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스가 아니야

주스가 아니야

월드 트리거. 팬아트

비자림 by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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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팬아트입니다.

트리온체는 트리온으로 이루어진 신체이며 트리거를 해제하면 트리온체도 함께 분해되어 사라지는 것이 기본이다. 그것은 트리온체로 이뤄진 모든 신체 일부에 해당하며 본체 곧 트리온 공급 기관과 물리적으로 절단되어 분리되었을지라도 분해되는 시간에 차이는 조금 있을지언정 소멸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보더는 트리온 반응을 조사하여 보더제 트리거를 판별해낼 수 있다고 하나, 보더의 눈을 가릴 수 있다면. 또는 보더의 묵인이 있다면 트리온체는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을 수 있는. 완전 범죄에 적합한 신체 곧 수단이 된다.

*

오래전 카코 노조미가 A급 1위 아즈마 부대에 속했을 적의 이야기다.

여느 때와 같이 경계 구역을 지나 보더로 출근하던 카코는 인적이 없어야 할 경계 구역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방위 임무를 수행 중인 보더 대원일까? 그러나 그렇다면 이렇게 은밀하게, 마치 자신을 숨기려는 듯 의도적으로 눌러 죽인 기척을 낼 필요가 없었다. 아니, 은밀 행동에 적합한 소형 네이버 개체일지도 모르지. 정보 수집, 첩보 등의 역할을 수행하는 개체라면 보더 대원으로서 가만히 내버려둘 순 없었다. 어쩌면 고양이나 강아지, 너구리 같은 소동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인적이 드문 지역이니 그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도 이상할 건 없었다. 오히려 그들에겐 다른 곳보다 더 나은 선택이 될 수 있었다. 네이버는 오직 인간의 트리온 기관만을 노렸으므로 네이버와의 전투로 간혹 집이 부서질 수 있다는 점만 감수하면 제법 괜찮은 터전이기도 했다. 가능하면 경계 구역을 파괴하지 않고 전투하는 것이 보더의 규율이기도 하니. 그리고 만약 위의 선택지가 모두 아니라면…… 정말 사람일 수도 있겠지. 카코는 제가 최초에 느낀 기척을 ‘인기척’으로 분류하고 표현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네이버가 언제 어떻게 출현할지 모른다는 점만 감수한다면, 또는 도박을 벌이자면 경계 구역 시가지만큼 범죄를 저지르기 좋은 지역도 없음을, 그리하여 미카도시 시민이 경계 구역에 접근하지 않는 이유에는 그곳이 우범 지역이기도 때문이라는 것을, 카코도 모르지 않았다. 저희가 아무리 경계 구역을 순찰하고 방위를 해도 모든 지역을 커버할 수 없다는 것도.

“…….”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범죄율이 높지만도 않았다. 사실이다.

사람이 없는 만큼 사람의 눈만큼 폐쇄회로 카메라가 사각이 존재하지 않도록 온 사방에 설치된 지역이 또 경계 구역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범 지역이니 뭐니 하는 건 실은 괴담. 그럼에도 아이들이 호기심에 경계 구역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덴 제법 유용하게 사용되며 효과가 좋았다. 인기 있는 괴담이었다.

그래서 다시 인기척으로 돌아와서.

카코는 손에 트리거를 쥔 채 인기척이 들린 골목으로 접근했다. 사람이든 네이버든 소동물이든 이곳이 경계 구역인 이상 정체를 확인할 의무가 카코에게 있었다. 신중히, 모퉁이를 돌아 오후의 햇살이 내리꽂히지 못하도록 슬레이트 지붕 처마로 방어하여 어두운, 혼자 어둠이 몰려 있는, 벽과 벽 사이 좁은 골목 입구 앞에 혼자 섰다. 정면으로. 곧 눈이 어둠에 적응하니 카코는 사람의 그림자를 어둠 속에서 구분해 낼 수 있었고, 그리고 카코는 그곳에서, 그것이, 제가 아는 이의 그림자이며 뒷모습이며 사람이라는 것을 분간해 냈다. 다시 말해 그것이, 그가 카코에 의해 발각되었다. 카코가 그의 인기척을 느꼈듯이 그 사람도―사람이었다. 앞서 이미 언급한 대로 그것은 사람의 기척이 맞았다.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카코를 인지하고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고 동시에 불린 이름이 공기라는 매질을 서로 스치듯 지나가 서로에게 닿았다.

“아즈마 씨.”

“카코.”

얼굴에 붉은 액체가 튄 아즈마가 서 있었다.

실은 얼굴뿐만이 아니다. 상의에도, 그 손에도 사정없이 튀어 있는 액체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붉어서 카코는 저도 모르게 제가 입꼬리를 올리고 웃어버리고 말았음을 알았다. 상황이 재미나서 그런 것은 아니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또는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긴 머리가 방해되었는지(무엇에?) 동그랗게 말아 묶어 올린 아즈마를 보며 카코 역시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아즈마 씨도 실수로 주스를 터뜨리는 경우가 있구나.”

그것은 카코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괜찮은 ‘대안 답안’이었다.

카코는 아즈마가 이에 동의하길 바랐다. 아즈마 씨. 최초의 스나이퍼. 우리의 대장. 아즈마 하루아키. 그렇다고대답해요얼른. 그러나 시선을 옆으로 돌리는 그에게선 카코가 더는 웃는 낯을 유지할 수 없게끔 하는 말이 흘러나오고 카코는 저 역시 제가 한 번도 ‘바닥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았음을 상기했다. 그야 바닥에는. 그리고 당신에게는. 그리하여, 그리고, 가라사대 당신이 말하기를.

“―――――――――――――――――――――――――――――――――――――――――라는 괴담을 생각해 봤는데, 어때? 우승할 수 있을 것 같아?”

보더 휴게실, 모퉁이의 벤치, A급 1위 부대 아즈마 부대 소속 슈터 니노미야 마사타카는 조금 전까지 제가 마시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더는 입에 댈 수 없게 된 토마토 주스 캔―카코가 샀다. 어쩐지―을 든 채로 황망한 시선을 제 맞은편에 앉은 부대 동료 카코에게로 향한 채 말을 잃었다. 옆에 앉은 부대의 막내, 미와 슈지의 얼굴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으니 조금 전까지의 분위기야 말할 것도 없었다. 여름을 맞이하여 보더 내 장기 자랑 등 다양한 친목 대회가 우후죽순 개최되는 가운데 괴담 말하기 대회에서 우승하겠다고 대장을 갖다 파는 희대의 행보에 니노미야는 머리가 지끈 울리는 걸 느꼈다. 너 그거 아즈마 씨에게 허락은 받은 거냐? 당연하지. 이래 봬도 실화 바탕인걸. 할 말이 없어지고, 아니, 무어라 말을 하고 싶다는 의지마저 소멸했다. 아즈마 씨는 무슨 생각으로 저런 이야기에 자신이 등장하는 걸 허락한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와중에, 두 사람의 반응에 만족스럽게 웃던 카코가 손을 번쩍 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즈마 씨, 여기!”

“다들 모여 있다니 별일이네.”

무슨 재미난 일이라도 있니? 여느 때처럼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건 아즈마가 그들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이런 사람을 가지고 이 인간은 대체……! 옆에서 괴담의 후유증으로 파득 떠는 미와와, 그런 미와를 보고 걱정하는 아즈마와, 그러든 말든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서 지우지 않는 카코를 번갈아 돌아보던 니노미야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무슨 일 있었던 모양인데. 무슨 일은 무슨, 전에 말했던 거 있잖아요. 괴담 대회. 그 이야기 들려주고 있었지. 아, 그거?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아즈마에 견디다 못한 니노미야가 ‘그런 얼토당토않은 괴담을 다수 앞에 말하게 두어도 괜찮냐’고 따지려 들 때쯤, 한발 앞서 미와가 고개를 벌떡 들었다. 니노미야와 아즈마 사이에 불쑥 끼어든 그가 평소와 달리 다급하게 일을 열었다.

“그래서 그거, 뭐였나요?”

실화 바탕이란 말을 듣는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을 지경으로 허예지다 파래지다 번갈아 얼굴색을 바꾸던 막내, 미와를 보고 아즈마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거?’ ‘아, 그거.’ 카코가 키득대며 ‘그거 말예요, 그거.’ 하고 설명을 시작하고 잠시 후 무슨 뜻인지 이해한 아즈마의 고개가 가볍게 끄덕여졌다. 니노미야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고, 아즈마는 온화한 미소 그대로. 그리고 카코의 이야기 속 그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주스가―.”

그것은 아즈마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괜찮은 ‘대안 답안’이었다, 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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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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