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스가 아니야

주스가 아닐까

월드 트리거. 주스였을지도 모르는 이야기

비자림 by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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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더의 제식 트리거 중 스나이퍼 트리거는 유탄 방지를 비롯하여 여러 안전 처리가 되어 있어, 설령 트리온체가 아닌 본체의 육신을 저격하여 맞히는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충격과 고통에 기절하는 데 그치도록 안전을 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스나이퍼라는 포지션 특성상 교전 시 적과의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어, 상대가 트리온체인지 확인이 불가할 때를 대비한 조치이지 어태커, 슈터, 건너 트리거에는 해당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반드시 적의 육신이 트리온체인지, 또는 아예 트리온 병사인지 확인한 뒤에야 교전하도록 훈련받았고, 그 덕인지 다행히도 지금까지 별다른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경계 구역에서 보더 대원과 전투를 벌이는 대상은 네이버후드의 침공을 제외하면 100%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트리온 병사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침공 이전까지는 인간형 네이버와 조우한 적도 없으니 전투에 임한 적도 당연히 없었다. 보더 대원 대다수에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원정 부대를 제외하고.

원정 부대는 인간형 네이버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알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제대 시 기억 봉인 조치가 취해질 게 확실시된 이들이기도 했다. 여러 차례 인간형 네이버와 교전한 그들은 원정을 떠나기 전 트리온체 여부를 가리는 훈련에 철저히 임해야 했다. 스나이퍼야 트리거에 안전장치가 되어 있으니 안심이지만, 다른 포지션은 특성상 안전 조치 자체가 불가한 경우가 제법 많았다. 호월이나 스콜피온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그래도 다행히, 원정에서도 지금까지 ‘사고’가 발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실은 알고 있었다. 한 명에게라도 ‘사고’가 발생할 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의 기억이 봉인될 거라고. 저지른 자도, 목격한 자도, 모두, 남김없이. 어쩌면 말이다. 지금도 실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뿐이지 여러 차례 기억이 봉인될 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진실은 이를 총괄한 자들만이 알지어다. 그들만은 진실을 알리라.

그해 여름 괴담 대회를 위해 토마 이사미가 준비한 이 괴담은 당연하게도 대외비가 같이 포함되어 있어 대회에서 발표될 수 없었으며, 듣기론 그가 첫 마디를 떼기 무섭게 그와 함께 원정 부대에 속해 있었던 타치카와와 카자마가 뒷덜미였는지 멱살이었는지를 붙잡고 끌고 나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진상은 불명이었다. 기술반의 노력 덕분이긴 하지만 트래퍼같은 일부 특수 포지션과 오퍼레이터를 제외한 전투 포지션 중 타인을 해할 가능성이 적은 스나이퍼 포지션으로서, 스나이퍼만 쏙 빠지는 괴담을 말하는 것은 조금 비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다행인지 아닌지 아무도 그 내용을 알지 못하고 끝나지는 아니하였는데, 전년도 괴담 대회 우승자 아즈마 하루아키는 토마의 괴담을 끝까지 들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즈마 씨에게 인정받는다면 올해 우승은 떼놓은 당상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실제로 같은 이유로 아즈마를 찾아온 대원들은 제법 많았다).

“어떨까.”

아즈마는 딱 그 세 글자만 입에 담았을 뿐인데, 그가 흥미를 보였다는 점만으로 만족한 토마는 그 이상의 감상은 추후를 위해 미뤄달라 요청한 뒤 돌아갔다고 한다. 비록 그 추후 따윈 오지 않았으며 발표되지 않은 채 그대로 비밀로 남고 만 괴담, 그리고 감상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체로 또다시 전설이 되고만 토마의 괴담이었다. 그 왜, 그 카자마 씨가 가로막았다잖아(타치카와 씨는?). 뭔지는 몰라도 그 이야기에 진짜가 섞여 있었다는 이야기지(저기, 나는?).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이는 없었다. 후일 토마 역시 원정과 관련된 그 괴담은 실은 장난이었다며, 대회엔 다른 이야기를 준비했었다고 말하며 본래 이야기에 관해선 침묵을 지켰다. 듣기론 수뇌부로 불려 가 그들과 따뜻한 면담 시간을 가진 이후였다고 한다. 알려진 것은 그게 전부였다.

따라서 아즈마가 말하고자 한 이야기 역시 따라 침묵 속에 묻혔다. 어떨까, 아즈마는 그런 이야기를 하려 했었다.

기억을 봉인하는 것이 만능은 아닐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그런 이야기를. 또한.

꼭 원정일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도. 경계 구역에서도 ‘사고’는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는 것도. 모른다. 아즈마 역시 실은 다른 이야기를 준비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아무도.

그렇지만 보더 입대 시험 중 가장 어려운 시험은 인성 면접이란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으며 실제로도 그러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더불어 보더에 소속된 대원은 훈련생과 정규, 정예를 가리지 않고 주기적으로 상담심리사와 의사의 상담을 받고 그 소견서를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그걸로 방지할 수 있는 사고라면 참으로 보람찬 조치일 것이다. 빈말이 아니었다. 보더는 언제나 대원들의 여러 ‘상태’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최고는 아니겠지만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의 방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아즈마도 그 사실을 알았다. 보더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것도 알았다. 보더는 할 수 있는 한에서 최대한 노력하고 있지만,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고 ‘정해놓은 것’은 하지 않는다고. 아즈마는 오래전…… 어떤 사건을 계기로 보더에 소속되어 있는 한 기억을 지우진 않겠지만 대신 기억을 지운 이들의 사후 동태를 관찰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지금까지 그 역할은 제대로 수행되고 있었다. 그 같은 자가 필요한 까닭은 앞서 말했듯 기억을 봉인하는 것이 만능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보라, 토마도…….

여기까지.

그러나 아즈마는 오랜만에, 오래전 카코와 경계 구역에서 마주쳤던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그는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미와의 팔을 붙잡아 저지한 날도, 연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기억해 내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기억이 있는 한. 조금도……. 그런 상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저, 아즈마 씨. 누군가 아즈마에게 다가와 인기척을 내기에 아즈마도 그에 시선을 돌려, 시선을 주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딱 알기만 하는 얼굴이라고 하는 게 옳았다. 그러나 그쪽도 마찬가지일 테니, 두 사람은 지금껏 대화 한 번 나눈 적이 없었다. 즉, 친분이 없었다. 그러나 먼저 그 관계를 바꾸려 한 쪽이 그렇지 않은 쪽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아는 얼굴이란 것은 얼굴이 눈에 익었다는 뜻이지 이름이나 그 외 다른 정보를 안다는 이야기와 같지 않았지만 아즈마는 그의 이름도, 그와 관련된 몇 가지 정보도 알고 있었다. 저는……. C급 훈련생 대원복을 입고 있는 그를 향해 아즈마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하토하라 미라이였지.”

“네.”

처음엔 그리 눈에 띄지 않았으나 훈련을 거듭할수록 성적이 눈에 띄게 올라 주목했던 훈련생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으로 눈에 띈 것은 아니고, 대물 저격은 나날이 고득점을 내면서 대인 저격은 마치 반항 시위라도 하듯 0점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억하고 있었다. 그를.

“실은 상담하고 싶은 게 있는데 이야기를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짐작하는 것은 기억해 내는 것 못지않게 어렵지 않았다. 마침 일과가 빈 시간이었다. 아즈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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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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