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카미 군 거짓말도 잘하시네

미즈카미 군 거짓말도 잘하시네 下

월드 트리거. 미즈이코

비자림 by 비
2
0
0

7

사람이 아닌 것이 당연한, 그리고 분명한. 사람으로 칭해서는 분별을 잃고 마는 환상, 환청, 환후. 그 주제에 반대로 옷깃을 여미고, 목은 흰 깃으로 빈틈없이 감싼 그것. 눈을 감아 보지 않으면 그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꼭 산 사람처럼 굴지만, 내려간 앞머리를 파득 올라간 어깨 따라 흔들며 평소처럼 대꾸하기나 하지만, 뇌 내의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것에겐 그런 말도 할 수 있다. ‘내 환상이잖아요. 내 말을 따라요.’ 그러면 그 말에 별수 없다는 듯이 수긍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선다. 그의 말을 따른다.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

눈은 그렇게 묻지만,

‘그럼요. 계속할 수 있어요.’

입은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그럼요. 계속할 수 있어요.

최악의 현재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그날 이후로. 지금껏 미즈카미는 그리 생각해 왔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으니 최악은 언제나 현재형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고. 삼 년 전, 꼬박 1년을 불면으로 지새웠던 때를 그는 기억했다. 그때의 그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세 시간이라도 잠들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던 때였고, 그러기 위해선 그것이 제 앞에서 죽은 이와 똑 닮은 얼굴을 하고 있어도 다만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눈 감을 수 있었던 때였다.

‘잠시만 이러고 있어 줘요.’

동시에, 처음으로 요구했던 때이기도 했다. 세 번의 허락 끝에야 곁에 다가선 이를 올려다본 미즈카미는 그때, 그것이 꽤 잘도 제 기억을 휘저어 제 바람과 교묘히 뒤섞인 존재를 구현했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미즈카미에겐 그 수 외엔 별수가 없어 어쩔 수 없었지만, 당시의 미즈카미도 그에게 남은 분별로 최선을 다했다.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묻는 듯한 그것에게 수년째 같은 대답을 돌려주며. 그는. 단념하는 수 외엔 별수가 없지 않은가, 하면서.

‘들어와도 돼요.’

허락을 내줬다. 문간 너머로.

그제야 발을 내딛는 이것은 과연 당신일까, 당신의 탈을 뒤집어쓴 다른 것일까? 모르겠다고 생각한 기억은 있다. 어디까지가 진짜 당신인지, 내 기억에서 왜곡된 당신인지, 그저 내 바람일 뿐인 당신인지 모르겠어. 정말로.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했으니, 목을 옷깃으로 덮어 드러나지 않게 철저하게 감춘 그것은 당신의 죽음을 감싸 거짓말쟁이조차 되지 못한 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냉증이라도 생긴 것처럼 그날 이후 차갑기만 한 손으로 당신을 이용할 수 있도록. 당신에게 요구할 수 있도록. 이름만 남아 살고 있는 당신의 이름으로 그것을 부르며 미즈카미는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미리 생각해 두지 않으면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라서. 그뿐이라서.

그런데 내 착각인 줄로 알고 고백한 당신이.

실은 진짜 당신이었다는 전개가 일어나면 어떡하지.

산개하는 말 앞에서 미즈카미는 말을 잃었다. 입속의 말도, 반상의 말도. 지금까지 정리해 온 감정도, 평정도. 처음으로 제 통제를 벗어난 그것이, 그―이, 그가 입을 열었다. 저를 불렀다. 소리를 내었다. 그 자신의 기억 속에 또렷이 존재하는 목소리로.

‘이코 씨. 네이버가 올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네가 알았으니까 알았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이코 씨. 난 몰랐어요.’

난 몰랐다고요. 정말로.

그리하여 그에게 남아있는 얼마 안 되는 분별까지 모조리 앗아갈 것만 같았던 날. 아무렇지 않게 미즈카미를 부르는 그에 미즈카미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의 씨를 제 머릿속에 스스로 심고야 말았다. 머리도, 요령도 좋은 청년의 머릿속에서 그것을 이코 씨라고 부르면서도 이코 씨라고 착각하지 않게 만들었던 분별이 스러져간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아무렇지 않게 낮은 확률을 고르는 사람이 있다고. 망설임 없이 뛰어들어 기어이 행동하고야 마는 사람이 있다고. 미래를 직전에야 뒤틀어 아무도 그 자신의 현재에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고. 당신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을 거라고. 뿌리내린 것은 말도 안 되는 생각. ‘트리온이란 물질은 워낙 가능성이 무궁하니까.’ 말도 안 되는 가능성. 다시 말해 헛소리. 허풍. 허언.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

그래도…… 어쩌면. 그럼에도…… 어쩌면.

“진짜.”

가지지 못한 4월의 거짓말을 떠올린다.

“진짜 이코 씨예요?”

내가 ‘당신’이라 불러 ‘당신’이 된 당신이 아니라,

정말 존재하는 ‘당신’이에요?

*

보이잖아.

*

여기 있잖아.

*

그날 이후로 자신이 항시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잊는가? 스트레스는 온갖 장기를 망가뜨린다. 뇌의 지각도 그 대상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결국 사람이, 오류를 일으킨다. 그런데 그것을 가속하는 무언가도 존재하고 있다. 오류를 누적하는, 오류를 확산하는, 오류를 증폭하는 물질이다. 보이지 않는, 그러나 분명하게 여기 존재하는 물질의 이름을 모두 알고 있다.

트리온이란 물질의 무궁한 가능성이 사람을 망가뜨린다. 그러나 그 기관 역시 결국 장기 중 하나에 불과하니, 사람을 망가뜨리는 건 사람 그 자신이다.

*

증오하며 살아가는 수도 있기는 하였다. 언제 돌아올지 어떨지도 모르는 까마득한 시간을 기다리면서, 미와 부대의 대장 미와와 그의 일부 부대원같이 그들에게 진정 되갚아주는 날을 기다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즈카미는 그들과 마주하지 않기로 했다. 트리거를 반납하며 분노할 자격도 내려놓았다. ‘이제 더는 의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렇게는 적지 않았다. 예의상. 미즈카미 안에는 오랫동안, 그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도 더 오래도록 남아 이따금 한 번씩 그의 주의를 끈 불합리한 분노란 개념이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뿐이었을까? 합리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정당한 분노와 굴절되거나 왜곡된 분노를 갈라, 올곧게 대상을 향해 나아가고 그쳐야만 ‘건강’하다는 정론을 내세운 그의 안에는 정말 그 개념만이 있었을까? 분노는 정말이지 한 톨도, 없었을까?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이 미즈카미가 지난날 빠뜨린 어떤 것이다.

‘다투었나요?’

‘화를 내고 싶지 않았나요?’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던가요?’

전혀.

당신의 가족들, 유족들 앞에 서서 모든 것을 소상히 고백할 때였다. 우리 사이에는 큰소리 한 번 오가지 않았으니 미즈카미는 내내 아래를 내려다보다 바짝 마른 입술을 적신 후에야 시선을 올려 그들의 눈을 보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럼에도 그들은 미즈카미를 딱하게 여겨서, 실로 당신의 가족이어서, 그들이 자리하지 못한 죽음 앞에서도 최선을 다했을 그를 믿고 그가 믿은 미즈카미를 믿었다. 그러니 그들을 그날 처음 보았음에도 좋아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 않냐고 말하고 싶은데, 말해도 들어줄 사람이 곁에 없었다. 저와 비교할 바가 아닐 슬픔 앞에서도 의연한 그들 앞에서 어리광을 부릴 수도 없었다.

당신을 내가 좋아했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던 지난 시간은 말하지 않았다. 물길 가운데 물살에 잠긴 기분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물 아래선 살 수 없는 사람인데도, 아니, 외려 그런 사람이라 밀려오는 파도에 덮쳐져 흔적도 없이 영영 사라지고 싶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온 4월, 봉오리마다 꽃송이를 함박 피워 올린 목련나무 가지가 창 가까이 뻗어온 밤에, 베란다 형광등의 불빛으로 앨범을 정리하던 미즈카미는 그들에게서 일 년 만에 ‘잘 지내느냐’는 연락을 받았다. 저는 이토록 부재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 하는데, 그들도 그러할진대, 와중에도 그가 구해낸 사람을 기억하고 걱정하며 안부를 물어 오는 그들이 정말로 최선을 다해 힘껏 노력하며 살고 있음을 미즈카미는 알 수 있었다. 그러니 그 역시 그라도 구하기 위해 뛰어든 사람들을 기억하며 살아야만 했다. 힘든 건 저만이 아니었으므로. 그들 중 많은 이가 보더를 떠났을 정도였으므로. 그중엔 그에게 화를 낸 사람이 하나 없었다. 그러니 저 역시도.

‘당신이 본 미래에서 내가 당신에게 화를 내나요?’

최선을 다했음에도 맞이한 최악의 미래에 화를 낼 순 없었다.

‘아니.’

굴뚝 너머로 흩어지는 연기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던 날을 연상한다. 앞으로 계속될 창백한 나날 중에 당신은 없으리라 생각한 어떤 날을 회상한다. 이제는 지나간 날이다. 지나간 날을 지나온 미즈카미는 몸을 돌려 묻는다. 하늘에서 시선을 내린 뒤.

“진짜 이코 씨예요?”

내 앞의 당신은 차분히 앞머리를 내리고 눈을 감고 있는데, 등 뒤엔 또 당신이 있다.

지금까지 나는 당신을 제대로 묘사한 적이 없지만 그래도 지금까지의 당신은 내가 당신을 진실로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의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몸을 돌려 바라본 당신은 트리온 전투체의 전투복을 입은 채 고글을 쓰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것은 마지막으로 본 ‘살아있는’ 당신의 옷차림과도 달랐다. 그에 미즈카미는 자신이 지난날 빠뜨린 어떤 것을 연상한다. 이곳, 이 꿈, 이 무의식 가운데서 드디어 주워 든 그건…….

감정이다.

“미즈카미.”

“부르지 마요.”

“일어나.”

“나를 왜 부른 거예요?”

불합리한 분노

합리적으로 표출해도 되는, 정당한 분노와 다르게 굴절되고 왜곡된 분노.

“왜 그랬어요?”

원망.

그날로 돌아가면 해야 하는 말과는 전혀 다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거기 서 있어요. 이쪽으로 오지 말아요.’ 정확히 딱 반대로 소리쳤을 말과도 다른 말을 멈출 수 없어 그대로 뱉어내고야 만다. ‘오지 말아야 하잖아요. 부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런 건 성미에 맞지 않았겠지. 물론 그랬겠지. 그래도 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 아, 더는 좋게 말할 수가 없어 일그러지는 얼굴에 차오르는 것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단 한 순간도, 표출할 수 없었던 감정. 분노. 존재할 수 없었던 분노다. 그러나 대상이 눈앞에 나타난 지금 더는 참지 않아도 되는 분노. 존재하게 되는 분노. 미움. 화. 억하심정. 설움.

미즈카미는 살아생전이든 죽어사후든 처음으로 제 앞에 선 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윽박질렀다. 처음으로, 큰소리로.

“왜 그랬냐고!”

‘미즈카미.’

곧 다가올 처참한 아픔을 예상하면서 눈까지 질끈 감았으나 예상한 아픔은 오지 않았다. 대신하여 닿은 것은 정체를 알고 싶지 않은 소리. 눈앞을 덮은 붉은 피. ‘트리온체도 아니면서 무슨 자신감이에요.’ 같은 말을 했으면 좋았겠다. 그렇지만 미즈카미는 뜬눈으로 남자의 입 모양을 읽어내느라 바빠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였다. 그날. 아, 당신은 정말 너무했다.

‘미즈카미.’

정말 너무했어. 정말로. 안 그래?

‘화내지 마라.’

그 말에 미즈카미는 다만 생각했다.

뭐 이딴 유언이 다 있어.

이딴 유언이…….

*

사람을 망가뜨리는 건 언제나 사람이라지.

*

당신의 형상만 빼다 닮은 그것이라면 언제까지나 지켜보며 사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진짜 당신이라면. 내가 ‘당신’이라 불러 ‘당신’이 된 당신이 아니라, 정말 존재하는 ‘당신’이라면 나는 당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원망할 수밖에.

“미워요.”

미워할 수밖에.

“밉다고요, 이코 씨.”

“…….”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니 바닥이 있는 줄도 몰랐던 이 꿈속에 바닥이 있어 그 위로 점점이 물 자국이 박혀 들고 있었다. 처음으로. 처음으로.

그리곤 냉담하게 느껴질 만큼 단호한 목소리가 미즈카미를 밀쳐낸다.

“그만 일어나라. 미즈카미.”

귀를 찢을 기세로 우는 기계음 곧 사이렌 소리 속에서 미즈카미는 눈을 떴다.


8

눈을 떴을 때 그 사람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자 칸막이 안쪽에서부터 비좁은 길을 달려 제게 오는 선배를 볼 수 있었다. 중간에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한 건 덤이었다. 미즈카미! 깼어? 네이버랜다. 내가 미친다, 진짜! 언제는 뭐 예고하고 열리는 게이트겠냐마는 학교, 교내, 그것도 건물 안에서 게이트가 열릴 줄은 알지 못했다. 미카도시의 게이트는 대부분 보더 본부 근방에서만 열리도록 조치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처럼 변칙적인 게이트 출몰은 지금까지도 종종 발생하여 보더 수뇌부와 엔지니어 부서의 골치를 썩이는 문제 중 하나였다. 뭐든 100%란 없으니 그런 것이겠다. 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자니 선배가 곁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재촉했다. 얼른 일어나! 빨리 나가자! 안 그래도 사이렌 뒤로 건물에서 당장 대피하여 운동장으로 모이라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미즈카미는 소파 밑에 흩어진 신발을 주워 모으며 초조해하는 선배에게 말했다.

“먼저 가세요. 뒤따라갈게요.”

그러나 돌아온 것은 칼 같은 거절이었다.

“헛소리 말고 같이 가.”

“저 컴퓨터 저장도 해야 해요.”

“그거 내가 아까 해놨다. 너 내가 마음 급하다고 후배고 뭐고 다 버리고 가는 사람으로 보이냐?”

물론! 마음은 급해! 그것까지 부정하진 않겠어! 미즈카미는 그 말에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작게 웃음을 흘렸다. 뒤축 뭉개지 말고 제대로 신어. 넘어진다. 꿍얼거리는 그를 따라 문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연구동 내부 같은 층에 머무는 사람들이 혼비백산한 채로 연구실에서 뛰어나와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평소엔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누던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을 찾기에 썩 좋지 못한 상황이기는 했다. 그들의 처지도 다를 바는 아니었고 말이다. 엘리베이터 말고 계단으로 이동하세요! 교내 경비 및 시설 관리를 맡아 평소에도 종종 인사하고 지내는 니무라 씨가 새하얗게 질리긴 했어도 결연한 표정으로 연구생들의 피난 유도를 하고 있었다. 긴급 상황에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것은 과연 현명하지 못했다. 지금처럼 건물 붕괴의 위험이 있을 때는 더욱 그랬다. 그 말 따라 계단으로 발을 옮겨 내려가면, 몇 층 내려가기 무섭게 복도를 가득 메운 인파와 마주할 수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봉쇄된 듯하였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훌쩍이며 코를 마시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였다.

대학원생들의 실질적 주거지인 연구실과 실험실이 자리하고 있는 연구동은 학부생들이 주로 수업을 듣는 수업동과 완전히 별개의 건물로 딱 나뉘어 있지 않았다. 수업동과 연구동 사이엔 통칭 구름다리가 두 건물을 연결하고 있었고, 다리를 통해 학생들은 수업동과 연구동을 오갈 수 있었다. 모든 수업이 꼭 수업동에서 열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실험 수업이 있는 학생들은 바깥길을 통해 연구동 실험실로 이동하거나, 구름다리를 통해 넘어가고는 했다. 그리고 지금, 연구동 3층에 몰려 있는 이들의 면면을 보면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학생들이 다수 보였다. 봉쇄된 것은 수업동의 출입구인 모양이었다. 수업동 학생들까지 모두 넘어온 연구동 복도는 발 디딜 공간 없이 꽉 메운 인파에 혼잡하기 그지없었다. 보기만 해도 숨이 콱 막힐 지경이었다.

“다들 질서를 지켜 이동해주세요!”

그래도 침착하게 지시에 따르는 학생들 덕분에 혼란은 천천히 수그러들고 있었다. 눈에 확연히 띄는 속도는 아니나, ‘천천히, 줄 맞춰서!’ 자리를 지키고 선 연륜 있는 교수의 호령에 맞춰 계단을 차분히 내려가는 학생들로 복도에 남아 있는 인원도 차츰 줄어들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얼굴에 먹구름처럼 짙게 깔린 불안과 걱정이 멀끔하게 개는 순간이 도래하기엔 이른 때였다. 건물 내부로 침입한 네이버와 보더 간의 전투가 이미 시작되었는지 쿵,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이 이따금 흔들릴 때마다 짧은 비명이 인파 속에서도 구분할 수 있게 튀어나왔다. 3층에 모인 사람들이 구름다리와 연구동의 경계까지 줄어들었을 때였다. 미즈카미와 선배가 계단 아래로 내려와 복도에 발 디딜 공간을 겨우 마련했을 때, 구름다리 끝에서 외마디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네이버다!”

순간,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인파가 일제히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단 가까이에 서 있던 미즈카미는 본능적으로 난간을 꽉 붙잡았고, 그와 다르게 좀 더 복도 안쪽으로 다가가 서 있던 선배는 속수무책으로 인파에 휩쓸려 멀어지기 시작했다. ‘다들 발밑 조심하고! 침착하게!’ 그러나 그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귀가 이 자리에 남아있지는 않은 듯했다. 사람들은 우당탕 큰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고, 가운데 저 멀리, 구름다리 쪽에서는, 쿵. 잠시 후 또다시, 쿵. 하고 묵직한 울림을 전달하는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미즈카미! 이따가 꼭 연락해! 내려가서 봐!”

멀리서 간신히 고개를 든 선배가 소리쳐 구름다리에서 시선을 돌린 미즈카미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윽고 선배의 머리는 계단 아래로 사라져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고, 부모 손을 놓친 아이처럼 당황하기엔 부모 손을 놓치지도, 아이이지도 않은 미즈카미 역시 사람들 사이에 섞여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스피커에선 여전히 사이렌 소리와 대피 안내 음성이 시끄럽게, 귀가 아플 지경으로 방송되고 있었다. 아파하라고 틀어둔 음량에 불만을 가져선 안 되겠다 생각하며, 그대로 난간을 잡고 빙글 돌아 계단을 향해 내려가려던 미즈카미였다.

누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고개가 저절로 다리 쪽으로 돌아간 이유를 미즈카미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돌아보았으니 보이는 것이 있기 마련이라, 미즈카미는. 지금껏 내내 보이지 않았던 그를, 드디어 발견할 수 있었다. 이코마를.

“이코 씨.”

실은 눈을 뜨고 나서부터 곁에서 보이지 않는 그에, 미즈카미는 혼란한 바깥 사정에 따라 몸을 움직이면서도 내면으론 차분히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가 드디어 제 곁을 떠났구나 하고 있었다. 모두가 바란 대로, 본인 또한 바랐던 대로.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애도를 멈춘 자신에, 마침내 극복된 상처에, 이에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지 알 수 없는 기분에 잠겨, 생각은 늘 했으나 이름 붙일 생각은 하지 못했던 감정의 이름을 붙이고자 하고 있었다. 뜻대로 이루는 게 쉽지 않을 줄은 늘 알았다. 이뤄지는 것은 언제나 제 뜻하고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질 수 없는 것인지, 가지기 힘든 것인지 분간되지 않는 바람에 닿기 위해 뻗었던 손을 이제는 그만 거둬들여도 괜찮을 듯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진정으로 그를 ‘보내주었다’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려 했지만…….

말도 안 되는 가능성. 다시 말해 헛소리. 허풍. 허언.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

가지지도 못한 채 빼앗겨 버린 4월은 이렇게 쉽게 포기할 리 없지.

그럴 리 없지.

당신을 포기할 수 있을 리가…….

―그렇지만 이것도 실은 거짓말이지.

언제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굴기는.

제일 먼저 포기했던 주제에. 그런 주제에.

“…….”

사이렌 속에서도 미즈카미의 발은 복도에 뿌리내린 것처럼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왜냐면 그가 처음으로 미즈카미를 등진 채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이버―트리온 병사가 쩍 하고 벌린 아가리를 향해서. 그것은 이제 다리에서 벗어나 복도로 완전히 들어서 있었다. 복도에 남은 사람 또한 미즈카미밖에 없었다. 미즈카미 외, 한 명. 전위에 서서 물러서지 않는 이코마를 앞에 세운 미즈카미는 이제 와 제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후회했다. 내려놓지 말 걸 그랬나? 분노도, 자격도.

남은 건 기억뿐이었다. 그 뒤의 전개. 떠올리는 것만으로 일그러지는 얼굴. 차오르는 분노.

“이코 씨. 거기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요.”

“미즈카미.”

“이코 씨.”

누가 이기는지 해 봐요? 악문 이가 으득 갈렸을 때였다. 집채만 한 곰을 연상케 하는 트리온 병사가 거대한 팔을 들어 올렸다. 바로 앞에 서 있는 이코마도, 그에게서 얼마 떨어져 서 있지 않은 미즈카미도 충격을 피할 수 없는 거리에서 미즈카미는 도리어 한 발 앞서 나갔고, 이코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입만을 움직여 소리 내 말했다.

“‘------ ---- -.’”

아.

멍해진 미즈카미가 그를 붙잡기 위해 뻗었던 팔을 멈췄을 때.

트리온 병사의 팔이 미즈카미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순간.

“선공.”

호월.

촤아아아악!

미즈카미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궤적이 뻗어와 떨어지는 그것의 손을 잘라내 떨어뜨렸다.

눈앞에 선, 당신도.

*

떨어지는 모든 것에 소리가 있진 아니했다. 중량을 가진 소리 뒤로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니 중심을 잃고 앞으로 기울어지는 네이버의 육중한 몸체가 미즈카미의 몸을 짓누르지 않도록 쏘아 보낸 아스테로이드였다. 아스테로이드는 트리온 병사를 밀쳐내 그와 거리를 벌렸고, 쿠쾅, 하고 넘어진 병사는 굉음을 내며 그와 부딪친 바닥과 벽 일부를 부서뜨렸다. 쓰러진 자리에선 먼지와 연기가 함께 피어올랐다. 먼지는 벽과 바닥, 연기는 트리온 병사의 것임을 어렵지 않게 구분해 낼 수 있었다.

아직도.

콰당탕탕!

잘린 손이 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소리로 시작된 소리와 소리 사이엔 그 외에도 많은 소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미즈카미는 그 모든 소리를 귀에 담았다. 그에겐 키쿠치하라와 같은 사이드 이펙트가 없었으므로 제 귀로 수집해 낸 소리를 정밀히 구별해내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미즈카미는 딱 하나의 소리만 구별할 줄 알면 되었고, 귀 기울여 집중한다면 그 소리만을 짚어내는 것 역시 불가능하지마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미즈카미가 찾는 소리는 그 안에 없었다. 놓쳐버렸거나 묻혀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것에겐 소리가 없었다. 최초에 미즈카미가 바랐던 대로 그것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스테―로이드!”

한쪽 팔을 잃고도 동작을 멈추지 않는 그것에게 다시금 트리온 탄환이 일직선으로 뻗어가다 바닥에 못을 박듯 수직으로 쏟아져 내렸다. 콰콰콰콰쾅! 포기하지 않고 몸을 일으키려던 네이버―트리온 병사의 움직임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것이 더는 동작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자 아이는 미즈카미의 등 뒤에서 앞으로 몸을 내밀고는 빙글 돌아 그 앞에 섰다. 마지막 탄환을 날렸을 때쯤엔 미즈카미의 바로 등 뒤에 서 있던 아이가 미즈카미의 양어깨를 잡았다. 대뜸 어깨를 잡힌 미즈카미는 눈앞의 아이를 제가 알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떻게 알았냐면 목소리가 제가 아는 이의 것이라서 알았다. 선공을 개시하는 목소리가, 일전에 들었던 목소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서. 단 하루 만났을 뿐인 아이는 한 달 사이에 콩나물 자라듯 쑥 자라지는 못하였고, 그렇기에 그 애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아이 역시 미즈카미를 알아보았던 모양이었다. 다만 아이에겐 미안하게도 미즈카미가 아이의 이름을 기억해 내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이시다? 네! 이시다 마유입니다! 이시다는 키가 작았고 미즈카미는 큰 편이었기에 미즈카미의 어깨에 손을 척 얹기 위해선 팔을 조금 높게 올려야만 하는 이시다였다. 그렇지만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미즈카미를 좌우로 휙휙 돌려보며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큰 부상이 보이지 않는 것에 안심했는지 음! 하는 소리와 함께 손을 내리고는 뒤로 물러섰다. 절도 있는 동작으로 안정감 있게 다리를 벌리고 선 아이는 베테랑보다는 기합이 팍 들어간 신입 대원을 연상케 했지만 기죽고 불안해하는 것보다는 자신감 있게 덤벼드는 쪽이 보호받는 시민으로선 아무래도 나은 편이었다. 이시다는 그들 뒤에 놓인 계단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가시죠. 붕괴 위험이 있어서 대피하셔야 합니다.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충격이 몇 번 있었으니 과연 흔들림이 멎은 지금이라도 이렇게 복도에 서 있는 것이 안전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확실히. 하지만 미즈카미는 이 상황에 조금 생뚱맞은 것을 입에 담는 자신을 제삼자라도 되는 양 느끼며 입을 열었다. 담아낸 것을 내어놓는 목소리는 언뜻 듣기에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아마 실제로도 그럴 것이었다.

“좀 더 길어졌네, 선공.”

미즈카미가 무슨 말을 하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다리고 있던 이시다가 그 말에 곧 반색하며 눈에 반짝임을 띄웠다. 그쵸!? 그리곤 종달새 지저귀듯 빠른 속도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좀 더 길어지고 좀 더 빨라졌어요! 아, 진짜. 저 정말 엄청나게 노력했어요. 이게 진짜 되나 싶었다니까요. 저 정말…….”

그래도 이번엔 유바에게 드디어 ‘잘했다.’ 한마디를 듣는 데 성공했다는 듯했다. 물론 아이가 바라는 건 그보다 더 성대한 축하와 칭찬이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어떤가 싶었다는 듯했다. 이어서 그간의 지난한 노력과 장황한 시행착오를 설명하려던 아이였지만, 다행히 이를 두고보지 않고 중재하는 이가 있어 이야기는 중간에 중단될 수 있었다. 말을 잇다 갑자기 헙, 하고 입을 다물고 이내 어깨를 떨어뜨리는 것이 트리온체 간의 통신으로 혼이라도 난 듯싶었다. 이야기는 대피하면서도 할 수 있으니 가면서 하자고 말할 수도 있긴 하였다. 그래도 아이는 현재 상황에 집중하겠다며 진중한 얼굴이 되어 계단으로 발을 옮겼고…… 그럼에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는지 이내 작은 목소리로 미즈카미에게 속달대기 시작했다. 그때도 그 일면을 엿보긴 했지만 생각보다도 더 수다스러운 아이에 미즈카미가 짜증을 내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지난날 제가 속했던 부대가 어떠했는지는 제가 제일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종알거리길 이어나가던 아이가 마지막 계단에 이르렀을 때쯤 말했다. 그래서요. 언제 되려나 싶긴 하지만요?

“반드시 따라잡을 거예요.”

누구를, 이라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따라잡아서, 교관님이 인정해 주실 만큼 선공을 쓸 수 있게 된다면…….”

넘어설 것이냐고 묻는 건 미즈카미 자신에게 아직 조금 잔인하여 할 수 없었을 때, 아이가 미즈카미를 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유바 교관님께 보여드릴 거예요. 선물로.”

“선물?”

예상치 못한 단어에 마지막 단어를 붙잡고 되물었다. 콧대를 꺾어주겠다던가 그런 게 아니고? 그러나 아이는 한 번 더 강조하여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물이요.

“분명 위안받으실 거니까요. 교관님.”

“…….”

지금도 그러신다는 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긴 해요. 그래서 더 죽어라 노력하는 것도 있고요. 그치만, 표정으로야 드러내시지 않지만 그런 생각 하실 수도 있는 거잖아요. 안 되는 건가, 진짜 안 되는 건가. 그런 생각하신다고 생각하면 슬프니까, 꼭 완성해서 보여드리려고요.

끊어진 걸 제가 이어놨다고. 잃어버리셨던 걸 제가 찾아왔다고.

아이는 생각보다 더 관찰력이 좋았고, 성숙했다.

그러나 미즈카미에겐 그 말만큼 슬픈 말도 없었음이다.

친구이자 호적수였던 이를 잃은 누군가에겐 위안이 될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사실이 미즈카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는 없기 때문에, 다시금 살아있게 된 이름에 미즈카미는 제가 느껴야 할 감정이 슬픔인 것을 이젠 알았다. 이어놓았다는 것은 결국 끊어졌다는 뜻이지. 찾아왔다는 것은 결국 잃어버렸다는 뜻이지. 아, 물길 가운데 물살에 잠긴 기분이 들었다. 물 아래선 살 수 없는 사람은 밀려오는 파도에 덮쳐져 흔적도 없이 영영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거짓말은 이제 그만할 때였다. 착각도, 그만해야 할 때였다.

그것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 확실하게 알게 된 미즈카미에게는 더는 혼란할 이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더는 헷갈릴 무언가도 없었다. 사이렌 속에서 그를 붙잡기 위해 뻗었던 팔을 뻗었을 때였다. 제게 등을 보이고 선 그에게서 미즈카미는 마침내 제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을 들을 수 있었고, 그것으로 끝났다. 복도에 남은 사람은 미즈카미밖에 없었다. 트리온 병사의 팔이 미즈카미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순간 미즈카미는 혼자였다. 혼자 남은 미즈카미의 중얼거림을 들을 사람도 미즈카미 외엔 없었다. 정말 아니구나. 정말로. 당신이.

당신이 아니구나…….

“선배님, 괜찮으세요?”

“잠깐 다리가 풀려서.”

“거의 다 왔어요. 부축해 드릴게요.”

멈춰 서는 일은 용납되지 않았다, 이제. 응. 고마워. 자리에서 일어선 미즈카미는 출입구를 향해 발을 떼었다. 마침내.

9

제3차 미카도시 대규모 침공 이후 4년 만에 침공 생존자를 대상으로 하는 트리온 기관 기능 이상 증상에 관한 대대적인 조사가 시행되었다. 침공 전후의 과도한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추정되는 이 이상 증상의 증상으로는 사이드 이펙트와 유사한 오감 강화, 초기능, 초감각 능력 등의 일시적 발현 등이 보고되었고, 이렇게 발현한 능력은 그 범위가 과하고 조절할 수가 없어 사용자의 일상생활을 지나치게 방해하거나, 빈번하게 발동하되 조건을 특정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임의로 발동하는 특징을 보여 사이드 이펙트로 분류되지 못했다. 곧이어 증상의 직접적인 원인 또한 밝혀질 수 있었다. 증상을 호소하는 이들의 트리온 수치가 단기간에 제멋대로 증감하는 특징을 보인다는 사실이 지속적인 트리온량 측정을 통해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트리온 수치가 일정치 이상일 때 해당 증상을 발현할 확률이 높았으며, 그 때문인지 제3차 대침공 이후 제대한 전직 보더 대원 중에서 특히 높은 발생률을 보였다. 이에 이들에 대한 추적 관찰이 함께 시행되었다.

조사 이후 치료법에 대한 연구가 보더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와 관련된 공고가 보더 대원들에게도 또한 전달되었을 때, 보더의 건너 교관 유바 타쿠마는 일전에 제게 메시지를 보냈던 이에게 그가 보냈던 메시지와 거의 같은 메시지를 전송했다. ‘유바다. 통화 가능한 시간 알려주길 바란다.’ 잠시 후 답장으로 추정되는 메시지 전달음이 울려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로 시선을 내렸다. 통화는 답장에 적힌 시간 중 하나에 이뤄지게 될 것이다. 2시. 3시 45분. 6시 20분. 그중 하나에.

*

보더 제대 후 일반인으로 돌아온 오키 코지는 8월, 지원한 기업으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았고 이듬해 4월의 입사를 내정 받았다. 소식을 전한 직후 그는 미나미사와로부터 졸업식 날에 졸업 축하 기념 현수막을 내걸면 안 되겠냐는 제안을 받아 거절했으나 뜻대로 이루지는 못했다. 이듬해 3월, 현수막 앞에 선 오키는 미나미사와, 미즈카미, 호소이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액자에 꽂혀 그의 책상 위, 한 번씩 시선을 흘리게 되는 자리에 놓여 한 번씩 시선을 받으며, 한 번씩 그들이 누구냐고 물어오는 직장 동료의 질문을 받으며 그 자리를 오랫동안 지켰다. 오키는 그들을 친구라고 소개했다. 그러면 이따금 이와 같은 질문이 이어질 때도 있었다. 들고 있는 사진 속 사람도? 그러면 그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치만 그 사람은 대장이에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A급 정예 부대 우타가와 부대는 최근 원정 부대로 선발되어 약 두 달 후 떠나게 될 원정을 준비하는 기간을 보내고 있었다. 현 우타가와 부대의 유일한 중학생 대원 스즈이 미나토가 합류한 이후론 처음이었다. 키쿠치하라 시로는 그 사실이 여간 탐탁지 않은 듯해 보였지만 이미 결정된 사안에 왈가왈부할 순 없는 노릇이었고, 누구보다 신나서 뛰어다닐 줄 안 스즈이는 이세계로의 원정이 거대한 부담 거리가 되었는지 남은 두 달 내내 안절부절, 좌불안석, 수각황망한 상태로 있을 예정이 되었다. 정말 저 녀석을 데리고 가야 하나? 우타가와 부대는 구 카자마 부대의 전투 스타일을 그대로 이어받은 스텔스 전투가 특기로, 원정에서 제외되기엔 그들을 활용하였을 때 얻는 이점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 떠는 녀석을 어떻게. 저렇게 어리기만 한데 어떻게. 그때,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울리매 문이 열렸다. 문을 등지고 섰던 키쿠치하라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열린 문 앞에 선 카자마 소야를 보았다.

“카자마 씨.”

“원정에 관해 전달 사항이 내려왔는데 아직 전달받지 못한 것 같군.”

“전달 사항이요?”

서둘러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 말과 함께 내민 서류로 키쿠치하라는 눈을 돌렸다. 앗, 안녕하세요. 카자마 씨……. 스즈이의 반쯤 울음 섞인 목소리는 무시했다. 카자마는 현재 B급 상위 카자마 부대의 부대장으로서 A급 예비역인 이들의 흡사 교관과 같은 멘토 역할을 맡고 있었고, 부대로서는 원정 참가 자격을 획득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원정에는 개인으로 참가할 예정이었다. 그러했으므로.

“어태커 간의 연계는 미리 맞춰두지 않으면 까다로우니까.”

카자마 씨? 서류에서 눈을 떼 저를 보는 키쿠치하라에 카자마는 평소와 다름이 없다.

*

호소이 마오리는 보더의 베테랑 오퍼레이터 중 한 명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는 미나미사와 부대의 오퍼레이터를 맡고 있었다. 미나미사와 부대는 가장 최근의 B급 랭크전에서 최종 순위 6위를 달성하여 처음으로 상위에 연속 잔류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럼에도 호소이의 고민은 과거 그가 이코마 부대의 오퍼레이터로서 미나미사와 카이와 함께했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니, 오늘도 그는 혼자 전위로 뛰쳐나가는 그의 대장을 향해 소리치느라 바쁘다.

“혼자 먼저 튀어 나가지 말라니까!”

그러나 이제는 명실상부 에이스 어태커. 호월 사용자 중 꽤 높은 개인 랭크를 갖고 있기도 한지라 그 기세를 잡아 다루기는 더욱 까다로워졌다. 에이, 제가 해낸다고 했잖아요! 과연 그의 선공은 정확하고도 매서운 각도를 그리며 상대의 다리를 순식간에 베어내 버렸다. 자세가 기울어진 틈을 타 그래스호퍼를 타고 재빠르게 접근하면 상대는 도저히, 도무지 손쓸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해냈죠?”

「말이나 못 하면!」

하하!

“그래도 미워하지 않을 거잖아요.”

“……에휴.”

미워할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지끈대는 이마에 손을 올리면서도 입가엔 미소가 올라온다. 에이스를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오퍼레이터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미카도 시립대학 공과대학 트리온 공학 전공 대학원생 사토 아야코는 최근 지도교수를 트리온으로 흔적 없이 암살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을까 같은 생각을 하며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온라인 주문으로 연구실에 박스로 쟁여둔 고카페인 음료를 추가 주문하려던 그는 지난 학기 수업을 통해 가끔 연락하는 사이가 된 미즈카미를 떠올리고는 그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배달료 아끼게 한꺼번에 주문할래? 답장은 그가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을 잊었을 때쯤에 받을 수 있었다. 주문하는 건 좋으나 지금으로부터 일주일간 휴가를 받았기 때문에, 그의 선배가 대신 수령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나쁘지 않았기에 그러자고 다시 답장을 보냈다.

*

올라운더 대원을 꿈꾸는 B급 어태커 이시다 마유는 아직도 0.3초의 벽을 뚫지 못해 고전하고 있다. 더불어 타치카와 교관의 설명도 여전히 도무지 못 알아먹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로그라도 한 번 더 보는 게 나으려나. 벌써 한참 전에 외워버린 이름 네 글자를 검색창에 검색하는 손에 망설임은 없다. 끊어진 걸 제가 이어놨다고, 잃어버리셨던 걸 제가 찾아왔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날을 지금도 소망하고 있다.

*

학창 시절 미즈카미 사토시는 머리가 좋은 학생 중 하나였다.

지금도 그 평가는 부정되지 않았다.

취미로 고전을 암기하고 다닐 만큼 암기력이 우수한 이 학생은 중학생 때까지 장려회에 있었고,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보더에 소속되어 툭하면 오후 수업을 빠져대도 항상 상위권을 놓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그는 머리가 좋은 학생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도 탁월하다고 표현할 만큼 머리가 좋은 소년이었다.

그리고 하루하루에 충실히, 즐겁게 살아가고 있었을 뿐인, 좋아하고 있었을 뿐인 소년. 어느 해의 4월에,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문이 열리고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온 그를 본 순간 소년은 다만 깨달았다. 거짓말같이,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래, 그는 좋아했다. 그의 부대를. 그들의 부대를. 농담하지 말고. 그래. 그를.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은 뒤 소년은 말했다.

“휴강했어요? 일찍 오셨네요. 이코 씨.”

“혼자 있었어? 미즈카미.”

깨달은 뒤로도 아무렇지도 않게 떨어지는 입이었다. 그러니 제 감정을 들여다보다 깨닫게 된 감정이 정말 거짓말 같았다.

정말 손에 넣지 못할 온기였을까.

가져 본 적 없는 4월이었을까.

미즈카미는 보더에서 전투원으로 활약하였으므로 몸을 쓰는 능력도 나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그래도 역시 그 장기는 우수한 두뇌에 있었고 부대를 위한 전략을 세우고 돌발적인 상황에서도 그에 맞춰 유연하게 대처하는 데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다. 그는 가히 그가 속한 부대의 두뇌였다. 미즈카미는 보더에 소속된 이래 부대장을 맡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따라서 그가 보더를 은퇴하는 날까지도 미즈카미 부대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까지 이코마 부대의 슈터로서 활동하다 보더를 제대했다. 이코마 부대가 마지막의 마지막 날 그 이름을 지우는 순간 이코마 대신 임시 부대장을 맡은 건 미즈카미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임시였기 때문에 공식적인 부대장으로 기록되지는 아니했다. 그 사실에 유감 같은 감정을 품은 날도 없었다.

아즈마 부대가 그러했듯 연차가 쌓인 뒤 각기 다른 부대로 헤어져 신진을 육성하는 대원들도 몇 있었고, 후일엔 아즈마가 그러했듯 카자마 역시 자신의 대원들을 독립시킨 후 B급 대원들을 새로이 맡았지만 미즈카미는 그러지 않았다. 이코마 부대의 슈터였던 미즈카미, 스나이퍼였던 오키는 제대를 택했고 시기는 미즈카미가 좀 더 빨랐다. 보더에 남기로 결정한 건 어태커였던 미나미사와, 오퍼레이터였던 호소이였다.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미즈카미와 황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좀처럼 들지 못했던 오키보다는 적극적으로 슬픔을 표현했던 그들이기에 떠난다면 그들이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사람도 제법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남은 건 그들이었고 떠난 건 남은 이들이었다. 당시의 미즈카미에겐 어떤 것도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코마 부대는 미즈카미에게 딱 맞는 부대였고, 그곳에서 미즈카미는 그곳과 그곳에서의 자신에 만족했지만 그뿐만이 아닌, 그뿐으로 그칠 수 있을 리가 없는 자리였고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게 무너졌다.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괜찮아’ 같은 말을 누가 해주었으면 좋았겠지만 먹혀들지도 않을 거짓말이거니와, 모두가 그 말을 듣길 바라였기에 거짓말쟁이가 되길 자처하며 이를 말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 중에는 존재하지 못했다. 이들 외에도.

그들은 흩어졌다. 사실을 말하자면 다신 서로를 보지 않으려 할 줄 알았다. 너무나 큰 상처를 받은 그들이었기에.

그런데, 그 순간엔 읽어내지 못한 미래이지만 그 말 모두가 사실이진 아니했다는 것을 그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런 말 말이다. 이제는 모든 게 무너져서 망가졌다는 말. 다시는 돌이킬 수 없으리라는 짐작. 다시는 서로를 보려 하지 않을 것이며 모두가 그에 관한 화제를 피할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아니했다. 분명 한동안은 그랬을지도 모르나 결국엔 서로를 다시 만나 잃은 줄 안 자리를 영영 잃을 수는 없다고, 끊어진 줄 안 우리를 영영 끊을 수는 없다고. 누군가는 엉엉 울고 누군가는 훌쩍이고, 누군가는 지켜보고, 누군가는 저를 지켜보는 이를 지켜보며 다시는 서로에게 이렇게 잔인하게 굴지 않기로 약속하고 다짐받은 뒤, 다시 헤어졌다. 그것이 벌써 4년은 더 되었던 듯했다.

그 뒤로 종종 만나며 근황을 나누고 지낸 그들이다. 올 6월도 다르지 않았다.

「어디쯤 왔어요?」

“거의.”

까마득한 오르막을 오르는 동안 말동무나 좀 하라며 전화를 걸었더니 흔쾌히 받아준 오키였다. 지난 4월 지금의 직장에 신입 사원으로 입사한 오키는 회사 생활이 아직은 그리 힘들지 않다는 듯했다. 이제 겨우 2개월을 넘겼으니 할 수 있는 소리인지도 몰랐다. 한편 미즈카미는 지금쯤 연구실 냉장고 안에 가득 채워져 있을 고카페인 음료를 떠올렸다. 사이드 이펙트 없이도 맨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자명한 미래는 곧 다가오는 디펜스를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맨몸으로는 맞설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들의 공격에 방어할 방법은 끊임없는 준비, 공부, 연구, 조사, 실험, 검토, 재실험, 재검토…… 제법 많았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고카페인 음료 캔이었다. 더는 커피에 샷 추가로는 버틸 수가 없었다……. 곧 다가올 처참한 위장장애를 예상하면서도 캔을 따는 손을 멈추지 못하는 미즈카미였지만, 등 뒤로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언덕을 오르는 그는 지금 그가 있어야 할 학교, 연구실 제 자리에 앉아 있지 않았다. 지도교수에게는 사정을 말하고 휴가를 받았다. 짧게 요약된 사연에도 흔쾌히 부탁을 들어준 지도교수는 잘 다녀오라며 그에게 기차표를 끊어주기까지 했다. 이렇게 보면 참 좋은 사람이었다. 사람은 참 좋았다. 사람은…….

「아까도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거짓말은 아니었다.

“거의 다 왔어. 진짜로.”

고개를 들면 정말로 끝이었다. 긴 오르막을 따라 끝이 보이지 않게 쌓여 있던 계단의 마지막 단을 딛고 올라섰을 때였다. 미즈카미는 네모난 돌이 가지런히 깔린 하얀 보도 끝에 서 있던 사람과 눈을 마주했다. 때마침 그 사람도 계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사람이 올라오는 소리에 미즈카미임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도 몰랐다. 잠시 말이 멈춘 사이 오키가 곤란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한데 저 점심시간이 끝나서요. 진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어…… 고마워. 다음에 만나면 내가 식사 한 번 살게. 오키.”

이런 일로 무슨 식사냐고, 커피나 한잔 사달라며 웃은 오키의 목소리가 이내 끊겼다. 제 인사도 대신 전해주세요. 그래, 라고 대답하면 통화는 정말로 끝이었다.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넣은 미즈카미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여기서 만나게 될지, 만난다면 어떻게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해 두지 않은 미즈카미는 이내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하길 택했다. 천천히 상체를 들어 올리는데, 그를 길러낸 만큼 그만큼 선하여 제대로 된 거짓말쟁이조차 되지 못한 이의 손을 잡아주었던 이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미즈카미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직접 보는 건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미즈카미 군? 냉증이라도 생긴 것처럼 그날 이후 차갑기만 한 손의 냉증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았다. 염치없이, 아직도 낫지 못한 채 남아있는 손을 허리 뒤로 숨기려다 예의가 아닐 듯하여 간신히 다리 옆에 붙였다. 그러며 대답했다.

“네.”

진은 오늘의 이 만남을 미리 귀띔해 주려고 했던 것일까?

교토에 가기 전 보더 본부에 잠시 들를 일이 있어 방문하였을 때, 미즈카미는 꽤 오랜만에 진 유이치를 만나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를 생각하면 그보다 더 전으로 돌아갔을 때와 가까울 만큼 밝아져 있었고, 사실상 한 번도 그에게 악감정을 가진 적 없는 미즈카미도 흔쾌히 그와 악수하며 간만의 근황을 주고받았다.

‘모레 교토에 간다며?’

‘네.’

‘그렇구나.’

나중에야 안 것이지만, 그러니까 지금에서야 안 것이지만 ‘모레라고 콕 집어 묻는 건 무슨 이유냐’고 묻기 좋은 타이밍이 그때였음을 미즈카미는 앞서 말한 대로 나중에야, 지금에야 알았다. 그러나 상관은 없었다. 정말로. 이제 와 바꿀 수 있는 일정도, 되돌려 없던 일로 만들 수 있는 조우도 아니었고, 솔직히 말해 영원히 피할 수 있는 만남도 아니었다. 언젠가 한 번은 다시 만나 인사를 드려야 하긴 했었다. 오늘인 줄은 알지 못했지만.

자신도 이제 막 도착했다며, 괜찮다면 정돈하는 데 손을 빌릴 수 있겠냐는 그의 어머니의 부탁에 얼른 그를 만류한 미즈카미는 제가 할 테니 쉬고 계시라고 말한 뒤 바로 앞으로 나섰다.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미즈카미는 대신 가방이라도 받아 들게 해달라는 그분에게 미안함을 숨기지 않은 표정으로 메고 온 가방을 맡겨야 했다. 분명 지난 4월에 내려왔을 때 치웠을 텐데도 또 어디선가 내려와 떨어져 있는 지난해의 낙엽을 빗자루로 쓸어 치워버리고, 손두레박에 담은 물을 뿌려 정돈하는 동안 미즈카미는 묵묵히 입을 다문 채 제 할 일을 다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그를 지켜보는 이도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를 지켜보았다. 정리가 모두 끝났을 때였다. 고맙다며 공손히 인사하는 이에게 더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 미즈카미는 그가 먼저 묘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이는 사이 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 조곤조곤한 말투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렸다.

어머니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였다. 미즈카미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던 그는 어머, 하고는 주머니에서 진동을 울리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난처한 기색으로 미즈카미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미즈카미 군. 먼저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에 올 때는 꼭 연락해 줘요. 알았죠? 그 말에 할 수 있는 말은 그러겠다는 말밖에 없어서, 그러겠다는 말을 한 뒤 바쁘실 텐데 저는 신경 쓰지 마시라는 말을 미즈카미가 막 마쳤을 때. 처음 만난 날부터 늘 그러했지만 오늘도 미즈카미를 보며 은은하면서도 어딘가 애달픈 미소를 지은 그가 조용히, 차분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타츠히토가 미즈카미 군을 많이 좋아했어요.”

순간 멈칫했지만 멈춘 티를 크게 내진 않았다. 저도 그러했다며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정말 많이요. 정말 많이 좋아했어요.”

“네, 저도…….”

“정말 많이…….”

눈이 다시금 마주쳤다. 깊이, 수면에서 멈추지 않고 더 깊이.

수심(水心)에서 그와 똑같은 눈과 미즈카미는.

마주친다. 마주치고.

미즈카미는 그가 지금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깨닫는다.

아, 학창 시절 미즈카미 사토시는 머리가 좋은 학생 중 하나였다.

지금도 그 평가는 부정되지 않았다.

…….

아.

미안하다며 사과하고 내려가는 그를 미즈카미는 붙잡지 못했다. 어느 날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움직이면, 나아가면 방향은 그가 내려간 계단과는 반대 방향. 눈앞에는 제가 조금 전까지 모르겠지, 당신은 모르겠지, 하고 소리 없이 생각할 뿐 절대 입 밖으론 내지 않고 참아낸, 그리하여 입 밖으론 내지 않은 소리를 끊임없이 입속으로 중얼거려 들려준 그의 묘가 있었다. 그가 있었다.

거짓말에 익숙하거나 능숙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기에 그런 기대는 걸 수 없었다.

그런 기대는 걸지 않았다.

미즈카미에게도 그 정도 분별은 남아 있었다.

자신 외엔 그의 동기가 될 자가 없고,

그를 움직이게 한 행동 원리는 실로 타당했다고.

착각하지 않을 만큼.

속아넘어가지 않을 만큼.

“……이코 씨.”

과거, 잘린다면 몸통보다는 팔이 더 생존율이 높으리란 판단, 아니, 실은 그런 판단조차 내릴 시간도 없이 찰나에, 본능적으로 미즈카미는 팔을 들어 올려 시야를 막았다. 곧 다가올 처참한 아픔을 예상하면서 눈까지 질끈 감고 말았으나 예상한 아픔은 오지 않았고 그는 다시 눈을 떠야만 했다. 그래, 예상한 아픔은 오지 않았다. 정체를 알고 싶지 않은 소리는 귀에 닿았다. 제 것이어야 할 소리를 가져간 그로 인해 미즈카미는 소리와 함께 뒤따라야 할 고통은 하나 없이 오직 소리만을 그 귀에 담아야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귀를 막고 눈을 감아 그 무엇도 보거나 듣지 않았으면 좋았겠더라는 불손하고 무례한 생각이 머릿속을 오랫동안 떠나지 않아 미즈카미는 줄곧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늘날, 잘린다면 관계보다는, 목숨보다는 연심 따위가 잘려 마땅했으리란 판단 아래. 아니, 실은 그런 판단을 내릴 만큼 가치 있게 존재하지도 못하고 제게 혼자 남은 것이 있었으니, 일그러지는 얼굴 아래 일그러진 감정으로 악문 이가 으득 갈렸다. 미즈카미가 중얼거렸다.

“거짓말쟁이.”

<完>

카테고리
#2차창작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