….

그리고 찰나의 절명이 도래했다.

 

축축하다.

어디가 축축한가 하면 물기 없는 눈동자가 아니라 가슴팍이 뜨뜻미지근하고 축축해 묵직하다. 내장이 다 흘러내리는 것만 같은 착각에 남자는 피로한 눈꺼풀을 다시 감는다. 그때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이 메아리친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정신을 잡으셔야 합니다. 일어나십시오, 가주님……. 감촉은 멀다. 통각이 둔하게 흘러내릴 뿐 아니라 분명 눈앞에서 소리치고 있는 식솔의 모습이 가히 멀고 흐리게 보인다. 음성이 아득하고 둔중하게 머리통을 두들긴다. 피가 너무 많이 납니다. 어서……. 남자는 눈을 감은 채 입술만 움직인다. 온몸이 무겁게 땅을 향해 내리꽂히는 듯한 감각을 이겨내고 확인해야만 했다. 살갗을 관통하고 뼈를 가르며 파고든 달의 감각 따위 그에 비하면 중한 일이 되지 못한다. A, A는…….

A는.

간헐적으로 감기는 눈 사이 흐리게 이지러지는 시야에도 하수인들의 망설이는 눈빛은 명료하다. 헉, 숨을 들이키며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확인해야 한다. 딸이 무사히 도주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안 됩니다! 비명처럼 터지는 간청에도 아랑곳없이. 익숙한 인영은 이미 까무러치기 직전의 시야로부터는 멀어진 이후일 것이다.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이미 출혈이 심하니 자리에서……. 지시에 가까운 간청이 귓가에서 맴돌 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상처가 난 자리를 메울 생각은 없다. 부친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행할 자격이나마 남았다면 그의 손으로 찢어발긴 몸을 기워넣을 생각은 들지 않아야 맞을 것이다. 환부를 움켜쥔 손 위로 주르륵 덩어리져 떨어지는 역겨운 질감의 핏물을 털어내기도 전에, 남자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다. 멀어졌나? 도망갔나? 그렇다면 어디로…… 더 멀리, 자하드의 전능한 이목 바깥까지, 이 깊은 해구를 꿰뚫고 진짜 하늘 아래까지.

제발.

이윽고 그의 의중을 눈치챈 하수인이 조심스럽게 운을 뗀다. 공주께서는. 답을 확인한 남자의 몸이 허물어진다. 강철보다 견강히 가문의 앞을 지키고 섰던 가주의 등이 물을 잔뜩 먹은 육지생물의 꼬리처럼 무너지자 곁에 선 식솔들이 그를 간신히 받친다. 의식이 빠르게 점멸해 간다.

딸은 멀어졌다. 아마도 영원히…… 아비로서 받을 인사 따위 없으리라.

A.

 

네가 어디에서든 어떤 형상으로든 무사할 수만 있다면.

긴 어둠을 지난다. 어떤 여자의 긴 머리카락은 기이하게도 어둠 속에서 찬란하다. 긴 겨울 속에서 태동하는 봄의 불길처럼. 물비늘처럼 일렁이며 그를 유인한다. 가시아귀의 속삭임이나 다름없는 것을 예견한 채로도 남자는 그를 향해 똑바로 걷는다. 아주 오래도록 걸었으나 거리는 그대로이다. 손을 뻗으면 닿지 못할 그 자리에. 여자가 반쯤 고개를 돌린다. 머리카락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속눈썹이 연약하게 떨린다. 아버지.

눈을 뜬다.

물에서 막 튀어나와 소식을 얻은 포유류처럼 숨을 몰아쉰다. 공주께서는 이미 달아나셨습니다. 저희 측에서 그분을 따라갈 추격자를 몇 붙였으나 이미 행방이 묘연한 것으로 보이며…… 아시다시피 저희 정도의 실력으로는 그분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요지는 딸을 놓쳤다는 뜻이렷다. 필연 가주의 부상이 이들을 패닉에 몰아넣기 좋은 요건이었으리라. 일견 책임을 피하려는 듯 보이던 말씨의 언저리에는 일종의 진정이 깔려 있었다. 원하시는 대로 되었다, 그러니…… 무리하지 않고 당장 까무러치셔도 좋다고. 다시 눈을 감으려 했으나 깊은 새벽 중에도 가주의 기침을 감지한 간병인들이 분주하게 몸을 놀리는 소리에 명징하게 정신이 돌아온 남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의식을 잃기 직전 그가 딸의 행방을 포착하기 위해 했던 것처럼. 만류를 뒤로하고 느릿하게 걸음을 옮긴다. 전능한 그의 힘에 따라 배를 가르고 지나간 상흔 따위 문제 삼을 것은 없었으나 기이하게도 몸이 무거웠다. 육지로 끌어올려진 해양 생물처럼, 무겁고, 둔중하고, 차갑게…… 복도를 에워싸는 바람 사이로.

고개를 돌린다.

이 앞에 둥지 삼을 가족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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