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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작업물은 웹툰 <잔불의 기사> 등장인물을 기반으로 한 2차 창작물임을 밝힙니다.
결국 돌아왔군, 불멸의 용자가.
정신이 들었다. 비웃는 음성이 익히 들어본 낮은 여자의 그것이다. 바짝 신경을 세운 힌셔가 하마 턱을 휘두르며 음성의 발원지를 향해 돌아본다. 잠깐, 하마 턱?
없다.
그에게 분신과 같은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없다. 다만 손아귀를 움켜쥐고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했을 뿐. 여자는 맨몸이다. 굳은 주먹과 가벼운 옷만 남은 여자가 음성의 발원지를 날카롭게 쏘아본다. 그 자리에도 역시, 그는 없다.
하하! 걸작이구만. 연고도 없는 성에는 어쩐 일이래?
그 기사의 음성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속삭인다. 붉은 갑옷을 입은 딱정벌레가 손목을 타고 올라온다. 등반하며 점점 형태를 바꾼다. 더 길쭉하고, 더 뾰족하고, 더 많아진 다리를 놀리며 속닥거린다. 잘 왔어, 힌셔. 잘 왔어. 고저가 없어 소름 끼치는 음색으로, 그 여자의 목소리로. 이윽고 떨어진다. 거미줄을 팔목에 감고 아래로, 아래로……. 순결한 은색 실을 아래로 줄줄 늘어트리며 낙하한다. 바닥과 같은 심연에 착 붙은 근사한 거미줄 그물이 그를 꽉 붙잡고 놓지 않는다. 떨쳐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만큼이나 미력하고 연약한 힘이다. 그러나 힌셔는 잠자코 주먹을 말아쥐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끈적한 감촉, 그리운, 질긴 유대의 기억. 무심하게도 나를 두고 역사의 뒤안길로 흩어진. 기다림 끝에 손톱 사이를 가르고 어떠한 이물감이 파고든다. 아프지 않다. 아프지 않아, 그노제스.
눈을 뜬다.
드물게도 식은땀이 흘러 떨어진다. 검붉은 하마 힌셔는 허리를 바로 세우고 앉아 얼굴을 왼손으로 연거푸 쓸어내렸다.
‘그 일’로부터 몇 달이 흘렀다. 새까만 닭 와론은, 역시나 죽지는 않았다고 들었다. 듣자 하니 행방이 묘연해진 것은 그 일을 기점으로였는데, 기이하게도 복귀는 늦었다고 했다. 어디로 언제 튈지 모르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은 직접 대해본 입장인지라 부정할 수 없다. 아마 종잡을 수 없는 이유로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돌아왔거나, 그냥 태만한 기사이거나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기사란 종자는 누가 됐든 어떤 성격이든 간에 적어도, 최소한 태만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아마도 높은 확률로 전자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향이나 됨됨이가 특별히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이러나저러나 그 역시 기사. 그의 처우를 결정하는 것은 ‘기사 선배’인 힌셔 그 자신이 아니라 황제 폐하일 것이다. 다만…….
아니. 상념은 단칼에 끊어진다. 힌셔는 채비를 서둘러 마치고 하마 턱을 집어 들었다. 그 기사가 등장한 것은 이번으로 두 번째다. 예단할 필요는 없다. 또한 걱정할 필요도 없다. 꿈은 그저 잔재한 무의식을 아무렇게나 엮어 내놓은 부산물.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하게, 그의 목소리가 꿈 속 거미로 탈바꿈해 등장하는 데에 특별한 이유 따위는 없다. 그는 머리를 가득 채운 안개를 지우며 걷는다. 이 오백 년 뒤의 기사들은 그를 두려워한다. 물론 존경하고 경외하는 인물도 더러는 있다. 하나 그를 편안하게,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처럼 여기는 기사는 한 명도 없었다. 말하자면 기사 대개는 그를 경이원지하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그가 깨우침을 얻으려면, 그 자신을 갈고닦기 위해서는 성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산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힌셔는 새삼스럽게 어떤 사실을 곱씹는다. 음,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처럼……. 그러고 보니 적어도 유리감을 일으키는 눈으로 보지 않는 사람은 한 명 있었군. 그러나 그도 보통의 기사와는 멀다. 그것은 편안함이라기보다 익숙한 흥미, 또는 흥분과 닮아 있는 태도였기에……. 어떤 면에서는 기사들이 굳이 꺼내 전시하기를 꺼리는 면모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그 반발심, 두려움 없는 호전성은 익숙한 기사들의 핵심이었던 만큼이나.
여자는 부쩍 이지를 흐트러트리는 몇 갈래의 생각을 뒤로하고 산을 오른다. 한 번의 도약이면 충분한 거리도 느리게 흙을 눌러 걷고 싶었다. 어떠한 충동, 혹은 내키지 않는 어떤 사건을 예감한 동물적 감각일 터. 그러나 힌셔가 이를 알 리 없다. 그는 다만 발 아래 밟히는 단단한 동시에 무른 돌들의 날카롭고 울퉁불퉁한 고저를 쓰다듬듯 내리누르며 산의 후미진 기슭을 가로질러 바위 언덕을 오를 뿐이다. 조금 더 이동하자 바위로 이루어진 산 중턱이 펼쳐진다. 나무가 없어도 산이 될 수 있다. 거칠게, 그리고 완강하게 유수의 세월에 의해 깎인 크고 작은 바위들이 그의 앞에 펼쳐진다. 여기에 서서, 그는 하마 턱을 휘두른다. 그러자 전방을 지키고 섰던 바위가 매끄럽게 잘린 두부의 단면처럼 갈라졌다. 쿵, 떨어지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금속질의 마찰음이 미세하게 울렸다.
금속질의 마찰음?
힌셔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가 짐작하는 자라면 땅보다는 하늘, 모래와 바위보다는 나무와 절벽 위에 가까운 자리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져 힘없이 쓰러진 바위의 중앙에 익숙한 형상의 창이 한 자루 박혀 있다. 찰나에 두 쪽으로 갈라지는 듯 보이던 바위틈은 네 조각으로 분산했다. 방해, 또는 아주 적확한 개입을 뜻하는 것처럼.
“내 뒤를 밟았나.”
“오해는 마. 내가 먼저 와 있었거든?”
머리 위에서 경쾌한 듯 낮은 성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위산에 가까운 지형 사이 드문드문 뿌리를 악착같이 내리고 독선적으로 가지를 뻗은 나무의 무성한 녹음이 살랑, 인위적으로 흔들린다. 저기에 있군. 비로소 미세한 고통이 머리 안쪽에서 쿵쿵 울린다. 힌셔는 다소 피로하고 경직된 표정으로 폐에서부터 깊이 나오는 숨을 느리게, 그리고 길게 끌어냈다. 하필 이런 때에 나타나다니……. 그렇다면 영역 주장이라도 하러 온 것인가. 기다렸다는 듯 밀실하게 우거진 나뭇잎을 가르고 투구를 쓴 사람의 날렵한 일신이 떨어진다. 론누 끝을 가볍게 밟고 툭 내려앉는 바람 같은 몸짓. 새까만 닭이다.
“이봐. 난 아무 짓도 안 했다고, ‘아직은’. 그런데 이거야 반응이 영~ 거 간밤에 나쁜 꿈이라도 꾸셨나?”
힌셔의 눈썹이 미세하게 좁아진다. 전부터 느꼈지만 감은 쓸데없이 좋은 인간이다. 그 동물적일 정도로 좋은 감각을 선한 방향으로 투자할 의지는 전혀 없는 성정인 까닭에 기사들이 입을 모아 가장 위험한 기사, 라고 지칭하는 것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미동도 없는 그의 몸짓에서 불길한 신호를 감지한 와론이 먹이를 찾은 듯 목을 바짝 모로 꺾는다. 무심코 짚어 넘길 수도 있을 동작이겠으나 그 주체가 다름 아닌 새까만 닭이다. 그러므로 힌셔 또한 감지한다. 꿍꿍이가 생겼군. 무언의 신경전에 멋대로 반점을 찍고 와론이 땅에 꽂힌 창을 쑥 뽑아 어깨 뒤로 넘겼다.
“안심해, 오늘은 딱히 싸우고 싶은 날이 아니거든. ……. 아마도?”
“자리 주장을 하고 싶은 거라면 내가 비키겠소. 이쪽도 오늘은 겨루고 싶지 않거든.”
짧은 침묵이 감돈다.
힌셔는 이쯤에서 기묘한 비틀림을 감지한다.
“아, 그래~?”
싱글벙글 웃는 듯 한층 격앙된 목소리가 투구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오늘은 어쩐 일로 겨루고 싶지 않은 날이실까나~ 인망 자자한 선배가 후배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데에 손속을 둔 적은 없었는데 말이야. 안 그래?”
고요한 힌셔의 눈동자가 질기게 달라붙었다. 특별히 적의랄 것이 감지되지는 않지만, 호의 또한 전무한 눈빛. 역시나 기사의 그것이다. 굳이 언어로 정제하자면 강자의 압박, 또는 포식자의 경고. 아니, 아니. 나는 잘못 없어. 먼저 먹이를 던져 놓고 그런 얼굴로 보지 말라고. 냄새가 나잖아, 끝내주게 재미있는 냄새가 난다니까. 가느다란 휘파람 소리가 와론의 투구 사이로 가볍게 흘러나온다.
“명예롭게 행동하기를 바란다.”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네. 질릴 때도 안 됐나.”
“아니. 필요하다면 몇 번이라도.”
다시, 침묵. 와론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것을 힌셔가 감지했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애초에 봐 달라고 웃을 작정이었다면 그답게 과장스럽고 경쾌한 웃음소리를 터트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애잔하기까지 한 이 과거의 영웅이 살짝, 우스웠을 뿐이다. 저렇게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린 거목처럼 단단하게 서서, 기사도를 논하며, 결연하게, 아마도 ‘죽음’까지 강직했을 테지. 와론은 천천히 등에 졌던 론누를 휘둘러 땅에 꽂는다. 양손을 들어 열 손가락을 쫙 펴 보인다. 지극히 작위적인 행태인 반면 그 의도는 확실하게 전달된다. 바로 검붉은 하마, 여기, 오늘따라 하마 턱의 날을 갈지 않기 위해 부득불 분투하는 용사에게. 이윽고 깡, 터무니없는 마찰음이 작게 울린다. 나린기에 그대로 머리를 기댄 와론이 팔짱을 끼고 서는 것이다.
“아~ 쯧! 재미없게 굴지 마. 싸우지 말자고 했잖아? 벌써 잊은 것 같아서 다시 말하자면, 나도 오늘은 컨디션이 영 별로거든. 대신 기왕 마주친 김에…… 서로를 조금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볼까~ 하는데.”
응? 그가 답을 촉구하는 듯이 머리통과 나린기를 두 차례가량 툭툭 맞대자 들리는 일정한 박의 깡깡 소리를 듣는 동안 힌셔의 표정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거기에 짜증이나 귀찮음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은 없다. 오히려 놀라움에 가깝다. 그를 오래 알거나 자주 보지는 못했을지라도 번연히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쾌락 기사처럼 보이는 이자에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몇 가지 원칙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몇 가지 조건들을 아우르는 가장 지배적인 감정은 그의 안에 내재한 이유 모를 적대감, 기사 근원을 향한 경멸과 원분 따위의 독심이라는 것. 통칭 ‘기사다운’ 자를 마주할 때 그 환멸과 같은 태도는 도드라진다. 그 증거로 그는 회색 족제비에게 이유 모를 호의를 거듭 베풀었으나 힌셔에게는 특별히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던 적이 없다. 즉 힌셔의 판단에 의해서는, 와론이 그에게 호기심을 보일 만한 이유가 없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와론은 힌셔에게 접근했다. 덫을 치고 기다린 끝에 사냥감을 잡은 엽사처럼. 오랫동안 노려 온 먹이를 드디어 취하는 맹수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기회를 낚아채 ‘평화롭게’ 대화나 하자는 제안을 해 온다. 거기에 어떤 꿍꿍이속이 도사리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불응할 수는 없다. 그것이 힌셔의 명예이다.
그와의 대화에서 늘 부자연을 상징하듯 끼어들고는 하던 짧은 침묵 끝에, 힌셔는 와론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무기를 지면에 내리꽂는다.
“잘 생각했어.”
와론은 노골적으로 웃는 태를 선보인다.
*
잘됐군. 나도 마침 궁금한 것이 있었소.
그때의 내 임무나 행방에 대한 질문이라면 안 하는 게 좋겠다 싶네~
이유는?
글쎄, 그런 시시한 질문이라면 성문 안에 계시는 남 이야기 좋아하는 기사들이 이미 대신 대답해 줬을 게 분명하거든.
소문대로 믿으라는 의미인가?
뭐……. 그건 알아서~ 그보다 나야말로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고 싶거든? 대체 어떻게 살아난 걸까~ 이렇다저렇다 말은 많지만 역시 본인 입으로 듣는 것만 못하지.
알아서 소문대로 믿는 것이 좋겠군.
하핫! 성격 하고는.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난 무슨 수로 냉동됐다가 해동됐느냐 묻는 게 아니라고. 그 고결한 기사 정신! 기사끼리의 싸움까지도 불사하는 우직하고 곧은 정의! 캬하……. 참 궁금하단 말이지. 자신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옳은 것이 되는 그 알량한 선의가, 잘난 영웅 기사를 죽게 했다~ …… 그게 과연, 진실인지. 난 그걸 확인하고 싶어.
쓸데없는 갑론을박을 원하는 건가?
쓸데가 없기는 왜 없대? 이봐, 검붉은 하마 힌셔. 머리 잘 굴리는 게 좋아. 오백 년의 간격을 두고 시체도 못 찾았던 영웅 기사가 살아 돌아왔으니 이제 좋든 싫든 너는 남은 인생 전반을 기사의 상징으로써 살아갈 거다. 그 빛깔만 좋은 정의, 나 하나도 똑바로 설득하지 못하고 궤변이니 갑론을박이니 둘러대야만 할 정도의 봉사 활동이 기사질의 전부라면 차라리 은퇴하는 편이 자네가 몸 바쳐 이룩한 기사의 체계에 도움 될걸.
내 대답은 같소. 더욱이 새까만 닭, 너라면 우둔하지도 무지하지도 않을 터. 그 질문은 알 만한 사람이 핵심을 교묘하게 비켜 지적하는 모습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군. 그것이 궤변이나 갑론을박 외의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아무래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니 부연 설명을 좀 붙여주지. 악마 기사를 무찌르고 귀성길에 홀연히 사라진 기사가 실은 민간인 여성을 구하고 죽었었더라는 사실 정도야 뭐, 그럭저럭 듣기에는 괜찮아. 그런데 말이지~ 내가 그것에 대해서 좀 물어본 게 있다는 사실! 그래서 뭘 들었을까?
…….
아! 기사의 눈물 나는 희생에도 글쎄, 민간인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쯤에서 끝내는 편이 서로에게 좋겠군.
닥치고 끝까지 들어봐. 나 지금 진지하거든.
닥……. 후우.
자, 여기까지 알게 되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할까? 뻔하지? 관심이 생긴다고. 사건 전체에 대한 관심이 생길 수밖에. 알아듣겠어? 관심이 중요한 거야. 기사 하마의 영웅적인 행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의 맥락에 눈길이 간다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는 호기심을 해소하기 시작했지. 그걸 위해 내가 불멸자에게 어떤 정보까지 팔아치웠는지나 알아? 그래도 뭐, 괜찮아. 결론적으로는 그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었거든. 글쎄 그 민간인이 각성한 반쪽짜리 마족이 되어 폭주 끝에 저지당했다고 하더라고. 야하, 참…… 기구해, 그렇지? 어떻게 기사가 살린 인간이 하필 마족이었을까? 응? 사람 일은 참 모르는 거야. 그 자리에서 기사도 마법사도 이미 몇 죽인 뒤였다고 하던데…… 어때? 그 민간인이 만일 거기서 그대로 죽지 않았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잠깐. 그 사건을 지금, 람에게…… 물었다는 것인가?
불멸자? 뭐 그래. 맞아.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람에게 그걸 물었다고?
……. 햐, 오늘 운수 한번……. 이봐. 나 장난하는 거 아니라고 했어.
뭘 알고나 있는가? 그녀는 람의,
뭐?
불멸자의, 뭐?
그딴 게 중요해? 그게 너무 중요해서 감히 발설하지도 못할 일이었다면 내 귀에 물리지도 않지 않았을까 싶은데~ 내가 뭐 묶어놓고 팔다리 쑤셔 가며 고문이라도 했을 것 같아? 이봐요, 선배. 나는 그 정보를 샀어. 내게도 나름대로 아쉬운 정보를 내놓아 가며 입수했다고. 그리고 선배를 포함한 모든 기사가 도대~체 정신을 못 차리는 모양이라 이제 그 정보의 값어치를 땅바닥까지 끌어내릴 작정이지. 중요한 건 불멸자에게 그 민간인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었고 거기에 하필 누가 있었고가 아니라니까. 역사는 결과론적인 기록의 집합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
무슨 속셈이지? 아니, 설마…….
그래, 아마 그 설마겠지! 참 이해가 빨라서 좋아?
새까만 닭……. 정녕 너에게는 명예가 없는가? 왜 그런 짓까지 하려는 거지?
말했잖아. 난 말했어.
도대체가 정신들을 못 차린다니까, 이놈이나 저놈이나. 안 그래~? 나는 이미 아주 오래전에 질려 버렸거든, 그 명예라는 것에.
그만두게. 계속할 생각이라면 나는 막을 수밖에 없소.
음……. 하핫, 이거야 너무 뻔해서, 참.
나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오. 그와 스텔라의 명예를 위해 부탁하는 것일세.
글쎄 뭐, 알 바인가?
새까만 닭 와론.
이제 뭐가 좀 느껴져? 어때, 여전히 내 질문이 궤변 같고 갑론을박에 불과해 보이시나.
그게 목적이었다면 충분히 이해했소. 그러니까.
아니. 아직 한참 멀었어. 이해했다면 날 뜯어말릴 수 없을걸?
기어이 저지르겠다는 말인가.
……. 아~ 에헤이, 이거 참. 오늘은 정말 싸우고 싶지 않았는데…….
*
기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땅에 내리꽂혔던 무기를 뽑아 든다. 지면에서 강제로 무엇이 뜯겨나가는 듯 거친 파열음. 거의 동시에, 그러나 아주 근소한 차이로 금속과 금속이 부딪쳐 빚어진 큰 마찰음이 와론의 귓가에서 강렬한 파동과 함께 터진다. 와론은 헛웃음을 짓는다. 론누를 쥐고 휘둘려 오는 하마 턱을 틀어막은 손이 저릿하게 떨린다.
“거 사람 죽일 일 있나! 살살 좀 하지?”
돌아오는 답신은 없다. 대신 하마는 재차 마력을 응집하며 하마 턱을 떨구었다가, 떨어지는 무게의 반동을 이용해 반대편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것과 동시에 응집된 마력을 발산한다. 하! 기합 소리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리며, 와론은 론누를 세워 다시 한번 날카롭게 정방향을 쏘는 마력의 칼날을 틀어막아 가른다. 찰나에 서너 합의 공방이 반복되고 하늘을 향해 가파르게 뻗어 있던 바위산 여기저기에 함몰된 구덩이가 두엇 패인 뒤에야 힌셔는 하마 턱을 거두어 오른손에 쥔다.
“이해할 수 없군.”
“뭘?”
“기사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왜 발언하지 않고. 너 정도 되는 기사라면 무시할 수 없을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누구라도 경청할 수밖에 없을 텐데.”
“나 정도 되는 기사~? 하핫! 천하의 영웅 힌셔가 인정을 해주는 날이 다 오는구만. 그런데 참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기사답다고 해야 하나. 발언~? 우리가, 말로 하면 얌전히 들어먹는 놈들을 기사라고 불렀던가?”
“방법론적인 순서가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그건 한낱 네 명예고. 아! 아니면 그런 식으로 악마 기사도 말로 타일러 보셨나~? 응? 그랬는데 잘 안돼서 효수해 버렸어?”
“그 일에 대해서는 입을 조심해라. 경고했을 텐데.”
“보라고, 잘 알면서 방법론을 운운해? 인간은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르거든.”
“그래서, 기어이 많은 이들의 명예를 네 손으로 꺾겠다는 건가.”
“지루한 소리는 그쯤 하지?”
와론이 오른발을 뒤로 성큼 물린다. 동시에 활을 쏘는 듯이 몸을 쭉 당겼다가, 론누를 던져 올리며 도약한다. 공중에서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창이 힌셔를 향해 쇄도한다. 바람길을 짚고 소리에 가까운 속도로 날아든다. 깡! 날카로운 마찰음이 연쇄적으로 빠르게 지나간다. 더불어 지맥을 틀어막다시피 지면에 꽂힌 네 다리 역시 파쇄음을 따라 움직인다. 매캐한 흙먼지가 일어났다. 거기에 신경 쓰는 이는 없다. 흐린 공기를 가르고 심판처럼, 마력으로 이루어진 검이 하늘로 솟는다. 찍어 내리는 완력을 견디지 못하고 론누가 퉁겨 나가자 익숙한 탄성과 함께 와론은 허공을 찍어 도는 론누를 회수하며 고개를 젓는다.
“와하, 진짜 장난 아니네~ 역시 다음에 싸우는 게?”
“그때까지 허튼짓하지 않겠다면.”
“그건 좀.”
“알겠소.”
힌셔가 하마 턱을 고쳐 쥐자 마스터피스의 마력이 날카롭게 뻗는다.
“……. 살살 좀 하자니까~”
와론이 땅을 찍다시피 짚어 추진한다. 반 바퀴를 돌아 창을 쏘아 올린다.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덤벼드는 망치를 퉁긴다. 힌셔는 찰나에 손에서 빠져나간 하마 턱을 회수하는 대신 주먹을 그러쥔다.
“얼레, 설마?”
기이한 데자뷔를 감지한 와론이 고개를 돌린다. 그가 하마 턱이 날아가 박힌 자리에서 일어난 바위 파편을 감지함과 동시에, 하복부에 묵직한 통증이 후비고 들어온다. 뒤이어 닥치는 퉁, 몸 자체가 매질이 되어 산산이 으깨지는 감각. 아, 조졌네. 헛웃음이 기침과 섞여 터진다.
풀썩 꺾여 추락한 와론의 오른손 위로 머지않아 차가운 금속질의 무게감이 얹힌다. 힌셔가 지면에 내리꽂힌 하마 턱을 뽑아 그의 손을 눌러 봉한 것이다. 투구 너머로 기침 소리와 웃음소리가 아무렇게나 섞여 터졌다. 나 참, 이래서 오늘은 싸우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나에게 말해 봐라.”
연신 갈라져 터지던 웃음이 뚝 멎었다.
“네가 기사에게 무엇을 바라는 건지.”
“……. 아~ 에이씨.”
“내가 경청하지.”
나는 기사가 싫다.
태양을 등지고 빛 대신 내리쬐는 힌셔의 그림자에 멸각될 것만 같은 찌릿한 전율을 떨쳐내며, 와론은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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