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꿈속의 당신

월드 트리거. 나스쿠마

비자림 by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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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침까지 잠을 설치고 말았다. 꿈자리가 사납기가 여간하지 않았다는 말로는 간밤의 꿈을 다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표현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기에, 쿠마가이 유코는 자신의 걱정을 구겨진 이불과 함께 침대에 덜어둔 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방에서 나왔다. 이러든 저러든 식사는 해야 하고 학교는 가야 했다. 유코, 얼굴이 왜 그래. 잠 못 잤어? 응, 조금. 식탁에 앉으니 유코의 얼굴을 본 어머니가 걱정스레 물었다. 꿈이라도 꿨어? 옆에 먼저 앉아 있던 남동생이 젓가락을 집어 까딱이며 조잘거렸다. 꿈은 얕은 잠에서 꾸는 거라서 꿈꾸는 날은 잠을 깊게 못 잔 거라더라. 어디서 알게 된 상식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인 뒤 크게 하품했다. 무슨 꿈이길래 그래? 꿨다고는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덧 기정사실인 것처럼 묻는 가족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그냥, 별 의미 없는 꿈.

침대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유코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꾼 꿈을 말하지 않을 작정을 했다. 그렇게까지 관심이 있지는 않은 듯했지만 설사 가족들이 캐묻는다고 해도 입 밖으로는 절대 내지 않을 꿈이었다. 혼잣말로도 꺼내 들지 않을 꿈. 혹 누군가, 또는 신 같은 존재가 엿듣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라는 망상. 이뤄지지 않기만을 바라는 공상. 식사를 마친 뒤 유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깔끔히 비운 빈 그릇 같이 꿈 또한 제 머릿속에서 내몰 수 있기만을 바라며, 안색이 회복되길 바랐지만.

“안색이 안 좋네, 쿠마. 잠 못 잤어?”

여느 때처럼 온화한 미소를 짓지 못하고 흐려져 버린 친구, 나스 레이의 얼굴에 유코는 침음했다. 감쪽같이 숨겼으니 들키지 않을 거란 기대는 역시나 부질없었더랬다. 레이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코가 잘 숨기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유코는 레이가 제 오른쪽 뺨에 왼손을 가져다 댄 뒤 이내 부드럽게 감싸자 반사 반응처럼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손이 닿은 뺨이 시원했지만 좋아할 일은 아니었다. 레이, 손이 차. 그 말에 그는, 괜찮아. 늘 그랬으니까, 하고 단정한 말씨로 대답하며 유코의 얼굴에 오른 열을 식히는 데 제 손을 아낌없이 더했다. 유코의 양 볼에 레이의 손이 닿는다. 엄지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눈 아래, 그늘이 진 부분을 어루만진다. 레이가 오늘 유코를 만난 건 오후가 다 돼서였다. 몸 상태가 좋지 못해 학교에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코는 하교하기 무섭게 레이의 집으로 레이를 찾아갔고, 그 길 그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는 사실을 들키고 말았다. 레이에겐 아무것도 숨길 수 없었다.

“레이에겐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네.”

하지만 그런 레이에게도 꿈의 내용을 말하진 않을 것이다. 유코를 아는 레이라면 유코가 그럴 작정을 한 것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잠시 후, 레이가 말했다. 난 말이지.

“꿈에서, 무서운 일이 생겨 싸워야 할 때가 오면 쿠마를 떠올리며 싸우곤 해.”

“나를 떠올리면서?”

“응. 쿠마라면 이렇게 움직였겠지, 쿠마라면 이렇게 방어했겠지, 하면서.”

그 말에 부스스 웃어버리는 유코였다. 눈은 아직 감은 채였지만 제 앞에 있을 레이가 없을 비스듬한 각도에서부터 뻗어온 오후의 햇살이 유코의 눈꺼풀 안쪽을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유코가 말했다.

“내가 나타나서 함께 싸우지는 않는 거야? 꿈인데.”

“응. 쿠마가 그 자리에 없다는 건 쿠마도 쿠마의 싸움을 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꿈이라도.”

레이. 부르며 눈을 뜨자 언제나처럼 엷은 미소를 지은 레이가 유코를 바라보고 있었다. 색채야 엷지만 얇지는 않았다. 그는 옅은 색을 입힌 단단한 유리와 같았다. 유코의 부름에도 멈추지 않은 레이가 이어 말했다. 이어 당부했다. 이어 부탁했다. 대장으로서. 친구로서. 레이로서.

“그러니까 쿠마도 나를 떠올리며 싸우는 거야. 나라면 이렇게 움직였겠지, 나라면 이렇게 공격했겠지, 하면서.”

“레이.”

“그러면 괜찮을 거야. 어떤 꿈을 꾸든, 쿠마는 지지 않을 거야.”

그가 그렇게 말하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 같았다. 그가 말하는 대로 어떤 꿈을 꾸든 유코는 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레이. 유코는 이내 자신의 어깨를 감싸 당겨 끌어안는 레이는 보지 못할 표정을 지으며 짧게 숨을 삼켰다. 숨과 함께 입 밖으론 절대 내지 않을 말도 삼켰다. 레이, 그치만 세상엔 반드시 질 수밖에 없는 꿈도 있어. 아니. 싸워볼 틈도 없이 져버린 채로 시작하는 꿈이 있어. 재승부는 없는데, 이대로가 끝인데. 어떤 꿈에서 나는 질 수밖에 없어. 레이.

그러나 지더라도 내 머릿속에는 네가 떠올라 있겠지. 네가 있겠지.

얼굴을 감쌌던 손은 그토록 차가웠는데 품으로 끌어안은 몸은 이다지도 따뜻해서 꼭 오후의 햇살이 이 몸 안에 깃들어 담긴 것만 같았다. 유코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좀 더 많이, 좀 더 많이 쬐어주세요. 레이의 손까지 따듯해질 수 있도록. 좀 더 많이 레이 안에 담겨 주세요. 유코의 소원, 바람,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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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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