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PLE PAGE (산문)

24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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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커미션 작업물은 신청자의 허가 및 요청으로 전문 게시 및 검색 허용으로 전환합니다.

본 작업물은 만화 <죠죠의 기묘한 모험> 등장인물을 기반으로 작업한 2차 창작물임을 밝힙니다.

 


전화가 걸려 온 것은 새벽 세 시 십이 분이다.

죠르노 죠바나는 태양조차 해면을 이불 삼아 은신하고 있을 무렵에 걸상을 요란하게 흔들어 대는 주파수의 쩌렁쩌렁한 소음을 무시했다. 다른 의도는 없다. 다만 짧은 단잠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취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죠르노 죠바나는, 따지자면, 귀도 미스타에 비해 아침잠이 조금 많은 편이고 밤에 뛰어난 능률을 보이는, 다소 고루하고 정형적인 법칙에 따르자면 갱이라는 무법자의 지위를 타고난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새파란 새벽은 불길한 냄새와 함께 닥치는 쥐덫의 날카로운 칼날이나 다름없기에 아침을 비워두는 것은 개편된 조직 내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수신음은 이상하게도 포기하는 법이 없다. 한참을 울려댄 끝에 뚝 끊기고, 사오 초의 정적을 간격에 두고 다시 시끄럽게 영 보스의 고막을 두들겨 댄다. 이래도 안 일어날 거야? 이봐, 날 좀 받아봐. 그래야 다시 잘 수가 있지. 세 번까지는 꾸역꾸역 몰려오는 잠기운을 부여잡고 버티던 영 보스가 신경질적으로 박차는 소리와 함께 수화기를 집어든 것은 네 번째 전화벨이 울린 직후이다. 어디 해가 뜨기도 전에 요란하게 신경줄로 연주를 해댄 이유나 들어 보자는 듯 완강하고 차가운 침묵을 불쑥 끊고 익숙한 오른팔의 음성이 수화기로 흘러들었다. 죠르노, 일어나. 급한 일이야. 고려의 여지를 주지 않고 미스타는 말한다. 메시나로 와, 지금. 즉시 끊는다. 이런 버릇없는 오른팔을 봤나. 게다가 메시나로 ‘오라고’? 나는 그런 지령을 준 적이 없는데 당신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그보다도 차로 여섯 시간 걸리는 곳을 무슨 수로 지금 가라는 거야? 하나부터 열까지 기막힌 사건은 되레 죠르노의 불분명한 의식을 맑게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까지 했다.

죠르노 죠바나는 약 이 분 가량을 자리에 못 박힌 듯 앉아 있다.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필요로 하는 첫 번째 사안은 이렇다. 이걸 죽여, 살려? 두 번째 사안, 일단 메시나까지 갈까? 세 번째, 미스타가 지금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 걸까. 그가 미스타에게 지시한 내용은 이렇다. 이탈리아 남동부의 치안이 말도 못 할 상태에 이르러 무정부상태나 다름없다는 소식이 거듭 전해져 오기 시작했다. 영역 싸움을 공격적으로 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나폴리 인근에서 소란이 끊이지 않는다면 문제가 된다. 따라서 갱으로서, 법 없는 칼로서 그가 직접 쓸만한 사람을 건져내고 개중 몇 명을 그 자리에 꽂아야 할지 판단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죠르노는 미스타를 보냈다. 오른팔을 내보낸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 단순한 정찰 임무였고, 두 번째로는 죠르노가 거점으로 삼은 이곳 나폴리에서 거리가 가까웠다. 길어야 이틀이 걸릴 간단한 업무인 데다 영역 확장과 연결된 사안인 만큼이나 극비에 부쳐야 했던 임무이다. 그런데 뭐, 대뜸 메시나? 무슨 수로 이탈리아 남동부도 아니고 이탈리아의 끝단인 시칠리아 섬까지 하루아침에 기어간 것도 모자라 급한 일까지 만들어 연락을 다 했느냐는 것이다.

‘전 호위팀’ 인원에 비하면 죠르노도 제법 낭만파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미스타는 그 정도가 죠르노 이상이다. 운치와 여유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미스타의 기질은 그 자신의 까탈에서 그치지 않았다. 여섯 마리(미스타는 명이라고 지칭했다.)나 되는 그의 섹스 피스톨즈까지도 그 기질을 빼다 박은 까닭에 임무 전에는 기름지고 부드러운 음식을 먹이며 어르고 달래야 한다. 그의 집에는 온갖 비디오테이프가 가지런히 배열된 서랍장까지 있다. 애초에 단지 멋있어서, 그것이 낭만이기에, 삶이란 마땅히 그러한 것이라야 한다는 이유로 죠르노 죠바나라는 풍랑을 기꺼이 둥지로 선택한 작자이다. 그렇기에 충동적이고, 변수 창출에 뛰어나다. 대부분 그 방향은 죠르노에게 득을 주는 방향이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찾아가서 이 인간의 피와 살로써 넣어둔 갖가지 기물 중 한두 개는 꺼내 교훈을 좀 줄까…….’ 따위 살벌한 계획은 새벽녘 곤히 든 잠에서 막 깬 영 보스 특유의 단발적인 심술일 것이다. 체념에 가까운 옅은 한숨은 소리조차 없이 덩어리진 질감의 사물 사이로 가라앉는다. 죠르노 죠바나는 느긋하게 몸을 일으킨다. 뭐가 어떻게 됐든 출발해야 했다. 나폴리에서 메시나로 가려면 차로는 여섯 시간은 족히 걸린다. 해가 다 뜨고 도착해서야 미스타가 요구하는 ‘지금’에는 못 미칠 것이다. 그렇다면 거리를 줄여야 한다. 거리를 줄이기 위해서는 바다를 가로질러야 한다. 그럼 무엇을 타고 가는가? 극비 임무를 내린 직후의 접선이니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는 편이 낫다. 아무 보트나 빌려서 물고기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그렇다면 순간 속력이 중요한 새치류가 아니라 체력이 좋은 돌고래를 타고 가야 한다. 그중 속도로는 으뜸인 작은곱등어가 좋겠다. 두세 마리를 교체해 가며 직진하면 세 시간 안에는 도착하겠으나 정확히 메시나의 어느 지점에 도착할지는 모른다. 아마도 아쿠아로네 또는 그 인근이리라. 간결한 계획을 짜고 죠르노 죠바나는 걸음을 옮긴다. 사무실의 문을 닫고 걷는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짧은 기간 다져진 영 보스의 규칙적인 발소리를 파문처럼 대리석 바닥에 남기며.

 

죠르노 죠바나가 피아노 토레에 도착한 것은 다섯 시 육 분. 해수가 막 태양을 물기 시작했을 즈음의 타오르는 바다를 가로질러 그는 왔다. 바다 냄새를 풍기며 푹 젖은 몸으로 흰 모래를 밟는다. 손가락에 걸어 꽉 쥐고 온 미스타의 열쇠 고리에 생명의 입김을 불어 넣는다. 깎인 선이 날카로운 철물은 은회색 날개를 허영심 넘치는 꽃처럼 펼치고 파닥거리며 날아간다. 어디로 어딘가로, 그것이 있어야 할 것으로, 즉 미스타의 품으로 향하여. 그렇게 되면 죠르노는 다만 그 잿빛 날개의 이정표를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날은 어스름하다. 아직은 사물과 생물들이 어둠이라는 질감의 불분명하고 흐려지기 쉬운 덩어리로 보이며 시각 외의 모든 감각이 그 이상으로 기민해지는 시간. 죠르노는 아킬레우스의 발목을 탐내는 화살처럼 그의 발꿈치를 핥고 물러서기를 반복하는 파랑을 가르고 모래밭을 밟는다. 나비를 따라간다. 그 방향은 해변에서 대지로 향하지 않는다. 대신 더 얕은 해변으로, 더 긴 파도가 성마르게 떠도는 자리로 이끈다. 그렇게 속삭임과 다르지 않은 파도 부서지는 소리에 의존해 침묵을 지우며 걷는다. 계속해서 걷는다. 나비는 혀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죠르노 죠바나에게 앞으로 320m 남았습니다, 따위의 안내를 남기는 대신 너풀너풀 바람에 부딪혀 나가떨어지기를 반복하며 길을 바로잡는다. 계속해서 걷는다. 죠르노의 멈춘 사고가 천천히 톱니바퀴 한 조각분의 생각을 틔운다. 계속해서 걷는다. 미스타, 급해요? 오란다고 달려오는 것을 보니 어느 쪽이 영 보스인지 알 수가 없군. 계속해서,

포착한다.

영 애먼 곳에서 파랑에 실려 오는 죠르노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인지 저 멀리에 쪼그리고 앉은 어떤 인영이 있다. 익숙한 듯 강렬한 원색의 차림은 어둠 속에서 공평하게 흑연을 칠한 듯 흐리다. 알아볼 수 있다. 나비의 직선에 가까운 활공을 포착하기 전부터, 저 둥글둥글하고 낮은 인영을 두른 옷감이 어떤 빛깔인지 불분명함에도 알아볼 수 있다. 그 자신의 머리통에서 모자를 훌러덩 밀어 버리고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며 느긋하게 일어나는 저 멀고 작은 인간을 본다. 이제 녀석은 낭만의 표정으로 해를 등지고 죠르노를 향해 서 있다. 육안으로 확인되는 거리와 명도는 아니겠으나 분명 그럴 것이다. 날카롭게 벼려진 직관과 미스타에 관한 그의 일천한 몇 줄 지식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당초 여기에 급한 일은 있어도 위험한 일 따위 없었고, 미스타는 철저한 계산 하에 약 삼십 도의 오차 범위로 비틀려 여기 이곳, 이탈리아 남서 지방과는 전혀 무관한 메시나의 흰 백사장 위에 서 있다고.

죠르노는 걷지 않는다.

 

날개 달린 미스타의 열쇠가 허공을 횡주한다. 이제 귀도 미스타가 걸어온다.

 

“급해요?”

“급했어, 아까까지는.”

“지금은?”

“지나가 버렸지. 다시 기다려야 해.”

“당신이 기다린 게 내가 아니란 말이지.”

“네가 생각보다 늦게 온 거야.”

“돌고래 여섯 마리를 썼습니다.”

“인상 풀어, 죠르노.”

“내가 화난 것처럼 보입니까?”

 

그럼 내가 쓰고 있나? 미스타는 바닷물에 얼비친 자신을 들여다본다. 수심이 너무 얕아 보이는 것이라고는 귀도 미스타의 인영이 아니라 알알이 흩어지고 뭉쳐 꿈질거리는 모래알들뿐이다. 의문에 감응하듯 죠르노의 시선이 끈기 있게 따라붙는다. 가벼운 정적이 잇따라 그림자처럼 늘어진다. 안색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 느낀다. 모호한 표정으로 모래사장을 내려다보는 미스타를 눈으로 좇는다. 또다. 낭만의 표정이라고. 머리보다 먼저 감지한 진실을 떠안고도 이 좁아터진 바다를 가로질러 시칠리아 섬에 직접 온 것은 순전히 충동적인 매혹을 느꼈기 때문이다. 귀도 미스타, 당신만한 인간이 내 명령을 도외시하고 내려와야만 했던 이유. 한때 너무 급해서 불문율을 깨고 이 내 단잠을 깨워야만 했던 이유. 그런, 이상한, 일렁이는 물처럼 거듭 흔들리는 낭만의 표정으로 우두커니 앉아 나를 기다린 이유. 미스타, 실존하지 않는 걱정을 사서라도 나를 이 해변으로 잡아당겨야 했습니까? 그의 고집을 위해 죠르노는 한 번쯤 져 줄 수도 있었다. 한 번쯤 그래, 홀딱 넘어가 줄 수도 있었다. 발칙하고 귀여운 이 낭만과 무모함의 화신을 들추어 낱낱이 살펴볼 수만 있다면.

 

“여름이잖아, 죠르노.”

흘러내리는 밤처럼 검은 눈동자가 건조하게 반들거렸다.

“오 년이라고. 알아? 오 년이 되도록 네가 탈환한 그 왕좌에 앉아 있었어. 하는 일만 보면 갱스터가 아니라 뭐 대통령 같다니까.”

고저가 없어 평이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사이사이로 잘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끼어들어 강세를 낮춘다. 미스타의 행간마다 일부러 물을 끼워 넣는다.

“이런 걸 기다려서 네 오른팔이 된 게 아니야.”

죠르노. 여름에는 <녹색 광선>에 나오는 장면처럼 새빨간 일출을 보며 짠바람을 맞고, 겨울에는 <러브 레터>에 등장하는 눈밭에 주저앉고, 눈이 멀 것처럼 흰 산을 오르고, 가끔 비 오는 날에는 싱잉 인 더 레인을 흥얼거릴 수 있는 삶이어야 한다고. 그리고 거기에 네가 있어야 해. 이건 중요해. 널 배신하고 태업할 수도 있는 사유가 된다고, 나에게는. 이해할 수 있어? 이해할 수 있겠어? 너는 내가 넌 아직 모르는 비디오테이프를 돌려 두고 술을 마시다가 잠들어도 자리를 정리하지 않고 그 영화를 끝까지 보는 녀석이잖아. 여름이라고, 죠르노. 우리는 삶을 살아야 해. 그런 삶을 살아야 해. 바다 멀리서부터 난반사되어 눈동자에 꽂히는 물비늘이 시려 눈살을 살짝 찡그린다. 그림자가 빛을 맞아 태어났다가 다시 비산하기를 반복한다. 그런 건 내 스타일이 아니야. 그런 건 우리 스타일이 아니야.

 

“뭘 원해요?”

“휴가.”

“며칠이나?”

“한 달.”

“그건 어렵고.”

“이주일.”

“지금부터 일주일입니다.”

“너도 받아.”

“나는 보스인데요.”

“보스 휴가 좀 주시죠? 보스.”

“안 된다는 것 알 텐데.”

“그럼 여기서 널 납치할 수밖에 없고.”

“자신 있습니까?”

“자신이 없어서 이런 일을 벌였을 것 같아?”

 

철컥, 고요히 나는 장전 소리가 미스타의 진의를 대변했다. 이쪽이 작정하고 온 만큼 귀도 미스타 역시 그의 영 보스를 작정하고 꾀어낸 것이렷다. 어린 상사의 눈살이 살며시 일그러진다. 엄폐물도 없는 곳에서 총 한 자루와 그의 자랑스러운 식솔 여섯 마리(미스타는 명이라고 불렀다.)나 겨우 데리고 죠르노와 그의 골드 익스피리언스―레퀴엠이 될 여지가 언제나 있는―를 상대하겠다고? 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바벨탑을 오르는 남자를 움켜쥐고 바닥 끝까지 내팽개치는 일은, 쉽지는 않겠지만, 굳이 해야 한다면 못 할 것도 없다. 그러나 피떡을 만들어도 이미 이 오른팔의 심장에 똬리를 틀고 앉아 혀를 날름거리는 열망의 목까지 비틀어 꺾을 수는 없을 것을 안다. 귀도 미스타의 기개라는 것은 처음부터 상대를 가리는 법이 없다. 당신 아주 성가십니다. 소리 없는 한숨이 길게 긴장처럼 빠져나갔다. 금발의 상사가 고개를 살랑살랑 저으며 양손을 어깨 위로 들어 보인다. 그래요. 속삭이자 비로소 인상을 찡그리며 미스타가 웃는다. 진작 이래야 했어. 알았다고요. 그런데 숙식 계획은 짰습니까? 글쎄다? 그래요. 이탈리아의 파락호답게 아무 배나 빌려서 자는 걸로 합시다. 나 멀미 있는데? 뻔뻔하기도 하지.

 

일단 콘 파냐를 좀 마셔야겠어. 이 시간에 문을 연 카페는 없어요. 식당 정도야 있을걸. 누가 말립니까. 4인석 중 오른쪽 아래에 있는 의자를 굳이 빼내어 옆자리 테이블 앞에 꽉 붙이고 나서야 미스타는 남은 세 자리의 의자 중 하나를 당겨 착석했다. 푹 젖어 바다 냄새가 나는 차림새로 문을 열고 들어와 주문하는 두 청년을 달게 맞아들이는 직원은 없었으나, 야외의 철제 테라스석을 차지하고 앉아 총구를 닦는 부리부리한 인상의 남자를 굳이 자극해 변수를 빚고 싶어 하는 직원 또한 없었기에 일은 비교적 쉽게 풀렸다. 일 미터를 조금 넘기는 높이의 목제 난간에 팔을 기대고 그 위에 턱을 괸 채 미스타는 잠시 눈을 감는다. 네가 올 때까지 한숨도 못 잤어. 안됐네요. 돌고래를 타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저는 편안하게 잤거든요. 뾰족한 반박에 정면으로 얻어맞은 미스타가 허탈해 바람 빠지는 웃음을 터뜨리자 다부진 어깨가 추위에 떨리는 모양과 다르지 않은 형상으로 들썩거린다. 이봐, 죠르노. 네, 듣고 있습니다. 너 내가 두 번이나 보여준 영화 기억해? 그런 게 한두 편이라야 기억하죠. 야, 그렇게 많지는 않았어. 많았어요. 아닐 텐데. 많았는데요. <귀여운 여인>은 네 번 보여줬다는 것 압니까? 그렇게나 많이? 그렇게나 많이. 사랑스럽잖아. 여자 쪽 말입니까? 아니, 그 사랑이. 사랑이 사랑스럽다? 미스타는 지어낸 낭만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요. 뭘 모르는구만~ 낭만은 지어내는 게 아니라고. 그런 이야기가 전부 실존한다고 믿는 겁니까? 좀 달라. 실존하는 마음의 이데아라는 거지. 글쎄, 때와 장소가 갖춰졌을 뿐인 추억에 의미 부여가 과하지 않나. 역시 모른다니까. 살아 보면 안다. 살아 봤어요. 너 덜 살았어. 고작 세 살 많은 게. 뭐? 콘파냐 식어요. 새끼가 건방진 구석이 있다니까. 건방진 쪽이 누구입니까, 지금. 새벽부터 상사를 오라가라……. 아~ 알았어, 알았다고. 두 번 보여준 영화는 결국 왜 물어본 겁니까. <녹색 광선>도 두 번 봤으니까. 네. 너 메시나에서 보는 타오르는 바다가 얼마나 절경인지 모르지. 봤어요? 나도 안 봤어. 안 봤으면서 어떻게 압니까? 모르니까 너를 부른 거야. 아까 내가 오는 사이에 해가 떴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안 봤다고. 왜? 말했잖아. 그러니까 무엇을. 미스타는 혀 위에 오른 말을 쏘는 대신 천천히 콘 파냐를 음미한다. 입속에 감도는 커피의 진하고 쓴 향을 연신 궁굴린다.

 

“까먹었어.”

얄궂게도 한쪽 입꼬리를 다른 쪽보다 높이 끌어올려 웃으며 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는다. 죠르노는 파문을 알지 못하는 수면처럼 고요하고 여상한 청록색 눈동자로 그 모습을 곱씹는다. 장면 전체를. 바다가 잘 보이지 않는 암벽 위의 낡은 오스테리아,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는 녹슨 철제 의자와 테이블, 바닷물을 맞아 아직 차고 서늘한 체온, 어울리지 않는 목제 난간에 걸쳐진 미스타의 젖은 팔, 이상한 모양으로 구겨진 그 특유의 진한 눈썹과 반쯤 접혀 고개만 내민 흑요석처럼 반들거리는 눈동자, 살짝 말라 영 성에 차지는 않는 저렴한 카프레제를. 이따금 마주칠 때마다 스며들어 적시는 바닷물처럼 익숙하게 그의 시야에 감기고는 하던 저 낭만의 낯짝을. <녹색 광선> 속 불길처럼 열렬하게 맥치던 파도를 생각한다. 영화 도입부에 소개된 아르튀르 랭보의 시구를 생각한다. 역시 의미 부여가 과하다고, 물의 간지러운 단맛을 음미하면서.

 

“시킨 조사는 하고 온 겁니까?”

“휴가 중에 일을 꺼내시는 겁니까?”

“휴가 끝나기만 해요.”

 

후식으로 주문한 딸기 아이스크림은 쉽게 녹는다. 역시나 합해서 4가 되는 숫자만큼은 피해야 한다고 부득불 고집을 부려 대며 죠르노의 콘 위에만 두 덩이를 올려놓은 아이스크림 한 입을 베어간 미스타에 의해 움푹 패인 자리가 특히 그렇다. 이 습한 여름철에 밖에서 질겅거리는 아이스크림이라니 그 수명에 대해서야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이따금 그들과 맞닿은 거리를 바삐 지나는 사람을 포함해서 팔목 끝까지 꽉 닫힌 옷을 입는 것은 이 젊은 갱들뿐이다. 무더위가 뺨을 스치고 습한 바람이 이마에 퉁기는 계절. 녹음의 냄새를 맡으며 배가 불러와 온건하고 조용해진 미스타의 여섯 스탠드를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당신은 내가 일을 시키자마자 혼자 음험한 계획을 세워 놓고 이 먼 섬까지 단신으로 내려왔을까. 우리는 살아야 해,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단정하던 이 밤 같은 눈동자 안에 든 열망이라는 것은 언제부터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나. 오는 길에는 보트를 탔을지, 차를 탔을지. 어느 쪽이든 운전은 일반인에게 맡기고 미스타 자신은 오만하게시리 편한 상석에 앉아 총이나 수시로 손질했겠지. 당신은 운전하지 않으니까.

 

“여기 언제 왔습니까?”

“한 열여섯 시간 됐어.”

“그럼 내가 일을 시키자마자 온 거잖아.”

“일 얘기 금지.”

“이것도 일 얘기로 치는 겁니까?”

“당연하죠, 보스.”

“무슨 염치로 이렇게 엄해졌습니까.”

“염치?”

그때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옷 너머로 복사뼈를 툭 건드리는 감촉이 느껴진다. 미스타의 발등이다. 이 귀도 미스타에게 염치를 바랄 거냐? 수채화처럼 묽게 펼쳐진 풍경 위에 꾸덕한 기름으로 그린 그림과 같이 이질적으로 새까만 눈이 악동처럼 일그러졌다. 보조개처럼 깊게 패이는 입꼬리와 함께. 죠르노는 그 모습을 일체의 미동 없이 망막 뒤에 판처럼 박음질하고 눈동자를 돌린다. 미스타, 알고 있습니까. 뭐를? 당신이 좋아할 것 같은 영화 포스터를 봤어요. 언제? 이틀 전이었나. 이름은? <오만과 편견>. 그럼 영화나 보러 갈까.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요. 가서 다른 거 아무거나 한 편 보지, 뭐. 그래요. 휴가 동안 보는 영화는 말이다,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걸랑. 그럼 뭐가 중요합니까? 네가 말한 게 중요해. 때와 장소가 갖춰진 추억이요. 눈치가 너무 좋아서 알려줄 게 없네. 그럼 보스 머리 위를 언제까지 점하고 있을 줄 알았습니까. 아~ 일 얘기. 기준 참. 불만 있으면 가까이 와 봐. 뭡니까? 일단 와 봐. 그냥 당신이 보스 할래요? 됐거든? 난 널 섬기는 쪽인 게 마음에 든다고. 그런 것치고는 고개가 영 빳빳해서. 그러니까 와 보라는 거지. 역시 좀 더 잡아 둬야겠어, 속삭이며 죠르노가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난다. 오래된 철물이 바닥을 긁으며 나는 거친 소리를 뒤로하고 한 걸음을 디딘다. 그것만으로도 잡을 수 있는 거리가 된다. 가느다란 골격의 손을 잡아 쭉 당긴 미스타가 옷에 간신히 덮였다가 밀려 나왔다가 하는 손목에 고개를 묻는다. 부드럽고 찬 감촉이 쏘는 벌의 뾰족한 침처럼 따갑게 피부를 찌르고 지나간다. 그럼 영화나 보러 가자고. 이번 일출은 꼭 봐야 하니까 극장에서 자도 돼. 천연덕스럽게 테이블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는 미스타의 어깨를 눌러 앉힌 영 보스가 허리를 숙인다. 시야가 암전된다. 아프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미스타의 촉각에 감지되는 것은 아프지 않아도 위협적인 입맞춤, 찌르지 않고도 데일 것처럼 오래 머무는 감촉, 여름보다 덥고 습한 한숨. 짧은, 때와 장소가 맞물리는 찰나. 이윽고 몸을 일으킨 영 보스가 입을 연다. 방금 당신이 한 짓이야말로 일처럼 느껴졌거든. 계산하고 있을 테니 천천히 나와요.

천천히 나오라고? 무릎이 박살 난 기분으로 미스타는 고개를 돌려 스무 살 청년의 뒤통수를 올려다본다. 그런 얼굴을 뭐라고 불러야 했을지 가동을 멈춘 사고 회로를 억지로 후려갈겨 돌리며 복기한다. 그런 얼굴, 그렇게나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그 표정을. 낭만의 얼굴이라는 괴상한 단어 간의 배합이 머리에 둥둥 떠다니는 것을 지각하지 못하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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