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 승전파티

요정대모의 축복, 맹세파기자 티플링에게

한밤이었다. 술냄새와 음식냄새, 꺼져가는 장작의 연기 냄새가 희미하게 야영지를 감돌았다. 걱정이 태산같은 사람들도 술냄새에 힘을 얻어 잠에 취한다. 제블로어 역시 그 중 한사람이었다.

앞으로 발더스게이트에 향하는 여정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과연 앞으로도 자신이 이들을 잘 이끌 수 있을까? 이번일 같은 행운이 계속 따라줄까?

심란한 고민은 얕은 잠으로 이끈다. 깨어있는지, 자고있는지 스스로 구분을 못하는 상황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제블로어는 퍼뜩 눈을 떴다.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단검에 손을 올린다.

“어머, 그러면 안되지.”

여자 목소리였다. 제블로어가 아는 소리다. 위협을 위해 내지른 단검이 기이한 막대에 막혀 허공에서 떨었다. 미미한 미소만이 희끄무레한 달빛 아래 선명하게 보였다. 확신 없이, 제블로어가 물었다.

“아이든..?”

“너는 착한 아이야.”

답도 없이, 새로운 문장이 들려왔다. 제블로어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어쩌면 아이든이 제어해줄 어른 없이 술에 손을 대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드루이드들이 내어준 술 중 일부는 아주 달콤하고, 또 아주 독했다..

“너처럼 착하고 상냥한 아이는 자주 보기가 어렵지.”

그 헛소리에 제블로어는 완전히 잠에서 깼다. 가물가물하던 눈을 비비자,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그제야 사물을 분간한다. 눈 앞의 인간은 아이든이 맞았다. 얼굴만큼은 그랬다.

“…자네, 누구인가?”

작은 소녀가 그의 침낭 앞에 앉아있다. 진주처럼 희고 보드라운 살결, 잎사귀 모양의 보석을 모아 꽃잎처럼 만들어놓은 왕관, 투명하게 나부끼는 베일.. 대관절 모험가들이 입을 복장이 아니었거니, 잠깐이나마 마주한 아이든이나 노만의 취향과도 백광년이상은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제외하고도 신경쓰이는 것은, 아이든 기더르의 이상하게 뾰족한 귀였다. 이 애는 인간이 아니던가? 그제서야 하얀 드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

제블로어의 뇌가 이해하길 거부했다. 뭐…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다. 당연히 아이든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성격으로 알 수 있는 예상 범위라는 것이 있다. 활동적인 걸 좋아하니 바지를 입고, 실용성을 중시하니 하얀색을 꺼릴 것이다. 이런, 아주 상식적인 수준의 예상들.

“우후후.”

그 모든 걸 박살내버린 저 새하얀 드레스는 무엇인가? 머리에 뒤집어쓴 하얀 베일은? 분홍색으로 반짝이는 눈동자와 머리카락은?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투명한 보석왕관은?

저 요상한 웃음소리와, 등에 돋아난 날개는?

“날개? 자네 인간이 아니었나?”

“나는 인간이 아니란다. 한때는 그랬지만, 이제는 먼 과거지..”

아득하게 중얼거린 소녀는 가만 제블로어를 바라본다. 분홍색 눈동자는 선명했고, 그리하여 지독히 불길했다. 문득, 소녀가 꽃을 한송이 건넨다. 짙고 짙은 분홍색이었다.

“착한 아이에겐 상을 주어야 마땅해. 내가 주는 선물이란다. 널 지켜줄 거야.”

그 꽃은 빛이 났다. 이상할 정도로 반짝였고, 아롱거리며 흔들렸다. 짙은 분홍색은 화려하였으나 제블로어는 왜인지 이것이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자네..”

“후후.”

다시 이상하게 웃은 소녀는 제블로어의 뺨을 잡고 살살 쓸어준다. 마치착한 아이에게 상을 주듯. 곧이어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이 날아온다.

“???????????????”

“좋은 꿈 꾸렴. 내가 네 곁에 있는 한, 악몽은 없을 거란다.”

.

.

.

“-개꿈!”

“???”

물을 길어와 전날 밤의 더러운 흔적들을 치우고 있던 아이든이, 뭔 개소리냐는 눈으로 제블로어를 쳐다보았다.

“숙취 심해요?”

“아, 아니, 어제 이상한 꿈을 꾸어서 그렇다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

아이든은 그 말을 허투루 넘기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제블로어는 알아야 했다. 소녀는 차분히 물동이를 내려놓고, 한바가지를 떠 제블로어에게 건넸다.

“일단 정신부터 차리시죠.”

“아, 고맙네.. 추태를 보이는군.”

“뭐.. 추태까지야…”

어젯밤 헛짓거리를 하던 티플링들과, 또 제 동료들을 기억한 아이든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어느 한놈은 개가 되었는데 말입니다, 제블로어. 당신은 점잖게 즐기다 갔잖소.

“그래서, 그 개꿈이라는 건?”

“으풉.”

“…….”

아이든은 고저없는 얼굴로 뺨에 튄 물을 닦았다. 제블로어가 화들짝 놀라 바가지를 대충 내려놓았다.

“이거 미안하네! 아니, 내 실수야. 잠시만 닦을걸..”

“어차피 여기 천들은 다 술쩐내밖에 안 나요.”

여상히 뺨을 닦아낸 뒤, 찝찝한 목소리로 아이든이 대답했다. 제 목을 한번 긁으며 소녀는 묻는다.

“어지간히 개꿈이었나 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상상도 못한 꿈이었네. 자네가 꿈에, 분홍 머리가 되서 나왔더군.”

“오….”

아이든이 다시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그거 불길하게 들리는데.

“혹시 제가 무슨 요술지팡이 들고 있었어요?”

“요술 지팡이?”

“끝에 별달린 막대기요.”

“…잠시만, 기억을 좀 떠올려 보겠네.”

제블로어는 놀란 마음을 다스리며 눈을 감았다. 어젯밤 꿈은 아주 이상하고, 기묘했고, 또 너무나 강렬한 이미지였다. 분명 단검을 막은 막대기가 있기도 했지…

“맞네, 끝에 분홍색 별과 리본이 달린 막대를 들고 있었어. 은색-“

“은색이었죠. 날개도, 베일도, 왕관도.”

“??????”

제블로어가 두 눈을 땡그랗게 떴다. 무슨 소리인가? 그거 꿈이 아니었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제블로어를 보고 얼굴이 다소 창백해진 아이든이 다급하게 변명했다.

“그거 저 아닙니다! 제가 아니라, 제 후원자에요!”

“…..아.”

그제야 제블로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오밤중에 드레스에 왕관 쓴게 자네가 아니었다는 말이로군! 다행일세! 뭐가 다행인지 둘 중 아무도 몰랐지만 말이다. 그런 제블로어를 보며 아이든은 느리게 설명했다.

“그건 제 후원자 중 하나일 겁니다. 당신이 마음에 들었나 본데요.. 계속 신호를 주긴 했지만, 그 녀석이 제 몸을 빌린 건 처음있는 일인데.”

“몸을 빌리다니, 어떤 계약을 했길래 그게 가능한가? 그보다 자네가 워락인지도 몰랐는데..”

제블로어가 중얼거렸다. 하기사 아이든은 워락이라기엔 보다, 파이터에 가깝지 않았던가? 굳이 따지면 몽크라던지, 바바리안이라던지. 하여간 위브를 다루는 타입은 아니었다…

“흠, 그게. 제 계약 방식은 상당히 독특해서요. 엄밀히 말하면, 제가 후원자고 그 녀석들이 피후견인인지라.”

“...자네가?”

제블로어는 귀를 의심했다. 보통 아이가 아닌 줄은 알았지만, 알면 알수록 자신이 대체 무슨 행운을 만난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은 보통 힘을 내주기보다 힘을 갈구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망할 녀석이 당신께 무슨 헛짓거리를 했나요? 그 인간이 친 사고는 대게 제가 수습할 수 있습니다.”

“어… 별 일은 없었네. 일단 내게 꽃을 한송이 줬었는데..”

“꽃이요?!?”

아이든이 놀라 소리를 쳤다. 흠칫 놀란 제블로어가 그 꽃을 찾아 보여주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분명 침낭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꼬리에 으깨지거나 했더라도 잎사귀 정도는..

“아, 아니. 거기 없을 겁니다. 그건 물리적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손 좀 주시죠.”

차분한 목소리가 제블로어의 행동에 제동을 걸었다. 상반신을 가까이 내밀며 정중하게 손을 내미는 아이든의 모습에, 제블로어는 머뭇거리다 제 손을 내밀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자, 숨을 한번 들이쉬고, 내쉬고. 그 호흡 유지하세요. 네, 옳지..”

소녀의 작은 손이 제블로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단단하고 근력이 강했다. 손바닥은 물론이요, 손등이 스쳤을 때 희미하게 느껴진 굳은살에서 그 삶의 고난함을 짐작케 했다.

맥을 짚는 손, 무언가를 찾아보려는 듯. 수심 어린 남색 눈동자는 그저 고즈넉하다.

“축복받으셨어요, 제블로어.”

“..그게 무슨 의미인가?”

“말 그대롭니다. 제 후견자.. 요정 대모에 의해 축복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이 축복이 흐려지기 전까지, 당신은 평생 안온한 꿈을 꿀 것이며, 당신이 베어야할 적에게 상처입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뺨과 갑옷에 피가 묻을 일은 없겠지요.”

“내게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의미인가?”

“어지간해서는요. 다만..”

아이든은 잠시 말하기를 주저했다. 흐려진 목소리에 고민이 담겨있었다.

“당신의 본질을 흐리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내 본질? 그게 무엇이기에?”

“당신 그 자체죠. 이건 제가 말로 설명드릴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만…“

고심하는 얼굴이 선명했다. 본질, 본질이라? 제블로어는 자신 역시 저 개념적 설명에 대한 고민 속으로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애초에 사람의 본질을 어떻게 산자가 정의한단 말인가? 죽은자, 모든 것이 멈춰서야 겨우 과거를 되돌아볼 기회가 생기건만.

“당신이, 과거에 집착하며 현재와 과거의 자신을 끊임없이 저울질하고, 비교하며, 행복에 대해 의심하고, 타인이 자신에게 주는 신뢰를 믿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거 좋지 않군.”

“좋지 않죠.”

아이든이 답했다. 그는 곧 제블로의 투박하고 거친 손에서 자신의 손을 떼어냈다. 문득, 제블로어는 자신의 몸 속을 나돌았던 어떠한 긴 끝들이 빠져나가는 감각을 느꼈다. 아무래도 제 몸 속에 어떠한 가닥들을 집어넣고 관찰을 했던 모양이다..

“다만, 당신은 워낙 심지가 굳어서, 이 축복에 삼켜질 일은 없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러니까 당신한테 축복을 준 거겠죠, 그 녀석.”

“내가 말인가? 난 그정도는 못되는데.”

“그… 말썽꾼과 저는 시야를 일부 공유합니다. 제 평가를 그 녀석도 받아들이고, 제멋대로 해석할 수 있다는 의미죠. 가급적이면 이 축복을 거두어가고 싶습니다만 제블로어. 이게 발더스게이트까지 가능 여정에 분명 도움이 되리란 걸 부정할 수도 없겠습니다. 어쩌시겠어요?”

“나는….”

아이든은 말끄러미 제블로어를 쳐다본다. 굴곡이 진 얼굴만큼이나 굴곡진 인생이다. 이 티플링 지도자는 짧은 기간, 아이든 기더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가 바란다면, 아이든은 비단 대모의 축복을 남기는 것만이 아닌 ‘자신의 축복’마저 그에게 내려줄 수 있었다.

일종의 동질감이다. 그 어떠한 보상을 바라지 않고 타인을 책임지고자 결정한 사람. 진정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만약 노만의 머리에 올챙이가 없었고, 아주 우연한 기회로 그와 만났다면 아이든 기더르는 망설임 없이 그를 도왔을 것이다.

“나는 가져가겠네. 혹시나 내가 나를 잃는다고 해도, 내 사람들이 나를 지지하고 도와줄 거야.”

“예상한 대답이네요.”

아이든은 픽 웃으며 고개를 잠시 흔든다. 이내 소녀는 잠시, 라며 양해를 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제 침낭 근처를 뒤적여 무언가를 가져왔다.

“이거, 선물입니다.”

“…이건 무엇인가?”

손에 쥐여준 물건의 감족은 금속제질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확인하니, 그것은 브로치였다. 금속 테를 두른, 자수 브로치. 검은색과 파란색, 은색 별이 지극히 빽빽히 수놓아져 있는 물건이다.

“길드, ‘검은 별’의 상징물입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별목걸이를 단 고양이에게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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