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카미 군 거짓말도 잘하시네

미즈카미 군 거짓말도 잘하시네 中

월드트리거. 미즈이코

비자림 by 비
2
0
0

4

구 카자마 부대, 현 우타가와 부대의 유일한 중학생 대원 스즈이 미나토는 작전실로 가져온 수학 숙제의 남은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기다 이윽고 긴 한숨을 내쉬며 문제지 위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다. 그러다 벌떡 고개를 쳐들었다. 이따가 저도 가면 안 돼요? 그에 키쿠치하라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본 채로 대꾸했다. 숙제 있다며. 잘하면 그전까지 다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꿈 깨. 시간도 늦을 거야. 중학생은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기나 해. 네……. 시무룩한 아이의 고개가 다시 교과서 속으로 빠져들 듯 그 위로 떨어지지만 사정 봐줄 정도로 친절한 어른은 이 자리에 없었기에 달리 상황을 타파할 방법은 없었다. 우는 소리도 그치고 문제지로 돌아와 간신히 반 장을 풀어 넘겼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리매 문이 열렸다. 들어가도 되나.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부터, 혹은 그 전부터 손에서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문을 돌아본 키쿠치하라에 ‘너무해―!’하고 씨알도 안 먹힐 우는 소리를 다시 한번 내보는 스즈이였지만, 키쿠치하라에겐 역시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참나, 열어도 되냐고도 물어보지 그래요. 툴툴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난 키쿠치하라가 의자에 걸어둔 겉옷을 집어 들었다.

“카자마 씨.”

카자마는 키쿠치하라와의 이러한 문답 자체가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넘겼다. 우타가와와는 오는 길에 만났다. 주차장에서 기다리겠다는군. 그래요? 그 말에 스즈이는 제 사정을 봐줄지도 모르는 어른 한 명을 그대로 잃고 말았다. 그러나 포기하긴 이르다는 생각이 아이를 사로잡은 모양이다. 또는 이게 마지막이란 기회라는 생각이 든 탓이던가. 아무튼, 아이는 한쪽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그러면서도 눈은 질끈 감은 채였다. 왜, 무섭기는 한가 봐?

“저도 가고 싶어요, 회식―!”

어쭈. 기어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스즈이에 키쿠치하라를 제지한 건 의외로 카자마였다. 스즈이. 넵, 카자마 씨! 그러나 그 뒤로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한참을 그러하자, 스즈이는 감았던 눈을 가늘게 뜨며 주변을 힐끔 살폈다. 말은 없었다. 여전히.

“…….”

그러나 말만 없었다고 하였다.

오늘만 세어도 여러 차례 고개를 숙이는 아이겠다.

“잘 다녀오세요…….”

“그래.”

그에 감출 생각도 없이 투덜거리는 키쿠치하라다.

“그렇게 봐줄 필요 없다니까요. 엄살만 늘잖아요, 카자마 씨 때문에.”

“이 정도로 늘 엄살이면 뭘 해도 늘겠지.”

“너무해요…….”

“시끄러워.”

“으앙……!”

그 뒤 이어진 우는 소리는 문을 탁 닫아버린 후에야 겨우 그쳤다. 어휴, 시끄러워. 저건 언제 클는지. 그래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안심되는군. 그 말에 질린 듯이 바라보는 키쿠치하라지만 그에 아랑곳할 카자마도 아니긴 하였다. 카자마 씨가 나이 먹고 물러진 거라니까요. 마치 저는 나이를 안 먹는 것처럼 말하는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뻔뻔하기 그지없기도 하다. 아, 그러고 보니. 들으셨어요? 오늘 시가지에 게이트가 열려서 처리하러 갔다가―.

미즈카미와의 짧은 조우를 듣는 동안 카자마는 묵묵히 이야기에 집중할 뿐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다 듣고 나서야, 그런가. 한마디를 꺼내놨을 뿐이었다. 곧 화제를 돌릴 필요성을 느낀 키쿠치하라는 아주 짧게 그를 곁눈으로 응시하고는, 머리는 여전히 앞을 향해 고정한 채 다른 주제를 꺼내 들었다. 카자마가 새로 맡은 아이들에 관해서였다. 어때요? 걔들은. 그리고 그 말에 작게 미소 짓는 카자마다. 아직 갈 길이 멀지. 다들. 그래도 우리만 한 애들은 없죠?

*

키토라는 보더를 그만두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A급 정예 아라시야마 부대의 에이스 어태커로 활약하고 있다.

*

“미즈카미. 저것 좀 봐.”

떠다니는 구름을 가리키길래 고개를 들어 그걸 바라보는, 한가로운 나날 중의 당신은 꿈에 있는가, 기억에 있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뭔데요?”

“브로콜리 닮지 않았어?”

“그 말 하려고 부른 거예요?”

앞서가는 당신이 어디 있는지는 나도 알고 있다. 당신은 지금 현실에 있다.

미즈카미는 뒤따르던 발을 멈추고 그에게 물었다.

하늘에서는 시선을 내린 뒤에.

“이코 씨.”

당신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어느 날처럼, 반대로 여민 옷깃에 눈길이 가고, 목을 빈틈없이 감싼 흰 깃에 상처 따위 보이지 않는 당신이 거기 서 있다. 보이지 않으면 없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감싸고 감싼 죽음은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 꼭 존재하지 않는 것 같고. 그럼, 그 말은, 보인다면 존재한다는 뜻이 될 수 있을까. 보인다면 여기 있다고도 할 수 있을까. 보이니까. 보이잖아. 여기 있잖아.

“이코 씨. 네이버가 올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날 이후 아무렇지 않게 나를 부르고, 부르고, 또 부르는 당신에 익숙해지기까지 미즈카미에겐 사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진짜 이코 씨예요?’라고 묻길 원하나 차마 아직은 그러지 못하는 미즈카미에게 그―의 대답이 돌아온다.

미즈카미.

“네가 알았으니까 알았지.”

“하…….”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이코 씨.’ 조금만 더 친절하게 굴어주면 안 되는 걸까? ‘조금만 더 친절하게 굴어주면 안 돼요?’ 안 그래도 그는 지금 만사가 힘들고 범사가 버겁고 매사가 거북했다. 그러나 어느 날처럼, 내려간 앞머리가 파득 올라간 어깨 따라 흔들리는 그는 이러한 생각을 전혀 알지 못하겠다는 양 평소처럼, 그처럼 대꾸하고 있기나 한다. 이 정도면 충분히 친절하지 않았어, 나? 미즈카미. 아뇨, 아뇨. 전혀 친절하지 않은데요. 이코 씨. 이제는 정말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미즈카미는. 다음 수도, 그다음에 이어질 다음 수도. 먹칠 된 세상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자신이 보고 싶을 때마다 원 없이 바라볼 수 있던 그―이 이제는 그에게 남아있는 분별까지 모조리 앗아가는 듯하다.

안 돼요.

지금 거리에서 더 가까워져선.

그러면 그 말에 별수 없다는 듯이 수긍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서던 당신이 아닌가. 그리하여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도 묻는 듯한 당신에 지지 않고 ‘그럼요. 계속할 수 있어요.’ 대답했던 나였지 않나. 단념하는 수 외엔 별수가 없다면 미즈카미에게 계속할 수 있는 건 무언가. 단념한 건 오래전인데. 너무나 오래전이라 돌아갈 수 없는데.

*

합동 추모식 이전엔 장례식이 있었다.

미즈카미가 키토라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날도 이날로, 빈소 밖 벽에 기대어 혼자 주저앉아 있는 이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이 미즈카미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미즈카미의 사정 역시 그다지 좋지 못했던 고로 미즈카미가 키토라에게 어떤 위로나 격려가 되는 말을 해주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괜찮아?’라고 물었던 것이 전부였다. 무릎을 세우고 앉아 그 위로 겹쳐 올린 팔 위에 한동안 얼굴을 묻고 있던 키토라도 그 질문에 ‘네’라고 대답했을 뿐이었다. 그 말을 믿든 믿지 않든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을, 있더라도 본인에 의해 정중히 거절되었음을 안 미즈카미는 ‘그래’라고 말한 뒤 조금 떨어진 벽에 기대어 선 뒤 담배 생각을 했다. 이때까지 그는 한 번도 담배를 피워본 적 없었으며 이후로도 그가 흡연자가 되는 일은 없었다. 다만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담배를 무는 것이 비현실 속, 그러니까 TV 속 ‘등장인물’의 모습이기에 저희 역시 그래야 이 현실 같지 않은 현실을 비현실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 탓이었다. 아마 진짜 흡연자인 스와 씨라면 잘 알 것도 같은데. 그를 찾아 나설 생각이 아직은 들지 않은지라 미즈카미는 아무 말 없이 벽에 기대어 시간을 죽였다.

미즈카미는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키토라가 저를 의식하거나 말을 붙여오길 기대하거나 기다리며 그 자리에 서 있지는 아니하였다. 조금도. 그럼에도 그 곁에서, 정확히는 그 장소에서 떠나지 않은 이유로는 키토라가 먼저 선점한 장소가 그 마음에도 제법 들 만큼 고요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그래서 그는 키토라가 제게 말을 걸든 그렇지 않든 정말 상관하지 않았고 다만 먼저 온 자로서 자리를 비켜주길 요구할 때 군소리 없이 따를 생각 정도만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 외에 어떠한 영향이라도 미치겠다는 의지는 부재하였다. 물론 지금 그 마음대로 행동하고 있는 그처럼 키토라 역시 그 마음대로 행동할 자유가 있었으니, 떠나는 인기척을 감지하지 못한 그가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입을 열고 말을 꺼내는 것도 그 자신의 선택이고 자유였다. 그렇다면 그것에 미즈카미가 반응할 이유는 있는가? 없겠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 있는 유일한 청자로 지목되었으니 예의상 무시하지 않는 것이 옳기는 하겠다. 다행히 문장은 평서형이었다. 질문이진 아니했다.

저는 괜찮아요.

그래, 라고 대답했다.

제 안의 불합리한 분노와 싸우고 있을 뿐이에요.

그 말에는 그에게 되물었다. 불합리한 분노?

그것은, ‘괜찮아? 네.’ 그 뒤로 꽤 긴 공백을 두고서 이어진 사유의 사유였다. 미즈카미가 그 말에 고개를 그에게로 돌렸을 때 키토라는 더 이상 고개를 팔 위에 파묻고 있지 않았다. 눈이 마주쳤다. 대답할 말이 여의찮을 때는 되묻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다. 대화를 이어나가는, 그리하여 돌려받은 질문에 키토라는 대답했다.

저는…….

미즈카미는 키토라가 말을 마치고 고개를 다시 숙일 때까지 그를 기다렸다가, 그 뒤에야 그 자리를 떠나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확실히 본인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분노였다. 키토라처럼 올곧고 중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판단할 수도 있는 감정과 감정을 유발한 이유였다. 게다가 그 사실을 다른 사람도 아닌 본인이 가장 먼저 알아차렸으니, 그 불은 틔우지 못하고 태우지도 못하고 그 발에 밟히고 꺼져 사그라들고 말리라. 키토라는 능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틀림없이 그러하리라. 다만 그 정도 근미래야 미즈카미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는 것과 별개로, 그것이 정녕 불합리한 분노냐고는 묻고 싶은 생각은 조금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모든 감정을 통제할 수 있겠는가. 풀어놓으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불합리하다’고 딱 잘라 말하여 쳐내는 것은 자신에게 조금 잔인한 처사이지 않을까. 미즈카미가…… 할 소리는 아닌지도 몰랐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리 다르지도 아니하리다. 장례를 치를 수 있을 만큼은 수습할 수 있었다는 것 또한, 그러지 못한 이들에게는 큰 슬픔 되었으리라. 가장 큰 불합리는 역시 그 점에 있었다. 동등하더라도 동일하지는 못한 슬픔.

그날로부터 상당한 날이 흐른 언젠가 미즈카미는 휴대전화 앨범을 정리하다 오래전 그들의 부탁으로 제가 찍었던 사진들을 발견했다. 이날까지 흐려짐 없이 회상될 줄은 몰랐던 기억, 곧 당시 나눴던 대화도 함께였다. 미즈카미! 우리 사진 좀 찍어 줘. 네, 네. 셋 셀게요. 셋. 둘. ……. 미즈카미? 찍었어? 실은 동영상이었어요. 앗! 거짓말이에요. 아앗!

아라시야마가 함께 찍힌 사진은 후일 키토라를 통해 그의 가족들에게도 전달했다. 키토라는 고맙다는 메시지를 짧게 보내왔고, 다시 답장하기엔 애매한 메시지였기에 미즈카미는 이에 답장하지 않았다. 이후 그가 보더를 제대하니 두 사람이 다시 만나 대화를 나누는 날은 오지 않았다.

*

식사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가자 미즈카미! 하고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래도 이 목소리는 그에게 있어 이치에 맞는 소리였기에, 미즈카미는 칸막이 너머로 고개를 쑥 내밀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네. 메일 확인해라. 너 작년에 건강검진 귀찮다고 건너뛰었다면서? 작년에 안 받은 조교들 올해는 필히 받으라고 과사에서 메일 왔어. 아, 네. 듣기만 해도 귀찮은 일이 하나 더 늘었지만 이번엔 전화가 올지도 몰랐으므로 포기한 미즈카미는 순순히 메일함을 확인했다. 교내 연구실 연구 종사자 대상 건강검진 공지 메일은 수신 메일함 가장 상단에 있었으므로 찾기 어렵지는 아니하였다. 웬만하면 그냥 받아. 어차피 우리는 사무직이라 많이 하지도 않으니까. 과연 유해인자 요소가 포함된 실험실의 경우 검사 항목이 곱절로 더 많은 것 또한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일반 사무실의 검사 항목들은 비교적 조촐한 편이었다. 시력 검사, 청력 검사, 폐 X-Ray, 혈액 검사, 그리고…….

“트리온 검사는 왜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결과 확인할 때마다 이래서 당신은 재능이 없어요! 하는 것 같아서 우울해진다고. 어차피 우리 같은 애들은 이미 다 끝난 거 아냐? 스카우트할 것도 아니면서, 참나.”

“할 수도 있죠.”

“퍽이나 하시겠다.”

“하하.”

보더는 미카도 시립대학과 제휴 및 산학 협력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교내 교직원 및 학생들의 건강 검진에도 상당 부분 관여하고 있었다. 아마 태반은 읽지 않을 약관 및 유의 사항에도 검진 결과가 외부 기관의 연구 자료로 사용될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을 터였다.

“그러고 보면 미즈카미는 예전에 보더에 있었다고 했잖아. 그럼 트리온 수치도 높게 나오겠네? 자칫하면 우리 연구생 보더로 다시 홀랑 뺏기는 거 아냐?”

“언제 적인데요. 지금은 그냥 일반인이에요. 그때도 그다지 많은 편은 아니었어서.”

“그래? 아쉽겠다.”

“그다지요.”

저는 지금이 더 편하고 좋은걸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선배를 마지막으로 칸막이에서 몸을 물리고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할 일이 많은지 오늘따라 딴짓에 더 열중하는 선배의 목소리가 칸막이 너머로 넘어왔다.

“확실히, 저번에 TV 보는데 쬐끄만 애들이 엄청 고생하고 있더라고. 위험해 보이기도 엄청 위험해 보이고……. 어휴, 난 그냥 하던 대로 이대로 만족하며 살아야겠다. 오래 살려면 그게 제일 안전할 것 같아. 안 그래?”

하하…….

그 말이 맞을 거예요. 그 말이 맞을 것이다. 미즈카미는 메일함 창을 뒤로 넘긴 뒤 식사하러 가기 전까지 읽고 있던 리포트를 다시 상단에 띄웠다.


5

불합리한 분노란 개념은 미즈카미 안에 오랫동안, 그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도 더 오래도록 남아 이따금 한 번씩 그 자신의 주의를 끌었다. 합리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정당한 분노와 달리 굴절되거나 왜곡된 분노는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불합리한 분노는 그것이 이치에 맞지 않다는 걸 안 순간 가능한 한 빨리 삼가야 마땅하였다. 분노란 올곧게, 대상을 향해 나아가고 또한 그쳐야만 이런 표현이 괜찮은지는 의문이긴 해도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지난 4년간, 미즈카미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향해 분노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스스로 거리가 먼 성인이 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불행히도, 그가 정당히 분노할 대상이 그 곁에 남아있지 않은 탓이었다. 직접적인 복수 대상은 그 직후 돌격한 어태커에 의해 잘게 썰리고 남은 조각마저 슈터가 쏜 탄환으로 흔적도 없이 분쇄되었다. 미카도시를 침공한 네이버 행성 국가를 증오하며 살아가는 수도 있긴 했지만, 궤도를 따라 도는 국가란 상대를 특정하기도, 추적하기도 어렵게 만들어 그에게 강제적인 기다림, 즉 시간을 요구하였다. 차례가 언제 돌아올지 어떨지도 모르게 만드는 까마득한 시간을. 기다리면서, 그들에게 진정 되갚아주는 날이 오길 바란다면 그날까지 그는 보더에 남아있어야 했다. 미와처럼.

그러나 미즈카미는 그들과 마주하지 않는 길을, 그들과 마주할 기회를 버리는 길을 택했고, 보더를 떠났다. 댈 수 있는 이유야 많았지만 제대 신청서의 사유란에는 ‘이제 더는 의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대신 다른 말을 적어 제출했다. 트리거를 반납하는 날에 이르러선 자신이 분노할 자격도 내려놓았음을 깨달았다. 미즈카미는.

미즈카미는 머리도, 요령도 좋은 청년이었기에 그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전투원이 아닌 다른 직무도 능히 맡아볼 수 있었다. 전투원은 될 수 없었다. 그야 시야 한구석이 상시 방해받고 있는데 어찌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을 외면한다면 가능한 일이기는 하였다. 썩 들어맞는 비유는 아니긴 하나 사이드 이펙트가 항시 발동하여 시야에 창을 하나 더 갖고 있는 느낌이라는 진 유이치는 미래를 보고 싶지 않을 땐 그것을 무시한다고도 했다. 미즈카미도 제 시야에 걸리는 그것을 무시한다면 전투원으로 돌아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미즈카미는 그것을―꼬박 1년이 지난 후에야 인정하긴 했지만 무시하고 싶지 않아 했다. 이유야 간단하고 단순했다. 구태여 언급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미즈카미는 그가 가지지 못한 4월의 거짓말을 떠올린다.

밝힐 생각은 딱히 하지 않았다. 이대로도 좋았으므로. 이대로도 그는 만족했으므로. 거짓말이 아니라 실로 그는 그런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확실히. 모순되게도 더는 바라보지도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도 그는 다시 그것을 바라보고 또 함께했다. 심지어 형태도 같았다. 정체는 다르겠지만.

그래도 그것을 이코 씨라고 부르면서도 이코 씨라고 착각하지 않을 정도의 분별은 갖추고 있었다. 그는 그날 이후로 자신이 항시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스트레스는 온갖 장기를 망가뜨린다. 뇌의 지각도 그 대상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리다.

그러나 과연 그뿐이었을까?

지금까지 그것은 미즈카미가 가지고 있는 기억에서 비롯된 무언가였다. 그러므로 그것을 사람으로 칭할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사람은 아닐 것이었다, 분명히. 사람이 아닌 것이 당연했으니까, 그날 이후로. 지금껏 미즈카미는 그리 생각해 왔다. 내 착각인 줄로 알고 고백한 당신이 실은 진짜 당신이었다는 전개는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동안. 그러나 그 말대로였다면 어땠을까. 사람이라 칭할 수 없어도. 사람은 아닐지라도. 내가 ‘당신’이라 불러 ‘당신’이 된 당신이 아니라. 정말로 존재하는 ‘당신’일 수 있다면. 트리온이란 물질은 워낙 가능성이 무궁하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않은가. 판 위에 놓일 수도 있는 수이지 않은가. 왜냐하면 나는…….

당신이 나를 불렀으면 좋겠다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오직 입 모양만이 내가 읽을 수 있는 말이었지 않나. 유언이었지 않나.

아, 사이렌 소리가 울리는데도, 지금 당장 사람들을 따라 대피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도, 미즈카미의 발은 복도에 뿌리내린 것처럼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왜냐면 그―이 처음으로 그를 등진 채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이버―트리온 병사가 쩍 하고 벌린 아가리를 향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 그렇지. 어태커라면 전위에 서서 그처럼 물러서지 않고 공격할 준비를 해야지. 그렇지만 그 뒤의 전개 역시 미즈카미는 알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코 씨. 거기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요.”

그날로 돌아가면 절대 할 수 없는 말. ‘와야 하잖아요, 내가 불렀으니까.’ 정확히 딱 반대로 소리쳤을 말. ‘내 환상이잖아요. 근데 왜 내 말을 따르지 않아요.’ 도망 다니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아서? 물론 그렇겠지. 그래도 안 돼요. 그러면 안 돼요.

점차 일그러지는 얼굴에 차오르는 것은 미즈카미가 지난날 빠뜨리고 만 어떤 것이다.

“이코 씨.”

후일에 벌어지는 일이다.

*

첫 번째 거짓말.

‘당신에게 화를 내면 나는 지금보다 더 내게 화를 내야 해요.’

화라도 내면 다행이지. 화라도 낸다면 그러려니 하지. 분노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 자신은 무엇이 되나? 무엇이나 될 존재가 되나? 물속에 가라앉히나?

*

미즈카미가 무너지기 전으로 돌아가면 그는 작은 진료실 안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앞에 마찬가지로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의 손에는 그의 신상에 관해 적힌 서류가 들려 있고, 비고란에는 아마 그가 한때 보더 전투원이었다는 문장이 적혀 있을 것이다. 4년 전에 그만두셨다고 하셨는데 그런 것치고 지금도 트리온 수치가 상당하시네요. 아. 네. 보더 기술반 소속 엔지니어라고 했다. 이번에 개량한 트리온 측정기를 테스트할 겸 파견 나왔다나. 미즈카미로선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그사이 새로 영입한 엔지니어인지, 아니면 쭉 근무하고 계셨으나 그간 알지 못했던 분이신 건지 하는 의문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다음 검사자의 서류를 꺼내 드는 그에 미즈카미도 고개 한 번 꾸벅 숙이고 진료실을 나올 뿐. 그뿐일 뿐.

보더를 그만둔 미즈카미는 기억 봉인 조치가 취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많은 것을 알고 제대하였으나 그 대신 비밀 유지 서약서에 서명하는 것으로 사실상 이를 무마할 수 있었다. 미즈카미가 겪은 일이 있기에 그래도 그만두지는 말라고 말리는 이는 좀체 없었다. 사실 미즈카미만 그만두는 것도 아니었기에 바짓자락 붙잡고 가지 말라며 말리기엔 붙잡아야 할 바짓자락이 곳곳에 널려 있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서류를 제출하면 상층부와의 최종 면담이 남아 있었다. 그들도 기억을 지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미즈카미의 면담은 그가 보더를 나간 뒤 받을 수 있는 보상 또는 배상에 관한 안내와 대외비로 취급되는 정보에 관한 입단속, 그 당부로 이루어졌다. 추가적인 설득은 없었다. 미즈카미는 자신이 사유란에 적어둔 이유를 그들 모두가 확인하였음을 알았다. 거기에 거짓말은 적지 않았다.

‘상담을 받아야 할 것 같음.’

사실 그건 모든 보더 대원에 해당하는 사항이기도 했다. 보더에 계속 소속된 채 보더 내 의무반에서 그들이 고용한 전문 상담심리사의 상담을 받는 이들도 적지는 않았다. 현재는 모두가 한 번씩 필수로 상담을 받도록 지침이 내려진 상태이기도 하여, 자신이 적은 사유가 조금 약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과거의 미즈카미는 그 밑에 한 문장을 더 추가했었더랬다. 한 문장일까, 문장이라고 하기 조금 민망할 정도로 짧았지만. ‘심각함.’

상담받을 센터는 알아보았느냐는 질문은 여차하면 보더와 연계된 기관으로 연결해 줄 수도 있다는 의미의 배려가 담겨 있었다. 미즈카미는 보더에 더는 소속되고 싶지 않아 그만두는 것이긴 하지만, 보더와 관련된 모든 것을 지워내거나 도려내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권유를 감사한 마음으로 거절했다. 아니요. 그렇지만 괜찮아요. 그런가? 네. 미즈카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일단은.’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서 병원을 먼저 알아보았다는 말에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인 그들은 이윽고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게 가장 좋다는 말을 끝으로 이에 관해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일리가 있는 말이기에 미즈카미는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의 나날에 행운이 있길 바라며, 보더는 그대가 보여준 그간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는 인사말까지 듣고 나면 절차는 모두 끝났다. 작전실 개인 로커에 있는 짐은 진작에 정리하였으므로 남긴 것도, 남길 것도 없었다. 미즈카미가 이날 이후로 보더 본부에 다시 발을 들이는 날은 4년 뒤, 유바의 권유를 받아 방문한 어느 날이 되었다. 아직은 기억 속 그것보다 짧은, 그러나 언젠가는 정말로 넘어설지도 모르는 아이의 선공을 확인한 날. 대범하게도 저에게 선공을 가한 건 그쪽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후공이 되어 말을 쥔 미즈카미가 말을 내려놓을 곳은 없었다. 어디에도.

*

7월의 직사광선이 작열하는 여름 한낮에 그는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진정 바깥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생각에 잠기느라 아무렇게나 버려둔 시선이 우연히 창밖으로 기울어졌을 뿐으로, 이름을 부르면 돌아볼 정도의 정신은 어느 정도 남겨둔 채였다. 그는 잔잔한 음악이 깔리는 카페에서 제 존재가 흐릿해지도록 기척을 지우고 있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정녕 지워지길 원했다면 오늘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니. 아무튼 투명 인간은 될 수 없었던 그는 그를 찾는 누군가의 눈에 어렵지 않게 발견되었지만 아직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에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가 앉은 자리를 향해 먼저 발을 옮기는 이가 왔기 때문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그사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그를 보는 미즈카미다. 인사처럼 이름을 먼저 부르는 건 다가온 쪽이다.

“미즈카미.”

그에 미즈카미도 그를 부른다. 부르니. 부르는. 부른 이름은.

“이코 씨.”

반소매 옷을 입고 야구모자를 쓴 그의 이마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맞은편 빈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뒤엔 손에 쥔 모자를 부채처럼 쥐고 흔든다. 밖에 덥죠? 엄청. 오다가 일사병으로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아직 7월밖에 안 됐는데.

아직, 7월.

미즈카미가 자취를 시작한 것은 보더에 스카우트되어 학교를 이곳으로 옮긴 이후였다. 부모님은 혼자 괜찮겠냐며 독립하는 당신들의 자녀를 걱정하셨지만, 실상은 혼자가 아니라고 봐야 했기에 미즈카미는 적당히 그들을 안심시키고 미카도시에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물론 그들이 걱정한 것이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자식의 나 홀로 타지 생활뿐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사실 그건 부차적인 문제이기도 하였다. 진짜 문제는 중학교 때까지 장기만 두던 애가 이제부터는 네이버란 괴물들과 맞서 싸우게 된다는 점에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들은 미카도시처럼 네이버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보지도 않은 지역 거주민이었으므로, 아이의 부모를 설득하는 역을 맡은 보더의 스카우트들은 상당히 적극적으로 저희를 홍보하고 의의를 강조하며, 당연하지만 보더에 소속되어 누릴 수 있는 복지도 빼놓지 않고 설명해야만 했다. 어쩌다 보니 이들을 집까지 불러온 미즈카미가 적극적으로 뭔가를 할 필요는 없었다. 실제로도 뭔가를 하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네 뜻은 어떠니?’라고 물어오는 부모의 질문에 흠, 하고 목을 울린 뒤 대답하기만 하면 되었다. ‘무엇보다 사토시, 네 뜻이 가장 중요하니까.’ 그에 뭐라 대답했냐면, ‘저는.’

그로부터 수년이 흐른 지금도 보더에 관한 그의 생각이나 감상은 그때와 별다르지 않으니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지금까지는 그들이 걱정할 일이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큰일이 여럿 벌어지는 와중에서도 미즈카미는 비교적 트라우마 없이, 일상을 영유할 수 있었다. 너머에 있는 ‘미래’도 바라볼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미카도시에서 졸업한 그는 이듬해 미카도시 시립대학에 진학했다. 트리온 연구를 진행하기에는 보더 본부가 설립된 미카도시만 한 곳이 없기에 트리온 연구 및 관련 학과로 이름을 알린 미카도 시립대학은 보더 대원 특별 전형을 유치하고 있었다. 미즈카미는 특별 전형 없이도 그가 원하는 대학 어디든 수월히 붙을 성적을 받았지만, 대학에 진학하는 다른 대원들과 같이 시립대학을 진학할 학교로 택했다. 이유를 묻는 부모님, 친구들에겐 짤막하게 대답했다. 언젠가처럼. ‘그냥. 거기로 가고 싶어서.’

보더에 입대했을 때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 뜻은 뭐니?’라는 질문에 무어라 대답했냐면. ‘해보고 싶어요.’

그에 후회는 없었다. 미즈카미는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니 익숙함에 안주하기 위하여 발전의 기회를 내다 버린 게 아니냐는 말은 제법 곤란하였다. 그는 정말로 하루를 충실히, 즐겁게 살아가고 있었다. 좋아하는 하루를. 지나간 4월에 들여다보아 알게 된 감정과 함께.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함께 있고 싶어서요.’

턱을 괴었던 손은 내리고 시선은 맞은편에 고정한다. 몸을 바로 하고 의자를 끌어당겨 앉는다. 보고 싶을 때마다 원 없이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니 오늘의 해가 질 때까지의 시간도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먼저 주문한, 여름 특선으로 새로 출시된 파르페를 기다리면서, 이참에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아도 좋으리다. 하고 싶은 말을 해도 좋으리다. 이코 씨. 있잖아, 미즈카미. 그런데 당신이 먼저 입을 열어 그 기회를 먼저 내어주기로 하였다. 상관은 없었다. 아무래도 좋을 것이기에. 먼저 말하세요. 그에 테이블 위에 한쪽 팔을 올리고 비스듬히 앉은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런 적은 없었어.

“…….”

한 번도.

………………………………………………………………………………………….

……………… …………! …………………………………………………?

……………… …………………………! ……………… ………

…………………… ………!? …………… …………

………………………? …………………

………………….

……….

*

아.

6

학창 시절 미즈카미 사토시는 머리가 좋은 학생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도 탁월하다고 표현할 만큼 머리가 좋은 소년이었다. 취미로 고전을 암기하고 다닐 만큼 암기력이 우수했고, 장려회에서 프로 기사 등단을 준비할 만큼 수를 읽는 능력 또한 뛰어났으니, 그런 그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이런 자신 따위 그 역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채로 4월의 봄을 보내고, 또 보내고. 그렇게 7월이야. 벌써. 미즈카미에겐 그때의 봄날보다도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는 7월. 반소매 옷을 입고 야구모자를 쓴 건 그 자신이다. 빈 의자에 내려앉은 뒤 손에 쥔 모자를 부채처럼 쥐고 흔든 건. 아니. 모자는 쓰지 않았어. 모자는 쓰지 않았다. 그러니 손에는 아무것도 쥐여 있지 않았다. 잡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밖에 덥죠? 엄청. 오다가 일사병으로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아직 7월밖에 안 됐는데. 아직, 7월밖에. 아직, 아직이라니. 웃기는 소리. 벌써겠지. 벌써 4년이 지난 거겠지. 벌써 4년? 아니, 역시 아직이다. 아직 4년밖에 되지 않았다. 4년밖에 되지 않았어.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지난 4년. 가질 수 있는 것은 4월에 거짓말 같이 잃어버린. 거짓말 같이 사라져 버린. 거짓말뿐인. 거짓말 같은.

거짓말이야.

그건 거짓말이야.

제3차 대침공 이후 일선에 섰던 많은 보더가 제대했다. 미즈카미는 여전히 미카도시에 머물러 있었지만, 미즈카미가 제대한 시점도 이와 같았다. 보더에서 전투원으로 활약하였으므로 몸을 쓰는 능력도 나쁘지 않았던 미즈카미였지만, 그 장기가 문제를 일으켰을 땐 그로서도 별수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에 유감 같은 감정을 품은 날도 없었다. 미즈카미는. 어떤 말이 하고 싶든 속에서 소리 없이 생각할 뿐 절대 입 밖으론 내지 않을 만큼의 자제력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쉽게 입 밖으로 낼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니기도 했고, 그에게 입을 열라 요구할 수 있는 이도 곁에 없었다. 권리는 모두 미즈카미에게 있었으니 미즈카미는 그런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할 자신이 있었다. 실로 그러했다. 미즈카미 사토시는 부대를 위한 전략을 세우고 돌발적인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사용했던 자신의 능력을 자신을 위해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거기까지기도 하였다. 두 번째 거짓말은 미나미사와 앞에서였다.

‘괜찮아요?’라고 묻는 그에게 미즈카미는 대답했다.

“괜찮아.”

코를 찌르는. 평생토록 익숙해지지도 무뎌지지도 못할 쇳내로도 마비되지 않은 후각이 인간 뇌의 잘못된 지각을 건드린 게 분명하다. 트리온 기관의 농간일 수도 있겠다만 원인이 무엇이든 뇌를 찌르고 눈을 찌른 것이 이제는 코를 찔렀다. 미즈카미는 눈앞에 앉아있는 그에게서 이제 냄새까지 맡아낼 수 있었다. 냄새는 처음이었다. 아무리 그것이라도 후각까지 재현해 내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날 이후 처음으로 맡은 냄새에 미즈카미는 제 키를 넘는 해일이 머리 위로 천장을 세웠음을 깨달았다. 그날 그가 뒤집어쓴 그것이, 그것의 냄새가 쏟아져 내린다.

머리 위로.

“아.”

“미즈카미, 괜찮아?”

미즈카미는 천천히, 소리가 나지 않도록 몰아쉰 숨을 다시 내쉰 뒤 고개를 들었다. 사토가 그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테이블에 바짝 붙어 서 있었을 뿐 자리에 앉지는 아니했다. 자리에는 여전히 당신이 앉아 있었다.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미즈카미에게 괜찮냐고 물어본 것은 사토가 아닌 그였다.

“미즈카미, 괜찮아?”

이번에야말로 사토가 물었다. 일전에 미즈카미는 사토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트라우마가 없다는 건 좋은 거야. 정말로. 그런 말을. 미즈카미는 대답했다. 사토에게.

“괜찮아.”

패닉에 빠진 게 우습게도, 그런 당신에 ‘또’ 익숙해지기까지 미즈카미에겐 사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후각은 쉽게 피로해지는 감각이다. 다음엔 사흘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다음에?

“…….”

미즈카미는 깨닫는다. 당신은 점점 형태를 입어가고 있다. 사람처럼.

이제는 그것을 그―라고도 부르지 않는다. 미즈카미가 빠뜨린 어떤 사실.

*

거기 서 있어요. 이쪽으로 오지 말아요.

오지 말아야 하잖아요. 부르지 않았으니까.

*

내 말 좀 따라줘요. 제발.

*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아이가 바짝 다가와 붙어 있었다. 뭐 보세요? 우왓, 얀마, 이시다! 이거 네 거 아냐! 헉. 그 말에 펄쩍 물러서며 기겁하는 아이는 지금 트리온체 및 트리거 조정과 시제품 확인을 위해 엔지니어실에 와 있었다. 겸사겸사 트리온 측정도 했다. 한창 성장기인 덕도 있겠지만 트리온량이 이전보다 대폭 상승한 아이는 훈련을 거듭한 보람이 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들뜬 기분으로 저지른 실수에 몹시 당황해했지만 곧 표정을 바꿨다. 팔짱도 끼고, 당당히 다리를 벌리고 섰다.

“절 옆에 세워 두고 들여다보니 당연히 제 건 줄 알았죠!”

“뻔뻔하구먼!”

“그치만 잘못했습니다! 훔쳐봐서 죄송해요!”

그리곤 그대로 허리를 90도로 굽혀 사과했다. 됐어. 뭘 그렇게까지. 도리어 이쪽이 떨떠름해지도록 만드는 전략이 제법 빛났다. 알고는 있지만 당할 수밖에 없는 수법이기도 했다. 이러니저러니 아직 아이기도 하니, 남의 개인정보니까 얼른 잊기나 해. 네! 가볍게 타박한 후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이름 같이 중요한 개인 정보는 진작에 일련번호로 대체하여 표기했기에 신상을 특정할 만큼 알아볼 수 있는 건 거의 없었을 것이다. 아이를 크게 꾸짖기엔 그 말대로 부주의하게 서류를 확인한 자신 탓도 있었다. 멋쩍어하며 뒤통수를 긁적이고는 돌아가는 아이를 배웅했다. 다 끝났으면 얼른 가 봐.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으니까. 네…… 근데 뭐가 잘 안 풀려요? 요게, 얼른 안 가? 그래도 아이의 유도에 걸려들 만큼 얕봐도 될 어른은 아니었다. 문이 닫히자 금세 조용해진 엔지니어실이었다. 그 안을 가득 채우는 것은 엔지니어의 한숨이었다.

보더에 입사한 후 처음으로 주도권을 잡아 진행한 프로젝트였다. 햇수로 치면 2년째. 큰 문제 없이 흘러가고 있는 프로젝트지만 해를 넘길수록 이를 담당하는 엔지니어의 골머리는 천천히 썩어가고 있었다. 모니터 화면에는 포물선을 그리는 그래프가 여럿 띄워져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일전의 건강 검진을 통해 수집한 시민의 트리온 수치를 나타내고 있었다. 측정에 오류는 없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연구실과 집만을 오가는 인생을 사는 이 개발자에게 초조함을 안기고 있었다. 외근은 사양인데. 사람 대할 때마다 끌어다 쓰는 사회성 가면도 이젠 너덜너덜했다. 그는 커다란 듀얼 모니터 화면에 오류와, 오류로 판단될 정도는 아니나 이상치에 근접했던, 경계에 선 이들의 측정 결과도 함께 띄웠다. 그리곤 인쇄기에서 뽑아낸 한 무더기의 서류를 책상 위에 털썩 내려놓았다. 지금부터 이들의 연관성을 찾아내어야 한다. 어지간한 건 전부 자동화가 되어 있었지만 가끔은 눈으로 확인하는 게 더 빠를 때도 있었다.

“해보자고.”

그렇게 서류와 모니터 화면을 번갈아 확인하길 수십 분. 담배라도 한 대 피워야겠다는 생각이 든 그는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디스크 방지를 위한 스트레칭을 하기 위해 일어났다면 좀 더 행복했을 것 같았다. 물론 일어난 김에 스트레칭도 하긴 해야 했지만, 그보다는 입맛이 썼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입은 담배를 또 찾고 말이지. 금연과 먼 인생을 사는 그는 앞으로도 제 신세가 흡연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란 생각을 했다. 쉽게 끊어낼 수 있다면 중독이 아니었다. 보안을 위해 화면을 잠그기 전, 엔지니어는 마지막으로 제가 그린 도표를 한 번 더 확인한 후 모니터를 껐다. 심란한 기분은 여간해선 가시지 않을 듯했다.

측정에는 변수도, 오류도 없었다고 가정한다. 수치를 크게 뒤흔들만한 외란은 없었다고 한다면 한 가지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오류를 일으키고 있는 건 사람이라고. 결국 사람이란 결론만이 내려진다.

*

극도의 스트레스는 신체 장기를 망가뜨린다.

트리온 기관 역시 결국 장기 중 하나에 불과하다.

*

아. 코피. 헉, 여기 휴지. 미즈카미는 칸막이 너머로 넘어온 휴지를 한 손으로 받으며 다른 손으로 코를 감아쥐었다. 고맙습니다. 뭘. 휴지와 함께 넘어온 목소리는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운 것처럼 피로가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었다. 미즈카미. 지금 며칠째 철야 중이지? 저…… 사흘 됐나. 그럼 슬슬 한 번 자 두는 게 좋아. 아니면 진짜 골로 간다. 얼굴도 보이지 않은 채 손만 칸막이 너머로 휘적거리는 선배의 손이 소파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이렇게 표현하면 좀 우습긴 하지만 꽤 유혹적인 손놀림이었다. 뭐…… 그럴까요. 마침 급한 일은 끝냈을 때였다. 사흘 동안 작성한 코드를 저장하고, 프로그램 내 합성 버튼을 누른 미즈카미는 코피가 대충 멎은 듯하자 삐꺽거리는 몸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세 시간 만이었다. 목각인형처럼 뚝딱거리며 칸막이 사이로 난 복도를 통과하는 사이, 슬쩍 내려다본 선배의 책상엔 그와 마찬가지로 고카페인 음료 캔들이 찌그러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그래도 과제 마감이 곧이었다. 조금만 버티면 쉴 수 있었다. 물론 얻을 수 있는 건 잠깐의 휴식일 뿐 숨만 돌리고 숨 다 돌렸다 싶으면 바로 다음 일에 착수해야 하긴 하지만…… 중간 휴식이 있는 게 어디냐 싶었다. 사실상 침대처럼 쓰이는 낡은 가죽 소파 앞에 선 미즈카미는 구겨진 담요를 집어 들어 베개처럼 접은 뒤 슬리퍼를 벗고 풀썩 누웠다. 휴대전화에 알람으로 맞춰 둔 시각은 15분 후였다. 그 정도면 프로그램은 코드에 오류가 없다는 가정하에 무난히 출력 결과를 뱉어놓을 것이고, 당장의 피로도 조금쯤 해소할 수 있었다. 해소보다는 무마에 가까울지라도. 한시적인 효과일지라도 그만하면 충분했다.

미즈카미는 조금 전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했었다.

그가 잠을 자지 못한 시간은 실제로 그 두 배, 일주일에 달했다. 수개월 동안 잠잠했던 불면증이 부활했기 때문이었다. 일전에 받아 둔 수면제 약통이 텅 빈 지도 일주일째나 보충하러 갈 시간을 내지 못했더니 금세 이 꼴이 되었다. 어차피 잠도 못 자는데 누워 뭐하나, 그 시간에 한 줄이라도 더 쓰자, 하고 컴퓨터 앞에 앉으니 진도는 조금 더 뺄 수 있었지만 그 대신 허리와 목이 경고처럼 비명을 뱉어냈다. 그렇지만 별수 있으랴. 조금만 버티면 되었다. 조금만 더.

미즈카미 사토시가 최근 잠을 이루지 못한 이유엔 당연히 이코마 타츠히토가 얽혀 있다.

눈은 감아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그 곁에 있을 그를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숨만 내쉬면 되기 때문이었다. 코로, 그럼 그가 곁에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일상에서 그와 착각할 만큼의 농도를 가진 냄새를 아직은 맡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미즈카미는 최근 자신이 분별을 잃어가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얼마 전 제대로 꿈과 현실을 혼동한 이래 그가 지켜온 선이 뭉개졌음을 그는 알았다. 지금까지, 그러니까 그전까지 그는 단 한 번도 현실과 꿈을 혼동한 적이 없었음에도 그랬다. 현실은 언제나 현실이었고 꿈은 꿈이었다. 비록 그 현실에서 환시, 환청, 이제는 환후까지 느끼는 미즈카미였지만 기반이 된 세상은, 제가 지금 둘러보고 존재하는 세상이 현실인지 꿈인지는 언제든 간파할 수 있었던 미즈카미였는데. 지금은 그것이 퍽 곤란했다. 그러니 어느 때든 신중하게 언행을 골라야 하는 피로가 그의 머리 위로 안수하듯 내려와 가중되어 있었다. 아, 이대로 가다간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 일전, 유바에게 했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급한 일이 마무리되면 상담을 다시 예약하는 게 좋을 듯했다. 병원도. 미즈카미는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방치하는 식으로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 역시도 가능하다면 이 끝나지 않는 ‘애도’를 멈추고 자신이 받은 상처를 ‘극복’하길 원했다. 그것은 모두가 바라는 것이었고, 미즈카미 본인도 바라는 것이었다. 아마 당신도 그걸 바랄 사람이란 걸 미즈카미는 알았다. 다만 뜻대로 이루는 게 쉽지 않을 따름이다. 이뤄지는 것은 언제나 제 뜻하고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다. 한눈에 봐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 손을 뻗어 닿기란 쉽지 않았다. 가질 수 없는 것인지, 가능하지만 힘든 것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는다.

가지지도 못한 채 빼앗겨 버린 4월은 이토록 분명하건만…….

극도의 피로 속 미즈카미는 최대 15분밖에 되지 않을 잠에 까무룩 잠겨 들었다.

덕분이었다.

*

당신은 차분히 앞머리를 내리고 눈을 감고 있다. 나의 자각몽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많지 않으니 바라는 것은 결국 그뿐이고 당신뿐일진대, 그 바람마저 이루어지지 않은 꿈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이것이 꿈인 줄을 알아 일생이 허무하였다. 살아있어요. 살아있기만 하면 돼요. 당신의 이름대로. 정말 그뿐인데, 꿈속인데 그게 무어 어렵다고 코 고는 소리 하나 들려주지 않는다니.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을 이름으로 삼지 않았나. 당신에게 부족할 것을 이름으로 받지 않았나.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가족들을 앞에 두고도, 당신을 길러낸 만큼 당신만큼 선한 그들 앞에서도 감은 눈을 좀처럼 뜨지 않는다. 당신처럼 시간 감각이 날카로운 자는 찰나도 알아차리고도 남는 걸 내가 아는데. 짧지 않은 시간을 기다려도 당신은 묵묵부답이다. 나는 그런 당신이.

당신이…….

지난 4년간, 미즈카미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향해 분노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도 그것만으론 성인이 될 수 없었음이다. 불행히도 그 곁에 남아있지 않은 대상에게 밀어 넣고 미뤄놓은 분노는 정당했음이다. 직접적인 복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네이버 개체는 그 직후 돌격한 카자마 부대의 공격으로 썰려 나갔다. 남은 조각은 나스 부대의 슈터이자 대장, 나스가 쏜 탄환으로 흔적도 없이 분쇄되었다. 미카도시를 침공한 네이버 행성 국가는 궤도를 따라 돌지 않는 국가로 추후 밝혀졌다. 상대를 특정하는 것까진 성공했지만, 추적은 어려웠다. 어떻게도 손쓸 수 없는 강제적인 기다림, 시간만이 그들 앞에 남겨졌다. 그들에게 남겨진 전부였다. 그게.

그들 곁을 영영 떠난 이들과 함께 남겨진 전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영영 떠났기에 도리어 이곳에 남게 되었다.

영원히.

‘미즈카미.’

“이코 씨.”

현실에서도 나를 부르게 된 당신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조용할까?

지난날 나를 부르지 못하게 막은 내가, 당신이 나를 불렀으면 좋겠다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내가. 오직 입 모양만으로 당신의 말을 읽어내렸던 내가, 실은 당신의 목소리를 듣길 원하고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일까? 꼬박 1년이 지난 후에야 인정하긴 했지만 실은 한 번도 무시하고 싶지 않았던 그 형상처럼. 사람처럼. 사람의 형태를 입은 진짜 사람이 되길 바랐던 걸까?

그렇다면 그것은 미즈카미가 가지고 있는 기억에서 비롯된 무언가다.

카테고리
#2차창작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