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DR 이벤트 [펠] 개인 백업

밥헤 by sold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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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dowheart_way / @godofambition_ / @DarkMoon_SH 합동 이벤트[샤와 셀루네의 전쟁] 관련

항상 감사드립니다.


<기본설정>

외모 동일, 20대 중반 티플링

티플링과 인간 부부가 어렵게 얻은 늦둥이 고명딸. 이름은 어느 다른 세계선의 여신의 이름에서 따왔다. ‘용기’라는 뜻.

몸이 약해서 어렸을때부터 잔병치레가 잦았다. 태어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앓아누웠던 적이 있는데, 그 때 집에서 가장 가까운 신전의 주인인 야망의 신에게서 축복받고 회복한 이후 가족들이 모두 신자가 되었다(축복이 직접적인 회복의 원인은 아님). 아주 어렸을 때부터 착실하게 신전에 드나들었으나, 크고 나서는 그렇게 자주 방문하지는 않았다. 키가 작고 말랐다. 바깥활동이 적어 창백하고 주근깨가 없다.

조금 예민한 성격. 낯을 많이 가리고 조용하다. 고집이 세서 막무가내인 모습도 자주 보인다. 커리어로 성공해서 나이가 지긋한 부모님을 편히 모시는 것이 그녀의 야망이었으나……. 부모님을 사고로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다함께 살던 집에서 혼자 사는 중이다. 부모님을 잃은 뒤 야망의 신전에 자주 방문해서 기도하게 되었다. 현재 발더스 게이트에 있는 회계사에서 회계 업무를 보고 있다. 일 처리가 빠르고 유능하나 조용해서 친해지기 어렵다는 평가가 대다수.

1492RD 발더스 게이트의 영웅 [펠리시아]로 산 기억과 능력을 가지게 된 이후, 처음에는 건강해진 몸을 보며 안도하고 전생의 기억은 없는 것으로 치부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뒤섞이는 기억에 괴로워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이미 다 죽고 세상도 멸망으로 빠르게 향하는 와중에 굳이 자신이 더 살아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며 전쟁을 피하다가… 도중에 ‘자신’의 능력으로 사람들을 구하고 얼떨결에 전장으로 향하게 된다. 도망치고 싶었으나 영웅으로 살았던 기억이 발목을 잡았다. 뒤섞이는 기억에 괴로워하면서도 전투 중 묘한 해방감을 느끼는 자신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선신 연합에게 소환되고 전쟁을 치르면서 자기보호를 위해 전생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평화로운 시대의 정신보다는 그 시절의 정신이 좀 더 단단하니까. 기본적으로 1999DR의 상태가 우선되나, 야망의 신을 대할 때 한정으로 1492DR의 기억에 기반한 행동을 한다. 펠리시아의 마지막 남은 미련이 그를 향한 것이었으므로.


<독백>

*지친 걸음으로 신전에 들어와 제단에 사과 한 알을 내려놓고는 익숙한 듯 기도문을 외웁니다.*

.... 오늘 사과는 며칠 전에 산 거긴 한데.. 아직 싱싱하니까 노여워 마세요. 마을 과일가게가 문을 닫았더라구요. 오늘도 어떻게든 하루를 버텨내서 다행이에요. 내일은 좀 더 괜찮은 하루였으면...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지르다 성상의 얼굴을 슬쩍 보더니 이내 신전을 떠납니다.*

습관처럼 신전에서 기도하고 온 후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온다. 새삼 집에서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어린 저를 들쳐매고 야망의 신 신전으로 달려갔던 부모님이 생각나 웃음이 나온다. 들어온 집 안은 고요하다. 앞으로도 쭉 고요하겠지. 펠은 대강 씻고는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누인다. 내일도 피곤한 하루가 될 것이니까. 눈을 감으니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혼자 남았다는 불안함이 부풀어올라 몸을 집어삼키는 듯 하다. 펠은 애써 생각을 떨쳐내며 이불 속으로 더 파고들어 잠을 청한다.

*출근길에 신전을 지나친다. 굳게 닫힌 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누군가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치고, 누군가는 울며 닫힌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펠은 잠시 멈춰 그들을 바라보다 이내 인파에 뒤섞인다. 야망의 신께서는 무슨 생각이실까? 물론 자신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야망의 신 신전이 문을 다 닫았다며? 카르테 씨, 신자 아니었나? 뭐 아는거 있어?" 펠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신자라고 할 수 있으려나요... 그냥 어렸을때부터 습관적으로 갔던 거 뿐이라. 축복의 효과가 좋긴 하니까요." "하긴, 나도 중요한 일 앞두고는 꼭 축복받으러 가게 되더라고."

“그나저나 옆 팀의 로페 씨 말인데요, 그 병에 걸려서 출근 못 하고 계신거, 맞죠?”

커피를 마시던 상사가 굳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조용히 속삭인다.

“그래. 며칠 전부터 감기 기운이 있다고 하더니, 결국 그렇게 됐다고 하더군. 우리도 이미 걸렸을지도 몰라. 회사에서는 쉬쉬하고 있지만.”

펠은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돌봐 줄 사람 하나 없는 자신이 그 병에 걸리게 되면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죽은 후에 신고를 받고 나타난 경찰이 시체를 발견해 주면 다행이겠지.

펠은 상사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커피를 들고는 자리로 돌아온다. 퇴근하면서 마스크라도 사 가야 할까…….

점심으로 샌드위치와 사과를 먹으며 인터넷으로 뉴스를 본다. 온통 '납빛 역병'에 대한 기사들 뿐이다. 알맹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그저 현상 보고와 공포만이 가득한 기사들. 그 중 하나를 골라 읽는다. [닫힌 신전 앞의 사람들]이라는 타이틀을 단 기사에는 야망의 신 교단에 대한 악의적인 추측이 가득한 말이 쓰여져 있다. 펠은 사과를 씹으며 생각에 잠긴다. 왜? 종교집단은 필멸자들이 힘들어하는 시기가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큰 기회일 텐데. 펠은 사제가 폭력에 노출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눈을 찌푸리며 짧게 빌었다. 그래도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들은 지켜야 하지 않겠어요? 문을 걸어잠근 신이 이 기도를 들어 줄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일기>

1999RD, X월 2일.

이상한 꿈을 꿨다. 내가 나였는데……. 마치 주마등을 보는 듯했다. 나와 같은 얼굴, 같은 이름을 쓰지만 나와 다른 삶을 사는. 꿈 속의 ‘나’는 수도원에서 자랐고, 건강했고, 무투를 즐겨했고, 모험을 하고……. 일기장에 쓰기도 민망할 정도지만, ‘발더스 게이트의 영웅’이라고 불렸다. 말도 안 되는 꿈이지만 지금 이 일기를 쓰고 있는 밤까지 너무 생생하게 기억난다. 원래 꿈은 아침에 침대를 벗어나면 까먹게 되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 그러고 보니 오늘은 평소보다 몸이 가뿐한 게 신기하다. 원래 긴 꿈을 꾸면 잠을 설치는데. 어제 있었던 감기기운이 무사히 지나갔나보다. 다행이다, 안그래도 역병이 시작되고나서는 밖에서 아픈 티를 내기 좀 그런데.

1999RD, X월 5일.

며칠 전에 꿨던 꿈을 계속해서 꾸고 있다. 사실 이제 꿈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잘 때 뿐만 아니라 깨어 있을 때도 문득 내가 모르는 기억들이 떠오른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웃고 떠드는 나, 내가 모르는 일들을 저지르는 나, 내가 모르는 감정을 알고 있는 나. 오늘은 어떤 지하 공간에서 뼈만 남은 용과 싸우던 기억이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오늘 본 기억 속의 ‘나’는 한번 죽었다 살아나기까지 했다. 어디서 읽어본 적 있는 것 같은데……. 내일은 도서관에 가봐야겠다.

요즘 몸 상태는 이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최상이다.

1999RD, X월 6일.

이게 정말 꿈이 맞나?

500여년 전 사태를 다룬 책에 몇 줄 적혀 있는 일을 내가 왜 자세히 알고 있지?

왜?

1999RD, X월 9일.

퇴근하는 길에 누군가 내 머리를 내리치는 것 같은 강한 충격을 느끼고 길바닥에 쓰러졌다.

내가 죽는 장면이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눈을 감고 외면하려 애를 섰지만, 기억은 터진 둑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밀려들어 나를 덮칠 뿐이었다.

‘나’는 지친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냉정한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 사람, 아니. 노이즈가 낀 비디오 화면처럼 흐릿한 그 존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지긋이 응시하고만 있었다. 그리고 ‘나’는 뒤를 돌아 걸어갔고, 큰 소리와 충격이 동시에 ‘나’를 덮쳤다.

피로 얼룩진 시야는 흐릿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손을 뻗어 봐도 만져지는 것은 없었다. 생의 마지막 감정으로, ‘나’는 고통이 아닌 후회를 택했다. 그 후회가 마지막 숨과 함게 사그라드는 것을 느끼며, 나는 한 손으로 머리를 짚고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났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눈을 몇 번 깜빡거리자, 눈 앞에는 야망의 신의 신전이 있었다. 내 것이 아닌 감정이 나를 집어삼켰다. 눈 앞이 아득해지는 것을 애써 무시하고는 집으로 달렸다. 집까지 가는 그 짧은 길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내 것이 아닌 기억들이 내 발을 붙잡고 늘어졌다. 기억해, 기억해야 해. 나는 …….

내가 정말로 미쳐가는 걸까?

이 그리움은 누구의 것이지?

이 감정은, 이 기억은, 나는…….

[볼펜으로 마구 칠해 있어 알아볼 수 없습니다.]


<다시, 독백>

도망치고 싶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

지급받은 막사 안의 침낭에서 뒤척인다. 기억 속의 '나'는 이것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잠을 청한 적도 있었다. 그게 뭐? 그건 내가 아니야. 고개를 애써 흔들며 '영웅'의 기억을 지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뇌는 자연스럽게 오늘 있었던 전투를 복기한다. 적들이 많이 몰려 올 때는 기를 집중해서 빠르게 치고 빠져야 해. 마법직을 먼저 파악해서 기절시키고 다시 빠르게 후퇴를....... 첫 전투의 충격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적에게 주먹을 꽂는 순간 펠은 해방감을 느꼈다. 난생 처음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에 경악하면서도.

굳은살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로 바로 느껴지는 얼얼함, 몸 속을 타고 흐르는 기가 상대에게 흘러들어가는 느낌은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펠은 타인의 생을 위협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강렬하게 느꼈다. 다시 생각을 흩어낸 펠은 숨을 깊게 내쉬고 습관처럼 신을 찾아 기도하려다 멈칫했다. 항상 자신이 기도를 올리던 신에게는 더 이상 기도할 수 없었다. 감히 자신이. 그에게. 그를 지옥에 밀어 넣은 내가 어떻게...

덜컹이는 군용 트럭에 실려 워터딥 쪽으로 이동 중. 어렸을 때 고작 한 번 가본 것이 다인 도시인데, 나는 왜 이렇게 이 도시를 익숙하게 여기는가. '영웅'의 기억이 또 나를 감싸고 지나간다. 반짝이는 별 아래에서 들었던 이 도시의 이야기. 도시가 얼마나 생기 넘치는지, 그곳의 겨울이 얼마나 추운지, 노을이 내려앉는 바다의 아름다움에 대해. 가 본 적은 없었으나, '그'가 나에게 보여 준 환영 속에서의 풍경이 얼마나....... 헛웃음이 나온다. 어렸을 때 직접 본 워터딥은 그런 도시가 아니었는데. 알면서도 나는 또 영웅의 기억 속에서 허우적댄다. 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소중한 것을 떠올리는 그의 복잡한 표정을 더 떠올리고 싶어서. ...아직도 나는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그저 직감적으로 그곳으로 향할 뿐이었다. 그 곳에서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미약한 희망을 품고.

'영웅'의 기억이 머뭇거린다. 내 것이 아닌 두려움이 온 몸을 짓누른다. 그가 있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향해야 하나. 아직 그를 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내가 그에게 모습을 드러내는게 옳을까? 그를 영원한 지옥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하여?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나?

휘청이는 정신을 다시 가다듬는다. 방금까지 나를 둘러싸고 있던 자칭 '선신'들이 야망의 신에게 보이는 적대감을 경고해야 한다. 신앙심이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저런 이야기를 듣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왜인지 ... 마음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의 성상 앞에서 멍하니 얼굴 부분을 바라보다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다. 푸른 장미를 향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다 이내 거둔다. 마른 침이 넘어가는 목구멍이 쓰리다. 오랜 습관대로 성상 앞에서는 눈을 감는다. 오래된 기억 속에서, 그가 필멸자들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 중에 내 목소리만큼은 크고 선명하게 들린다고 말하는 다정한 목소리가 귀를 스치고 지나는 듯 하다. 너는 나의 목소리도 들었을까. 아무 것도 모르는 나의 목소리를. 너는 내 목소리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듣고 있어, 게일? 나는 네가 ....... 차마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입 속을 맴돌다 그대로 아스라히 흩어진다. 눈을 뜨고는 성상 앞에서 물러나 뒤를 돌아 걷는다. 이상하지. 귀에는 대리석 바닥을 딛는 소리만 들리는데, 내 발은 진흙 속을 걷는 듯 힘겹기만 하다.

푸른 장미를 엉겁결에 받아들어 바라본다. 역할을 다해 시들어버렸던 나의 아바타, 나의 푸른 장미. 그가 매개체로 삼던, 지금은 흔적조차 없을 붉은 장미. 그리고 지금 손에 들려 있는 절대 시들지 않는 푸른 장미. 어쩐지 꽃을 으스러뜨리고 싶은 충동을 짓누르며 신전 밖으로 발걸음을 마저 옮긴다.

푸른 장미에게서는 생명력이 넘쳐 흐른다. 막 자른 듯한 줄기에서는 진한 풀내음이, 탐스러운 꽃에서는 진한 향이 뿜어져 나온다. 잘린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 절화의 운명인데도, 이를 거부하고 언제까지나 영원히 피어 있을 것처럼. 어쩐지 그와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이 푸른 장미는 죽음을 향해 갈 수 있을까. 내가 다시 운명을 돌릴 수 있을까.

더 이상은 그를 보러 가는 것을 미룰 수는 없겠지. 역병의 손길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순간 가장 먼저 한 생각이었다. 언제 죽을 지 몰라. 전투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병에게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아직 그를 마주할 마음의 준비는 되지 않았지만, 얼굴을 보고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지만. 몸을 일으켜 그가 있는 곳을 향한다.

그를 잘 알고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아는 그가 지금의 그와 같은 존재일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사실 내가 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오만일 수도. 그리움과 두려움, 미약한 기대.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나 자신에 대한 역겨움. 계속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도 발은 진창에 빠진 것처럼 무겁기만 하다.


<짧은 재회>



막사를 나오자마자 꾹 참았던 눈물이 흐른다.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눈물을 훔치고 걷는다. 너무 느리지도, 너무 빠르지도 않게. 네가 내 발걸음 소리를 듣고 나오는 일이 없도록.

훔쳐 낸 것이 무색하게 눈물은 계속 흘러넘쳐 흙바닥에 동그란 자국을 남긴다. 눈물자국은 커다란 세계에 비해서 너무 작아서, 몇 분 뒤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질 것이다. 나의 존재도 너에게 그렇게 작았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 있었을까? 내 유언 같은건 지키지 않고, 네가 원했던 대로 소멸할 수 있었을까.

아니, ‘나'를 찾아 그렇게 많은 세계를 기어다니지도 않았겠지. 원하던 대로 신이 되어서, 네가 향하는 이상을 좇아 위로, 저 위로 나아갔을 것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망가질 일 없이.

중립 진영의 입구를 나오자마자 달음박친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나는 갈 곳이 없는데. 영웅인 나도 이제 돌아갈 곳을 잃었는데. 일단 너에게서 멀리 떨어지고 싶어서 나는 그저 달린다. 계속 뛰다 보면 이 눈물도 마르겠지. 지워지지 않는 자국만 남기고.

숨이 차서 발을 멈춘다. 전쟁의 폭격을 간신히 빗나간 듯한 작은 숲이다. 멈춰서서 붉은 색이 섞인 기침을 뱉는다. 옷자락에 문질러 닦고는 나무 밑에 털썩 주저앉아 눈을 감는다. 할 말이 있어 보였던 너의 마지막 얼굴이 떠올라 다시 눈물이 차오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나도 더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어. 정말 많았어. 며칠 밤을 새도 다 하지 못할 그런 말들이. 하지만 할 수 없었어. 너를 위해서라면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거든. 너도 나를 위해 삼켜냈을까? 깨진 유리 파편에 찔리는 것 같은 그런 말을. 서로를 아프게 하는것 보다는 자신이 찔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면서.

.

.

사실 나를 잊지 말아 달라고 하고 싶었어.

정말 이기적인건 나야. 네가 그렇게 오랜 시간 고통받은걸 알면서도, 네가 여전히 나를 사랑해 주길 바랐어. 정말 끔찍하지. 미안해.

이번에도 너에게 진심을 전하지 못해서 미안해.


<다시, 독백>

있잖아, 널 사랑해서 그랬어. 우리의 사랑이 같은 방향을 향하지 못하는 걸 알지만, 그래도 널 사랑해서 그랬어.

우리는 언제나 같은 곳을 바라보고 서 있었는데. 언제부터 반대쪽을 보고 있었을까? 그런데도 서로를 사랑하는 걸 멈추지 못하고 있네. 끊임없이. 이 상황이 되어서도.

우리에게 사랑은 축복이었을까, 저주였을까? 피곤한 눈을 감으며 네 생각을 한다. 네 눈이 닿지 않는 구석에서. 너는 내 생각을 하고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당장이라도 달려가 끌어안고 싶어서,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깊게 나도록 주먹을 꽉 쥐며 참는다. 너의 마지막 인사를 듣는다. 마지막 얼굴을 눈에 담는다. 빛이 나는 너는 눈이 부셔 제대로 쳐다볼 수 없다. 너의 눈에 전투가 막 끝나 엉망진창인 내 모습이 비치고 있겠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이런 표정으로 널 보낼 순 없어서 억지로 웃어본다. 너도 억지로 웃는다. 웃으면서도 솔직한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까지도 너에게 솔직할 수가 없구나. 이번에도.

하지만 이게... 내가 너를 사랑하는 방법이야.

네가 사라진다. 동시에 나는 온 몸을 휘감는 너의 축복을 느낀다. 무릎에 느껴지는 흙바닥이 차갑다. 흙바닥이 젖어들어 진한 자국이 남는다. 나는 곧 이 감정을 잊게 되겠지. 모두 잊고 언제나 그랬듯이 또 당신을 찾게 될지도 몰라. 너를 힘들게 할지도 몰라. 혼자 남아 이 모든 것을 기억할 너를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파. 미안해, 미안해. 또 내 욕심으로 너를 외롭게 만들어서. 네가 나를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너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지 못해서.

너에게 영원히 전하지 못할 편지를 써. 행복해질게. 나를 사랑하는 널 위해서. 나를. 영원히. ■■■.


후기 읽고 나서 주저리주저리 . . .

펠깅은... 게일의 과오를 목도하고나서 그가 힘을 많이 잃은 상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일종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게 기본스탠스라서 자기를 잊어 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네...

게일이 신이 되고 야영지에서 처음 마주치고 그 이후 그가 자신에게 다시 찾아올때까지 야망의 신은 점점 신격을 불리는 중이었고 실제로 야영지에서 마주쳤던 신 본인도 꽤나 열성적이었고(재수없던건 별개로), 보트씬에서도 신이 되어 힘을 갖겠다는 야망에 가득 차 있었는데 막상 펠이 갖게 된 야망의 신은 '자신'이라는 존재에 집착해서 원래 가지고 있던 힘은 아주 많이 잃은 상태가 되잖아.

펠은 게일을 사랑했으니까... 그의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겠지. 날이 갈수록 자신에게 목매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어쩌다 저 사람이 저렇게 되었나 싶기도 할거고... 그걸 보면서 나라는 존재가 게일 개인의 삶에 있어서 그가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족쇄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될 것 같음. 그 사실에 괴로워하면서도 사랑하고 책임져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버리지도 못하고.

그런 펠이 자신이 홧김에 한 유언때문에 말 그대로 빠그러진 게일을 본다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지. 날 잊어. 나한테서 벗어나. 네 삶을 찾아.

이미 자기때문에 저렇게 된 사람한테 다시 같이 있자고 하기엔 자신의 기억이 유지될거라는 희망도 없어서 그러고 싶지 않아할 것 같음. 남아있는 사랑은 혼자 삭여야하는 감정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부질없는 희망을 줄 수는 없으니까. ...500년을 괴로워한 존재에게 또?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아할듯. 사랑하는 사람을 더 괴롭게 할 수도 있는 선택을 하느니 멀리 보고 그의 새로운 삶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그는 자신이 한 말은 지키니까. 잊으라는 말을 지킬 거라는 그 사실에 희망을 걸고.

게일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미련은 기억과 함께 사라지게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전후 복구를 하면서 혼자 많이 울었겠지. 이 선택이 맞았는지 고민도 하고, 후회도 하고, 이게 맞는 길이라고 스스로 위로도 하면서. 점점 사라져가는 기억을 붙잡으면서도 너무 괴로워서 빨리 잊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가 빨리 자기를 잊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모든 걸 잊는 게 맞으니까, 있었던 일의 기록도 전혀 안할 것 같음. 기억을 처음 찾았을 때의 일기도 다 불태워버리고.

그렇게 기억을 깨끗하게 잃고 나서는 평범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네… 어쩐지 그러면 안 될것같은 느낌에 야망의 신 신전은 멀리하면서.


너무재밌었다 ……………………………………………………………………………………….

근데 진짜 9900자 실화인가? 이렇게 재밋게 즐겻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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