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PLE PAGE (산문)

241010

TXT.7838 (후속)

자기만의 방 by 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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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커미션 작업물은 신청자의 허가 및 요청으로 전문 게시 및 검색 허용으로 전환합니다.

본 작업물은 웹툰 <잔불의 기사> 등장인물을 기반으로 작업한 2차 창작물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시간은 적확하게 걷는다.

오차 없이, 비틀림 없이.

 

힌셔가 새삼스럽게 정연하고 일정한 시간의 흐름을 복기하는 이유는 기사 새까만 닭, 저기에 서서 살랑살랑 손을 흔드는 장신의 여자에게 있다. 그와의 은밀한 대치로부터 며칠이 지났는지 굳이 세어 보는 정성까지는 들이지 않았으나, 그날 이후로 저 여자가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사실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힌셔가 세심하고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와론을 눈여겨보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서서 자리를 지키고만 있어도 이목을 사로잡는 기사, 검붉은 하마 힌셔 정도 되는 위치에 있는 이상 저 두문불출의 기사가 관심을 보이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특이점마다 밟아 대며 그를 수소문할 수는 없었다. 대신 힌셔는 오감을 곤두세웠고, 그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기에 좀처럼 발을 놀리지 않던 성을 배회하며 족적을 남겼다. 일종의 맹수 간 영역 싸움이나 다름없는 행위였을 것이다. 애초에 성을 자신의 영역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기사와 성을 수호하는 자들의 근본이나 다름없는 기사 간에 이루어졌던. 힌셔는 성 곳곳에 자취를 남겼다. 기사가 있는 공간이라면 빠짐없이 그의 것으로 장악했다. 그에게는 그럴 힘과, 아우라, 그리고 배경이 있기에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대를 잘못 타고나는 바람에 옛사람으로서 이 자리에 남고 만 그가 경각심을 가지고 저어하던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언제든 지울 수 있는 마킹, 군림할 수는 있을지라도 섞일 수는 없을 여느 역사에서 온 일시적인 도킹과 다름없는 행위였을 것이다. 어느 탕아가 아무리 집을 떠나 배회하더라도 언젠가는 이 촘촘하게 짜인 기사들의 본거지에 발을 대고 말리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의.

그리고 이에 응신하는 듯이 와론은 그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성이라는 덫에 태연하게 발을 올려놓는다.

“오, 힌셔!”

어떤 일도 겪지 않은 사람처럼 반질반질한 낯짝, 검은 옷과 잔흠집이 많은 투구를 자랑하며 경쾌한 리듬으로 나린기를 등에 짊어진다.

힌셔의 눈살이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패여 들어가기 시작한다.

 

*

 

일전 이들의 결말은 엉망이었다.

힌셔는 와론을 확실하게 제압했고, 정중하며 모욕적인 방식으로 그를 깔아뭉갰다. 호혜와 자비를 베풀기를 주저않는 강자 특유의 시혜였다. 그리고 와론은 그러한 특례를 받을 만한 종자가 아니었다. 받을 만한 위치도, 그런 약함도, 그리고 성미도, 이 중 어느 하나도 갖추지 않았기에 와론에게 그의 행동은 반발의 여지밖에는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와론은, 일어나지 않았다. 반발하지 않았고, 그 어떤 말과 행동으로도 힌셔를 꺾어 누르려 들지 않았다. 한동안 숨을 고르는 소리와 귓가를 때리는 사나운 바람 소리만이 맴돌았다. 새까만 닭은 잠든 듯 드러누웠으나 규칙적이고 확실한 호흡 소리가 그의 의식을 대변하듯 쿵쿵 대기 중에 울렸다. 첨예한 침묵 끝에 지면, 즉 힌셔의 하마 턱 아래에서 낮게 긁는 듯한 소리가 천천히 진동하며 올라왔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그 거룩한 명예가 네 앞에 버티고 있는 한 아무것도 안 된다고.

“알았으면 좀 치우지?”

으르렁거리는 듯 울리는 낮고 거친 일갈과 함께 와론은 왼쪽 주먹을 움켜쥐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건어물처럼 바닥에 늘어진 채 미적거리는가 싶더니 활처럼 왼쪽 반신을 튕겨 움직임이 제한된 오른쪽 반신을 받친 지반으로 주먹을 내리꽂았다. 땅이 진동하며 원형의 궤적을 따라 갈라졌고, 순식간에 일어난 흙먼지와 튀어오른 날카로운 돌자갈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스쳤다. 이상할 정도로 힘이 빠져 부서질 것처럼 흔들거리는 어깨가 힌셔의 강직하게 버티고 섰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튼, 그래. 네 뜻은 잘 알았다.”

 

*

 

그날 와론은 달아났다.

그리고 오늘, 예리하게 날을 세운 채 닭을 위한 덫을 마련한 힌셔의 앞에 뻔뻔하게 나타나 맨들맨들한 웃음으로 다섯 손가락을 교차해 흔들어 대고 있다. 오, 힌셔! 짐짓 친근하고 격의를 갖추지 않아 날아갈 것만 같은 목소리로.

행동거지로 미루어 모르는 척을 하고 싶은 것인가. 장단을 맞춰 줄 것인가 아닌가에 관하여 골몰하는 힌셔의 눈앞에 성큼 다가온 와론이 손바닥을 휘휘 흔들어 보이며 깡통 머리를 들이민다.

“뭐야, 왜 이렇게 뿔이 났어?”

힌셔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슬쩍 빼며 얕은 한숨을 삼킨다. 동시에 길지 않은 생각의 끝에 방점을 찍고 어깨에서 힘을 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입을 여는 힌셔의 눈동자를 일방적으로 훔쳐본 와론이 그의 질문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보기 좋게 상반신을 뒤로 쑥 빼고 성큼 반대편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한다.

“기사질도 쉬엄쉬엄 하는 게 어때. 지금 얼굴이 말이 아니거든?”

돌아서는 와론의 등을 향하여 힌셔가 읊조리듯 일갈한다.

“또 달아나는군.”

“……. 뭐, 이해해. 한낱 새까만 닭에게 기사 영웅은 좀 벅차서~”

“그래. 끝까지 달아나길 바란다.”

 

뭐라는 거야. 투구 안으로 인상을 은근하게 찡그린 와론이 시각을 등에 짊어진 론누 쪽으로 옮기자 그를 향하여 걸어오는 힌셔가 포착된다. 눈을 맞추기라도 하는 듯 나린기의 최단부를 빳빳하게 노려보며, 시침처럼 적확하고 큰 보폭으로. 시선이 맞아떨어진 듯한 위화감을 이기지 못하고, 와론은 재빠르게 생동하는 몸의 시신경을 사용한다. 모든 건물이 그러하듯 복도는 단일한 길을 제시한다. 이 성의 이 복도 끝에는 대회의장이 있다. 헛웃음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줄줄 흘러나온다. 그렇군. 그 소리였어? 이것 참, 내가 저 하마를 상대로 자충수를 두다니. 그러니까, 와론은, 사실, 재미도 없고 짜증만 나는 기사 쌈박질로 진탕이 될 의회로부터 달아나고 있었다. 이 길 끝에 하마가 있다는 것쯤 당연하게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일일이 피하기도 귀찮은 관계로 대충 상대해 주고 튀자는 계산까지 알뜰하게 마친 뒤 그의 앞에서 이죽거렸던 것이다. 반면 힌셔는 이 기사, 새까만 닭의 성정에 대해 오래 알아 온 사람처럼 파악하고 있다. 그의 ‘다시 재생된’ 삶 속에서 가장 먼저 마주친 기사가 새까만 닭 와론이더라는 사실을 압도하고 그 심리적 거리가 일반 기사의 것과 판이한 궤에 있는 까닭 중 하나는 그가 이 성과 이 성을 이루고 있는 기사라는 체제, 그에 더해 기사 개개인에 대한 원한에 가까운 혐오가 어려 있음을 인지한 점에 있다. 그러므로 그가 어디에서 출발하여 왜 이 복도를 걷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게 짐작했으리라. 하! 와론은 다시금 언젠가 겪었던 일의 데자뷔처럼 몰려오는 신경질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는다. 하여간 사람 기분 더럽게 하는 데에는 도가 텄어. 이 새까만 닭을 양 몰듯 유인했단 말이지. 우두커니 서서 머리를 굴리던 그의 어깨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하고 낮은 음성이 음산하게 귓가를 간질인다.

“즐거운가?”

와론은 이를 갈며 응수한다. “그럼.” “그렇다면 문제없겠군. 가는 방향이 같으니 함께 가세.” 아~! 검은 기사는 탄식에 가까운 짜증을 뒤로하고 성큼 발을 뗀다.

 

*

 

표정을 전혀 모르는 채로도 기색을 읽을 수 있다 함은 어떤 것인가. 뒤로 갸우뚱 기울어진 채 미동이 없는 투구와 굳게 얽힌 팔짱을, 힌셔는 조용히 지켜본다. 두 사람이 함께 회의장에 들어선 그때 당연하게도 뭇 기사들의 따갑고 복합적인 시선이 와르르 쏟아졌고, 날카로운 눈빛 중 몇몇은 이내 새까만 닭을 관리 감독하는 하마를 향한 무언의 경의로 치환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힌셔의 그것보다 한층 더 날카롭게 벼려진 와론의 직관, 또는 육감이 포착한 불유쾌한 현상이라. 그러므로 그는 이처럼 뒤틀린 회의장 내 기류에 맞서 뭐라고 대거리를 하거나 횡포를 놓는 대신 마음가짐을 조금 바꾸기로 한다. 오래간만에 이 개싸움을 직접 함께 관전하며 살짝 들쑤셔 주기만 하면, 만에 하나의 경우지만 이 앞뒤가 틀어막힌 여자도 시야각이 조금은 넓어질지 모르는 일이지.

 

아니나 다를까 가진 것이라고는 힘과 줏대밖에 없는 종자들이 기십 기백씩 모여들었으니 앉았던 자들은 곧 기립하고, 홀을 중심으로 오가는 언성은 점점 올라가 쩌렁쩌렁해지기 시작한다. 장내의 열기가 달아오름에 따라 와론의 기울어진 고개는 잇따라 뒤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흉부를 가리고 꽉 잠겼던 양팔은 이내 풀어져 그의 투구 뒷머리를 받치고 깍지로 묶인다. 힌셔의 눈에, 이 모습은, 어쩌면, 오히려 즐기는 사람처럼도 보인다. 그것이 썩 유쾌하지 않다.

 

“즐거운가?”

“그거 알아? 당신 오늘 그 질문만 두 번째야.”

“분쟁을 유희 삼고 있는 듯하여.”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지.”

“너는 관망하는 쪽이 아니라 이들의 일원이다.”

“다 아는 사실로 기운 빼지 말자고요, 하마 씨. 체력이 넘쳐? 난 없거든, 누구 덕분에 빠진 팔이 아직 회복 중이라. 넘치는 힘으로 언쟁이 하고 싶으면 뭐, 저기 낄래?”

힌셔는 한숨 내쉬는 소리를 굳이 가무리지 않는다. 두 기사는 다시 좌중을 응시한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통탄스럽게도, 이 눈앞의 기사들은 신념과 철혈 같은 정의를 내세워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소를 끄는 인부들처럼 곳곳으로 갈라져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다. 작금의 뜨거운 감자는 과연 그 어느 기사가 친히 적진에 뛰어들어 동대륙의 정황을 낱낱이 보고할 것인가에 관한 담론이다. 필연 양날의 검이다. ‘누구’를 적임자로 선출할 것인지를 떠나 과연 이 정탐을 지금 이 시기에 실행해도 되는가에 관한 언쟁까지 오가고 있는 실정이다. 힌셔는 그를 둘러싼 세상이 기울어진 채 마구잡이로 흘러내리는 듯한 감각 속에서 균형을 간신히 바로잡는다. 명예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무엇을 종착지로 삼아야 하는가?

눈동자가 점차로 컴컴하게 가라앉을 무렵, 힌셔는 기이한 불쾌함을 감지한다. 시선. 고개를 홱 돌리자 그 자리에 그를 끈질기게 뜯어보는 깡통 대가리가 있다. 투구로 가려져 잘 포착되지 않는 눈동자가 저 철의 가면 너머에서 번뜩이며 꿈틀거리고 있다. 느낄 수 있다. 힌셔는 이토록 노골적으로 해체하는 듯한 시선에 즉각 반응하여 살기를 풍긴다.

그러나 지극히 원초적인 이 위협에 반응할 수 있는 기사들이 있다.

여기, 이 자리에.

수십 쌍의 눈을 등불처럼 켠 채로.

 

일제히 시선이 쏠린다.

번뜩이던 힌셔의 눈빛은 눈꺼풀을 감았다가 밀어 올리는 찰나 평온하며 권위적인 그것으로 돌아온다. 와론은 농담처럼 두 손을 들어 손바닥이 보이도록 흔들며 낄낄 웃는 소리를 투구 너머로 스멀스멀 흘린다. 홀에 팽팽한 긴장감이 맴돈다. 그리하여 짧은 침묵 사이에 끼어든 와론의 웃음소리가 기이하리만치 크게 귓가에 날아와 박힌다. 와론은 고개를 살살 저은 뒤 천천히 상체를 앞으로 흘리다시피 수그린다. 난간에 팔을 기대고 턱을 괸 채로 회의의 참석자들을 훑어본다. 한층 흥미가 동한 티가 묻은 몸짓이다.

 

“아우, 무서워라~ 무슨 일이실까, 우리 선배께서. 아, 이런! 그래, 마음이 많이 아프지? 기껏 기사의 기대를 닦아 놓았는데 그 위에서 치고받고 앉아 있는 멍청이들을 보고 있으니 무슨 사명감이 끓어오르나? 응?”

 

*

 

노골적인 책동에 반응하여 기사 몇 명인가의 반발에 가까운 욕지거리와 고성이 터지고, 누군가의 삿대질까지도 관측되었으나 그런 것은 그에게 하등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와론은 고개를 홱 돌려 그를 향해 불길한 시선을 따갑게 내리쬐고 있는 힌셔를 올려다본다. 자, 어쩔 테냐. 너무 화내지는 마. 인과야 어쨌든 나는 네가 직접 나서서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판을 깔아준 셈이잖아. 힌셔는 이 초대에 응하듯 눈을 지그시 감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소 불쾌한 방식이기는 하나 와론의 도발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는 다시 ‘삶’을 시작한 이래 번뇌 바깥에 놓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당면한 이 세대의 기사들이 보이는 행보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 그래. 다소 호도된 면이 있지만, 정리가 필요해 보이는 상황임에 이견은 없소.”

 

좌중은 침묵한다. 이제 이 무대를 막무가내로 벌려놓은 와론은 투구를 뒤집어쓴 얼굴을 아예 손에 괴고 삐딱한 자세로 기대어 작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힌셔를 지켜본다. 봐라, 힌셔. 잘 봐. 너의 살기, 너의 목소리와 눈빛 하나에도 일관된 태도로 너를 우러르는 이 어리고 어리석은 후배들을 보라니까. 너는 이 정도의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어. 네가 의도한 모든 시와 때는 물론이거니와 인식하지 못한 순간에도. 그러니 무책임하게 ‘대화로 해결합시다’ 따위의 설득 이상을 선보이란 말이야. 그 정도는 되어야지, 네가. 그래야 나도 ‘대화로’ 해결해줄 마음이 들지 않겠어? 오늘까지도 대련의 여파가 남아 시큰거리는 한쪽 어깨에 무심코 손을 얹으며 일신을 찬찬히 일으킨다.

 

“이미 결정된 사안에 대하여 필요와 적합성에 대해서 논할 시간으로 구성된 자리가 아님을 주지하시오. 근본만 기억하고 있어도 필요한 대화를 이끌어낼 재목들이 아닌가.”

그때 유연하게 가누어지던 투구 기사의 동작이 우뚝 멎는다.

 

흠, 그건 좀 별로인데.

너는 작금의 황제에게 네가 개입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겠지. 그 고지식한 머리로 웬만해서는 ‘이견 없이 따르는’ 쪽이 되고 싶을 수도 있어……. 다 티나거든~? 하지만 우리 기사들은 그렇지가 않아. 그래서야 직무 유기지. 이 시대의 기사는 충심이 아니라 정의, 무력이 아니라 법칙. 고작 그 정도의 봉인책을 써봤자 당장 이 자리에서 네가 가진 영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들 뿐인 것을……. 와론은 그 자신의 선득한 시선을 고스란히 감내하며 주먹을 그러쥔 채 무겁게 혀를 놀리는 힌셔에 대해 생각한다.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기사의 고질적인 오만함이라는 게 너에게도 있을 테니.

 

“속히 적임자를 찾지 못한다면 내가 움직이는 수밖에는 없소.”

그래. 바로 그거야. 그걸 말하고 싶었겠지. 처음부터 네 결론은 정해져 있었어. 이래서 기사가 참 싫다니까. 기이할 정도의 침묵으로 힌셔의 입지를 받치고 있던 기사의 투구 사이로, 피식 바람 빠지듯 은밀한 웃음이 흘러나온다. 뭘 기대한 거냐, 나는. 직접 대면하고 입씨름까지 해 놓고도 그런 위업을 남긴 영웅 기사쯤 되면 뭔가 다를 거라는 생각이라도 했던가……. 와론은 발을 돌린다.

“잘해봐.”

이번에는 힌셔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가, 그대로 그를 툭 치고 스쳐 회의장을 빠져나간다. 일전 힌셔와의 대치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지면을 내리찍었던 바로 그 손. 새까만 닭, 와론의 걸음은 여느 때처럼 경쾌하며 흔적이 없다. 부유하는 듯이 붕 뜬 채 고요히 빠져나가는 몸짓. 힌셔는 유령처럼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는 와론을 오로지 눈동자만으로 쫓는다.

 

나는 왜 그를 잡지 않았나.

그러나 떠나간 검은 기사의 그림자는 사라졌고 수십 쌍의 눈이 여전히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

힌셔는 잠시 침묵한 끝에, 천천히 입을 연다. “그러나 나는…….”

 

*

 

와론은 다시 자취를 감췄다.

 

원체 보이기보다 보이지 않는 법이 더 자연스러운 기사임을, 이제 힌셔는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덫을 놓지 않기로 했다. 와론이 의회의 장을 박차고 나갔던 그 날에는 언젠가 꾼 적이 있는 것도 같은 꿈을 다시 꾼 것만 같다. 선득하고, 불쾌하며, 절박하지만 이미 가버린 것들을 애도하는 그 나름의 무의식이 수행하는 예법. 같은 악몽이 반복될수록 기억은 흐려지고 기억의 무게를 감각하는 여섯 번째 감각도 둔중해졌다. 당시의 회의를 통하여 혼란한 정세를 무릅쓰고 그 나름의 정의를 수행하러 먼 길을 떠날 기사가 정해졌다. 힌셔는 그에게 일임한 일에 관하여 더 개입하지 않고 이 성에 남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것이 ‘정당한’ 흐름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적성의 문제도 있다. 본디 암행과는 도통 어울릴 수가 없는, 나면서부터 잘 세공되어 칼같이 번쩍거리는 사람. 기사, 그중에서도 검붉은 하마, 힌셔. 그가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무엇인가에 염을 내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잘해보기를’ 바라서였는지 물을 길이 없는 기사 사냥꾼과는 언제쯤에나 마주볼 수 있을는지. 이따금 떠오르는 얼굴을 뒤로하고 힌셔는 반듯하게 등을 펴고 성을 가로지른다. 질서를 아는 시침처럼, 적확하게, 올바르게.

 

그러나 이때,

 

“이봐요.”

인사 안 들려?

 

어느 부름이 있다.

힌셔는 시큰둥하며 단정한 낯빛으로, 정직하게 정면을 향해 걷던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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