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스가 아니야

주스가 아니면

월드 트리거. 이어지지 않았을 이야기

비자림 by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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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더의 제식 트리거는 최대 8개의 트리거를 장착할 수 있도록 구성된 트리거 홀더라는 케이스 안에 결합하여 있으며, 정규 대원 이상의 트리거 안에는 여기에 추가로 베일 아웃 기능이 기본으로 내장되어 있었다. 트리거 사용자의 육체는 트리온체로 전환된 사이 트리거 홀더 안에 압축되어 보관되는데, 베일 아웃이란 이렇게 보관된 본래 육체를 지정된 장소로 긴급 사출하는 기능을 뜻했다. 베일 아웃은 보더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기술이었다. 보더 전투원, 그중에서도 근접 전투를 주로 벌이는 어태커와 건너가 다소 무모할 정도로 깊숙이 파고드는 식의 전투를 하게 만들었다는 그림자가 있긴 하지만, 보더 전투원의 생존율을 크게 향상했다는 공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베일 아웃 덕분에 B급 이상의 전투원은 전장에서 본래 육체로 돌아갈 걱정을 덜게 되었고, 위급 상황 시 안전이 보장된 후방으로 즉시 대피할 수 있게 되었다. 심혈을 기울일 만한 기술이었다. 실로 개발되기 전까지는 많은 희생이 존재하여 그 위에 간신히 세우는 데 성공한, 집념의 기술이기도 하였다.

그러니 다음과 같은 괴담이 돌기 시작했을 때, 베일 아웃을 개발한 엔지니어들이 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며 진심으로 분개해도 다들 이해해야만 했다. 이는 그들의 노고와 자부심을 모두 무시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괴담이 으레 그러하듯 최초 유포자도, 괴담 속 희생자의 정보도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개연성을 뒷받침하는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보더에 소속된 모든 대원은 보더의 판단에 따라 제대 시 기억을 봉인할 수 있다는 조항에 서명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괴담 속 희생자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럴 수 있었다.’ 이런 근거를 달고 퍼진 소문이었다.

베일 아웃 시 극히 드문 확률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오류는 베일 아웃의 목적지를 본부 또는 지정된 장소 외 다른 곳으로 변경하여, 이때 트리거에서 사출된 사람의 행방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 내용의 괴담이었다.

다만 이 괴담은 직접 네이버를 상대하는, 방위 임무를 맡는 B급 정규 요원들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아, 그렇다고 안 쓸 거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할래? 혹여 그럼에도 괴담에 겁을 먹는 이가 생기면 다음과 같이 ‘토닥였다’고도 한다. 그래, 그렇겠네. 그러니까 베일 아웃을 할 일이 사라지도록 훈련을 더 하자꾸나, 우리. 이에 따라 정말로, 평소보다 더 훈련에 매진하는 대원들이 생겼으니 제법 괜찮은 효과를 낳은 면도 있었다. 물론 소문을 들은 엔지니어들은 당연히 역정을 냈다. 헛소리하지 말고 일들 해! 그렇게 말하는 그들도 그들의 일에 다시 전념하느라 오래 툴툴대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그렇지만 만약에, 0에 극도로 가까운 양수의 확률이 있어 실제로 그런 오류가 발생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까? 이 질문은 한동안 보더 내에서 제법 괜찮은 이야깃거리가 되어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렇다면 안전한 지역에, 몸 성히 사출되는 것이 첫째 바람이요, 가능하면 본부와 가까운 지역에 떨어지길 바라는 것이 둘째가 되었다. 그다음은 무얼까? 세 번째를 든 자가 누구였는지는 마찬가지로 밝혀지지 않았다. 따라서 익명의 누군가가 말했다: 현실에 떨어지길 바라야 하지 않겠어?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하여도 마냥 우스갯소리로 치부할 순 없었다고 한다. 트리온 기관이라는 비가시기관이 체내에 실존하는 세상이다. 그러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세상 또한 존재할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현실에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고 희생자를 보더가 기억 소거로 감춘다는 부분 역시 현실성이 떨어지는 억측이었다. 사람이 살면서 맺는 주변과의 인연은 한둘이 아니다. 고작 보더에서 보더 소속 대원들을 상대로 입단속, 기억 단속을 시도해 봤자였다. 캐보면 말도 안 되는 점이 속속들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딱 괴담의 조건에 부합하며 무서운 이야기로는 합격선에 선 이야기였다. 최초 유포자가 이를 괴담 대회에서 털어놓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면 우승에 근접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었다. 뭐, 진상을 아는 자에게는 아쉬운 것도 없었다. 괴담의 최초 유포자는 보더 본부 상층부였으므로 아쉬울 게 있을 턱이 없었다. 보더는 왜 이런 괴담을 유포했을까? 이야말로 대외비였으므로 보더 수뇌부의 지령―미디어 대책실의 공문을 받은 이들조차 그 이유를 알진 못했다. 둘만 있는 자리를 틈타 수뇌부의 의중을 묻는 질문을 받아도 아즈마 하루아키는 저 역시 알지 못한다는 말로 그들에게 응하지 아니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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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물체든 압축하여 앞서 설정한 전송 위치로 전송할 수 있는 것은 굉장히 실용적인 기술이다. 그것이 살아있는 생명체여도 관계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물체 이동 기술은 이곳 보더―네이버후드에서 일컫는 바로는 미덴만이 가진 기술이 아니었지만, 다른 국가 역시 이 정도로 기술을 활용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마더 트리거의 출력에 제한이 있는 만큼 한정된 트리온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기술은 언제나 보더의 관심사였다. 효율적으로, 하지만 사용해야 할 때는 망설이지 말고 과감하게. 그 순간을 위한 절제였으므로, 절제는 언제나 제일의 미덕이었다.

그렇다면 미덕을 잃은 자는 어떻게 되는지.

절제하지 못한 순간에 발목이 잡혀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는지.

아는 자는 없었다. 괴담은 멀리 있지 않았다.

보더(border)는 경계를 의미한다. 경계를 넘은 이에게는 이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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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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